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06 12:59:5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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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No.83
이광우(李光雨 / Kwang-woo Lee)
생년월일 1965년 3월 14일
출신지 전라북도 익산시
본관 경주 이씨[1]
학력 군산초-군산중-군산상고-원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9~1991)
OB-두산 베어스 (1992~2001)
LG 트윈스 (2002)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3)
KIA 타이거즈 잔류군 투수코치 (2003~2007)
KIA 타이거즈 재활코치 (2007~2009)
성균관대학교 투수 인스트럭터 (2010)
화순고등학교 감독 (2011~2013)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4)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4)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5)
두산 베어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6~2017)
두산 베어스 2군 트레이닝 코치 (2018~ )

1. 소개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같이 보기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 LG 트윈스의 투수였으며, 현재는 두산 베어스의 코치이다.

현역 시절엔 쓰리쿼터 투구폼으로 직구-슬라이더의 투피치 투수로, 주로 미들맨과 임시 선발을 오고가던, 돋보이진 않지만 소속팀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던 투수였다.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5mm가량 찢는 수술을 감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전라북도 익산시 출신으로 군산상고 졸업생이다. 동기로는 정명원 등이 있다. 1984년 청룡기에서 군산상고가 우승할 때 최우수 선수도 그였으며, 청소년 대표로도 발탁되는 등 고교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2]

당연히 초고교급 투수였던 그에게 서울의 유명 대학교들이 스카웃 제의를 했지만, 동기들과 지역 대학교 동반 진학으로 압력을 넣은 지도자와 학부모 때문에, 결국 고교 동기 8명을 데리고 원광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함께 입학한 선수로는 정명원도 있다. 원광대에 진학해서도 고교시절의 명성을 이어가며 1학년때부터 에이스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정통파 우완투수로 인정받아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대학 2학년인 1986년에는 춘계리그에서 팀 창단 처음으로 우승[3]이라는 영광을 모교에 안겼다.

이광우는 원광대 1학년때 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당대를 대표하는 아마 최고의 투수 중 한명 이었으며, 대학 4년내내 태극마크를 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최다투구이닝 (12이닝)을 기록하고 캐나다전에서 1승을 올리는 등, 그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원광대학교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는 연고 지역내 최고 선수로 평가받던 그를 1차 1순위로 지명했는데, 88올림픽 때문에 한해 더 아마추어로 발이 묶인 군산상고 1년선배 조계현, 동기인 국가대표 언더핸드 이강철과 함께 국가대표 신인투수 3인방으로 꽤나 화제가 되었다.

당시 짠돌이 구단 해태로서는 파격적인 4,1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아마시절 엄청난 명성을 떨친 선배 조계현의 3,500만원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했을 정도로 특급신인으로 기대가 엄청나게 컸다. [4] 물론 조계현의 이름값은 이광우나 이강철보다 높았지만, 고교시절부터 엄청난 혹사로 팔이 이미 망가져서 예전의 강속구를 못 던진다는 평가가 나왔고, 조계현의 연세대 재학시절 중 2,3학년때는 아예 타자로 나올때가 더 많아서 기대치가 많이 떨어져 있던 상황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5]

그 때문에 당대 최강팀에 선동렬을 위시한 투수진도 풍족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뭘해도 잘 풀린다는 부러움 섞인 시샘을 받았는데, 정작 구단 관계자들은 '거물급이 한꺼번에 3명이나 들어와서 계약금이 부담스럽다'는 배부른 소리를 해대서 욕을 먹기도.[6]

당시 1차지명급 대졸 신인 계약금이 1,500~2,000만원선, 국가대표급 투수들도 3천만원에 근접하면 꽤 수준이 높은 선수에게나 지급하던 금액이었으며, 같은해 입단한 좌완특급 송진우가 당해 신인 최고 계약금 4,200만원을 받았으니, 이전 문서처럼 이광우는 완전히 무명이던 정명원과 함께 이야기 될 차원의 선수가 아니었다는 증거. [7]

다만 입단 동기인 이강철은 첫해부터 15승을 거두며 한희민의 뒤를 잇는 잠수함 투수로 각광을 받았고, 조계현도 우려를 딛고 비록 승수는 7승으로 작았지만 174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0위 (2.84)에 올라 이름값을 어느정도 해낸 반면, 이광우는 1989년 입단 초부터 발가락부상, 어깨부상 등이 연이어 발생하는 고초 끝에 22게임에 등판, 5승 4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여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이듬해에도 자잘한 부상으로 인해 투구 밸런스가 무너지며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세 시즌동안 8승12패3세이브의 초라한 성적으로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자신감을 잃은 이광우는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1992년 박노준과 맞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OB 베어스로 이적한다. OB는 이광우가 과거 국가대표 에이스급 투수였으니 페이스만 찾으면 몫을 해줄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투수는 포기하고 타자에만 전념하여 3할타율을 기록한 거물 박노준을 과감하게 트레이드 카드로 내미는 강수를 두었다. [8][9][10]

이광우는 OB 베어스 이적 첫 해 중간, 마무리, 선발을 전천후로 오가며 31경기에 등판 7승 6세이브를 올렸는데, 당시 투수진의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팀에 박철순과 함께 불펜의 중심을 잡고 소금같이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1993년 32경기 7승 6패 2세이브, 2.96의 평균자책점, 1994년 23경기 8승 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9로 전천후 역할을 수행했고, 이때부터 은퇴할때까지 이광우에게 따라붙는 'LG 킬러'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90년대 LG는 좌타라인을 중심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야구를 전개하여 인기몰이 중이었는데, 쓸만한 좌완투수가 없어 늘 LG 좌타자들의 봉쇄에 곤란을 겪던 OB측에서 잠실 라이벌전에 내밀 수 있는 필승카드가 되었다. LG전만은 엄청난 구위를 가지고도 유독 큰 경기에 약해 새가슴 소리를 듣던 에이스 김상진보다 더 든든한 존재였으며, LG전에는 아예 표적등판 비슷하게 선발로만 고정으로 출장해 완봉승을 거두는 등, 93년부터 대 LG전 9연승을 올리기도 했다.

프로야구 원년 이후 OB가 13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던 1995년은 부상과 부진으로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이듬해에도 17경기에 나와 1승 8패로 별다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1997년에는 조금씩 선발로 나오는 경기가 많아졌으며 29경기 8승 7패 2세이브, 4.54의 평균자책점으로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했고, 1998년에도 28경기 5승 6패 4.33으로 하위 선발과 롱맨을 오가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이 시점에 화제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째는 수술을 받은 것!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이광우는 본인 요청으로 정형외과에 가서 검지와 중지 사이를 1센티가량 째는 수술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주무기인 슬라이더 하나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다는 판단하에, 종으로 떨어지는 포크볼을 연마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술을 강행한 것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이면 은퇴하는 선수가 많았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손가락이 짧아 포크볼 그립을 잡기 힘들어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고 한다. 이 일은 스포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며 잠시 화제가 되었는데, 워낙 이광우의 눈빛이 매서워 조폭이 오줌지릴만한 수준인 덕분에, OB팬들 사이에서는 '이광우가 조폭이 휘두르는 칼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제압하고 치료 받으러 간거다' 라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11]

그 덕분인지 팀명을 OB에서 두산으로 바꾼 1999년에는 선발로 32경기에 나와 9승 8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본인의 역대 최다승이었다. 손가락을 찢어가며 터득한 포크볼이 효자 노릇을 제대로 하면서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 줬고, OB는 그 해 리그 승률 1위에 올랐으나 플레이오프에서 구대성, 정민철, 송진우 3인방에 로마이어, 데이비스, 장종훈을 앞세운 한화에 완패했다.

2000년 35세가 된 해에 드디어 선발투수로서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는데, 29경기 11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70의 성적으로 데뷔 첫 10승을 거두고 사실상 두산 베어스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0년도는 전년과 함께 사상 최고의 타고투저였던 해로 기억되는데, 구원과 선발을 오가던 구대성이 2.77로 유일하게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을 뿐, 2위가 3.12의 해리거 였을 정도였던 시즌에, 35세의 이광우는 타 팀 중심 투수들에 밀리지 않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것이다. 특히 친정팀인 해태 전에서 6년만에 완봉승으로 첫 승을 올린 이후 4개월 남짓한 기간에 11승을 거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2000년도는 '미라클 두산'으로 기억되는 포스트 시즌 명승부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해태 입단 동기이자 고교 1년선배 조계현이 포스트 시즌 맹활약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등 묘한 인연이 있기도 했다.

2001년에는 선발로 부진하여 중간계투로 29경기에 나와 2승 3패 평균자책 5.40으로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 해의 두산은 선발투수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중간, 선발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한 이혜천과, 무적 포스는 조금 떨어졌어도 여전히 특급 중무리였던 진필중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투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오죽하면 10승 투수 한명도 없이 한국시리즈에 우승한 유일한 팀이었을 정도로 엉망인 투수진에서, 이미 36세의 이광우가 큰 역할을 맡기엔 구위나 체력이 버거웠다.

팀의 3번째 우승 이후 조계현과 최훈재 등 노장들을 정리하던 분위기에서 이광우도 은퇴하고 구단 스카우트로 진로를 결정한 상태였는데[12] 이, 당시LG 감독이던 김성근의 노장 수집(그때나 지금이나...)으로 LG에서 1년 더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물론 LG 킬러 이광우가 LG로 갔으니 별반 기대는 없던 상황이었는데, 역시나 김민기, 장문석, 이동현, 최향남, 신윤호 등 쓸 놈만 쓰는 분위기에서 37세가 된 그가 나올 일은 거의 없고 4경기 등판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 하게 된다.

통산 성적은 66승 65패 15세이브, 평균자책점 4.46.

해태 입단 당시의 명성이나 기대치에 비해서는 평범한 성적이긴 하지만, 보직을 가리지 않고 팀에 소금처럼 꾸준히 기여했던 점이나, 30대 중반 이후 새로운 구종(포크볼)을 습득해서 뒤늦게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베어스의 역사에 충분히 기억 될만한 투수였다.

3. 은퇴 이후

2003년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어 2007년까지 잔류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07 시즌 중 재활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2009 시즌 후 김종모 수석코치와 같이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그 후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투수 인스트럭터를 거쳐서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2013년까지 맡았다.

2014년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으나, 시즌 중 권명철과 자리를 바꿔 불펜 투수코치로 올라온 가득염과 같이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항명 파동에 연루된 선수들 중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를 해 본 적이 있거나 하는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이광우 이 세 사람이 전부이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다시 보직을 바꿔, 재활코치로 내려갔다. 반대 급부로 올라온 건 권명철... 재활군에서는 주로 이현승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이후 내리막을 타던 이현승을 살려 내면서 좋은 평을 듣기도 했다.

4. 같이 보기

1984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김광윤
(북일고등학교)
이광우
(군산상업고등학교)
김동수
(서울고등학교)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김준환 (1982~1988) 이광우(1990~1991) 박노준 (1992~1993)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11번
계형철 (1982-1991) 이광우 (1992-2001) 김덕용 (2002)


[1] 경주 이씨 38세손 '雨'자 항렬이다. 현재 이 연령대의 경주 이씨 사이에서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뻘, 이건희 회장의 할아버지뻘, 이재명 성남시장의 증조할아버지뻘, 프로게이머 이제동6대조뻘이다.[2] 1982년에도 우승했는데, 이 당시 MVP는 그의 1년 선배 조계현.[3] 춘계리그에서 원광대가 우승한 해는 1986년과 2010년 두 번이다.[4] 같은 해 해태에 입단한 동기 이강철의 경우, 송진우의 계약금이 4,200만으로 최고를 기록하자 자존심을 세워준답시고 3,500만원인 이강철의 계약금을 4,200만원으로 부풀려서 발표했다. 따라서 실제로는 조계현과 이강철이 같은 3,500만원이라고 한다.[5] 1989년도에 입단한 서울연고 최대어 좌완 김기범도 조계현과 비슷한 케이스로 구위가 심하게 떨어졌다고 판단한 OB가 LG와의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겨놓고도 이진을 뽑았던 사례가 있다. 물론 김기범의 강력했던 구위가 사라진 건 사실이었지만, 이진의 프로 커리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니 뻘짓도 이런 뻘짓이 없었다.[6] 물론 당시 엄청난 짠돌이 구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해태 입장에서는 거물 신인 계약금을 한꺼번에 3명이나 지출하는게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강철의 계약금을 실제 3,500만원 지급해놓고 4,200만원이라고 부풀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가격 200원짜리 브라보콘 100원짜리 누가바 300원짜리 맛동산에 오예스 한통 12개들이에 1,200원였으니 힘들만도 했다.[7] 물론 해태에서도 190의 장신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연습 경기에서 엄청난 구위를 보인 정명원을 다크호스로 생각은 했지만, 아마 시절 비교 불가능한 경력과 서울올림픽 대표로서도 출중한 기량이 입증된 이광우를 놔두고 무명의 정명원을 지명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8] 당시 여론은 OB가 아무리 급해도 5승 투수와 천하의 박노준을 바꿔먹느냐는 비난 일색이었다. 물론 이광우도 국가대표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아마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던 박노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이미 투수로는 생명이 끝났지만 타자에만 집중해도 워낙 탁월한 베이스러닝과 뛰어난 수비, 천재적인 센스와 타격기술 덕분에 3할에 40도루는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박노준이었다. 물론 해마다 부상을 달고 다녀서 건강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지만...게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구름같이 여성팬을 몰고다니던 박노준이 사라지면서, 90년대초 하위권을 맴도는 성적과 맞물려 OB의 팬덤은 오로지 박철순의 등판때만 열광하여 잠실 구장을 찾는 처지가 되었다.[9] 다만 트레이드의 결과는 OB의 완승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박노준은 해태에서는 부상과 김응룡 감독이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로 인해 중용되지 못했고, 1994년 쌍방울로 다시 트레이드 되고 나서야 골든글러브와 도루 2위,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보여줬다. 게다가 그것도 한해 뿐...계속된 부상으로 1997년 초라하게 은퇴하고 말았다. 이광우는 OB 입단 후 화려하진 않아도 10년간 꾸준히 자기몫을 해주고 2번이나 우승반지를 획득했으니 OB의 이득이 맞다.[10] OB는 다음해인 1993년에도 비슷한 트레이드로 구설수에 다시 올랐는데, OB의 10년 프랜차이즈이자 3할 교타자인 김광림을 1993년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직후 쌍방울의 선발투수 강길룡과 트레이드 해 버린것이다. 강길룡도 국가대표 경력이 있고, 비록 팀이 쌍방울이라 승률은 낮아도 3년간 8승 5승,7승을 올리며 선발자리는 그럭저럭 지켜주긴 했지만, 성실하기로 소문난 골든글러브 3할 타자 외야수 김광림과 트레이드 카드로는 격이 맞지 않았다. 당연히 '박노준도 5승 투수랑 바꿔먹고 김광림도 5승 투수랑 바꿔먹는다. 아무리 투수가 없다고 해도 너무하는것 아니냐?' 이런 비난은 물론이고, 이광우도 이적 후 제법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강길룡은 팀만 좋으면 10승을 기대할만하다는 평가와 달리, OB 트레이드 후 강길룡의 최다승은 5승일 정도로 지지부진한 모습만 보여주고 은퇴했다. 훗날 김광림은 1995년도 타격왕과 골든글러브를 다시 차지하며 한일슈퍼게임 대표로까지 선발되었으니...욕은 욕대로 먹고 손해만 잔뜩 본 트레이드[11] 코치 시절인 지금도 강렬한 인상과 눈빛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인데, 선수 시절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꽤 미남이지만, 눈매와 눈빛만으로 조폭 두목 무릎 꿀릴만큼 눈에서 레이저를 뿜는 수준이었다. 선수들과 사석에서 모임이 있을때 팬들을 저절로 공손해지게 만들던 분 ㄷㄷㄷ;;[12]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것도 컸으며 이광우 뿐 아니라 당시 이 사건의 주동자 중에 속했던 박철순 장호연 김형석 김상호 권명철 등이 쓸쓸히 은퇴했거나 타 팀으로 떠났지만 안경현은 오랫동안 베어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