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1:39:50

현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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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 | 顯德王后
조선 세자 이향의 세자빈
현덕빈 권씨 | 顯德嬪 權氏
파일:현덕왕후능침.jpg
현릉 현덕왕후 능침
출생 1418년 4월 26일(음력 3월 12일)
조선 충청도 홍주목 합덕현 사저
(現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사망 1441년 8월 19일(음력 7월 24일)
(향년 23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자선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능묘 소릉(昭陵) → 현릉(顯陵)
재위기간 조선 승휘 ~ 양원
1431년 4월 26일 ~ 1437년 3월 15일
조선 왕세자빈
1437년 2월 28일 ~ 1441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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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안동 권씨
부모 부친 화산부원군 권전
(花山府院君 權專, 1371 ~ 1441)
모친 해령부부인 최아지
(海寧府夫人 崔阿只, ? ~ 1456)
형제자매
1남 5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 권자신(權自愼, ? ~ 1456)
여동생 - 김영명(金永命)의 처
여동생 - 조청노(趙淸老)의 처
여동생 - 권산해(權山海)의 처
여동생 - 윤영손(尹令孫)의 처
배우자 문종
자녀 1남 1녀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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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녀(1433 ~ 1433)
장녀 - 경혜공주(敬惠公主, 1435 ~ 1474)
장남 - 단종(端宗, 1441 ~ 1457)
봉작 승휘(承徽) → 양원(良媛)
→ 왕세자빈(王世子嬪) → 왕비(王妃)
→ 폐비(廢妃)[1] → 왕비(王妃)
전호 경희전(景禧殿)
휘호 인효순혜(仁孝順惠)
시호 현덕빈(顯德嬪)
현덕왕후(顯德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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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2.2. 후궁 시절2.3. 세자빈이 되다2.4. 원손을 낳다2.5. 죽음 이후
3. 사후의 폐위와 복권4. 단종 출산 후에도 살았다면?5. 가계6. 대중매체에서7.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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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종추존 왕후이자, 경혜공주단종의 어머니이다.

세종대왕소헌왕후의 큰며느리이다.

2. 생애

2.1. 출생

본관은 안동 권씨. 태종의 재위기인 1418년(태종 18년) 3월 12일 홍주 합덕현에서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씨의 딸로 태어났다.[2]

2.2. 후궁 시절

세자의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1429년 폐위되고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세자와 순빈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후사를 염려한 세종대왕허조의 조언을 듣고 세자에게 권씨, 정씨, 홍씨 3명을 승휘(세자의 후궁)로 들여주었다.

승휘였던 현덕왕후는 그 시절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3]은 조산으로 태어난 지 얼마 못 되어 요절하였고, 1435년 낳은 둘째 딸이 경혜공주다.

2.3. 세자빈이 되다

순빈 봉씨마저 폐위되어[4]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자 새로 간택하지 않고, 세 후궁 중 한 명을 세자빈으로 승급시키기로 하였다. 이때 양원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세자승휘 홍씨를 세자빈으로 삼고 싶어 했지만, 세종은 "이미 을 낳았으며 홍씨보다 나이도 많고 품계도 높은[5] 권씨가 합당하다."고 하였다.

세자빈으로서 가례(嘉禮)를 치르지 않고, 세자빈으로 봉(封)한다는 교지만 받았다.[6] 오늘날로 비유하면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두 명의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들인 것이기 때문에 절차를 간소하게 하였다.[7]

2.4. 원손을 낳다

세자 문종의 아버지 세종의 기대대로 권씨는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경복궁 자선당에서 원손을 낳았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자리에서 큰 초가 떨어졌다. 세종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떨어진 초를 당장 치우게 했다.

실제로 권씨는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향년 23세에 산욕열로 사망하였다. 권씨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후궁혜빈 양씨가 직접 자신의 을 물려가며 단종을 길렀으며 그 동복누나인 경혜공주도 돌보았다. 권씨 사후에 문종은 더 이상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8] 문종 즉위 후 행사에서 왕비 역할이 필요할 때에는 후궁 숙빈 홍씨가 대행하였다.

2.5. 죽음 이후

시호는 현덕빈(顯德嬪). 남편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아들 단종이 즉위하자 '인효순혜(仁孝順惠)'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즉, 정식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안산군 와리면 와리산(현재의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9] 능안)에 있는 소릉(昭陵)에 장사지냈으며, 후술할 사건의 여파로 능이 파헤쳐져 바닷가 모래밭에 이장되었다가 문종과 함께 동구릉 내 현릉(顯陵)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합장되었다.
공교롭게도 친아버지인 권전 역시 현덕왕후가 사망한 지 4개월 뒤인 1441년 11월 18일에 70세[10]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사후의 폐위와 복권

현덕왕후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인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1456년(세조 2년), 처형되었다. 단종도 일개 왕자 신분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유배된다. 이 여파로 아버지 권전과 현덕왕후는 각각 서인(庶人)으로 격하되고, 현덕왕후의 신위는 종묘에서 끌어져 내쳐졌다. 태종도 하지 않았던 패륜 짓을 한 셈.[11] 세조가 괜히 패륜왕이라고 욕먹는 게 아니다. 성종 때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교명 등이 불살라지기도 하였다.

세조가 형인 문종의 무덤을 파헤쳐서 현덕왕후의 관을 꺼낸 뒤, 시신을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닷가에 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실제로 이것과 같은 헛소리를 실록에 올려놓은 김일손무오사화때 아주 제대로 작살이 났는데다가 진짜 이랬다면 다시 현덕왕후를 세조의 형이었던 문종과 합장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에 따르면 단종 사후 세조가 꿈을 꿨는데, 왕자 시절에 사망한 형수 현덕왕후의 혼령이 시동생 세조에게 분노하면서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들을 죽이겠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세조에게 환관이 급히 달려와 아뢰기를,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세조안산에 있는 소릉[12]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시신을 망치로 부수고 소각해서 강에다가 던지고 현덕왕후 신위를 종묘에서 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려운데, 의경세자가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3년) 9월 2일, 단종이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로 오히려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사망하였다. 다만 민간에서도 세조단종과 현덕왕후에게 가한 패륜적 행위가 결코 대중들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 정도로는 볼 수 있다.

성종 때 남효온이 현덕왕후를 복권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나 성종은 불허하고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등 반대 여론이 심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중종 때에, 그녀가 살아있을 당시 친정이 역모에 관여되었다 하더라도 왕후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폐서인하지 않는 법인데[13], 이미 죽은 뒤의 일로 연좌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유와 문종이 혼자 종묘에 모셔져 있으니 신하로서 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1513년(중종 8년) 왕후로 다시 복위되어 동원이강릉 형태로 동구릉 경내에 있는 현릉(顯陵)에 다시 안장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나,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비로소 현덕왕후의 복위가 이뤄졌다.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후 벌어진 세조의 참혹한 만행 때문에 관련된 야사가 많다.

야사에 따르면 유순정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앞장서서 반대하였는데, 어느 날 권민수가 숙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현덕왕후의 외손자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와 유순정이 크게 싸우는데, 유순정이 궁색해하는 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순정이 병사하니, 사람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야사에는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는데, 한 승려가 바닷가에서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놀라 나와 보니, 여자는 없고 빈관만 있었다. 승려는 괴이쩍게 여겨 관을 풀로 덮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바닷가 언덕 중 하나가 되어 아무도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중종 대에 현덕왕후가 복위되자 관을 찾기 위해 언덕을 팠는데,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감역관이 꿈을 꿨는데, 현덕왕후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였다. 감역관이 꿈에서 깬 뒤 땅을 파자 바로 시신없는 빈관이 나왔다고 한다.

4. 단종 출산 후에도 살았다면?

단종 출산 직후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시아버지와 남편 사후에 단종이 즉위하던 시점까지 생존해있었다면 왕대비의 자리에 올라 어린 단종 대신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하였을 것이고,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뒷받침 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종법을 따르면[14] 이미 소헌왕후, 세종, 문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기 때문에 현덕왕후 권씨가 왕실의 가장 웃어른이고, 다른 왕족들이 그 권위를 침범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수양대군은 애시당초 이 되려는 시도조차 못했거나 시도했어도 실패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당시 살아있었던 시아버지의 첫째형이던 양녕대군 역시 실제 계유정난때처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찬동하지 못하고[15] 단종과 왕대비가 된 조카며느리인 현덕왕후의 존재를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양녕대군과 마찬가지로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권람, 한명회, 신숙주 등 조선 조정내의 대소신료들도 수양대군을 지지하지 못하고 단종을 마지못해 임금으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단종이 성인이 될 1455~1460년경[16] 수렴청정을 마치고 친정에 나서는 상황이 되었다면 후계자를 보았을 가능성도 크므로, 수양대군은 자연스럽게 옥좌에서 멀어져 일개 왕자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딸이던 경혜공주 또한 불행한 삶을 영위하지 않았을 가능성 역시 다분히 존재하며 안평대군, 금성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등도 계유정난으로 목숨을 잃는 일 없이 생존하여 세종, 문종 승하 이후 조선 역사의 양상이 달라졌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시어머니 소헌왕후수렴청정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왕권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물론 왕대비인만큼 나이와 상관없이 종친과 내명부의 가장 웃어른이고, 조선의 태생적 정치구조 특성상 현덕왕후의 권한도 상당할테지만 수양대군, 안평대군을 위시한 종친들의 권력도 상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이와 항렬 자체는 비슷하면서 종친들이나 고명대신들이 치를 떨며 경계하는 외척에 속하는 왕대비 현덕왕후 입장에서도 입지가 불안정할 가능성도 있다. 수양대군 입장에서도 어머니보다는 서열만 확실히 높지, 항렬과 나이는 비슷하면서 배우자를 잃고 홀몸, 과부가 된 형수가 만만할테니 말이다. 실제로 조선 이전의 고려왕조 시기 숙종은 형수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헌종과 형수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당시의 숙종은 수양대군보다는 명분도 어느 정도 있었고 종친들과 신료들에게 상당히 신망을 받고 있던 것과는 달리[17] 세조는 고려 숙종보다는 서열이나 명분, 인망 등 모든 부분에서 왕위에 오르기에는 상당히 불리했다. 따라서 고려의 숙종이 무력으로 사숙태후와 헌종을 축출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듯이 세조가 단종과 현덕왕후를 억지로 축출시키며 왕위를 찬탈, 정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 불안하다는 것도 앞서 언급했듯이 어디까지나 소헌왕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뿐이지 결국 승자는 현덕왕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계유정난 자체가 단종 친위세력(김종서,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로 인해 분열된 상황을 비집고 들어가 성공한 정난이었다. 국정의 중심을 잡아 줄 대비가 있는 상황에서는 친위세력이 분열될 일이 없고. 따라서 난을 일으켜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 애초에 일개 대군 따위가 왕대비를 제칠 만큼의 정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역사적 배경상 왕대비의 권한이 다소 약하거나 견제를 더 많이 받는 서양조차 아무리 권력을 가진 왕자라도 살아있는 (대)왕대비까지 제치며 현 왕을 없애고 왕위를 강제로 빼앗은 경우는 매우 드문데 태생적으로 대비의 권위와 권한이 더욱 강력한 조선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18][19]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런 가정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조부모와 부모를 12세 이전에 모두 잃은 단종에 대한 안타까움, 직접 살해를 지시했는지는 불명이지만 단종을 죽게만든 가장 큰 원인이 수양대군(세조)인 건 확실하기 때문에 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단종이 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건국 후 최초로 정통성이 가장 탄탄한 왕,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아 총명했던 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대는 물론 당대에도 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20] 거기다 그 시절 군주는 오늘날 대중의 인기로 유지되는 입헌군주제와 달리 임금이 곧 나랏님이고, 하늘이고, 태양이고, 어버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비록 어리다지만 하루아침에 만백성의 어버이인 나랏님을 내치고 스스로를 나랏님이라 칭하니...

5. 가계

  • 친정
    • 아버지 :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
    • 어머니 : 해령부부인 최씨(海寧府夫人 崔氏)

6. 대중매체에서

  •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배우 강해인이 연기했다. 승휘 권씨로 첫 등장해서 세자빈 봉씨에게 견제당하고, 세자빈이 된 이후엔 단종을 낳고 사망한다.
  • 네이버 웹소설 <해시의 신루>에서 해루라는 이름으로 여주인공으로 나와서 남주인공이자 남편인 왕세자 이향과 로맨스를 이룬다.
  • 문피아 대체역사소설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에서는 유품인 가락지에 혼이 깃들어 있다가 먼 후손인 현대인 아동심리상담가 권윤서가 가락지를 끼는 순간 권윤서에게 자신 대신 아들 단종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의 사망 2년 후로 권윤서를 타임슬립시킨다.
  •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산 사람으론 나오진 않지만 1화부터 인수대비의 꿈에 나와 "나는 상왕의 모후 현덕왕후다. 수양이 내 아들을 비참하게 죽였으니 나 또한 수양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라며 저주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수양의 씨를 말린다는 본인 말대로 수양의 손자 며느리뻘인 공혜왕후의 꿈에도 계속 나와 초췌해진 자신을 걱정하는 인수대비에게 공혜왕후가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수양의 씨를 말리겠다는 궁중 여인이 나오는 흉몽을 자꾸 꾼다"는 말을 한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까지 나와 비몽사몽이된 공혜왕후는 결국 요절한다. 그냥 한명회한테 나타날 것이지 왜 착한 공혜왕후한테 일단 조정 권력에 발담는 용도를 제치고 한명회도 한 아버지로서 딸의 요절이 참담할테니 현덕왕후 입장에선 공혜왕후를 요절시키는 전략으로 한명회 때리기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7. 참고 문서


[1] 계유정난으로 인한 폐비 강등[2] 우연히도 같은 해 11월 역시 홍주에서 아랫동서 정희왕후가 태어났다. 참고로 조선에서 홍주에서 태어난 왕비는 현덕왕후와 정희왕후 단 둘 뿐이다.[3] 문종의 첫째 자녀다. 그래서 임신 당시에 큰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세자빈이었던 순빈 봉씨는 당연히 경계했다.[4] 주술, 거짓 임신 등 여러 사고를 치다가 끝내 궁녀 소쌍과의 동성애 동침이 문제되었다.[5] 이때 권씨는 양원으로 책봉되어 있었다. 첫째 딸의 사망 기사에 승휘 권씨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혜공주를 낳은 후 양원으로 책봉된 듯 하다.[6]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2029_002[7] 원래 조선왕조는 가례 등 의식절차와 예법을 중시했던 왕조이기 때문에 단종을 낳은 후에 가례를 정식으로 치르려고 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낳자마자 죽어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봤을 때 가례를 “못”치른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8] 일각에서는 문종이 세자 시절에 두 차례나 세자빈이 폐출당하는 사태를 겪었고 세번째 부인인 권씨마저 산후에 숨지는 바람에, 결혼을 세 번이나 했는데 모두 비극으로 끝나버린 충격으로 네번째 부인을 들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1436년 두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가 폐출될 때에도 세종소헌왕후는 신중을 기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듯이 이미 휘빈 김씨가 폐출된 상태에서 봉씨마저 폐출되면 이는 세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비춰질 소지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종이 즉위 2년만인 1452년(문종 2년)에 서거하여 단종이 어린 나이(12살)에 즉위한 후에 야심 많은 숙부들의 위협에 노출되는 악영향을 초래했다. 다만 현덕왕후 3년상 후인 1444년에는 남동생 광평대군이, 이듬해인 1445년에는 남동생 평원대군이, 1446년에는 어머니 소헌왕후가, 1450년에는 아버지 세종대왕이 붕어하여 재혼의 기회가 1449~1450년에 있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9] 조선 초기까지 안산 읍치가 존재했으며, 소릉이 들어서면서 수암동으로 이전했다.[10] 70세(세는나이 71세)면 굉장히 장수한 편인데, 자신을 국구로 만들어줄 젊은 딸이 외손자를 낳고 사망해서 고령에 정신적 충격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11] 태종은 친형인 회안대군이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어도 반란 진압 이후에 죽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를 엄청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하는 선에서 그쳤다. 더욱이 태종이방번, 이방석을 서자로 규정했기에 신덕왕후후궁격으로 격하시킬 필요성이라도 있던 것과는 달리 세조는 "단종은 문종의 자식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라서 딱히 현덕왕후를 격하시켜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12] 昭陵, 현덕왕후의 예전 능[13] 실제로 세종처가심온 일가가 태종에 의해 역모로 몰려 거의 박살이 났음에도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 심씨폐서인되지 않고 자리를 유지했다.[14] 사실 당시만이 아니라 동서양 가릴거 없이 정상적으로 위계질서가 자리잡은 군주제 국가들의 종법에서는 선왕이 살아있지 않다면 선왕의 왕비인 대왕대비(태황태후)와 왕대비(태후)가 왕족들 중 가장 웃어른이다. 현대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시절 1952년에는 친할머니 메리 대왕대비가 가장 큰 웃어른이었고, 그 다음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였으며, 1953년 메리 대왕대비의 사망 이후에는 자연스레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시동생들을 제치고 가장 큰 웃어른이 되었다.[15] 양녕대군은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 수양대군을 지지, 찬성하는 행동을 넘어서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의 사형을 주청하는 등의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16] 성종과 명종은 20세, 순조는 15세까지 수렴청정을 받았다. 숙종처럼 14세에 즉위했음에도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친정한 경우도 있다.[17] 게다가 당시 헌종이 워낙 몸이 약했기 때문에 설령 숙종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 해도 헌종의 요절로 자연스럽게 숙종왕위를 승계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당시 고려는 확실하게 부자상속을 원칙으로 한 조선보다는 형제 상속이 많았고(현대의 사우디 왕조를 생각하면 쉽다), 헌종은 폐위 당시의 단종(15세)보다 나이도 어리고(13세) 몸도 약한지라(당뇨병) 숙종에게도 충분히 명분이 있었다. 또 사숙태후와 숙종은 비교적 가까운 이종사촌관계로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인 이석의 딸인데, 이석은 숙종의 생모 인예왕후의 오빠 즉 숙종에게는 외삼촌이었다.[18] 현덕왕후의 시할아버지인 태종이 생전 외척을 그리 경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조선의 정치구조와 태생상 대비의 권한이 막강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외명부의 수장이자 국왕의 아내이자 국모인 왕비를 별 명분없이 제거할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세력만 치밀한 숙청으로 어느정도 약화시키고 원경왕후와 소헌왕후 모두 왕비의 지위와 권위까지 건드리지는 않은 것이다. 당시 노년에 속한 본인이 죽고 막 세자 및 국왕이 된 아들인 세종이 혹여나 급사하게 되면 적장손인 문종이 원경왕후소헌왕후수렴청정을 바탕으로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종 본인부터 형제들을 제치고 왕까지 되었는데 상당한 종친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종친이라는 이유로 죽일수도 없으니 계유정난 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견제할 왕비(대비) 자체를 없애거나 지위나 권한까지 흔들순 없었던 것이다.[19] 실제로 서양에서 거의 비슷한 시대에 수렴청정을 하진 않았지만 형수인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대비와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몰아내고 왕이 된 리처드 3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우드빌 왕대비는 아들을 잃는 비극을 당했지만 그래도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만약 세조가 대비로 있던 형수 현덕왕후를 몰아내고 단종을 똑같이 죽였더라도 리처드 3세처럼 패자가 되어 몰락하고 현덕왕후가 승리하는건 확정적이었다는 뜻이다.[20] 물론 어린 시절 총명했다는 군주가 다 커서도 그런 총명스러움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유송의 황제 유자업은 독서를 좋아하고 박식했다지만 즉위하자마자 폭군이 되어 불과 1년 동안 수많은 패악질을 하다 살해당했다. 허나 단종은 살아생전에 극악무도한 비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전혀 없으며 3년 동안 수양대군의 외압 외에는 정상적으로 통치를 했으므로 성인이 되었다면 무조건 태종과 세종과 문종처럼 명군이나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암군이나 폭군으로 빠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