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8:07:12

차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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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김용만(2) 장진범
조종규
(4명)
강정남
김윤환
조도연
문희수
(7명)
김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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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윤영철(2) 조대현(2) 김태형(2)
(1) 지명 후 미입단 / 지명 거부
(2) 1차 지명 미시행 연도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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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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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LG 트윈스 우승 엠블럼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6 1987 1988 1994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1번}}}
엄평재
(1983~1985)
차동철
(1986~1989)
최향남
(1990~1991)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18번}}}
오영일
(1985~1989)
차동철
(1990~1997)
이정길
(1998~2000)
}}} ||
}}} ||
파일:건국대차동철.jpg
차동철
車東哲 | Cha Dong-Cheol
출생 1963년 1월 27일 ([age(1963-01-27)]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림초 - 전남중 - 광주제일고 - 건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6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6~1990)
LG 트윈스 (1990~1997)
지도자 건국대학교 야구부 코치 (1997~2010)
건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1~2022)
한국골프과학기술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3.09.0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11)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해태 타이거즈 시절2.3. LG 트윈스 시절
3. 은퇴 이후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선수 시절에는 해태 타이거즈LG 트윈스에서 뛰었던 투수였으며, 은퇴 후 모교인 건국대학교 야구부에 코치와 감독으로 오랜 기간 재직하며 지도자 시기를 보냈다.

현역 시절 별명으로는 SF볼의 마술사가 있으며 그에 걸맞게 스플리터를 잘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 투수였다. 차동철, SF볼의 마술사 “야구인생도 SF”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전남중학교 졸업 후 전남고등학교로 진학했으나 교내 사정으로 야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광주제일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이 과정에서 1년을 유급하면서 동갑내기였던 선동열, 이순철보다[1] 후배가 된다. 광주일고 재학 당시 선동열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하였고 2학년이던 198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후 1982년 건국대에 입학했는데 1982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에 출전해 팀은 준우승했지만 우수투수 타이틀을 가져갔다. 1983년 추계리그에도 출전해 최종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건국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참고로 건국대 야구부 창단 이후 최초로 등장한 호남 출신 선수가 차동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 이후 198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을 받았다.[2]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6년 신인으로 데뷔한 후 선발 중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해 10승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그해 7월 27일에는 청보전에서 연장전까지 완투 끝에 무승부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만들었다.[3]

신인 시즌부터 선동열-이상윤-문희수에 이은 4선발로 주로 뛰었지만 마무리 투수패전처리 투수도 맡는 등 전천후 스윙맨으로 등판하며 마당쇠다운 활약을 펼쳤다. 방수원 - 차동철 - 송유석 등 1980년대 해태 왕조의 마당쇠 계보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정확히 차동철이 해태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송유석이 개화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송유석과는 달리 원래 보직이 선발이었기 때문에 전문적 노예라 보기에는 좀 그런 면이 있다. 어쨌든 이런 전천후적 등판으로 인한 혹사는 부상과 함께 1989년 중간계투 전향을 불러오게 된다.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2승(1986년 4차전, 1987년 1차전) 1패(1986년 2차전), 2세이브(1986년 3차전, 1987년 3차전)를 기록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방수원이 술회하기를 방수원이 선동열과 차동철에게 슬라이더를 전수했고 두 선수들은 더욱 변화구를 갈고 닦아 실전에서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2.3. LG 트윈스 시절

트레이드 초 백인천 감독 재임기에는 부상에다가 감독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출장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4] 그래도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이 우승하면서 해태 시절에 이어 5년 연속으로 우승반지를 껴보게 되었다.

이후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며 다시 한 번 활약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조금 더 전문 마당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광환 감독 체제 하에서 차명석, 김용수 같은 전문 셋업/마무리 체제가 생기는 등, 투수 분업화가 나타났지만 지금보다는 확실히 엉성한 편이었다. 따라서 전천후 역할을 해 줄 투수가 필요했고, 차동철은 많은 이들이 피하는 이 전천후 투수를 맡아 때로는 승리조, 때로는 패전조, 때로는 대체선발까지 맡는 등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1997년에는 노쇠화 여파 및 부상으로 인해 많이 등판하지 못했으며 시즌이 끝나고 LG에서 방출되며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모교인 건국대의 코치로 선임되었고, 2011년에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2013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건국대학교 야구부를 우승시켰다. 해태 입단 동기들인 이건열장채근동국대홍익대 감독이며 2022년까지도 세 명 모두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2022년을 끝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이후 2023년 9월 1일 한국골프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4. 여담

  • KBO 리그 선수 중 5년 연속 우승을 맛본[5] 유일한 선수다. 해태 타이거즈가 1986년~89년 4년 연속으로 우승하던 시절에 모두 엔트리에 들었고, 1990년 곧바로 LG 트윈스로 이적해 팀이 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후 1994년에 LG가 또다시 우승에 성공하며 커리어 전체 12시즌 동안 무려 6개의 우승 반지를 껴보게 되었다.
  • 심재원과 함께 최초로 2개팀에서 우승의 영광을 맛본[6] 선수다.
  • 비록 선동열에 가려 2인자 느낌이 강한 선수였지만, 광주일고 2학년 시절부터 박노준, 김건우가 주축이 된 선린상고, 광주상고, 천안북일고를 차례로 격침시킨 대물투수였다. 태산에 가리운 투수 차동철
  • 여러 기록을 만들어 준 허용투수이기도 하다. 장종훈의 화려한 타격 역사를 열어준 이가 차동철인데 그가 1987년 4월 14일 대전 해태전에서 친 프로 첫 안타가 차동철의 공을 받아친 2루타였다. 또 역대 KBO 역사에 단 한 번뿐인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도 차동철이 완성시켰는데 1997년 5월 4일 대구 삼성전 2회말 때 정경배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면서 대기록이 완성됐다.
  • 스플리터를 매우 잘 던져서, 1987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스플리터를 던진 게 부정투구로 오인받기도 했다. 후에 차동철은 이 스플리터를 문희수에게 알려줬고 문희수 또한 이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 야구인들 중 축구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 포지션은 미드필더.[7]
  • 친화력과 소통력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한다.
  • 1992년 타석에 한 번 들어선 적이 있다. 그리고 아웃.
  • 전설의 타이거즈송유석과 같이 출연했다. 사실 3년전부터 제작진이 출연 요청을 했으나 건국대 감독 재임 시절에는 출연을 사양했으며 한국골프과학기술대 감독으로 옮기고서야 출연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아래 내용들은 출연 당시 설명한 일화들이다.
  • 아들 차상현은 매송중학교 시절 유소년 국가대표로 뽑혔고 야탑고로 진학했다.[8] 야탑고 졸업 시점에서는 지명을 받지 못하면서 강릉영동대학교 야구부로 진학했다. 차동철이 평하기를 포지션은 3루수로 수비력은 프로급이나 체구가 작고 발이 빠르지 않은 점을 아쉬워 했다. 발이 빠르지 않은 건 처가 쪽을 닮아서 그런 것 같다고 농담했다. 차동철이 40대 초반일 때 태어난 아들이다.
  • 해태에서는 이기는 야구를, LG에서는 지도자의 기본을 배웠다고 한다.
  • 건국대 야구부 창단 역사 상 첫 호남 출신 선수였다고 한다. 차동철이 물꼬를 트면서 광주일고 뿐만 아니라 광주진흥고와 광주상고(광주동성고) 등 선수들이 입학하기 시작했다.
  • 당시 건국대 야구부에서는 먼저 입단한 고교 선배들이 후배들을 챙겨주는 문화가 많았는데 차동철은 광주일고는 물론 호남에서 올라온 선배가 아무도 없어서 외로웠다고 한다. 그때 차동철을 많이 챙겨주고 보살펴준 선배가 한 학번 위인 김성갑이었다. 김성갑은 차동철을 데리고 나갔으며 두 사람의 취미가 당구로 같아서 당구 실력으로는 팀 내에서도 이 둘을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차동철은 김성갑이 건국대 4학년 시절 결혼할 때 함진아비 역할을 해줬다고 한다. 김성갑은 결혼 직후 장녀 김유나, 그리고 3년 뒤엔 차녀 김유진을 보았는데 그 차녀가 바로 애프터스쿨유이다.
  • 김성갑이 따뜻한 선배였다면 또 다른 1년 선배 이강돈군기반장으로서 기합을 엄청 강하게 줬다고 한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안하고도 야구실력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 이종범의 건국대 진학에 큰 힘을 보탰다. 이종범의 부친이 차동철을 보고 '(차동철을 믿고) 건대로 보내도 되겠다'고 했다. 이종범은 타 프로그램 출연 당시 아버지가 연세대, 고려대, 건국대 등을 둘러보고 팀 분위기, 숙소, 연습장 등을 면밀히 살펴봤으며 연세대와 고려대는 이종범만 받겠다고 했으나 건국대는 동기들을 많이 받아주겠다고 해서 건국대로 진학했다고 밝혔다.건국우유가 맛있어서라는 이유는 덤
  • LA 올림픽 상비군으로 뽑혔으나 연습경기에서 한양대 4번타자 이종두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무너지면서 상비군에서 탈락했다. 은퇴 후 차동철과 이종두는 각각 건국대 감독, 대구상원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종종 만났다고 했다.
  • 해태 시절, 선동열의 룸메이트였다. 광주일고 시절에는 선동열의 누나가 챙겨온 과일도시락을 같이 먹었으며 해태 시절에는 선동열이 '(변하기 전에) 어서 내 한약 먹어'라고 말하며 한약도 같이 먹었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9] 해태 33 131 10 4 3 0 0.714 2.82 134 4 29 35 46 41 1.21
1987 35[10]
(3위)
159⅔ 9 11
(5위)
0 0 0.450 3.16 157 8 44 49 65 56 1.23
1988 32 146 10 6 1 0 0.625 3.33 156 11 31[11] 45 68 54 1.21
1989 14 40 0 4 0 0 0.000 4.28 48 4 0 8 22 19 1.7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0 LG 16 49 3 3 0 0 0.500 5.51 56 3 21 7 30 30 1.55
1991 3 3⅔ 0 0 0 0 - 14.73 9 1 2 0 6 6 2.73
1992 19 28 2 1 4 0 0.667 4.18 29 1 12 8 14 13 1.43
1993 32 59 5 4 4 0 0.556 3.20 52 5 16 28 21 21 1.14
1994 34 59 2 5 7 0 0.286 2.59 75 5 24 29 24 17 1.59
1995 46
(5위)
54⅔ 4 2 4 0 0.667 2.80 52 1 16 23 24 17 1.23
1996 48 77⅔ 1 6 4 0 0.143 5.21 90 4 34 33 51 45 1.52
1997 11 11 0 0 0 0 - 14.73 22 4 6 0 19 18 2.27
KBO 통산
(12시즌)
323 818⅔ 46 46 27 0 0.500 3.70 880 47 258 265 390 337 1.34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6년 3완투 2완봉
(8위)
1987년 7완투 2완봉
(8위)
1988년 5완투 3완봉
(2위)
KBO 통산 15완투 7완봉

6. 관련 문서



[1] 이순철은 1961년생이지만 이쪽은 초등학생 때 1년을 유급하는 바람에 1962년~1963년 2월생과 학교를 같이 다니게 됐고 본인도 1961년생보다는 1962년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1963년 1월생인 선동열은 차동철보다 3주 정도 먼저 태어났다. 결론적으로 중학교 때까지는 세 사람이 동기였다.[2] 드래프트 입단 동기로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김평호, 신동수, 김대현이 있다. 송유석은 연습생으로 입단했다.[3] 청보 쪽 투수도 연장 완투였다. 투수는 김신부.[4] 1990년, OB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호투한 차동철을 감독이 2차전에서도 올리려는 것을 거부하면서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5]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이상 해태, 1990년 LG.[6] 심재원은 1984년 고향팀 롯데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프로 말년이었던 1990년 LG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1984년 우승 당시에는 백업 신세였지만 1990년 우승 당시에는 헹가래 포수였다.[7] 건국대 후배인 이종범도 야구인들 중 축구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다. 또 차동철의 중학교 동기인 이순철도 원래는 축구선수로 운동부 생활을 시작했다.[8] GS 칼텍스 배구감독과 동명이인이다.[9] 커리어하이[10] 선발등판 3위(23경기)[11] 사구 4위(10개), 폭투 4위(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