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20:01:07

김태업(1962)

파일:김태업야구.jpg
김태업
金泰業
출생 1962년 2월 19일
전라남도 강진군
사망 2023년 2월 13일 (향년 60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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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광주서림초등학교 (졸업)
전남중학교 (졸업)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졸업)
포지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5~1988)
지도자 강진북초등학교 감독 (2012~2018)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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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야구인.

2. 선수 경력

전남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강진군에는 당시 4개의 초등학교(중앙초, 동초, 북초, 서초)에 야구부가 있었으며[1] 계속 야구선수 생활을 할거면 광주광역시에서 하는 게 낫다는 조언에 따라 광주 서림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전남중학교에서는 대학 졸업 후 지도자 생활을 막 시작한 강의원 감독[2]의 맹훈련을 소화했고 중학생 최초로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피홈런 투수는 선동열이었으며 선동열에게는 고등학교 전국대회 지역예선에서 연타석 홈런을 친 적도 있다. 정작 선동열은 김태업에 피홈런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의 명성을 들은 고교 감독들이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전남중 감독의 추천으로 동계학교인 전남고에 입학했다.

전남고로 진학 후 1학년이던 1978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예선에서 막강 신일고를 1대0으로 이길 때 투타에서 활약하며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78년 어느 날 고교야구 인기가 극성스러웠던 시절이어서 봉황기 대진표 추첨실황을 공중파에서 중계했다. 사회를 MBC 김용(?) 아나운서가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남고의 추첨 결과 1회전에서 막강 신일고와의 대진이 확정됐다. 사회자가 추첨한 주장 선수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신일고는 8월 봉황기 대회 한 달 전인 7월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팀이었다. 며칠 후 어느 일요일 오후에 봉황기 TV중계가 시작됐는데 중계 예정 경기의 직전 경기 9회말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 경기가 바로 전남고와 신일고의 경기였다. 전남고 1학년 김태업이 선발투수로 나와 신일고 타선을 상대로 무실점 완봉하고 9회말 타석에서 적시타를 날렸다. 중계시작 시그날 음악이 울리고, 광고가 끝나고인지 광고 전인지, 마이크를 넘겨받은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그 적시타를 날리는 장면부터 중계를 시작한 기억이 있다.

전남고가 해체되면서 광주상고로 전학했다. 2학년 때 연투로 인해 부상을 당해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할 당시 선배 언더핸드 스로 투수 윤여국[3]이 다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김태업은 이 시절을 "나 혼자 예선부터 다 던졌어. 그때는 참말로 밥만 먹여주면 던졌어. 그러다 보니까 발목도 아팠고, 팔꿈치에도 무리가 왔던 거야. 요즘처럼 거짓말로 아프다고 하면서 몸 관리하는 게 어디 있어. 아파도 던지고 싶어서 안 아프다고 하고 던지는데. 멍청한 짓이었지 (웃음). 프로야구도 없었고, 실업에 가도 27, 8세가 되면 다들 은퇴하고 그랬잖아."라고 씁쓸하게 술회했다.

3학년 당시 지역 라이벌인 광주일고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1980년 5월 1일에 대결했다.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광주팀끼리 결승에 오른 건 사상 처음이었다. 지역예선에서 상고가 일고를 항상 이겼기 때문에 자신감에 차있었으나 결승전에서는 라이벌이었던 선동열이 아닌 예상외로 차동철이 등판하여 2-8로 졌다. 충격적인 준우승을 경험하고 광주로 내려와 바로 다음 대회인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준비하던 차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지면서 청룡기 참가가 불발됐다. 여름에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매 게임 출전해 승리를 거뒀고, 천안북일고와 준결승에서 연장 11회초 상고가 1득점에 성공하며 4-3으로 앞서갔지만 11회말에 2점을 내주며 4-5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4]

고교 졸업 후 연세대로 진학하였고, 고등학교 때 혹사당한 어깨 때문에 투수로는 거의 등판하지 않은 채 주로 야수로 플레이 하였다. 김태업은 '사실 나는 투수보다는 타자가 더 좋았어. 타자는 매일 경기에 뛸 수 있잖아. 반면, 투수는 날마다 등판 못하잖아. 그런 것도 있어서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완전히 타자로 전업했지.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선택이 늦었던 것 같아. 투수를 할 것인지, 아니면 타자를 할 것인지를. 그것도 아니면 타자가 아닌 투수를 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미련도 남아. 연세대에 다른 투수도 있었고, 나 자신이 타자가 더 좋아서 너무 빨리 투수를 포기해버렸어. 투수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면 1, 2년 재활하고 다시 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우선 경기에 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거여. 나는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어.'라고 술회했다.

1985년 선동열, 이순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하여 타자로 뛰었지만 1985년 시즌 0.149라는 초라한 성적만 남긴 채 이듬해인 1986년 현역으로 입대하였고, 전역한 후 팀에 복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은퇴 수순을 밟았다. 김태업은 '대학에서도 그렇고 프로에서도. 프로에 갈 때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야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정신력이 부족했어. 김응룡 감독님이 참 기대도 많이 하셨고, 기회도 주셨는데. 군대로 2년 공백을 가진 것도 있지만, 야구에 대한 목표의식이 없었어. 그때는 야구가 아니더라도 입에 풀칠을 못하겠느냐고 생각했거든. 참 잘못된 생각이지. 군대에서 해태로 복귀하고 나서도 내가 안 해부린다고 하고 그만뒀어. 그 자체가 후회스러워. 지금은 은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지만, 유니폼은 언제든지 입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때 주위 선배 중에 나를 잡아줬다면 좋을 텐데 라는 후회도 들지만, 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누구를 탓하겠어. 그래서 내가 방황하는 후배를 보면 신경이 가는 거여. 내가 그랬으니까. 온 힘을 다하고 안 되어서 유니폼을 벗으면 미련이나 후회는 안 남는데 …. 그러지 못한 게 한스러워. 지금도.'라고 술회했다.

초-중-고-대 동기인 이순철은 김태업에 대해 '여학생한테도 인기가 정말 많았다. 김태업을 보러 온 여학생 팬들 때문에 숙소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에 팬레터도 엄청 왔다. 내가 프로에 있으면서 받은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며 “타이거즈 시절 김응용 감독한테도 총애를 받았다. 다른 동기들이 서운할 정도로 정말 총애를 했다. 그래서 나는 ‘키가 적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렇게 실력과 인기를 갖췄던 선수가 더 활약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서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3. 은퇴 이후

카페, 세차장을 갖춘 자동차 정비소, 조명가게, 일식집 등을 운영했다. 큰 돈을 벌기도 했지만 부도를 맞아 집을 날리고 신용불량자 위기까지 겪었다. 그러나 여자소프트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여자소프트볼 저변확대에 노력했고 2012년 강진북초등학교의 재창단 과정에서 감독직 제의를 받아 수락했다. 2013년 전남도지사기 학생야구대회 준우승, 2014년 우승을 이끌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야구부가 폐교를 막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학생 수가 줄어 2018년 야구부가 해체되었고, 학생 폭력 등의 이유로 지도자의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내려왔다.

4. 사망

2023년 2월 13일 오전 1시 40분에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지병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1] 정부의 지원에 따라 1969년부터 차례대로 창단했으나 1976년 무렵 정부지원이 끊기자마자 해체의 아픔을 겪었다.[2] 훗날 광주진흥중, 광주진흥고 감독을 역임하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KBO 선수로 키워냈다.[3] 훗날 광주상고, 배명고, 전주고 감독 역임[4] 북일고가 전대영, 김영로의 랑데뷰 홈런등으로 3대0으로 앞섰으나 광주상고가 곧바로 2점을 따라붙고, 7회초에는 1회부터 구원등판한 투수 김태업의 3경기 연속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연장 11회초 광주상고는 3루주자 이순철의 더블스틸로 역전에 성공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듯 했다. 그러나 11회말 북일고는 2사에 주자를 3루에 두고 1번 김용대의 기습번트 안타로 3루 주자를 홈인시키며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2사 후에 스퀴즈번트 작전이 나온 셈이라서 중계 아나운서가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아, 이게 뭡니까? 아나운서는 번트 순간 본인이 아웃카운트를 착각하고 있었나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3번 전대영은 2루수 옆을 빠지는 끝내기 적시타로 승부를 뒤집었다. 라디오로 생중계된 이날 경기는 저녁에 1 경기당 5분 내외의 하일라이트가 편집되어 TV로 중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