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00:20:08

장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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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김현태 이광용 권성욱 강성철 이기호 이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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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 이용철 장성호 안치용 봉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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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성호(張盛好 / Chang Sung-ho )
생년월일 1977년 10월 18일 ([age(1977-10-18)]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학력 충암초 - 충암중 - 충암고
포지션 1루수, 좌익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96년 2차 1라운드 (전체 6번,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6~2010)
한화 이글스 (2010~2012)
롯데 자이언츠 (2013~2014)
kt wiz (2015)
종교 개신교
해설위원 KBS/KBS N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6~)
응원가 기아 시절: 장윤정 - 사랑아[1][2]
롯데 시절: The Beatles - Let It Be[3][4]
공통 응원가: Johnny, I hardly knew ya[5][6][7][8]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7 2009
수상 기록
2002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2000, 2002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7 2,100 안타 2012년

파일:KIATIGERS_1.png
-1 [[틀:KIA 타이거즈 주장|{{{#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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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1984 1985~1987 1988~1993 1994~1997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A] 주장직 폐지 이순철
1998 1999~2001 2002~2004 2005 2006
이강철 이호성 이종범 김종국 이종범
2007 2008 2009 2010 2011
이종범장성호[B] 장성호김상훈[C] 김상훈 최희섭김상훈[D] 김상훈
2012 2013 2014~2016 2017~2018 2019~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김주찬안치홍[E]
[A]: 김일권 이후 긴 시간 동안 주장직을 폐지. 출처
[B]: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C]: 시즌 중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D]: 시즌 초 선수단의 반발로 인한 주장 교체.
[E]: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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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플레이 스타일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3.2. 해태-KIA 타이거즈 시절
3.2.1. FA 파동과 트레이드
3.3. 한화 이글스 시절
3.3.1. 2010 시즌3.3.2. 2011 시즌3.3.3. 2012 시즌
3.4. 롯데 자이언츠 시절
3.4.1. 2013 시즌3.4.2. 2014 시즌
3.5. kt wiz 시절3.6. 은퇴
4. 해설자 경력5. 기타6.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스나이퍼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 kt wiz 소속의 타자. 현 KBS N SPORTS 야구 해설위원.

등번호는 1번으로 선수생활 내내 달았다. 해태에서의 신인 시즌인 1996년 10번과 한화 트레이드 직후에 잠깐 달았던 31번을 제외하면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1번 백넘버와 함께 해 왔다.[9] kt에서도 1번을 사용했다. 응원가 역시 하나를 가사만 살짝 바꿀 뿐 팀을 계속 옮기면서도 선수생활 내내 사용한 불후의 명곡이었다. 타격폼도 그렇고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에서 본인의 캐릭터를 질기도록 유지한 독특한 개성파.

2015년 12월 7일. 20년간의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은퇴 후 현재 KBSN스포츠 해설위원 이다.

2. 플레이 스타일

한국에서 외다리타법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 외다리타법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수많은 타자들이 쓰는 타법이지만, 일반적인 외다리타법이 몸의 리듬대로 발을 들어올려 자연스럽게 다시 딛는 과정에서 축적한 파워를 쏟아내는 과정인 데 비해 장성호의 발을 투수의 와인드업처럼 들어올려 포수 얼굴 방향으로 차내린 다음 내 딛는 타격폼은 외다리타법 중에서도 상당히 유니크하다. 동작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은근히 체력소모가 크고, 일반적으로는 큰 동작을 지탱하는 왼쪽 다리가 크게 흔들려 선구안이 무너지거나 할 공산이 큰, 타격의 원칙중 하나인 '쓸데없는 동작을 줄이고 빠르게 반응'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될 법 한 폼이다. 스스로도 꾸준히 타격폼에 수정을 가하려고 했으나 결국 디테일의 수정은 있었을지언정 스타일은 선수생활 내내 유지했다. 해태시절엔 극단적으로 허리를 웅크린 폼으로, 현역선수로 치자면 정성훈의 폼을 왼쪽으로 치는 형태였으나, KIA로 바뀌면서 점점 준비자세의 허리가 곧추섰게 되었다. 극단적인 당겨치기 타자로, 20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치고는 밀어치는 홈런이 굉장히 적은 사례. 바깥쪽 흘러나가는 공이 약점인데 이 약점을 선구안으로 메꾸는 스타일은 아직도 그대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2스트라이크를 먹은 후 스트라이크존을 좁히는 스타일. 아슬아슬한 코스의 공을 때리는 게 아니라 과감하게 보내버린다(...). 2스트라이크에서 그런 코스를 쳐 봐야 좋은 타구 나오지 않는다는 철학. 참고로 장성호는 초구 스트라이크도 잘 안친다그럼 뭘 치는 거야? . 해설위원이 되고서도 이 이론을 열심히 설파하고 있는데 문제는 KBO 올타임급 선구안을 가진 본인은 어설픈 코스를 과감하게 볼로 거를 수 있지만 과연 다른 타자들이 그게 될지...

김재현과 함께 세이버매트릭스가 사랑하는 선수로, 데뷔부터 은퇴하는 시점까지 선수 시절 내내 높은 출루율과 볼넷/삼진 비율을 유지했기 때문에 생산력 지표가 실제 클래식 스탯보다 이상하리만치 높다. 스탯티즈의 창설, 스포츠 2.0의 창간 등으로 팬들의 야구보는 눈이 높아지면서 단순한 교타자인줄 알았던 장성호의 가치가 팬들 사이에서 크게 뛰었다. 양준혁과 더불어 9년연속 3할타율이라는 3할의 대명사라고 불릴정도로 KBO의 전설적인 타격솜씨를 보였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양준혁과 더불어 '거꾸로 잡아도 3할'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타율이 2할대 중후반으로 폭락했어도 BB/K 숫자는 거의 1.0 수준을 유지했다. 일례로 더 높은 OPS와 홈런수를 기록하고 있어 겉으로는 별 차이 없어보이는 이호준과 세이버 지표를 비교하면 누적이던 비율이던 장성호가 죄다 우위다. 이런 유형의 타자로 현역으로는 김태균이 있고, 물 건너 메이저리그에는 조이 보토를 예시로 들 수 있다. 땅볼이 많은 타입이긴 하지만 어쨌든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하며, 6천타석이 넘는 타석에 서면서도 1.25:1 정도의 볼넷 대비 삼진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선구안 괴물.

1루 수비는 객관적으로는 리그 상급이긴 했으나 1루수에게 필요한 땅볼 및 기습타구 처리, 포구 및 블로킹 면에서는 그냥 준수한 편이었고 순발력으로 커버하는 편이었다.[10] 그러나 당시 거포가 부족했던 KIA의 입장상, 거포들이 모여드는 1루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한 때 1루에 장성호 대신 다른 거포를 써야 되는 거 아니냐는 여론도 상당했으며, 구단측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그에따른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그로인해 장성호는 포지션이 확실치 않았던 90년대를 제외하더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좌익수 출장을 굉장히 많이 했다. 그 와중에 기아는 장성호 대신 마해영, 김주형, 김경언, 홍세완, 이재주 등을 1루수로 꾸준히 실험했고 그 결과는 돌고 돌아 장성호였다. 1루밖에 못 보는 최희섭에 의해 강제 이동되기 전까지는.

어찌되었든 장성호는 어지간한 거포는 찜쪄먹는 140대의 wrc+와 40이 훌쩍 넘는 누적 war을 기록하며 당시 KBO의 모든 타자 중 20대에 가장 대단한 성적을 남겼던 타자들 중 3위를 마크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페이스를 보였다. 그러나 비슷한 클래스의 타자들이 나이가 들면서 부침을 반복해가며 떨어진 데 비해, 장성호는 2010년 이후 2012년 약간의 반등을 한 것을 제외하면 확연히 가라앉은 페이스로 커리어를 마친 특이케이스. 저니맨이 되면서 영입한 팀들 모두 장성호가 전성기로 복귀하는 것보다는 그 한 번의 리바운딩을 노렸었음에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려 그 몰아친 타이거즈 시절의 전성기의 대단함만 강조되었을 뿐.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

충암고를 졸업하고 1996년 KIA의 전신인 해태에 지명되어 입단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해태에 지명된 입단 동기는 故 김상진을 비롯해 김종국 등이다. 당시 서재응도 고졸 우선지명을 받았으나 인하대로 진학한 뒤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장성호는 고교 2년을 폭주생활로 날려버린 상태에서 고3때 겨우 야구로 복귀하여 당시 박명환이 에이스로 활약하던 충암고의 주축타자로 활약한, 정대만의 실사버전 상태였다. 그런데 해태에서는 오로지 이 1년도 안 되는 시기의 포텐셜만 보고 2차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1억 계약금으로 지명하는 해태 나름의 초강수를 둔다.[11] 당시 현대 피닉스가 신인이란 신인은 죄다 빼내가서 신인들의 계약금이 껑충 뛴 탓에 해태도 나름 재산 싹싹 긁어내면서 장성호, 투수 故 김상진, 포수 황성기에게 각각 1억이라는 해태 나름의 거액 계약금을 안겨줬지만 사실상 프로에서 성공한 건 장성호 뿐.[12][13]

3.2. 해태-KIA 타이거즈 시절

해태 타이거즈 No.1
장성호(張盛好 / Chang Sung-ho )
KIA 타이거즈 No.1
장성호(張盛好 / Chang Su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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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했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

이후 좌타거포 좌타거포 노래를 부르던 김응용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과 오리궁둥이로 유명한 김성한 타격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외다리타법을 장착하고 본격적으로 타이거즈의 주전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장성호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고의 타자 스카우팅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된다.

입단 첫 해인 1996년에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으나, 김성한의 지도를 받으면서 타격 스킬이 많이 늘어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번타자 1루수로 뛰며 데뷔 2년차에 우승반지를 낀다.[14]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과 KIA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모두 경험한 네 사람(이종범, 김종국, 이대진)중 한 명이며, 해태 타이거즈 마지막 우승 멤버 중 故 김상진과 함께 가장 어린 선수였다. 이 때문에 해태 막내라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 1999년 정성훈이 들어오기 전까지 3년동안 야수 막내이기도 했고…. 사실 해태에 몸담았던 선수 중 가장 어린 현역선수는 그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한화로 간 김경언이지만, 김경언은 우승멤버도 아닌데다 들어온 지 반 년만에 팀 이름이 KIA로 바뀌었기 때문에 해태 이미지가 거의 없다.

장성호가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한 시절은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시절, 즉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의 암흑기였다. 98시즌부터 이종범이 떠난 해태의 1번타자는 무주공산이었는데, 이 시기에 타율.312 15홈런 출루율.381 장타율.462 OPS.843 sWAR 3.7을 기록하며 해태의 1번타자로 활약한다. 이후 KIA로 스폰서가 바뀌기 전까지는 뛰어난 컨택 능력과 나쁘지 않은 주루능력, 더불어 빼어난 출루율로 굉장히 유동적이던 당시 타이거즈 타선에서 테이블세터와 클린업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15] 특히 99년은 당시 홍현우, 양준혁, 샌더스, 브릭스와 같은 강력한 타자들과 함께 타율 .342(3위) 24홈런 출루율 .421(5위) sWAR 5.63(9위) wRC+ 152(7위) wOBA .425 (7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난다.

KIA로 팀이 바뀐 이후,[16] 그는 클린업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본에 나갔던 이종범이 다시 돌아와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김종국이 부상과 타격부진에서 벗어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더이상 테이블 세터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 덕에 02년부터는 3번타자 1루수로 위치하기 시작했으며, 그 덕에 장성호의 타격실력이 더욱 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클린업에 안착한 2002년에 타율 .343를 기록하며 곧바로 타격왕을 차지했을 정도. 장성호는 최전성기인 1999시즌부터 2003시즌까지 그는 5시즌을 연속으로 OPS 9할을 뚫었고 4년을 3-4-5를 찍었으며, sWAR은 5점대를 당연하듯이 기록하면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17] 그야말로 OPS 중장거리형 교타자의 교본과도 같은 성적. 다만 당대 최고의 거포와 타격실력이 빼어난 선수가 많이 모이는 1루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으로 인해 골든글러브와는 도통 인연이 없었다. 신인시절에는 동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승엽에 밀리고 이승엽일본으로 가자마자 각성한 이대호김태균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18] 가장 유력한 시절은 오히려 외야수로 뛰었던 99년이었는데, 좌익수 디스카운트와 30-30의 제이 데이비스도 골글을 못받는 타고투저로 인해 안타깝게 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한 때 양준혁이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로 장성호를 뽑기도 했을만큼, KIA의 암흑기를 지켜주는 대들보 같은 선수였다. 저 시기에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반올림 3할을 달성하고, 거기에 2005시즌 3할을 달성하기 위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번타자로 나와 5타수 5안타를 치는 절실함이 낳은 괴력 비슷한 것(...)을 보여주면서 야구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타자는 3할되기 직전의 장성호라는 개드립이 널리 퍼졌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했으며 2000년 동메달로 병역면제를 받았다. 2000년에는 누가 봐도 김응용 감독의 의중대로 억지로 외야수로 국대에 들어간 경우로, 당시 배트에 연습용 링을 그대로 끼우고 타격에 들어간다거나 평범한 파울볼을 파울플라이 처리해서 1점을 헌납하는 등 부진한 타격에 에피소드만 무수히 연출하였다. 그러나 짬이 어느정도 쌓이고 팀내 타선에서 클린업에 익숙해지던 2002년 부산아시안 게임에서는 그가 전성기였음을 증명하듯, 대회내내 5할 타율을 기록하며 상대팀을 두들겨 팼다. 그러나 하필 역대 최고의 1루수였던 이승엽이 국가대표에 승선했기 때문에 이승엽의 컨디션에 따라 1루수지명타자 사이를 오가곤 했다.

2005년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어 내야수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액수인 38억 원을 받고 KIA 타이거즈에 잔류했다. 이 계약은 시즌이 지날수록 연봉이 높아지는 형태의 계약이었는데, 다음 FA 때 이적은 생각도 안 한다는 계약이었다. 이 당시 KIA가 제시한 대우에 대단히 만족했다는 증거였으며 실제로 본인 역시 이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터뷰로 증명했다. 그리고 이 계약이 이후 FA파동의 진원이 된다.

2006년에는 04-05 시즌에 약간 손해봤던 커리어가 반등하며 기아 타선을 이끌었다. 시즌 중후반까지 이대호와 타점왕 경쟁을 하며 투고타저를 뚫고 역대 거액 FA 타자중에 손꼽히는 활약을 했다. 특히 시즌이 정확히 절반을 돌 시기에 이미 12홈런을 터뜨려 수많은 기아팬들은 장성호의 커리어하이를 기대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부터 당시 이용규와 장성호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부실했던 기아 타선 덕분에 고의사구가 쏟아지며 전반적인 스탯은 약간 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때의 활약을 통해 3번타자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타자가 되었다.[19] 그렇게 기아는 이용규, 장성호, 이재주[20]의 활약과 서정환의 투수진 혹사를 통해 겨우겨우 4강에 진출했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탈락.시즌 후 커리어 마지막 국가대표에 뽑혔으나 그 국가대표는 전설의 도하 참사 대표팀. 장성호는 이 대표팀에서조차 3할과 홈런 1개를 치며(...) 역시 3할하면 장성호라는 이미지를 이어갔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 장성호의 성적은 9년 연속 3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훌륭했는데, 전성기였던 9년 동안 장성호는 그 기간 동안 타율 .317(1위) 151홈런 610타점(4위) 1341안타(1위) 747득점(1위) 2루타 258개(1위) 2115루타(1위) 590볼넷(1위) 출루율 .414 장타율. 500 OPS.914 sWAR 43.34(2위) wRC+ 147.1, wOBA .405를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꼽기에 손색이 없었다. 괜히 양준혁이 본인의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로 장성호를 지목한게 아닌 것이었다.

2007년에는 구단 선수들의 투표에 의해 주장으로 선출되었다. 해태 시절 지명권이 있던 최희섭이 메이저리그에서 완전히 연을 끊고 영구 귀국을 함으로서, 아예 한국 리그에 오면서 이전의 장성호는 1루수를 최희섭에게 내준 뒤 본인은 신인 시절 처럼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크게 타선이 보강되지 않은 타이거즈의 대들보였으며 김기아라고 놀림받던 타선에서 이용규와 플루크시즌이었던 이현곤과 함께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타자였다. 그러나 시즌 중반 한화 전에서 신경현과의 홈플레이트 공방전 과정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상태로 서정환 감독의 역대급 망상이었던 섬머리그[21] 우승을 위해 제대로 휴식이나 치료를 하지 않고 계속 출장하면서 부상이 악화돼 결국 이후의 커리어 하락의 계기가 되었다. 대신이라면 이 시기에 장성호의 유명한 절구질[22]이 중계되었고, 장성호에 대한 부정적 편견[23]이 싹 날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0년 연속 3할이라는 리그의 대기록이 걸려있던 시즌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주목도도 높아졌던 시즌으로, 2005시즌의 전설적인 활약(?)의 이미지가 남아있던 덕에 시즌 말미에 경기가 끝날 때마다 장성호 타율을 계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부상의 여파로 10년 연속 3할타율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연장의 실패에서 멈추지 않고 본인의 커리어의 일종의 전환점이 되어버린 시기였다.

2008년부터는 부상과의 사투를 벌이곤 했다. 08년에는 최희섭의 부진으로 인한 주전확보와, 고의사구효과로 어찌어찌 커리어 반등에는 성공했지만 대신 조범현 감독과 주전 및 포지션 문제로 앙금이 생겼고, 최희섭이 각성해버린 2009년부터는 확실히 입지가 줄었다. 당시 포지션에서 경쟁하던 다른 타자들에 비해 확실한 매력이 부족한 탓인지 결국 플래툰 타자가 되었고, 수비포지션 역시 매우 유동적이었다. 또한 이전의 부상의 여파가 여전히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한 몫했다. 2009년은 98년 이후 장성호의 커리어 로우 기록이었다. 다만 시즌 내내 장성호는 불평불만 없이 무난하게 시즌을 치렀고, 당연히 팬들은 장성호가 단순 안식년을 치르고 내년을 노릴 것으로 생각했다. 이유는 바로 상술한 FA 계약으로, 연봉이 꽤 높아 다른 구단이 영입하기엔 보상금이 걸림돌이 된 탓에 KIA 잔류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성호는 FA 신청을 선택했고 모든 야구 커뮤니티가 동요하는 사건이 시작되었다.

3.2.1. FA 파동과 트레이드

FA를 신청했지만, KIA 프런트로부터 무시에 가까운[24][25] 대응을 받고 시장에 나왔다. 기아 구단에서도 이렇게 나올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앞선 계약 기간 동안 장성호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앞서 언급된 07년 무릎부상 뿐 아니라 08년 손목, 등, 갈비뼈 등의 부상이 있었고, 09년 시즌 종료 뒤 손목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26] 결국 구단 입장에서는 06년의 활약을 제외하면 실패한 계약이었으니, 두번째 계약에서도 무리한 금액을 질러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27] [28]

하지만, 장성호가 시장에 나왔음에도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이 없었다. 연봉 및 보상금이 워낙 막대했고, 부상과 수술 경력,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29] 더욱이 컨택터 1루수라는 애매한 특성 역시 타 구단이 원하는 스타일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2005년 첫 FA 당시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30] 구단이 장성호를 탐냈었으나 불과 5년도 안 되어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FA제도의 보상금 등의 제약이 없었다면 원하는 구단은 있었으나, 이미 구단과 장성호가 서로 돌아선 상황이 명백한 이상 트레이드 매물이 될 것이 자명한 장성호를 FA로 영입할 이유는 사라졌다. 장성호는 FA신청 이후 내내 이적을 원했고 KIA에 다시 발을 붙일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는데 , 이것이 장성호 스스로 본인의 시장성을 깎아내는 행동이 되었다.

결국 기아와의 최종 협상에서 연봉 2억 5천만 원의 재계약 제의를 받자 팀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2010년 1월 14일 1년 2억 5천만원으로 재계약했으나 구두상으로 '조건이 맞을 경우 트레이드 추진'이라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3.3. 한화 이글스 시절

한화 이글스 No.1
장성호(張盛好 / Sung-ho Chang)

한화 또는 두산[31]으로의 트레이드설이 돌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6월 8일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장성호+이동현+김경언안영명+김다원+박성호의 3:3 트레이드.[32]

이 시기의 장성호의 평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이며 일부 반론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FA이후 트레이드 요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팬들이 장성호의 잘못으로 보고 있으며 기아팬들이 등을 돌린 계기도 대부분 이 때였다. FA때 언론플레이는 오히려 장성호에게 긍정적이었던 편이었는데, 이는 장성호의 언플이 철저하게 감독과 프런트를 향했고 단순히 구단이 싫다는 투정이 아니었기에 작용한 모종의 동정론과, 장성호라는 선수가 한국프로야구의 차세대 레전드이자 타이거즈라는 구단의 불세출의 스타라는 압도적인 위상이 기능한 사례이다. 또한 전년도에 이도형으로 인해 FA규정의 불합리함이 불거진 상황에서 장성호는 '구단이 선수의 권리가 있으니 따라야 한다' 는 개념과 '선수에게 불리한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 는 개념의 큰 충돌이었으며, 에이전트 없는 FA 권리자의 상징으로 언론에 비추어졌다. '장성호가 입털고 다른구단 가서 싫다' 는 주장은 당시의 분위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당시에는 장성호가 기아에 입지가 없었다는 것이 팬들에게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며 이런 정황이 칼같이 맞아떨어져 fa미아가 되었음에도 트레이드로 풀릴 수 있었다. 실제로 KIA 구단은 장성호에게 레전드 대접을 해주겠다는 어떠한 자세도 없었고, 어쨌든 장성호는 한화에서 명실공히 2년간 주전에다 2011년은 후반기부터는 없어도 되는 수준이었지만 2012년에는 어쨌든 리그 OPS 20위의 준수한 타자였으니 아직 주전으로 뛰고 싶다는 본인의 주장은 일단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반면 장성호 본인 스스로 기존의 상식적으로 여겨지던 트레이드 룰을 혼란스럽게 하고 구단 운영을 꼬아버린 것 역시 명백하며, 엄연히 계약한 타자가 2군에서 태업을 작렬한 것 역시 나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kt로 이적한 이후 본인의 인터뷰로 추측하자면 감독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본인의 잘못으로 인정하는 듯 하다.

KIA는 이종범,김종국 이후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덕아웃 리더를 잃었으며, 이종범마저 은퇴해버렸던 12년 이후, 한 동안 그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 장성호가 나가면서 타이거즈 구단에는 이종범과 이용규사이의 중견선수가 제 앞길 가리기도 빠듯한 김상훈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김상훈이 은퇴하고 이용규는 타팀으로 이적해 가면서 팀리더의 공백은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더 현실적으로는 장성호가 나가고 나자 막상 기아의 1루 및 지명타자 자리는 최희섭이 계속 부상당하면서[33] 매년 1자리 이상 펑크가 났으며, 이 펑크는 브렛 필을 영입하고 나서야 풀리게 되었다.

한화의 경우 어쨌든 단순 전력에는 플러스이긴 했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이는 사건이었다. 장성호 스스로 트레이드 되고 싶다며 계속 한화를 언급하면서 본인은 한화로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당시 한화팬들은 주전자리를 원하는 장성호가 한화를 원하는 것은 우리 팀이라면 주전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비추어졌고 자연스레 우리가 만만하냐?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와중에 보인 한대화 감독의 오매불망 장성호 저자세 역시 한화팬의 자존심에는 약간의 스크래치였다.[34]

이래저래 서로서로 벌레 씹은 듯한 결론. 스토브리그를 휩쓸던 태풍이 드디어 잦아들었다.

3.3.1. 2010 시즌

6월 16일 안영명과의 이적대결을 펼쳤다. KIA팬들은 홈런 맞으라고 하고 한화팬들은 삼진 잡으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론은 삼진….

6월 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역전 결승타를 쳤다. 그러나 이후 두 달 가까이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며 한화팬들이 수비담당관, 장성호-안영명 트레이드가 아니라 김경언-안영명 트레이드라며 까고 있다. 영입 목표였던 장성호가 오히려 부진하고 기아에서 잉여자원이라고 버린 김경언이 최근 중견수로 출장하며 3할 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니….

7월 28일 류현진의 등판일에는 병살타로 찬물을 끼얹어서[35]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패배가 모두 장성호의 책임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한화팬들이 가장 예민해지는 류현진의 등판일이라….

그러나 류현진의 다음 등판날인 8월 3일 넥센전에서는 선취점과 결승타점을 내고[36] 그 다음 등판날인 8월 8일 롯데전에서는 시즌 첫 홈런을 치고 호수비까지 했다. 덕분에 아직 스탯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까이는게 일시적으로 줄어든 상태. 어떤 경기에서 잘 해야 일시적으로라도 까임 방지권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달은 듯.

그리고 또 몇 경기동안 제대로 삽질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다가, 류현진의 등판일이었던 8월 17일 LG전에서 또 홈런을 쳤다. 이 홈런으로 역대 12번째 900타점 달성…. 다만 이 날은 홈런을 치긴 했어도 안타를 치고 3루까지 가다가 주루사한지라, 마냥 깔 순 없지만 까방권을 주기도 뭐한 애매한 상황. 류현진도 16승을 달성하지 못한데다 경기 결과도 무승부로 끝났고.

부진 원인은 아무래도 스프링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것과 트레이드 파동 때문에 정신적인 방황까지 겹친 것이 가장 크다. 실제로 한대화 감독은 현재 훈련이 부족해서 하체가 부실해진 상태다. 올 시즌 끝나면 하체부터 강화시킬 것이라고 공표해둔 상태. 그렇게 피지컬이 부실한걸 알면 2군을 보내든가, 아니면 타순조정이라도 해야 되는데 1루수 철밥통에 클린업트리오 타순으로 기회 말아먹은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한대화 ㅅㅂㄹㅁ!

9월 13일 vs LG전에서 올시즌 첫 연타석 홈런을 쳤다. 근데 그 경기는 7:10으로 졌는데, 7점 중 6점이 장성호의 몫이다. 슬슬 감을 되찾는거 같은데, 시즌은 거의 막바지라….시즌 끝나가니 슬슬 오르고

2010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0.245 출루율 0.344 OPS 0.673 4홈런 29타점.

신인시절의 2시즌을 제외하면 타율 0.280 OPS 0.800 이하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타자였기에, 커리어로우 성적이다…. 이 때문에 통산타율은 0.306에서 0.303으로, 통산출루율은 0.400에서 0.398로 하락.

그리고 아래 기록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2010년 시즌까지 통산 1799안타 199홈런 898볼넷 699삼진이다.아홉수도 이런 아홉수는 없다

3.3.2. 2011 시즌

2010년 10월 18일 오른쪽 어깨 연골 봉합수술을 받았다. 미니홈피 가보면 병상에서 생일을 맞는 사진도 있다….

이전에도 계속 통증을 느꼈으나 FA를 위해 진통제를 먹으면서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트레이드 당시에는 '프로야구 선수 누구나 갖고 있는' 잔부상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덕분에 한화 팬들에게는 말년에 돈도 벌고 퍼질곳 찾아 왔다고 폭풍처럼 까이는 중에 장사기라는 멋진 별명까지 얻었다. 아예 방출해버리자는 팬들도 많다. 물론 전부 5월 되니 버로우

그런데 우습게도 개막전부터 김강이 타격은 물론 수비에서 완전히 무너지자 한화 이글스 갤러리를 비롯한 주요 야구 사이트의 한화 팬들은 장성호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4월 24일 이대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되었다. 그날 치른 두산전에서 3번 지명타자로 출격하여 4타수 1안타 1타점으로 1800안타를 달성했으며, 4월 26일 넥센전에서는 2타수 2안타 2볼넷으로 전 타석 출루에 성공하고 900볼넷도 달성했다. 하지만 기껏 장성호가 돌아왔더니 다른 타자들이 부진하는 바람에(특히 넥센전에서의 최진행) 류현진이 완투패를 먹는 참사가 벌어졌다.

6월 16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4타석 4연속 볼넷으로 한국 프로야구 통산 4번째 1000 사사구를 달성했다.# 그리고 그 볼넷은 결과적으로 카림 가르시아의 만루홈런으로 이어졌다.

7월 2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KBO 역사상 5번째로 통산 1000득점 달성.

올스타전 브레이크 기점으로 타격과 선구안이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다. 본인이 출루하는 일도 거의 없고, 득점권 찬스땐 여지없이 똥볼에 폭삼.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는 이제 장스나라는 별명 대신 장물총, 장폭삼, 장조루, 장득병, 장광고 등으로 도배하면서 까고 있다. 8월 26일 LG 트윈스전에서는 무려 6타석 동안 출루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그 뒤로는 명불허전의 선구안으로 볼넷은 잘 골라 나가고 있으나, 내야 플라이, 땅볼 등등을 자주 치며, 타격에서는 아직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선구안은 살아있는 게 확실하나, 2년 연속 스프링캠프를 소화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지 체력 저하가 확실히 눈에 보이는 상태. 게다가 아주 야금야금 볼넷 골라나가는 것도 떨어졌다.

최종성적은 타율 0.244 출루율 0.379 95안타 8홈런 37타점. 81개의 볼넷은 리그 1위 기록이다. 특이한 점은 달랑 홈런 8개치고 전구단 상대홈런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물총에 스코프를 달았나? 최훈은 2012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스나이퍼의 기본은 보는 것이라면서 보는 것 밖에 못하는 모습으로 장성호를 디스묘사 했다.

그런데 또 다시 수술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라고. 이번에도 스프링캠프 참가는 힘들다고 한다. 악! 장성호 또 수술했다. 한화 초비상 김태균과 박찬호의 영입으로 희망에 부푼 한화 팬들에게 또 다시 찬물을... 이쯤되면, KIA에서의 갈등이 단순히 코치진이나 프런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을 듯.

3.3.3. 2012 시즌

어깨부상을 딛고 재활해서 시범경기부터 등장했다. 바뀐 점으로는 라식을 해서 안경을 벗었고, 외다리 타법을 바꿔서 아예 다리를 들고 치지 않았다. 이후 다시 외다리 타법으로 돌아가긴 했으나 다리를 드는 높이가 낮아졌다.

2012 시작부터 한화팬들은 그 동안 장성호의 3번에 우려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개막 초에는 아직 체력이 있어서인지 김태균과 함께 중심타선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문제는 최진행과 테이블세터

4월 12일에 1900안타를 달성했다. 큰 부상만 없다면 시즌 후반에 2000안타를 달성할 것으로 보이나, 훈련량이 부족한지라 시즌 중후반에 체력 저하가 우려된다.

5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역대 2번째 개인 통산 1000볼넷을 달성했다.

6월 29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통산 3000루타를 솔로홈런으로 장식했다. 역대 4번째 3000루타.

8월 1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포항 야구장 1호 병살타를 쳤다.

9월 1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포항 야구장 경기에서 2000번째 안타를 쳤다. 브라이언 고든은 허용 투수가 되었다

그런데 대기록 작성에 너무 흥분을 했는지 6회 말, 2사 상황에서 하주석의 호수비에 이은 송구를 그대로 알을 까서 실점을 유발, 이후 류현진은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그 회 3실점을 해 패전 위기에 처했다(...). 대기록 달성하고도 팬들에게 좋은 소리는 커녕 포풍까임을 받게 됐다.

10월 2일 대전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4회 말 선두타자로 등장, 채병용을 상대로 우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선행주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프로 통산 아홉 번째 1000타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성호의 1000번째 타점은 이 경기의 결승타점이 될 뻔했으나 불펜의 부진으로 경기가 뒤집혔는데, 다행히 김태균의 끝내기 안타가 작렬, 이날은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다.

3.4. 롯데 자이언츠 시절

롯데 자이언츠 No.1
장성호(張盛好 / Sung-ho Chang)

2012년 11월 27일, 롯데 자이언츠 신인 대졸 좌완투수 송창현과의 맞트레이드로 롯데로 이적하게 되었다. 한화로서는 부족한 투수 자원을 보완하고 롯데에서는 홍성흔이 빠진 구멍을 메꿔줄 자원을 보완하기 위해서 한 트레이드 같지만, 17년간 통산 타율 2할9푼7리 2007안타 1076득점 1000타점을 올린 베테랑 선수와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신인 투수와의 일대일 트레이드라는 점에서 논란이 생기고 있다. 사실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트레이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장성호의 한화이글스에서의 성적만 놓고 본다면 3년간 타율이 2할 5푼대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혹자는 한화에 보탬은 안되고 개인 기록 채우려 왔다는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 김태완의 복귀로 장성호의 자리가 없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얽혀있다.

하지만 2012 시즌 OPS 20위권 선수를 2대1이 아닌 1대1 트레이드를, 그것도 제대로 검증도 안된 신인투수와의 트레이드를 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고있다. 뭐니뭐니해도 장성호는 한화가 가진 최고의, 아니 유일한 트레이드 카드였으며 [37] , 동시에 트레이드 상대는 선수진이 쏠쏠한 롯데. 게다가 롯데는 1루/지명타자가 없어 차기시즌 준비에 목이 타던 상태였으며 이에 따라 트레이드 자체를 롯데에서 먼저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에서 한화는 롯데의 치명적인 약점을 시원하게 긁어주었고, 동시에 팀의 최고의 트레이드 카드를 대졸 미필의 무명투수 한명에 써버렸으며, 동시에 롯데는 장성호 트레이드를 발판삼아 FA 보상선수 픽에서도 대박을 터뜨리며 2명의 FA로 인한 출혈을 최소한의 공백으로 메우게 된다. 아무리 장성호의 서비스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곤 하지만 송창현도 결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대졸미필이며, 송창현 외에도 선수를 얻어 올 수 있는 카드를 송창현으로 거래를 끝내버렸다는 건 송창현의 차후 성장과 아무런 상관 없는 치명적인 장사의 실수다. 1+1 제품에서 1을 그냥 포기한 수준.[38] 하지만, 트레이드 결과는 결국 시즌 개막 후에 밝혀지는 것이므로 속단은 금물.[39]

11월 28일, 이적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통영시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의 납회식에 참석하여 새 팀에서의 새출발에 대한 강한 의욕을 다졌다.

등번호는 기아, 한화시절때부터 썼던 1번을 계속 쓴다. 기존에 1번을 썼던 이승화는 51번을 쓰게 되었다.

3.4.1. 2013 시즌

3월 30일 한화 이글스와의 개막전에서 5번 타자로 출전했다. 4회와 6회에 뒤져있는 스코어를 따라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천금같은 볼넷[40]을 얻어냈고, 4:5로 뒤진 9회말 1사 만루에서 안승민의 스플리터를 절묘하게 동점 적시타로 만들어 내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롯데에 와서도 쩌는 친정저격 여왕 갈매기에 이은 저격 갈매기 추가요

2013년에는 박종윤과 1루수 자리에 번갈아 선발 출장중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만큼 수비 능력이 현저하게 딸리기 때문에... 초반엔 팡야보다는 타격 능력이 월등히 좋아 대타로도 종종 나왔으며, 지명타자로도 나왔다. 좋은 타격감과 자신의 특기인 눈야구를 후배에게 전수하는 모습 등으로 인해 팬들의 지지가 높아 한화 이글스 입장에서는 아쉬운 장면이었지만, 초반과는 달리 팀 전체의 타격력 하락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고 본인도 점차 타격 부진에 빠져 결국 5월 13일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2군에서 권두조 감독님의 은총을 받아 신나게 구르다가 6월 경에 1군에 올라왔다. 올라와서 결승타를 친 건 좋았는데 올라온 당일 주루 플레이를 하다가 팔꿈치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도로 2군에 갔다. 아이고 이 유리몸... 7월달에 부진한 김대우와 자리를 바꿔 올라왔다.

결국 2013 시즌은 83경기에 나가 타율 2할 6푼 6리에 4홈런 27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그렸으며, 곧 다가올 2차 드래프트에 대해서도 장성호를 보호선수에 묶지 않는 걸 당연시할 정도로 입지가 좁아졌다. 이적 당시 송창현하고 비교하며 한화 팬들이 아우성치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3.4.2. 2014 시즌

시즌 전 인터뷰에서 2014년 후 은퇴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은퇴식은 KIA에서 치루고 싶다고. KIA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루이스 히메네스최준석이 롯데에 영입되면서 장성호의 입지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시즌 초에 잠시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으나 5경기 5타석에 나와서(모두 대타로 출전했다) 안타를 하나도 때리지 못했으며 루이스 히메네스가 콜업되면서 2군으로 내려갔다. 5월 9일 이후 한동안은 2군 경기에도 나오지 않다가 5월 30일에야 다시 출장.

일단 퓨처스리그 성적은 3할 6푼에 볼넷도 적지않게 골라내 장성호다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1군경기 출장은 위에서 말한 5경기 5타석이 전부. 히메네스가 없다고 해도 박종윤과 최준석에 밀려 롯데에서의 1군 출전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클라스는 영원하지 않다

조성환이 은퇴를 선언했을때 자신의 페이스북에 눈물 셀카를 올렸다. 팬들은 슬픈 것은 공감하지만 왠지 웃긴다고(...) 후에 다음 스포츠에서 조성환이 카톡 상태 메시지를 "굿바이"라고 했는데, 이걸 본 장성호가 울컥해서 진짜로 울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1년 선배가 은퇴하니 자기 나이를 실감하기도하고 슬프기도 해서 울었을 듯. 둘은 충암고 선후배 관계이다.

6월 19일 이후 재활군에 내려가며 쓸쓸하게 시즌을 끝냈다. 팀도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내부 문제까지 발생하며 여러모로 베테랑 장성호에겐 씁쓸할 시즌.

시즌 후, 일부 KIA 팬들은 장성호의 복귀를 바라고 있다. 프런트가 물갈이되어 장성호와의 갈등이 약화되고, 정신적 지주인 이종범선동열 감독이 사실상 내치면서 반강제로 은퇴하고, 팀 성적은 추락했다. 급기야 2014년엔 나지완이 부상을 숨기고 AG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병역특례를 받아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는 등의 좋지 못한 일 등이 일어날 정도로 팀 케미가 박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가, 장성호가 2군에서 밥값하는 것과는 달리 2013년 1루수였던 최희섭은 연봉은 1억씩 받으며 2군경기 출전도 없이 사이버화가 되고 있어 만년 유망주 김주형김민우가 1루를 보는 상황인지라, 브렛 필의 백업 1루수 역할도 필요하다. 게다가 2012년 이후로 KIA 덕아웃에서 젊은 선수들을 다잡아줄 고참이 사실상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에 팀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해태/KIA 출신의 프랜차이즈이자 레전드인 장성호는 매력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동열 감독이 안치홍에게 임의탈퇴 이야기를 꺼냈다가 팬들의 포화를 맞고 사라졌기 때문에(...) 정말 KIA로 이적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 깽판치고 나간 양반이 팀 분위기를 어떻게 잡아 줄지는 아직 미지수

그리고, 인터뷰가 있었다. 2군에서 맹활약 했는데도 불구하고 1군 승격은 커녕 부상 없이 재활군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구단에게서 직접 맹활약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아마 1군으로 올리자니 최준석히메네스가 있고, 2군에 계속 두자니 팬들의 집중 포화가 곤란했을 것이란 추측을 했다 한다. 그런데 저 기사에 장성호가 CCTV 사찰에 대해 항명하다가 이를 빌미로 2군으로 내려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다. 이는 미디어스의 기사를 통해 이영미 기자가 자신이 스스로 삭제했다고 밝히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아니 이런 거로 은퇴했으면 그냥 돌아와도 되는 거 아닌가?

3.5. kt wiz 시절

kt wiz No.1
장성호(張盛好 / Sung-ho Chang)

파일:external/www.ktwiz.co.kr/water_2015033011114645.jpg

KIA 시절의 조범현 감독과 있었던 갈등이 해소되었고 조범현 감독도 장성호가 kt wiz로 오는것에 호의적이라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kt행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11월 25일 롯데 자이언츠의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kt로 이적했다. 연봉은 1억원. # 여담으로 조범현-장성호 간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는 데 같은 충암고 출신인,[41] 조성환이 가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박동희 기자에 의해 알려졌다. # 기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2014시즌 롯데 2군에 있던 장성호가 kt와의 경기때 조범현 감독에게 인사를 가려고 하지않자, 조성환이 장성호를 잘 다독여서 조범현 감독에게 인사를 같이 갔고,이를 본 조범현 감독도 반가워하며 장성호와의 은원을 잘 마무리했고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모두 풀었다고,그리고 조범현 감독이 장성호에게 추후에 같은 팀에서 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kt는 김동주와 장성호에게 비슷한 연봉을 제시했는데, 장성호는 받아들였고 김동주는 더 큰 액수를 요구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한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던 최고 좌-우타자의 야구 인생 말년이 그렇게 갈리게 됐다.
스프링캠프 중이던 2월 25일, 장염+구토증상을 보여 귀국했다.

3월 28일 개막전과 3월 29일 경기에 출전했지만 29일 경기도중 햄스트링 통증을 느끼며 약 4주간 결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회복이 늦어 5월 21일이 되어서야 1군에 다시 등록되었다. 본인 말에 따르면 근육 부상은 처음 당했던지라 회복 및 재활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전부터 최악의 상황으로는 전반기를 날릴수도 있었단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kt에 가서는 부진했던 시절의 성향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장타는 전혀 없는데 볼넷은 미친듯이 주워담고 있다. 박종윤의 정반대.

7월 10일 3회말에 신명철이 스트라이크존에 격하게 항의하다가 퇴장 당해, 교체 투입후 2타점 2루타를 올리고 삼성 수비진의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하여 오랜만에 활약하여 4타수 2안타 2타점 1득점을 올리고 팀 승리에 견인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11일에 말소되었다. 허리와 등에 담 증세가 있어 곧 올스타 브레이크 이기도 해서 휴식 차원에서 말소 시켰다고 한다.

8월 18일 넥센의 김동준을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만들어냈다.

8월 19일 넥센의 한현희를 상대로 2100안타를 달성했다. 양준혁에 이은 역대 두번째 개인 통산 2100안타. 게다가 이 안타를 시작으로 팀이 기적적인 대역전승의 시발점이자 발판이 되었으니 팀과 개인 모두 의미가 깊었던 대기록이었다. 그러나 9회말 손승락에게 정강이에 사구를 맞아 4주 공백이 발생하였다. 사실상 시즌 아웃. 그리고 이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시즌 성적은 대타 위주로 적은 타석에 나왔지만 OPS 0.8을 오랜만에 넘겼으며, 이상하리만치 높은 득점권 타율과 5할이 넘는 대타 타율을 기록하는 등 나름 반등했다.

2016년도 FA 자격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재자격), 권리행사를 신청하지 않았다.

결국 2015년 12월 7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6. 은퇴

장성호의 은퇴식은 2016년 9월 11일 KIA전에서 진행되었다. 은퇴식을 먼저 제안한 것은 kt 구단이지만, 당시는 순위싸움이 한창이라 팀에 방해가 되기 싫어서 미루다가, 2016년 9월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히 kt 팬 30명과 KIA 팬 30명을 뽑아서 그라운드를 돌면서 한 번씩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서가 마련되었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KIA의 레전드인만큼 KIA측에서도 기념 유니폼을 증정해주는 등 양 팀이 함께하는 훈훈한 은퇴식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은퇴식은 kt 시절 유니폼과 KIA 시절 유니폼을 나란히 놓고 진행. 은퇴사에서는 프로에 처음 입문시켜 준 해태 시절 김응용 감독, KIA의 김성한 감독, 한화 시절 한대화 감독, 그리고 자신을 다시 kt로 불러 준 조범현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본인이 희망했던 대로 호랑이 팀에서 은퇴하지는 못했지만, 그 팀과 함께 하는 은퇴식은 가능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데뷔 첫 타석과 2009년 한국시리즈[42] ,그리고 마지막 타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은퇴사에서도 KIA 팬들에 대한 감사인사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면 KIA에 대한 애정은 확실히 남아 있는 듯 하다. kt팬이야 자세한 설명 생략하고, KIA 팬들 중에서도 애증의 관계지만 그 동안 타이거즈의 대들보였던 만큼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수고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KIA 팬들도 "영원한 스나이퍼,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으로 은퇴를 기념했다. 그리고 은퇴경기는 역대급 투수전이 되었다[43]. 그리고 각주에 적어놓았듯 kt는 졌다...

4. 해설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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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은퇴 후에 2016년부터 KBS N SPORTS의 해설위원이 되었다. 현역 시절부터 화려한 입담을 자랑해서 많은 야구팬들이 기대를 하고 있는 중. 대부분 팬들이 송셀린이 하는 해설 스타일 닮지 말아달라는 얘기도 있다. 기아 편파가 심할 것 같다 기아요? 저 거기 나온지 6년됐어요 그래도 마음은 기아인것 같다. 공격 수비를 가리지 않고 기아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여담으로, 현재 한국에서 중계를 담당하는 인물 중 유일한 kt wiz 출신이다(1년 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런 특징을 본인의 해설 데뷔경기였던 LG와 kt의 시범경기 중계 해설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했다. kt 팬들은 드디어 매 경기마다 8월 이후 달라진 타격감이라느니 김진곤김바위 아들 전준우 처남이라거나 고영표KIA 고영우 동생 같은 똑같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며 아주 즐거워했고, LG 팬들이 실시간 중계에서 임정우 얘기 좀 해달라며 하소연할 정도로 kt 관련 이야기를 많이 풀어냈다는 평이다. 그리고 3월 25일 경기에서는 희대의 독설(?)이 나오기도 했다.

선수 출신으로 여러 입담은 좋지만 정작 논리적인 해설자의 역량은 징징 꽝이었던 이숭용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선출의 장점을 잘 살리며 호평을 받은 김선우, 차명석[44] 처럼 말 주변이 좋은 해설자가 될 것인가 또는 박재홍, 정민철의 뒤를 이어 성공적인 스타 선수 출신 해설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흥미로운데 일단 시범경기에서 해설 퀄리티는 호불호가 갈린다. 굉장히 늦게까지 은퇴 및 은퇴후 진로를 고민하던 통에 해설자를 준비할 시간이 없던 만큼 해설자 다운 지식이나 컨텐츠는 약한 편이며, 대신 방송에 걸맞게 멘트를 고르고 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 선수 시절 모아놓은 에피소드가 바닥날 경우가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쉽게 바닥나지 않고 있다(...). 선수 생활만 21년을 했으니 에피소드가 차고 넘치는게 정상이긴 하다만

해설가로는 일단 사운드가 끊기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바로 뱉어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kt 관련 해설로는 단연 톱이며 말하는 감각이 kbsn 해설진 중 가장 젊다. 반면 기존 kbsn의 중계진과의 호흡이 약하고, 초보해설답게 편파해설 논란이 있으며[45], 컨텐츠 준비기간 부족 탓인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진행이 미숙하고, 해설자인 자신의 발언의 무게를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첫해라 그런지 이용철이나 송진우 등의 선배해설과 같이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혼자 했을 때 훨씬 깔끔한 해설을 했다.단독 막장해설도 모자라 신인해설자 옆에 붙여놔도 성장에 해가 되는 이용철 송진우의 위엄

5월 10일자 해설에서 요근래 펄펄 나는 김재환을 보고 배리 본즈 같다고 하여 팬들에게 큰웃음을 주었다.

12월 26일에는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vsKB스타즈의 경기에 객원해설자로 참여해서는 마치 오랫동안 몸담은 농구인마냥 해설을 했다(...).

2018년 현재의 평가는 호불호가 너무 심하게 갈리는 해설자. 언변은 확실히 좋은 편이고, 내용도 최상급 해설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야구이해도가 말재주를 전혀 못 따라가던 그 분보단 낫다.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확고하게 하는 스타일이며 어떤 방송에 가져다 놔도 일단 말은 잘 푼다. 그러나 언급했듯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발언의 경중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데다 이 분을 제외한 모든 KBS 해설들의 중병인 편파해설 문제에 감염되고 있다는 점이 크나큰 비판을 받는다.

일부 팬들은 장성호가 편파해설을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kt 팬들은 장성호가 은퇴식까지 치러준 kt 프런트에 대해 유독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편파해설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아마 kt식 무책임한 짠돌이 운영과 조범현 감독과의 재회 등으로 인해 바깥에서 보기보다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반면 소속팀 중 KIA와 롯데, 한화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편이다. 기아에 호의적인 것은 뭐 모두가 예상했던 바이고, 롯데에 대해서도 비교적 짧은 기간 몸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 장성호는 롯데 시절 팀에 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부산 어디엘 가나 팬들이 알아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것이 놀랍고 감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굳이 kt와 대조한다면(...) 팬 뿐만 아니라 그 CCTV 사건과 관련되었던 롯데 프런트와도 생각만큼 나쁘지 않게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조용히 거쳐갔던 한화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46]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해설위원들 KS 전망에서 두산이 4승1패로 우승할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기아팬들이 한때는 친정팀이였는데 뒤통수를 때렸다면서 비난했다. 기아팬들은 장성호가 기아시절 FA파동 이후 트레이드건으로 기아에 앙금이 남아있다고 카더라 그런데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 두산광주에서 기아를 5:3으로 이기면서 장성호의 예측이 맞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2차전 양현종의 1:0 완봉승에 이어 잠실 원정 스윕을 달성, 기아가 4대1로 우승하였다. 일부 시각에서는 장성호가 친정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정규시즌 내내 kt를 제외한 자기 몸담았던 팀들에 편파해설한다고 욕먹었지 기아까 해설로는 전혀 분류되지 않았으니...

발언의 경중의 경우 실제 경기 해설에서보다는 분석 프로그램이나 합의판정 방송에서 불거진다. 전형적인 자기 철학이 너무 확고한 사람으로, 맞는 말을 할 때는 하염없이 맞는 말만 하고 이상한 말을 할 때는 하염없이 이상한 말만 하며 특별히 기준도 찾기 힘들다. 굳이 경향성을 찾자면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제에서는 맞는 말이 많은 편이며, 나머지 주제에서는 종잡을 수 없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충암고 2년 선배이며 KBS의 간판 아나운서 이광용과 함께 야구 중계를 했다. 그리고 부활한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시즌3의 야구편 패널로 나오고 있다. 2019년부터 이용철 해설위원이 지상파 중계에서 물러나 지상파 주 해설위원이 되었다.

5. 기타

  • 야구는 초등학교때부터 시작했지만, 고등학교 1~2학년 때 잠시 야구를 그만두고 폭주족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갑자기 야구도 공부도 하기 싫어져서라고. 술도 어느 정도 했다. 그러나 고3 때 복귀한 이후 주장을 맡으면서 금방 팀내 주전을 꿰차고, 프로에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다. 폭주족 생활을 끝내고 복귀한 이후 첫 경기에서 바로 홈런 2개를 때려내기도 했다. 그 당시 상대투수는 휘문고의 김선우.[47] 흠좀무. 참고로 이 시기에 박명환이 주목받던 충암고의 간판타자이긴 했지만,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김성근은 주목했다고 하지만.)
  • 또한 똘끼가 있는 성격이라 정성병자해태/KIA시절 또라이짓의 스승이자 영혼의 콤비였다. 요새도 그 성격은 변하지 않아 한번은 직관을 온 한화 팬에게 그 팬이 응원하는 선수가 올해 결혼할 거라는 낚시를 하기도 했다. 저 특유의 성격에 칼같이 짜여진 해태의 문화가 더해져 장성호는 유난히 해태 내에서도 일화가 많은 선수다. 신인타자가 김응용 감독 앞에서 우동을 떡하니 시켜놓고 먹는다든가 하는 짓거리를 하도 많이 해서 코칭스태프가 질겁을 하면서도 저놈은 크게 될 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입담이 좋다는 평가 역시 이런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화법에 기인한다.
  • 또한 경기 중에 매우 잘 웃는다. 심지어 공에 맞거나, 삼진을 당하거나, 병살을 치거나, 실책을 해도 웃는다…. 본인 말로는 천성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다 그렇게 한번 웃고 스트레스를 떨쳐버린다고 하는데, 팬들의 반응은 '식빵 굽는 것보단 낫다.'와 '야! 웃음이 나오냐?'의 두 가지로 갈린다.아니면 홈런을 치고 원없이 식빵을 구우라든가...
  • 파일:attachment/JSH_mortar.gif
  • 전설의 절구질짤. 머리쪽으로 날아오는 한기주의 위협구를 이대호가 그대로 노려본 뒤 만루홈런을 때린, 이대호를 상징하는 장면이 등장한 그 경기다. 장성호 역시 만루에 섰고 총알같은 타구를 쳤는데 수비수에게 날로 걸리면서 더블플레이로 무산되고 난 후 덕아웃에서 분풀이를 한 장면. 무기력한 꼴찌팀의 주장의 분노에 타이거즈 팬들의 자존심을 저격한 장면이자, 역대급 부진을 겪던 이종범의 뒤를 이어 장성호가 모든 야구팬들이 인정하는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대관식을 하는 장면이었다.[50] 장성호가 불성실하다, 진지하지 못하다 같은 평가가 저 순간 이후 일순간에 모든 야구 커뮤니티에서 사라졌다.
  • 의외로 선수들에게 리더십이나 인성을 인정받는 선수. 기아 선수들이 직접 뽑은 주장이기도 했고 선수협 회장 선거에서도 손민한 다음으로 다득표하기도 했다. 롯데로 이적한 후 가진 각종 인터뷰를 보면 은근히 개그맨 소질이 다분한 것 같다. 입을 놀린 사례가 많아 팬들이 차기 해설로 주목하는 몇몇 후보 중 하나.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성출이라는 별명도 있다. 2017년 11월 방영된 KBS N "합의판정" 이호준 편에서 설명하기를, 당구 선수 중에 장성출이라는 이름을 가진 왼손잡이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만큼 당구를 잘 쳐서 붙었다고.(...). 해태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형인 이호준이 성출이라고 잘 부른다.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tjdcnfdl라는 단어를 아이디에 사용하고 있다.(현재는 탈퇴상태). 야구선수들의 당구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는데 조성환에게 패배했고, 결승전에서는이호준이 조성환을 꺾고 우승했다고 한다.
  • 프로야구선수의 스타크래프트 대회에도 참가한 적이 있고, MBC GAME도 알고 있는 빼도박도 못하는 스덕. 야구선수 당구대회 룰이 더블엘리미네이션이었는데 그 룰을 박재홍에게 설명하면서 MBC 게임을 언급했다. 그 외에도 싸이월드 초창기에 홈페이지에서 직접 질문에 답도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인터넷문화에 대응한 인물이며, 지금도 SNS가 유명한 야구선수 중 한 명.
  • 등번호가 1번인데 팀을 옮길 때에도 1번을 유지했다. 한화로 이적후에 1번을 달던 윤경영에게 양보받으며 상품권 30만원을 선물로 주었고, 롯데로 이적후에 1번을 쓰던 이승화에게는 미즈노 방망이 5자루를 줬고, kt로 이적후에 1번을 달던 고영표에게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신발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장성호에게 등번호를 양보한 선수들은 다음해에 모두 몰락했다(...) 윤경영은 이듬해 방출, 이승화는 꾸준히 못했고, 고영표는 방어율 5.79를 기록하며 익산 위즈와 kt wiz를 오갔다.
  • 99년 데뷔 첫 20홈런(24개)에 올랐고 그 이후 홀수해마다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2001년 23홈런,2003년 21홈런).

  • 같은 KBS N SPORTS 해설위원 송진우와 투타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장성호의 패배.
  • 통산 안타수 5위임에도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이 한 번도 없다.이유는 이분처럼 동포지션에 다른 거물급 선수들이 있었기 떄문이다.[51] 1루수 포지션이라면 지명타자로도 활로가 있긴 했으나, 막상 장성호 본인이 1루수로 너무 성실히 출장하는 바람에(...) 그런 일은 없었다.
  • 2019년 3월 26일 이용규/선수 경력에도 나오듯이 자신이 이용규에게 트레이드를 요구하도록 부추겼다는 일부 소문에 페이스북을 통해 강력히 불쾌감을 드려내면서 부인했다.[52] 기사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6 해태 타이거즈 71 189 .206 39 9 0 2 11 16 0 21 .286 .286
1997 103 314 .268 84 14 1 4 35 36 2 13 .357 .305
1998 125 465 .312
(5위)
145
(4위)
23 1 15 49 76 5 44 .462 .381
1999 129 485 .342
(3위)
166
(5위)
32 1 24 62 110
(4위)
5 61 .561 .420
(5위)
2000 115 450 .324 146 30 1 14 48 90 6 88
(1위)
.489 .436
(1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타이거즈 133 489 .311 152
(5위)
32
(2위)
4 23 97
(5위)
86 6 90
(5위)
.534 .422
2002 133 481 .343
(1위)
165
(2위)
29
(3위)
0 19 95 82 7 86 .522 .445
(1위)
2003 130 476 .315 150 36
(3위)
2 21 105
(4위)
93
(5위)
13 84
(3위)
.532 .417
(5위)
2004 130 474 .300 142 29
(5위)
0 19 80 78 11 76
(5위)
.481 .401
2005 123 464 .300 139
(3위)
23 1 16 74 70 4 61 .457 .382
2006 126 445 .306
(4위)
136
(5위)
24 2 13 79
(3위)
62 6 83
(3위)
.456
(4위)
.413
(3위)
2007 116 395 .281 111 22 0 11 62 55 9 63 .420 .381
2008 85 293 .304 89 17 1 7 46 39 15 53 .440 .412
2009 88 271 .284 77 11 3 7 39 39 7 40 .424 .37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0 한화 이글스 74 237 .245 58 8 0 4 29 34 0 35 .329 .344
2011 116 390 .244 95 13 0 8 37 53 0 81
(1위)
.338 .379
2012 130 429 .263 113 28 0 9 52 57 2 67 .392 .36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3 롯데 자이언츠 83 241 .266 64 10 1 4 27 21 0 37 .365 .363
2014 5 2 .000 0 0 0 0 0 0 0 3 .000 .60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5 kt wiz 49 94 .309 29 4 0 1 16 11 1 17 .383 .421
통산(20시즌) 2064 7084 .296 2100
(5위)
394
(3위)
18 221 1043
(9위)
1108
(6위)
99 1101
(2위)
.451 .394


[1]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장성호! 장성호!*4. 후에 안치홍이 이 응원가를 물려받았다.[2] # 영상 초반을 보면 장윤정의 사랑아가 들린다.[3] 롯데의 장성호 자이언츠 장성호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2[4] 장성호가 나간 후엔 하준호가, 하준호가 나간 뒤엔 김재유가 이 응원가를 물려받았다.[5]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군에 끌려가 실론에서 강제로 싸우다가 반병신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아내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내용의 곡이다.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노래로 훗날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들이 남북 전쟁중에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노래는 북군의 군가가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이다.[6] 날려버려 날려버려 안타 장성호~ 날려버려 날려버려 안타 장성호~ 날려버려~날려버려~날려버려~날려버려 스! 나! 이! 퍼! 장! 성! 호![7] 이 응원가는 조지훈 응원단장이 기아 응원단장 시절때 만든 응원가였으며, 한화와 롯데에서도 이 응원가를 사용했었다. kt에서도 동일곡을 계속 사용. 사상 최초 4구단 레알 공통 응원가.[8] 롯데 시절 가사는 최강 롯데 자이언츠 안타 장성호~ 최강 롯데 자이언츠 안타 장성호~ 최강 롯데 자이언츠~ 최강 롯데 자이언츠~ 스! 나! 이! 퍼! 장! 성! 호! 홈 경기에서는 '최강' 부분을 '부산'으로 바꿔서 부른다. 응원가에 '날려라'를 쓰지 않고 '쌔리라'를 사용하는 롯데 구단 특성상 불가피했던 가사변경.[9] 롯데 이적 후에도 1번 등번호에 애착이 큰 장성호의 요청으로 결국 1번을 달았고, 원래 주인인 이승화는 51번으로 등번호를 바꾸었다. 맞트레이드 상대인 송창현도 한화 이적 후에는 원래 달았던 10번을 투수 김병근이 달고 있어서 91번을 받았다.[10] 외야수 출신답게 플라이처리가 귀신이었다. 특히 담장에 착 달라붙는 1루수 파울플라이 타구 처리는 신의 경지. 물론 그게 1루수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는 없지만.[11] 당시 동기 박명환은 3억5천만 원에 OB 베어스와 계약했다. 투수-타자 차이를 감안한다면, 그리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해태가 지명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성호의 계약금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12] 3년 전 이종범이 받은 계약금이 7천만원이었다. 좌타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코감독상당한 기대를 했다는 방증이고 해태는 그것의 몇 배를 빼먹을 수 있었다.[13] 물론 故 김상진도 9승은 하며 나름 안착했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서…[14] 그리고 그 다음 우승반지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에야 끼게 된다….[15] 전성기 시절의 이병규와 약간 비슷한 유형이었으나, 이병규는 전형적인 배드볼히터였던 반면 장성호는 선구안을 바탕으로한 타격을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6] . 여담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홈런을 친 타자다.[17] 2004년과 2005년에 타율 2할 9푼 9리 6모를 기록하여 이를 반올림하고 9년 연속 3할. 타율 규정상 소수점 3째 이하는 사사오입이 인정된다. 94년의 양준혁이 기록한 2할 9푼 9리 8모를 3할 타율로 인정한 사례가 있다.[18] 저 둘은 홈런왕과 타격왕 타이틀이 있고 이대호는 그 무시무시한 트리플 크라운을 2번씩 했다.[19] 이 시기에 이대호, 김태균 등 각 팀의 강타자들이 4번으로 자리잡으면서 3번타자 라이벌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다.[20] 당시 4번타자를 담당했다.[21] 여담으로 조범현 전 KIA 감독의 데뷔 날이다...[22] 마침 이 경기는 한기주이대호로부터 위협구 뒤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경기로도 유명하다.[23] 워낙 웃는 모습이 중계중에 자주 잡혔고 선수들간에 장난을 많이 치는 선수로 유명해 게임에 대해 별로 진중하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당시 돌았다. 더욱이 신인시절 툭하면 김성한에게 농땡이 피운다고 혼난 일화가 더 유명한데다 그런데도 3할을 치니 게으른 천재 이미지가 생겨버렸다.[24] 장성호 본인이 직접말했던 이야기이니 알아서 판단해야한다. 참고로 이에 대한 프런트의 대응은 없었다.[25] 2018.01.05 방송된 합의판정에서 장성호 본인이 당시의 비하인드를 밝혔는데, 구단에서 1년 계약을 제시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식당에서 후배 하나 데려다 놓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26] 나중에 인터뷰에서 조범현 감독이 자신의 잘못을 알기를 바라며 2군으로 보냈는데도 반성하지 않다가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최희섭과의 포지션 경쟁도 이적을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 결국 은퇴를 앞두고 이러한 결정을 후회하고 반성했다고 한다.[27] 이것은 장성호라는 선수가 타이거즈라는 구단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을 감안할 때 약간 이해하기 힘든 입장이다. 당시에 은퇴해도 영결을 줄까말까 싶던 수준의 선수를 FA 신청했다고 아예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구단이 철저하게 실리적인 판단만을 했던가, 구단이 장성호를 그렇게 대단한 위치로 보지 않았던가 둘 중 하나. 물론 어디까지나 장성호의 발언에 기초한 것일 뿐 구단이 실제로 어떻게 협상에 임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28] 물론 당시 기아에는 장성호의 자리가 없긴 했다. 외야는 이미 김원섭-이용규-이종범이 장악했으며, 1루와 지명에는 포텐이 터진 최희섭과 나지완 있었다. 당시 백업으로도 김주형, 이종환, 채종범, 신종길 등 자리가 중복되는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나이가 많던 장성호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리그에서 상위권의 교타자이던 장성호를 박대한 기아 프런트의 행보는 상당히 냉정하다 못해 얼음장과 같았다.[29] 대게 2번째 FA 하면 다들 40세 즉, 은퇴를 바라보는 시기와 노쇠화가 오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 같다.[30] 돈 없는 거지현대 유니콘스 및 이미 FA를 두 명씩 영입한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하면[31] 김상현(現 김태영)과의 트레이드 소식이 나왔으나 박동희가 아직 성사되지도 않은 트레이드 내용을 전부 까발리는 바람에 파토. 결국 김상현, 아니 김태영은 2013 시즌 종료 후 한국프로야구 2차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되어 기아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32] 그러나 안영명은 FA 이범호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면서 8개월 만에 원 소속팀으로 복귀. 사실상 2:4 트레이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2015년 5월 6일 KIA 타이거즈한화 이글스간에 트레이드가 있었다. 기아는 유창식+김광수+오준혁+노수광을 받아오는 대가로 한화에 임준섭+이종환+박성호 주었고 결국 4:3 트레이드로 5년만에 박성호도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갔고 그때 트레이드 멤버였던 김다원KIA 타이거즈에 남았다.[33] 결국 15 시즌 후 미련없이 은퇴를 했다.[34] 다만 당시, 한화 팀 감독도 신인감독이라 베테랑에게 어쩔수없었을 것이다..[35] 그날 팀은 삼성에 2:3으로 패했다. 다행히 류현진이 패전투수로 기록되진 않았지만….[36] 이 멀티히트로 장종훈 타격코치의 1771안타 기록을 깨서, 역대 최다안타 3위가 되었다.[37] 당시 한화가 내밀 트레이드 카드는 정말 없었다. 투수진은 류현진의 포스팅, 양훈의 군입대, 박찬호의 은퇴로 빈 자리 메꾸기도 힘들었고, 타자들중 그나마 한화에서 내놓을 뎁스라고는 1루와 지명타자 자리였고, 김태균,김태완,장성호 중 그나마 장성호가 가능성이 높았다.[38] 혹자는 출루율 보다 타율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김응용 감독의 성향이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삼성 감독시절 통산 출루율이 3할5푼을 넘어가는 박한이를 FA 계약때 저평가 하는데 1등공신이 김응용 감독이었다.[39] 2015시즌 현재 송창현은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하고 있고, 장성호는 롯데에서 2년만 쓰이고 kt로 트레이드되었다. 어쨌든 송창현은 한화에서 서비스타임이 남은 자원이라 송창현이 이득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웃기는 건 분명히 괜찮다 싶은 피칭을 했던 송창현의 2년간 war은 마이너스였고, 딱히 한 것 없어뵈던 장성호는 롯데에서 어쨌던 플러스 war이었다는 것(...)[40] 볼넷 따위에 웬 천금이냐고 묻는다면... 롯데에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상대 투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볼넷을 얻어내 주는 선수는 조성환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원래 선구안도 크보 바닥권이고, 거의 닥공밖에 모르는 스윙을 가져가기 때문. 양준혁 해설은 롯데경기 해설을 할때마다 상황에 맞는 눈야구가 안된다는 지적을 밥먹듯이 했고, 이 날도 또 지적했다. 한마디로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주었다.[41] 조범현, 장성호, 조성환은 모두 충암고등학교 출신이다.[42] 해태의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경험했지만 당시 주전은 아니었기 때문에, 2009년 우승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43] kt 2:4 KIA, 승리투수 헥터 노에시 8.1이닝 2실점, 패전투수 KT 정대현 8.1이닝 2실점, 세이브 임창용 0.2이닝 무실점[44] 선수 시절 불펜투수 중에는 처음으로 연봉 1억원을 찍은 선수다. 허나, 그 이후로는 하락세가 와서 일찍 은퇴를 했다. 그렇지만 은퇴 뒤 코칭 스텝 or 해설자로는 정말 호평을 받았다. 현재도 해설 역량이 좋다고 평가받는 중이다.[45] 특히 기아와 KT 경기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진다.[46] 정작 한화 팬들은 지고 있을때 육성응원을 듣고 부끄러웠다는 말을 와전해서 들어서 장성호에 적대적인 팬들도 좀 있고 잘 알다시피 한화가 최근 사정이 사정이라 장성호가 한화 편파냐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는 편이지만, 장성호의 편파해설에 불만이 있는 제 3자 입장에서 최소한 kt처럼 적대하진 않는다는게 중론. 애초에 한화는 무주공산이라 장성호가 주전으로 뛴 것은 물론 기아나 kt처럼 조범현도 없었고 롯데처럼 거하게 문제가 터진 팀도 아니라 가장 무난히 헤어진 팀이다.[47] 김선우가 그야말로 고교를 평정하던 시절이다.[48] 기사에 의하면 김응용 감독은 기자에게 "장성호가 소질은 있는데 노력을 해야 말이지. 성격도 얼마나 느긋한지." 라는 인터뷰를 했으며, 김 감독은 장성호를 야구선수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했으며, 그래서 조금은 비정한 충격 요법을 썼다고 했다.[49] 내용에 의하면 버스가 떠난 후 장성호는 흙 묻은 유니폼을 입은 채로 훈련 가방을 어깨에 훌쩍 둘러 메곤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대전 시내를 관통해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의 숙소까지 1시간 가량 뛰었으며, 가는 도중 대전 시민들의 숱한 눈총을 받기도 했으나 때론 비아냥도, 우스개 농담도 귓전을 때렸지만 앞만 보고 달렸으며, 숙소에 도착했을 때 김응용 감독이 현관 앞에 서 있었는데, 김 감독은 땀과 흙이 범벅이 된 채 뛰어오는 장성호를 발견하곤 획 돌아서 숙소로 들어갔다.[50] 하지만 이 장면을 '마늘 빻을 땐 장성호'라는 파일명으로 희화화하기도 했다.(...)[51] 장성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01~2003년 동안 이승엽은 매년 시즌 MVP(. . .)[52] 장성호 위원과 이용규는 KIA타이거즈에 오랫동안 함께 활약하였고, 공교롭게도 FA로 이적한 팀이 한화 이글스였다 보니 이런 오해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화이글스에서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