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병조(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김병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김병조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연기대상 코미디 부문 최우수상[1] | ||||||||||||||||||||||||||||||||||||||||||||||||||||||||||||||||||||||||||||||||||||||||||||||||||||||||||||||||
서영춘 (1984년) | → | 김병조 (1985년) | → | 이주일 김영하 (1986년) |
}}} ||
}}} ||
<colbgcolor=#595959><colcolor=#fff> 김병조 金炳朝|Kim Byung Jo | |
출생 | 1950년 5월 23일 ([age(1950-05-23)]세) |
전라남도 장성군 | |
본관 | 광산 김씨 (光山 金氏)[2]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배우자 김현숙, 아들, 딸 |
학력 | 북이초등학교 (졸업) 장성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 17회)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 / 학사) |
데뷔 | 1975년 TBC '살짜기 웃어예' |
종교 | 불교 (법명:환희장)[3] |
경력 |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겸 평생교육원 초빙교수 |
링크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개그맨이자 대학교수.2. 생애
2.1.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얼씨구~ 지화자~"[5]
1950년 5월 23일(음력 4월 7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 거마마을[6]#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75년 TBC의 개그 프로그램 '살짜기 웃어예'를 통하여 데뷔하였다. 1980년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MC를 맡았다. 이 프로그램이 훗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프로그램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로 이어진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콩트와 슬랩스틱 위주던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닌 뉴스 보도 형식의 개그로 일요일 프라임 타임대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즉 김병조는 대한민국 최초로 TV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인 개그맨이다.
당시 앵커 역을 맡은 김병조는 독특한 헤어 스타일 덕분에 배추머리로 유명했으며[7][8], 극중 천태만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는 "지구를 떠나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거라", "제발, 교양있게 살아라", "먼저, 인간이 되거라",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안녕~ 오지마~ 와봤자 주민등록 말소야~", "인도코끼리 방구끼는 소리 하고 있네~" 등의 유행어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밖에도 공처가 컨셉으로[9]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MBC 아동 프로그램인 뽀뽀뽀에서 뽀식이로 나온 이용식과 같이 뽀병이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성인 시청자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이렇게 막연한 프로필만 봐서는 감이 잘 안올 텐데, 1980년대 김병조는 1990년대 후반의 김국진이나 2010년대 유재석에 비견할 만한 인지도와 파워를 가진 개그맨이었다. 역대 시사 개그의 1인자로 꼽히는 KBS의 김형곤보다도 먼저 시사개그를 시도했고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 CF도 많이 찍던 잘나가던 개그맨이었다. 유튜브에서 1980년대 옛날광고 모음을 보면 김병조가 정말로 많이 나온다. 그도 그럴것이 김병조는 당시 아주 잘나가던 빙그레의 전속 광고모델을 오랜 기간 했으며[10] 주력상품들은 물론 신제품이 나와 광고를 만들면 항상 출연했다.[11]
김병조의 리즈 시절은 케이블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SBS조차 개국하기 이전이라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이라곤 KBS 아니면 MBC였다. 더구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제목 그대로 일요일 저녁 편성이었는데, 경쟁사 KBS의 대표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1번지는 토요일 저녁 편성이었다. 1980년대 말 쇼 비디오 쟈키(KBS)와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두 프로그램이 일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정면으로 격돌한 것에 비한다면 탄탄대로를 달렸던 셈이다.
2.2. 한학자로 제 2의 인생
1995년 고향인 광주에 KBC 광주방송이 개국하면서 <열창무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조선대학교와 인연을 맺어 학부와 교육대학원, 평생교육원에서 명심보감 강의를 하게 되었다. 현재 조선대학교에서 명심보감을 강의하고 있다. 김병조의 높은 한학지식 덕분에 지역학계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인기도 많고 강의 질이 높은 교육봉사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12]그 간의 강의와 연구결과로 2014년에는 명심보감 해설서 전법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병조의 마음공부 上, 下권>을 집필하였으며, 현재는 동 대학에 특임교수와 명예평생교육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매년 두 번 길벗과 JTS[13]에서 주최하는 명동 거리모금 성금 사회자로 아들 김형주와 함께 참여하고 있다.
2.3. 현재 활동
그동안 이어온 명심보감 강의를 토대로 세대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아들 김형주와 함께 1인 방송회사 소쿠리TV를 만들어 유튜브 채널 "김병조의 시래기톡"에서 인터넷 방송을 진행 중이다.3. 사건사고
3.1. 민정당-통민당 사건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김병조는 출연자(사회자는 임성훈)로 참석해서 진행하던 중 대본에 있던 "민정당, 우리 민족에게 정을 주는 당 민정당, 그런데 통민당이 뭐요? 우리에게, 민족에게 고통을 주는 당, 통민당"이라는 대사를 그대로 읽었다. 정확하게는 MBC가 주도적으로 막간행사를 진행했고 소속 개그맨 중 김병조가 동원된 것이었다. 즉 MBC가 책임져야 할 일을 김병조가 뒤집어 쓴 셈이다.[14] MBC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김병조는 1987년 6월 29일에 방송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날은 6월 항쟁이 시작된 날로 민주화 열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김병조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사그라들었다.그나마 김병조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가진 개그맨이었고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그들 앞에서 제대로 말한 사람 얼마나 있었겠나?"는 동정론도 있어서 이후에도 MBC에서 뽀뽀뽀 출연, 전주 대사습놀이를 꾸준히 진행하는 등[15] 계속해서 방송 활동은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김병조 본인은 리허설 때 대본을 보고 굉장히 당황스러워서 얼버무렸고 이런 그를 본 여당 관계자들은 김병조에게 "곤란하면 그 부분은 빼도 된다. 물론 그 뒤의 일은 알아서 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특히 그때 시사개그를 처음으로 도입한 김병조의 성향으로 보아 그 때의 개그가 김병조 본인의 자발적 대사라고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후 1991년 개국한 SBS로 옮겨가서 <사랑의 공개홀>, <웃으며 삽시다>, <코미디 전망대>, <현장쇼 주부만세>에 출연하며 방송에 복귀했고 1996년에는 이상용의 후임으로 우정의 무대를 1997년 종영까지 진행했다.[16]
이후 무려 35년이 지난 2022년에도 또다시 이 사건에 대한 사과를 했다. 타격이 크긴 컸던 모양.
3.2. 망한나라당 사건
1997년 SBS <웃으며 삽시다> 프로그램[17]에서 뉴스 앵커 역으로 출연한 김병조가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쳐져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는 소식을 보도하면서 대사 끝에 살짝 "망한나라당"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를 풍자하였는데, 높으신 분들이 대노하여 김병조는 하루 아침에 방송에서 강판되었고 이것이 개그맨으로서의 마지막 활동이 되고 말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화일 뿐인 것이, 김병조가 개그 활동을 사실상 은퇴하게 된 데에는 1998년 3월 6일부터 조선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사로 부임하게 된 데에다 소속된 SBS의 개그 프로그램들이 IMF의 여파로 모두 폐지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라운관에서 은퇴를 한 뒤에도 지역행사 등에서 꾸준히 초청되어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나 하여튼 망한나라당 드립은 국민회의에서 논평을 낼 때도 사용되었고, 이후로도 네티즌들에 의해 한나라당이 존속하는 기간동안 꾸준히 알뜰(?)하게 쓰였다. 바리에이션으론 '못한나라당'과 '이상한나라당'도 존재.4. 여담
- 비평준화 시절 광주광역시(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시)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였던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한문, 영어 등 어학 및 문자 분야에서는 거의 천재 수준이었다. 참고로 광주광역시 동구·남구 을 국회의원을 지냈던 박주선 의원이 광주고등학교 17회 동기동창이다. 당시 광주-전남 지역 양대 명문고교였던 광주일고와 광주고를 놓고 서울대학교 진학을 꿈꾸면 광주일고,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꾸면 광주고를 택했는데 김병조의 끼를 알아 본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중앙대학교 연극영학과에 입학했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다녔다.#
- 고향이 광주였기 때문인지 해태-KIA 타이거즈의 열렬한 팬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전성기를 맞았던 1980년대 전속 방송국이던 MBC에도 청룡 프로야구단이 있었는데 청룡 응원단 자격으로[18] 야구장에 들어갔음에도 뒷길로 도망을 가서 상대편 관중석에서 해태를 응원했다고 한다.[19] 재밌는 것은 자신과 동명이인인 선수가 1992~1997 시즌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로 뛰었던 적이 있다는 점이다.[20] 2021년 12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김봉연과 함께 출연하여 개그맨 김병조와 야구선수 김병조가 서로 통화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참고로 김봉연과는 40년 이상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과거에는 서로 '김 선수', '김 형'[21] 등으로 불렀는데 현재 김병조는 김봉연에게 '김 교수', 김봉연은 김병조에게 '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됐다. 김병조가 회상하기로는 김봉연이 현역 당시 서울 원정을 올 때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김병조의 서울 집에 전화를 걸어서 김병조의 가족을 해태 원정 숙소인 남서울호텔(구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꼭 대접했다고 한다.
- 개그를 하기 전에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이수하였던 적이 있어서 한학 실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며[22] 또한 명심보감과 고전류 등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끔 한문을 이용한 개그를 내놓는데, 길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나 안부를 묻자 지인이 말하기를 요즘 주식회사 하느라 바쁘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럼 큰 회사 차리셨군요" 하고 감탄했더니 상대가 그게 아니라며 보여준 한자가 술 주(酒), 먹을 식(食), 모일 회(會), 일 사(事)자였다고(...).[23]
- 카투사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25][26] 1990년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토크쇼 방식으로 바뀐 후 "한 권의 책" 코너에 박미선과 함께 고정 출연하였는데 한 번은 미국인이 출연했을 때 박미선에게 대화를 하도록 분위기를 띄운 후 박미선이 말문이 막혀 데꿀멍 상태가 되자 김병조가 미국인에게 영어로 조리있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방송가에서 구봉서와 쌍벽을 이루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상가집에 가서도 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오열하다가 후배들이 모범택시 부르자 일반부르라고 한 에피소드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상들을 위한 위선사업이나 종사에는 아낌없이 돈을 쓴다고 한다.
- 불자이며, 환희장이라는 법명도 있다. 또한 BBS 불교방송의 "김병조의 이야기쇼"라는 프로그램을 25년간 진행했다. 법륜스님이 주축되어 만든 정토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 정토회 행사 때 사회도 가끔 맡고 있다.
- 젊었을 때는 잘 생기진 않았지만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세월의 풍파를 적게 맞아서 외모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비교적 잘 늙었다는 평을 받는다.
- 원래는 비장애인이었지만, 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2006년경 왼쪽 눈에 큰 병이 생겨서 치료에 최선을 다했으나 격통이 계속되고 시력을 살릴 수 없게 되어서 시신경을 완전히 제거하든가 진통제로 버티든가 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왼쪽 시신경을 제거했다는 사연이 있다.#
- 2021년 이용식과 30년 만에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이용식도 막혈관폐쇄증으로 한쪽 눈이 안 보여 둘 다 만나서 서로 똑같이 한 쪽 눈을 볼 수 없다고 눈물을 보였다. 이용식보다 2살 많은 김병조이긴 해도 이용식이랑 같이 있으니 김병조가 10살 이상은 더 나이들어 보일 정도로 많이 초췌해졌다. 물론 이용식이 동안인 것도 감안해야한다.
- 음색이 동갑인 성우 이인성과 비슷하다. 1980년대 중후반,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미스터 일요일>이라고 박수동이 그린 그림체로 3~5분 정도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만들어져 방영한 바 있는데 주인공 미스터 일요일 성우가 바로 김병조인데 이인성 톤으로 연기해 제법 잘 어울렸었다. 참고로 이 애니에서 아내 역을 맡은 성우는 배연정이다. 한 에피소드에서 직장에서 회식이 있다고 하는데 주인공 미스터 일요일이 정중히 거절하고 집에 간다. 회사 간부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택시를 타고 쫓아가보니 집에 오자마자 연탄 보일러 연탄을 갈고 있었다.(아내는 몸도 전혀 이상없고 아프지도 않다....) 웃으면서 "여보, 연탄 다 갈았어"라고 하자 아내는 TV나 보면서 "잘했어. 설거지도 해." 이때, 이 일요일이 애처가 상을 회사에서 받았기에 이걸 본 간부들이 "애처가는 무슨, 정말 공처가잖아!" 라고 황당해한다. 참고로 어린 아들도 있는데 성우가 당시 아역 연기자이던 이건주였다.
- 야구선수 선동열이 젊은 시절에 제일 좋아했던 연예인은 김병조였는데 호텔 사우나에서 같이 땀을 뺐다고 한다.
- 김병조의 아들이 KBO 허구연 총재의 아들과 친하다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1984년부터 1990년까지 MBC 연기대상에서 코미디 부문을 따로 시상하였고, 1991년부터 1994년까지 MBC 방송대상 코미디 부문, 1995년부터 2000년까지 MBC 코미디대상, 2001년부터 MBC 방송연예대상으로 바뀌었다.[2] #[3] 법륜스님이 주축인 정토회 소속이며, 상당히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4]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시민 의식을 고양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만든 대사라고 한다.#[5] 전주 대사습 놀이 진행 때만 사용한다. 김병조가 먼저 얼씨구나 지화자를 선창하면 여자 진행자가 좋다~ 이런다.[6] 제헌 국회의원 김상순도 이 마을 출신이다.[7] 이런 이유로 본인이 말했던 일화 중 한번은 동료 코미디언 이용식과 같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보고는 말하기를. "에그머니나, 돼지보쌈 지나가네."[8] 자신은 배추머리, 집사람은 무우다리이니 둘을 합쳐서 김치깍두기를 담근다는 개그도 자주 했다.[9] 예, 아내가 "OO에서 할인행사하는데, 가격이 싸서 좀 더 사왔다. 오늘 OOO원 벌었다."는 말을 2번, 3번째 반복하면서 "돈 벌었다."고 자랑하자, "여보, 제발 돈 그만 벌어와!"라며 울상.[10] 후술하겠지만 김병조는 해태 타이거즈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 해태가 1988, 1989, 1991 한국시리즈에서 세 번이나 빙그레 이글스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굳이 변호하자면 해태에서는 CF 의뢰가 없었다고 한다.[11] 근 10년 가까이 빙그레 광고를 찍었다.[12] 그 대신 1980년대 그의 코미디언 시절 전성기를 모르는 젊은 세대는 김병조가 본래부터 한학자였던 걸로 알기도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싸인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는데, 김병조의 팬이었던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했다는 후문이다.[13] 정토회 봉사단체다. 노희경, 배종옥, 한지민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14] 기사[15] 한참 활동하던 1989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으로 이 공로로 2019년 전주 명예시민상을 받았다.[16] 당시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 기금 횡령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이듬해 초에 무혐의로 풀려났다.[17] 이전의 서술에서는 SBS 코미디 전망대에서 이 발언을 했다고 적혀있었는데 코미디 전망대는 1997년 6월에 종영하고 한나라당은 1997년 11월에 탄생했기 때문에 시기상으로 맞지도 않는다.[18] 당시 MBC는 자사 전속 연예인들을 야구 응원단으로 곧잘 써먹었다. 다만 탤런트를 응원단으로 쓰자니 너무 무게를 잡아서 응원단으로 어울리지 않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었던 코미디언들이 응원단으로 투입됐다. 1982년 3월 27일 원년 개막전 영상을 봐도 코미디언 남보원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외야에서 메가폰을 잡으며 응원을 주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19] 친한 선배인 배일집이 ' 배추 어디갔어 배추' 라고 찾았고 해태응원하는걸 알고 '저 배추 소금 뿌려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20] 해당 선수는 1992 신인드래프트에서 해태가 2차 1픽을 했을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선수였지만 활약은 미미했다. 그럼에도 1993년 한국시리즈와 1996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하여 우승반지를 2개나 갖고 있다.[21] 성씨 뒤에 '형'을 붙이는 호칭은 1990년대 이전까지는 꽤 흔했다. 보통 남자들끼리 이 호칭을 썼는데 'OO이 형'이라고 부르자니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니고 'OOO 씨'라고 하기에는 꽤 가깝지만 그렇다고 반말로 하대를 하기에는 모호한 사이에서 이 호칭을 썼다. 김병조보다 나이가 두 살 적은 김봉연이 현역 시절 김병조를 향해 통상 '김 형'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22] 김병조의 별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배추머리로 인한 배추였지만, 가끔씩 불리던 별명 중에는 서당의 훈장도 있었다. 실제로 훈장 캐릭터로 자주 출연했는데 특히 모 아침프로에서는 배추훈장이란 캐릭터로 나온 적도 있었다.[23] 즉 모여서 술마시는 게 일이라는 뜻이다. 일요일밤의 대행진 271회(1986년 12월 14일 방송)에서 나온 개그의 일부분이다.[24] 현재 라디오 여성시대 단결!필승!충성! 코너 진행자.[25] 그러나 전역은 한국군에서 했다. 백마부대로 원대복귀하여 지금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해당하는 문선대에 뽑혀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되며, 그 공을 인정받아 방송국의 개그맨으로 데뷔할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인 셈이다.[26] 군번:12269676[27] 일본 닛신식품과의 기술제휴로 탄생한 제품이다. 그런 탓에 가격도 동시대 컵라면보다 월등히 비싼 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