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25 08:44:12

장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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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호연 (張浩淵 / Ho-yeon Jang)
생년월일 1960년 5월 5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대건중 - 충암고[1] - 동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OB 베어스 1차 지명
소속팀 OB 베어스 (1983~1995)
장호연의 수상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5

1984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자책점
하기룡(MBC 청룡) 장호연(OB 베어스)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

1. 소개2. 선수 시절3. 은퇴 이후4. 연도별 성적

1. 소개

공 세 개로 삼진 잡는 것보다 공 한 개로 맞혀 잡는 게 낫죠

前 프로야구 OB 베어스 소속의 투수로 명실상부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투수로 활약하였다. 현역시절 등번호는 31번.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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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출신이지만 서울 충암고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1996년 1월에 은퇴할 때까지 13시즌 동안 계속 OB에서 활동하였다. 베어스 구단 역사상 한 팀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유일한 투수다.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고 이적해서 100승을 거둔 투수로는 1990년대 V2를 이끈 에이스 김상진[2]과 2000년대 에이스 박명환[3] 등이 있다. 두산은 물론이고 KBO 리그 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100승을 채우는 외국인 투수가 될 줄 알았던 더스틴 니퍼트는 100승에 6승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베어스와 이별했다. 반대로 대부분을 롯데에서 보내다가 FA로 이적해 온 장원준은 두산에 와서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개막전에 강했는데, OB 소속으로 무려 9번이나 개막전 선발 등판 하였고, 심지어 1988년 개막전에서는 무삼진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역대 개막전에서 노히트 노런 포함 완봉 2번, 완투 2번을 기록. 일명 개막전의 사나이.[4]

장명부, 조계현 등과 함께 KBO 리그 역사에서 기교파 투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선수로, 독특한 야구 철학과 기행으로 지금도 많이 이야기되는 선수. "1:0으로 지는 투수보다는 10:9로 이기는 투수가 훌륭하다"[5],"공 세개로 삼진잡는 것보다 공 하나로 맞춰 잡는 게 효과적인 투구다"같은 말이 유명하며 그다지 빠르지 않은 구속을 커버하기 위해 자기만이 개발한 다양한 구질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당시 '12가지 구질을 던진다라는 소문도 있었고, 본인은 6가지 정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구속이 느린 정도는 아니었는데, 평균 130km/h 초중반의 패스트볼을 던졌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성준이나 전병호 같은 '흑마구' 타입의 선수는 아니고 그냥저냥 쓸만한 수준의 직구로 당시는 140km/h만 넘으면 강속구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장호연 선수 말년에 자기도 빠르게 던질 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진짜 140대 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근데 자기 스타일에 안맞아 다시 원상복귀를 하긴 했지만. 직구구속과 관련된 일화로 차명석이 해설 도중 자신의 공이 느린 까닭이 본인이 학창시절에 롤 모델로 삼은 스타 플레이어가 하필 장호연이었다고 언급하며 자기 디스 와중에 깨알같이 장호연도 깠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체인지업, 그리고 슬라이더와 커브의 장점을 합친 슬러브를 제대로 구사한 투수이며 투심 패스트볼을 개량한 원심 패스트볼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또한 싱킹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써서, 땅볼을 유도해서 "공 하나로 맞춰 잡는" 능구렁이같이 지능적인 투구에 얼굴도 왠지 중국인을 연상시킨다 해서 '짱꼴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한 마운드에서 같은 구질을 두번 이상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구질을 보유한 팔색조로 130km/h대의 몸쪽을 파고드는 절묘한 직구에, 날카로운 슬라이더, 체인지업, 주무기 싱킹 패스트볼과 슬러브 그 외 여러가지 구질을 사용한다. 1994년 야구 관계자 설문 조사에서 가장 많은 구질을 던지는 투수 1위에 꼽힌 적이 있다.

매년 연봉 협상에서 굽히지 않는 자세[6]로 시간을 끌면서 전지훈련에 불참하기 일쑤였고 임의탈퇴까지도 가보았지만, 자기관리에 철저한 선수였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기에 통산 79완투로 역대 완투 순위 3위를 기록했다. 당시 투수로는 드물게 하반신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매년 비시즌에 스키로 다리 근육을 단련했으며, 프로야구 선수는 몸이 생명이라는 철학을 지녔는데 이는 그가 자기관리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야구계에서 적이 많았으며, 매년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의 마찰과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금도 두산 구단과는 견원지간이다. 1988년에는 최고급 벤츠 차량을 장만하기도 했는데, 당시 외제차를 타는 것을 죄악시하는 풍조 덕분에 안팎의 비난에 못 이겨[7] 얼마 못 가 국산차로 바꾸었다. 사실 본인이 무슨 연유가 있어서 벤츠를 장만하려 한 건 아니고 자동차 수입업체에서 시승차를 싸게 넘긴다길래 한 번 지른 거라고 한다.

1988년에는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개막전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기록이 대단하고 특이한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원래 그가 등판할 경기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 경기에 선발 등판 예정이었던 김진욱이 연습 중 동료의 타구에 영 좋지 않은 곳을 가격당하며 그가 김진욱 대신 서게 되었던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無탈삼진 노히트노런. 그는 볼넷 1개와 몸에 맞는 공 2개를 허용하면서 삼진은 한 개도 잡지 않고 28명의 타자를 전부 땅볼이나 플라이 그리고 병살타 2개 등의 범타로 처리했다. 세 번째는 99개의 투구수로 최소 투구 노히트노런 기록이라는 점. 노히트노런이라는 기록도 대단한데 개막전, 무탈삼진, 100개 미만 최소 투구수 노히트 노런이라는 점이 기록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다만 이 기록을 세운 곳이 홈이 아니라 하필 롯데의 홈인 사직 야구장이라 장호연은 제대로 세레머니도 못하고 성난 관중들을 피해 버스로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고 한다. 요즘이야 관중문화가 어느정도 성숙해서 관중 난동같은 것은 극히 보기 드물지만 이 당시만 해도 홈 팀이 참패하거나 판정시비가 일어나는 날엔 관중들의 난동이나 소요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이날도 성난 롯데팬들의 시위로 OB 선수단을 태운 차량이 몇시간이나 구장을 못 빠져나갔다는 조범현의 회상도 있다.

항명 파동 이후 1995년 초에는 대만프로야구로 트레이드될 뻔했으나, 당시 OB 구단 수뇌부의 운영 방식을 달갑지 않게 보았던 이종남 기자의 중재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1996년 1월 구단에서 방출되어 은퇴식도 없이 선수생활을 접고 만다.

통산 성적은 13시즌 동안 1,805이닝을 던져 109승 110패 평균자책점 3.26. 전형적인 완투형 선발 투수[8] 1990년대 중반까지 OB의 에이스 역할을 해 주었으며, 두산 구단과는 끝내 좋게 헤어지지 못했으나 지금까지도 두산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가져다 준 투수는 장호연이다.

그의 롱런을 데이터로 분석해보면 결국 낮은 볼넷이 비결이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이미지대로 일관적으로 낮은 볼넷과 삼진, 그리고 피홈런을 기록했는데, 피홈런의 부분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쓴 투수답게 리그 평균보다는 낮지만 팀 기록과는 큰 차이가 나지 않으니 제외하고[9], 탈삼진의 많고 적음은 이닝이팅과의 상관관계가 별로 없으며, BABIP 역시 동기간 리그 평균이나 팀 평균보다 살짝 낮기는 하지만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스캇 맥그레거처럼 일단 볼넷은 적지만 구위가 미비해 좋지 못한 성적을 낸 선수들은 수두룩하기 때문에 소위 똥볼러라는 이미지와는 달리[10] 구사하는 구종의 가치도 높았을 것이다. 유희관이 장호연의 재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비슷한 이유. 헌데 그 유희관도 장호연보다는 훨씬 탈삼진이 많다는 점에서 장호연의 유니크함이 돋보이기는 한다.

그의 어록중에 "공 세 개로 삼진을 빼앗느니 공 한 개로 범타를 유도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이 있는데, 말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비현실적인 조건이 되므로[11] 결국 해석하기 나름인 말이 될 것이다. 구위가 뒷받침된다면 피해가지 말고 자신있게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하라는 의미로 본다면 맞는 말이겠지만.

3.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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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효천고에서 조용준[12][13]을 발굴했고, 그 밖에도 박명환, 임창용, 윤길현 등의 투수를 발굴했다. 프로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며, 포수로 삼성에 입단한 황두성은 그의 제안을 받아 투수로 전향했다. 2003년에는 신일고 감독을 맡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지도한 3학년은 나지완임훈, 신입생은 김현수였다.[14]

그러나 2004년에 자기 팀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위해 야구협회의 규정을 어기고 스카우트들을 볼러 임의적인 공개 테스트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대한야구협회에 의해 무기한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단순한 테스트 차원이 아니라, 테스트에서 합격하면 커미션을 일정액 수수하기로 협정을 맺었다고 한다.[15]결국 이 협정이 문제가 되면서 무기한 자격정지를 받은걸로 알고 있었...지만 2017년 1월 말에 이영미 기자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사실 커미션 건은 표면적인 거고 진짜 이유는 2002년 모 선수가 입단하면서 받은 계약금 일부를 받기로 한 공증서가 2년 뒤인 2004년에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장호연의 무기한 자격정지는 신일고로 전학[16] 온 그 해 최고의 포텐셜 덩어리중 하나였던 서동환의 멘탈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래의 칼럼과 본인 인터뷰에도 나와있듯이 자격정지는 2010년도에 해제되었다.

2010년 홍윤표 원로기자의 칼럼에 따르면, 대한야구협회에서 "그 동안 장호연이 사회봉사를 하는 등 '개전의 정'을 보였고 앞으로 사건이 재발할 경우에는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받고 징계를 해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징계 해제 이후에도 야구계로 복귀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 후술할 인터뷰를 보면 징계를 받은 점과 외골수적인 이미지 때문에 현장 복귀는 주저하고 있는 듯 하다.

최근 대구광역시 주재의 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일반 사회인 선수들을 상대로 학살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에서 통하던 그 팔색조의 변화구를 잘 써먹어가며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상대팀 항의도 있고 해서 타자로 뛰고 있다고 한다.

2007년, 휘문고에 다니던 그의 아들 장영빈이 국내 최초의 스위치 투수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장영빈은 실제 공식 대회에서 투수로 등판한 기록은 전혀 없었으며 2008년 말 돌연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마도 휘문고에서 주전을 차지하지 못하자 주전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간 듯하다. 전학 직후 유급해 2009년에는 1경기도 나오지 않았으며 2010년에는 타자로만 뛰었다.[17] 대학 진학에는 실패. 그러나 아직 야구는 포기하지 않았는지 고양 원더스에 도전했다고 한다. 다만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별다른 근황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도전에 나선 것이어서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 결국 합격자에 들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가 속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야구를 하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여담으로 장영빈은 좌타다.

2017년 1월 말에 진행한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 #1#2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경기이닝ERA피안타4사구탈삼진
1983OB 베어스 34 155⅓ 6 17 2 0 4.23 165 81 31
1984 31 102⅓ 5 3 1 0 1.58
(1위)
77 39 47
1985 29 128⅔ 7 4 1 0 3.50 110 67 46
1986 31 165⅔ 13 9 3 0 1.90 136 51 44
1987 32 188⅓ 15
(3위)
8 6
(3위)
0 2.82 170 84 73
1988 36 146 8 12 1 0 3.95 163 50 46
1989 30 171 9 12 0 0 3.47 143 80 72
1990 19 110⅔ 5 8 0 0 4.55 108 52 34
1991 12 99⅓ 6 4 1 0 2.27 85 25 37
1992 35 225
(1위)
16
(5위)
12 2 0 3.12 225 71 90
1993 27 161⅔ 10 9 0 0 2.56 134 46 51
1994 15 71⅔ 2 6 0 0 4.52 75 32 26
1995 15 79⅓ 7 6 0 0 5.33 89 34 28
통산(13시즌) 346 1805 109 110 17 0 3.26 1680 712 625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3년 3완투 1완봉
1985년 5완투 0완봉
1986년 10완봉 4완봉
(3위)
1987년 13완투
(4위)
2완봉
1988년 3완투 1완봉
1989년 3완투 1완봉
1990년 4완투 1완봉
1991년 10완투[18] 2완봉
(4위)
1992년 17완투
(1위)
1완봉
1993년 9완투 3완봉
(5위)
1994년 1완투 0완봉
1995년 1완투 0완봉
통산 79완투
(3위)
16완봉

[1] 대구상고에 입학했으나 나중에 충암고로 전학을 하게 된다. 전학 당시 대구상고에서는 전학동의서를 써주지 않았는데, 당시 충암고 감독이던 김성근이 "책임지고 대학에 보내준다"고 해 전학부터 하고 나중에 동의서를 받았다고 한다.[2] OB에서 88승을 했고 1999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 직후 100승 고지에 올랐다.[3] OB/두산에서 88승을 했고 LG 트윈스로 이적한 후 고생 끝에 100승에 성공했다.[4] 매년 프로야구 개막전을 앞두고 스포츠신문에서 개막전 관련 진기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가 장호연이기도 하다.[5] 김은식의 책에 의하면 이 말은 와전된 것으로, 점수를 많이 줘도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고 있더라도 자신있게 공을 던져 실점을 끊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었다고.[6] 강병규는 신인 시절 장호연의 이러한 모습에 감탄하고 그걸 본받고야 만다.[7] 게다가 당시 OB 사장이 대우 로얄 프린스를 타던 시절이었다.[8] 1991년에는 연봉 갈등으로 임의탈퇴되어 후반기부터 등판이 가능했으나 12경기(11선발)에서 10완투 2완봉을 기록하기도 했다. 역대 두자릿수 완투 선수 중 유일하게 100이닝을 넘기지 못한(99.1이닝) 선수.[9] 구장 덕을 아예 안 보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모든 OB의 투수들이 장호연처럼 롱런하지는 못했으므로[10] 애초에 평균 130Km/h 중반대의 구속은 최고구속 140Km/h만 던져도 강속구 투수 소리를 듣던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딱히 느린 것도 아니었다.[11] 공 한 개로 인플레이를 100% 유도할 방법은 없으며, 3구 삼진도 마찬가지이다.[12] 이 때는 아직 프로 출신 인사들의 아마야구 지도자 진출 규제가 풀리지 않아 정식 감독 신분이 아니었다. 그가 떠난 뒤 해태, 쌍방울에서 뛰었던 서창기가 감독을 맡아 계속 팀을 이끌고 있다.[13]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바로 조용준과 강철민인데 둘 다 투구폼 때문에 이닝이터가 아닐 것 까지 예상했다. 2년 뒤 나중에 진짜 둘 다 확실하게 대학에서까지 무리하다 장호연이 말했던 것과 일치하고 말았다.[14]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 타격상은 부산고 2학년 정의윤, 홈런상과 타점상은 성남고 2학년 박병호, 준우승팀 우수투수에게 수여하는 감투상은 천안북일고 1학년 유원상이 타갔다.[15]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야구부 운영비를 보충하기 위해 이런 협약을 맺은 거라고 한다.[16] 경남고 내 감독 - 학부모 간 갈등으로 신일고, 한서고, 서울고로 전학 간 선수들이 있었다.[17] 훗날 밝히길 입스 증후군이 있었다고 한다.[18] 11번의 선발등판에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