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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EB8><colcolor=#ffffff>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 朴承稷[1] | Park Seung-jik | |
출생 | 1864년 7월 25일 |
경기도 광주목 돌마면 이매리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 |
사망 | 1950년 12월 20일 (향년 86세) |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 (現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둔전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밀양 박씨[2] |
종교 | 천주교[3] |
자 | 사선(士善) |
호 | 매헌(梅軒)[4] |
부모 | 아버지 박문회, 어머니 김씨[5] |
형제자매 | 형 박승완 |
배우자 | 정정숙 |
자녀 | 장남 박두병 차남 박우병 삼남 박기병 사남 박규병 그 외 슬하 5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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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기업인이자 두산그룹의 시초가 된 두산상회의 창립자. 경술국치 전인 1900년대부터 일제패망 직전인 1940년대까지 일관되게 친일 활동을 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2. 일생
1864년 경기도 광주목 돌마면 이매리(現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에서 아버지 박문회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면서 조모 밑에서 자랐고,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7세 되던 1881년에 땅 주인 민영완이 해남군수로 부임하자 책실(비서)이 되어 공무를 보면서 행상 등을 하여 돈 3백 냥을 벌어 형 박승완에게 보냈고, 이듬해부터 송파상에서 포목행상을 시작해 사업 커리어를 시작했다. 1884년 해남으로 돌아와 형과 함께 장사를 하다가 1886년부터 단독으로 포목상을 맡아 마판상을 시작했다. 처음엔 송파장에서 직접 사서 말에 싣고 내륙을 돌며 팔다가, 그 후엔 제물포에서 수입 면직물을 사서 팔기 시작했다.위와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1889년 한성 배오개로 사업 터전을 옮겼고, 1896년 박승직상점을 차리고 종로4가 15번지로 옮기고 일본과 영국 등지에서 수입한 직물을 팔아왔으며, 1900년 성진감리사, 1905년 중추원 의관 등 잠깐 관직에 외도했으나 1905년 김종한, 박기양, 신태휴, 김한규, 홍충현, 최인성 등과 함께 '광장주식회사' 설립에 동참해 근대 상설시장 '광장시장'을 설립코자 했다. 1906년 창신사, 1907년 공익사 등 합명회사 창설에 참여하는 한편, 1906년 한성상공회의소 설립에도 참여했다. 1910년엔 공익사 일부 지분을 일본 이토추합명회사에게 넘긴 후 1914년 조-일 합자회사로 개편했고, 1915년 '박가분 본포'를 세우고 연분 화장품 '박가분'을 만들어 1937년까지 생산했다.
1917년 동대문시장에 '공신상회'를 세워 곡물 판매 및 정미업을 개시했고, 1925년 박승직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해서 사세 확장을 개시했다. 본업 외에도 1920년 동양염직 취체역(이사), 1921년 경성곡물신탁 감사역, 1931년 중앙일보사 취체역 등을 각각 맡았고, 1933년 쇼와기린맥주 설립 때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부 주식을 지녔다. 1934년 경성상공협회 회장으로도 일했다. 심지어 1919년 고종 국장과 1926년 순종 국장 때 상인봉도단으로 참여했고, 1927년 월남 이상재 사회장 때 준비위원이기도 했다. 1940년 창씨개명 후 성을 따서 '미키(三木)상사'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1945년 8.15 해방 후 박승직상점을 닫았고, 쇼와기린맥주 자치위원회로부터 지배인 제의도 받았으나 고령으로 인해 장남 박두병에게 지배인 자리를 맡겼고,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이듬해 박승직상점을 '두산상회'로 바꾼 후 1950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에서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친일 행적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을 때, 창업주 박승직은 이등박문을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총 41명) 및 위원(총 100명)으로 참여했다. 이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가 주최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한 것으로,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 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됐고 이듬해 유길준이 주도해 한성부민회로 재조직됐다고 기록돼 있다.(이용창,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참조).박승직의 친일 행적은 일제 치하 내내 계속됐는데 1919년에는 박영효, 최진 등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로 참여했고 1922년에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회 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내선융화(內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박승직은 또한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됐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마련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다. 박승직은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승직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 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됐다’며 환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박승직이 같은 해 8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됐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총독부의 종용 하에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이화여대의 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이듬해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다. 박승직은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개편된 뒤인 1940년 10월에도 평의원을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1년 12월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했고 1943년에도 두차례에 걸쳐 방공감시대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