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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 | 恭嬪 金氏 | |||
성묘 전경 | |||
출생 | 1553년 11월 26일(음력 10월 11일) | ||
조선 강원도 원주군 (現 강원도 원주시) | |||
사망 | 1577년 6월 23일(음력 5월 27일)[1] (향년 24세)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능묘 | 성릉(成陵) → 성묘(成墓) | ||
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571년 전후 ~ 1572년 전후 | |||
조선 귀인 | |||
1572년 전후 ~ 1575년 이후 | |||
조선 공빈 | |||
1575년 이후 ~ 1577년 6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김해 김씨 | |
부모 | 부친 - 김희철(金希哲, 1519 ~ 1592) 모친 - 안동 권씨(安東 權氏, 1538 ~ ?) | ||
형제자매 |
| ||
배우자 | 선조 | ||
자녀 | |||
봉작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공빈(恭嬪) → 왕비(王妃) → 공빈(恭嬪) | ||
당호 | 자미당(紫薇堂) | ||
전호 | 봉자전(奉慈殿) | ||
존호 | → 경렬명헌(敬烈明獻)[3] | ||
휘호 | |||
시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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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과 임해군의 생모. 아버지는 해령부원군(海寧府院君)[4] 김희철(金希哲)이며, 어머니는 권장(權璋)의 딸이다.아들 광해군이 다음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생모인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려하자 조정 대신들이 이를 반대하며 왕의 생모이니 왕비로 추존하자고 주장했지만[5] 결국 광해군이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꺾고 왕후로 추숭되지만, 광해군이 일련의 쿠데타로 폐위되자 시호는 삭제되고 신주는 사가로 내보내지는 등 살아있을 때보다 사후가 더 극적인 인물이다.
2. 생애
야사에는 소주방 나인이었다가 선조의 승은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첫째 임해군을 낳기 전부터 이미 종2품 숙의 신분이었던 점과[6][7] 친정 집안 배경[8][9] 등을 보면 양반가 출신의 간택후궁으로 추정된다. 1571년(선조 4년)에 귀인 정씨와 함께 간택되어 입궁한 듯하며,[10] 1572년(선조 5년) 임해군을 낳고 귀인이 된 후 이어서 광해군을 낳고 정1품 빈(嬪)이 된 것으로 보인다.왕비 의인왕후가 회임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조의 첫 아이를 낳은 공빈은 성총(聖聰, 임금의 총애)을 독차지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으나, 광해군을 낳은 지 2년만인 1577년(선조 10년), 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공빈 김씨의 졸기
공빈 김씨가 졸(卒)하였다. 공빈은 사포(司圃) 김희철(金希哲)의 따님으로 임해(臨海)와 광해(光海) 두 왕자를 낳았는데, 이 때 산후병으로 졸하였다. 김씨는 평소 상(上)의 총애를 입어 후궁들이 감히 사랑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에게 하소연하기를, "궁중에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있어 나의 신발을 가져다가 내가 병들기를 저주하였는데도 상이 조사하여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죽음은 상께서 그렇게 만든 것이니, 죽어도 감히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상(上)이 매우 슬퍼하며 궁인을 만날 적에 사납게 구는 일이 많았다. 소용(昭容) 김씨(金氏)[11]가 곡진히 보호하면서 공빈의 묵은 잘못을 들춰내자, 상(上)이 더이상 불쌍히 생각하지 않고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김소용이 특별한 은총을 입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이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12]
-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 5월 1일(무자)[13]
공빈 김씨가 졸(卒)하였다. 공빈은 사포(司圃) 김희철(金希哲)의 따님으로 임해(臨海)와 광해(光海) 두 왕자를 낳았는데, 이 때 산후병으로 졸하였다. 김씨는 평소 상(上)의 총애를 입어 후궁들이 감히 사랑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에게 하소연하기를, "궁중에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있어 나의 신발을 가져다가 내가 병들기를 저주하였는데도 상이 조사하여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죽음은 상께서 그렇게 만든 것이니, 죽어도 감히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상(上)이 매우 슬퍼하며 궁인을 만날 적에 사납게 구는 일이 많았다. 소용(昭容) 김씨(金氏)[11]가 곡진히 보호하면서 공빈의 묵은 잘못을 들춰내자, 상(上)이 더이상 불쌍히 생각하지 않고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김소용이 특별한 은총을 입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이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12]
-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 5월 1일(무자)[13]
공빈은 죽기 전에 '제가 아픈 건 다른 후궁들의 저주 때문'이라고 선조에게 말했다. 실제로 선조는 그걸 믿고 다른 후궁들에게 모질게 대했지만, 이후 인빈 김씨가 오히려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인빈은 왕에게 일부러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었고, 선조는 공빈을 점차 잊고 인빈을 총애하게 되어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을 포함한 여러 자녀를 낳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인 1610년(광해군 2) 3월 29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어 종묘에 모셔졌고, 심지어 명나라에서 책봉도 받아 대례복까지 내려왔다. 광해군의 추존은 매우 주도면밀했는데, 처음에는 명나라의 사례를 들어 '비(妃)'로는 높이되 종묘에 들이지 않고 외왕내제 적인 칭호인 '왕후(王后)'로 묘호를 내리지 않았으나, 결국은 종묘에 올리는 것을 포함한 완벽한 추존에 성공하였다. 이로서 공성왕후가 계비가 되자, 광해군의 적자로서의 지위는 그의 재위 후반기에는 일시적으로나마 완벽해졌으며, 이는 소성왕대비(인목왕후)의 지위를 모후에서 부왕의 제2 계비, 일개 대비로 끌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평가 받고 있다.[14]
허나 왕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원종)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된 직후인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18일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고 신주는 종묘에서 꺼내어 다시 사가로 돌려 보내졌다.
추촌과 강등 과정에서 묘소의 급도 같이 변하여, 광해군이 왕후로 추존했을 때에는 왕후의 묘역으로 승격되어 '성릉(成陵)'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후에 다시 강등되어 '성묘(成墓)'라고 바뀐 뒤 오늘날에 이른다.[15] 광해군이 죽기 직전에 생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대로 실행되어, 광해군묘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성묘 근처에 있다.
3. 가계
3.1. 친가(김해 김씨)
- 고조부 : 정헌대부 병조판서(貞憲大府 兵曹判書) 김영정(金永貞)
- 부친 : 증 의정부영의정 해령부원군(贈 議政府領議政 海寧府院君) 김희철(金希哲)
- 모친 : 부부인 권씨(府夫人 權氏)[18]
- 큰언니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큰형부 : 증 참판(贈 參判) 이민강(李民康)[19]
- 작은언니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작은형부 :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박윤(朴潤)
- 첫째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첫째제부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성준(成準)
- 둘째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둘째제부 : 덕인정(德仁正) 이준(李壿)
- 셋째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셋째제부 : 호조판서(戶曹判書) 박건(朴楗)
- 넷째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넷째제부 : 현감(縣監) 남간(南侃)
- 다섯째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다섯째제부 : 검사(僉使) 박진남(朴震男)
- 막내동생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막내제부 : 만호(萬戶) 하순(河淳)
- 양동생 : 김예직(金禮直)[20]
3.2. 외가(안동 권씨)
- 외조부 : 권장(權璋)
- 외조모 : 부인 허씨(夫人 許氏)
3.3. 시가(전주 이씨)
3.4. 배우자 / 자녀
- 남편 : 선조(宣祖) 이균/이연(李鈞/李昖)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 드라마 《허준》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이은성 작가가 집필한 소설 <동의보감> 후반부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 아름다고 어진 인물로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데 남동생 김병조가 구안와사에 걸리자 선조에게 아뢰어 궁에서 치료를 받게 해준다. 이 때 어의 양예수가 치료를 맡으나 구안와사가 고치기 어려운 병인 척 호들갑을 떨어 선조의 총애를 받으려다가 공빈이 김병조가 위독한 줄 알고 눈물 흘리는 등 사태가 좋지 않게 돌아갔고 이 때문에 허준으로 주치의가 교체된다. 허준은 김병조가 단순히 구안와사 뿐만 아니라 위암에 걸려있음을 진단하며 "사흘 안으로 이를 치료해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정말로 치료해냄으로 공빈의 총애를 받게 된다. 이후 허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지만 3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선조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26] 최음제와 묘약 등을 무리하게 복용하다가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27]
- 신 <광해의 연인>에서는 김수빈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나인 시절 선조의 승은을 입고 대비의 명으로 죽게 된 동무를 구하고자 빌었던 모습이 선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을 둘이나 낳았으나 후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선조는 공빈이 의지할 사람을 없애가며 공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다. 대비의 명으로 인빈 김씨가 선조의 눈에 띄게 되면서 점차 고립되어 가다가 차라리 선조에게 "아들들과 함께 궐에서 내보내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다. 어느 날 사망했다고 하는데 강 상궁[28]은 인빈의 수족이었던 자신의 오라비(김공량)가 인빈의 사주를 받아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생전에는 광해군에게 삶은 달걀을 만들어 주는 상냥한 어머니였으며 광해군도 생모(공빈)를 그리워한다.
4.2. 드라마
《허준》의 공빈 김씨 |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에서는 배우 박주미가 연기했다. 공빈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하나로 기품이 있으며 인물의 됨됨이와 재주를 잘 살피고 아끼는 성품을 지녔다. 동생인 김예직의 구안와사와 반위를 고쳐준 허준을 크게 신임하여 궁의가 되어 줄 것을 거듭 청하였으며 훗날 허준의 과거 죄가 드러나 하옥되었을 때에도 선조에게 그의 사면을 간곡히 부탁하는 등 후원자가 되어 준다. 훗날 선조의 총애를 빼앗아간 인빈이 방자한 태도를 보이고 선조가 병 중인 자신조차 돌보지 않고 인빈과만 있으려 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등에 크게 상심하여 진심통(심근경색)에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결국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왕자 둘(임해군, 광해군)과 허준을 데리고 외출을 나가는데 그 곳에서 "왕자들을 잘 부탁한다"는 일종의 유언을 남기고 얼마 후에 사망한다.[29] 이런 공빈의 죽음에 상심한 허준은 딱히 처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의술 정진을 위해 당분간 내의원을 떠나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훗날 돌아와서도 당파 싸움의 적대 세력과 선조의 눈 밖에 나서 여러모로 괴로운 광해군을 성심을 다해 모시고 병을 치료하는데 힘들고 괴로울 때에는 공빈이 남긴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고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심의가 되겠다는 허준 본인의 목표와 상통해서 더욱 가슴에 남은 듯하다.
- 2013년 《불의 여신 정이》
- 2014년 《왕의 얼굴》
5. 참고 문서
[1] 만 23세의 나이에 산후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작은아버지 김희현의 차남으로, 실제로는 사촌 남동생이다.[3] 원래 '경렬명순(敬烈明順)'이었으나 '명순'이라는 존호가 정희왕후의 존호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명헌'으로 고쳤다.## 이후 추탈된 공빈의 존호 경렬명헌(敬烈明獻)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휘호로 재활용된다.[4] 공성왕후 추존 때 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인조반정 이후 강제로 추탈되었다.[5] 우리나라에서는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妃)라 칭하고 별세하면 왕후라 칭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서 이루어 놓은 준례입니다만,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건대 왕비를 왕후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왕후와 왕비는 등급이 다소 다릅니다. 지금 마땅히 추존하여 왕비를 삼아 다소 높이는 분별을 보여 주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別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후략)"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23일 기해 2번째 기사의 일부에서.[6] 궁녀 출신의 승은후궁이라면 자식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종4품 숙원 품계를 받는다.(자식을 낳고도 한참 후에야 종4품 숙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왕실에 자식이 귀해지고 품계 주는 것을 남발하여 승은후궁도 자식을 낳지 않고도 숙원으로 봉하거나 출산을 하고 처음부터 숙의나 귀인으로 봉하는 경우가 생기긴 했지만, 선조 연간에는 전혀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다.[7]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선조의 간택후궁인 정빈 홍씨·정빈 민씨와 승은후궁인 인빈 김씨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인빈은 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으로 시작한 반면, 정빈 홍씨와 정빈 민씨는 1580년(선조 13년), 종2품 숙의로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592년(선조 21년), 임진왜란 당시 아직 자식도 없었던 홍씨와 1남 1녀밖에 없었던 민씨는 이미 정1품 빈(嬪)이었던 반면, 4남 4녀나 낳은 인빈은 숙의에 불과했고 무려 12년 뒤인 1604년(선조 37년)이 되어서야 빈으로 겨우 진급한다. 마찬가지로 공빈도 승은후궁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빈에 봉작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8] 공빈의 할머니는 정인지의 증손녀이자 세종의 아들 계양군의 외증손녀였고, 어머니는 태종의 딸 경안공주의 직계 후손(6대손)이었다.[9] 공교롭게도 공빈의 시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와 공빈의 할머니는 6촌 자매간이다.[10] 최입(崔岦)의 <간이집(簡易集)>에 실린 귀인 정씨 묘지명에 따르면 이때 숙의 2명을 뽑았다고 하는데 다른 1명이 공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추후에 빈의 칭호인 인빈(仁嬪)이 된다.[12] 【애초 궁중에는 조종조로부터 금성(金姓)은 목성(木姓)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를 선택할 때 언제나 제외했었는데, 상이 임금이 되어 3빈(嬪)이 모두 김씨(공빈, 인빈, 순빈)였고,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중전(中殿)의 자리를 잇게 되자 식자들은 불길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13] #.[14] 계승범, <모후의 반역> 참고.[15] 다만 광해군이 조성한 묘소 근처의 문인석이나 무인석, 석등 등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성릉으로 조성할 당시의 모습을 여전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과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무덤인 회묘가 먼저였는데 회묘도 본래는 윤씨지묘라는 이름의 무덤이었지만, 연산군이 폐비를 왕비로 복위시킨 뒤 무덤도 회릉으로 고쳤다가 중종반정 이후 격하되어 회묘가 되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의 무덤은 도리상 건드는 것이 아니었던 건지, 능으로 격상되었던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16] 강이행(姜利行)의 딸.[17] 정승우(鄭承祐)의 딸. 정승우는 정인지의 손자이기도 하다. 고로 남편인 선조와 10촌으로 엮인다.[18] 권장(權璋)의 딸.[19] 조선 정종의 14남인 정석군의 외고손자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다.[20] 공빈 김씨를 비롯해서 해령부원군 김희철과 부부인 안동 권씨 사이에서는 계속 딸만 연이어 출생하다 보니, 대를 이을 남자 자식이 없자 가까운 친척 집에서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했다. 참고로 김예직의 직계 후손이자 12대손이 바로 김종필 前 국무총리이다.[21] 혈연상 실제 시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이다.[22] 혈연상 실제 시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 정씨다.[23] 선조의 또다른 후궁 정빈 홍씨의 소생이자 임해군 본인에게 있어 이복동생인 경창군의 차남이다.[24] 출처 :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11월 11일 (계해) 4번째기사. #.[25] 호환마마인 홍역을 앓다가 일찍 죽었다.[26] 궁 안에서는 경쟁자가 많기 때문이다. 당장 궁녀들만 해도 왕비와 후궁들 입장에서는 암묵적인 경쟁자나 다름없고 다른 후궁이 왕의 아들을 낳게 되면 총애를 잃을 수도 있다.[27] 임신 상태에서 좋지 않은 약들을 과다복용한 것도 있고 작중 서술에 따르면 태아가 나올 때도 정상적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태아가 제대로 자연분만되려면 머리부터 나와야 했는데 다른 신체 부위가 먼저 나왔다는 서술이 있다. 악화된 몸상태에 태아가 정상적으로 나오지 않아 난산까지 겹친 것.[28] 선조의 승은을 입는 바람에 죽게 되었던 그 동무이다.[29] 작중 허준에게 있어서 공빈이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큰데 혜민서 참봉으로 남아있던 허준이 선조의 눈에 드는 계기가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허준의 재주와 인품을 아껴 후히 대우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