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5 16:46:00

종기

1. 질병
1.1. 개요1.2. 관련 문서
2. 終期
2.1. 관련 문서
3. 무협소설겁난유세》의 등장인물

1. 질병

1.1. 개요

腫氣(furuncle)

피하감염으로 고름이 형성되는 질환이다. 종기가 악화되면 피부 염증으로 끝나지 않고 발열, 오한 등 전신에 걸친 증상을 나타낸다. 정말 드물게는 패혈증으로까지 진행되어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확실한 절개 배농법과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종기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장 조선 왕들만 봐도. 현재도 당뇨병, AIDS, 간경변, 환자들과 같이 면역이 억제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질환이다. 농익었을 때 툭 짜면 퍽 하고 고름이 쏟아진다. 증세가 심한경우, 가만있는데도 고름이 제멋대로 터져서 우수수 쏟아진다.

모낭(털구멍)의 염증이 가장 흔한 원인이나 피하에 작은 낭종이 형성되어 감염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보다 더 깊은 범위의 감염일 경우에는 종기라고 칭하지 않는다.[1]

보통 종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비위생적인 생활습관만 생각하기 쉬운데, 면역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환이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피부의 세균 감염을 쉽게 처치하지 못하고 점점 악화되는 것. 당뇨 등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종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연관한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기에 자주 앓았던 것도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운동 부족 등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운 요인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와도 관련이 있어서, 면역력이 좋은 젊은 시절에는 종기로 인해 죽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이러한 생활 패턴과 나이로 인한 면역력 악화가 겹치면 순식간에 간단한 질병에서 난치병으로 돌변한다.

현대에는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여드름처럼 가벼운 피부 질환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조선시대에만 해도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종기 치료에 꼭 필요한 항생제 및 상처 소독 기술이 미비해 종기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하는 데 필요한 소독기술과 항생제가 부족했다.[2] 특히 환자가 왕인 경우는 소독을 안 하고 시술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외과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침이나 칼로 외과적 시술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뱉거나 하는 식의 치료를 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저 시술 도구 살균처리는 고사하고 물론이고 환부를 하다 못해 물로 씻지도 않는데다[3], 제대로 된 비누나 샤워라는 개념이 등장하지도 않은 시절이라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이러한 외과적 치료를 시행해서 고름을 빼내도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은 조선 후기에 들어 고약이 개발된 후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고약이 종기 속의 고름을 배출해 줌과 동시에 상처 소독까지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약은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정 상비약의 자리에 올랐지만, 의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 위생수준도 상승하면서 바르기 간편한 연고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잊히는 상황이다.

엉덩이 종기는 곪은 상태에서도 안 터지고 앉을 때마다 굉장히 아픈 경우가 있는데 겪어본 사람만 안다. 엄청 아프다. 정말 엄청나게 아프다. 이럴 땐 그냥 시원하게 터트려서 고름을 쭉 짜버린 후 소독해주는 게 편할 때도 있다. 괜히 그냥 있다간 자기도 모르게 터져서 속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 검은 피와 함께 새카맣거나 회색인 고름이 쏟아져나올 수도 있다.

겨드랑이 같은 데 난다면 지옥을 볼 수 있다. 안 움직여도 아프고 움직이면 더 아프다.
앞서 언급한 고약을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상처 부위에 붙이기만 하면 고름을 쭉쭉 잘 뽑아낸다. 직접 짜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프고 간편하다. 요즘은 쓰기 편하게 밴드 형태로 출시되는 고약도 있다. 다만 고약으로 종기 치료하려다가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서# 안 붙이는 것만 못 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장기간 사용시 납중독이 우려되며 흉이 진다는 말도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하여 사용하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면 웬만하면 고약은 추천하지 않는다. 위에 의학 틀을 봐라.

깨끗히 관리해주면 보통은 2 ~ 3주 정도면 사라진다.

심한 종기가 났을 경우에는 혼자 해결하려 하지말고 외과를 방문하여서 제거하기를 추천한다. 화농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 항생제 복용만으로 좋아진다.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간 소독이 올바로 되지 않아 또 고름이 생기며 또 아파진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항문 외과에서 치료를 해야하며, 치료라는 것이 마취 주사를 놓고 피지낭종을 제거하고 주변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즈를 쑤셔넣고 향후를 지켜보면서 염증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거즈를 교체해가면서 고름을 짜낸다.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염증이 나는 살 부분을 완전히 도려내는 대수술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탁구공의 절반만큼의 구멍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치료 과정은 더 괴로워지고, 흉터도 크게 남는다. 그러니 귀찮다고 냅두지 말고 종기가 좀 심해진다 싶으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상 수많은 왕들의 직접적인 사인이다. 사실상 왕들의 언더테이커. 견훤도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이 악화되어 죽었고[4] 조선왕조실록에도 종기 이야기가 줄기차게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은 종기를 일종의 직업병처럼 여길만큼 많은 왕들이 이를 앓았다. 참고로, 조선왕조 임금 27명 중 12명이 종기를 앓았고 문종, 세조, 성종, 효종, 정조[5][6] 종기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7]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 6월 25일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그나마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고 기록으로 남는 왕들도 저 정도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받기도 어려운 민간에서도 널리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치료받지 못하고 종기가 악화되어 숨진 이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명의 백광현, 피재길이 종기를 잘 고치기로 유명했다. 백광현은 현대에도 소설 마의 백광현과 드라마 마의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고, 피재길은 웅담 고약으로 정조의 종기 치료에 참여했던 의원이다.[8]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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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終期

법률 용어로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를 뜻한다. 부관 종류 중에서도 기한(期限)의 한 종류이다.

2.1. 관련 문서

3. 무협소설겁난유세》의 등장인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종기(겁난유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사실 조선시대에는 봉와직염과 단독(erysipelas)도 종기의 일종으로 취급했다[2] 당시의 의학에도 외과시술은 있었고, 실제로 시행된 경우도 많았지만 소독기술의 부족으로 위험성이 높았다.[3] 이때는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기때문에 강, 개천이나 온천과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이상은 물을 길러 나르는것이 귀찮고 번거롭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세수는 매일같이 했기에 위생관념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럴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4] 후삼국시대를 소재로 한 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이 점점 등창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5] 정조는 초기에는 피재길 집안에서 만든 고약으로 종기를 치료했지만, 평소에 업무과로에 시달리는 데다가 담배를 애호하는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종기가 다시 재발했다. 고약을 애용한 탓에 내성이 생겨 결국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6] 그런데 정조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정조가 요절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매우 설득력 있다.[7] 효종은 얼굴에 악성 종기가 나서 침으로 땄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8] 《이계집》(耳溪集)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홍양호 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