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1 23:58:06

다이쇼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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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mperial_Seal_of_Japan.svg.png 일본 제국 제123대 천황
[ruby(大, ruby=たい)][ruby(正, ruby=しょう)][ruby(天, ruby=てん)][ruby(皇, ruby=のう)]
다이쇼 덴노
파일:다이쇼 덴노.png
출생 1879년 8월 31일
일본 제국 도쿄시 아카사카구 동궁어소
사망 1926년 12월 25일 (47세)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미우라군 하야마정
하야마 어용저(葉山御用邸)
능묘 일본국 도쿄도 하치오지시 다마릉 (多摩陵)
재위 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14년 152일)
즉위식 1915년 11월 10일 (교토고쇼)
장례 1927년 2월 8일 (도쿄 고쿄)
연호 [ruby(大, ruby=たい)][ruby(正, ruby=しょう)](다이쇼)
친필 서명 파일:647px-Taisho_shomei-svgver.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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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嘉, ruby=よし)][ruby(仁, ruby=ひと)](요시히토)
[[칭호#s-3|어칭호]] [ruby(明宮, ruby=はるのみや)](하루노미야)
부모 부황 메이지 덴노, 모친 야나기하라 나루코[1]
형제 5남 10녀 중 다섯째
배우자 데이메이 황후
자녀 4남
쇼와 덴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학력 가쿠슈인 중퇴
십이지 토끼띠 (기묘년) }}}}}}
1. 개요2. 유년 시절3. 결혼 생활4. 재위 기간5. 개인사6. 가족관계7. 기타

1. 개요

일본의 제123대 천황. 유년 시절 사용한 궁호는 하루노미야(明宮)이며 휘는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嘉仁)이다.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는 다이쇼(大正)이다. 연호 다이쇼는 <주역(周易)> 단전(彖傳) 임괘(臨卦)에 나오는 "대형이정 천지도야(亨以 天之道也, "바른 것으로 크게 형통하니 하늘의 도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다이쇼 덴노가 재위했던 시기를 일명 다이쇼 시대라 부른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고유명사로도 그의 연호가 알려져 있다.

2. 유년 시절

메이지 덴노의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소생으로, 정실인 쇼켄 황후(하루코)에게 자녀가 없었고, 다른 측실 소생의 아들 4명마저 줄줄이 사망하여,[2] 사실상 메이지 덴노의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서자임에도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습진을 앓은 데다가 뇌막염까지 걸릴 정도로 병약했으나 기적적으로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까지 건강이 안 좋았다.

1880년 11월 1일부터 황실의 전통에 따라 부모와 떨어져서 메이지 덴노의 외조부인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동안 친부인 메이지 덴노는 요시히토의 양육에 거의 간섭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1885년 3월 다시 황거로 돌아왔으나, 역시 메이지 덴노는 자식들을 거의 보지 않은 데다가,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도 만나질 못했으며, 형제들도 대부분 어릴 때 죽고 없어서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1887년 메이지 덴노의 정실 부인인 하루코 황후의 정식 양자가 되었고, 황실 예법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어릴 때 생모를 만나지 못해서 하루코 황후가 생모인 줄 알고 자랐으며 몇몇 사람들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해도 좀처럼 믿지 않으려고 했다고 알려진다. 1887년 9월엔 학습원에 입학했으나[3], 학습원의 엄격한 규칙에 적응하지 못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백일해에 걸려 휴학하고 1889년부턴 아타미나 하코네에서 요양하며 건강 회복에 힘 썼다. 동년 11월엔 황실전범의 제정과 동시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학습원에서의 성적이 매우 좋지 못했고[4] 1894년에 결국 중퇴했다.

중퇴한 이후 아카사카 별궁에서 개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한문, 국학(유교학)을 배웠다. 이즈음 모토오리 도요카이로부터 국서와 한시를 배웠는데, 문학에는 상당히 흥미를 보였으며 와카와 한시를 취미로 즐겨 많은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 교습에서도 요시히토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메이지 덴노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시히토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는 인물로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5]를 임명하였다. 이후 요시히토는 다케히토로부터 학문을 배우게 된다. 성적은 중하-하상 정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1889년 고작 10살의 나이에 일본 육군 '소위'로 임명되었다. 15살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히로시마 대본영에 참여했고, 16살에 '대위'로 진급한다. 18살에는 귀족원의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러한 것들은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다이쇼 덴노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데다가 또래와의 교류도 거의 없이 자랐으며, 9살 때부터 육군 중장인 소가 스케노리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엄격한 규칙 아래 생활해야 했다. 이래서야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 당연히 어리고 병약한데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6] 다이쇼 덴노가 이러한 생활을 버틸 리가 없었고, 결국 그에 대한 대부분의 교육 계획은 폐기되었다.

3. 결혼 생활

할머니인 에이쇼 황태후(아사코)가 1897년 사망하여 성인식은 1898년에 치뤄졌다. 건강이 워낙 좋지 못해서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1900년 5월 10일, 황태자비로 간택된 고셋케구조 사다코와 결혼했다.

황실은 황태자를 최대한 빨리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 덕분에 다이쇼 덴노는 답답한 궁중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결혼 생활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메이지 덴노와는 달리 을 두지 않았는데, 건강한 사다코 황태자비가 아들을 4명이나 낳아서 첩을 둘 필요도 없었다. 다만 막내 다카히토는 늦둥이라서 즉위 당시 사다코 황후임신 상태라 즉위 이후에 태어났다.

이 무렵 그는 좀 병약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대단히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유년 시절이나 천황으로서 요시히토가 '모자란 인물'로 취급된 것과 대조되게 하라 다카시는 이 시절에 다이쇼 덴노에 대해 인간미 넘치는 인물상으로 묘사했다. 독일 제국 출신의 의사였던 에르빈 폰 벨츠 또한 이 당시 요시히토에 대해 "유럽풍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며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을 회복한 그는 메이지 덴노를 대신해 12년간 9차례에 걸쳐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홋카이도를 포함한 전국을 순행했으며, 그의 교육을 담당했던 다케히토와 함께 순행길에 오르면서 한시 짓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1907년 그는 대한제국을 방문해 순종황제와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을 만났는데, 이 때 이은을 마음에 들어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7] 이후 요시히토는 구미권을 방문하길 희망했으나 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4. 재위 기간

파일:external/www.shiryodo.jp/aa0606-75.jpg

15년에 불과한 시기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가 - 시베리아 출병 - 쌀 소동 - 워싱턴 회의 - 관동 대지진 등 국내외 굵직한 사건사고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우리로서는 경술국치(1910.08.29.) 직후 일제강점기 무단통치 - 3.1 운동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회유공작이자 친일 조선인을 양성하고자 한다.)를 겪은 기간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번벌(藩閥)[8] 정치에서 벗어나 정당 세력이 활성화되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노동쟁의가 격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를 가리켜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르나, 이 시기의 민주주의는 군부의 폭주로 무너지고 두려운 군국주의 군부 파시즘정권(추축국/일본-나치독일-이탈리아)으로 들어서게 된다.

1912년, 메이지 덴노가 훙거(薨去)하자 연호를 '다이쇼'로 바꾸고 즉위한다. 1915년 교토고쇼에서 대례가 거행되었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이온지 내각이 실각되고 사이온지 긴모치가쓰라 다로를 다이쇼 덴노에게 후임으로 추천한다. 그대로 가쓰라 타로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다. 가쓰라는 비입헌적인 입장을 취하고 긴모치와 하라 다카시 중심의 입헌 정우회와 제휴를 거부하며 대립한다. 이에 입헌정우회는 국민당과 함께 반가쓰라 족벌타파', '헌정옹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쓰라 내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가쓰라 다로는 이에 '절대적인 천황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타계하려 했다. 이에 다이쇼 덴노는 사이온지에게 "정쟁을 중지하라"는 칙허를 내렸다.

그러나 정당 세력도 대중들도 이러한 천황의 명령을 무시했다. 심지어 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9]가 의회 질의 도중 가쓰라와 그의 관료 동지들을 가리켜 "천황을 방어벽 삼아 숨어있다"고 비난했다. 이 연설로 인해 대중이 크게 동조하여,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난다. 결국 가쓰라 내각은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퇴진했으며(다이쇼 정변), 절대적이어야만 했던 천황의 명령이 무시당하게 되었다. 이 일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이 된다.

이런 일은 메이지 시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로, 이 사건으로 다이쇼 덴노가 즉위하자마자 천황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어버린다. 다이쇼 덴노는 메이지 덴노와 달리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재위 기간에 생긴 그의 별명은 존재감이 없는 천황(影の薄い天皇)으로 정치인들은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

또한 천황이 된 이후 다이쇼 덴노의 건강은 공무로 인해 급속도로 악화된다.[10] 워낙 빡빡한 스케줄로 조금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답답한 궁중 생활과 엄청난 공무량으로 극도로 바쁜 생활을 강요당했다.

1913년 그는 재위 1년만에 폐렴에 걸려 현재의 닛코 다모자와 고요테 기념공원에서 요양하게 되었고, 완치까지 1개월이 걸렸다. 이후 별장에서 요트, 승마, 한시 짓기를 즐기며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국제정세가 급변했고, 이로 인해 공무량이 급격히 늘어나, 1915년부턴 말을 제대로 못하거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1916년엔 다이쇼 덴노의 측근인 오쿠마 시게노부가토 다카아키 입헌동지회 총재를 후임으로 추천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추천, 원로들이 야마가타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또다시 천황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게다가 '천황기관설'이란 주장까지 나오는 등, 갈수록 천황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다.

이러한 분위기와 공무로 받은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1917년부턴 거의 공무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고 1918년부턴 보행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1919년부턴 뇌질환으로 식사도 못하고 칙어를 읽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로 인해 1921년부터 야마가타를 중심으로 섭정 논의가 활발해지고 동년 10월에 궁내성에선 천황이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다이쇼 덴노는 섭정 논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나[11] 더 이상 집무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어, 20살이 된 장남 히로히토가 섭정을 맡아 천황 직무를 권한대행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병약한 천황"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된다.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정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요양 생활을 했고, 1925년 12월엔 아내 데이메이 황후도 경악할 정도로 심하게 경직·발작했고, 이후 4개월 동안 누워만 있었다. 1926년 5월에는 건강을 다소 회복하여 보행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지만, 3일만에 다시 발작하여 병상에 드러누웠고 하야마에서 요양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병세가 안정됐으나 9월에 재발작한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2월 25일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손을 잡은 채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때 데이메이 황후가 배려하여, 다이쇼 덴노가 요양 중이던 하야마의 별장으로 나루코가 찾아갈 수 있었다.

다이쇼 덴노의 유해는 도쿄 서쪽 근교의 하치오지 시에 있는 타마 어릉에 안치되었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공교롭게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능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5. 개인사

  • 생각한 걸 바로 입밖으로 내뱉는 버릇이 있었다. 아스퍼거 증후군? 지금에서야 솔직하다고 평가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시 대신들에겐 모자라다는 이미지를 남겼다. 때문에 메이지 덴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으로부터 항상 혼나야 했으나, 결국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했다.[12]
  • 호기심과 질문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보거나 만지고 끊임없이 "이게 뭐야?"라고 물어보곤 했다.
  • 보통 일본 황실와카를 즐긴 것과 달리 한시를 좋아해서 어린 시절부터 평생 여러 한시들을 썼다고 하는데 무려 1,367수나 되는 한시를 창작했으며 문학적 가치보다는 정경 묘사가 충실한 편이다.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메이지 덴노보다 낫다는 평이 있다.
  • 규칙을 매우 싫어했으며 신분에 얽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탈탈한 성격으로 황태자 시절 교토제국대학 부속 병원을 방문했는데 환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내어 환자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나 후쿠오카 현 지사와의 대화 중 담배를 권한 일화, 구마모토에서 학생들의 수영을 구경하던 중 물이 차가운 걸 확인하고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 다이쇼 덴노를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 대한 호감이나 친근감을 드러냈으며, 다이쇼 덴노 역시 신분에 관계없이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는 극도로 대비되는 부분.[13] 또 행계 중 정해진 일정과 코스를 무시하고 골목길로 갈 것을 명령하거나 아침에 숙소를 벗어나 혼자 산책을 하여 아랫사람들을 매우 곤란하게 하는 등, 경호라는 의미에서는 피곤한 사람이었다.
  • 영친왕과 대화해보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덴노 시절까지 꾸준이 한국어를 공부했는데, 죽기 얼마 전 영친왕이 자신과 대면할 당시 한국어로 말을 걸었으나 병으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였기에 한국어 같지 않은 한국어를 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영친왕 이은과는 이은이 인질로 일본에 있던 시절에도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한제국 황족들과 일본 황족들과의 결혼 당시, 다이쇼 덴노와 사다코 황후 내외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영친왕의 신붓감으로 정하고,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을 불러서 직접 명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모리마사 왕은 "내 큰딸 마사코가 황태자비 되는 줄 알고 기대했더니 그런 폭탄을 떠맡아야 하냐"고 멘붕했다고 한다.
  • 애연가로 황태자 시절부터 담배를 즐겼으며 다양한 종류의 담배를 피웠다. 오래 못 산 건 이것도 있었을 듯.
  • 정략결혼이었음에도 아내인 데이메이 황후와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아들이 넷이라서 후궁이 필요없기도 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황실에서 일부일처제는 법적으로 명시되지 않아서 후궁을 충분히 둘 수 있었음에도 하나도 두지 않았다. 사다코 황후 역시 다이쇼 덴노가 요양 생활을 할 때 관례를 무시하고 직접 그를 돌보고, 그가 사망하자 영정 앞에서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장남 히로히토도 애처가였고, 후궁 논의[14]가 있을 당시에 모두 거절했다.
  • 아버지로서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후에도 아버지와 거의 대면하지 못하는 등 쓸쓸히 자라서인지 직접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황태자 시절 즉위 전까지 직접 자식들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으며, 황손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 교육시키던 전통을 싫어해서 4남인 다카히토는 끝까지 부부가 키웠다. 자식들을 거의 보지 않았던 메이지 덴노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 기행으로 유명하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던지 카펫 위에서 신발을 양 손에 들고 맨 발로 걸어다닌다는 소문이 유명한데, 대부분이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여 다이쇼 덴노의 병약한 이미지 때문에 생긴 헛소문일수도 있다.
  • 다이쇼 덴노는 병약하고 소극적이라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길 꺼렸다. 그래서 한 번은 한 번이라도 국회로 행차하여 군주의 존재감을 나타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이쇼 덴노는 갑자기 공문서를 돌돌 말아 김밥 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걸 망원경이라고 국회 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로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와달라는 요청도 다시는 없었다고 한다.[15]
  • 다만 이 사건을 다룬 기사들의 내용 중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고 1950년대부터 갑자기 퍼진 소문이라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다이쇼 치세를 보면 알다시피 그는 군부의 폭주로 왕의 권위가 추락하고 자기 명령이 무시되곤 했으며, 원래는 공무를 보고 싶었지만 몸이 안 좋아서 막 20살이 된 아들 히로히토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헛소문일 가능성도 높다.

6. 가족관계

측실(후궁)은 없으며,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와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낳았다.[16]
  • 차남 아츠노미야 야스히토(淳宮雍仁) 친왕(1902-1953) : 만 20세가 되던 1922년, 지치부노미야(秩父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1928년, 아이즈 번의 마지막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의 손녀 세츠코(勢津子)[17]와 결혼했다. 세츠코 비는 한 차례 임신했으나 2.26 사건 당시 유산되었고, 이후 자녀를 낳지 못했다.

7. 기타

게임/애니 사쿠라 대전의 시대적 배경 다이쇼는 한자 하나만 바꾸어 太正 [일본어 발음으로는 같은 타(다)이쇼]시대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었으나, '하이카라 씨가 간다'는 다이쇼 중기, '다이쇼 야구 소녀'는 다이쇼 후기로 배경은 현실 역사의 이 시대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own_Prince_Yoshihito_and_Crown_Prince_Lee_Eun_1907.jpg
다이쇼 덴노가 즉위하기 전 황태자 시절(1907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위는 방한 당시의 사진. 왼쪽이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훗날의 다이쇼 덴노), 가운데는 당시 10살이던 한국 황태자 이은, 오른쪽은 일본의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威仁).

당시 그의 방한은 이토 히로부미가 밀어붙여서 성사된 것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 어쨌든 역사상 일본 황태자의 해외 방문은 이게 처음이며[21] 그 후 지금까지 덴노나 황태자의 방한은 아직 성사된 바 없다. 다만 쇼와 덴노아키히토 덴노가 방한하려고 몇 번 추진하기는 했고, 나루히토 덴노가 황태자 시절에도 방한이 추진된 적이 있다.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일화가 약간 있다. 황태자 이은을 마음에 들어하여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내용이 일본의 교수 하라 다케시(原武史)의 저서 『다이쇼 덴노(大正天皇)』에 언급된 바 있다.
요시히토(다이쇼 덴노)는, 번역관에게 '때때로 한국의 태자 (이은=영친왕) 를 만나니까 조선어를 익혀보고 싶은데, 책 같은 것은 없는가. 있다면 시종에게 전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한 이외에도 이은을 만날 때마다 '오늘 이야기한 문장을 조선의 언문(한글)으로 써서, 거기에 발음과 번역문을 달아서 제출하도록' 이라고 (번역관에게) 명했다고 한다. 요시히토는 덴노가 되어서도 한국어 학습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시종에게 때때로 한국어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시종 구로다 나가히로(黒田長敬)는 다이쇼 덴노의 사망 직후 '언젠가의 일이다. 무언가를 아뢰었더니 미소를 띄우시면서 묘한 말씀을 하셨다. 이상하다고 여겨 생각해 보니 그건 한국어였고, 앗 하고 몹시 놀랐다'고 진술하고 있다.

윤덕영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강권으로 인해 1917년 부황 고종을 대신해[22] 일본을 방문했던 순종은 요시히토를 자신의 군주처럼 여기는 듯이 대하자[23] 눈물을 보일 정도로 엄청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순종황제와 다이쇼 덴노는 둘다 병약한 체질이었으며, 군주로서의 권위가 미약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일제강점기, 백두산의 최고봉인 병사봉(兵使峰)은 그의 연호를 따서 대정봉(大正峰)으로 불린 흑역사가 있다.[24] 병사봉의 수난은 이후 북한 정권하에서도 계속되어, 병마절도사의 약칭인 '병사(兵使)'를 '병사(兵士)'로 오해한 무식왕 김정일에 의해 병사봉은 '장군봉'으로 개칭되고 만다.

다소 슬픈 이야기지만, 이 다이쇼 연호가 쇼와 연호로 바뀐 줄도 모르고 1927년까지도 쓰인 일이 있었다. 료에이마루 조난 사건 항목 참조.

2011년은 다이쇼 100년이 되는 해이다. 백년기념 사이트


[1] 메이지 덴노의 측실[2] 메이지 덴노는 원래 5남 10녀를 낳았는데, 그 중 1남 4녀만 살아남았다.[3] 이 때 요시히토는 군용 가방을 매고 등교했는데, 이게 현재의 란도셀의 유래라는 얘기가 있다.[4] 독서와 승마에 능했으나 이해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모두 떨어져 이수계 교과를 힘들어했다고 한다.[5]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당주. 다이쇼 덴노의 셋째며느리인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의 외할아버지이다.[6] 그는 집중력이 떨어진 데다가 침착함도 없었다고 한다. 또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바로 말하는 버릇도 있어서 모자라단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7] 당시 대한제국은 형식적으로는 국가가 남아 있었으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을사늑약으로 박탈하고 심지어 고종황제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시켜 반불구 국가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8]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츠마, 쵸슈 등의 출신자들이 형성한 파벌[9] 그의 딸 소마 유키카는 덕혜옹주가쿠슈인 동창이기도 하다.[10] 1921년에 20살이 된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섭정을 해야 했는데,(조선식으로는 대리청정) 덴노가 된 뒤의 히로히토의 증언에 따르면 황태자 시절의 요시히토는 매우 쾌활하고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었지만, 즉위한 후 온갖 제약에 속박되는 생활을 하게 되자 이로 인해 괴로워했다고 한다.[11] 다이쇼 덴노가 아직 괜찮다고 말한 이야기가 일본 인터넷에 상당히 있는데, 사실이라면 병세를 회복하고 계속 집무를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즉위한 지 겨우 6년만에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하고 그 기간도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못한 걸 생각한다면, 불만을 표할 만하다.[12] 여담으로 데이메이 황후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싫어했다고 한다.[13] 하지만 성격이 이랬기 때문에 갑갑한 궁중 생활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14] 아내 고준 황후가 오랫동안 아들을 못 낳아서.[15] 다이쇼 덴노가 멍청해서 그랬건 노리고 그랬건 간에, 다이쇼 덴노의 희망대로 다시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16] 일본 민법에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것은 메이지 31년(1898년)이고, 일본 황실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황실전범에 측실(후궁) 제도에 대한 특별규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법을 준용하여 일본 황실의 측실 제도도 이 때 폐지된 것으로 본다. 다이쇼 덴노는 황태자 시절인 메이지 33년(1900년) 쿠죠 사다코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전부로, 이후 일본 황실에서는 더 이상 측실을 두지 않았다. 다만 히로히토는 아내인 나가코 황후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후궁을 들이라 많이 권했지만 애처가라 모두 거절했고, 이후에 아키히토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정서적으로도 완전히 없어진다.[17]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 본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와 한자가 같았기 때문에 개명했다. 勢는 황실과 인연이 있는 땅인 이세(伊勢)에서, 津은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근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따왔다고 한다. 데이메이 황후가 가장 귀여워한 며느리이기도 하다.[18] 패전 후 신적강하로 신분과 재산을 잃은 후,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19]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히로히토 덴노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한편 스게마사는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이기도 하다.[20] 친손녀 5명에 외손자까지 따지면 손자, 손녀, 증손자까지 많다.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이을 친손자가 없어서 그렇지. 다카히토 친왕의 손녀들에 대한 정보는 여왕 항목을 참조.[21] 일본 천황의 해외 방문은 쇼와 덴노가 처음이다. 순서대로 미국, 영국, 대만(사실 중국에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서 무산되고 대만을 방문함.), 네덜란드 총 4개 나라였다. 이후 1992년에 아키히토 덴노가 중국을 방문했다.[22] 고종황제의 사망은 1919년이라서 이때까지는 노구라도 살아있었다.[23] 순종이 요시히토와 대면했을 때, 순종은 육군 대장 정복을 입고 있었고 요시히토는 육군 대원수 정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24] 이러한 덴노 신격화, 우상화는 메이지 덴노 때부터 패전을 맞이할 때까지 꾸준하게 유지된 정책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