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중도보수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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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f,#fff> 신민당 (新民黨) | |
| 무정파전국연합 (無政派全國聯合) | |
| <colbgcolor=#FF91A4,#FF91A4> 영문 명칭 | <colbgcolor=transparent>Non-partisan national federation |
| 약칭 | 전국연합 |
| 표어 | 제5의 정치세력[3] |
| 등록번호 | 제68호[4] |
| 등록연월일 | 1995년 6월 27일 (신민당) |
| 당명 변경 | 1996년 2월 5일 (무정파전국연합) |
| 말소연월일 | 1997년 5월 6일 (성립요건 흠결로 등록취소) |
| 선행 조직 | ,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 |
| 사무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로 1 510-2, 세림재단빌딩 2층 (창천동) |
| 대표자 | 고병현 권한대행 |
| 국회의원 | 0석 / 297석 (0%) |
| 광역자치단체장 | 0석 / 15석 (0%) |
| 기초자치단체장 | 0석 / 229석 (0%) |
| 당 색 | 분홍색 (#FF91A4) |
| 스펙트럼 | 무소속 빅 텐트 |
| 당원 수 | 2,595명 (1996년 기준)[5] |
| 법정당원 수 | 885명 (1996년 기준)[6] |
| 1997년 5월 6일 기준 | |
1. 개요
무정파전국연합(無政派全國聯合)은 무소속 후보들의 연합 정당임을 표방하여 약 2년의 기간 동안 존속했던 정당이다.2. 역사
1995년 5월 16일, 김복동 대표가 신민당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대표와의 회동을 통해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 간의 합당 의결안에 합의하면서 신민당은 소멸했다. 하지만 합당 과정에서 임춘원을 비롯한 일부 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임춘원 의원은 자유민주연합과의 합당 결정에 반발하여 탈당한 일부 당원들과 함께 신민당을 재창당하면서 독자적인 정당 활동에 나섰다.신민당은 1995년 6월 5일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인대회를 개최한 후 6월 8일에 결성신고를 마쳤다. 그리고 1995년 6월 23일에 서울 여의도 사학연금회관에서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고 임춘원 의원을 총재로 선출했으며, 6월 27일 정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대한민국 제14대 국회 원내정당이 되었다.
임춘원 신민당 총재는 1996년 1월 22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당명을 무소속전국연합으로 바꾸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996년 1월 31일 특정 정당의 이름에 "'무소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국민들에게 혼란을 준다. 따라서 무소속전국연합이라는 당명은 선거 질서나 정치 질서에 중대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러자 신민당은 1996년 2월 1일 당명을 무정당전국연합으로 재신청하였는데, 다음날 '무정당' 또한 부적합 판정을 받고 불허되었다. 이에 따라 2월 2일 무정파전국연합으로 변경 신청했고, 2월 5일에 새 당명이 승인되었다.
무정파전국연합은 무소속 후보들의 전국 연합 정당임을 표방하면서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될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참여를 추진했다. 하지만 임춘원 총재는 통합민주당의 국회의원 전국구(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기 위하여 무정파전국연합을 탈당했다. 임춘원은 통합민주당의 국회의원 전국구 3번 후보로 임명되었으나 하루 만에 무산되면서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무정파전국연합은 1996년 3월 26일 고병현 대표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했으나 15대 총선에 불참하면서 원외정당이 되었다. 무정파전국연합은 1997년 5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지구당의 법정 당원 수 미달로 인하여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해산 이후 대부분의 당직자와 당원들은 신한국당에 합류하였다.
3. 역대 지도부
- 부총재
- 전당대회의장
- 이종섭
- 사무총장
- 김인태
- 회계책임자
- 김인태
4. 선거 결과
1년 10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참여한 선거가 없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려 했으나 당 총재 임춘원이 사퇴 후 탈당하면서 무산되었다.5. 기타
- 앞서 설명했듯 이 당의 원래 명칭은 '신민당'이다.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이 합당하여 신설된 신민당(1994년)은 자유민주연합과의 합당으로 사라졌으며, 이에 다시 신민당을 계승하기 위해 창당한 당이다. 당세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원 신민당보다 약했지만, 임춘원이 있어서 한때 원내정당이긴 했다. 원래 있던 당이 합당으로 다른 당이 되었고, 탈당 인사들이 다시 원래 당을 재건하려고 했던 점에서 열린민주당-열린민주당(2022년) 등과 유사하다.
- 의외로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의 간접적 후신 정당이기도 하다. 계승 정당인 신민당(1994년)이 통일국민당과 신정치개혁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고, 신민당 합당 반대파를 중심으로 창당된 정당이 신민당(무정파전국연합)이기 때문이다.[7]
- 동시대에 무당파국민연합이라는 유사하게 무소속 정당을 표방한 정당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문민정부는 지지율이 하락했으며, 삼김시대가 비판받으면서도 여전히 정치판은 삼김 위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염증을 느껴 무소속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을 공략한 것이다. 무정파전국연합은 15대 총선에 참여하려다 포기했지만, 무당파국민연합은 총선에 참여했다가 0.9%의 저조한 득표율로 인해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8]
- 사무소 소재지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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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춘원 등.[2] 위쪽은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변경한 로고이며, 아래쪽은 창당 당시 로고이다.[3] 자료 당시 원내 제5당이었음을 홍보하기 위한 표어로 보인다.[4] 창당준비위원회 신고번호는 제200호.[5] 등록 당시 당원 수는 3,738명이었다. #1 #2[6] 등록 당시 법정당원 수는 1,009명이었다. #1 #2[7] 다만, 대다수의 통일국민당 인사들은 신한국당으로 개별 합류했으며, 신민당 창당에 합류한 인사들도 신민당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합당하면서 자민련에 잔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8] 당시에는 총선에서 2% 이상의 지지율을 얻지 못하면 정당이 해산되는 법률이 있었다. 이후 녹색당 등이 주도하여 위헌청구소송을 내어 현재는 관련 법률이 사라진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