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2 01:29:41

대리청정

1. 개요

대리청정()은 군주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태자, 태제, 태손 같은 후계자가 군주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으로, 섭정의 하위 개념이다. 이때 대리를 하는 태자, 태제, 태손을 소조(小朝), 군주를 대조(大朝)라 칭하여 구분했다. 현재의 대통령 권한대행과 비슷하지만 권한대행은 계승권이 없다는 점에서 군주국의 대리청정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군주의 건강이 위중해서 업무를 볼 수 없는 경우에 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이 후계자나 신하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써 먹었다. 예를 들어 대리청정 선언을 신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대리청정에 찬성하는 신하들이 누군지 눈여겨 봐 놓았다가 나중에 "너, 내가 왕 그만한다니까 좋다고 박수치더라?"라며 마구 갈구어 불충을 명분으로 파직시키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심지어는 처형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일례로 태종은 18년간 재위했으면서도 재위한 지 6년 만에 뜬금없이 세자 이제에게 선위하겠다고 몇 번씩이나 나서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한 적이 있다. 태종은 신하가 수상하다 싶으면 바로 철퇴를 내릴 정도로 왕권을 세우는데 집착한 왕이었가에, 그 모습을 본 신하들 입장에서는 "내가 왕 노릇 하기가 버거운데 말이지..."하는 제스쳐에 "아니옵니다 전하!!"라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태종은 총 세번이나 대리청정 쇼를 한 뒤에야 진짜 상왕으로 물러났다.

왕권이 약하기로 유명했던 경종도 대리청정 선언으로 함정을 파서 나라를 쥐고 흔들던 노론을 한방에 척결해버릴 수 있었다.(신축환국) 노론도 바보가 아니라 처음에는 대리청정을 반대했지만 경종이 계속 끈질기게 대리청정을 선언하자 "혹시 진심인가?" 하고 혹해 떡밥을 물었고, 그 순간 경종은 소론 신하들이 눈물로 간청하니 대리청정을 물러야겠다면서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해 버린다(...)

이런 속셈이 있기 때문에 왕이 대리청정을 지시하면 신하들은 이게 진짜 승계목적인지 충성심 시험인지 알 수 없으니 안전빵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고 차라리 날 죽여라!고 저항하며 명령을 받들려하지 않았다. 세종 때도 거의 완벽한 정통 후계자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1] 신하들이 지독하게 반대하여 세종이 "지금 내가 내 몸 건사하기 급급하다 이놈들아! 날 죽일셈이냐?"라고 거의 애원어린 일갈을 하고 나서야 겨우 관철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도 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를 초월해서 신하들은 비를 맞으며 돌바닥을 머리로 두드려 피를 철철 흘리며 반대했지만 영조가 "이러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협박하여 겨우 물러났다.

이 때문인지 조선의 경우 제대로 된 대리청정은 문종, 정조, 효명세자처럼 정말 드물었고[2] 사실상 후계자 교육과 왕위승계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는 문종 하나 말고는 없었다.[3] 정조는 대리청정 3개월 만에 영조가 승하하는 바람에 제대로 해보지 못했고, 반대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자체는 아버지 순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잘 했으나 정작 본인이 3년 만에 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즉위하지 못했다.

그런데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킬 때는 친 세자파였던 소론은 반대하고, 친 연잉군파이던 노론은 쌍수들어 환영했다.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이 숙종의 건강이 워낙 안좋아진 것도 있지만 장희빈 아들에다가 몸이 약한 경종을 숙종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여 노론과 의논하여 트집잡아 폐세자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강하다.[4] 또 훗날 효명세자에게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종사의 무궁한 복입니다."라고 쌍수들어 환영했다. 이건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 반대하다가 끔살당해서 생긴 학습효과라는 해석이 있다. 무능한 임금을 자처하면서까지 여러번 양위 선언을 시도했던 순조의 행적까지 고려하면, 순조 본인은 그닥 권력욕이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며, 스트레스 받으면서 왕 노릇하기 보단 적당할 때 아들한테 양위하고 은퇴해서 쉬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리청정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뒤 순조가 효명세자를 크게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것을 보면 더욱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대리청정의 예를 살펴보면 대리청정이 성공하기 위해선 군주가 확실히 후계자에게 전권에 기꺼이 내줄 마음이 있어야 하며 서로간 사이가 매우 좋아야 하고 후계자의 정치력이 성숙한 상태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제군주제에서 군주의 권력을 나누어주기 위해선 그만한 신뢰가 필요하단 이야기일 것이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훈육과 기대치 때문에 부자간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대리청정 체제로 간 뒤에도 대부분의 정무를 영조 본인이 처리했기에 아무리 오래했어도 의미는 없다. 사실상 대리청정 선언 역시 당시 분열된 정부의 당파싸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영조의 정치책략 중 하나라고 봐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용당한거나 마찬가지인 사도세자의 스트레스는 장난 아니었을 것. 심지어 영조는 태종이 했던 선위 파동까지 했다.

현대의 군주국들의 군주는 이런 대리청정이 필요한 상태가 되기 전에 아예 후계자에게 미리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건강 상태가 좋아지고 평균 수명 자체도 길어지면서, 선왕이 지나치게 오래 살게 되어 후계자도 덩달아 너무 나이가 많아지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즉 굳이 대리청정을 해야 할 정도로 계속 군주의 자리에 남아 있느니 일찍 퇴위하는게 더 낫다는 것 다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처럼 현대판 대리청정도 존재하기는 한다.

2. 사례

괄호는 대리청정을 한 기간이다.

2.1. 중국사

2.2. 한국사

2.2.1.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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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군주 대리청정 · 수렴청정 및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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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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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리나 양위는 왕이 마음먹은대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본디 왕이란 즉위해서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이 원칙이며 단지 왕이 정사를 돌볼 수 없을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대리나 양위라는 선택지를 꺼내드는, 어떻게 보면 특수 상황에서나 꺼내들 수 있는 카드다. 태종, 세종이 이 사례를 사용했다지만 그건 그만큼 일반적인 사례로 끝낼 수 없을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지 절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세종과 순조의 경우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대리를 맡겼기에 절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유교적인 관점에서 왕위를 대놓고 노리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며 또한 충효사상이 겹쳐져 신하가 왕이 바뀌었으면 하는건 불충이며 아들이 아버지의 왕위를 노리는 것은 불효이다. 따라서 대리든 양위든 왕이 원한다고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신하들과 세자는 최소한 몇 번 이상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쳐야 하고 거기다가 더 위에 나온 원칙 때문에 신하들은 "명령이 두곳에서 나오게 되면 폐단이 될 것이옵니다" 식의 논리를 펼치며 반대한다. 세종만 해도 좋지못한 건강 때문에 세종 19년에 처음 대리청정을 제안했으나 신하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8년이나 지나서야 대리청정을 맡길 수 있었다.

경종의 대리청정이 숙종과 노론이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설도 이 때문에 존재하는데 원칙상 경종과 정적과 다름이 없는 노론이 대리청정을 찬성할 리 만무하건만 이이명과의 독대 후 숙종의 대리청정 결정, 평소 친노론에 가깝고 경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숙종의 모습, 대리청정에 반대하지 않는 노론의 모습으로 인해서 둘이 짜고 일단 대리를 맡긴 후 꼬투리를 잡아 폐세자 시키려는 음모였다는 말이 나오는 것.

그리고 대리나 양위도 만능은 아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에서 보았듯 준비되지 않은 대리는 오히려 후계자에게 독이 되면 독이 되었지 득이 되지 않으며 또한 대리라고 갑자기 모든 권한이 왕에서 세자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분야를 맡길지 세부적으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왕과 세자간의 권력을 두고 긴장감이 돌 수도 있다.

그나마 신하들도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존재한다. 그것은 왕의 건강 문제인데 왕의 건강이 너무 안 좋으면 왕이 대리나 양위를 결정하는데 반대해서 왕이 건강 때문에 죽어버리면 그것도 불충에 걸릴 수 있으므로 그런 결정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게 좀 아프고 마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오늘내일 할 수준의 환자이거나 진짜 오랫동안 아프다며 대리 좀 하자고 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조선왕조에서 대리, 양위와 관련이 있는 왕들은 다음과 같은데 그들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 태조 :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양위
  • 정종 :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양위
  • 태종 :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후 두달만에 양위
  • 세종 : 세종 19년(40세)에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제안한 후 강무, 제사 등의 일을 세자에게 이관하며 준비하다가 세종 27년(48세) 대리청정 시작.
  • 단종 : 세조의 압력으로 양위
  • 세조 : 사망하기 하루 전에 양위(50세)
  • 중종 : 사망하기 직전 양위 결정(56세)
  • 숙종 : 숙종 43년(57세) 대리청정 시작
  • 영조 : 영조 25년(54세), 영조 51년(80세)이자 본인 사망하기 세 달 전에 대리청정 시작.
  • 순조 : 순조 12년(37세)에 대리청정 시작
  • 고종 : 헤이그 밀사사건 후 일제의 압력으로 대리, 양위

목록들을 보면 확실하게 압력을 받아 양위했거나(태조, 정종, 단종, 고종) 정말 오늘내일 해서 했거나(세조, 중종, 51년의 영조)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나머지 예외들을 보면 이렇다.

태종은 폐세자된 양녕대군이 살아있었기에 생전 양위가 후계자 세종에게 더 안전한 선택지였고, 양위의 목적부터가 (본인 입으로 밝혔듯이) 세종이 왕 노릇 잘 하도록 선왕으로서 보좌하기 위함이었다.[5] 애초에 태종은 양위를 하든 대리를 하든 자기 맘대로 할 왕권이 충분했다.

세종은 일 중독 수준으로 일해서 30대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일할 정도는 되어서인지 8년이나 지나고서야 대리가 시작되었다.

숙종은 앞서 말한대로 경종을 낚기 위한 함정이란 설이 있고 권력이 충분히 강했다.

영조는 세제 시절에 건저, 대리의 건으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어 이 때문에 역으로 대리청정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맨쉽으로 조기 대리를 택했다는 추측도 있고 그리고 말이 대리였지 실제로는 영조가 다 해먹어서 이름만 대리였다. 영조 역시 태종처럼 왕권이 강했다. 게다가 본인이 사도세자를 불신했던 것도 이유로 작용했는데, 결국 이 대리청정 과정에서 부자 간의 불신이 폭발하여 임오화변이라는 비극이 발생한다. 다만 세손 이산은 든든히 믿었던 덕에 세손에게는 힘을 확실히 심어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정조는 즉위 후에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순조는 20대부터 무기력해졌으며 나중에는 건강도 안 좋아졌다. 거기다가 영조-정조 교체기에 대리를 반대하다가 이에 빡친 정조에게 찍혀서 사약을 받고 죽은 홍인한이라는 본보기가 있었다.[6]

보면 알겠지만 결국 위의 예외들은 비정상적인 결정이라도 왕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거나 나이가 젊은데도 건강이 아주 나쁜 수준이었다.[7] 양위가 아닌 대리청정에 관한 개별 사항은 이하를 참고하라
  • 세종 - 문종 (4년 9개월)
    단순히 기간만 따지자면 사도세자에 이어 2위지만, 사도세자는 실제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리청정을 주관한 기간을 따지자면 이쪽이 조선 최장기간 대리청정이라 할 수 있다. 세자 이향은 부왕의 명으로 1445년부터 1450년에 부왕이 훙서할 때까지 대리청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식 대리청정 기간이고, 실질적으로는 이미 1442년부터 행사에서 왕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다. 중간에 문종이 삼년상종기 때문에 매우 위독해져서 대리청정을 중단하고 세종이 직접 정무를 살핀 기간이 있다.
대리청정 당시 문종은 확실한 정통성과 아버지의 전폭적인 신뢰, 할아버지 대에서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돌봤으며, 그 기간에 여러 업적을 세웠다.(특히 세종 말기의 군사적 업적은 사실상 문종의 공이라 보면 된다) 또한 그 기간동안 확실한 후계자 수업과 차기 왕으로서 권위를 세웠기에, 아들 단종까지 이어지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본인이 오래 못 살고 동생이 배신하면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바람에 세조대에 신권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해지는 계기가 생겨서 문제지, 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제도를 확실히 다진 명군으로 남았을 확률이 높다. 살아있는 왕의 권위와 의지를 존중하면서 젊고 유능한 섭정이 사실상의 왕으로서 훌륭히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대리청정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
  • 숙종 - 경종 (2년 10개월)
    세자 이윤(경종)은 병약한 부왕을 대신해 1717년에서 1720년까지 대리청정했다.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노론이 세자가 실수를 저지르면 바로 꼬투리 잡아 폐출시킬 빌미를 만들기 위해 대리 청정을 주장했고 이것에 솔깃해 어느 순간 폐세자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숙종이 승낙하여 일부러 놓은 덫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럼에도 경종은 숙종이 승하하기까지 2년 10개월 동안 세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반대파였던 노론과 함께 국정을 돌보면서 마치 가시밭길을 걷는 상황에 놓였음에도 무탈하게 대리청정을 완수했다. 물론 과정이 순탄치 않아서 대리청정 당시 경종의 대답은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 이 3가지가 거의 전부일 정도로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때 자주 경종(세자)의 신경을 건드리며 대놓고 세자를 만만히 여겼던 노론은 후일 경종 즉위 후에도 계속 선을 넘으며 덤비다가 신임사화로 대거 숙청당하며 제대로 카운터 펀치를 맞게 된다.
  • 영조 - 사도세자 (13년 4개월)
    조선 역사상 최장기 대리청정이다. 세자 이훤은 부왕의 명에 따라 1749년부터 1762년까지 대리청정했다. 기간만 보면 조선 최장기 대리청정이나 실질적으로 대리를 한 기간은 훨씬 짧다. 사도세자가 병을 이유로 정무를 기피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조도 겉으로만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다 했었으니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아무 의미없는 허울이었다.
  • 영조 - 정조 (3개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세손이 대리청정을 했다. 세손 이산은 죽기 직전의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했다. 기간은 짧지만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 영조가 혼수상태가 되었고 정조 본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순조 - 효명세자 (3년 3개월)
    세자 이영은 부왕의 명에 따라 1827년부터 1830년까지 대리청정했다. 세종 - 문종과 더불어 대리청정의 모범적인 사례로 순조는 효명세자를 전적으로 믿고 맡겼으며 효명세자 역시 정사를 잘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효명세자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막을 내렸다. 문종이 재위 기간이 극히 짧기는 해도 최소한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했는데 이쪽은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어 왕이 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더 불우하다.
  • 순종 (3일)
    고종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폐위되기 직전 황태자 이척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으나 같은 날 폐위당했다. 이로인해 황태자는 부황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부황이 황위에서 쫓겨난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친일 내각은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다고 주장했지만 고종과 순종 모두 황제 직무를 대리한다고 조서를 작성하였고 이에 일본 황실에서조차 해당 내용을 듣고 멋대로 퇴위로 간주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질책했을 정도로 이들의 주장에는 절차상 하자가 너무 많았다. 결국 법률상으로는 양위가 아닌 대리청정으로 인정되었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대신 송병준은 나중에서야 정식 즉위식을 거행했다.

2.3.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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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계보) · 추존 · 섭관 · 후남조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 스이코 덴노 - 우마야도 황자 (8년 10개월)
    스이코 덴노 즉위 다음해부터 태자로써 섭정에 올랐는데 스이코 덴노 자체가 정미의 변으로 스슌 덴노가 암살당한 후 소가노 우마코의 허수아비로 세워진 천황이었고 우마아도 황자가 소가씨 가문의 정치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수순이었다.
  • 고토쿠 덴노/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 (2년)
    을사의 변으로 소가씨를 숙청한 덴지 덴노는 정변에 불만을 가지고 퇴위한 어머니 고교쿠 덴노를 대신하여 외숙부 카루 황자를 고토쿠 덴노로 즉위시키고 본인은 황태자로 섭정에 오른다. 이후 고토쿠 덴노가 1년도 안 되어 붕어하자 고교쿠 덴노를 사이메이 덴노로 복위시킨다.
  • 덴무 덴노/지토 덴노 - 구사카베 황자 (2년 9개월)
    덴무 덴노가 병석에 눕자 어머니 지토 덴노와 함께 공동 섭정이 되었다. 이후 지토 덴노가 오쓰 황자의 반란을 진압해 주는 등 어머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단독 섭정을 시작한 지 몇 년만에 요절한다.
  • 다이쇼 덴노 - 쇼와 덴노 (5년)
    다이쇼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섭정. 상당히 오랜 기간 다이쇼 덴노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았다.
  • 쇼와 덴노 - 아키히토 (4개월)
    쇼와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섭정. 그래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리 서명하고 취임식에서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신 수여했다.


[1] 아들 단종이 워낙 정통성이 뛰어나서 그렇지 문종 본인도 적장자-원자-세자루트를 다 밟았고 세자수업도 착실히 잘 받아 흠 잡을게 하나도 없었다.[2] 경종의 경우 하긴 했는데, 위기에 몰린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종 스스로가, 의견개진을 거의 하지 않고 중간만 가자는 식으로 임해서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다.[3] 다만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본인도 건강 악화로 너무 빨리 승하하는 바람에 아들 단종이 왕위를 너무 어린나이에 이어받았다.[4] 실제로 숙종과 이이명이 독대를 했는데 그래서 더 의심을 산다.[5] 실제로 대마도 정벌 건에서 나타나듯 세종은 태종이 직접 맡았던 군사 부분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다.[6] 그러나 이 경우는 영조가 정말로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 대리를 한 것이라 이 상황에서 반대하는 것은 나는 새 국왕은 필요없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기에 그냥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는 거랑 다름없다.[7] 선조는 이 경우에 속하냐면 그건 아니다. 당시의 선조가 누구의 압력을 받아 대리나 양위를 결정할 상황도 아니고 오늘내일 할만큼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도 선조는 말엽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광해군에게 대리나 양위의 뜻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반대로 그 전에는 국정을 맡을만큼의 수준은 되었다. 그렇다고 예외 사례처럼 왕권을 써서 이루기에는 저 왕권을 써서 억지로 양위나 대리를 이룬 경우, 미리 다 계획해두고 한 태종의 사례만 빼고 다 별로 좋지 않았고 선조에게는 그렇게 해서라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즉 선조는 굳이 광해군에게 대리나 양위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신하들에게 하야 촉구를 받은 적도 있긴 하나 그건 비상시의 특이사례일 뿐이다. 임진왜란 후는 그런 비상상황이 아니므로 신하들도 선조가 굳이 대리나 양위를 해야 할 경우에나 표면상으로든 실제로든 마지못해 찬성할 것이나 그런 것도 아니라면 왕권을 써서 찍어눌러서 이루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먹히려면 계획적으로 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