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2 11:45:57

조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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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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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9 1991 1993
1996 1997 2001

1982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조광덕
(경북고등학교)
조계현
(군산상업고등학교)
김광윤
(북일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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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4 KBO 리그 다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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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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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의 단장직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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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TIGERS_1.png KIA 타이거즈 역대 단장
허영택
(2014~2017)
조계현
(2018~)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조도현(1984~1988) 조계현(1989) 이대진(1993-1999)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강만식(1982-1988) 조계현(1990~1997) 곽현희(1998~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김훈(1997) 조계현(1998~1999) 남기헌(2000~2001)
두산 베어스 등번호 14번
김영수(1998) 조계현(2000~2001) 고영민(2002~2010)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결번 조계현(2003~2005) 김태룡(2006~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김종모(2001~2004) 조계현(2006~2009) 김종훈(2010~)
두산 베어스 등번호 75번
권명철(2006~2009) 조계현(2010~2011) 권명철(2012~2017)
LG 트윈스 등번호 71번
김기태(2010~2011) 조계현(2012~2014) 최경훈(2015~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76번
한혁수(2014) 조계현(2015~2017)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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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_1954379601523524143528.jpg
KIA 타이거즈 단장
조계현 (趙啓顯 / Cho Kye-Hyeon)
생년월일 1964년 5월 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학력 군산상고 - 연세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8년 1차 지명 (해태)
소속 팀 농협 야구단 (1988)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두산 베어스 (2000~2001)
지도자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3~2005)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8~2009)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0)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0~2011)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1)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12~2014)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5~2017)
프런트 KIA 타이거즈 단장 (2018~)

1. 개요2. 고교 시절3. 선수 시절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1기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4.2. 두산 베어스 시절4.3. LG 트윈스 시절4.4. 다시 KIA 코치로
5. 프런트 시절6. 연도별 성적7. 여담

1. 개요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현재는 KIA 타이거즈의 단장이다. LG 코치로 있던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한 후, 5월 11일까지 18일간 수석코치 보직으로 감독 대행을 맡다가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 감독으로 보직변경되었다. 김기태가 KIA 감독으로 부임하자 LG를 나와 다시 친정 팀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이후 2017년 12월에 팀 최초의 선수 출신 단장이 되었다.

팔색조라는 별명 답게 여러 변화구를 구사 했고 특히 싱커볼 마스터였다. 1990년대 중반 최고의 2인자. 1993, 1994, 1996년에 3번이나 골든글러브 2위 득표자가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올드 팬에게 선동열을 제외하고 이강철과 비교해서 누가 1990년대의 에이스냐 물으면,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정도의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1993~1996은 조계현이지만 1989~1998은 이강철이 아닐런지..

2. 고교 시절

파일:YvRmuza.jpg
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1]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청룡기 준결승도 치열했다. 당시 광주일고 문희수는 2학년이었는데도 둘은 치열한 투수전을 벌였다. 둘 다 강속구 투수들이었고, 타자들은 그들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 이 게임도 연장전 승부가 아니었을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명승부였다. 1981년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 1985년 박동희의 부산고, 1991년 조성민의 신일고와 함께 군산상고 조계현은 고교야구에서도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완전히 야구 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가 맛이 가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혹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선동열, 김건우[2] 등과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연대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연세대 에이스는 박철순, 최동원, 윤학길, 김정수, 조계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윤학길만 순둥이다. 김정수가 가을 까치요 이순철 김성래 조계현이 큰경기 명승부를 펼친 이유는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정기연고전의 살떨리는 큰승부를 체감한 덕분이리라. 조계현은 초등시절 학교의 요청으로 1년 유급했고, 프로 진출도 올림픽 때문에 1년을 유예했다. 고졸 선수보다 6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것은 팬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3. 선수 시절

파일:attachment/nonghyupjogye.jpg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대륙간컵 등 국제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다. 당시 이로 인해 발이 묶였던 선수는 송진우, 강기웅, 노찬엽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한 박정현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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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SuAxd47yS7P65ZCdJqQiUYMPo33vCibc.jpg

기아 타이거즈 투수진의 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리즈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3]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에[4][5]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6]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엘지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선동열을 워낙 압도적이라 따로 이야기 하지 않고 같은해 데뷔한 이강철과 해태 시절을 비교하면 이강철은 2점대 2번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3점대의 안정적인 선발로 해태에 공헌했고, 조계현은 1점대 한번 2점대 5번의 임팩트 강한 시즌을 선보였다. 둘이 같이 뛰던 1988~1997년까지를 봐도 출전횟수, 선발횟수, 승수 이닝 등의 누적은 이강철이 조금 앞서나 투구비율성적은 조계현이 더 좋았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최고 투수는 못 됐을지 모르지만 열혈 팬들도 거느리고 있다.그래서인지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군산상고 주축에 광주일고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 그가 떠난 후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전북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 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7]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건초염으로 사실상 선발에서 오래 할 수 없자, 마무리 공백으로 내려가면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8]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했다. 보길도였을까?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5승이 조계현이었다.본격 쌍둥이 킬러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는데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라이벌 팀 LG의 이상훈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이 받았다[9]. 그 해 8월 14일에는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감독이 된 후에는 드러눕기를 취미삼는 분.[10][11]

1995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12] 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1996 시즌은 1993이나 19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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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13]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14]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1998 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어율을 5점대까지 수직상승으로 평범?했고, 1999 시즌은 말 그대로 몇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재활의 신 이라 불리는 킬인식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지금은 킬인식이라 부르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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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해태시절 후배였던 이광우와 함께 원투펀치로 이끌어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하며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라는 신기록을 세우는 등 2001년까지 전천후 현역 선수로 뛰며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15] 그렇게, 현역 마지막 우승인 2001년 한국 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은퇴를 한다.

파일:JQAOktA.gif

이름 가운뎃글자가 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투수코치로 있을 때 투수진이 망가지면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16]

LG에 무척 강해서 엘나쌩 클럽의 대표 멤버였다. 이렇게 LG에 강했던 조계현이 훗날 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인해 LG 감독 대행이 된 게 아이러니.(...)

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1기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KIA 타이거즈 No.77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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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6년만에 친정팀 코치로 다시 시작된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삼성 라이온즈 No.77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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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2001년 시즌을 마치고 두산에서 방출되어 은퇴한 후 2002년에는 KBS의 해설위원으로 있었고 2003년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6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5년까지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 + 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화약고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17]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결국 팬들의 열화 끝에, 2009 시즌 막판에는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다. 이후 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용국은 나중에 류중일 감독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4.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No.75
조계현(趙啓顯)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1110032115372874.jpg
(출처 : 포토로)
9년 만에 코치로 돌아왔으나 초단기 코치 생활에 흑역사를 안긴 두산 베어스 시절 코치님 여기서 시구하시면 안됩니다!!!

2010 시즌부터 본인이 현역 말년을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2001년 이후 9년 만에 두산으로 돌아왔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기아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사대천왕막장 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사실 선수들이 못하는데 코치가 다 잘못한것처럼 말하는것도 웃기는 일이다. 특히 두산 김경문의 운영이라면.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 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버 용병 투수 페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 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 투구를 했던 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2011년에 16승을 달성한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물론 가장 큰 지분은 들한테 있지만

4.3. 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 No.71
조계현(趙啓顯)
파일:external/sports.donga.com/45662401.2.jpg
LG 코치 시절.

어수선했던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DTD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18]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아 자기가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적이 있었던게 미안했는지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수석코치로 어떤 활약을 할 지 우려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성질 부리는 감독 달래기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LG 팬들에게 까이지 않았다. 아예 잊혀진 수준 김태한이 그러길 바란다

2012년 9월 12일 SK전에서는 5살 연하인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19]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말리는 걸 김기태 감독이 뿌리치는 과정에서 저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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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LG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지명타자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투수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 대행임에도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었다.

LG 프런트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 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 듯하다.[20] 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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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막판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되었다.

4.4. 다시 KIA 코치로

KIA 타이거즈 No.76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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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겼다. 10년 만에 친정 앞으로 KIA에서도 보직은 LG 시절과 똑같이 수석코치다.

당초 kt wiz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가 KIA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wiz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김기태 감독과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는 편. 무지 재미있고 유쾌한 성격이라 선수들이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나지완이 보는 앞에서 나지완의 모습을 대놓고 따라한 바 있다.

2차 드래프트 1라운드로 데려온 배힘찬이 드럽게 못하고 있는데, 배힘찬을 데려온 김기태만 욕 먹었지만 사실 배힘찬을 뽑자고 얘기한 사람은 조계현 수석코치라고 한다.선수 보는 눈이 이렇게 없다

5. 프런트 시절

5.1. KIA 타이거즈 단장

전임이던 허영택 단장이 기아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전임 대표이사로 가게 되면서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는데, 그전부터 선수출신 단장을 선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결국 2017년 12월 6일, 단장으로 승진하였다. 송구홍과 반대의 테크를 타게 되었다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닭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타이거즈 역대 최초의 선수출신 단장인데, 염경엽과 송구홍의 명암 때문에 우려하는 바도 있지만, 대부분 2017의 기운을 받아 기대하는 바가 큰 편이다.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라 팬들 대부분은 나이 때문에 서열정리 차원의 승진과 동시에, 김기태 감독의 사람을 프런트에 앉혀서 확실히 밀어주기 위함으로 인지하는 듯.후임 수코인 정회열이 김기태보다 선배인 건 함정

2017년 12월 28일 드디어 기아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양현종과 계약 체결에 성공하면서 단장으로써 1호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1월 18일에는 정성훈도 영입했다. 이후 김주찬도 잔류시키며 FA문제를 깔끔히 해결하였다.

이후 2018 시즌에 김기태 감독이 열심히 삽질을 하면서, 수석코치로서 역할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단장으로서 충분히 감독을 제어할 수 있음에도 방관,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소통이 없음을 팻 딘 교체 문제로 드러났다. 애초에 보스기질의 김기태와 같이 다녀서 단장이 된거라 감독을 제어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0월엔 임창용마저 방출당하면서 김기태와 세트로 미친듯이 까이는 중. 그야말로 김기태의 철저한 마리오네트에 불과하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계시다. 그리고 임창용 방출 사유가 젊은 투수들이 기회를 잡기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개소리를 날리며 더욱 까이고 있다.

이어서 해태시절부터 거의 한솥밥을 먹은 선후배 사이였는데 예우가 이런 식이라며 강하게 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또한 정성훈에게 플래잉코치를 제안했는데 은퇴를 권하거나 정식 코치를 제안한 상황은 아직 아니다. 먼저 현장에서 정성훈에게 플레잉 코치로 내년 시즌을 보내냐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간 상태라고 하는데.. 기사 기아팬들에게 죽을려고 작정하고 있다

다만 임창용의 재계약 불발 통보에 후폭풍이 이어지자 "임창용 선수는 특별하니까 묶어서 통보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해 따로 발표했다"면서 "(2018년 10월 23일) 선수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재계약을 하기 힘들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임창용 방출이) 안타깝다"면서도 "신구조화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위해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방출 배경을 설명했다.

"임창용 선수와 만난 자리에서 '올해 FA 신청할 거냐'고 물어보니 선수 본인이 '선수로 더 뛰고 싶다'고 말하더라"면서 "그런 상황에서 (코치직이나 은퇴식 제의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기사

하지만 2019년 5월 16일 김기태 감독이 개인 2번째 중도퇴진했고 외국인 선수 점검차 미 현지에 간 조계현 단장은 급히 귀국을 했다고 한다. 사퇴가 확고했다고 한 만큼 KIA 타이거즈 팬들의 비난 겸 사퇴 압박은 좀 거셀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 출장 중 급거 귀국한 조계현 KIA 단장 "너무나도 슬픈 일"

1차 지명으로 정해영을 지명하면서,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다. 전년대비 성장이 아닌 하락세를 보인 정해영을 1차지명함으로써, 팬들에게 정회열 2군 전력분석원과의 긴 인연 때문에 지명된것이 아니냐는 괴담이 돌 정도. 게다가 외국인 용병 농사를 3명 중 단 한명도 성공시키지 못했으며,[21] 대졸 군필루키였던 양승철이 상상을 초월하게 부진하면서 정말 선수 보는 눈이 달려있긴 하냐며 까일대로 까이고 있다. 게다가 한창 잘하고 있는 터커를 보며 내년에는 거포 1루수가 필요하다는 언플시즌 중간에 하는 등 자신이 데려온 선수가 맞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가면 정재공 이래로 KIA 타이거즈 최악의 단장이 될 확률이 아주 높다.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1 174 7 9 4 - 0.438 2.84 153 3 73 97 64 55 1.27
1990 30 178⅓ 14
(4위)
13 0 - 0.519 3.28 144 8 81 130
(5위)
73 65 1.25
1991 21 130⅓ 9 9 0 - 0.500 3.25 100 6 52 75 50 47 1.12
1992 37 156 10 6 12
(4위)
- 0.625 2.94
(5위)
123 13 59 98 64 51 1.14
(4위)
1993 28 196⅓
(3위)
17
(1위)
6 1 - 0.739
(4위)
2.15
(4위)
141 8 58 118 54 47 0.98
(2위)
1994 27 210
(2위)
18
(1위)
5 0 - 0.783
(2위)
2.61 171 12 68 135 69 61 1.11
1995 19 126 9 6 0 - 0.600 1.71
(1위)
97 2 43 59 28 24 1.06
1996 27 191⅔
(5위)
16
(3위)
7 0 - 0.696
(3위)
2.07
(2위)
145 12 52 116 51 44 0.99
(3위)
1997 25 114 8 9 0 - 0.471 3.71 111 11 36 71 64 47 1.2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삼성 29 150⅓ 8 11 0 - 0.421 5.21 171 19 76 94 99 87 1.56
1999 12 20⅓ 0 3 0 - 0.000 11.51 36 5 15 16 27 26 2.3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두산 16 89 7 3 0 0 0.700 3.74 81 7 31 53 40 37 1.20
2001 18 87 3 5 0 0 0.375 5.28 99 7 38 38 53 51 1.52
KBO 통산
(13시즌)
320 1823⅓ 126 92 17 0 0.578 3.17 1572 113 684 1100 736 642 1.19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 7완투 0완봉
1990 10완투
(1위)
5완봉
(2위)
1991 1완투 0완봉
1992 3완투 1완봉
1993 10완투
(공동 4위)
4완봉
(1위)
1994 14완투
(1위)
5완봉
(1위)
1995 4완투 0완봉
1996 11완투
(1위)
3완봉
(공동 2위)
1997 2완투 1완봉
(공동 4위)
1998 2완투 0완봉
1999 0완투 0완봉
2000 0완투 0완봉
2001 0완투 0완봉
KBO 통산 64완투 19완봉
(4위)

7. 여담

  • 야구인중에서 박희수는 물론이거나 이숭용도 반반 섞일 정도로 닮았으며, 심지어는 선수 시절에 생김새가 그럴싸해보여서 그런지 과거 모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삼장법사까지 닮았다는 소릴 듣게 된다. 근데 당시 머리 빡빡밀었던 정황이 없어서 기분 탓으로 그런 별명이 붙었나 보다!!!
  • 선수시절에도 유머러스하고 쿨한 성격인지, 최해식에 인터뷰에서 하루는 피칭 중에 팜볼을 던지겠다고 하자 최해식이 팜볼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느리게 오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자 웃으면서 어디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면서 넘겼다고한다. 다만 박재홍이 고향 팀 해태와 계약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입단을 거부하자 광주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는데, 박재홍이 프로 입단 후 조계현이 혼쭐내주겠다고 벼른적이 있다. 박재홍 항목 참조.
  • 1997년 4월 15일 당시 LG 트윈스의 신인이었던 이병규가 당시 LG에게 매우 강했던 조계현을 상대로 무려 3안타 4타점을 기록한 바 있는데 당시 이병규는 인터뷰를 통해 "(조계현 선배가)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시고 좀 열심히 던져주시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말은 상대팀이었던 해태 선수단을 자극하고 말았고, 당시 화가 난 해태 선수들이 조계현에게 이병규를 한 대 맞추겠다고 하자 후배들에게 "쟤는 분명히 야구 잘 할것 같다. 그냥 둬라." 라고 했다고 한다. 훗날 2014년 5월 6일 조계현이 잠시 LG 감독대행을 맡고 있었을 때 이병규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고 조계현은 이병규의 신인 시절이던 1997년을 회상하며 이병규의 기록을 축하해 주었다.
  • 정세균 국회의장이 그의 팬이라고 한다. 해태시절부터 조계현의 팬이었다고 하며, 2017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 당시에 정세균 의장이 입은 옷에도 조계현의 이름과 해태시절 등번호인 17번이 마킹되어 있었다.
  • 아들 조재웅 역시 야구를 했으며 아버지와 똑같이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냈기 때문에 드래프트에서는 미지명되고 프로에 가지 못했다.


[1] 이 분은 연고지 팀인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없이 얼마안가 은퇴한다.[2]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3] 일례로 이대진도 넣긴 하나 이대진은 93년도에 입단으로 오히려 선배들에게 밀린다. 그래도 저 위에 3인방과 함께 100승 투수 반열 중 한명은 틀림없다.[4]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의 리그 전성기였다.[5] 1993년 4월 11일 LG와의 광주 홈경기에서 9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 송구홍에게 통한의 중전안타를 맞고 노히트 노런이 깨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조계현은 15년 후 삼성 투수코치로서 친정팀의 어느 후배 투수박석민에 의해 자신처럼 9회 2사에서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6]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7] 역대 최초의 고졸 지명선수[8] 하지만, 그해 시즌이 시작되기 전 스프링 캠프 팀내의 분위기가 개판이였는데 구단 초유의 항명사건으로 인해 조금 싫어하는 팬들도 있었다. 반대로 그와 대비되는 이강철은 반대파.[9] 전년도 선동열의 31세이브에서 9개 더 갱신을 했다. 선동열 역시 그 해 골든글러브를 수상[10]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11] 그리고 공교롭게도 1993년에 조계현의 노히트 노런을 9회 2사에서 저지한 송구홍은 조계현이 1997 시즌 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얼마 후 해태로 트레이드되었다.[12] 이건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던 이종범이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13]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 한국 시리즈 후 ~ 1997 정규시즌 종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만큼은 예외,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14] 이 시기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에 감탄할 정도인데, 먼저 김영진(야구)양용모(...)가 주전을 하던 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 1998년에는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자유계약으로, OB로 입단해야 했던 신인포수 김지훈(1973)을 지명권 양도로 데려왔고, 1999년에는 우완투수 이상훈과 4억원을 주고 두산에서 진갑용을 사온다. 그리고 1999시즌이 끝나자마자 LG에서 주전포수인 김동수를 3년 8억의 조건 + FA 보상금 + 김상엽을 주고서 사왔다. 또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1997 시즌이 끝나고 해태에서 4억원을 주고 조계현을 영입했으며, 1999년 시즌을 앞두고 OB의 에이스 투수 김상진6억 5,000만원을 내주고 데려왔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의 젊은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무려 간판타자 양준혁에 곽채진, 황두성을 얹고 거기에 현금 30억까지 줘가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불펜투수 김현욱과 좌타자 김기태를 무려 20억을 주고 데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닌데,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서 1999년 말 FA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 + FA 보상금 + 박충식을 주고서 영입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대우로 9회 우승신화를 일군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과 코치진들까지 모셔오는 투자를 단행했다. 1997~2000년 4시즌 동안에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자그마치 100억 이상이다.하지만 정작 바라고 바라던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2년에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삼성과 현대가 서로간의 전력 상승을 위해 야구판에 돈X랄을 한 탓에 강한 팀들과 약한 팀들의 전력 양극화가 심해졌고 결론적으로 리그 흥행 저하의 큰 이유가 되었다.[15]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16]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함.[17]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은 2009 시즌 후 경찰 야구단에 입대했으나 군 복무 중 2군 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제대 후 토미 존 수술까지 받고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2016 시즌 후 방출당한 후 은퇴했고, 최원제는 군 제대 후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투상수박성훈은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트레이드됐다. 그나마 차우찬이 이듬해인 2010년 승률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이후 6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등 2년 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2013년부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며 2015년에는 탈삼진왕에 올랐고 시즌 후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201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무려 4년 95억이라고 쓰고 110억이라고 읽는다이라는 대박을 터뜨리며 LG로 이적했다.막내가 가장 출세했다[18] 사실 김기태와는 삼성에서 1999 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19] 9회 2아웃 2루 상황에서 박용택 대타로 신인 투수 신동훈을 기용한 것. 그것도 이전에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데뷔전을 대타로 치룬 것이었다.[20]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 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올해 LG를 맡아 감독이 되는건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기도 하고..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김기태 자신도 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21] 프레스턴 터커의 영입에 관해서는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후술[22] 실제로 감스트조계현 둘 다 호남 출신이라 서남 방언이 짙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