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8:10:22

폐빈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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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폐세자 이지의 폐빈
폐빈 박씨 | 廢嬪 朴氏
출생 1598년 3월
사망 1623년 6월 19일 (음력 5월 22일)
(향년 25세)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11년 8월 2일 ~ 1623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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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밀양 박씨
부모 부친 - 박자흥(朴自興, 1581 ~ 1623)[1]
모친 - 광주 이씨(廣州 李氏)[2]
배우자 폐세자 이지
자녀 장녀 - 군주(郡主, 1614~1614)
봉작 왕세자빈(王世子嬪) → 폐빈(廢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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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계4. 참고 문서

1. 개요

조선 제15대 국왕이자 광해군의 장남[3] 폐세자 이지의 세자빈. 박승종의 손녀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2. 생애

1598년(선조 31년) 3월, 박승종의 장남 박자흥과 이이첨의 딸 광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친조부는 박승종이고 외조부는 이이첨으로, 두 할아버지 모두 시아버지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으나 박승종은 소북 이이첨은 대북으로 서로 정적 관계에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1611년(광해군 3년) 음력 8월 2일에 세자빈 정식 간택을 통해 왕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4] 박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자 광해군은 특별히 아버지 박자흥에게 6품의 관직을 내리고, 조부 박승종에게는 숭정대부(崇政大夫)를, 외조부 이이첨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7월 5일에는 박씨의 출산을 위해 산실청이 설치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때 낳은 딸은 같은 해 음력 12월 19일에 요절하였다.

이후 1623년(인조 1년) 음력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시아버지 광해군이 폐위되자, 박씨도 폐위되어 남편과 함께 강화 교동도위리안치되었다. 박씨의 조부 박승종과 아버지 박자흥은 반정이 일어나자 모두 자결하였고, 외조부 이이첨은 아들들[5]과 함께 참수되어 사실상 집안이 몰락하였다. 유배 생활 중 박씨는 남편 이지와 함께 죽기로 약속하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단식했다. 그래도 죽지않자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으나, 이를 본 여종이 곧바로 풀어 주어 자결에 실패하였다.

그러다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가 보내져 왔는데 이걸 본 이지와 박씨는 땅굴을 뚫어 유배지를 탈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지가 손으로 땅을 파면 박씨는 흙을 자루에 담아 방 안으로 옮겼다. 땅굴 작업은 시작한 지 26일 만에 약 70척에 달하였다. 이지는 땅굴을 통해 탈출하였고 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도주하던 이지는 병졸에게 체포되었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느낀 박씨는 남편이 체포된지 3일 째에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남편 이지도 박씨가 자결한 지 약 한 달 후인 음력 6월 25일인조의 명을 받아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폐인 이지(李祬)에게 죽음을 내렸다. 의금부 도사 이유형(李惟馨)이 강화도에 가서 폐인 지에게 전지를 유시하였다. 폐인이 말하기를,

"일찍 자결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나 지금까지 구차히 살아 있었던 것은 의 안부를 알고 나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해서였다. 지난번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하고, 바로 방안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 관과 신발을 갖추었다. 이어 칼을 찾아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하였는데, 도사가 허락하지 않으니, 말하기를,

"죽은 뒤에 깎아 주면 좋겠다."

하고, 곧장 일어나서 마루로 나왔다. 또 웃으면서 말하기를,

"지금껏 죽지 않은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옛사람이 죽음에 임하여 황천(皇天)·후토(后土)에 고한 경우가 많다."

하고, 그대로 자리를 펴고 촛불을 밝히게 하고는 북쪽을 향하여 두 차례 네 번 절했으며, 또 그의 부모가 있는 곳을 물어서 곧 서쪽을 향하여 절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일어나서 말하기를,

"문천상(文天祥)이 8년간 연옥(燕獄)[6]에 있을 적에 어떤 이가 죽지 않는다고 꾸짖었는데, 어찌 그의 마음을 알았겠는가. 그가 죽은 뒤에 뒷사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원나라가 문 승상을 죽이지 않아 임금의 의리 신하의 충성 둘 다 이뤘네[大元不殺文丞相 君義臣忠兩得之]’ 하였다."

하고, 도로 방안으로 들어가 세조대(細絛帶)로 목을 매어 스스로 당겼으나 세조대의 중간이 끊어지자, 또 스스로 숙주(熟紬)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2권, 인조 1년 6월 25일 갑신 1번째기사 中
이지자결하기 전, 의 안부를 확인한 뒤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구차하게 살아 있었으며 지난번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아버지어머니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문천상의 사례를 언급하며 유언을 남겼다.

3. 가계

  • 친정(밀양 박씨)
    • 증조부 : 박안세(朴安世)
    • 증조모 : 정경부인(貞敬夫人) 창원 황씨(昌原 黄氏)
      • 조부 : 영의정(領議政)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
      • 조모 : 청풍 김씨(淸風 金氏) 김귀희(金貴姬)[7]
    • 아버지 : 박자흥(朴自興)
    • 어머니 : 광주 이씨(廣州 李氏)
  • 배우자/자녀

4. 참고 문서


[1] 박승종의 장남.[2] 이이첨의 딸.[3] 정확히는 차남이지만 장남인 형이 일찍 요절했기에 실질적 장남이다.[4]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 중초본 44권, 광해 3년 8월 2일 기사 3번째기사[5] 폐빈 박씨의 외숙부들.[6] 연경(燕京)의 (元)나라 감옥.[7] 김사원(金士元)의 차녀로, 정현옹주의 외5대손.[8] 류유일(柳惟一)의 딸.[9] 이극유(李克維)의 딸.[10] 친시조모는 공빈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