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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朴興植 | Park Heung-sik | |||
출생 | 1903년 8월 6일 | ||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학옥동 387 (現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 |||
사망 | 1994년 5월 10일 (향년 90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직업 | 기업인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본관 | 밀양 박씨# | |
부모 | 父 박제현[1], 어머니 | ||
배우자 | 한인하(재혼) | ||
가족 | 박병석(장남), 박병찬(차남), 박봉숙(딸) | ||
호 | 산남(山南)·용강(龍岡)·유재(猶齋) | ||
체중 | 100kg 이상 | ||
학력 | 용강보통학교 (졸업) 진남포공립상공학교 (중퇴) | ||
경력 | 前 화신백화점 사장 前 화신산업 사장 前 흥한화섬 사장 前 광신학원 이사장 前 흥한재단 이사장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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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화신그룹 및 흥한재단 설립자이며, 매우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악명을 떨쳤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거부로 불렸던 사람이며,[2]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체포 대상 1호로 잡은 친일 기업인이다.[3] 신문을 통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표현하기도 했고, 일본인과의 내선결혼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쇼와 천황과 악수를 한 적도 있다.
민족자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백화점이며 일제 시기를 다룬 사극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화신백화점[4]이 바로 이 사람 소유였다. 백화점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큰 규모인 전국 350개의 체인점을 운영하는가 하면 해외무역을 시도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 반도의 유통업을 지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 물론 이러한 승승장구는 허가제 등을 적절히 활용한 조선총독부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특혜를 받아서 성장한 전형적인 친일 자본가였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현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의 부농가에서 용강군참사를 지낸 2천석지기 박제현(朴濟賢) 슬하의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진남포부로 나와 진남포공립상공학교에 입학했으나 얼마 뒤 중퇴하고 상업계에 투신하였다.1919년 2월부터 진남포부 비석리(현 남포시 항구구역 상비석동)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그후 명함가게 및 소규모의 인쇄소도 경영해봤으나 이 또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고향 용강에 있던 몇 마지기 농토를 내다 팔고 명함가게를 정리하여 자본금 5만원[5]으로 1923년 선광당인쇄소(鮮光堂印刷所)를 창립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 이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사장에 취임하였다. 경쟁업자가 없었다는 것도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그의 수완과 성실성 덕에 인쇄사업은 날로 번창해 나갔다.
1925년, 경성부(현재의 서울)로 올라온 그는 황금정(현재의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180번지, 식산은행 건물을 임대하여 '선일지물(鮮一紙物)'이라는 종이회사를 차려 수입선 다변화로 일본산보다 더 싸게 지물을 확보했고, 박리다매식 영업수단으로 설립 1년만에 전국 수백 개 서점과 인쇄소 등을 거래처로 삼았다. 심지어 조선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까지 주 고객으로 삼았으며, 당시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와 친교를 맺어 일본 내지의 각 제지회사와 특별 계약을 맺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두루마리를 직수입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1930년 경성상공협회 회장을 지냈고, 종로네거리 동북쪽 모퉁이[6]에 있던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신태화로부터 인수해 화신백화점을 출범시킨 뒤, 화신상회는 1932년 주식회사가 되었다.
1932년 1월에는 화신상회 바로 옆 건물에 동아백화점이 들어선다. 그러나 상품권 발행, 오사카에서 물품 직수입, 금전등록기 설치, 문화주택 경품 등의 대담한 전략을 구사하는 화신백화점에 밀려 매출이 부진하자 6개월만에 상호와 경영권 일체를 화신상회에 매각한다. 동아백화점을 흡수한 화신은 두 건물 사이에 육교를 가설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고,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 등을 채용하여 광고업무를 맡기는 등의 재치도 발휘했다.
또 전국의 주요잡화점을 화신의 연쇄점(프랜차이즈)으로 만드는 구상을 하는데, 1934년 신문 광고를 통해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모집하고 1935년 1월에는 3천여명 이상의 신청자 중에서 경영상태 등을 기준으로 300여개 점포를 엄선한다. 그 후 이들 연쇄점에는 화신이 일본 등지의 생산공장에서 염가로 수입한 물품들이 공급되었고 이들 공급물품의 견본을 전시하는 견본시장과 대규모 창고도 마련되었다. 각 연쇄점은 이 견본시장에서 상품을 임의로 선정하여 주문하는 선구적인 체계였다.
한편 이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조선식산은행에서 3천만원을 대부받는데, 이런 거금을 한반도 경제침략의 본거지였던 식산은행으로부터 빌렸다는 것은 바로 일제 침략행위에 적극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거듭된 성공으로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 등과 함께 조선 최고의 거부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1939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서우사범학교[7]를 인수하여 1940년에는 '광신상업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는 현재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광신중학교 - 광신고등학교 -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2.2. 대화재 그리고 재개관
1935년 1월, 목조 4층 건물이던 화신백화점에 큰 불이 난다. 동관, 서관 건물 중 서관 건물에 이웃한 빈 터에 있던 허술한 사과창고에 처음 불이 났는데, 과일장수가 촛불을 켜고 그대로 둔 것이 원인이었다. 서울 중심부인 종로 네거리에 대화재가 난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주위에 고층건물이라곤 전혀 없던 시대라서 화신백화점이 타오르는 불길은 도성 안팎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삽시간에 성 안팎에서 몇 만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혼비백산한 것은 조선총독부 당국도 마찬가지였다.이 화재로 불타 없어진 건물의 연면적은 약 270평 가량이었고, 손해액은 약 45만 3천원에 달하였으나 박흥식은 다행히도 44만원의 보험에 가입해 있었다. 박흥식은 곧바로 부흥계획에 착수하였으며, 500여 점원 및 조선총독부, 식산은행, 보험회사 등도 적극 협조하였다. 그 후 화신은 서관에 인접한 부지까지 새로 매입하여 연건평 2천 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새 모습으로 1937년 11월 개관식을 치른다.[8]
화재가 나던 해 9월에는 평양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평안백화점을 인수하여 12월 1일부터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개관하였으며, 전술한대로 1936년에는 화신연쇄점까지 흥행을 터뜨려 박흥식의 인생은 고공행진을 하게 된다. 당시 경성 조선인 사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6층 식당의 비빔밥이었다. 경성의 조선인들은 6층에 올라가 비빔밥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나들이 코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보는 것도 큰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2.3. 친일 행적
이미 사업을 시작한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위가 노골화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비행기 헌납운동(소위 애국기 헌납운동)에 앞장선다. 친일 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이사를 맡았고,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도 가담했다. 전쟁 말기 친일 인사들의 총본산이었던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지내고 고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기간 중 조선총독부 기관자인 《매일신보》에 대한 기고 활동과 각종 간담회 참여로 전쟁을 지원했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이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1944년에는 전투기 생산 기업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일명 조비를 설립하였고,[9] 1945년 종전 직전에는 전투기 생산을 위한 자신이 운영 중이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꾸어 전투기 생산 인력을 양성할 정도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군수 업체로서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공장의 인력은 강제 징용된 노동자로 채워졌다. 아마 일제 패망 이후 이 회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박흥식은 항공군수산업계의 재벌로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2.4. 해방 이후
광복이 되어서도 노동자 자치위원회 관리 시기를 빼곤 그의 왕성한 기업 활동은 변함이 없었다. 1945년 11월 조선비행기공업을 조선기계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쌍용그룹 계열 금성방직에 매각하였다.[10][11] 12월에는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홍콩 등지에 해산물과 인삼 등을 수출했고, 1947년 10월에는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에 취임했다.이 와중에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과 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400만원의 폭리를 취득하고, 비행기회사 청산정리자금으로 일본 육군성에서 받은 5,000만원 가운데 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946년 2월 기소되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200만원을 구형받았으나, 1946년 5월 무죄가 언도되었다. 1948년에는 화신무역을 통해 국내 최초로 한국 국적 무역선 '앵도환'을 취항시켜 영국령 홍콩에 홍삼을 수출했고, 12월에는 원산항까지 출항하려 했으나 1949년 1월에 북한 당국이 '친일 반동분자의 재산'이라 하여 압수했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1949년 1월 5일부터 시행됐는데, 박흥식은 1월 11일 제 1호로 구속 수감된다. 박흥식이 제일 먼저 체포된 이유는 미국 도피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과 함께,[12] 미군정 수도경찰청 청장을 지낸 장택상의 형 장직상과 만나거나 현직 경찰 최난수에게 수사금을 지원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13] 박흥식은 다른 반민족행위자들과 함께 매일 특별검찰들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의해 활동이 유야무야된다. 박흥식은 구속 3개월 만인 4월 2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그 해 9월 26일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어려웠던 일제 하에서 이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고 민족자본 육성의 기수로서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다. 그러므로 친일파로서의 기소사실은 편파적이었다.
반민특위 재판부의 무죄 판결 이유 중에서.
반민특위 재판부의 무죄 판결 이유 중에서.
석방 이후 그가 이끈 화신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 하에 삼성, 락희,[14] 대한,[15] 삼호,[16] 삼양, 개풍[17] 등과 더불어 1950년대 10대 재벌로 군림해왔었고, 1950년 한일무역협정 타결 당시 사절단으로 활동한 뒤 1955년 신신백화점을 세웠으나, 화신은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우선 해방 후 터져버린 6.25 전쟁으로 인해 그의 기반이었던 유통업의 경기가 영 좋지 않았고, 1957년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와 대리점계약을 맺고 1958년 정부에 원자력발전소 건립 계획안을 내보기도 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18]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잡혀가기도 했으나 금세 풀려난 후 경제재건촉진회 발기인으로 나섰다. 1963년 인천도시관광을 세워 송도해수욕장 및 송도유원지를 개발했고, 1964년 막대한 외자를 투입해 화학섬유 제조업체인 흥한화섬[19]을 설립해놓고도 실적 부진으로 고작 1년여 만에 산업은행으로 넘겼다. 1960년 서울 장충단공원에 '소화낙원(小花樂園)'이란 놀이동산을 세우고 1961년 종로 신신백화점 뒤편으로 옮기며 '신신놀이터(해피랜드)'로 바꿨지만, 운영미숙과 비싼 요금으로 인해 부잣집에서나 왔다갔다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대차게 말아먹어 1966년 대한석유공사에 부지를 팔았다.
난 아딕 늙디 않았디오, 현역입네다.
1968년 10월 흥한화섬 부도 당시 그가 남긴 말.[20]
1968년 10월 흥한화섬 부도 당시 그가 남긴 말.[20]
1972년 3월 14일에는 화신전기(주)를 세워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생산했고, 이듬해 9월 1일에는 일본 소니와 합작으로 화신쏘니(주), 11월 13일 일본 레나운 합작사 화신레나운(주), 1975년 1월 31일에는 미국 금융업체 타이거리싱그룹과 합작해 화신타이거리싱(주)를 각각 세우는 등 재기를 기도했으나, 직후 터져버린 오일쇼크로 나빠진 경기와 국내의 타 경쟁회사에 비해 낮은 실적을 보이는 것에 실망한 소니측이 자본금을 회수하여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또 다시 부도를 냈다. 이 와중에 그룹의 본가라고 할 수 있던 화신백화점 역시 차남 박병찬이 말아먹고 해외로 도피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귀국하긴 했다.
이렇게 1980년에는 파산선고를 받아 그룹이 해체되어 1981년에는 화신전기가 부도를 냈고, 화신타이거리싱은 제일은행 및 씨티은행해외투자회사(COIC), 화신레나운은 동일방직에 각각 넘어갔다. 1985년에 화신백화점까지 팔고 흥한재단, 광신학원, 인천도시관광(송도유원지)[21]을 장남 박병석에게 물려준 후 판교 쇼핑센터 등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1989년에는 자택마저 팔아치운 뒤[22] 파킨슨병 및 담석증과 싸우며 은거하다 1994년 향년 92세로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두고 당시 재계에서는 '민족자본가 1호'가 별세했다며 애도했다.
“내가 한참 뛸 때 이병철씨(삼성)는 양조업을 하고 있었고 정주영씨(현대)는 자동차를 수리했다”.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2.4.1. 경영 능력에 대한 평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조선의 최고 거부였던 그가 해방 이후 허망하게 몰락해버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기업 운영에 부채를 쓰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점이 거론된다. 물론 기업을 운영하면서 경영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다한 부채를 지는 건 멀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금의 확보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부채는 감수하는게 기업 경영의 현실이다. 이 부분에서 박흥식의 방식은 너무 경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야 통할지 몰라도, 처음부터 막대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산업자본시대에는 그의 경영원칙은 맞지 않았다.[23]또한 박흥식은 조직 경영이 아닌, 박흥식 개인의 능력만으로 기업 경영의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한국 재벌들은 현재도 총수 1인의 결정에 매우 의존하는 황제적 경영을 하고 있고 이는 매우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수를 보좌하기 위해 강력한 보좌조직 (비서실이나 구조조정본부 등등)을 두고 총수도 이들의 자문을 받아 결정을 하는데, 박흥식은 전혀 이런 거 없이 본인의 감만으로 모든 결정을 행했다. 이렇게 조직이 아닌 원맨쇼 형태의 경영은 일제강점기와 같이 미숙한 경제하에서는 통용될 수 있었으나, 현대적인 기업 환경에서는 기업 발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박흥식은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다 위의 흥한화섬처럼 막 세운 기업을 날려먹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그룹이 망해서 해체되는 시점에서도 여전해서 기업 부도에 따른 재정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재산으로 충당하는 모습으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당시 화신전자의 잔여 부채가 2억 3,000만 원이었다.(중앙일보 기사) 그래도 그의 사망 3년 후 일어난 1997년 외환위기에서 김우중, 김석원, 정태수 같은 수많은 후배 재벌 총수들이 회사가 부도나자 재정책임은 나몰라라 하고 비자금 챙겨서 도피한 것과 비교하면 기업인으로서 자기가 세우고 일군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나 애정[24]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평가해 줄 수도 있다.
3. 기타
- 1930년대에 불광동 - 수색동 일대의 신도시 개발계획을 수립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은평구 불광 - 수색 일대는 황량한 논밭과 농촌 마을이 전부였는데, 박흥식은 이 일대에 이상적인 신도시를 조성하고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지하에서 불광 - 수색 일대까지 터널을 뚫어 지하철을 관통시킨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계획안을 작성하여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25]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않는데, 그 이유로 첫째는 이 계획에 호의적이었던 우가키 총독이 교체되고 후임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 박흥식이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아 했으며,[26] 둘째로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물자가 귀해져서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계획안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아있어 정부 내부에서 열람했다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후 어느 시점엔가 사라져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여담으로 불광동은 이후 택지가 조성되고 서울 도심과 서울 지하철 3호선, 6호선으로 연결되었으며, 수색동은 최근에서야 디지털미디어시티로 개발되고 서울 지하철 6호선, 경의중앙선, 인천국제공항철도로 서울 도심과 연결되었다.
- 이호 기자가 2006년 이코노미스트에 공개한 육성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박흥식의 형 박창식과 아버지 박제현은 그가 어렸을 때 독립운동을 하다 각각 고문과 화병으로 사망했다. 사실 박흥식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도산 안창호를 우가키 총독에게 부탁하여 출옥시킨 후 2년 간 보호한 경력이 있다.
- 대식가였다고 한다. 한 끼 식사량이 능히 보통 사람의 3인분을 넘었다고 한다. 게다가 승용차에 한약재를 넣어 특수 제작한 전병과 그의 농장에서 농약없이 재배한 사과와 배를 싣고 다니면서 시도때도 없이 먹어댔다고 한다. 그는 여러 자리에서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보다 더한 대식가는 딱 한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몸집 또한 커서, 100kg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경영생활 동안 회장이나 총수를 일체 맡지 않고 줄곧 사장 직함을 달았는데, 그 이유로는 회장이 될 시 자기가 일궈 온 회사와 연을 끊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 1965년 한일수교 전, 기시 노부스케의 답장과 박정희의 두번째 편지의 답장의 전달자 역을 박흥식이 담당했다. 박정희 - 기시 노부스케 친서
- 1976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용인시 기흥 신도시 개발을 허가받은 바 있었다.
- 광신고 교정에 1996년부터 세워진 박흥식의 동상이 있었는데, 그간의 친일 행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은 끝에 2001년 10월부터 두 달간 민족문제연구소가 항의 시위를 벌인 끝에 그해 12월 23일에 철거되어 현재 목공실 창고 내에 있다.
- 아주 적극적인 친일파였으나 기회주의자였던 만큼 독립 이후에는 입을 싹 씻었다. 신념형 친일파였다기 보다는 그냥 자기 보신이 중요했던 모양.
- 이사장으로 있었던 광신학원의 광신중학교, 광신고등학교,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의 체육관 이름은 박흥식의 호인 유재를 딴 유재기념관이다.
- 서북 방언 구사자로 유명하다.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6화에선 그가 체포되는 장면이 짤막하게 나오는데, 배우는 미상이다.
- 1990년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신구가 연기했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71화 초반에 등장하는데, 배우 이중열이 연기했다. 김두한 일행이 그의 집에 쳐들어오자 친일 행위는 어쩔 수 없었다는둥 연신 살려달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김두한 일행이 당시 3,000만원 상당의 현금과 금괴를 '이승만 박사의 주도 하에 모으는 애국성금'(...)이라는 명목으로 털어가버리자 경찰을 부르라고 절규한다.# 이후 경찰청에서 반민족특별법이 생겨 친일파들을 처벌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애국성금을 낸 거라며 태세를 전환한다.
- 2004년 MBC 특별기획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성우 겸 배우 최병학이 맡았다. 참고로 작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실존인물을 거의 그대로 차용해 등장시킨 기업인이다. 야인시대랑 작가가 같음에도 전작에서 미안했는지 이번엔 작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철학 있는 기업인 식으로 많이 띄워줬는데, 문제는 박흥식이 어쨌든 친일자본가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너무 올려쳐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 2015년작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인 강인국의 모티브이다. 극중 강인국은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하는 앞잡이로 나오는데, 실제 박흥식도 조선비행기공업회사를 세워 비행기를 헌납한 적이 있다.
- 대체역사물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 애국회 에피소드의 메인 빌런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강산이 자신을 이시영의 조카라 밝힌 이후 자신을 포함 구 친일파 세력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라 보고 그를 암살하려 하지만 완벽히 실패하고 본인은 걷어차여 이빨이 다 빠진 상태로 이시영에게 즉결 처형당한다.
5. 가계도
- 박제현 / 妻 조성녀
- 1남 박창식 (1892 ~ 1911)
- 2남 박흥식 前 화신산업 사장 (1903 ~ 1994)
前妻 김낙선 (1905 ~ 1952) - 1녀 박병숙 前 화공회 이사장 / 夫 장병찬 초대 이천전기 사장 (1918 ~ 1986)
- 1남 장세창 파워맥스 회장
- 1남 박병석 제2대 흥한재단 및 광신학원 이사장 / 妻 정소영 제3대 흥한재단 및 광신학원 이사장
- 2녀 박영숙
- 4녀 박경숙
- 2남 박병찬 전 화신산업 전무
- 3녀 박혜숙
- 5녀 박봉숙 前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夫 전순재 前 연합해운 회장
後妻 계씨
後妻 한인하 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15 ~ 2010)
後妻 손길자
[1] 朴濟賢. 1877년(고종 14) 9월 14일 ~ 1915년 9월 14일. 1901년 5월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되었고, 1907년 4월 용강군 지방위원에 임명되었다.# 1911년 10월 용강공립보통학교 교사 수선비로 금 10엔을 기부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 1개를 수여받았다.# 이후 용강군참사를 지내다가 38세 생일이였던 1915년 9월 14일 사망했다.#[2]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유명한 이완용이 300만 원대의 자산가로 2위였으며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이자 남이섬 소유자인 민영휘가 6,000만 원의 자산가로 1위였다. 이 둘은 1930년대에 사망한 이들이니 1940년대가 된 후에는 박흥식의 순위가 높아졌을 법도 하다.[3] 3개월 만에 석방된 후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독점재벌로 군림했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박흥식의 몰락이 시작된다.[4] 조선인 최초의 근대건축가로 불리는 박길용이 설계한 기념비적 건물로서 그대로 존치하자는 의견도 소수 있었으나 당시는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등록문화재같은 제도도 없던 시절. 때마침 종로 도로 확장계획이 맞물려 1987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종로타워가 들어섰다.[5] 그는 2천석 부농의 자식이었다.[6] 현재 종로타워가 서 있는 자리.[7] 1905년에 안창호, 박은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하였다.[8] 참고로 이 건물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건물이었다.[9] 시흥군 안양리, 즉 지금의 안양시에 있었다.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짜리 대형 공장인데, 문제는 이게 조선총독부의 힘을 빌려 강제로 빼앗은 땅이었다.[10] 이후 해당 부지는 금성방직 안양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 쌍용이 대한농산(현 대농)에 매각했고, 1977년에 다시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인에게 매각된다. 현재는 평범한 주택단지로 변한 상태. 위치는 경기 안양시 안양 3동.[11] 사실 쌍용그룹이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섬유 산업이 주력이었다. 금성방직 외에도 안양 진흥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태평방직을 인수, 경영했었고 1970년에는 강원도 정선군에 생사(生絲)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12] 1948년 반민법이 제정되자 부인과 함께 미국비자를 발급받았다. 지금은 미국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대단히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외교관 이외에는 외국 구경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박흥식이 반민법 제정 후 비자를 발급받은 것은 신문에도 기사화될 정도였다.[13] 박흥식 체포는 특조위 제 3조사부에 그가 곧 도망칠 것이라는 제보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박흥식은 특조위 조사관 이덕근이 시경에서 차출해온 형사들과 4층 집무실로 들이닥치자 뒷문열고 비상구를 통해 화신 옆골목으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으로 빠져 도망치다가 체포되었다.[14] 현 LG그룹의 전신.[15] 대한전선, 대한방직, 대한제당의 모체.[16] 전 계명대 이사장 의양 정재호(1913 - 2005)가 세운 재벌그룹.[17] 대한유화의 모체.[18] 1950년대 들어서 미국은 핵무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대대적으로 외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종전 이후 이승만 정권도 경제발전을 위해선 원자력발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1956년 한미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공계 인재들의 미국 아르곤 연구소 연수, 실험용 원자로 도입,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설치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미국의 원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그야말로 돈과 사람을 쥐어짜서 원자력 도입에 집중한 것이다. 박흥식의 원전 건설 계획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직 기반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라서 유야무야 무산된다.[19] 이 회사는 훗날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으로 수백명의 사망자를 남긴 악명 높은 원진레이온이 된다. 원진레이온 사태 항목만 보지 말고 '원진레이온'으로 한번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해봐라. 얼마나 흉악무도한 회사였는지.[20] 1961년 5.16 쿠데타 발생 당시 박정희를 가장 먼저 찾아간 기업가가 박흥식이었다.[21] 2006년 동원투자개발(현 싸이칸홀딩스)에 매각.[22] 종로구 가회동 177 - 1. 박흥식은 1931년부터 1988년까지 57년간 거주했으나, 자금난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이후 이 저택에는 무역업자인 박우준이 낙찰받아 거주하다가, 2000년 2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매입하여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23] 부채와 차입을 지양하는 스타일은 후대에 등장한 재일교포 출신 기업가인 신격호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신격호와 롯데의 경우 사업 분야 자체가 식품과 유통의 비중이 높고 부동산 자산의 비중이 적지 않아서 차입 자체가 중공업 등 다른 분야에 비해 많이 필요하지 않았던게 한 몫 했다. 이와 정반대의 스타일이 기술은 사서 쓰면 된다는 말까지 했던 대우의 김우중인데 이쪽은 차입으로 흥해서 차입으로 망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차입과 대출의 규모가 상당했다.[24] 냉소적으로 보면 자기 것은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탐욕스러움일 수도 있다.[25] 화신그룹의 '화신 50년사'에는, 박흥식이 우가키 총독을 불광동 숫돌고개까지 데리고 가서 설명을 했더니 우가키가 그 원대한 구상에 탄복하고 승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남한에 지하철이 최초로 건설된게 1974년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일본과 북한이 더 이르기는 했지만 1930년대 일본은 지하철이 도쿄에 긴자선, 오사카에 미도스지선이 전부였고, 북한은 1973년이다. 사실 도심까지 철도를 건설하고, 연선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구상은 한큐 전철의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조를 필두로, 고토 케이타의 도큐 전철을 비롯한 일본 사철에서 먼저 사용했던 전략이다. 그런데 동력으로 움직이는 탈것 자체가 희귀하던 1930년대 조선에, 지상 전철도 아닌, 일본에도 흔치 않았던 지하철을, 그것도 민간 자본으로 건설한다는 구상은 수십년을 앞서간 발상이다.[26] 계획의 실행을 동양척식회사의 자회사를 설립하여 진행토록 하고 박흥식은 부사장으로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라는 제안을 하였으나 박흥식이 거절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