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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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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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1997 |
{{{#fff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 ||||
김성한 (1982~1995) | → | 김상진 (1996~1999) | → | 이대진 (2000~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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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金相眞 | Kim Sang-Jin | |
출생 | 1977년 4월 26일[1]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재뫼마을[2] | |
사망 | 1999년 6월 10일 (향년 22세)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광주용봉초등학교 (전학) 광주서림초등학교 (졸업) 광주진흥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졸업) |
신체 | 178cm, 75kg, A형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6년 고졸우선지명 (해태)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96~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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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수가 9회말 마지막 타자를 아웃시킬 때까지 전력을 다하듯 앞으론 긴장을 풀지 않고 치료에 전념할게요.
- 1999년 3월 6일 한겨레 인터뷰 中
前 해태 타이거즈 소속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였다.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을 기록하며 해태의 아홉 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위암이라는 병마에 발목을 잡혀 불과 22세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비운의 선수이다.- 1999년 3월 6일 한겨레 인터뷰 中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용봉초등학교 5학년 때 선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내성적이고 숫기없는 성격이었던 김상진은 "야구로 성공하면 명문대도 갈 수 있고 선동열처럼 1억원을 벌어서 부모님도 호강시켜드릴 수 있다"는 감독의 말에 수긍하여 곧바로 2학기 때 서림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에 발을 들였다.처음엔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어쩔 수 없이 야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3], 진흥중학교 진학 이후 강의원 감독[4]의 지도 하에 실력이 급성장했다.
강 감독은 나중에 김상진이 진흥고로 진학하는 시기에 맞춰 진흥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6년간 사제지간으로 같이 야구를 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하루 2,3 시간씩 학교 뒷산인 운암산을 뛰어 다니는 러닝 위주의 훈련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단단한 하체의 소유자가 되었고 아마추어 선수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컴퓨터급 제구를 선보이며 야구계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당시 1995년 고교 전국 대회에서 평균자책점 0.86을 달성했고, 커브, 슬라이더, 패스트볼 평가가 상당히 좋았으며, 최고 구속은 145km/h까지 찍었다.[5]
2.2. 프로 경력
아버지 어머니가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죠. 야구가 내 직업이잖아요. 야구말고는 살 길이 없어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명문 해태의 10승대 투수로 태어나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이어가겠다.
- 입단 당시 첫 훈련때의 출사표
- 입단 당시 첫 훈련때의 출사표
1996 시즌 입단 동기들과 함께[6] |
가난한 집안 사정이었지만 당시 대다수의 고교 선수들은 대학교로 진학하던 트렌드에 따라 연세대학교 야구부 진학이 거의 기정사실 수준으로 굳어졌었는데[7], 당시 상당히 고령이었던 그의 아버지[8]가 막내아들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셔서 강하게 해태 입단을 권유했고 결국, 대학의 꿈을 접고 프로로 선회했다.[9] 이에 해태 타이거즈는 1억원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모험수를 뒀다. 더구나 외환위기 직전 모기업 상황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해태가 제시한 1억은 다른 구단의 2~3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1996년 데뷔 시즌부터 선발진에 합류하여 5월 2일 롯데전에서 최고구속 146km를 던지며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따냈고, 데뷔 첫 해에 9승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해 신인왕을 노려볼 만 했지만 현대 유니콘스의 괴물 신인 박재홍이 사상 최초의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맹활약하면서 신인왕 경쟁에선 밀렸다.
1997년에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아쉽게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147이닝을 던지면서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WAR 3.25를 기록하여 시즌 내내 해태 선발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LG 트윈스와 맞붙은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 팀의 아홉 번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웠다.[10] 해태팬들은 새로운 에이스급 투수의 출현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11]
그가 머물던 세 시즌 동안 신인치고는 묵직한 경기운영으로 해태의 4선발 정도의 위치[12] 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음은 물론이고, 첫 번째 시즌과 두 번째 시즌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까지 누리며 앞으로의 프로 경력도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다.
3. 위암 투병
투병 중이던 김상진. |
1998 시즌 내내 지난 해에 비해 다소 떨어진 구위를 보이며 121이닝에 평균자책 3.87, 6승을 기록하는 데에 그쳤고, 그 해 9월 1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목 통증을 호소하며 조기 강판했다. 그 당시 구단이나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목 부상으로 알고 좀 쉬면 나아지려니 했지만, 시즌 종료 후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면서 전남대학교병원에 긴급 입원하여 목뼈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의료진의 판단으로 정밀 조직검사를 실시한 결과, 청천벽력 같은 위암 4기 판정이었다. 목뼈의 종양도 위에서 전이된 것이었다.[13]
처음에는 선수가 이렇게 병이 악화되는 동안 구단에선 무엇을 했느냐며 팬들은 해태 구단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사실 해태는 매년 선수들의 정기 건강검진을 실시했고 김상진 또한 내시경까지 받는 등 받을 검진은 다 받았다. 단지 암의 발원지가 내시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위벽 바깥이었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던 것. 위벽 바깥에 암이 생기는 것은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 기술로도 내시경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초기에는 MRI로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애초부터 미리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평소 먹성이 좋았던 김상진은 자신이 위암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 변함없이 먹는 것을 즐겼으며, 진흥고 시절에는 학교 숙소에서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먹었는데, 큰 냄비 하나 가득 끓인 뜨거운 라면을 제대로 식히지도 않고 거의 흡입하는 수준으로 게 눈 감추듯이 먹어치울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14] 그리고 진흥고 시절 스승 강의원 감독도 "다른 선수들이 밥 한 그릇 먹을때 김상진은 두 그릇을 먹었고 간식도 친구들이 안먹는다고 하면 가져다가 먹을 정도로 정말 잘 먹는 친구였다" 라며 회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엔 형처럼 따르던 구단 트레이너 김준재[15]와 병원 부근 용산시장에 바람을 쐬러 가서 "형님, 저 순대 먹고 싶어요." 라고 졸라서 김준재가 사준 순대 한 접시를 뚝딱 비우기도 했고, 팀 선배인 홍현우가 문병하러 오면서 사온 큼지막한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김상진을 "아그야 천천히 먹어라 체하겄다."라고 다독이면서 목이 메어 혼났다고 후일 박동희 기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16] 이를 기억하는 김상진의 친구들은 그 왕성한 식성 때문에 암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17] 한때 위암으로 투병했던 정현욱 또한 소싯적에 대단한 먹성을 자랑했는지라[18] 폭식하는 식성이 암 발병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언론에서도 김상진의 투병 사실에 대해 엠바고가 적용되어 한동안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김상진의 어머니가 병원을 올 때마다 울면서 자식을 걱정해 김상진 본인이 투병 사실을 알까봐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당시 철저하게 비밀로 했던 위암이라는 사실은 11월 28일이 되어서야 본인에게 알려졌고 언론에서도 12월 3일에서야 경향신문을 통해 암 투병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후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옮겨져 기약 없는 투병 생활에 들어간 김상진은 1999년 초까지는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1999년 3월 종양에 의한 위벽 천공으로 봉합수술을 받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그 해 6월 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22세. 죽기 전 부모님께 남긴 편지에 의하면 한국시리즈에서 완투승을 거둘 당시 이미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19] 그러니 손을 쓰려고 해도 이미 한참 늦은 셈이었다.
그가 먼 길을 떠나기 얼마 전,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63빌딩에 가고 싶다고 간청해 휠체어에 탄 채 전망대에 올라갔고, 어딘가를 멍히 주시하고 있던 김상진에게 김준재가 어디를 보고 있냐고 묻자 김상진이 손가락으로 잠실 야구장을 가리키며 "형님, 저곳이 제가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뒀던 곳이죠...?" 라며 울먹이며 되물었다고 한다. 임종 직전까지도 그가 얼마나 선수 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투병기는 1999년 4월 28일 방영된 KBS2 《영상기록 병원 24시》 '이젠 희망을 던진다 투수 김상진' 편에서 다뤄졌다.[20]
사후 화장됐고 유골은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그가 중고등학교 시절 매일 뛰어다니던 운암산에 뿌려졌다. 다만, 진흥고 측의 반대로 비밀리에 뿌렸다고 한다.
사후 3년 뒤인 2002년, 친구들의 주선으로 법당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당초엔 생전 사귀던 여자친구가 신부로 나서려고 했지만, 그녀의 미래를 걱정했던 친구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3.1. 투병 일지
- 1998년 9월 19일: 잠실 OB전서 2회말 투구 중 뒷목 통증을 호소하며 자진 강판
- 1998년 10월 8일: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식사 도중 후두부 통증과 토혈 증세를 보여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
- 1998년 10월 16일: 경추 3번 종양 제거 수술
- 1998년 10월 23일: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위암 4기 진단
- 1998년 10월 26일: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입원, 재검 결과 전남대학교병원과 동일 진단
- 1998년 10월 30일: 방사선 치료를 위해 서울중앙병원 입원. 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으며[21] 2주 간격으로 항암제 투여
- 1999년 3월 6일: 토혈 발생, 서울중앙병원 입원. 암세포로 인한 위벽 천공이 원인인 것으로 판명
- 1999년 3월 8일: 위벽 봉합수술 실시
- 1999년 6월 2일: 병세 악화,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의식 불명에 빠지며 산소호흡기로 연명
- 1999년 6월 10일 15시 5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망 (향년 22세)
4. 사후
- 1993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츠다 츠네미가 연상되는 비운의 투수.[22] 또한 김상진이 사망한 이듬해인 2000년엔 같은 투수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후지이 마사오가 폐암으로 별세했다.[23]
- 동아일보가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을 '김상진 인생 마운드 강판' 이라고 적어놔서 '아니 젊은 청년이 불의의 병으로 죽었는데 거기다 '강판'이라고 제목을 적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라고 사람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 다음 주 해당 신문사에서 '이건 아니지 않냐'라는 독자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도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한참 후에 '자기는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데 편집부에서 맘대로 붙인 제목이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24]
* 김상진이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KIA 타이거즈는 김상진의 기일인 6월 10일에 근조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하고 있으며, 2000년에 생긴 김상진의 팬클럽인 "천상비애(天上飛愛)"도 매년 기일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야구 현수막을 걸고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예전보다는 회원 수가 줄고 활동이 뜸해졌지만, 김상진 선수에 대한 정보와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카페이니 김상진 선수를 기리는 마음으로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2002 시즌 중 장성호가 김상진을 추억하며 글을 남기기도 했다.
- 2011년, MBC LIFE 히스토리 후에서 아기 호랑이 김상진 선수를 다룬 회차를 방영했다.
- 2013년 9월 10일, 임창용이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임창용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리포트"에 김상진 선수를 추모하는 내용의 칼럼을 쓰면서 야구 팬들이 이 비운의 선수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27] 임창용 칼럼
- 2016년 10월 김상진의 출생지인 재뫼마을의 환경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김상진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사
- 2017년 이호준을 통해 다시 팬들의 기억 속에 소환되었다. 김상진은 이호준이 당시 아끼던 후배였으며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사진을 보며 상진이와 함께 했던 때네... 보고 싶네. 상진이라고 언급했다.
-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1997년 한국시리즈 당시 활약 영상을 틀어줬으며 최해식이 출연하여 시리즈 당시 김상진의 직구가 참 좋아서 직구 하나만 가지고도 상대 팀 타자들을 압도했다고 술회했다.[28] 2022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진흥고 선배들인 김정수와 송유석도 '김상진은 참 착한 아이였다'고 술회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비쳤다.
- 생전 절친했던 친구로 OB의 박명환이 있었다. 이 두 선수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는데 언론에서 그런 구도를 잡은 게 아닌 김상진 본인의 의사로 라이벌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스톡킹에 출연한 박명환이 회고하기를, 무등경기장 원정을 간 박명환에게 해태 이대진이 김상진을 데리고 오더니 "얘 너랑 친구인데 라이벌 하고 싶대. 친하게 지내 봐."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친해져 김상진의 문병도 갔다고 한다.
4.1. 11번 잔혹사
생전의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진흥고 직속 선배 이대진은 김상진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한동안 등번호 11번을 달고 경기에 임했지만, 2004 시즌을 끝으로 스스로 번호를 반납해버렸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성적이 너무 부진해서 하늘에 있는 후배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대진은 어깨 수술을 받고 타자 전향까지 하는 등 부진한 상황이었다.이대진이 11번을 반납한 이후, 2011년 시즌 손영민이 11번을 물려받기로 했었는데, 이범호의 FA 영입 보상 선수로 친정 팀에 돌아간 안영명의 등번호이던 1번을 달면서 결번으로 남아 있다가 2010년도 신인 투수인 김대웅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김대웅이 방출되며 다시 결번이 되었다가 2012년부터는 좌완 투수 임준섭이 달았고, 이후 임준섭이 한화로 트레이드되면서 반대급부로 KIA 유니폼을 입은 김광수가 11번을 달았다.
2016년에는 유창식이 물려받았지만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유창식은 한화에서도 레전드의 번호를 달았던 유망주인 만큼 참 씁쓸한 부분. 뒤이어 진흥고 후배 김진우가 11번을 받았지만 그도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면서 2017년 시즌 후 육성선수 전환과 함께 반납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때 해태의 강타자 김성한의 등번호이기도 했던 김상진의 생전 등번호 11번은 2018년에는 결번으로 남아 있다가 2019년에 박정수, 2020년에 이민우의 배번으로 정해지는 등 여러모로 곡절을 겪고 있다. 2020 시즌에는 이민우가 이 번호를 달았고 시즌 초엔 호투했으나 이후엔 부진하면서 선발 로테이션에서 아예 빠져버렸고 2022년엔 아예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2022년 시즌에는 김상진 사후 출생한 2000년생 투수인 김도현이 11번을 달고 있다가 군에 입대한 뒤 송후섭이 번호를 이어받았으나 송후섭이 2023 시즌을 끝으로 방출된 뒤 윤도현이 달게 되었다.
4.2. 기일에 열렸던 타이거즈 경기의 기록
1999년 6월 10일 그가 하늘나라로 떠난 바로 그날, 수원 야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뛰었고, 소소경의 7이닝 4피안타 2실점의 호투, 그리고 입단 동기 장성호의 역전 타점과 쐐기 점수에 힘입어 10:2로 크게 승리했다.매년 6월 10일이면 근조 리본을 부착하고 경기에 임하는 타이거즈이지만, 이날마다 KIA의 승률은 0에 가깝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경기 연속으로 패배하다가[29] 2016년에 한 번 이겼다. 삼성이 고 장효조 선수 기일에 여는 추모 경기와 딱 비교된다.[30]
2014년 6월 10일 경기에서는 난타 세례를 받으며 팬들을 폭발시켰다. 그렇잖아도 타어강 등 2013년 이후 처참한 성적으로 분위기가 살벌한 기아 팬들이었는데 이런 막장 경기까지 나오니 김상진 기일만 되면 지던 놈들이 이젠 아주 가지가지 한다며 분노어린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2015년에도 또 졌다. 이번엔 양현종의 등판 경기라서 많은 팬들이 승리를 기대했지만, 라인업에서 김기태 감독이 나지완을 좌익수 겸 1번타자로 기용하는 이상한 수를 뒀고, 결국 마무리 윤석민이 1.1이닝 2실점 불쇼를 보여주며 넥센 히어로즈에게 역전패했다.
2016년에는 드디어 이겼다. 광주 홈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이범호와 브렛 필의 홈런포를 앞세워 4-0의 스코어로 경기를 끝냈으며, 고졸 신인 정동현이 1군 데뷔 첫 선발승까지 거두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승전보로 김상진을 추모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다시 졌다. 광주 홈 경기에서 넥센에게 연패를 하며 당시 시점에서 NC와 불과 0.5경기차 1위라는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2018년에는 롯데 원정 경기였는데 4:0으로 끌려가다가 우천으로 노게임 선언이 되었다.[31]
20주기인 2019년 6월 10일은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
21주기인 2020년 6월 10일은 kt 위즈와의 수원 원정 경기였고, 이른 장마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KIA는 10:0으로 5회 강우콜드 승리를 거두었다. 김상진의 기일에 거둔 네 번째 승리였다. 이날 경기는 7안타를 치고도 kt 마운드의 난조로 무려 10개의 사사구를 얻어 대량 득점에 성공했고, 애런 브룩스가 5이닝 무실점의 맹투로 완봉승을 거두는 등 여러모로 뜻 깊은 날이었다.
22주기인 2021년 6월 10일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 경기였으며 2:4로 패했다.
23주기인 2022년 6월 10일은 키움 히어로즈와의 홈 경기였으며 10:6으로 패했다. 이로써 기일에 키움(전신팀들 포함) 상대로 5연패를 기록했다.
24주기인 2023년 6월 10일은 두산 베어스와의 원정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기일날 잠실 원정은 무려 18년 만에 이루어졌다. 경기는 6:3 KIA의 승리로 6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25주기인 2024년에는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다.
26주기인 2025년에는 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연도 | 주기 | 상대팀 | 구장 | 스코어 | 승패 | 비고 |
2000 | 1 | 두산 | 잠실 | 5:4 | 승 | |
2001 | 2 | 현대 | 수원 | 0:6 | 패 | |
2002 | 3 | 경기 없음 | [A] | |||
2003 | 4 | 한화 | 무등 | 17:8 | 패 | |
2004 | 5 | 삼성 | 시민 | 3:1 | 승 | |
2005 | 6 | 두산 | 잠실 | 2:5 | 패 | |
2006 | 7 | 경기 없음 | [33] | |||
2007 | 8 | SK | 무등 | 2:3 | 승 | |
2008 | 9 | 우리 | 목동 | 2:10 | 패 | |
2009 | 10 | 히어로즈 | 2:4 | 패 | ||
2010 | 11 | 두산 | 무등 | 3:1 | 패 | |
2011 | 12 | LG | 군산 | 7:6 | 패 | |
2012 | 13 | 롯데 | 사직 | 3:6 | 패 | |
2013 | 14 | 경기 없음 | [A] | |||
2014 | 15 | 한화 | 광주 | 16:15 | 패 | |
2015 | 16 | 넥센 | 4:3 | 패 | ||
2016 | 17 | 삼성 | 0:4 | 승 | ||
2017 | 18 | 넥센 | 8:4 | 패 | ||
2018 | 19 | 롯데 | 사직 | 취소 | [35] | |
2019 | 20 | 경기 없음 | [A] | |||
2020 | 21 | kt | 수원 | 10:0 | 승 | [37] |
2021 | 22 | 삼성 | 대구 | 2:4 | 패 | |
2022 | 23 | 키움 | 광주 | 10:6 | 패 | |
2023 | 24 | 두산 | 잠실 | 6:3 | 승 | |
2024 | 25 | 경기 없음 | [A] | |||
2025 | 26 |
아래는 팀 간 전적이다.
팀 | 전적 | 승률 |
SSG(전신팀 포함), kt | 1승 | 1.000 |
삼성 | 2승 1패 | .667 |
두산 | 2승 2패 | .500 |
롯데, LG, 현대 | 1패 | .000 |
한화 | 2패 | |
키움(전신팀 포함) | 5패 | |
NC | 전적없음 | |
통산 전적 | 6승 13패 | .316 |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ERA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1996 | 해태 | 29 | 123⅔ | 9 | 5 | 0 | 4.29 | 115 | 62 | 59 | 55 | 64 | 1.35 |
1997 | 30 | 147⅔ | 9 | 10 | 1 | 3.60 | 135 | 60 | 59 | 71 | 91 | 1.28 | |
1998 | 25 | 121 | 6 | 11 | 1 | 3.87 | 120 | 63 | 52 | 50 | 69 | 1.34 | |
KBO 통산 (3시즌) | 84 | 392⅓ | 24 | 26 | 2 | 3.90 | 370 | 185 | 170 | 176 | 224 | 1.32 |
6. 관련 문서
[1] 음력 3월 9일. 네이버 프로필에서는 1978년생으로 기재했으며 생존했다면 현재 [age(1977-04-26)]세이다.[2]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신안동[3] 이는 야구가 하기 싫어서가 아닌 돈 많이 드는 야구 한다고 하니 부친이 완강하게 반대했던것과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이 겹쳐 야구를 할 때도 소심한 모습으로 일관했었기 때문이다.[4] 제자 김진우의 활약에 힘입어 팀을 2000년 봉황대기와 2001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감독에서 물러나 광주진흥고 체육 교사로 근무했다. 아들 강하승도 진흥고를 졸업하고 고양 원더스에 입단 후, KIA 타이거즈로 스카우트 되었지만 1년을 뛰고 방출되었다.[5] 고등학생이 145를 찍었으니 프로에 와서 더 훈련받으면 140대 후반 내지는 150km를 찍을 확률도 높았다.[6] 당시 해태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은 선수가 2명이 더 있는데, 김상훈은 고려대에 진학한 후 2000년에 입단했고, 서재응은 인하대에 진학했다가 중퇴 후 뉴욕 메츠와 계약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8년에 입단했다. 김종국은 1973년생이나 고려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프로에 데뷔해서 입단 동기가 되었다.[7] 본인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했을 만큼 간절히 원했다.[8] 1924년생으로 김상진 본인과는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 수준의 나이차이가 났으며 형, 누나와도 나이 차이가 10살이 넘었다.[9] 연세대의 김충남 감독은 직접 광주로 내려와서 강의원 감독에게 메달릴 정도로 김상진을 데려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지만 실패하자 강의원 감독에게 엄청나게 뭐라 했을 정도였다. 다만, 김상진이 연세대를 포기한 이유는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목재 공장을 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었는데, 심지어 이 당시엔 팔이 부러진 상태였다. 김상진 본인도 대학 진학을 취소한 것에 대해 동기 3명은 같이 데리고 갈 수 있던 상황인데 취소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10] 이 경기에서 본인의 최고 구속인 149km를 기록했다.[11] 하지만 그 때만 해도 김상진이 '해태 타이거즈'라는 이름의 마지막 헹가래 투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해태가 아홉 번째 우승을 거두고 정확히 1주일 후에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로 쓰러지고 말았다.[12] 말이 4선발이지, 그 앞의 세명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이었음을 생각하면 타팀의 2~3선발과도 겨뤄볼 만 했다.[13] 1998년 시즌 중 러닝훈련 시에 고개가 비뚤어진 채로 뛴다고 장채근 코치가 핀잔을 줬는데 김상진도 제대로 세우고 뛰려고 했으나 "코치님, 잘 안됩니다" 라면서 계속 목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결국 이는 목뼈로 전이된 위암이 원인이었다.[14] 운동선수들은 다른 직업군보다 활동량이 많은 만큼 체력 소모가 크고 물질대사가 활발하며, 이 때문에 음식 섭취량도 많은 편이다. 즉 냄비 하나=봉지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양도 많은데 갓 조리되어서 뜨겁기까지 하다면 내장에 가해지는 부담도 그 양과 온도만큼 클 수밖에 없다.[15] KIA로 바뀐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구단 트레이너와 프런트로 활동하고 있다.[16] 홍현우는 문병 당시 김상진의 위암 투병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17] 2011년 MBC LIFE에서 방송된 '히스토리 후'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김상진을 주제로 취재하고 방영했는데, 초중고 동기가 인터뷰에서 "라면 먹을 때 상진이는 안 씹고 삼켜요."라고 증언했고 중고등학교 시절 감독으로서 김상진을 지도한 강의원 감독 역시 "상진이는 남들 밥 한 그릇 먹을 때 두 그릇 먹고, 남의 간식도 달라고 해서 먹었어요."라고 증언했다.[18] 라지 사이즈 피자 2판을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고 한다. 다행히 정현욱은 LG 트윈스 시절 위암을 초기에 발견하여 완치하였고, 지금도 건강하게 코치로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다.[19] 당시 해태 소속이던 최상덕의 증언에 의하면 덕아웃에서 김상진이 최상덕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대더니 "선배님, 저 이쪽이 너무 아파요." 라고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20] 2021년경 유튜브 KBS 같이삽시다 채널에 전편이 올라왔지만, 현재는 삭제되어 볼 수 없는 상태이다.[21] 통원치료를 위해 중앙병원 근처 오피스텔을 얻었다. 이 외에도 오피스텔 근처 한약방에서 벌침을 맞기도 했다.[22] 김상진과 츠다는 팀에서 촉망받던 우완 파이어볼러였고, 암으로 인해 안타깝게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23] 이쪽도 똑같이 암으로 사망했고, 챔피언십 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으며(한국/일본 시리즈), 강속구 투수를 상징하는 불과 관련된(후지이의 경우는 "불꽃의 중간계투") 별명이 붙었었다.[24] 당시 편집부나 데스크에서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마음대로 편집하거나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25] 네이버 스포츠로 발행된 칼럼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네이버에서는 삭제되고 박동희 기자 블로그에 원문이 남아있다.[26] KIA 타이거즈의 2009년 10번째 우승 후 박동희 기자의 칼럼. 김상진 선수가 V9의 마지막 승리 투수라는 점에서 위의 칼럼과 함께 보길 추천.[27] 임창용이 김상진의 진흥고 1년 선배이다. 위의 박동희의 기사에서 당시 진흥고 감독이었던 강의원이 제자인 임창용과 김상진을 회고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28] 최해식은 전설의 타이거즈 뿐만 아니라 방송, 신문에서 이따금씩 김상진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할 때마다 먹먹한 감정을 보였다.[29] 2013년은 6월 10일이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30] 장효조의 작고 후 삼성은 장효조의 기일이나 추모 행사가 있는 경기에서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나 2011년부터 삼성을 맡은 류중일 감독이 장효조와 함께 꽤 오래 선수 생활을 하였으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던 직속 후배여서 더더욱 이기려고 하는걸지도..[31] 참고로 이날은 한승혁의 직구가 142km/h가 찍히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와중에 손아섭은 목숨걸고 커트질을 하는 등.. 여러모로 눈을 뜨고 보기 힘겨운 경기였다.[A] 월요일이기 때문에 경기가 없다.[33] 무등 한화전 우천취소[A] 월요일이기 때문에 경기가 없다.[35] 4회말 우천 노게임[A] 월요일이기 때문에 경기가 없다.[37] 강우 콜드로 5회까지만 진행[A] 월요일이기 때문에 경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