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0 22:02:50

송지만

송지만의 현역 시절 모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2561914554F8CCFD10.png 파일:17-00_1-abi59.jpg 파일:/image/076/2011/09/09/2011090901000770500063091.jpg
전성기이자 친정팀이였던 한화 시절 현대로 이적한 후의 모습 이제는 볼 수 없는 현역시절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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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코치 시절
이름 송지만(宋志晩)
생년월일 1973년 4월 4일[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2]
출신학교 서흥초 - 동산중 - 동산고 - 인하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2차 3라운드 (전체 20번, 한화)
소속팀 한화 이글스 (1996~2003)
현대 유니콘스 (2004~2007)
넥센 히어로즈 (2008~2014)
지도자 화성 히어로즈 타격코치 (2015~2016)
화성 히어로즈 수비코치 (2017)
넥센 히어로즈 1군 수비·주루코치 (2018)
등장곡 패션 70's - Main title
응원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3]
원곡 정보 추가바람링크
종교 개신교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9 2004
2000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병규(LG 트윈스)
정수근(두산 베어스)
펠릭스 호세(롯데 자이언츠)
송지만(한화 이글스)
박재홍(현대 유니콘스)
이병규(LG 트윈스)
심재학(두산 베어스)
이병규(LG 트윈스)
정수근(두산 베어스)
2002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심재학(두산 베어스)
이병규(LG 트윈스)
정수근(두산 베어스)
송지만(한화 이글스)
심정수(현대 유니콘스)
이종범(KIA 타이거즈)
심정수(현대 유니콘스)
양준혁(삼성 라이온스)
이종범(KIA 타이거즈)
2000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장타율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송지만(한화 이글스) 펠릭스 호세(롯데 자이언츠)
2000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송지만(한화 이글스) 타이론 우즈(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등번호 16번
전대영(1986~1994) 송지만(1996~2003) 문동환(2004~2009)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17번
톰 퀸란(2000-2001) 송지만(2004~2006) 강정호(2007)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5번
강정호(2006) 송지만(2007) 팀 해체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25번
팀 창단 송지만(2008~2014) 브래드 스나이더(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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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 현재
2008~2009 2010 2011 2012 2013~2015
송지만 이숭용 강병식 강병식
이택근(교체)
이택근
2016~2017 2018 2019~
서건창 서건창
김민성(교체)
김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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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2.1.1. 트레이드
2.1.1.1. 트레이드 이후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2.3. 넥센 히어로즈 시절
2.3.1. 2013 시즌2.3.2. 2014 시즌
3. 기록들4. 지도자 경력5. 트리비아6. 연도별 성적

1. 개요

KBO 리그 한화 이글스,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외야수. 現 넥센 히어로즈의 코치.

가장 저평가 받는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중 한명이자[4] 한국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92학번 최후의 1인으로, 2014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선수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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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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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은 이승엽.

동산고등학교인하대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한화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1억 2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송지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한화 구단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금액을 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렇다 할 국가대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계약금을 많이 준 편이기는 하다.

1996년에 입단한 뒤 당시 강병철 감독의 눈에 들어 같이 데뷔한 입단 동기 이영우, 홍원기, 임수민임과장과 함께 1년차부터 맹활약하며 신인 4인방이라 불린다. 드래프트 순위는 당시 국가대표 주전 내야수였던 홍원기가 더 높았으나 4명 중 가장 좋은 성적을 찍은 것은 송지만이었다. 한 때 홈런 3위안에 들기도 했다. 물론 이영우, 임수민, 홍원기 역시 꽤 오랜 시간 선수 생활을 하며 괜찮은 성적을 냈다.

이후 그럭저럭 인정받을 정도의 성적을 내다가 1999년에 처음으로 3할, 20-20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 이글스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2000년에 33개의 홈런을 치며 처음으로 30홈런을 넘겼고, 여기에 20도루를 기록해 2년 연속 20-20을 달성하며[5] 데뷔 첫 골든글러브도 수상하며 한화 팬들로부터 장종훈의 후계자가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6] 올스타전 MVP 수상은 덤. 그 해 막판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출전을 위해 연습경기에 나섰다가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접는다.[7]

지금이야 워낙 국대 경기가 많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당시에는 프로 선수가 올림픽 대표로 출장하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리그 최고의 타자가 올림픽에 제대로 나가 보지도 못하고 부상으로 중도 하차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선수 본인이나 팬들에게나 참으로 속상한 일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부상으로 인해 20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좋았던 주루능력이 많아도 10개 정도밖에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부상을 입었던 박재홍의 대타로 나가게 되었다.

2002년에는 38홈런과 104타점을 기록하며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해를 장식하여 한화의 중심이 여전히 자신임을 과시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내내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나 2003년 손목 부상으로 인한 부진으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2003년 당시 9홈런을 치면서 2011년 다시 9홈런으로 두 자리수 홈런 달성에 실패할 때까지 자신의 프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두 자리수 홈런을 치지 못한다. 아홉수 어쨌든 한화 이글스에서 송지만은 황금 독수리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2.1.1. 트레이드

2003년 시즌 종료 후, 투수 권준헌과 1:1 맞트레이드되며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다.

물론 한화 팬들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는 대한민국 야구 암흑기 야구 팬덤이 발달하지 못한 때라 대체적으로 별다른 반향없이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어쨌든 너무 갑작스러운 트레이드 소식에 팬들 사이에서는 송지만과 한화 구단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제로 구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2000 시즌이 끝나고 KBO에 연봉조정 신청까지 하는 등, 구단과의 감정의 골은 있었던 상황. 연봉조정 판결에서 구단이 승리하면서 더더욱 그랬다. 공교롭게도 이듬해인 2001년에 부상과 연봉조정 신청으로 인한 훈련 부족으로 성적이 다소 추락하면서 연봉도 동결되는 등, 성적에 비해 연봉은 저평가받는 선수로 여겨졌다. 이외에 이전 해에 당한 부상 때문에 송지만이 예전 기량이 찾기 힘들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박동희의 칼럼에서 유승안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직접 본인이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독과의 불화 근데 은퇴식에서 송지만의 은사 중 한명으로 유승안이 등장했다 이에 한화 구단은 불안한 불펜진도 보강할 겸 송지만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게 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LG 트윈스에 가고 싶다고 하였고, 실제로 LG가 손지환과 투수 한 명을[8] 내주는 조건으로 트레이드 카드를 맞추었으나 중간에 삼성 라이온즈까지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삼성에서 내놓은 카드가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노장진이었다.[9] 이 당시 삼성은 마침 이승엽의 일본 진출, 마해영, 브리또의 이적 등으로 인해 약해진 타선을 보강할 겸, FA를 앞둔 송지만에게 미리 다년 계약을 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화도 노장진을 데려와 약점이던 불펜을 보강하고, 트레이드가 성사되는가 싶었으나,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이 노장진을 다시 마무리로 쓰기로 해서[10] 막판에 틀어졌고, 삼성과 트레이드 딜이 파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현대 유니콘스권준헌 카드를 내밀며 접근, 결국 딜이 성사되었다.

어쨌든 양 팀 감독인 김재박유승안이 주도해서 이뤄진 트레이드였고, 한화나 현대 양측 모두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 한화 측 입장
  • 전 해인 2003년에 김태균이 31홈런을 치며 대폭발. 나이 젊고 스타성 있는 김태균 위주로 팀을 재구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게다가 송지만은 한화의 연고지인 충청권 출신이 아니었던 데 반해 김태균충청권에서도 성골인 천안북일고 천안시 출신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 송지만의 빈 자리는 2003년 대한민국을 잠시 떠나 있었던 제이 데이비스로 채울 계획이었다. 게다가 당시 백업 외야수로 임재철, 김수연과 같은 발빠르고 수비되는 선수가 존재했으니 송지만의 빈자리는 크지 않다고 봤던 것.
  • 게다가 송지만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도 있었다. 당시는 극악한 타고투저 시대로 이런 괴물이나 저런 괴물이 50홈런을 빵빵 치던 시절이었고, 30홈런은 기본으로 넘겨야 나름대로 홈런 타자라고 명함 내밀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
  • 당시 송지만은 FA 자격 취득을 앞두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한화 이글스는 이미 2002년에 송진우의 FA로 18억. 일본에서 복귀한 정민철에게 1년 연봉 4억을 안긴 상태였다. 게다가 입단 동기인 이영우 또한 송지만과 같은 해에 FA를 앞두고 있었으니...[11]
  • 588689 시절과 마찬가지로, 당시도 한화는 불펜이 처참한 상태였다. 팀내 마무리는 15세이브의 37살 외국인 레닌 피코타로 시즌 내내 팬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더니 기어이 9월달에 웨이버공시. 이후 마무리는 38살의 송진우가 투잡을 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 권준헌은 이름값에서 밀릴 뿐 당시 최고의 구원 투수 중 한명이었다. 비록 2년 전 혜성처럼 나타난 조용준에 밀려 팀 내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셋업맨으로 흐믓한 활약을 해주었고 다른 팀에서는 충분히 마무리 투수로 뛸 수 있을거라는 평가. 게다가 권준헌은 '핫코너'인 3루수 출신으로 뒤늦게 투수로 전향했기 때문에 어깨도 비교적 싱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12][13]
결론적으로 당시 한화 이글스는 아주 끝내주는 타선과 베테랑 선발진,[14] 그리고 시궁창 불펜진(…)을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마무리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송지만을 보내는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무브였다. 또한 어차피 같은 해 FA를 맞이하는 이영우와 송지만 둘 다 잡기 힘들다면, 이왕이면 좌타자인 이영우가 낫다는 심산이었다. 거기에 우타로는 떠오르는 태양 김태균이 있으니까...
  • 현대 측 입장
  • 일단 현대는 연고지 문제, 모기업 재정난으로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15][16] 이로 인해 주축 선수들 대부분의 FA 재계약이 쉽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미 2002년 겨울에 박경완을 떠나보내야 했던데다가[17] 이 해 겨울에는 박종호도 놓쳤다. 이런 상황에 4번 타자였던 심정수가 이듬해인 2004년 말에 FA로 풀릴 예정이었다. 누가 봐도 연봉대폭발이 예상되는 심정수를 현대 유니콘스가 잡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향후 심정수보다는 싼 가격으로 중심타선을 맡아 줄 보험이 필요했다.
  • 트레이드 직후인 2004 시즌만 놓고 보면 심정수 - 클리프 브룸바 - ? 으로 중심타선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18] 게다가 중심타선 중 브룸바는 2003년 시즌 중반에 영입된 타자로, 2004년에도 좋은 활약을 보여줄 지 미지수인 상태였다.
  • 투수 쪽에선 해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긴 했지만 전통의 투수왕국다운 면모가 남아 있었다. 당시 한국의 레오 마조니라 불리던 김시진 투수코치는 매해 젊은 투수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불펜만 놓고 보면 마무리 조용준이 든든한 가운데 신철인, 오재영, 송신영, 이상열, 전준호(투수) 등 젊은 투수들이 쏠쏠하게 불펜진과 선발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2004년 이 젊은 투수들이 대폭발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정ㅋ벅ㅋ한다.

결국 위와 같은 이유로 양 구단 측은 윈윈 트레이드가 될 것으로 판단, 트레이드를 단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팬들의 반응은
  • 현대 팬들: 대체로 송지만의 영입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03년 시즌 부상으로 실력이 옛날같지 않을거 같다'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나뉘기도 했었다. 당시 외야수 자리는 많았지만, 2루수 공백이 컸다는 점에서 왜 외야수 거포 선수를 영입했는지에 대해 의아했던 이들도 있었다. 당시 현대에는 2루수 박종호가 FA를 선언하여 삼성에 이적하는 바람에 당시 빈공백이 큰 자리는 2루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외야수보다는 2루수 영입을 바랬던이들이 꽤나 있었다.[19] 하지만, 어쨌든간에 호타준족형 선수를 영입했다는것에 대해 당시 팬들은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 한화 팬들: 부정적인 입장이 주류였긴 한데, 구단 게시판을 도배하거나 집단적으로 트레이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의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다. 골수팬들 역시 불펜의 보강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그게 왜 하필이면 권준헌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트레이드 당시 권준헌의 나이가 만 33살로 이미 노장이었기 때문. 따라서 어차피 트레이드할 거라면 나이 많은 권준헌보다 신철인 혹은 송신영같은[20] 젊은 투수를 받았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2.1.1.1. 트레이드 이후
송지만은 어느새 KBO의 레전드 반열에 올랐고, 약간 노쇠의 기미는 보여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권준헌은.. 1년 뛰고 1년 드러눕고를 반복하다 2008년에 은퇴했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한화에서 권준헌을 기대치대로 잘 써먹었긴 했다. 문제는 제대로 써먹은 게 달랑 2년 반이라는 점. 일단 이적 첫해인 2004년에는 42⅔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2.11, 17세이브로 기대치를 해 줬다. 그런데 이듬해인 2005년에는 부상으로 단 1경기도 못 나왔고, 2006년에는 평균자책점 5점대의 아쉬워서 쓰는 불펜 투수, 2007년에는 평균자책점 1.98을 찍으며 부활하나 싶더니, 너무 무리해서 복귀한 탓에 부상이 도져 2008년 시즌이 끝난 이후 그대로 방출. 그리고 송지만 대신 남긴 이영우는... 자세한 상황은 이영우 항목 참조.

반면 송지만은 트레이드 첫해인 2004년에 타율은 낮긴 하지만 홈런 22개를 쳤고, 그 후에도 장타력이 전성기보다 줄긴 했지만 매년 2할 중후반대 타율과 두자릿수의 홈런을 치고 있다.

만약 송지만이 한화 이글스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2010년의 똥망한 타선을 최진행, 김태완과 이끌었을지도.

참고로 2010년 시즌 성적을 살펴보면,
  • 최진행을 제외한 나머지 한화 외야수 성적: 타율.237 출루율.307 장타율.313 홈런 12 타점 95
  • 송지만 성적: 타율.291 출루율.367 장타율.472 홈런 17 타점 63

타점을 제외하면 송지만의 압승. 덧붙여서 한화 이글스의 성적은 13명의 기록을 합산한 것이다.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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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만은 2004년, 재기에 성공했다. 2003년 9개쳤던 홈런을 단숨에 13개를 더해 홈런 22개를 만들었다. 선구안은 다소 떨어졌지만, 트레이드 첫해 풀 타임으로 .265 홈런 22개 74타점으로 쏠쏠한 활약을 하면서 외야수 선발, 백업 구분없이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많이 받으며 맹활약했다. 중심 타선에 서기도 했지만, 의외로 출루율이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1번 타자로 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히어로즈로 바뀌고서도 종종 있다.[21] 현대가 2004년 9차전 접전 끝에 삼성을 누르고 우승하면서 송지만은 생애 2번째 우승반지를 끼게 되는 경험도 누렸다.

심정수박진만이 이적한 후에는 팀 타선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팀은 이런 전력 공백을 완전히 메우지 못하고, 2005년 7위와 2006년 3위, 2007년 6위 식으로 널뛰기를 반복했지만 송지만은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다. 다만, 전성기의 30홈런을 기대하던 팬들에게는 약간 아쉬웠을 수도 있긴 했다. 그리고 득점권 타율이 다소 좋지 않았고 후술하는 연봉 외 다른 이유들이 겹쳐 현대 팬들에게 의외로 욕을 좀 먹었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수준의 타자로 활약했고, 2006년 WBC를 통해 생애 첫 국가대표도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구단에 송지만이 섭섭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2005년 시즌 후 FA 대상자였는데 하필 현대 유니콘스가 모기업의 사정으로 인해 재정악화가 되면서, FA 신청을 한 후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3년 18억원이라는 평범한 계약을 제시받았다. 당시 현대 구단이 시장에 나와 다른 팀에 가려고 마음 먹었지만, 삼성과 LG는 무관심, 롯데는 현대보다 못한 제안으로 송지만을 실망시켰다.[22] 저평가된 레전드의 비애일까? 결국 현대와 재계약했지만, 넉넉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23]

그리고 이런 돈과 관련한 불운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망하면서 FA 계약도 무효가 되었고, 새로운 팀의 주인이 된 센티니얼은 선수들의 연봉을 삭감하면서 시작했다. 결국 송지만은 연봉이 대폭 깎이면서[24] 2008 시즌을 맞았고, 2010년 시즌이 끝난 후에도 또 다시 연봉이 대폭 삭감되는 수모를 경험해야 했다. 그만큼 큰 돈을 버는 것과는 참 인연이 없는 선수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1군 14경기에 그쳐 2억 5,000만 원에서 8,000만 원으로 무려 68% 삭감되었다.[25]

2.3. 넥센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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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삭감같은 수모는 둘째치고, 온갖 선수와 관련해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히어로즈 프랜차이즈 선수 중에서 장타를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2012년 넥센의 이른바 LPG 타선이라는 화끈한 중심 타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팀에서 장타를 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선수였다. 연봉도 2009년의 활약으로 다시 오르기도 했지만, 좀만 부진하면 바로 깎으니[26] 이건 어떤 팬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던 웬수같은 애증의 사장님을 까자. 여하간 히어로즈의 타선을 항상 지킨 타자이자, 이택근이 잠시 LG 트윈스로 이적한 후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클럽하우스 리더 역할도 맡았다.

2008년에는 13홈런과 62타점으로 팀내 홈런 공동 1위, 2009년에는 22홈런을 때리는 노익장을 발휘하면서 팀의 강타선의 한 몫이 되었고, 2010년 역시 17홈런과 63타점으로 팀내 홈런 1위/타점 2위를 기록했다. 7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세워갔다.

2011년은 팀 사정이 그야말로 막장이었던 해이자, 본인도 다소 부진했지만 9개의 홈런을 치면서 꾸준한 활약은 이어갔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활약은 2011년 5월 15일 LG전, 상대 선발 투수 벤자민 주키치에게 노히트 노런을 허용할 뻔한 상황에서 8회말 안타로 노히트를 깼다! 또, 2011년 6월 2일 사직 롯데전, 9회초 2아웃 마무리로 등판한 강영식에게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으나 쓰리볼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며 끝내 역전 2점 홈런을 날렸다.

꾸준한 활약으로 인해 많은 KBO의 기록 고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넥센의 젊은 타자들이 영 성장세가 좋지 않은 관계로 꾸준히 지명타자로서는 경쟁력을 보여줄 기세. 다만 주전 외야수는 유한준의 성장과 이택근의 복귀로 인해 쉽지는 않을 듯 하다. 그리고 나이 때문인지 확실히 예전보다 손목 등의 부상이 빨리 회복되지는 않는 모습.

2012 시즌에는 시범 경기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면서 팬들에게 기대를 안겨줬다. 그런데 개막 후 2번째 경기에서 이혜천의 투구에 발등을 맞아 타박상을 입어 엔트리에서 빠지더니, 휴식을 마치고 복귀를 위해 경기 감각을 조절하던 2군 경기에서 주루 도중 발목 골절을 당하면서 전반기 아웃이 되었다. 넥센 팬들은 혜르노빌 찾으면 죽여버린다고 한다 카더라 그리고 이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 커리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지못미. 다행히 재계약 대상자에 올랐고, 자신도 현역 의지를 보여 재계약했다.[27]

92학번 동기인 박찬호박재홍이 201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자 황금의 92학번 세대 중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2.3.1. 2013 시즌

개막 엔트리에는 들어갔으나 바로 2군에서 잠시 머물렀다. 2군에서 홈런을 친 다음 날 1군으로 콜업되었다. 유한준의 거듭된 부진을 그가 보완해 주어야 했다. 교체된 선수는 박헌도.

4월 14일 시즌 첫 경기에서 오승환의 공을 밀어 넘겨 시즌 첫 안타를 첫 홈런으로 장식하였다.

4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교체 후 두번째 타석에서 2타점 적시타를 쳐 팀의 승리에 쐐기를 꽂으며 자신의 클래스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젊은 선수를 중시하는 염경엽 감독의 기용방침 때문에 1군에 거의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유한준, 장기영이 부진할 때는 송지만을 좀 써야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있었으나 문우람을 발굴한 이후로는 그마저도 무산되었다. 하지만 3년 뒤 문우람은...

9월 5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7회 말 장기영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1점을 내주는 바람에 11회 연장까지 이어진 상황. 11회 초 선두타자로 나와 기습번트를 치고 이 악물고 뛰는 주루플레이로 출루에 성공한다. 곧바로 유재신으로 교체되고 김민성의 적시타로 팀은 승리했다.

포스트시즌 경험이 있는 선수가 적고[28] 젊은 선수가 많은 넥센의 특성상 그의 경험이 필요했기에 2013년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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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10월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스코어 3:3이던 14회말 무사 1, 3루에서 이원석의 우전안타 타구를 잡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홈으로 송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29] 포구를 포기하고 퇴근본능을 발동한 17년 후배 박동원과는 매우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박동원은 송지만의 전력 수비에 비교되는 어이없는 꼬락서니를 보여 줌으로써 장기영총검술과 함께 세트로 묶여 당연히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팀이 처음으로 올라간 포스트 시즌에서, 그것도 대선배는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후배란 놈이 경기를 포기해버렸으니 선수고 팬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30] 더욱이 이 패배 이후로 넥센 히어로즈는 4, 5차전을 연달아 내주고 두산 베어스에게 리버스 스윕을 당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대가를 팀 전체가 톡톡히 치르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송지만은 201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 2, 4차전은 결장하고 3차전은 대수비, 5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2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3.2. 2014 시즌

2014년 시즌에도 현역 타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송지만은 최동수, 박경완이 은퇴함에 따라 한국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타자가 되었다. 2013년 시즌 들어 은퇴 또는 플레잉 코치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장석 사장과 염경엽 감독의 설득으로 현역 활동을 연장하기로 결정한 것. 송지만 본인은 이 1년이란 시간을 베테랑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지도자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삼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물론 FA 자격이 다시 들어왔지만 포기했다. 연봉 8,000만원에서 2,000만원 오른 1억원에 2014시즌 재계약을 마치면서 본인도 계약서도 보지 않고 싸인하는 배려의 모습을 보였고, 구단 프런트에서도 노장에 대한 예우를 다 하면서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

2014 시즌 개막일인 3월 29일 이성열, 비니 로티노, 문우람, 이택근, 유한준 등에 밀려 1군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6월 1일 까지 퓨처스리그에서 62타수 14안타 3홈런으로 그럭저럭 활약하고 있었으나 이번 시즌 은퇴한다고 밝혔다.

화성 히어로즈의 경기를 직관한 팬의 말에 의하면, 부상으로 2군 경기도 쉬고 있다고 한다. 주로 2군 후배들에게 타격 코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주고 있는듯. 팬들은 시즌 후반 엔트리 확장 때 1군에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결국 2014년 10월 7일, 명예롭게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동영상. 은퇴 후 화성 히어로즈(넥센 2군)에서 타격코치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송지만의 은퇴로 대한민국 야구의 황금 세대였던 "92학번" 선수들이 모두 현역 무대에서 퇴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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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진은 이쪽

은퇴식은 15년 10월 1일, 넥센 한화전에서 하게되었다. 오전중에 날씨가 좋지않아 팬들의 마음을 아쉽게 할뻔 했지만 다행이 비가 오지않아 게임이 진행되어 은퇴식도 진행되었다.

그의 최고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팀과 자신의 은퇴까지 몸담은 팀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식을 하였다. 이날 온 그가 모신 감독들만 해도 강병철, 유승안, 주성노,[31] 이광환, 김시진, 이희수, 김학용, 염경엽 감독[32] 등 송지만의 은사들이 모두 모인 셈. 예외로 김재박 전 감독은 경기감독관으로 이날 광주에 내려가 오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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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통산 300홈런 친 선수의 은퇴식이라니 ㅠㅠ

프런트의 농간으로 팬들의 축하 대신에 훌리건들만의 축하를 받게 된 것은 아쉬운 점. 자세한 건 넥센 히어로즈 특정 팬덤 지원 논란 참조. 이와중에 후배라는 놈은 또 눈치없게 극장 열려다 집사님 은퇴식 말아먹을 뻔 했다

3. 기록들

꾸준함을 대표했던 KBO의 5툴플레이어.

언제나 일정 이상의 성적을 내주는 꾸준함이 송지만의 장점이다. 홈런왕을 차지하거나 40홈런 이상을 넘긴 적은 없지만 20홈런 이상을 7번이나 기록했고 부상으로 74경기밖에 출장 못 했던 2003년을 제외하면 2010년까지 데뷔 이후 매 시즌 두 자리 수 홈런을 기록했다.[33] 덕분에 누구에게나 회자될법한 시즌이 없음에도 통산 기록은 이미 레전드급. 도루를 빼면 그 박재홍보다 더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총루타, 안타수, 홈런수, 피삼진수(…).

2010년 5월 19일 역대 5번째로 통산 1,700안타를 기록했다. 그보다 더 많은 안타를 친 선수는 양준혁, 전준호, 장성호, 장종훈뿐이다.

그리고 2010년 8월 20일, 8회초에 팀이 스코어 3:4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역전 2점 홈런으로 통산 3,000루타를 달성했다. 이는 장종훈, 양준혁에 이은 3번째 기록이며, 현역 선수 중 뒤이어 이 기록을 달성한 사람은 장성호, 이승엽[34] 뿐이다. 박재홍은 5번째로 3,000루타를 달성했고, 이 기록을 그대로 간직한 채 2012년 시즌 후 SK에서 방출당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나마 현역 중에서 앞으로 이 기록이 달성가능해 보이는 선수는 2,938루타의 이병규 정도이며[35] 그 외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 이종범은 2,777루타로 2012년 은퇴했으며, 박경완 또한 2,723루타를 기록하고 2013년 은퇴했다. 그 외 젊은 선수들에게는 아주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

2010년 9월 24일, 잠실 두산전에서 시즌 종료를 두 경기 남기고 드디어 대망의 300홈런이 터졌다. 통산 6번째 기록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스포츠 뉴스 등에서는 대단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팀이 패하는 바람에 대서특필되지 못했다. 안습. 본인도 아쉽다고 했다.역시 기레기들

사실 송지만의 대단한 점은 콩라인은커녕 콩의 콩의 콩라인임에도 불구하고 300홈런의 대업적을 달성했다는 점. 한 시즌 홈런 2위는커녕 홈런 5위 안에 들었던 게 단 2번뿐이다.

늘 20홈런을 기본으로 치는 타자였음에도 순위가 높지 않았던 이유는, 크보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기간 동안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 즉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 그런데 그 당시 송지만보다 홈런 순위가 높았던 타자들을 살펴보면 이승엽,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재홍, 박경완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레전드 of 레전드를 제외하면 한두해 갑작스레 홈런이 증가했다가 사그러 들었다거나, 외국인 타자였다는 점. 결국 성실하고 꾸준한 송지만이 승자로 남았다.

2011년 7월 21일 목동 LG전에서 상대 선발투수 벤자민 주키치를 상대로 자신의 통산 1,800번째 안타를 때려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통산 4번째 기록이다. 장종훈은 넘어섰고 위로는 양준혁, 전준호, 장성호뿐.

2011년 7월 31일 광주 KIA전 1회초에서 상대 선발투수 양현종의 공을 받아쳐 3점 홈런을 터뜨리면서 역대 7번째로 통산 1,000타점에 등극했다. 300홈런-1,000타점 고지에 올랐다. 역대 1,000타점을 넘긴 타자는 양준혁, 이승엽, 장종훈, 박재홍, 심정수, 마해영뿐이며, 송지만 뒤에는 994타점의 박경완, 986타점의 김동주, 911타점의 장성호뿐이었다. 그 외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 9월 6일 SK전에서는 통산 1,000득점을 달성하였다.

은퇴 선언을 한 시점에서 송지만이 달성한 기록은 6,620타수(4위), 1,870안타(5위), 327 2루타(8위), 311홈런(6위),[36] 3,186루타(3위), 1,019득점(8위), 1,030타점(6위) 143병살타(12위), 1,444피삼진(2위) 누적스탯이 엄청나다.

그야말로 무관의 제왕.

4. 지도자 경력

2015년부터 화성 히어로즈의 타격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2016년 6월 24일 1군 타격코치인 심재학이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하게 되자 임시로 1군 타격코치를 맡았으며, 심재학이 돌아온 후 다시 화성 코치로 내려갔다.

2017년부터는 화성 히어로즈의 외야 수비코치 겸 주루코치로 보직이 변경된다.

2018년부터 1군 외야수비 및 1루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8 시즌 후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5. 트리비아

  • 한때는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중장거리 타자로 2년 연속 20-20을 기록하기도 했다.[37] 그러나 앞서 서술했던 시드니 올림픽 연습경기에서의 발목 부상 후유증으로 2001년부터 주루 능력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2012시즌 들어 후배들과 당당히 경쟁하기 위해 주루훈련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부상 때문에...
  • 어깨도 크보에서는 강견으로 손꼽히는데, 이 역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크보의 대표 강견이었던 심정수, 심재학, 심성보 즉 '3심'에 비해 저평가 되는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하지만 전성기를 지난 이후에도 그의 강한 어깨는 상대팀의 주자들이 1루나 2루에 있을 때 다음 베이스로 태그업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묶어뒀다. 1999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공필성을 잡은 홈 송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2013 시즌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보여준 혼이 실린 송구는 아직도 송지만의 어깨는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단지 참치의 퇴근본능 때문에(...)
  • 현대 시절에는 초구 타격을 좋아하고 득점권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현대 팬들 사이에서 '스텔스기'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통산 득점권 타율은 0.275로 평균인 0.282와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초구 통산 타율이 무려 0.380에 초구 홈런만 70개이다.
  • 2000년에 특이한 타격자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른바 기마자세라 불리는 폼으로 MLB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레전드 제프 배그웰과 유사한 타격폼. 이 타격폼으로 송지만은 처음으로 30홈런을 넘어선다. (32홈런) 덕분에 당시 야구소년들이 박정태의 폼과 더불어 가끔씩 송지만의 폼을 흉내내곤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 자세만을 고집하지 않고, 꾸준히 타격폼을 교정해가며 선수생활 내내 변화를 시도하는 자세를 보여 줬다.
  •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져 있어 '송집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근데 이젠 나이가 있어서 송장로님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팔에 익투스 문신, 몸에 예수 문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2010년 7월 20일, SK 와이번스 구원투수 정대현의 순결한(…) 2010시즌 평균자책점 제로를 깨뜨리는 적시타를 치면서 별명 '교회오빠'[38]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팬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인 시절 선배들에게 도날드 덕 혹은 오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구강구조가 약간 튀어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
  • 한화 이글스 소속으로 뛰던 1999년 4월 21일 청주구장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홈런을 치고도 홈을 밟지 않아 홈런을 날려버린 일도 있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홈런 누의 공과... 이외 사례로는 2003년 LG의 이지 알칸트라가 한 차례 기록한 게 전부이다. 게다가 같은 해 프로야구 10,000호 홈런을 롯데의 펠릭스 호세 선수가 기록하는데, 송지만의 누의 공과가 없었다면 10,000호 홈런의 주인은 양준혁이 차지할 수 있었기에 나중에 송지만이 양준혁 선배에게 제일 미안하다는 인터뷰를 했다. 여담으로 다들 홈런이구나...하면서 딴 데 신경쓰는 사이에 유일하게 송지만이 홈플레이트를 안 밟은 걸 캐치해낸 사람이 바로 상대팀 前 쌍방울 감독인 김성근이었다.
  • 송진우의 2,000 탈삼진 희생양이기도 했다.허용타자
  • 1999년 한화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우승멤버 중 가장 늦게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두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LG의 이상열.[39] 인상깊은 장면은 상기됐듯 5차전 때의 홈송구. 주자가 3루로 돌아가려다 되레 견제사당했다.
  • 파일:attachment/송지만/2013110701000725900041571_59_20131107113402.jpg
    몸매를 보면 알겠지만, 자타 공인 크보의 헬스덕후. 이걸 불암콩콩이 써먹기도 했다. 송지만은 자신의 몸매를 평소에 보여 줄 기회가 없어서 은근 아쉬웠다 카더라 그와중에 종범신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불암갑 은퇴 직전까지 당당하게 주전경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꾸준한 체력 관리는 후배들에게 모범이 됐다. 실제로 체력 검사 결과 20대 체력으로 나온다고 한다. 흠좀무. 이래서 붙은 별명이 한국형 테임즈(...) 은퇴를 하고 나서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 KBS N 스포츠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본인의 차를 몰고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임해 왔다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자기관리가 꽤 철저한 선수였다.
  • 2004년 쯤, 브로커로부터 약물 권유 전화를 받은적이 있다고 인터뷰를 했었다. 애초에 KBO약물 문제는 쉬쉬하고 덮는 분위기라 별 반향없이 묻혔지만 분명히 있었던 사실. 많은 이들이 약물을 써서 손쉽게 스타가 되던 시절에[40] 소신있게 거부의사를 밝히고 폭로까지 했던 스포츠맨십은 존경받을 만 하다. 과연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이 송지만 한 명이었을까.
  • 이도형과 나눈 인터뷰가 올라왔다. 상당히 길지만 내용이 좋으니 송지만 선수의 팬이라면 읽어보자.
  • 인성이 훌륭한 선수로도 유명하다. 동영상
  • 2006년 제1회 WBC 대표팀에 같이 뽑혔던 박찬호와 같은 92학번 동기이나, 친분이 없어 서로 존칭을 쓰다 주장 이종범에게 지적을 받았다.기사 이종범이 무릎팍도사에 출연 당시에도 이 일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한화 122 394 .287 113 30
(3위)
4 18 53 58 10 52 .520
(5위)
.368
1997 117 414 .266 110 26 1 14 45 46 12 42 .435 .332
1998 126 432 .269 116 20 0 16 49 66 25 64 .426 .361
1999 132 476 .311 148 24 11
(1위)
22 74 76 20 32 .546 .362
2000 120 468 .338
(4위)
158
(4위)
33
(2위)
2 32 90 93 20 59 .622
(1위)
.409
2001 108 344 .285 98 19 0 22 69 55 5 40 .532 .357
2002 131 488 .291 142 18 2 38
(4위)
104
(5위)
84 8 67 .570
(5위)
.375
2003 74 273 .253 69 16 3 9 34 41 8 42 .432 .3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현대 132 486 .265 129 21 0 22 74 80 6 72 .444 .360
2005 123 436 .271 118 22 0 24
(4위)
74 70 3 67 .486 .366
2006 119 441 .270 119 16 0 16 53 76
(3위)
8 56 .415 .351
2007 120 413 .281 116 25 0 15 64 54 10 50 .450 .35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우리 118 414 .280 116 18 0 13 62 48 4 33 .418 .330
2009 서울 115 374 .289 108 15 3 22 67 69 10 60 .521 .384
2010 넥센 127 375 .289 109 15 1 17 63 52 5 49 .472 .367
2011 106 301 .266 80 8 1 9 43 43 9 41 .389 .351
2012 14 40 .175 7 0 0 0 4 2 2 5 .175 .261
2013 34 51 .275 14 1 0 2 8 6 0 5 .412 .339
2014 1군 기록 없음
통산(19시즌) 1938 6620 .282 1870
(6위)
329
(9위)
28 311
(6위)
1030
(8위)
1019
(7위)
165 836 .481 .361


[1] 음력 3월 2일.[2] 전주시 태생일 뿐 초등학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두 인천에서 보냈다.[3] 히어로즈 송지만 오오오오오~ x4[4] 장타율왕 1차례, 20-20 클럽 2차례, 외야수 골든글러브 2차례, 통산 300홈런과 1,800안타 이상 기록했는데도 워낙 타고투저 시절 활동해서 그런지 저평가된 부분이 많다.[5] 다만 타점 쪽에서는 95타점에 그치며 아쉽게도 강타자의 보증수표인 3할-30홈런-100타점 달성에는 실패했다.[6] 김태균이 등장하기 전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송지만을 장종훈의 후계자로 여겼다.[7] 그 대신 출전한 SK의 이승호가 병역 혜택을 입었다.[8] 장문석이었다는 말이 있다.[9] 노장진은 원래 한화 출신이다.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면 다시 친정팀 한화로 돌아가는 셈.[10] 하지만 막상 2004년 삼성의 마무리는 임창용이 맡았고, 노장진은 선발 전향을 하였으나 그해 초 고지행과 무단이탈 파문을 일으켜 롯데로 트레이드되었다.[11] 하지만 이영우는 FA 직전이었던 2004년 막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33세의 나이에 공익근무로 군 복무를 하는 바람에 제대 후 기량이 떨어지며 FA 신청도 하지 못했다.[12] 물론 늦게 시작했으니 어깨가 싱싱할 거라는 건 구시대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경우 어깨 부상을 당할 위험성이 높은 편이다.[13] 사실 권준헌은 타자로서는 1995년 3할을 친 것 빼고 보여준 것이 없으나, 어깨가 상당히 좋기로 유명했고 투수로 전환한 이유도 훈련 중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그의 강한 어깨를 알아본 김시진 코치가 투수 전향을 권유했기 때문이다.[14] 송진우, 정민철, 문동환조규수, 안영명, 김창훈의 젊은 피가 가세된 데다가 1년만 더 있으면 감독의 아들이자 초특급 유망주그러나 알고보니 화상가 입단할 상태였으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꿈은 산산히 흩어지고...[15]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이 쪼개지면서 현대 유니콘스는 5남 정몽헌 회장이 경영하던 현대그룹의 계열사 현대전자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현대전자가 경영부실로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 하이닉스반도체로 분사되어 채권단의 공동관리로 들어가면서 현대유니콘스 야구단은 붕뜨게 된다. 한푼이라도 빚을 회수하고자 했던 채권단 입장에서 프로야구단은 돈먹는 하마로 여겨졌고,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특히 정몽헌 구단주가 2003년 대북송금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투신 자살한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16] 그래서 2001년에는 당시 일본에 가 있었던 정민태 임대료로 운영하였고, 그 후엔 현대자동차, KCC,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등 범 정씨일가 계열사에서 약간씩 모아서 지원했지만 여타 구단에 비해선 그닥 풍족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2006년을 마지막으로 끊어지면서 2007년말 현대 유니콘스는 결국 마지막을 맞게 된다.[17] 다만 박경완이 그 해에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면과 높은 금액을 부른 것도 있긴 하다.[18] 이 때는 주로 이숭용이 클린업에 들어갔다. 용병은 타자 1명, 투수 1명으로 뽑았는데 투수에 비해 타자는 잘 뽑지 못하다 2003 시즌 중 대체선수로 합류한 브룸바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재계약한 상황.[19] 실제로 2004년 현대의 2루수 자리는 당시 막강했던 현대 타선의 최대 약점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김민우, 서한규, 채종국 등이 돌아가며 나왔으나 박종호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참 부족했다.[20] 이상열도 괜찮았지만 이미 한화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었으므로 논외로 한다.[21] 최근 몇 년간 기록을 보면 1번 타자일 때 가장 잘 친다! 1번 송지만, 2번 전준호로 잘 써먹었다.[22] 송지만을 신인 시절부터 잘 챙겨주고 주전으로 기용한 강병철 감독이 당시 롯데 감독으로 취임하자 강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롯데와 협상 테이블을 차렸으나 롯데는 그에게 4년 21억을 제시하였다고 한다.[23] 그런데 자세한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당시 현대는 계약금을 주지 않는 대신 연봉만 6억씩 3년을 주기로 하였다. 계약금을 주지 않았다는게 너무 크지만 연봉만 보면 KBO 내에서 최상급으로 받았다. 이렇게 계약을 한 이유는 구단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딴 팀에서 가져가지 않도록 일부러 이런 식으로 계약을 했다.[24] 특히 FA계약 조건이 연봉만 받기로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FA 돈을 다 받지도 못한 것.[25] 그래도 90% 삭감된 박명환보다 양호했다.[26] 2009년에는 22홈런을 때려냈고, 2010년 역시 17홈런과 60타점 이상을 기록했으니 크게 나빠진 성적이 아니었다.[27] 물론 연봉은 8,000만 원으로 무려 68% 삭감되었다.[28] 준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든 선수 중에서는 이택근, 이정훈, 이성열, 송신영, 오재영, 김민성 정도가 있었다.[29] 끝났다 생각하고 덕아웃에서 뛰쳐나오는 두산 선수들을 멈칫하게 만들 정도의 좋은 송구였다.[30] 박동원은 그 다음 시즌인 14년 각성하며 허도환을 밀어내기 전까지 죽어라 까이게 된다.[31] 인하대 재학 시절 감독이었다.[32] "염경엽 감독은 왜 나와?" 할 텐데, 송지만이 은퇴한 시점에서의 감독은 공식적으로 염경엽이다.[33] 양준혁박경완이 16시즌 두자릿 수 홈런을 기록해서 공동 1위, 장종훈 선수가 15시즌으로 2위, 바로 다음으로 송지만이 14시즌으로 3위이다. 단, 아쉽게도 장종훈을 제외하면 연속 시즌 기록이 아니다.[34] 2013년 8월 28일 달성.[35] 2014년 10월 10일 기준.[36] 5위는 314홈런의 박경완.[37] 98년 16홈런 25도루를 기록했던 적도 있다.[38] 개독교 관련 레퍼토리 중 하나인 '목사/장로 성추문 사건'에 빗댄 것. 송지만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별명이겠지만 2010년경까지만 해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잊을 만하면 튀어나온다.[39] 이상열이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멤버냐고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시리즈에 출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단지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내려왔을 뿐[40]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일본/한국 모두 극악의 타고투저가 수 년 간 계속되었다. 이시절 수많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타자들이 약빨로 기록을 세웠다는게 미첼 리포트에서 폭로되기도 했다. 과연 이게 메이저리그만의 문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