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22:41:56

야나기하라 나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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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친정4.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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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柳原愛子, 1859년 6월 26일 ~ 1943년 10월 16일 (향년 84세)

메이지 덴노의 측실(후궁)이자 다이쇼 덴노의 생모. 데이메이 황후의 친시어머니이자, 쇼와 덴노의 친할머니이다.

2. 생애

일본의 공경 중 4번째 서열[1]인 메이케(名家) 중에서도 막부 말 13메이케라 불리던 가문 중 하나인 후지와라(藤原) 홋케(北家) 히노류의 야나기하라 가문 출신이다. 우린케와 메이케는 다이진(大臣)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태정관에서 바로 그 다음가는 다이나곤(大納言)까지는 오를 수 있기에, 헤이안 시대로 따지면 다이진의 딸이 임명되는 뇨우고(女御) 다음가는 코우이(更衣)는 될 수 있는 신분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서열 중에서도 4번째인 자작이었지만, 흔히들 떠올리는 하급 귀족으로서의 자작이 아니라 근대 이전만 해도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던 가문이었다. 조선시대에 당상관이 정3품에서 상하로 나눈 것과 전근대 시절 일본의 관위가 30계급으로 나누어진 걸 생각하면 진짜로 고위직이었다. 거기다 역사도 있는 만큼, 말 그대로 나름 이름 있는 명가였다는 소리다.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는 허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대신 메이지 덴노는 여러 측실들로부터 5남 10녀를 얻었으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주로 뇌막염으로 일찍 죽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1남 4녀뿐으로,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생의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과 소노 사치코 소생의 내친왕(공주)[2]들뿐이었다. 나루코도 2남 1녀를 낳았으나 요시히토 친왕을 제외하곤 모두 요절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시히토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고, 훗날 다이쇼 덴노로 즉위했다.

그러나 나루코는 측실이었고, 측실 가문의 발호를 우려한 황실의 조치에 따라[3] 친아들 다이쇼 덴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이쇼 덴노는 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가 친어머니인 줄 알았으나,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야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이쇼 덴노의 임종 즈음해서야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가 배려하여, 다이쇼 덴노가 요양 중이던 하야마의 별장으로 나루코가 찾아가 비로소 상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이쇼 덴노는 친어머니 나루코의 손을 잡은 채로 사망했다.

이후 말년에는 도쿄 시나노마치에서 황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다가, 1943년(쇼와 18년) 10월 16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평소에 와카에 뛰어났다고 한다.[4]

3. 친정

나루코의 오빠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 백작의 서녀 야나기하라 뱌쿠렌은 '다이쇼 시대 3대 미인'이자 문학가로서,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야나기하라 사키미쓰의 또다른 딸인 노부코(信子)는 고모 나루코의 막내 손자인 다카히토 친왕의 아내 유리코 비의 외할머니이다.

4. 자녀



[1] 고셋케(五攝家), 세이가케(清華家), 다이진케(大臣家) 다음이자 우린케(羽林家)와 동격[2] 일본 황실에서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다만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의 경우 친왕/왕.[3] 나루코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고, 일본 황실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에서도, 자기 친자식이라도 후궁은 왕이 될 아들을 직접 키우지 못하고 정실의 양자가 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4] 메이지 덴노의 정실인 쇼켄 황후 역시 와카에 뛰어났다.[5] 메이지 덴노에게는 2녀[6] 메이지 덴노에게는 2남[7] 메이지 덴노에게는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