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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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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안치홍[5] 양현종 나지완 김선빈 나성범
[1]: 김일권 이후 장기간 주장직 폐지 출처
[2]: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3]: 마무리 캠프 직전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4]: 스프링 캠프 후 주장 교체
[5]: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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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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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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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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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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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준호
현대
김동수
현대
이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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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번}}}
팀 창단 김일권
(1982)
조충열
(1983~1985)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번}}}
조충열
(1982)
김일권
(1983~1985)
조충열
(1986~1990)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번}}}
조충열
(1983~1985)
김일권
(1986~1987)
서창기
(1988~1989)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7번}}}
이광근
(1987)
김일권
(1988~1990)
송재박
(1991)
LG 트윈스 등번호 11번
김신부
(1990)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일권
(1991)
김기덕
(1992~1996)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73번}}}
결번 김일권
(1993~1995)
이홍범
(1996~1999)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7번
이선웅
(1996)
김일권
(1998)
정명원
(2001~2007)
}}} ||
}}} ||
파일:해태 김일권.jpg
김일권
金一權 | Kim Il-kwon
출생 1956년 9월 20일 ([age(1956-09-20)]세)
전라북도 군산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군산남초등학교 (졸업)
군산남중학교 (졸업)
군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체육학 / 학사)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1974~1976)
해태 타이거즈 (1982~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0)
LG 트윈스 (1991)
지도자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주루코치 (1993~1995)
해태 타이거즈 1군 주루코치 (1996~1997)
현대 유니콘스 1군 주루코치 (1998)
삼성 라이온즈 2군 주루코치 (2003~2004)
해설 olleh tv 야구 해설 위원 (2012)
병역 육군 경리단 (1977~1980)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고교야구 시절2.1.2. 실업야구 및 대학야구 시절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2.3. 태평양 돌핀스 시절2.4. LG 트윈스 시절
3. 지도자 경력4. 근황5. 기타6. 연도별 주요 성적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한국프로야구 원년 도루왕이자 프로 통산 5번[1]의 도루왕을 차지했고, 리그 최초로 3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해태의 초창기 스타 플레이어였다. KBO 리그 최초로 대도라는 별명을 얻었던 선수로 총 363개의 도루를 기록하였으며 프로야구 최초로 개인 통산 300도루를 기록했다. 또한 통산 최다 단독 홈스틸 기록(2회)[2]도 가지고 있다.

특이 기록으로 1988 시즌에는 피삼진을 단 8개만 기록했는데 이는 KBO 리그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한 시즌 최소 삼진 기록이다.[3]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고교야구 시절

1972년 군산상고황금사자기에서 부산고에 9회말 역전승을 거두는데, 이 때의 주축 멤버 중의 하나였다.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영민 타격상을 이 때 수상하였다.

2.1.2. 실업야구 및 대학야구 시절

졸업 후 실업야구팀 상업은행에 입행하였다.[4] 김일권이 전설의 타이거즈, 야사시TV 등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설명한 바에 따르면 어렸을 적부터 서울 생활을 동경하여 중학생 때는 휘문고, 중앙고 입학을 고려했고 고등학생 때는 연고전을 동경하던 차 전라북도교육감을 통해 고려대 입학(1974학번) 제의를 받았다. 고려대에서는 김일권만 스카우트하길 원했고 상업은행에서는 동기생 1명을 더 받아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최관수 감독 등 야구부 관계자들은 학교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김일권의 부친을 설득했고 김일권의 부친은 '너를 더 이상 뒷바라지 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김일권은 '학교에서 숙소, 장학금, 용돈 제공 등의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 돈 필요없다'고 말하자 결국 아버지에게 최초로 뺨을 맞았다고 했다. 결국 동기생 양기탁과 함께 입행했다.

당시에는 대학 특기생 혜택이 고교 졸업 후 3년간 유효하여 대학 졸업 후 다시 은행으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상업은행 공덕종 행장과 합의를 마쳤다. 당시 상업은행 감독이었던 장태영의 반대가 심했으나 '감독님은 예전에도 명문인 서울대학을 나오신 것으로 안데 왜 저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아무런 말도 없었다고 한다. 상업은행 시절 실업야구 연맹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타격왕까지 차지하며 맹활약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출전 후 연세대에 입학원서를 제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어느날 은행 숙소에서 덩치 좋은 유도부 선수들에게 보쌈을 당했고 잠실주공아파트, 프레지던트 호텔 등에 일주일간 갇혀있었다. 그 사이 연세대 원서접수기한이 만료됐고 결국 후기모집 대학교였던 한양대, 건국대, 동국대 중 한양대를 지원하여 1977학번으로 입학했다.

한양대 입학 후 출중한 활약을 펼쳤으나 군대에서 입대영장이 날라오는 바람에 1학기만 마친 채[5] 육군 경리단 야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어느날 심말룡 육군 감독이 잠깐 보자고 해서 지프에 탔는데 그 지프는 논산훈련소로 바로 달려갔다고 한다.

육군 소속이었던 1977년에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었다. 이 때부터 독특한 성격은 눈에 띄었고...[6]

1980년 6월 제대 후에는 다시 실업야구로 돌아가려 했으나 군 휴학 선수는 모교의 동의를 얻어야 실업팀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조항에 걸렸고, 한양대로 복귀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7] 무적(無籍)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대표팀에는 계속 뽑혔다.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도루 18개와 득점 18개를 기록해 두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한국팀이 11경기(9승 2패로 준우승)를 치렀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타율도 0.476으로 3위를 차지했다.[8] 그 당시 한국 야구대표팀의 리드오프는 실업야구 최고 스타였던 김재박이 아닌 김일권이었다.

결국 1981년 2학기에 한양대학교 야구부에 복학했다.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1년 10월 프로야구 출범이 발표됐고 당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야구 월드컵을 준비하던 김일권은 단체훈련을 이탈[9][10]하여 프로행을 선언했다. 국가대표 선수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나는 9월까지 선수등록이 불가했으나 3월 31일 대한야구협회 긴급이사회에서 대표팀 영구제명, 아마추어 자격 박탈 등의 징계[11]를 받고 해태행을 확정지었다.[12]

데뷔 첫 해였던 프로야구 원년, 김일권은 해태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기용되며 75게임동안 무려 5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원년 도루왕에 등극해 당대 제일의 1번타자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13] 당시 김일권은 원년 도루왕이라는 상징적인 타이틀 뿐 아니라, 여러모로 선수로서 최고의 한해를 기록했다. 1번타자임에도 11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리그 7위에 올랐으며,[14][15] sWAR 역시 3.12를 기록해 김봉연에 이은 팀내 2위였으며 득점 생산능력을 나타내는 wRc+ 역시 팀내 중심타선인 김성한과 비등한 수치인 122.6를 기록해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홈런을 치면서 루를 훔치는 호타준족의 원조격이었던 것.

그리고 이듬해 83년 시즌에는 기믹을 바꾸어 홈런을 줄이기 시작했다. .275의 타율과 4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년연속으로 도루 타이틀을 차지해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83년 시즌 종료 후 그 유명한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으로 인해 프로 선수 생활에 우여곡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우승에도 불구하고, 연봉에 인색한 구단의 방침으로 인해 선수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에 다음 1984 시즌 개막을 앞두고, 구단주와의 회식에서 선수들이 불고기를 안 먹고 불판에 그대로 올려놓은 채로 태워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김일권 혼자 주도한 건 아니고 최고참들의 기획 하에 선수진의 동의로 일어나긴 했으나[16], 김일권이 행동대장 겸 선수 대변인 격으로 나섰기에 그 주동자로 지목된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문서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있다.

이 때문에 구단 관계자들은 크게 화를 냈고 김응용 감독에게도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이 사건때문에 구단에 찍힌 김일권은 84시즌 초반 트레이드 대상에 올라 팀에서 쫓겨날 위기까지 처했지만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킬 경우 야구를 그만두겠다" 라는 각서를 구단에 제출하고 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지금은 선수들의 인권과 권익이 많이 신장되었지만 저 당시엔 "감히" 아랫것이 윗사람에게 대든 큰 사건이었다. 관련기사 : 트레이드 대상 金一權(김일권) 벌금·각서쓰고 팀합류 다만 공개적으로는 300만원의 벌금과 3경기 출장정지 처분이 나왔지만, 구단도 김일권이 주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3경기 출장정지만 내리고 벌금은 부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김일권이 박건배 회장에게 사과하러 간 자리에서 "일권아, 놀다 와라"라는 격려의 말을 들으면서 500만원의 금일봉을 받았다. 실제 주동자들은 일이 커지자 입씻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금일봉은 김일권이 독차지했으며 비록 금일봉을 받았지만 과도하게 받은 비난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실 주동자들에 대한 원망을 표출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1984시즌엔 0.241의 낮은 타율과 3할을 간신히 넘기는 출루율을 기록했으나, 4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3연패를 이루어내어 체면치레를 하게 된다. 1985시즌에 들어서면서 철치부심해 .278의 타율과 39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데 성공. 신인왕을 수상한 이순철과 함께 특급 테이블 세터진을 구성하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나, 무려 50번의 도루를 성공시킨 MBC 청룡김재박에게 도루왕 타이틀을 내주며 4연패에는 실패하였다.

1986시즌 해태에는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가 OB와의 트레이드로 합류하는데, 이 트레이드가 김일권의 굳건했던 입지를 흔들게 되었다. 기존 해태의 3루수는 김성한, 김종모가 종종 번갈아 들어갈 정도로 무주공산이었다가 신인왕을 수상한 이순철이 3루에 안착하는가 싶었는데, 이순철이 외야 포지션에서도 무리없이 활약할 것이라 생각한 김응용 감독은 3루수를 한대화로 고정시키고, 기존의 3루수였던 이순철을 중견수로 전환시켰다.[17] 이에 기존 중견수였던 김일권에게도 불똥이 튀어 코너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뀐 포지션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공교롭게도 포지션 전환 후 성적이 크게 떨어져버렸다. 그나마 2할 중후반을 쳐주던 타율은 1할대까지 떨어졌고 도루는 20개 정도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1987시즌엔 겨우 63경기에 나와 타율 0.229에 홈런은 단 한개도 기록하지 못했으며 도루 역시 16개만을 기록하고 말았다, 이러한 부진이 2년동안 이어지자 결국 트레이드 매물로 오르게 되었다. 당시 김응용 감독은 김일권을 대타로 내보냈고 김일권은 타석의 흙을 고르던 중 또 대타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화가 너무 나서 덕아웃에서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방망이를 내던지면서 '이 사람 밑에서는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도 많긴 하고 해가 갈수록 도루를 제외하면 뛰어나다곤 할 수 없는 성적이었지만,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였던 초창기의 프렌차이즈를 트레이드 시킨다는 것은 당시 팬들에게 너무한 처사로 비춰졌다. 하지만 직설적 성격의 김일권이 예전부터 눈엣가시였으며, 젊은 이순철이 1번타자 중견수로 성장할 것이라 판단한 구단은 결국 태평양 돌핀스로의 현금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18]

2.3. 태평양 돌핀스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9)
88시즌 절치부심한 김일권은 이적 첫 시즌 생애 첫 3할타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19] 1989년 시즌엔 무려 62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도루왕 타이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 타이틀은 자신을 밀어낸 이순철과 경쟁하며 따낸 타이틀이었기 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 팀 타선이 워낙 약해 김일권의 도루는 다소 빛이 바랬지만 그의 분전으로 태평양 역사상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고, 본인도 첫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이듬해인 1990년에도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펼치며 48개의 도루를 기록하였고 통산 다섯번째 도루왕을 차지했다. 2위 이순철이 26개의 도루를 기록한것과 비교했을때 압도적인 도루를 기록한 것. 다만 도루를 제외한 스탯은 절망적일 수준으로 안 좋았는데, 일단 1번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달랑 85개밖에 치지 못해 타율이 겨우 2할5푼을 간신히 넘겼다. 그렇다고 선구안이 좋아진것도 아니라서 출루율도 3할 턱걸이, 장타력은 원래 있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있던 장타력도 사라져서 홈런 0개와 더불어 40년 프로야구 역사상 뒤에서 공동 18위인 장타율 .286을 기록한다. 이런 절망적인 성적을 증명하듯 90년 그의 WRC+는 겨우 72.9. 이는 11이대형과 비슷한 수치이다. 결국 그는 압도적인 도루왕을 차지하였음에도 LG에 트레이드 되고 만다.

태평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유는 김성근 감독의 하드 트레이닝 덕택이었다. 아메리칸 펑고[20] 훈련을 소화하면서 김일권의 말에 의하면 똥물까지 게워냈다고...오죽 김일권이 힘들었으면 김성근에게 "야 이 개xx야 쳐라!" 소리치고 김성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았다 xx야"하면서 쉬지않고 타구를 날렸다. 그런 강훈련의 결과 타율, 도루 부문에서 상위권에 랭크될 수 있었고 10번 게임을 하면 7~8번은 지는 게 일상이었던 태평양이 포스트시즌이 진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21] 김성근의 여러 이야기가 미화되는 게 심하지만, 펑고와 특타만큼은 대부분의 팀에서 성과를 거뒀던 편.

2.4. LG 트윈스 시절

1991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개막전에 태평양 상대로 3타수 3안타를 치며 또다시 부활을 알리는가 싶었지만 결국 최종에는 타율 0.151로 매우 부진하였다. 결국 35세의 김일권은 두번째엔 부활을 이뤄내지 못하고 은퇴하였다.[22]

3. 지도자 경력

쌍방울 레이더스해태 타이거즈 주루코치[23]를 거쳐 이후 LG 시절 팀 선배였던 김재박이 감독으로 있는 현대 유니콘스의 코치로 자리를 옮겨 1998년 한 해동안 1군 주루코치로 활동하다가,[24] 1년만에 그만뒀다. 현대에서 나온 이후로는 몇 년간 개인 사업 등을 하며 야인으로 있다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2년간 삼성 라이온즈에서 2군 주루코치를 맡았다.

도루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주루코치로써도 평가가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2004년 말 삼성 코치직에서 자진 사임한 이후로는[25] 다시 프로야구계에 못 돌아오고 있는 처지이다. 원래 야구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고[26] 직설적으로 할말 다하는 스타일[27]이라서 야구계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설이 많다.

4. 근황

한때 주루코치를 그만두고 골프장 사업을 한 적이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부설 골프연습장을 운영했으나, 수익금 횡령혐의로 구속된 흑역사가 있다. 개업 당시 취재 영상 관련 기사 유튜브에 당시 동영상을 보고 아직도 골프장을 운영하는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2012년 olleh tv에서 KIA 타이거즈 측의 편파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4년 3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케이코스모스라는 판촉물업체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2019년 4월 김재박, 김봉연과 함께 LG 유플러스 광고에 출연하였다. 문서 상단의 사진보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제법 미노년의 느낌이 난다.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 김봉연-김종모 편에 전화상으로 출연했으며 7월에는 선배 김준환과 함께 직접 출연했다. 야사시TV에도 출연하였다.

2023년 김봉연, 김성한과 함께 본인이 소장하던 야구 기념품들을 전라북도체육회에 기증했다.관련내용

5. 기타

  • 태평양 시절인 1989년 시즌의 한 경기에서 1루 출루 후 2루 도루를 시도했는데, 포수의 악송구로 공이 외야로 빠지자 이를 틈타 3루로, 그리고 내친김에 홈까지 질주하여 세이프에 성공했다. 다시 말해 타자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상대 실책과 자신의 빠른 발만으로 득점을 올리는 '무타 득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1999년 1출루 3도루의 신동주와 2015년 8월 30일 경기에서 박해민이 재현하였다.
  • 해태 시절에는 팬 서비스에 대한 평이 엇갈린다. 야유하는 홈팬들을 노려보거나 직접 응징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고, 사인해주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 한마디를 했다는 일화도 있는 등 업다운이 명백하다. 다만 전자의 증언은 명백히 팬들이 먼저 건드린 것임을 생각하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유형이었던 듯하다.
  • 이야기를 하면서 "이 김일권이가~" 식으로 본인의 3인칭화를 잘하는 편이다.
  • 학번이나 나이가 같은 건지 알 수 없으나 출연 영상에서 보면 2살 연상의 김재박을 재박이, 1살 연상의 이광은을 광은이라고 불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전화상으로 출연했을때도 1년 선배인 김준환에 대해 설명할 때 '김준환이가~'라고 불러서 김봉연의 지적을 받았다. 반면 김준환과 동반출연했을때는 선배인 김봉연에 대해 설명할때 '김봉연이가~'라고 불러서 김준환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걸 보면 그냥 성격상 선배건 아니건 자기가 편한대로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 1985년 신인으로 입단한 선동열의 멘탈을 다 잡아준 일화가 있다. 고교-대학 시절 슈퍼스타였던 선동열이 주위의 많은 기대를 안고 등판했으나 데뷔경기에서 대량실점, 다음 경기에서도 대량실점을 하고 말았다. 고민에 빠진 코칭스태프들이 패전처리로 올리자 마운드에서 씩씩대며 공을 던졌고 결국 김일권이 팀 전체 집합을 소집하여 심한 말로 선동열을 질책했고 그 뒤로 기량이 향상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에이전트 제도가 없어 연봉 협상을 선수와 구단이 직접 하던 시기였는데 선동렬의 부친 선판규가 연봉협상에 나서자[28] 선동열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
  • 한때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삼성 코치 시절 당뇨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도 있다는 걸 봐서는 꽤나 심각했던 듯 하다. 다만 그 이후로는 관리를 철저하게 했는지, 현재는 나이에 맞지 않게 호리호리하고 미노년 삘이 난다.
  • 슬하에 1녀가 있다.
  • 방송인 KBS 전 아나운서 왕종근과 얼굴이 닮았다.
  • 해태 선수 시절, 광주의 목욕탕에서 김일권을 본 팬들이 증언하기로 식스팩의 상체, 그리고 굵은 허벅지를 가지고 있었다.
  •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리더쉽, 카리스마, 포용력, 책임감 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해태의 첫 군기반장이었으며 이후 군기반장 계보는 김성한, 이순철, 송유석, 이호성으로 이어진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일섭이 술회하기를 명랑운동회[29] 녹화 당시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와 준우승팀 MBC 청룡 두 팀 선수들을 초청해 1983년 12월 24일에 대결했다고 한다. 웃고 즐기자고 녹화하는데 양 팀 선수들은 승부욕이 불타올라 기를 쓰며 이기려 했고 해태가 이기자 연출진에서 자꾸 녹화를 중단시켜 행동대장 겸 군기반장이었던 김일권이 해태 선수단을 철수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 김성한이 말하길 여고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선배라고 했으며 곱슬머리, 까만 피부, 그리고 허리에 거의 붙은 엉덩이 등 섹시함으로는 김일권이 최고, 잘생김으로는 김준환과 이상윤이 최고였다고 말했다.
  • 이종범이 해태에서 활약하던 1996~97년에 주루코치를 맡았다. 이종범이 스톡킹에 출연하여 밝히길 이종범이 몸을 사리지 않고 주루 플레이를 하자 '야, 몸 사려가면서 뛰어~ 무조건 뛰다가 다치면 너만 손해여. 도루 100개를 하들 뭣하냐~ 해태에서 돈도 더 안 줄껀디'하면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고 밝혔다. 김일권이 쌍방울 코치였던 1994년 이종범이 전반기에만 60개가 넘는 도루를 했고 100도루를 꿈꿨지만 그 조언을 듣고 후반기에는 도루를 줄여서 84개로 마무리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75 282 .270 76 12 1 11 36 48 53
(1위)
45 .436 .370
1983 96 374 .275 103 13 1 6 26 45 48
(1위)
41 .364 .347
1984 62 245 .241 59 9 0 2 17 29 41
(1위)
24 .302 .309
1985 92 316 .278 88 11 4 4 38 38 39
(2위)
36 .377 .352
1986 96 258 .186 48 6 1 1 20 32 22
(5위)
26 .229 .259
1987 63 175 .229 40 6 0 0 10 20 16 17 .263 .29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8 태평양 89 309 .301 93 11 5
(1위)
3 34 35 26
(2위)
19 .398 .337
1989 113 383 .261 100 23
(5위)
1 1 28 48 62
(1위)
37 .334 .324
1990 98 336 .253 85 9 1 0 27 48 48
(1위)
33 .286 .31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1 LG 58 139 .151 21 1 2 0 7 21 8 11 .187 .212
KBO 통산
(10시즌)
842 2817 .253 713 101 16 28 243 364 363
(7위)
289 .330 .321

7. 관련 문서



[1] 1982~84년(해태 시절), 1989~90년(태평양 시절)[2]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한문연과 타이기록.[3] 당시 108경기 체제로 규정타석이 334타석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역대급 기록이긴 하다. 다만 볼넷도 16개로 매우 적었다. 적극적인 타격을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숫자만 보면 볼삼비 2.00라는 수준급 선구안의 수치가 나온다.[4] 고교 1년 선배 김준환은 고교 졸업 후 상업은행에 입단해 뛰고 있었다. 김준환은 김일권을 꼬셔오라는 상업은행 팀의 특명을 받고 군산상고에 내려왔다고 밝혔다.[5] 김진영 당시 대학야구선발팀 감독(중앙대 감독)이 손을 써서 3개월을 늦췄다.[6] 야사시TV에서 술회하길 김응용 감독이 계속 본인을 시합에 스타팅 멤버로 내보내지 않아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고 일본과의 경기에서 1루 대주자로 나가자마자 유백만 1루 주루코치 앞에서 혼자 S자 들어가는 욕ㄱ자 들어가는 욕을 시전했다고 한다. 시합 후 당시 룸메이트였던 김인식과 숙소에서 담배를 피던 중 운동장에서 김일권이 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응룡이 전화를 걸어 추궁하기 시작했고, 처음엔 욕을 안했다고 발뺌하다가 제일 만만한 김재박이 먼저 본인에게 욕을 해서 맞받아쳤다고 말을 바꿨다. '너 정말 솔직하게 얘기 안할래!' 이 한마디에 결국 쌓였던 불만이 터지면서 '비싼 국민 세금으로 먼 곳까지 와서 왜 한 시합도 내보내주지 않는겁니까'말하자 다음날 스타팅 멤버로 포함돼 5타수 2안타 3타점을 쳤다고 한다.[7] 포항제철 야구단과 계약금 1,5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입단하기로 하였으나 선수 등록 규정때문에 입단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계약금 1,500만원이 중간에서 배달사고가 났는데 그 결과 500만원만 본인에게 왔으며 나중에 1,000만원은 어찌저찌해서 결국 찾았다고 한다. 또한 한양대를 지휘했던 김동엽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8]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1위였고 타이틀 욕심이 나서 김응용 감독에게 최종전에서 빼달라고 부탁했으나 '쳐서 먹어, 임마'(정정당당하게 경기에 다 뛰고 타율을 지켜 타이틀을 차지하라는 말)라는 말만 듣고 마지막 경기에 1번타자로 나섰고 5타수 2안타를 치며 3위로 내려앉았다.[9] 집에 사정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려 했고 어우홍 감독과 김충 코치는 허락을 했으나 배성서 코치가 막아서며 문제가 생겼다. 모멸감을 주는 언사로 인해 결국 한판 붙었고 주장이었던 이해창에게 '형, 나 대표선수 그만할래'하고는 보따리를 싸서 나왔다고 한다.[10] 김은식의 저서 '마지막 국가대표'에서는 초반부에 임호균과 면담하던 어우홍 감독이 "김일권이 아무 말 없이 해태로 떠났다"라고 배성서 코치에게 긴급하게 보고받는 식으로 '정말 말 그대로' 무단으로 이탈해 코칭 스태프도 충격을 받았다고 묘사되었다. 나중에는 배성서와의 불화가 있었다고는 언급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이것마저 김일권이 국가대표팀을 이탈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황에서 내세운 명분이었다고 묘사되었다.[11] 이미 프로에 입단한 이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징계였지만.[12] 이상윤(한양대)과 방수원(영남대)은 대학을 중퇴하고 입단하는 과정에서 역시 문제가 있었으나 잘 풀려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13] 1982년 7월 21일 숭의야구장에서 열린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7회초에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14] 이처럼 일발장타를 가진 1번타자 계보는 해태 타이거즈의 전통이 된다. 이후 이순철 역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여럿 기록해 은퇴 시점에서 통산 홈런 7위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일발 장타능력이 있는 선수였고, 이종범은 97년 30홈런을 포함해 데뷔 후 일본 진출 전 까지 매 시즌 홈런 10위 안에 들던 타자였다. 또한 해태 말기 종종 1번으로 출장했던 장성호 역시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였다.[15] 다만 김일권은 82년 시즌 이후 단 한번도 두 자릿수 홈런과 4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똑딱이로 전락한다.[16] 야구본색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김봉연김준환이 사전계획을 짜고 김일권에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고 김일권이 "형들이 하는데 나도 해야지" 라고 하자, 결국 실현되었다. 사실 구단주의 눈치를 본 김일권이 두 선배에게 먹는 척이라도 하시라고 손짓을 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17] 김성한은 3루수를 보다가 지명타자로 컨버트한 김봉연의 뒤를 이어 1루수로 정착했고, 외야에서 홈송구를 다이렉트로 던질 정도로 어깨가 좋았던 김종모는 우익수로 컨버트했다. 좌익수 김준환, 중견수 김일권, 우익수 김종모였으며 김종모가 노쇠화 기미가 보이자 김성한과의 1루수 경쟁에서 밀려 떠돌던 이건열이 외야수로 정착하게 된다.[18] 원래는 MBC 청룡이광은과 맞트레이드를 추진했다.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에게, 이광은은 김동엽 감독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태평양행으로 변경되었다. 훗날 MBC 청룡 후신인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됐다.[19] 이 시즌 김일권이 당한 삼진은 단 8개다. KBO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한 시즌 최소 기록이다.[20] 폴-투-폴이라고도 부르며 코치가 좌익수/우익수 방향으로 펑고를 번갈아 쳐주고 1명의 외야수는 그 공을 모두 잡아야한다.[21] 여담으로 당시 화제가 됐던 태평양 돌핀스의 오대산 극기훈련 당시 한 겨울 물 속에 들어가자마자 쌍욕을 내뱉었다고 한다.[22]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본인도 LG 시절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23] 부임하자마자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이 터지면서, 해태의 양대 항명사건을 각각 선수와 코치의 입장으로 겪게 되었다.[24] 이 시절 박재홍이 43도루, 전준호가 35도루를 기록했다.[25] 당뇨로 인해 5월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26] 이 점에서는 장호연과 비슷. 공교롭게도 장호연도 프로에서 지도자생활은 고향팀인 삼성이 마지막이다.[27] 현역 때나 코치 때나 상명하복에 무조건 충실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문제를 따져가며 해결하려 하는 스타일이었다. 집단주의가 대세였던 20세기에 21세기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선구자게다가 성격도 꽤 다혈질에 괄괄해서 나이가 들어서도 인터뷰 영상에서 말하다가 순간적으로 욱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28] 팀은 다르지만, 야구계의 선배 대투수인 최동원도 부친 최윤식 씨가 아들의 매니저/에이전트 역할을 도맡아 했다.[29] MBC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에 방송했던 프로그램으로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다양한 스포츠 종목을 대결하는 포맷이었으며 정동체육관에서 녹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