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4 22:04:34

이광환

이광환의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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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광환(李廣煥)
생년월일 1948년 3월 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중앙고-고려대
포지션 내야수
소속팀 한일은행
육군
지도자 중앙고등학교 감독 (1977~1980)
OB 베어스 타격코치 (1982~1985)
세이부 라이온스 연수코치 (1986)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연수코치 (1987)
OB 베어스 감독 (1989~1990)
LG 트윈스 감독 (1992~1996)
한화 이글스 감독 (2001~2002)
LG 트윈스 감독 (2003)
LG 트윈스 2군 감독 (2004~2005)
우리 히어로즈 감독 (2008)
서울대학교 감독 (2010~)

1. 개요2. 지도자 경력3. '미국식 야구'를 주장한 지도자4. 야구 인프라에 대한 관심5. 김성근 감독과의 악연6. 기타7. 강팀의 방정식8. 역대 감독 전적

1. 개요


LG 트윈스, OB-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히어로즈의 전 감독. 현재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1], 한국야구발전연구원 명예원장이자 KBO 육성위원장이다.

2. 지도자 경력

중앙고등학교 재학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였으며,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려대 졸업 이후 당시 실업야구 최강 팀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나 부상으로 일찍 은퇴하였다. 1977년에서 1980년까지 모교인 중앙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한일은행 시절 사제의 인연을 맺은 김영덕 감독의 부름을 받아 OB 베어스의 창단 타격코치로 부임하여 프로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였다.

1984년 김영덕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옮기고 김성근 투수코치가 OB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도 코치직을 유지했지만, 야구관의 차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 해 시즌을 끝으로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야구 연수를 가려고 하자, OB 구단에서 "기왕 공부하는 거 미국까지 갔다오라" 며 경비를 지원해 주면서 약 3년간 일본 세이부 라이온즈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연수하며 선진 야구를 체득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광환 본인에게도 득이 됐던 게, 세이부와 카디널스는 1980년대의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2]였다. 그냥 어중이 떠중이 구단에서 연수를 받은 게 아니다.

연수를 마친 후 귀국한 그는 1988년 OB의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했다. 이듬해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난 김성근의 후임으로 OB의 감독직에 올라 선수들에게 자율야구라는 개념을 선포하였지만, 성적 부진으로 자신의 야구관을 펼치지 못하고 1990년 시즌 도중 사퇴하였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94
이후 1992년 백인천의 후임으로 서울 라이벌 팀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광환 특유의 자율야구가 LG 선수들에게 확실히 녹아들며 이른바 신바람 야구의 선봉장으로 팀을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실 이광환도 1992년에는 팀이 7위를 기록하면서[3][4] 팬들에게 많은 욕을 얻어먹었지만, 1993년에 한때 1위 해태 타이거즈를 턱밑까지 추격하면서 위협하는 등 선전하다가 4위를 기록했고 1994년에 그야말로 신내림한듯한 야구를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기에 그의 철학이었던 자율야구와 스타시스템이 조명받게 됐다. 시즌 종료 후 LG와 재계약에도 성공하면서 당시 신흥 명문구단으로 급부상했던 LG구단의 첫 장수감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다.

그러나 1995년 시즌 중반에 2위 OB와 6게임차까지 벌어질 정도로 여유 있는 1위를 독주하고 있었음에도 이광환은 이해하기 힘든 조급증을 보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기마다 원칙없이 바뀌는 라인업과 좌우놀이는 물론이고 1994년의 주역이었던 선발 김태원이 부진으로 라인업에서 이탈하자 이광환은 당시 선발진을 3일 휴식 후 등판시키는 4일 로테이션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선발진, 특히 에이스였던 이상훈에게 엄청난 부하를 줬던 것은 물론이고[5] 자신의 투수 보호 원칙을 스스로 깨는 비합리적인 운영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팀은 막판에 엄청난 추락을 거듭했고 페넌트레이스 최종성적은 OB에게 반 게임차 2위였으며 체력이 고갈된 이상훈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한테 난타당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96년 들어 전년도보다 더한 막장 운영으로 팀이 7위까지 떨어지는 결과를 보이자, 시즌 도중 LG 감독직에서 경질됐다.

이후 야인 생활을 보내다 2001~2002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던 최동원을 투수 코치로 영입했다. 최동원을 투수 코치로 영입하면서 "한국 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면서 보인 팀에 대한 헌신을 선수들이 배우길 바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결국 '자율 야구의 선구자'와 '혹사를 불사한 승부사'는 서로에게 맞지 않았는지 1년 후 이광환은 최동원을 투수 코치에서 내쳤다.

2003년 LG의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팀이 시즌 6위에 그치자, 스스로 1군 감독 자리를 내놓고 잔여 계약기간 2년은 2군 감독으로 활동하였지만, 경기 도중 덕아웃에서 핸드폰으로 사적인 전화 통화를 하는 등의 근무 태만으로 2군 선수들을 방치하여, 2000년대 중반 LG 팜의 황폐화의 주범이 되었다. 그리고 LG에는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2008년에는 우리 히어로즈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7위에 그치면서 시즌 후 또 다시 경질당했다. 하지만 공중분해 위기 속에서 팀을 겨우겨우 꾸린 상태에 스프링캠프도 가지 못한 팀의 감독으로 뒤늦게 취임한 사람한테 7위의 책임을 묻기는 힘든 일이다. 뭐 당시 구단 사정이 영 메롱하기도 했고...

이후에는 프로 현장을 떠나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으며 LG가 후원하는 WBSC 2016 기장 여자야구월드컵 감독을 맡기도 했다.

3. '미국식 야구'를 주장한 지도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코치 연수를 경험하였고, 연수 후에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 로테이션 정착, 투수의 역할분업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의 도입[6] 등을 주장하고 실천에 옮기려 노력한 감독이라고 평가된다. 이 점만 고려해도 이광환의 업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가 대성공을 거둔 1994년 LG 트윈스 우승 이전과 이후로 프로야구 선수 수명에(무엇보다 투수!) 크나큰 차이가 있을 정도이다. 30대 초반이면 노장 소리 들으면서 은퇴 준비를 하던 풍토에서 평균적인 투수 수명이 거의 10년 이상 늘어났다고 봐야 한다. 팀별 성적이 아니라 한국 야구 전체에 끼친 영향을 두고 보면 이광환 만큼 발전적 영향을 준 현장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특히 토니 라루사 감독이 제시한 라루사이즘 즉 투수분업체계의 도입으로 혹사없이 체계적으로 투수진을 관리한 것이 최고의 업적이다. 당시는 기껏해야 선발중무리만 확실한 보직이였고 나머지는 그때그때마다 돌려막기 하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툭하면 선발이 불펜 알바 뛰고, 투수 바닥나면 어제 마무리 투수가 오늘 선발 등판 하던 그런 마구잡이식 기용이 횡행하던 리그에서 선발 투수에게 4일 휴식을 보장하는 5인 로테이션, 승리조/ 추격조/ 원 포인트 릴리프/ 롱릴리프/ 1이닝 마무리로 철저히 분업화한 불펜 투수 운영 등 이광환 감독이 제시한 투수분업체계 일명 스타시스템(Star System)[7]은 충격적이었다. 지금이야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야구계에선 대단히 생소한 개념들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스프링캠프에서 기자들이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자(...) 이광환 감독이 직접 화이트보드에 도표를 그려가면서 1시간 넘게 야구이론 강의를 하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기자들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사도 제대로 안나갔다고...
"감독님 잘 막으면 계속 던져야지 왜 한 타자, 한 이닝만 던지나요??"
"감독님 원래 투수는 매일 던지는 거 아닌가요? 왜 연투하면 안되나요?"
"감독님 왜 가장 잘던지는 투수를 이기는 경기 9회에만 쓰나요?"
"감독님 왜 선발은 선발만 하나요? 경기 불리하면 구원투수로도 써야죠!"
"감독님 왜 선발은 무조건 길게 던져야 하나요? 아니다 싶으면 1회라도 내리고 불펜 올려야죠!"

지금 보면 야알못 취급 받아 마땅할 말도 안되는 질문들이지만, 저 때는 저게 당연한 것들이었다. 아무튼 이런 질문과 의구심이 야구계에서 속출했지만, 이광환 감독은 김명성[8] 투수코치와 함께 우직하게 스타시스템을 밀어붙여서 결국 1994년 LG 트윈스 우승을 이끌었다.

훈련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당시 훈련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였냐면 1990년대 초반까지도 스포츠신문 1면에 '@@구단 오대산에서 극기훈련'같은 제목에 영하의 날씨에 투수가 얼음깨고 계곡에 들어가 있는 사진이 실리곤 했다. 한마디로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가능하다고 믿던 시절. 당연히 이런 훈련(?)은 오히려 선수의 몸을 상하게만 했지, 경기력 향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제 오대산 극기훈련은 김성근 감독이 1989년 태평양 돌핀스에 부임하자마자 실시한 것으로 해외에서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토픽으로 미국 방송의 전파까지 탓다. 또 만년 하위권이던 태평양이 이 해에 4강에 진출하자, 계속 준우승에 머물고 있던 삼성의 높으신 분이 이걸보고 "정신력이 약해서 그러니 특전사 훈련을 받게 하라"고 지시해서 졸지에 삼성 선수단 전원이 한겨울에 공수여단에 입소해서 일주일간 극기훈련을 받았다. 당시 얼음깨고 계곡에 들어가고, 군화신고 PT체조 등의 무식한 훈련(?) 끝에 오히려 선수들 몸상태가 엉망이 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당시 어찌어찌 겨우 한국시리즈는 진출했지만, 백인천 감독의 LG 트윈스한테 4전 전패의 수모를 당하면서 1990년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 선수였던 류중일 역시 이를 비판했고, 결국 김성근 감독도 "그런 훈련을 하면 안되는 거였다."라고 인정은 했다.

이런 시절에 이광환 감독은 기존에 선수들 근육 뭉치면 '마사지 해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되던 피지컬 트레이너들에 과감히 권한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선수단 엔트리 구성과 출전 여부에 일일히 트레이너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참조하면서, 트레이너들의 주도하에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지금은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선 대단히 혁신적이었고, 위의 투수분업화와 맞물려서 투수들의 부상방지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본파와 자신을 구별지으면서 자신은 미국파라고 자칭하기도.

이에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로서, 90년대 초반부터 이광환 감독은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 야구국가 에서는 당연히 한다면서 한국 프로야구에 선발투수 예고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언론에 주장하였다. 여기에 몇몇 투수력이 부족한 팀들의 사장단이 동의하여 KBO가 선발투수 예고제를 도입 하였는데... 막상 2008년 메이저리그 출신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한국에 오자마자 메이저리그에서는 경기시작 5분전에도 선발투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제도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로이스터, 선발투수 예고제 맘에 안들어. 실제 메이저리그에서는 선발투수 예고제가 2009년에 와서야 검토되었으며 실제 롤모델은 94년부터 일본 퍼시픽 리그가 시범적으로 적용한 것인데 아마 이걸 참조한 듯 하다.

'선발 로테이션' 정착을 비롯하여 선진 시스템 야구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구시대적인 야구의 대표적인 사례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4승을 들면서[9]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이른바 자율야구를 주장하였는데, LG 감독 시절 1994년 LG의 한국시리즈 우승 등의 선전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89~90년의 OB와 2003년 LG 감독 시절엔[10] 팀의 암흑기를 열었다는 악평도 받는다.

또한 2008년 히어로즈 감독 때에는 팬들이 감독이 먹는 해바라기씨에 수면제를 타고 싶다고 할 정도의 막장 경기운영을 보여주며 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는데, 이 때는 경기운영도 막장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구 현대 유니콘스 팬들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김시진 감독이 짤리고 나서 들어온 후임자라는 점 때문에 어떻게 해도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4. 야구 인프라에 대한 관심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야구 인프라 개선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야구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단 한국프로야구의 기록들과 기념품들이 보관되지 않는 상황을 개탄하여 사비를 털어서 1995년 제주도 애월읍 하귀리[11]야구 박물관을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1998년 서귀포시에 정식으로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건립되자 그 소장품 3,000여 점을 모두 기증하였다.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사실상 야구 박물관에 하드웨어적 요소(전시실, 공연장, 상영실 등)가 더해져서 완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한편, 해외 전지훈련 대신 제주도에서 훈련을 하면 좋다는 주장을 하여 본인이 실천에 옮기기도 하고[12], 제주도에 훈련장 등을 만드려고 하기도 하였으나 막상 제주도 전훈을 간 팀들이 엄청난 불편[13]을 호소하는 바람에 요즘은 잠잠하다가, 다시 2016년 김응룡이 '김응룡 필드'라는 가칭으로 제주도에 야구장과 실내훈련장 등 전지훈련 시설 건립을 시작하면서 제주도 야구개발이 재개되었다.관련 기사

여자야구의 대부라고도 불리며, 대한민국 여자야구 발전을 위해 많이 돕고 재정적인 문제도 많이 해결하기 노력하고 대회도 개최했다고 한다. 현재도 여자야구 감독을 맡아서 돕고 있으며, 중앙대 야구부 감독에서 사임한 뒤 한동안 야인으로 있었던 김용수를 투수 인스트럭터로 데려가기도 했다.

베이스볼 아카데미 원장으로 재직했다.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KBO서울대학교가 공동으로 설립한 전문 야구지도자 양성과정이었다. 2013년부터는 프로팀 코치 대상 수업도 개설되면서, 이 시기 기준으로 한국야구에서 프로 야구팀의 감독이나 코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14] 4과목 평균 60점 이하가 나오면 낙제. 하지만, 지원이 중단되면서 베이스볼 아카데미 전문가과정은 2016년 4월부터 문을 닫게 되었다.폐강공고

5. 김성근 감독과의 악연

1988년 미국연수를 다녀온 후 OB 2군 감독에 취임하자, 자신은 김성근 OB 감독의 스파르타식 야구에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기자들에게 의견을 피력하여 기삿거리를 만들었다. 또한 선수단 운영과 관련해서 여러차례 김성근 1군 감독과 공개적으로 충돌하였고, 결국 시즌 종료 뒤에 김성근 감독이 2군보다 1군이 오히려 지원을 못 받았다고 언플을 시전하면서 계약 만료를 이유로 팀을 떠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일명 세탁기 파동이다. 왜 세탁기 파동이라고 부르냐면 김성근 감독이 '2군은 세탁기로 빨래 하는데, 1군은 선수들이 직접 손빨래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당시는 아마야구와 프로야구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대졸신인들이 입단 첫해부터 1군에서 맹활약하는게 당연시 되던 시대였다. 당연히 2군에서 선수를 육성한다는 개념도 희박했고, 어느 구단이나 2군에 관심을 두고 체계적으로 운영하지도 않았다. 2군은 그저 1군에서 못뛰는 잉여들끼리 연습경기나 뛰는 그런 개념. 이런 현실에서 김성근은 관심이 가는 선수는 (엔트리에 넣지는 못해도) 1군에 동행시키면서 직접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다보니 김성근 감독은 엔트리에 비해서 훨씬 많은 선수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하다못해 배팅볼 투수까지 시켰다. 반면에 미국 연수에서 돌아온 이광환은 2군을 정비해서 체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을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두 명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기존에 하던 대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을 모조리 1군에 동행시키면서, 2군은 경기라인업을 짜기 힘들 정도로 선수가 부족해졌고, 결국 이광환 감독이 "2군도 경기하느라 바빠서 선수를 올려줄 수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프로야구가 아직 주먹구구이던 시절, 시스템의 변화에 따른 해프닝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2017년 시즌 초반 한화 이글스에서 불거진 박종훈 단장과 김성근 감독의 대립도 1988년 OB 베어스에서 벌어진 일과 똑같다. 김성근 "유망주들 내가 직접 관리할 테니 엔트리에는 못넣어도 1군에 동행시키겠다" vs 박종훈 단장 "안된다. 유망주는 2군에서 체계적으로 육성해서 1군에 올려주겠다." 즉, 시간이 거진 30년이 흐른 2017년에도 김성근은 아직까지 저런 구시대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한때 종신감독 소리까지 나오던 김성근이 팀을 떠나고, OB 프런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광환이 1군 감독으로 승격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렇게 1989년 OB 1군 감독에 취임했지만, OB는 한 시즌 반 동안 69승 93패 4무라는 최악의 암흑기를 겪는다(...).

사실 처음부터 김성근을 내치기 위한 인선이었는지는 다소 애매하다. 다만 이광환과 김성근은 이때부터 야구 철학이 확연히 달랐고, 그런 이광환이 귀국후 2군 감독을 맡은 사실 자체에 대해서 준비된 감독 후보라는 인식을 많은 이들이 가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이 김성근 당시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결과는 예고된 상황이었다.그리고 이 전개 과정은 이광환 한 쪽에만 책임을 묻기도 뭐한 것이 김성근 역시 과정을 보면 전형적인 과거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때문에 어느정도는 감정싸움으로 달린 것도 있고, 이걸 구단 프런트에서 조장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애초에 1군과 2군의 개념도 애매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러면서 김성근은 프런트인 정진구 실장을 포함한 자기 휘하의 코치진들을 데리고 나가면서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 이후 태평양을 3위로 끌어올린다[15].

이광환 감독의 말에 의하면 2003년 중반에 이미 노장 3인방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정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는 말을 단장에 들었다고 한다.[16] 이광환 감독은 목을 걸고 반대하다가 정말로 잘리고, 이 쳐내기 작업은 후임인 이순철이 담당하게 된다. 초보 감독인 이순철은 윗선의 명령대로 정말로 그 작업을 했고, 결과는 흑역사 당첨. 이광환 영입과정과 노장 3인방, 특히 이상훈의 제거 과정은 도저히 양립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도중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17] 다만 2002년 김성근 감독의 해임부터 이광환 영입, 2004년 이순철 감독 취임과 1994년 우승멤버들의 숙청까지, 장기 비전 없이 즉흥적인 프런트의 현장개입이 선수단에 대혼란과 불신을 가져오면서 비밀번호가 시작되었다는 게 인터넷에서 많이 도는 이야기이다.

두 번의 영입 모두 이광환 감독과 프런트와의 끈끈한 관계가 배경이 되었다. 80년대에는 OB맨이라고 불릴 정도로 OB 프런트와 친했고, 또 2002년에는 LG 프런트와 고려대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반면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감독이었으니. 다만 OB 시절에는 마지막 해의 갈등건만 아니라면 김성근 역시 OB 프런트와 친하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워낙에 구단주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서 최초로 종신감독 이야기까지 나왔던 인물이 김성근이었으니까. 물론 전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태평양 시기 이후에는 프런트와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러나 알려진 것 보다는 사이가 좋아보이기도 한다. 실례로 히어로즈 감독 말기에 시즌이 끝난 후 김성근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히어로즈와 SK와 연습경기를 가지려고 했으나 구단주 이장석의 주도로 감독에서 해임되어 이는 취소되었다. 이 때 "약속이 어긋나 (김성근) 형님에게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렸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봐서 야구관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명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듯. 아니면 화해를 했든가. 그리고 해임이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던 SK와의 3연전이었는데 이 때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면서 말하기를 한 3번은 더 짤려야 형님처럼 좋은 감독이 될까요라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고.

6. 기타

  • 야생마 이상훈김성근 감독과 함께 제일 존경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 저명한 야구기자였던 이종남 스포츠서울 이사가 그의 열혈 지지자였다. 덕분에 그는 'LG, 이광환, 자율야구'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고 그가 저술에 참여한 '한국야구사'에서 1996년 이광환의 경질 이후 천보성 감독의 부임에 대해 '찬탈'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했었다.[18]
  • 주간야구에 연재한 회고록을 보면 반골 혹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기질이 있어 보인다. 대구상고(현 상원고)에 입학한 이광환은 모 교사가 감독을 쫓아내고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반발해 동료들과 전임 감독을 모셔오려고 했으나, 선배의 회유에 넘어간 동료들의 배신을 목격하고는 그들과 같이 야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대구를 떠나 서울 중앙고로 전학했다.
  • 그 시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실업야구 팀으로 입단하는 게 성적 좋은 선수들의 일반적인 코스였는데, 이광환은 실업 팀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고집했다. 그가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후 점차 대학진학 선수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 고려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시위 현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또래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는데 공권력이 탄압하는 것을 보면서 불의하다고 느껴 참여해 투석전을 벌였다. 하지만 현역 야구 선수의 손에 들려진 돌맹이는 엄청나게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붙잡혔을 때에 몇몇 경찰이 알아보고 말았다. '이 친구 돌을 매우 잘 던지던데?'. 그날 경찰서에서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이후 신문에도 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이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 히어로즈 창단시에 감독을 맡은 게 현장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8개구단 존속을 위해 1년 봉사한다는 개념으로 취임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후배인 박노준 단장과의 인연으로 되었다는 것이 정설. 해당 팀 팬들에게는 아무것도 안하는 감독으로 기억되기도. 사실 박노준과 이광환 등이 생각했던 단장이 운영을 맡고, 감독은 관리를 하는 소위 말하는 단장 위주의 운영 스타일 기준이라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면 안 되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그런 점에서 이광환은 적격인 인선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때 영입된 인사들은 대부분 거물급으로 취급받았다.[19] 하지만 애초에 단장 위주 운영이 페이퍼 플랜으로 끝났고 결국 얼굴마담에 그치면서 놀고 먹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하나 건진 건 강정호의 포텐셜......
  • 그러나 유망주들에게 혹독하게 대하기도 하며 본인이 밝히길 터치를 많이해서 성장하는 선수와, 그렇지 않은 타입의 선수들을 구분해서 각각 맞춤식 조련을 시전한다고...
  • 글재주가 있는 듯. 가끔씩 올라오는 그의 야구 관련 에세이 들도 꽤나 읽을 만 하다. 그러나 공통되는 평가는 처음에는 뭔가 있어보이는데 중간까지 잘 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글 쓰는게 조루(...)
  • 야구계에서 잊혀진 인사들을 다시 불러주는 대인배로도 유명하다. 한화 이글스 감독 시기에는 선수협 문제로 찍혀서 사실상 야구판에서 추방된 최동원[20]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야인이 된 윤동균을 코치로 불렀다. 우리 히어로즈 감독 시기에 이순철을 데리고 있었던 것 역시 이광환 감독이어서 가능했다는 평도 있다.
  • 2013년 8월 30일에 간만에 "현장에만 정답이 있는 게 아니더라" 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나이 들어서 자꾸 욕심내면 안 돼요. 후배들이 할 일이 있고, 나이 먹은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꼭 현장에만 있어야 야구판을 위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라는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읽은 누리꾼들은 이 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으로 추측중. 1948년생인 이광환 감독과 비슷한 연배 혹은 선배 세대들은 대부분 은퇴 상태이고, 김성근은 야구관은 정반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사이가 나쁘진 않고, 더구나 이미 프로야구를 떠나서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감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외에 이광환이 나이 먹었다고 이야기 할만한 현역 프로감독은 이 분밖에 없어서...하지만 정작 김응룡은 금방 은퇴해서 야구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고, 독립야구단에 있던 김성근이 현역으로 복귀해서 2015,16년 초반 최악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 학원스포츠와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이다. 사사건건 반목하기 일쑤인 프로계 인사와 아마추어 야구계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 그 때문인지 학원 스포츠와 아마추어 야구계 내부의 이슈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곤 하는 몇 안되는 프로팀 감독출신 인사이다.
  •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동대문야구장 철거 계획을 발표하자, 야구계가 결사반대하고 나서는데, 이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서[22] 서울시와의 협상 끝에 "2009년까지 2만명 규모의 대체야구장과 기타 간이야구장 포함 7면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2만명 규모 대체야구장은 2009년까지 착공도 하지 못했고, 광진구 구의야구장은 관중석도 없는 간이야구장에 그치면서 공염불로 끝나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동대문야구장 대체용으로 시작한 2만석 규모의 아마추어 전용 구장은 넥센 히어로즈가 입주한 고척돔으로 끝나고[23], 아마추어 야구계는 목동야구장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 2016년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2016 기장여자야구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 김용수에게 있어서는 은인이다. 30대 중반의 김용수에게 고정 마무리 투수 보직을 주면서, 선수생활을 연장시켰고, 덕분에 국내 최다 세이브 기록(227 세이브)와 40대 까지의 선수생활,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게 된다. 이후에도 연수에서 돌아온 김용수를 이광환이 코치로 영입했으며, 중앙대 감독 직에서 사임하고 야인으로 있던 김용수를 이광환이 서울대 교양 교수로 영입하는데 힘을 써주었다.

7. 강팀의 방정식

이광환 감독의 지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팀의 방정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역대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89 OB 베어스 120 54 63 3 5위 -
1990 46 15 31 1 5위[24] -
통산 166 69 93 4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2 LG 트윈스 126 53 70 3 7위 -
1993 126 66 57 3 4위 -
1994 126 81 45 0 1위 우승
1995 126 74 48 4 2위 3위[25]
1996 82 35 42 5 7위[26] -
통산 586 309 262 15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2001 한화 이글스 133 61 68 4 4위 -
2002 133 59 69 5 7위 -
통산 266 120 137 9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2003LG 트윈스 133 60 71 2 6위 -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2008 우리 히어로즈 126 50 76 0 7위 -
총계 1277 608 639 30


[1] 기사에 따르면 정식 감독은 아니고 그냥 운영에 도움을 주는 고문단 정도의 위치이지만 2016년 기사를 보면 적어도 2016년 시점에서는 실질적으로 감독 역할을 하고 있다.[2] 다만 이 시기 카디널스가 강팀이었던 것은 사실인데,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일명 화이티볼이라는 특유의 스몰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 당시 메이저리그 기준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스타일이었는데, 이광환이 이후에 보여준 스타일은 메이저리그의 평균에 더 가까웠다는 것도 이색적.[3] 참고로 1992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순위이며 1위는 빙그레, 2위는 해태, 3위는 롯데, 4위는 삼성, 5위는 OB, 6위는 태평양, 7위는 LG, 8위는 쌍방울.[4] 참고로 1992년 4월 30일에 경기 종료 후 관중들이 LG 구단버스를 부수며 무능한 LG 이광환 감독은 물러가라라는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5] 당시 이상훈은 시즌 중반까지 20승이 거의 확실해보일 정도로 절대적인 페이스를 보이고 있었지만 4일등판이 시작된 이후 승수를 쌓는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다가 시즌 최종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기록했다.[6] 피지컬 트레이닝이라는 개념을 한국야구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 이광환이다.[7] 중앙에 5각형을 그려서 선발진을 두고, 그 5각형의 각 변마다 삼각형을 두는데 각각 마무리, 좌완 셋업, 우완 셋업, 좌완 롱릴리프, 우완 롱릴리프이다. 이렇게 하면 최종 모습이 5각형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스타 시스템이다.[8] 훗날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다가 2001시즌 도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비운의 인물. 김명성의 사망 이후 롯데는 8888577의 암흑기에 접어든다.[9] 말이 좋아 4승이지 실제로는 5경기 출장해 4승(1구원승) 1패를 거뒀다.[10] 다만 이 시기는 프런트와의 충돌로 사실상 팀 장악에 실패한 상황이었다.[11] OB 베어스의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거주했던 곳이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인데, 그 근처에 세웠다. 그 인연인지 제주에서도 야구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히어로즈 감독 시절에 제주 오라야구장에서 경기를 갖기도 했다. 오라구장이 히어로즈 보조 경기장이란 인식을 갖게된 이유. 그 때 언론에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어 인조잔디 교체 등 전반적인 시설 개선이 이루어졌다. 2013년 현재 오라구장은 2014 전국체전이 제주에서 열릴 예정이므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예정되고 있다.[12] 히어로즈 감독 시절 서귀포 강창학구장에서 전지훈련을 하였다.[13] 제주도는 프로야구단의 스프링캠프지로는 위도가 좀 높은 편이다. 제주도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이 일본 고치현인데, 이곳도 이상하게 고치현에 집착한다는 김성근 정도 제외하면 가지 않을 정도로 위도가 높다. 메인인 스프링캠프 외에 마무리 훈련지로 꼽히는 일본 지역도 미야자키 현이나 오키나와 정도로 위도가 내려간다. 아열대가 되어가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제주도 스프링캠프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마무리 캠프지로 활용될 가능성만 존재한다고 봐야할 것이다.[14] 하지만 이것은 알고보니 위법행위였다(...) 정확히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직접 시행하는 지도자자격증 1급 혹은 2급만이 지도자가 될수 있는데 KBO대한야구협회에서 이를 어기고 베이스볼 아카데미도 집어 넣은 것. 결국 2017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직접 공문을 보내 시정조치 하라고 했다. 기사 참조.[15] 그리고 정진구 실장을 포함한 상당수 코치진은 태평양에서 김성근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김성근이 태평양을 떠나는 계기중 하나가 된다.[16] 2003년 당시 포스트시즌 진출이 걸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17] LG트윈스 프런트가 이순철 감독을 해임한 직후인 2006년 6월 29일 올라온 박동희스포츠 2.0 칼럼에서는 어윤태 사장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도 박동희 특유의 부실한 팩트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칼럼으로, 추측에 불과하지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18] 이종남 기자는 인천 제물포고 출신으로 골수 인천야구 팬이었다. 관련 책이 나온 것은 순전히 이광환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다. 덤으로 이종남 기자는 감성에 호소하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글을 많이 쓴 사람이다.[19] 이광환 감독과 함께 취임했다가 같이 물러난 인물들만 보면 수석코치 이순철, 2군감독 강병철, 배터리코치 장채근, 그 외에 김정수, 장광호, 김종수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그 비용도 다른구단보다 적었다. 감독 이광환이 다른 팀 수석코치 수준인 계약금 1억에 연봉 1억의 총액 2억이었고, 역시 감독급 인사인 강병철이순철도 일반적으로 다른 팀 코치 수준 연봉을 받았다.[20] 19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선수협 창단을 준비하다가 KBO와 각 구단들의 방해공작으로 무산되고,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이른바 1차 선수협 사태이다.[21] 1998년 해설진으로 참여했던 박해종(前 OB 베어스) 위원의 밑천 드러나는 실력(...)과 스포츠서울 문상렬 기자의 미국 파견으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문상렬 기자의 후임으로 송재우 해설위원이, 박해종 해설위원의 후임으로 이광환 감독으로 바뀌어 1999년 중계진을 꾸렸다.[22] 야구계에서 고대 출신인 오세훈 시장을 고려해서 역시 고대 출신인 이광환을 내세웠다고 한다. 고대라면 허구연도 있는데...[23] 고척 스카이돔은 시기가 맞물려서 그렇게 보였을 뿐 애초에 동대문야구장의 대체와는 거리가 먼 전혀 별개의 사업이었다.[24] 사퇴 당시[25]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게 패배하여 최종 3위[26] 경질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