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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est_of_the_Prime_Minister_of_Singapore.png
싱가포르 총리
제1대제2대제3대
리콴유 고촉통 리셴룽

싱가포르 초대 총리
Lee Kuan Yew
GCMG CH SPMJ
파일:external/www.straitstimes.com/lky1.png
李光耀
Lee Kuan Yew
출생일 1923년 9월 16일
출생지 영국령 말레이 캄퐁 자바 가[1]
사망일 2015년 3월 23일
사망지 싱가포르 싱가포르 종합병원
국적 싱가포르 파일:싱가포르 국기.png
학력 래플스 고등학교[2] (졸업) (1935-1940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
가족 父: 리친쿤(李進坤 Lee Chin Koon) (1902년-1997년)
母: 추아짐니오(蔡認娘 Chua Jim Neo)
5남매 中 1째
배우자 콰걱추 (柯玉芝) (1950년 결혼, 2010년 사별)
자녀 슬하 2남 1녀
첫째: 리셴룽
약력 싱가포르 초대 총리 (1959년1990년)
싱가포르 제2대 선임장관 (1990년2004년)
싱가포르 고문장관
정당 [[인민행동당|
인민행동당
]] (1955년-2015년)
재임기간 1959년 6월 5일1990년 11월 28일
신장 180cm
종교 없음 (불가지론)
서명

1. 개요2. 이름에 대하여3. 생애
3.1. 청년기3.2. 정치 입문3.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3.4. 싱가포르의 국부3.5. 사망
4. 평가
4.1. 권위주의적 통치4.2. 경제성장의 허와 실4.3. 언론통제
5. 기타
5.1. 한국과의 인연5.2. 개인적인 일면
6. 주요 행적7. 관련 문서

1. 개요

싱가포르의 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싱가포르 자치정부,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를 지낸 뒤,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 간 장기 집권하였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 제일의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지도자이자 재임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여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2. 이름에 대하여

한문 李光耀
병음 Lǐ Guāngyào - 리광야오
객가어 발음 Lí Kông - yeu
한국어 리콴유
이광요
영어 Lee Kuan Yew
Lee Kwan - Yew

그의 이름은 한자로 李光耀라고 쓴다. 과거 한국의 언론에서는 리콴유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이광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 '콴유'는 로마자로 Kuan Yew라고 쓰는데, 이 철자가 어떤 중국어 방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光'을 'K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은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정도인데 리콴유 가계가 객가인 것으로 보았을 때 오어를 구사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耀'를 Yew라고 표기한 것은 객가어 쪽에 가깝다. 그의 동생인 李天耀(Lee Thiam Yew)의 발음은 객가어에 가깝다는 느낌이지만, 역시 그의 동생인 李祥耀(Lee Suan Yew)의 경우 '祥'을 'S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표준중국어와 객가어 등 여러 방언이 뒤섞여서 비슷하게 흉내낸 표기로 짐작하고 있다.[3]

파일:external/www.youngparents.com.sg/A_Boy_Named_Harry_The_Childhood_of_Lee_Kuan_Yew.jpg

그의 아버지 리친쿤은 영국령 싱가포르에 3대째 정착해 있었던 화교 집안으로써 부유할 뿐더러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했고, 그래서 아들 리콴유에게도 중국어식 이름 콴유뿐만 아니라 해리(Harry)라는 영어식 이름을 붙여줬다. 리콴유의 모국어는 영어였고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도 해리였으며,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옛 친구들은 리콴유를 Harry Lee라고 불렀다. 지금도 홍콩 사람들의 경우 앞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뒤에 중국어 이름을 붙인 일종의 영 - 중 혼합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4] 리콴유 역시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은 "Harry Lee Kuan Yew"였다. 그러나 그러나 리콴유 본인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독교도도 아닌 중국아이가 영국식 이름이 있다고 학교에서 놀림받았기 때문.[5]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 한족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리를 떼고 리콴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3. 생애

나는 일생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는 싱가포르'이다.[6]

3.1. 청년기

1923년 부유한 한족(광둥계) 집안에서 태어난 이민 4세다. 그의 집안은 중국 광둥성 출신의 객가(客家)[7]로, 중국인, 화교의 후손 중에서도 한족 이주민 집안의 후손인 셈이다.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과 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자랐다.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형성된 일종의 현지 엘리트 집단의 일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싱가포르를 침공, 영국대신 몇년간 주인행세를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훗날 싱가포르의 지도자가 되어서도 일본을 싫어했다. 다만 싱가포르의 나라라는 특성상 총리시절에는 드러내놓고 싫어하진 않았지만 선임장관이 된 이후 쓴 자서전들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사실 이는 일본인에 대해서 증오보다도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일본의 불손 세력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일본은 극우들을 청산하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임기내내 일본의 수상들에게 했던 전력도 있다. 리콴유는 식민지시절 친영주의적인 가족에서 자랐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자서전에서 서술한 표현 그대로이다.)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8]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감정은 더이상 전쟁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더이상 영국에 의지할 수 없고, 독립을 추구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소회했다. 일본의 지배하는 동안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9]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경대학교(LSE)에 입학 후 1947년에 케임브릿지 대학교 법학과로 옮겨 Double Starred First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1920 - 2010)와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문으로 영국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하였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던 시절 리콴유는 최고 영재였는데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2등으로 만든 유일한 학생이 콰걱추였다고한다.[10]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와 학생운동 연관된 소송일을 맡게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의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 이미 변호사로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역시 흠좀무.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덧붙이자면, 리콴유는 케임브릿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과를 졸업 당시 Double Starred First-Class Honours 를 받았다. 영국 대학은 졸업시 학위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높을 경우 따로 우등 표창(Honours)을 주고, 세부적으로 그 표창은 First - Class, Upper - Second, Lower - Second, Third - Class Honours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학생에겐 "Starred First"라는 세부 표창을 주고, 복수전공 두 개를 모두 "Starred First"로 졸업했을 때를 "Double Starred" 라고 한다. 한마디로 특 - 특 - 특 우등졸업 × 2 . 식민지 출신이 이정도 성적을 받고 졸업하는데 식민당국이 주목하지 않을리가...

3.2. 정치 입문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인민행동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리콴유와 같은 영국 유학파 출신의 인텔리와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세력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영어사용자로서 친서방주의자이며 사회민주주의자였고 비공산주의자였다. 리콴유의 출신 배경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은 세력과 손을 잡은 이유는 1. 당시 좌익세력은 굉장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고,[11] 2.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밀려날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PAP가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어떠한 산업으로도 대성하기에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해외 교역의 관문으로의 가치를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12]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고, 결국 양자의 갈등이 격화된 끝에 말레이시아는 1965년 8월 일방적으로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이것도 몇 번이고 늦춰진 것으로 리콴유가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절규하면서 하도 난리를 쳐서 연기해준 것이다. 이 동안 리콴유 정부는 말레이시아의 싱가포르 축출 결정을 뒤집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고 연방 잔류에 사활을 건 리콴유의 싸움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3.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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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65년 8월, 리콴유 정부는 일방적으로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영상을 찾아보면 리콴유는 발표를 기다리며 손수건으로 얼굴만 닦고 있었고 축출 통보를 받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애통해했고, 옆에 있던 싱가포르 대표단들의 표정은 진짜 X 씹은 표정이 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소감 인터뷰 중에 자신은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고 하며 울먹이다가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잠깐만 중단해달라고 한다. 어지간히도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다. 여러 나라들 중에 드물게도 분리 독립을 비통한 심정으로 받아들인 케이스이다. 리콴유가 일생 후회하고 슬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디스커버리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편 참조) 자신들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우리는 내일 당장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축출될 거다"라고 말할 때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고 한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던 것.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 이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시켰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계 인구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콴유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인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을 읽어보면,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지, 자원 없지, 땅 없지,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국가[13]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에 빌붙어 볼까 아니면 말레이에 다시 어떻게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 싱가포르처럼 막 독립한 제 3국들은 지하자원을 서방으로부터 뺏길까봐 걱정이라도 했지만, 싱가포르는 뺏길 자원조차도 그야말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주변 대국,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했다. 싱가포르가 쫓겨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시아가 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이러한 식수공급의 중단을 매우 두려워했다. 특히나 말레이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여 싱가포르의 축출 혹은 강제 병합[14]을 외치는 강경분자들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엘리전을 통한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싱가포르의 식수공급 중단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15]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콴유가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3.4. 싱가포르의 국부

독립 후 리콴유는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사회의 안정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국을 운영하여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중국계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도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 합병을 원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지역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만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군대가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아래에 있었다.[16]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이 아닌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현재도 싱가포르는 한국, 홍콩의 교육열을 저리가라 할 정도로 교육열이 뜨거운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어차피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모두가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우리나라로치면 중학교 전국모의고사를 보면 전체 평균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하였는데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흥했다고 보긴 어렵다. 리콴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었다. 왜냐면 싱가포르 주변에 대체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의 축출을 생각하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가 썩고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빌빌대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치고는 말도 안되는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

이 외에도 정말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상초월의 방법들을 생각했는데 사실 2010년대에 들어 얘기한다면 돌 맞을만한 얘기들이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 등은 유명하지만[17] 사실 이정도는 리콴유가 재임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하다.

그의 특이한 정책중에 하나를 예로 들자면 결혼장려정책이 있었다. 이른바 남자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기보다 똑똑한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한다는 얘기였다.[18] 이는 어느 한 개인의 똑똑함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결국 유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계가 75% 이상이어서 유교적 가치가 강한 70 - 80년대의 싱가포르에는 고학력 남성이 저학력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것을 국가정책 및 모토로 삼아서 추진했다. 그리고 이는 출산 장려정책으로 이어졌다. 특히나 3자녀를 낳는 가정에는 여러가지 특혜를 주었는데 문제는 이 3자녀라는 것이 대졸 이상의 엘리트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로써 이른바 고학력자들은 애를 많이 낳고 저학력자들은 애를 많이 낳지 말라는 정책으로, 2000년대 이후엔 세계에서 두들겨 맞을 만한 정책이었다.[19] 물론 두 제도 모두다 지금까지 싱가포르에 존속하는 것은 아니고 70 - 80년대에만 해당되는 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인들의 기초 사고방식에 아직까지 어느정도 남아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작 이러한 제도들은 오히려 대졸 이상의 여성, 다자녀를 둔 고학력엄마들 사이에서 반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들은 리콴유 재임 당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인구증대와 더불어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보면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당연히 리콴유는 이에 발맞춰 교육제도도 개편하고 대학도 열심히 손봤다. 그런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1959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1991년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를 가지고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고, 후임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퇴임하자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20]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에야 고촉통과 더불어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3.5. 사망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2015년 3월 18일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보도가 나왔고, 닷새 뒤인 2015년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콴유의 장남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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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3월 29일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수반 다수가 참석했고,[21]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골함에 함께 안치되었다.

4. 평가

4.1. 권위주의적 통치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

싱가포르/정치와 같이 보면 좋다.

리콴유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1968년 : 86.7%
1972년 : 70.4%
1976년 : 74.1%
1980년 : 77.7%
1984년 : 64.8%
1988년 : 63.2%

고촉통이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1991년 : 61.0%
1997년 : 65.0%
2001년 : 75.3%

리셴룽이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2006년 : 75.3%
2011년 : 60.1%
2015년 : 69.9%

1968년부터 1980년 까지 12년 간 4번의 총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집권 여당 PAP는 전 의석을 싹쓸이 했다.

싱가포르는 여타 민주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다당제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선거과정에서 국민들이 자신의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제1당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오기는 했고 특별히 저 선거 결과들이 부정선거로 이룩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총선 선거 제도가 여당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다는 문제점이 있고, 싱가포르/정치 항목에 있는 것과 같은 우회적인 방식의 정치 탄압이 있어 야당의 세력이 자라기 어려운 점은 싱가포르를 완전한 민주국가로 보기 어렵게 한다.

리콴유는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자체는 칭찬할 일이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무관하기 때문에 충분한 방어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 청렴하지 못함은 사람의 부패함을 가늠하는 여러 기준 중 한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22]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에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서도 리콴유의 통치를 독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리콴유 옹호자들이나, 독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옹호자들을 볼 수 있는데, 경제기반은 부유하되 자유와는 동떨어진 사회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것이다. 반대로 독재정치에도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사회안정을 이룩했다는 점때문에 주변국 독재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영감을 주기도 했고,[23] 특히 중국도 싱가포르가 일당독재체제 아래에서 사회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점때문에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펼칠때 싱가포르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실제로 덩샤오핑리콴유는 사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이후로도 리콴유과 장쩌민, 후진타오와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사실 말레이시아는 1957년부터 2018년 총선 이전까지는 여당연정이 권력을 독식했고, 싱가포르처럼 여당이 전 의석을 싹쓸이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싱가포르와 정치 체제면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도 1998년에 민주화 되었지만 수하르토 집권기때는 독재국가였으며 태국도 수시로 군부독재정치가 펼쳐지고 캄보디아도 훈 센 독재체제에 베트남과 라오스도 일당독재체제이니 한번쯤은 참고할만한 모델인 셈이다.

4.2. 경제성장의 허와 실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다소는 과장된 내용이다. 다만 그렇다고 싱가포르의 복지가 뛰어나다고는 볼수 없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 즉 일종의 국민연금 제도로,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운용하여 매년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하지만 내돈을 내맘대로 못쓰게 하니 반발이 없을 수 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연금보험 /의료보험으로 전용한다. 문제는 정말 싱가포르는 집/연금/의료 빼고는 어떠한 복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 세가지면 모든게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고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안전망 측면에서는 부실한 것이 맞다. 다만 이는 싱가포르내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사람들을 도태시키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고 리콴유가 특히나 이런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복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애초에 엘리트 주의로 상위 10%의 능력에 기대서 성장해온 나라가 싱가포르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이 저출산이 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큰 빈부격차로서, 이를 통해 보면 싱가포르의 문제는 2010년대의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24]

그렇지만 오늘날 싱가포르는 관광/물류 위주가 아닌 2차 산업 기반의 견고하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10위 내에 드는 1인당 GDP, 2000년대 중후반까지 7%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행정적 역량 등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공기업 역량과, 아시아 최대의 공업단지인 주롱공업단지, 싱가포르를 관광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국가주도하에 조성된 다양한 테마시설과 국가차원의 마케팅능력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위치를 바탕으로 리콴유의 공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말레이 시절에도 싱가포르가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였던 것은 맞다. 말레이시아 역시 규모만 놓고보면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인도양을 걸쳐 물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토 최남단에 있는 테마섹(싱가포르)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옳았다. 말레이시아 전체가 못살아서 그렇지 축출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싱가포르 축출이후 말레이시아에서는 탄중팔레파스를 주요 거점 항구로 키웠고 한국으로 치면 부산과 같은 위치로 만들었다. 물론 싱가포르의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싱가포르에 인접하면서 동시에 탄중팔레파스와의 거리도 가까운 조호르바루가 부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인도네시아의 항구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큰 것은 그 나라의 인프라가 만든 힘이고 그 인프라를 만든 노력은 리콴유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4.3. 언론통제

싱가포르에서는 항상 감시당한다.

정부가 무료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 바로 정부에서 조사나온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예전 일해거사처럼 기자를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이는 무식한 방법을 쓰는게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쓴다. 여기에 독재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법부의 독립성은 말뿐이며, 대부분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기 때문에 거의 100% 패소한다. 그러니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란 실제로는 없는 셈이다. 패소한 자가 돈을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둬야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하면 그대로 이 예치금은 날아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 또 사실 많은 언론기관이 국영 투자업체 테마섹 홀딩스가 대주주라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적 보도를 걸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세계 150위권으로, 이라크러시아와 동급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 비난하기도 한다.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거침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소국인데다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서방과 같이 행동을 하므로, 서방은 중국, 베트남, 북한과는 달리 싱가포르의 독재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 북한과 달리 유튜브나 트위터를 막지 않는다. 그러니까..

1) 서방권 전반은 싱가포르의 독재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히 외부 인터넷이 위험하지 않다.

2) 설령 자국인이 이런데 반정부적인 주장을 올려봤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금방 추적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는 중국, 북한, 베트남과는 달리 구글,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싱가포르 인들은 이런 데다가 정부 비판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명예훼손은 자국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전가의 보도로 쓰인다. 정치적 탄압은 그다지 심하지 않게 보이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 당원들을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가두는게 일상이었다. 90년대 이후엔 자제한 편.

일부 외국에서는 종신 총리를 예상하였으나 정권(총리직)을 측근인 고촉통에게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러나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이 계속 나돌았는데 실제로 '선임장관'이 되어 내각에 관여한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고촉동은 15년 간이나 재임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했고, 리콴유의 아들 리셴룽은 고촉통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고촉통 정권, 리센룽 정권에서도 리콴유는 사실상 선임장관, 내각고문으로 계속 정권에 참여하고 있어 완전히 퇴임한 2011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조사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도 꽤 낮은 편에 속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필리핀, 멕시코와 비슷하나, 실질적으로는 카르멘 아리스테기 등 반정부진영 언론이 어떻게든 돌아가는 멕시코보다 더 낮은 수준. 참고자료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링크 그는 이 일로 2015년 5월에 4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감 후 또 다시 리콴유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려 2016년 9월에 이번엔 6주 징역형과 2000 싱가포르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 2017년 미국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링크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가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를 금지시키고 못하게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마작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들은 강요하고 금지할 수 있어도 마작은 금지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25]

5. 기타

5.1. 한국과의 인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26]
- 리콴유
리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기에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 및 조선인 위안부[27]를 통해 한국과 처음 접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밝힌 바로는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 못지 않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초기에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28]

그러나 한국이 어느정도 외교력을 갖추면서 싱가포르와 정식 수교하고, 일제 부역국이라는 오해가 풀린 뒤 리콴유는 '식민시절 한국은 강압적 통치를 받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한국인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발언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절에는 상당히 드물었던 현상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피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주의에 순응하였으나 유독 한국만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다고 평하였다. 70년대에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보니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 문화에 익숙한 일본식 엘리트들이었음에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어마무시해서 놀랐다라고 한다. 한편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방식은 법치주의적이고 젠틀한 영국과는 달리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학생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 일본에게 일본이 중국과 한국, 싱가포르에서 자행했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여러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유럽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단결을 잘 하며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한 경외감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다. 일본군이 싱가포르 거리를 깨끗이 청소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94년, 야당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에 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글을 기고 한 후 리콴유 전 총리가 설한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국내외 저명한 석학들까지 가세해 수년 간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강조. 외국에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의 논쟁을 꽤 흥미있게 보았던 모양. 두사람은 모두 계해년생 돼지띠로 나이도 같다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그래도 리콴유 자신은 한국에 꽤 우호적이다. 2000년에 출간된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에서도 한국 관련 내용을 1개 장에 할애했을 정도.


대한뉴스 1261호 영상.

1979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한국을 방문해서 피살당하기 직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29]을 했던 내용도 자서전에서 비중있게 소개했다. 당시 영부인 대행 격으로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자서전에서는(이름은 따로 적지 않고)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통역을 했다" 정도로만 썼다. 아울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해 공식석상에서 견해나 권고를 피력한 경우가 6차례였고,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접한 후 그 부재가 단순한 지도력 공백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이 유무형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최고지도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아시아의 3대 위대한 지도자’로 꼽았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를 꼽자면 중국의 경제 근대화를 일궈낸 덩샤오핑(鄧小平)과 일본이 완전한 친미국가로 자리잡아 일본의 재건을 이끌어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 그리고... 이 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한국은 역사 바로쓰기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합니다. - 리콴유[30]

동아일보

대체로 개발독재 권위주의적 지도 형태를 좋아하는걸로 보인다. 덩샤오핑과는 냉전 때 만나 중국의 빈농 문맹 출신들이 많이 모인 싱가포르도 경제성장을 해냈으니 중국도 해낼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평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높은 가치를 굳게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강해진 사람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자제[31]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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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전에 키배를 벌였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그의 "아시아적 특수성"이라는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례로 매우 유명한 정치학자 중 하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경우, "동양유교문화가 민주주의와 조합되기 어렵다는 리콴유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양이 고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룬 가운데서도 광범위한 정치참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으며, 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군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상술한 보편성을 들어 반론을 하기도 했다. 링크

5.2. 개인적인 일면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하지만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는 행동도 했다고 한다.

표준중국어할 줄 알았다.[32] 약간 어눌하지만 보통화가 그에게 있어서 제 2 언어(제 1 외국어)도 아닌 제 3 언어(제 2 외국어)였던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유창했다.[33] 본인 말로는 표준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나라의 특성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의 인재를 데려오든지 외국의 기업을 들여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 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 보는게 보다 타당할 듯. 리콴유가 원했던 수준은 영어의 모국어화였는데, 첫 세대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영어가 공용어로 자리를 잡으면 세 번째나 네 번째 세대쯤에서는 완벽한 영어 사용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무참히 빗나갔다. 물론 싱가포르의 영어 사용능력은 아시아에서는 대적할 나라가 없고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비견할만한 수준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국계가 주류인 국가만큼의 수준은 아니다. 이는 인종의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이 너무 심해 공용어로는 영어를 써도 중국인들끼리는 중국어를 쓰고 집에가서는 자기네들 방언을 쓰는 등 중구난방으로 생활에 언어의 통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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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34]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 이라고 쓰고 축출당했다고 읽음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싱가포르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교에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하며, 저 종교는 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리콴유도 쿨하게 인정했다.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35]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사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닌 것이, '리콴유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리콴유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는 부분이 한 챕터에서 나온다. 하지만 리콴유는 극단주의를 싫어하는 것이지 이슬람 신자를 싫어한 것은 아니어서, 그 역시도 싱가포르가 온전한 중국계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말레이계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36] 그런 이유로 정치나 경제 요직에 이슬람 신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은 리콴유 개인의 특성이고 이는 싱가포르에서도 현재 통용되는 뿌리깊은 바탕이다. 반대파의 새싹이 될 비판적 젊은이들을 정부에 참여시켜서 옹호자로 길들이지 않았다면 싱가포르의 1당독재는 오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나라의 중국인 지도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리콴유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부인 콰걱추 여사 또한 170cm가 넘어 그의 가족 대부분은 장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임자는 리콴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6. 주요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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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원예와 아쿠아리움 물고기 쇼' 개막식에 참석하여 콰걱추(柯玉芝) 여사와 정부 요인들과 함께 시찰하고 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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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National Day(국경일) 기념식에서 싱가포르 달러의 그 분 유소프 빈 이샤크 싱가포르 대통령 내외와 회동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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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9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박근혜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바로 그 1주일 뒤...

7. 관련 문서


[1] 본적으로는 광둥성 출신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사실 실제 본적지를 한번도 다녀온적이 없기는 하지만 메이저우 시 탕지천 정부에서 리콴유 기념관을 만들면서 해당지역 정부와 주민들이 관광상품으로 잘 써먹고 있다.[2] Raffles Institution.[3] 장남 리셴룽은 한어병음방안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였다.(리셴룽은 1952년생이고, 한어병음방안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4] 예를 들어 양조위도 Tony Leung Chiu - wai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홍콩 연예인 상당수가 이름이 이런 식이다.[5] 한국에 번역된 '리콴유 자서전' 40 페이지 및 162 페이지 근거.[6]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 - 2000) 중에서.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요약해놓은 표현이다.[7] 객가인들은 한족에 속하는 작은 집단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객가 방언은 고대 중국어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 항목 참조.[8] 일본을 향한 리콴유의 감정은 서양인들을 무찌른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경외감과 동시에, 싱가포르인,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던 일본인의 야만성에 대한 혐오감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감정은 수카르노 등 일본의 군정을 겪은 동남아 민족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9] 리콴유 자서전 1권을 보면 일본군 보도부에서 복무하던 시절의 일화가 있다.[10] 부인 역시 케임브릿지 법대 출신의 엘리트다. 참고로 아들 리셴룽 총리도 케임브릿지 대학 출신.[11]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실패한 실험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공산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정치체계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 당시 싱가포르는 주류 민족집단인 화교들의 조상 나라 중국이 공산화에 성공하여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공산주의의 호소력이 매우 컸다.[12]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말레이반도 최남단에 있던 시절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최남단에 있어서 서방세계로부터 넘어오는 물류교역의 중심지였다.[13] 싱가포르가 번영한 항구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레이 반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번영이었다.[14] 싱가포르가 분리될 때도 말레이시아 정치권 모두가 힘을 합쳐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 말레이계를 위한 말레이 땅의 회복을 외치면서 싱가포르를 병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5] 현재도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정수 시설이 전세계 최고수준인 싱가포르인지라, 수입한 물을 싱가포르에서 정수과정을 거치고 보틀링하여 역으로 말레이시아에 물을 되팔고 있다는것. 말레이시아에서 부자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된 물만 먹는다. 여타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렇지만 보틀링된 생수라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 특히나 가격이 쌀수록 위험하고 가격이 비싸질수록 먹을만하지만 여튼 조심해야한다.[16] 애초에는 몇십년이 넘는 기간을 포함, 영속적으로 영국군대의 보호를 받길 원했으나 영국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또한 굉장히 어려워졌다.[17]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18] 본인도 그리고 아들인 리셴룽 총리도 굉장한 엘리트와 결혼했다.[19] 또한 이러한 출산장려정책은 출산장려 초기인 1980년대와 90년대에나 어느정도 먹혔지 2000년대 이후로는 싱가포르도 인종 가릴거없이 출산율이 뚝 떨어지는 판이라서 학력가리면서 출산장려할 처지가 결코 못된다. 물론 중국과 인도 등 해외에서의 인구 유입으로 인구는 매년 늘어나고있기는 하지만 고령화 문제는 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다.[20] 한국언론에서는 대부분 '고문장관'으로 표기했다. 주 싱가포르 한국대사관 역시 고문장관이라고 표기. 선임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국 신문에 실은 싱가포르 홍보광고에서는 스승장관이라고 표기했다.[21] 현직 국가원수가 참석한 경우는 한국(박근혜 대통령), 일본(아베 신조 총리), 인도(모디 총리), 호주(토니 애봇 총리) 등이었고, 중국은 리위엔차오(李源朝) 부주석을 파견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만의 경우는 마잉주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중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국장 직전에 개인 자격으로, 비공개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22] 다른 국가에서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사적으론 청렴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스탈린 조차도 자기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전부터 살던 조지아의 허름한 옛집에서 계속 살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돈과 권력 중 권력을 선택했다 [23] 물론 비단 리콴유만 영감을 준것은 아니기는 한다. 다만 스탈린 격하이전에는 스탈린이 가혹한 독재정치를 펼쳤음에도 소련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때문에 세계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24]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빈부차 문제와 다른 것이 비교적 빈부격차 문제가 적은 서유럽 주요 선진국들도 거의 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있고 그래서 이민 받아들이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출산율 높은 국가들은 대체로 개발도상국이고 빈부격차 심한 편인 국가들이다. 인식 정서 문제가 더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25]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 중화권(특히 화베이권)은 마작 없이는 하루도 못살 정도로 마작사랑이 매우 대단하다.[26] 실제로 한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2차 추축국 및 부역국 취급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참고.[27] 다만 이 부분은 일본인들로 구성된 매춘부 집단인 가라유키상을 조선인 위안부와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던 가라유키상들은 영국군한테 빼낸 정보를 일본군한테 전달하여 일본군이 싱가포르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일정 역할을 했다. 링크[28] 그러나 싱가포르가 일본군에 넘어간 때는 1942년인데, 일제는 1944년에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했고 그 전까지는 지원제여서 일본군 내의 조선인 숫자는 일본인들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더구나 당시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에 대한 인지도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낮았을 텐데, 리콴유가 어떻게 일본군 내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했는지가 의문.[29] 이때 부산에서는 부마민주항쟁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국무회의에서도 논란이 있었다.[30] 개인적 판단보다는 상대 국가의 정세에 척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옅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뻔하다보니 도리어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를 조소하는 듯한 멘트로 여겨지기 좋은 주장이라 조갑제 등이 활용하였다.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이를 두고 그 3명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또 리콴유 등을 꼽으며 서로 돌아가면서 3대 지도자를 해먹을 것이라고 조롱했다.[31]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8년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에서 김대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야당 시절 생명의 고비만 수차례를 넘긴 고초를 겪은 김대중 당선자가 속된 말로 "손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고, 그 중에는 자식을 고문해 후유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보복 대신 화해와 타협을 택한 DJ를 장수를 용서한 조조에 비유하면서, "간웅과 노정객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평을 남겼다.[32]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 3 언어(제 2 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잘 못한다고 했다. 다른 동영상 보러가기[33] 과장 좀 보태서 리콴유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34] 한국어판은 '리콴유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35]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36]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였던 시절의 싱가포르는 인종폭동이 빈발하던 나라였으니 다인종 공존이 필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소수자인 말레이계, 인도계 등에 대한 배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