| <colcolor=#fff>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阿峴洞 都市가스 爆發 事故 Ahyeon-dong gas explosion accident |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94년 12월 7일 14시 50분 경 | |
| 발생 장소 | 한국가스공사 아현차단관리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606 | |
| 유형 | 폭발 | |
| 인명 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12명 |
| 부상 | 101명 | |
| 재산 피해 | 약 78억 원 이상 | |
1. 개요
지금의 애오개역 4번 출구 방향[1]에 있던 도시가스 차단관리소에서 보수작업중 일어난 폭발로 화재가 발생하여 12명이 숨지고 101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이다.
2. 상세
1994년 12월 7일 한국가스공사는 서울 아현동 지역의 도시가스 공급을 담당하는 서울도시가스[2]로부터 배관 이상으로 인하여 가스요금이 부당하게 청구되고 있다는 민원을 지속적으로 받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후 2시경 서울도시가스 직원 4명과 한국가스기술공업[3] 직원 3명이 이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현차단관리소에 방문하였다.당시 작업자들은 이상이 있는것으로 추정되는 아현차단관리소내의 D11S 공급관의 계량기를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약 오후 2시 11분경 안산에 위치한 한국가스공사 중앙통제소에 D11S 공급관에서 가스가 누출 되고 있다는 경보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앙통제소에서는 이미 자잘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경보가 울렸기 때문에[4] 통제소 직원들은 늘상 있는 기기 작동으로 인한 경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경보가 울려버리자 통제소 과장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경보 소리를 줄이라는 명령을 하였고 그 결과 D11S 공급관의 가스 누출 경보는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계속 울리고 있었으나, 아현 차단관리소내에 있던 직원들뿐만 아니라 중앙통제소 직원들까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D11S 관의 이상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계량기 보수작업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후 2시 50분경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대량의 가스가 한꺼번에 누출되기 시작했고[5] 당시 작업원이던 진 모씨가 서울도시가스측에 급히 전화를 걸어 ''아현기지에서 가스가 대량으로 새고 있습니다, 빨리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라는 연락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2시 53분 D11S관에서 새어나온 가스가 알 수 없는 점화원[6]과 접촉하여 폭발하고 말았다.
폭발과 동시에 화염이 아현차단관리소 주변의 상가와 집을 불태우기 시작하였고 사고 즉시 인근의 마포소방서를 포함하여 주변 소방서의 소방차 79대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불길은 사그라 들기는 커녕 오히려 계속해서 커져가면서 주변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는데 D11S관에서 계속해서 가스가 누출되고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소화액이나 물을 뿌려도 가스관을 차단하지 않는 이상 진화작업은 불가능하였다.
한편 안산 도시가스 중앙통제소에서도 폭발과 동시에 아현차단관리소와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경보가 떴으나, 이번에도 통제소 측에서는 통신망에 장애가 생겨서 연락이 두절된것이라는 오판을 저지르는 바람에 인근의 순회직원을 출동시켜 아현차단관리소 상태를 확인하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지시를 받은 직원은 아현차단관리소가 위치한 곳에서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중앙통제소에 '차단관리소가 불타고 있다'라고 연락을 하였고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중앙통제소에서 D11S관으로 공급되던 가스를 차단하려고 했으나 폭발로 인하여 통제자체가 불가능해졌기에 합정정압기지에서 수동으로 가스관을 잠그고 내부에 있는 잔여 가스들을 배출시키고 나서야 진화작업이 가능해졌다. 이때가 이현차단관리소가 폭발한지 무려 40분이나 지난 뒤였다.
화재여파로 마포도서관(아현분관)에서 마포경찰서까지의 도로는 소방차와 구급차로 막혀 버리고 공덕오거리(공덕역)에서 아현삼거리(아현역)까지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었다. 현장의 맞은편에 위치한 대우전자 사옥[7]은 하층부의 유리창이 몽땅 파손되어 지나가던 보행자를 덮치고[8] 그 일대 가스와 전기가 차단되는 등 많은 불편이 있었다.[9] 또한 당시의 불길이 얼마나 뜨거웠는가 하면 사고 현장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뜨거워서 도저히 접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사고로 주민 5명과 보수작업에 동원되었던 직원 7명을 포함하여 총 12명이 숨지고, 10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의 인명피해와 건물 145동(전파 75, 부분파손 70), 동산 431건, 영업손실 47점, 차량손실 92대 등의 물적 피해 및 이재민 210세대 555명 등의 손실을 초래하였다. 사고 당일 부터 3일간은 야간 전기 공급이 끊겼으며 가스 공급 재개는 10일이 걸렸다. 당시 아현~공덕 일대에는 아파트가 없었고 달동네 수준의 인구밀집지역이라 인적, 물적 피해가 상당히 컸다.
3. 파장
사고 이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관련 책임자인 한국가스공사 경인관로사무소장과 한국가스기술공업 수도권사업소장이 각각 금고 2년 6개월과 금고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고 당시 경보가 시끄럽다며 소리를 줄이게 한 중앙통제소 통제과장에게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 금고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이 사고를 계기로 지하 매설물에 대한 전산화가 요구되었고 1995년부터 한국에 GIS가 도입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한국가스공사에도 큰 사건이라 그 전과 후로 나뉠 정도로 회사 시스템이 많이 바뀌었다. 안전을 지침에 따라 이행하는 EHSQ 경영시스템이 생겼으며 안전, 유지 및 보수 인원을 충원하느라 1997년 외환 위기 직전까지 신입사원을 많이 채용하였다.
KBS는 오후 5시 25분부터 1TV에서 뉴스 속보를 틀고 사고 소식을 전했는데 당시 방송 주무부처였던 공보처는 방송시간 5분 일찍 틀었다고 당시 KBS 사장으로부터 사내 징계 경위서 등을 받아냈다.[10] 이는 당시 공보처의 방송국 허가장 일부 규정 때문이었는데 지상파가 정파시간에 긴급속보를 때려야 될 경우에는 사전에 공보처에 얘기를 한 뒤 허락을 받아야 방송을 틀 수 있었다. '방송질서 유지' 명목이었지만 이 시책은 이 사고 바로 넉 달 뒤에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에서도 재현되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 들어 이 시책은 없어졌다.
아이큐 점프에서 달숙이를 연재하던 만화가 이재석도 단행본 8권에 수록된 에피소드 표지에서 4컷 만화로 이 사고를 언급했다. 당시 이재석 작가는 마포구 거주자였기 때문에 사고의 충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해당 사고 백서는 한국가스공사에서 만들긴 했으나 내부 보고용이라 현재도 비공개 상태이다. 해당 백서 및 기타 자료에서도 사고 원인을 노숙인들이 피우던 모닥불정도로 추정할 뿐 특정하진 못하고 있다. 폭발로 인하여 차단관리소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 되버린것은 물론 차단관리소 자체도 완전히 무너져 내려버리는 바람에 원인을 찾는것 자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인해 1987년작 영화 칸트씨의 발표회의 원본 필름이 감독의 집이 전소되며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개봉 프린트가 남아 있어서 볼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한 곳은 2010년경까지 10여년 간 공터였다가 2015년 공덕자이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합정 정압기지에서 아현 차단관리소를 거쳐 군자 정압기지까지 연결되던 가스관은 사고 이후 철거 된 상태이다.
4. 여담
5. 둘러보기
| <rowcolor=#fff> 한국의 화재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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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 화왕산 억새 태우기 사고H,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H,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 |
| A: 누전, 장비 고장 | H: 사람에 의한 실화 | V: 고의적 방화 | ?: 원인 불명/조사 중 |
[1] 당시는 서울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기 이전이었다. 애오개역이 개통된 것은 1996년 12월 30일.[2] 현재도 아현동 일대의 도시가스 공급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성그룹 계열사이다.[3] 現 한국가스기술공사[4] 하루 평균 3000~4000회 정도 경보가 울렸다고 하며, 공급관 기기가 자동으로 작동/정지 할때뿐만 아니라, 가스기지 출입문을 여는것 만으로도 경보가 울렸다고 한다.[5] 현재까지도 어떤 원인으로 갑자기 소량으로 누출되던 가스가 대량으로 누출되기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일각에서는 D11S관의 퍼지밸브 이상 혹은 수동밸브를 제대로 잠그지 않아서라는 주장이 있다.[6] 당시 점화원이 무엇이였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아현차단관리소에 상주하던 청원경찰이 중앙통제소에 관리소 주변에서 노숙인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라고 연락을 했던 정황이 있기 때문에 모닥불이 점화원으로 지목된적이 있었으나 현재까지도 정확한 점화원이 무엇이였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7] 당시에는 대우그룹의 계열사였으며 현재도 해당 건물은 존재한다. 하지만 대우전자의 사옥이 아닌 민간기업의 크레딧 센터로 전환되었다.[8] 다행히 안전유리로 시공되었던 터라 경미한 창상만 입었을 뿐 중상은 없었다.[9] 가스야 당연하지만 전기는 밤 12시에는 단전되었다. 당시가 12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 주변에서 야밤에 체온을 지키는 방법은 가족 단위로 껴안고 자거나 연탄을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기름 보일러도 불을 붙일 전기가 없으니 못 돌렸다.[10] 이 조짐은 두 달 전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당시 해당 사건을 뒤로 빼고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담화를 메인으로 틀면서 시작되었다.[11] 상단 신문 기사 사진에 등장한 바퀴가 큰 대형 소방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