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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 고촉통 | 리셴룽 | 로렌스 웡 | ||
싱가포르 대통령 | }}}}}}}}}}}} |
<colbgcolor=#e81b2c><colcolor=#fff> | |||
CH GCMG SPMJ | |||
출생 | 1923년 9월 16일 | ||
해협식민지 싱가포르 캄퐁 자바 가 | |||
사망 |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 | ||
싱가포르 싱가포르 종합병원 | |||
재임기간 | 초대 총리 | ||
1959년 6월 5일 ~ 1990년 11월 28일 | |||
제2대 선임장관 | |||
1990년 11월 28일 ~ 2004년 8월 12일 | |||
고문장관 | |||
2004년 8월 12일 ~ 2011년 5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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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래플스 고등학교 (졸업)[1]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 중퇴)[2]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 / 학사)[3] | ||
부모 | 父: 리친쿤 (李進坤, Lee Chin Koon) 母: 추아짐니오 (蔡認娘, Chua Jim Neo) | ||
형제자매 | 5남매 중 첫째 | ||
배우자 | 콰걱추 (柯玉芝, Kwa Geok Choo) | ||
자녀 | 장남 리셴룽 장녀 리웨이링 차남 리셴양 | ||
정당 | [[인민행동당| 인민행동당 ]] | ||
신체 | 180cm | ||
종교 | 불교> 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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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이자 독재자.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주 총리를 거쳐,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31년간 무려 8차에 걸쳐서 내각을 이끌면서 장기 집권하였다.[4] 1990년 총리직 퇴임 이후에도 1992년까지 싱가포르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서기장을 맡아 당수 역할을 했고 후임 고촉통 내각에서 2004년까지 제2대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지냈으며, 아들 리셴룽이 총리에 취임한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초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역임하면서 정계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5]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갖는 싱가포르 총리직을 통해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지도자이다.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그가 싱가포르를 제1세계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언론통제와 검열 등 사회 탄압이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싱가포르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리콴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나는 일생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는 싱가포르'이다.
리콴유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 - 2000) 중에서.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요약한 표현이다.
리콴유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 - 2000) 중에서.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요약한 표현이다.
3. 평가
자세한 내용은 리콴유/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타
권위주의적 통치, 장기 집권 속에서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덩샤오핑, 수하르토, 마하티르 빈 모하맛 등 동시기 아시아의 다른 지도자들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심각한 인권유린(고문이나 사법살인)을 저지른 박정희, 천안문 6.4 사태를 일으킨 덩샤오핑, 98년 화교 학살을 주도한 수하르토하고 비교하기에는 리콴유는 그래도 저들과 달리 심한 인권 탄압이나 학살을 저지르진 않았다는 옹호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이러한 옹호론에도 주의할 점은 있다. 일단 리콴유 통치 시기의 싱가포르는 고문의 폭력성이 상대적으로 덜했을 뿐 심각한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본 문서에도 상세히 서술된 내용이니 '심한 인권 탄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은 너무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주장이다. 그나마 자국민을 상대로 한 대규모 학살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인 독재자이긴 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것일 텐데, 그렇게 따진다면 소위 '싱가포르 모델'에 흔히 제기되는 반론, 즉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라는 점은 여기에서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작은 인구가 아주 작은 면적에 초고밀도로 몰려있음으로써 발생하는 통제의 용이성이나, 애초에 이런 환경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한 대규모 학살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6] 등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게다가 싱가포르의 정치상황 역시 리콴유 이후 단 한번도 리콴유 일가 및 인민행동당이 정권을 상실한 적이 없고[7], 언론의 자유도 사실상 보장되지 않는 상태이다.[8] 따라서 리콴유의 독재 체제가 그나마 덜 잔혹하고 폭력성이 덜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다. 드러난 한도 내에서는 그렇다. 또는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법과 그것을 매게로 한 금전적 수단을 정적 탄압의 수단으로 더 애용했다는 의미에서는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말하자면 말 안 듣는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 보다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려 재산을 빼앗고 파산시키는 것'이 더 인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점에서는 싱가포르의 독재가 인도적인 독재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기틀을 닦은 것이 리콴유인 것은 맞다.[9]
특히 박정희와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둘 다 권위주의적 통치자이자 독재자였다는 점, 국가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었다는 점, 자식들(박근혜, 리셴룽)이 같은 1952년생에 훗날 자국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리센룽은 총리직을 사임 후 후계자한테 직을 넘기고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10]
4.1. 한국과의 인연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리콴유 자서전(The Singapore story) 中
리콴유 자서전(The Singapore story) 中
리콴유는 '식민시절 한국은 강압적 통치를 받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한국인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발언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절에는 상당히 드물었던 현상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피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주의에 순응하였으나 유독 한국만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다고 평하였다. 1970년대에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보니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 문화에 익숙한 일본식 엘리트들이었음에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과 미움이 어마어마해서 놀랐다라고 한다.
한편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방식은 법치주의적이고 젠틀한 영국과는 달리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학생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 일본에게 일본이 중국과 한국, 싱가포르에서 자행했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여러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유럽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단결을 잘 하여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한 경외감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다. 일본군이 싱가포르 거리를 깨끗이 청소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94년, 야당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에 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글을 기고 한 후 리콴유 전 총리가 설한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국내외 저명한 석학들까지 가세해 수년 간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근대화와 아시아적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는 유교 덕분이며 이 덕분에 그 때 당시 싱가포르가 잘 살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즉, 리콴유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반해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외국에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의 논쟁을 꽤 흥미있게 보았던 모양이다.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 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그래도 리콴유 자신은 한국에 꽤 우호적이다.
대한뉴스 1261호 영상.
1979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한국을 방문해서 피살당하기 직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11]을 했던 내용도 자서전에서 비중있게 소개했다. 당시 영부인 대행 격으로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자서전에서는 (이름은 따로 적지 않고)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통역을 했다" 정도로만 썼다.
아울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해 공식석상에서 견해나 권고를 피력한 경우가 6차례였고,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접한 후 그 부재가 단순한 지도력 공백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이 유무형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12][13]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최고지도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아시아의 3대 위대한 지도자’로 꼽았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를 꼽자면 중국의 경제 근대화를 일궈낸 덩샤오핑(鄧小平)과 일본을 완전한 친미 국가로 자리잡게 하여 일본의 재건을 이끌어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 그리고... 이 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한국은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합니다.
- 리콴유[14]
- 리콴유[14]
동아일보
대체로 개발독재 권위주의적 지도 체제를 좋아하는걸로 보인다. 덩샤오핑과는 냉전 때 만나 중국의 빈농 문맹 출신들이 많이 모인 싱가포르도 경제성장을 해냈으니 중국도 해낼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평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높은 가치를 굳게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강해진 사람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자제[15]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1999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전에 키보드 배틀을 벌였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아시아적 특수성"이라는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례로 매우 유명한 정치학자 중 하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경우,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가 민주주의와 조합되기 어렵다는 리콴유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아시아가 고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룬 가운데서도 광범위한 정치참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으며, 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군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상술한 보편성을 들어 반론을 하기도 했다. 링크
4.2. 개인적인 일면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묘지 만든답시고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그러나 아들 리셴룽 수상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추모열기를 이용하여 같은 해(2015년)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선전한다.본디 영어가 모어(제1언어)인 리콴유인지라 공석/사석 할거 없이 영어를 주로 사용했으나, 어릴 때 말레이어를 배워서 말레이어를 할 줄 알았고, 표준 중국어도 할 줄 알았다.[16] 약간 어눌하지만 표준중국어가 그에게 있어서 제2언어(제1외국어)도 아닌 제3언어(제2외국어)였던 점을 감안하면 열심히 학습한 것이다.[17] 본인 말로는 표준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공식석상에서 쓰지는 않았지만 2차대전기 일본 군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웠기에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특성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의 인재를 데려오든지 외국의 기업을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총리 재임 시절 영어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에는 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한국 대학생들에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 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
1956년의 기자회견 영상. 중간중간 싱가포르 특유의 억양이 약간씩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발음을 보여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던 리콴유는 완벽한 영국식 보수적 용인발음(Conservative RP)을 구사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민들 역시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잘 하게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영어 공용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첫 세대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가 공용어로 자리를 잡으면 세 번째나 네 번째 세대쯤에서는 완벽한 영어 사용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무참히 빗나갔다. 물론 싱가포르의 영어 사용능력은 아시아에서는 대적할 나라가 없고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비견할만한 수준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국계가 주류인 국가만큼의 수준은 아니다. 이는 인종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이 너무 심해 공용어로는 영어를 써도 중국인들끼리는 중국어를 쓰고 각자 집에 가서는 자기네들 방언을 쓰는 등 중구난방으로 생활 언어의 통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18]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 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일인자인 싱가포르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19]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고 하며, 이슬람은 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리콴유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고 인정했다.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20]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사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닌 것이, '리콴유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리콴유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는 부분이 한 장에서 나온다.
하지만 리콴유는 극단주의를 싫어하는 것이지 이슬람 신자를 싫어한 것은 아니어서, 싱가포르도 온전한 중국계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말레이계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정치나 경제 요직에 이슬람 신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21]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은 리콴유 개인의 특성이고 이는 싱가포르에서도 현재 통용되는 뿌리깊은 바탕이다. 반대파의 새싹이 될 비판적 젊은이들을 정부에 참여시켜서 옹호자로 길들이지 않았다면 싱가포르의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토가 작은 나라의 중국계 지도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리콴유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부인 콰걱추 여사 또한 170cm가 넘어 그의 가족 대부분은 장신이다.
리콴유가 독재를 해도 폭력을 거의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 리친쿤의 영향이 컸는데, 정확히는 4살이던 리콴유가 아버지가 가지던 값비싼 병을 깨자 아버지한테 우물로 끌려나간 후 귀가 잡아당겨진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리콴유는 자신의 세 자녀가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폭력보다는 엄한 질책을 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리친쿤은 젊었을 땐 석유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은퇴 후 시계 및 보석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일했다. 아들 리콴유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일했는데, 한 기자가 “왜 수상의 아버지가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까? 편안하게 사실 수 있을 텐데.”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원래 직업에 충실할 따름이오. 내 아들이 수상이지 나는 수상이 아니지 않소?
5. 사진들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축출에 가까운 독립 선언 발표 당시 눈물을 흘리는 사진.
1966년 National Day (국경일) 기념 행사에서 유솝 빈 이샥 싱가포르 대통령 내외와 회동한 사진.
1976년 싱가포르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원예와 아쿠아리움 물고기 쇼' 개막식에 참석하여 부인 콰걱추(柯玉芝) 여사와 정부 요인들과 함께 시찰하고 있는 사진.
1979년 10월 19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박근혜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박정희는 암살되었다.
6. 이름에 대하여
한자 | 李光耀 |
한어병음 | Lǐ Guāngyào / 리광야오 |
객가어 발음 | Lí Kông-yeu |
한국어 | 리콴유 / 이광요 |
영어 | Lee Kuan Yew Lee Kwan-Yew |
그의 이름은 한자로 李光耀라고 쓴다. 과거 한국의 언론에서는 리콴유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이광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 '콴유'는 로마자로 Kuan Yew라고 쓰는데, 이 철자가 어떤 중국어 방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光'을 'K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은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정도인데 리콴유 가계가 객가인 것으로 보았을 때 오어를 구사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耀'를 Yew라고 표기한 것은 객가어 쪽에 가깝다. 그의 동생인 李天耀(Lee Thiam Yew)의 발음은 객가어에 가깝다는 느낌이지만, 역시 그의 동생인 李祥耀(Lee Suan Yew)의 경우 '祥'을 'S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아마도 표준중국어와 객가어 등 여러 방언이 뒤섞여서 비슷하게 흉내낸 표기로 짐작된다.[22]
그의 아버지 리친쿤은 영국령 싱가포르에 3대째 정착해 있었던 화교 집안으로서 부유할뿐더러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했고, 그래서 아들 리콴유에게도 중국어식 이름 콴유뿐만 아니라 해리(Harry)라는 영어식 이름을 붙여줬다.
리콴유의 모어는 영어였고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도 해리였으며,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옛 친구들은 리콴유를 Harry Lee라고 불렀다. 지금도 홍콩 사람들의 경우 앞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뒤에 중국어 이름을 붙인 일종의 영-중 혼합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23] 리콴유 역시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은 "Harry Lee Kuan Yew"였다. 그러나 리콴유 본인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중국계 아이가 영어식 이름이 있다고 학교에서 놀림받았기 때문.[24]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 중국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리를 떼고 그냥 리콴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리콴유를 지칭할 때는 흔히 정치인들 이름 내 대표적인 알파벳에 이니셜로 줄여서 칭하는 것 같이 LKY라고 부르기도 한다.
7. 관련 문서
[1] 1935년 입학, 1940년 졸업[2]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편입[3] 1947년 1월 편입학.[4] 싱가포르 총리는 공화국의 정부수반이자, 정부의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군 실권까지 행사하며 싱가포르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서기장으로 실질적 당수 역할까지 겸하는 최고 지도자 직위이다. 싱가포르 대통령은 국민 통합의 의미만 가진 실권 없는 상징적 국가원수일 뿐이며, 의원내각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싱가포르는 총리가 정부에 대해 모든 권한과 책임을 진다.[5] 선임장관(Senior Minister)과 고문장관(Minister Mentor) 두 직책 모두 리콴유가 총리직 퇴임 이후에 내각의 일원으로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직책으로, 이 기간 동안 리콴유는 싱가포르 정부에서 사실상 상왕에 가까운 지위에 있었다. 선임장관직의 경우 그나마 리셴룽이 총리에 취임하면서 리콴유가 고문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고촉통이 그 자리를 이어받은 뒤 훗날 다른 인물들이 또 임명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 직위 자체는 이어지는 모양새라도 띄고 있지만, 고문장관직은 말 그대로 리콴유의 상왕 행세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직책이나 다름없어서 리콴유가 완전히 정계 일선에서 물러난 2011년에 직책에서 사퇴함과 동시에 폐지되었다.[6] 도시 하나가 영토의 전부이니 어느 지역에서 학살을 저지르건 영향 범위는 전국이다.[7] 정확히 말하면 싱가포르는 일당독재국가이고, 이는 일정 부분은 인민행동당 자체가 받고 있는 60%~80%대의 높은 지지율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도의 지지율로도 거의 모든 의석을 독차지하도록 짜여진 선거제도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8]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고, 싱가포르 및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는 외국계 언론들에 대하여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및 그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9] 싱가포르는 파산상태에서는 선거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정적의 정치생명을 이렇게 끊어버리는 것이다.[10] 애초에 리센룽부터가 리콴유 시절의 권위주의적인 면들을 많이 희석시키는 데 공을 들였기에 싱가포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점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11] 이때 부산에서는 부마민주항쟁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국무회의에서도 논란이 있었다.[12] 실제로 5공화국 출범 "직후", 한국은 무기 개발 부서를(특히 미사일) 축소했으며,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협상에서, 1970년대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난립한 자동차, 중공업의 구조조정을 진행할 것을 강요받았다. 물론 이 구조조정은 유신 말기에도 이미 필요성이 거론되었고 김재익 경제수석 등이 적극 찬성했던 정책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것과 미국 입김이 강한 외국 금융기관이 잠재적으로 미국과 경쟁하게 될 분야 규모를 줄일 것을 강조하는 건, 그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13] 현대 정주영 창업주나 현대자동차 포니 정 회장의 자서전에는, 당시 세계은행측이 자금지원을 빌미로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에서 자동차를 포함한 중공업 규모를 축소하려 한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14] 개인적 판단보다는 상대 국가의 정세에 척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뻔하다보니 도리어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조소하는 듯한 멘트로 여겨지기 좋은 주장이라 조갑제 등이 이 발언을 활용하였다. 반대로 진중권에게는 그 3명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또 리콴유 등을 꼽으며 서로 돌아가면서 3대 지도자 해먹을 것이라고 까였다.[15]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8년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에서 김대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야당 시절 생명의 고비만 수차례를 넘긴 고초를 겪은 김대중 당선자가 속된 말로 "손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었는데도 보복 대신 화해와 타협을 택한 DJ를 장수를 용서한 조조에 비유하면서 "간웅과 노정객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평을 남겼다.[16]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3언어(제2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다른 동영상 보러가기[17] 과장 좀 보태서 리콴유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18] 한국어판은 '리콴유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19] 싱가포르에 있는 대부분 서점에서 판매중인 서적들 제일 앞에는 위에 언급한 두 권의 자서전이 놓여져 있다.[20]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21]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였던 시절의 싱가포르는 인종폭동이 빈발하던 나라였으니 다인종 공존이 필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소수자인 말레이계, 인도계 등에 대한 배려이다.[22] 아들 리셴룽(Lee Hsien Loong)은 한어병음 방안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표준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였다.(리셴룽은 1952년생이고, 한어병음방안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 비슷한 사례가 장제스, 장징궈 부자. 장제스는 방언 발음을 바탕으로 자기 이름을 Chiang Kai-shek으로 썼지만 장징궈는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Chiang Ching-kuo로 표기하였다.[23] 예를 들어 양조위도 Tony Leung Chiu-wai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홍콩 연예인 상당수가 이름이 이런 식이다.[24] 한국에 번역된 '리콴유 자서전' 40 페이지 및 162 페이지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