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2 12:50:18

김봉연

김봉연의 수상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86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5p4rcEr.png KBO 한국시리즈
1983 한국시리즈 MV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2, 1986 KBO 리그 홈런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6 KBO 리그 타점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2 KBO 리그 득점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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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KBO 리그 장타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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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의 역대 직책 및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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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KIA 타이거즈 주장|{{{#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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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1px"
1982~1983 1984 1985~1987 1988~1993 1994~1997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A] 주장직 폐지 이순철
1998 1999~2001 2002~2004 2005 2006
이강철 이호성 이종범 김종국 이종범
2007 2008 2009 2010 2011
이종범장성호[B] 장성호김상훈[C] 김상훈 최희섭김상훈[D] 김상훈
2012 2013 2014~2016 2017~2018 2019~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김주찬안치홍[E]
[A]: 김일권 이후 긴 시간 동안 주장직을 폐지. 출처
[B]: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C]: 시즌 중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D]: 시즌 초 선수단의 반발로 인한 주장 교체.
[E]: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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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2군 역대 감독
신용균
(1996~1998)
김봉연
(1999~2000)
서정환
(2001~2005)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창단 멤버 김봉연(1982~1988) 이호성(199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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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현역 시절.

파일:external/cdn.mydaily.co.kr/201107201142512227_1.jpg
군산상고 3학년 김봉연 선수 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기념 리매치 인터뷰에서.
이름 김봉연(金奉淵/ Bong-Yeoun Kim)
생년월일 1952년 1월 13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본관 김녕 김씨 충의공파
학력 전주중앙초-군산남중[2] -군산상고-연세대-원광대 석사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한국화장품 (1979~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8)

1. 소개2. 유년기3. 실업야구 시절4. 해태에서의 활약5. 은퇴 후6. 트리비아7. 연도별 성적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 코치. 전 극동대학교 홍보처장 겸 교수. KBO 리그 원년 홈런왕으로 1980년대 해태왕조의 초창기를 빛낸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백넘버는 27번인데, 김봉연이 은퇴한 후 김봉연이 타격코치가 되어 키운 이호성이 27번을 썼다. 그런데 이호성의 흑역사 때문에 이 번호는...[3][4] 그래서 김봉연은 이호성 살인 사건 때 등번호를 물려줄 만큼 자기가 아끼던 후배가 그 지경이 된 걸 어이없고 속상하다고 표현했다.

2. 유년기

7남 4녀(11남매) 중 6번째로 출생, 어린 시절 몸이 아파서 학교를 몇 년 늦게 입학했다고 한다.[5]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타고난 운동신경[6]과 부단한 노력으로 군산상고연세대 야구부의 붙박이 4번타자로 활동했다.[7] 1976년 군 입대 이후 복무 기간 동안 육군 야구단에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제대하여 연세대로 복학해 활동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 비거리가 긴 홈런을 날리기로 유명했는데 공대 옆 운동장에서 친 홈런이 백양로를 가로질러 학생회관에 떨어진 일화도 있다고...

3. 실업야구 시절

1979년부터 실업야구에 뛰어든 그는 스타급 신인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고, 이후 내내 실업야구의 거포이자 스타플레이어로 실업야구를 대표했다.[8] 그래서 1979년에 한국화장품 야구단으로 데뷔해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1세의 나이로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당시 야구 선수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에 뛰어들었는데, 해태에서의 활약은 한 마디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업야구 시절 대스타였던 덕분에 프로야구 출범때 선수들의 롤모델이나 다름 없었고, 선수들 연봉을 김봉연의 연봉계약 기준으로 맞출 정도였다. 이 당시 김봉연의 연봉은 2천 4백만원. 롤모델인만큼 당연히 프로 원년 연봉 1위자리에 오른다.

4. 해태에서의 활약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선은 주로 (1번 김일권),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준환, 6번 김종모가 출전했는데, 선수의 대부분이 김씨라서 김씨왕조라고 불렸으며, 위의 김 씨들은 모두 일발 장타가 있었다. 당시 코칭스탭간의 불화와 모기업의 지원 부족, 그리고 총원 18명의 초미니 선수단 으로 해태는 4위에 그쳤지만, 해태의 3,4,5번은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였다.[9]

김봉연은 초대 주장 겸 4번 타자로서 22개의 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등극했다.[10] 홈런 수도 대단하지만, 홈런 22개 치는 동안 삼진은 겨우 16개에 그쳤을 정도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원년 홈런왕 레이스에서 1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상당했고, 당시 백인천이 계속 이를 추격하자,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타를 자청, 홈런을 쳐냈다. 이때 절룩거리면서 베이스를 돈 것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파일:vcBf5Fx.jpg
1983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장면.

이듬해인 1983년에는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여행을 다녀오다 큰 교통사고를 입어서[11] 선수생활을 위협받는 부상을 입었다. 한 달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홈런레이스에 뛰어들지만, 아무래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후기리그는 대부분 출장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당시 전,후기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규정에 따라 해태가 이미 전기리그 우승을 하여 코시 진출을 확정했으니 후기리그의 성적은 한국 시리즈 진출에 영항을 주지 않았다. 이후 회복한 김봉연은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하고, MVP를 수상한다.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97a74124.jpg
이 교통사고로 인해 코 밑부분을 무려 300바늘 이상을 꿰매게 되자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기른 운동선수가 생소하던 시절 그의 콧수염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상처가 아문 후부터 면도를 하게 되어 오랫동안 볼 수는 없었지만 콧수염은 김봉연을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12] 아이러니하게도 콧수염을 깎은 84시즌과 85시즌은 2할대 초중반의 타율로 공갈포로 전락했다. 삼손인가?[13]

1986년에는 이미 프로야구 시대의 홈런왕으로 위상을 굳혀가던 삼성의 이만수와 최초의 통산 100개 홈런 경쟁을 벌이지만, 최초 100호 홈런의 영광은 이만수가 차지했다. 대신 김봉연은 이 해에 프로리그에서의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회했다.[14] 이때의 나이가 35세. 당시로 보면 평균 은퇴나이가 한창 지난시기 였다.

결국 이듬해인 1987년부터 시즌 홈런개수가 10개 미만으로 줄었고, 1988년에도 홈런 수가 10개를 못 넘겼다. 자신의 최대 강점인 홈런이 줄어들자,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김봉연이 회고하기를 자신의 홈런 타구는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니 체공시간이 길어서 관중들이 좋아했다고 한다.#[15] 그리고 학교-프로팀 후배인 김성한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배팅 케이지에서 연습을 더 하려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고 한다.

5. 은퇴 후

1989년부터 코칭스탭이 되었다. 그 후 1994년까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16] 코끼리 감독삼성 라이온즈로 옮기면서 차기 감독 0순위로 거명되었다. 이 당시 2군 감독이었던지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프런트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17] 후배 김성한이 감독직을 맡으면서 감독직은 물 건너갔다. 1995년에는 SBS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으며, 1996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후 야구계를 떠나 교육자로 투신했고, 2001년부터 극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하였다. 2005년 경에는 MBC ESPN에서 프로야구 경기 해설을 하기도 했다.

6.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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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선수 중에서 보기드문 석사.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100개씩 영어단어를 외우고 잠자리에 든다고 하고, 대학교 시절에는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체육교사 자격증까지 땄다고 한다. 이 후 연세대 이우주 총장의 "석사과정도 밟으라"는 격려에 고무되어 석사 학위까지 따 냈다고. 특히 프로생활 중에도 경기가 없을땐 항상 수업에 참여했다니 흠좀무. 이러한 학구열은 교사인 형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아기공룡 둘리"에 '김몽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마운드에서부터 3시간이 걸려 날아오는 둘리의 초 슬로볼[18]을 기다리다 지쳐 포수, 심판과 함께 졸다가 원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만다(...)
  •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김성한 전 감독을 대신하여 KBS 광주방송국의 '베이스볼 매거진 야호'의 해설자로 발탁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김봉연 교수는 한 주간의 경기 촌평과 함께 타이거즈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데, 2013년 5월 6일에 있었던 직속후배 김상현의 트레이드 소식에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직속 후배였던 만큼 더 많은 기회를 KIA에서 부여받길 원했었다고. 하지만 프로그램이 그 시즌에 나타난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덕분에 없어졌다.
  • 교직에 들어서면서 현장을 떠난 지 15년째이지만, 여전히 야구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인터뷰에 의하면 선동열의 후임 감독으로 다시 타이거즈 일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듯 했으나 김기태가 새 감독으로 선임.
  • 해태 수석코치 시절 김성근의 그 유명한 이중오더를 밝혀낸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김성근/구설이중오더 사건 항목을 참고.
  • 2016년 2학기를 끝으로 극동대학교 교수에서 정년퇴임 하였다. 떠난 지 오래된 현장 대신 학계 경력을 바탕으로 문제가 산적한 스포츠 행정이나 산업전략 등에 기여하면 어떨지 올드 팬들은 또 다른 변신을 기대하고 있다.
  • 전주시 어느 아파트에 가면 친형이 경비원으로 재직 중이신데 친해지면 음료수 한 병과 싸인볼로 맞바꿀 수 있다고 한다.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74 269 .331
(5위)
89 14 1 22
(1위)
52
(4위)
55
(1위)
7 34 .636
(2위)
.406
1983 80 286 .280 80 10 1 22
(2위)
59 53
(4위)
2 42 .552
(3위)
.372
1984 97 341 .249 85 18 0 17
(4위)
48 42 3 54 .452 .352
1985 91 316 .253 80 9 1 17
(3위)
47 45 7 46 .449 .348
1986 108 407 .300
(4위)
122
(2위)
18 3 21
(1위)
67
(1위)
63
(3위)
3 42 .514
(1위)
.363
1987 98 339 .271 92 11 2 6 39 33 1 31 .369 .331
1988 82 187 .257 48 4 0 5 22 20 1 13 .358 .303
KBO 통산(7시즌) 630 2145 .278 596 84 8 110 334 311 24 262 .478 .35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KBO_League.svg.png
KBO 리그 역대 홈런 1위
역대 타율 1위 | 역대 최다안타 1위 | 역대 홈런 1위 | 역대 타점 1위 | 역대 득점 1위 | 역대 도루 1위 | 역대 출루율 1위 | 역대 장타율 1위 | 역대 승리타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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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px; margin-top:-1px; margin-bottom:-1px"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김봉연
해태 / 22개
이만수
삼성 / 27개
이만수
삼성 / 23개
김성한
해태 / 22개
이만수
삼성 / 22개
1986년 1987 1988년 1989년 1990년
김봉연
해태 / 21개
김성래
삼성 / 22개
김성한
해태 / 30개
김성한
해태 / 26개
장종훈
빙그레 / 28개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장종훈
빙그레 / 35개
장종훈
빙그레 / 41개
김성래
삼성 / 28개
김기태
쌍방울 / 25개
김상호
OB / 25개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박재홍
현대 / 30개
이승엽
삼성 / 32개
타이론 우즈
OB / 42개
이승엽
삼성 / 54개
박경완
현대 / 40개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이승엽
삼성 / 39개
이승엽
삼성 / 47개
이승엽
삼성 / 56개
박경완
SK / 34개
래리 서튼
현대 / 35개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대호
롯데 / 26개
심정수
삼성 / 31개
김태균
한화 / 31개
김상현
KIA / 36개
이대호
롯데 / 44개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최형우
삼성 / 30개
박병호
넥센 / 31개
박병호
넥센 / 37개
박병호
넥센 / 52개
박병호
넥센 / 53개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에릭 테임즈
NC / 40개
최정
SK / 40개
최정
SK / 46개
김재환
두산 / 44개
}}}}}} ||


[1] 최다 득점 부문은 1999년에 신설.[2] 원래 전주북중학교에 다녔는데 야구부가 해체되어 전학을 갔다고 한다 #[3] 타이거즈의 27번은 강철민, 호세 리마를 거친 뒤 2009년부터 김상현이, 그리고 2013년에 신승현이 쓰고 있었다. 2013 시즌 종료 후 신승현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김태영이 물려받았다. 이호성부터 27번을 단 기아 선수들이 자살, 트레이드 이후 사이버투수, 돌연사, 트레이드, 트레이드 등의 부침을 겪으면서 27번 잔혹사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 그리고 김상현이 음란행위로 임의탈퇴되면서 저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시즌에는 포수 이홍구가 달았으나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현재는 SK에서 트레이드 되어 온 이명기가 달고 있다. 이명기는 KIA 타이거즈 이적 후 맹활약 하다가, 현재 매우 부진하고 있다. 이명기 이후에 27번을 이어 받은 문선재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 김봉연이 타이거즈 레전드이기도 하고 안습해진 27번이 더 이상 안습해지지 않길 바라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팬들이 제법 있다.[5] 그렇다 보니 73학번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 55년생인 김준환과 군산상고 동기생[6] 김재박과 함께 대학야구 도루 랭킹 1, 2위를 다퉜다고 한다.[7] 군산상고 시절 초기에는 싹수가 보이는 김봉연을 견제하는 일부 선배들에게 심한 기합을 받고 운동을 방해받아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운동을 훼방놓는 와중에도 4번타자 자리를 꿰찬 것.[8] 당시 실업리그는 거의 프로 리그처럼 운영되었으며, 한국 시리즈(당시 명칭으로는 코리안 시리즈)도 있었다.[9] 그 다음 83년에는 2번 김종윤과 그 해에 합류한 재일교포 포수 7번 김무종까지 더하면 9명 라인업 중 7명이 김씨. 거기다 선발투수가 김용남이 나오면 10명 중 8명이 김씨. 그 당시 KKK타선이라고도 불렸다.[10] 원년 1982년에는 각팀 경기 수가 80경기에 불과했으니, 거의 나흘에 한개 꼴로 홈런을 친 셈이다. 만약 팀당 경기 수가 100경기 이상이었다면, 더 많은 홈런도 칠 수 있었다는 의미.[11] 1983년 6월 28일(이 당시 올스타전은 6월 3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친구의 자가용을 함께 타고 여수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남해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를 운전하던 김봉연의 친구가 화물트럭을 추월해 앞서가려다 맞은편 차선에서 버스가 나타났고 그 버스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다가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고였다. 이 사고로 김봉연은 전남대병원에서 5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은 뒤 의식을 회복했지만 같은 차에 탔던 친구와 친구의 아들은 중상을 입었고 친구의 부인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이 때 김봉연은 부인과 자녀를 대동하고 여행을 떠났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다른 차를 타고 있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12] 김봉연 인생에서 콧수염을 기른 시절은 1983년 후반기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활약과 그 콧수염에서 나오는 강렬한 인상덕택에 콧수염을 기른 김봉연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많이 남아있는 것.[13] '탈모왕'이라는 별명을 이 때 얻게 되었다. 별로 달가운 별명은 아니다. 홈런을 노리고 온 힘을 모아 어퍼스윙을 해서 모자가 자주 벗겨졌던 것. 그래서 당시 김응룡 감독이 '헬멧을 끈으로 묶고 나가라'고 했을 정도다. 결국 홈런을 포기한 '공심'(마음을 비우다) 타법을 선언하며 예전 기량을 되찾았다.[14] 1986년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프로통산 99개 홈런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87년 시즌의 첫 홈런이 100호 홈런이 되었다.[15] 공의 아래 부분을 때려 공을 띄우는 스킬을 익혔다.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홈런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비슷하다.[16] 등번호까지 물려주면서 공들여서 자신의 타석이였던 4번 타자로 키운 이호성은 김봉연이 이 시기에 키운 선수였다. (이호성은 1990년에 해태 입단)[17] 김봉연 본인은 인터뷰에서 구단주가 해태에서 기아로 바뀌면서 감독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밝혔다.[18] 둘리는 김몽연의 팬이라는 설정이고, 바로 전 장면에서 둘리의 강속구에 야구장 벽이 뚫리는 것을 본 김몽연 선수가 원하는 대로(빠른 공 보다는 느린 공이 치기 편하지 라고 했다)초 슬로볼을 던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