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4 04:10:26

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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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의 수상 경력 및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
1996 1997 2002
2006 2014 2017

보유 기록(KBO)
최연소 구원왕 만 22세 115일[1]
최고령 세이브왕 만 39세 4개월 2일[2]
최연소 100세이브 만 23세 10개월 10일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장 만 41세 4개월 25일[3]
최고령 세이브 만 42세 3일[4]

수상 기록
1998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2004, 2015년 한국프로야구 세이브왕
1999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자책점
}}} ||
임창용의 역대 직책 및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8 386 세이브[5] 2014년 최초의 세이브 기록 가입자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7번
서정필 임창용(1995) 정영철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정현발(1995) 임창용(1996~1998) 곽채진(1999~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9번
김형석(1998) 임창용(1999~2001) 김덕윤(2003~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강영식(2001) 임창용(2002~2006) 김문수(2007~2009)
허승민(2013) 임창용(2014~2015) 박민규(2016~201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5번
이여상(2006) 임창용(2006~2007) 웨스 오버뮬러(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037번
결번 임창용(2016) 결번
KIA 타이거즈 등번호 12번
배힘찬(2016) 임창용(2016~2018) 백용환(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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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aab9a45765fa47623343bf174c9f4665cf2861e794aabdcb0906b58e65cba270407cf21139d0e52613f0f0cb3c9e8875a8a58cf381b49780096b9a05374486cc0ee734f47edd324b21354264efa894.png
이름 임창용 (林昌勇 / Chang-Yong Lim)
생년월일 1976년 6월 30일 (음력 6월 4일)[6]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까치마을[7]
학력 광주대성초 - 진흥중 - 진흥고
신체 182cm, 80kg, O형
가족관계 어머니, 3남 2녀 중 넷째, 아들 2명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8]
프로 입단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 팀 해태 타이거즈 (1995~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8~2012)
시카고 컵스 (2013)
삼성 라이온즈 (2014~2015)
KIA 타이거즈 (2016~2018)
병역 병역특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9]

1. 소개2. 선수 경력3. 평가
3.1. 투구 스타일
4. 여담5. 사건/사고6. 연도별 성적

1. 소개

KIA 타이거즈의 우완 사이드암 투수이였으며, 세이브 기록으로는 최초로 성구회에 가입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무리 투수. 국내 모든 옆구리 투수들의 우상이였으며, 한동안 한국인 투수로서는 가장 많은 세이브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오승환에게 역전당했다.[10] 아래 투구 스타일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특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가진 공을 슈트라고 하여 변화구로 구분하고 있다.[11]

대표적인 별명은 창용불패, 애니콜. 투수 분업 시스템이 명확하게 자리잡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는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올라온다고 해서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2] 구대성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예이기도 하다. 좌완 최강 노예 겸 중무리 투수가 구대성이라면, 우완 최강 노예 및 중무리 투수는 임창용이라 할 수 있겠다.[13] 1995년 입단 때부터 2007년까지 제대로 된 관리를 받기는커녕 혹사를 당하며 선수 생활을 평탄하게 해 본 적이 없다. 일단 한, 미, 일 프로야구 기록을 모두 합산하여 역대 한국인 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투수며[14], 그 동안 먹어준 이닝이 1,900이닝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노예였다. 류택현이 901경기에 등판했어도 먹어준 이닝이 600이닝대라는 점에 비춰보면 임창용이 얼마나 국내에서 빡세게 굴렀는지 알 수 있을 듯.[15] 리그를 여러 차례 옮기며 적응과 부상과 수술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24년 연속으로 속했던 모든 리그의 1군에서 투구한 것은 한국인 투수 중에서는 임창용이 최초며[16], 2018 시즌을 끝마치고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미일 통산 1,004경기에 등판하여 전세계 동양인 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했다.[17][18]

2012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 함에 따라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이상훈과 함께 한미일 프로야구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2014년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하면서 원소속팀인 삼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고령에다 급하게 영입되어 제대로 시즌을 준비할 수 없었던 탓에 2014년 5~6월 사이 블론세이브를 세 번 기록하는 등 많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며, 9월까지 이 모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14시즌 총 9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한다. 평균자책점도 5점대. 이 때문에 한 물 갔다는 평가까지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시즌을 준비하고 나온 2015 시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며 나이 40이 넘은 나이에 구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2018 시즌 투수로서 활동하는 선수 중 가장 먼저 프로에 데뷔한 선수다. 지금은 1990년대 전설이 되어버린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같은 팀과도 붙어보았을 정도로 커리어가 오래 되었다.

해태, 삼성의 두 팀이 한창 강팀으로 군림하던 시절 주역으로 활동했고, 가정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야쿠르트에서 연봉 60억 원을 받을 만큼 기량을 길렀으며, 선수 생활 막바지에는 미국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해서 활약한 그의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분발하는 투혼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어야 했지만, 커리어 막판 도박이라는 너무나 큰 오점 하나로 본인 커리어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야 말았다.[19]

2. 선수 경력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

창용불패(昌勇不敗) 이 별명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20]

투수로서 KBO 레전드 반열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선수이다. 1996년~1999년까지 100이닝+를 소화해왔고, 마무리 투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97년 이래 세이브 순위에 늘 꾸준히 들어왔다. 오승환 등장 전까지 KBO 최연소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으며, 98년에는 1점대 ERA도 찍었고[21] 99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ERA 1위를 찍지 않나, 주전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하더니 1선발로 등극하는 등... 여튼 대단하고 놀라운 기록들을 많이 세우기도 했거니와, 일본 시절 전까지 전성기 대부분이 혹사로 점철되어 있는데도, 그 구속을 유지했다는 건 놀라움을 넘어 무섭기 그지없다. 토미 존 서저리를 받긴 했지만, 여튼 매우 출중하다고 볼 수 있는 선수이다.

의외로 마무리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로의 능력도 대단한 투수다. 전성기 적이었던 2001년~2003년 잠깐 고정선발로 뛰었던 당시 삼성의 토종 1선발 자리를 꿰찼다는 것과, 선발 로테이션제가 확립된 2000년대 야구에서 달성하기 어려워진 200이닝+를 달성했다는 것, 선수 생활 말년에 선발로 떠밀렸는데도 버텨서 일정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커리어 대부분을 마무리 대신 고정선발로 뛰었어도 300세이브에 필적하는 대기록을 수립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의 투수. 어쩌면 고정선발은 혹사가 덜한 편이니 커리어 대부분이 고정선발이었다면 마무리 300세이브 이상의 대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다. 우완 역대 최다승이라든가...

선수 초중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도 지금까지 활동 중이며, 고무적인 것은 2016년 기준 커리어 22년차인 노장인데도 140~150Km을 넘나드는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30대 중반에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 타자에 비해 투수의 수명이 짧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놀랍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특이한 자기 트레이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2001년~2003년은 선발로도 뛰었었다.

실상 마무리로는 3년 연속 130이닝을, 선발로는 200이닝까지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레전드급 혹사의 아이콘이다.

다만 커리어에 비해서는 상운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기 때 두 부문에서 경쟁을 하다가 한 부문 빼고 꼭 경쟁자에게 밀리거나,[22] 한 부문에서 경쟁하다 아예 밀려버리곤 했다.[23] 게다가 큰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여 포스트시즌 경력은 많은데 MVP 한 번 수상한 적이 없다.

그의 속구는 뱀직구라 불리며, 속구를 던지면 심한 테일링이 걸리면서 공이 뱀 같이 들어온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제구까지 되니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덕에 전성기 때는 오승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9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리던 진필중에 대적했던 유일한 마무리 투수였기도 하다. 다만 전성기 중무리 활동과 선발 전향으로 인해 세이브 수에서 꽤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정도이면 그의 자신감과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발도 빨라 대주자로의 가치도 있는 선수이다.

국내 투수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암의 전설로 통한다. 이는 많은 사이드암 투수들이 임창용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잘하면 제2, 제3의 임창용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원판 임창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단점으로 지적되는 건 큰 경기에서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 분명 해태 시절까지만 해도 한국시리즈에서 세이브도 거두는 등 제 몫은 하는 선수였으나 1999년 삼성에 넘어간 이후부터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친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99년 플레이오프 때 탈탈 털렸던 게 트라우마였는지 일본 진출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시즌 때보다도 못한다고 욕을 들어먹곤 했으며[24] 국대도 차출은 많이 되었으나 활약상이 그리 크진 않았다.

경기 외적으로 흠이 있다면 사생활. 신인 때서부터 사생활 관리에 약점을 보였고[25], 2003년 급기야 간통사건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국 2015년 큰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외로 행운아 기질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터뜨리고 쫓겨난 게 큰 행운이 되어 여론의 호전과 함께 고향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 2013년 미국 진출 당시 소속팀 시카고 컵스의 리빌딩에 힘입은 빠른 승격과, 최종적으로 자리가 나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수 있었던 것을 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임창용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3.1. 투구 스타일

사이드암 투구폼으로 150km대의 강속구를 던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강속구가 나올 때 팔이 로우 쓰리쿼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로우 쓰리쿼터를 넘어 하이 쓰리쿼터로도 종종 던진다. 이 투구폼의 궤적과 빠른 강속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명 뱀직구는 임창용의 대표적인 전매특허 구질이다. 이 공을 처음 본 일본, 특히 2ch 사람들은 '이건 뭐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냐?'라고 말할 정도. 사실 일본 야구에서는 이런 테일링 무브먼트를 가진 투수가 드물다. 애초에 이런 무브먼트가 있어도 잘못된 것이라고 교정하는 판(…)[26]. 2013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이와 비슷한 무브먼트를 갖고 있는 선수는 한화 이글스의 정재원이나 삼성 라이온즈의 심창민 정도.

다만 전성기 때 임창용 투구폼은 공이 언더핸드 경계선에서 릴리즈될 정도로 낮았는데[27], 그럼에도 140~150km/h의 속구가 나왔다. 그러나 2003년 즈음부터 그간 혹사의 대가였는지 기존 폼에서의 구속이 감퇴하기 시작, 시즌 초 고전하다가 우연히 팔각도를 올려 던진 게 주효하여 이후 팔각도를 좀 더 들어올려 던지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임창용은 구속 증가의 효과를 보았지만[28], 공의 변화가 그만큼 약해지면서 2004년 이후 일본 진출 전까지 부진했던 하나의 원인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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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의 전매특허 뱀직구 직구인데 궤적이 휘는 것이 포인트. 원래 직구라고 해도 똑바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야구의 구질 참조. 다만 임창용의 그것은 일반적인 속구에 비해 수직 무브먼트가 적고 수평 무브먼트가, 그것도 좌우로 휘며, 그 정도도 눈에 띄게 크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도 사이드암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갔다.

직구가 주력인 거의 원피치형 투수로, 그 외로 던지는 변화구는 슬라이더를 주로 던진다. 그 외에도 싱커나 스플리터[29], 커브 등 있을 건 있다. 슬라이더는 좋은 편이지만 최고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까지는 아니고, 싱커나 스플리터는 괜찮은 편이며 커브의 경우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국내 복귀 이후로는 나이가 많아져서 생기는 구속 감소 때문인지 변화구 구사율이 갈수록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주력 구종은 직구이다. 뱀직구 때문인지 몇몇 이들은 투심도 구사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2018 시즌을 앞두고는 아예 오랜만에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커브와 투심, 체인지업까지 장착했다고 밝혔다. 커브의 경우 두 가지 폼을 사용하면서 존 안으로 넣어 루킹 삼진을, 바깥으로 보내 헛스윙 카운트를 버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투심과 체인지업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보아 구속 저하를 대비해 범타 처리를 늘리려는 듯 하다.

한물 갔다고 평가받았는데 일본에 가서 이처럼 화려하게 부활한 이유로
  • 혹사가 없어짐
  • 동기부여
  • 일본프로야구의 철저한 몸 관리 시스템
이렇게 셋을 들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뛰었기 때문에 공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한 프런트나 감독과의 불화설도 종종 보도되었고, 개인 사생활 측면에서도 물의를 빚는 등 야구 내외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일본 진출 직후 '모든 것을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그 말 속에 일본에서의 호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담으로 도는 얘기로 2005년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실은 이게 부상 치료용 수술이 아니라 신체 강화 수술이 아니였냐는 소리도 있다. 이 당시에 배영수의 10km/h를 훔쳐갔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배영수는 같은 수술을 받은 뒤 시속 150km/h에 육박하던 속구 구속이 10km/h 이상 떨어져 긴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배영수가 1년 늦게 수술했으므로 도둑질이란 건 농담. 하지만 배영수가 재활 뒤 복귀한 2008년에 좀 모자란 듯한 성적을 낸 반면 같은 해 임창용은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다시 태어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2009년에는 배영수가 직구 구속이 135도 못 넘을 정도로 아예 충격적으로 몰락한 반면 임창용은 160km/h를 찍는 등 날아다녀 대비되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문가은 임창용이 40대의 나이에도 150km/h를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려대는 비결을 유연성으로 보고 있다. 투구 시 테이크 백, 스트라이드, 릴리즈 까지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데다가 유연성이 뛰어나 젊은 투수들 보다도 더 많이 뒤로 젖혀지고 스트라이드 동작의 폭이 크기 때문에 공이 많은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에 가뜩이나 횡방향의 회전이 많이 실리는 사이드암 스로(Side-arm throw)인 것에 더해 더 많은 회전을 추가해 뱀처럼 휘어들어가는 뱀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칭과 런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웬만해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웨이트로 인해 근육이 붙어버리면 유연성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또한 마무리 투수의 필수요건인 커맨드도 매우 좋은 투수다. 자기 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위력적인 직구를 존 안으로 우겨넣는 스타일이다. 물론 부상 여파로 직구 구위가 하락했던 시절이나 노쇠화로 인해 전성기 같지 못한 요즘에는 종종 난타를 당하기도 하지만.

단점으로는, 스트라이드가 크고 사이드암 투구폼으로 인해 도루저지가 약한 편이며 데뷔한지 오래된 투수답게 인터벌이 엄청나다. 거의 25초가 넘어가는 인터벌을 지니고 있어서 경기 진행이 느린 편. 투구 시간 제한이 없던 옛날 투수들, 한구한구 집중이 필요한 불펜투수들이 인터벌이 느린 경향이 있는데 임창용은 둘 다 해당한다. 컵스 데뷔전 보면 5분동안 공 3개 던지는 환장하는 인터벌을 지니고 있다. 현역 중 인터벌 느린 투수로는 꼭 손꼽히는 투수. 이때문에 도루 저지 및 견제에 불리한지라 한화와의 시범 경기에서 홈스틸을 허용하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다.

평균적으로 인터벌이 빠를수록 타자에게 수싸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적게 주기 때문에 투수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고, 야수들 또한 지치기 때문에 인터벌이 느려서 좋을 것이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저 성적을 낸 것이니 그만큼 공에 위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4. 여담

  • 묘하게 이연걸하고 닮았다. 형제처럼 닮았다. 시카고 컵스로 이적한 임창용. 이젠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분과도 묘하게 닮았다.
  • 투수이지만 발이 대단히 빠른 걸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 드물지만 대주자로 나오곤 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편.#1#2 [30]
  • 파일:external/i43.tinypic.com/fop3py.jpg
    지승민, 권오준, 안지만, 김진웅 등 후배들과 함께.
  • 파일:Fw34HHz.png
    다른 의미로 전설이 된 사진.
  • 삼성에 있을 때에 프런트나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던 것과 달리 정현욱, 권오준,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등의 삼성 시절 후배들은 임창용을 많이 따른다. 특히 이들 중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과는 비시즌 기간에 같이 여행을 가거나 당구치면서 밥값 내기를 한다고. 다만 이승엽과는 2000년대 전반기에 사이가 안 좋았다는 설이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나돌고 있다. 임창용이 중무리 투수로 고생했는데 스포트라이트는 홈런왕인 이승엽이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하는 모습을 보면 둘이서도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은듯.[31]
  • 자신의 전성기가 해태에서의 4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연도를 적자면 1995~1998년. 또 삼성으로 이적한 뒤 2~3년간도 페이스가 좋았다고 언급했다.[32]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8년을 포함해 1998, 1999, 2000년 동안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 기사 말미 참조. 동시에 김응용 전 사장이나 선동열 전 감독도 구위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날아다닌 걸 보면 일본 시절이 진짜 전성기 같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임창용의 보직이 중무리 투수였다는 점. 야쿠르트에서처럼 철저하게 1이닝 마무리로서 관리를 받으며 등판하는 것과 비교하기 힘들다. 일본의 야구 팬들은 임창용의 대한민국 시절 스탯을 보고 저렇게 혹사를 당하고 부상을 안 당한 게 이상하다는 반응이 대다수.
  • 해태 타이거즈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 본 유일한 선수이다.
  • 일본 진출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임창용의 성인 '임'을 일본어로 イム라고 적는데, 이를 합치면 일본 한자로 부처{仏(佛)}를 의미하는 글자가 되기 때문. 2채널의 응원 스레드에는 임창용이 등판할 때 イムイム...로 도배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통칭 미스터 제로로 통한다. 일본에서 무실점 경기를 오래이어가서 붙은 별명인데 이후 기록과 상관없이 한국에서도 쓰이기도 한다. 야쿠르트에서 미스터 제로라 불릴 수 있는 선수로는 2008년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타카츠 신고뿐이었다. 참고로 임창용(林昌勇)이라는 이름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하야시 마사오'라는 평범한 일본식 이름이 되는데 일본시절 동료들이 매직으로 그의 모자에 ハヤシマサオ라고 카타카나로 써주면서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고.
  •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에 동그랑땡을 싸온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동그랑땡만 자꾸 먹어서 그만 먹으라고 했더니, 반찬에 침을 뱉고 도망치길래 화가 나서 포크수저를 던졌는데 그만 포크수저가 친구 머리에 꽂혀버렸다.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올래 야구할래라고 물어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싫었던 임창용 어린이는 야구를 선택했다고. 인생 초구 포크볼 그리고 유니폼을 가져왔더니 부모님은 유니폼을 도로 물르려 했다고 한다.
    파일:1fuaghc.jpg
  • 임창용의 별명 중 하나로 "창드"가 있다. 그룹 빅뱅 소속 가수 권지용이 G-드래곤을 예명으로 사용하는데 이걸 본따 팬들이 진갑용을 갑드라고 불렀다. 그래서 임창용은 창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에 쓰인 한자는 龍이 아니라 勇이다. 2012년에 심창민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부 삼성 팬들은 시속 150km대의 속구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과 이름에 창이 들어간다는 점 등을 임창용과 연관지어 "심창드"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칭찬하는 뜻. 사실 한국프로야구 사이드암 투수 중에선 거의 전설적인 존재라서, 딱히 삼성 투수들 말고도 사이드암으로 누군가가 조금만 잘던지면 순식간에 그 선수는 XX의 임창용, X창용이 된다. 물론 그 중에 원판을 뛰어넘은 투수는 지금까지 없다.
  • 2003년에 이혼을 한 적이 있다. 이모씨와 2003년 1월에 혼인신고를 했고[33], 2월에 이혼 신청을 한 것.이혼소송 관련 기사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카더라들이 있지만 적당히 걸러 듣자. 이후 재혼해서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는 듯.
  • 마구마구2 for kakao에서 2014년도 선수가 추가될 때, 2014 임창용은 처참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최고등급 8볼 플래티넘으로 나왔다. 마구마구 선수정보
  • 마찬가지로 마구마구에서도 2014 임창용이 레어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팀에게 너무 퍼주는게 아니냐고 유저들이 반발하였지만, 수정따위 그런 거 없다.
  • 전성기였던 1999년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진필중과 비교된 적도 있었는데, 그해 중무리를 한 임창용은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역시 중무리로 돌던 진필중이 구원승을 더 따는 바람에 임창용은 세이브포인트 딱 1P 차로 구원왕을 놓쳤다. 그러나 서로 거의 비등비등했던 1999년 외에는 정확하게 비교가 불가능한데 1998년까지 진필중은 선발을 겸업했으며, 이후 2002년까지 진필중이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반면 2000년에는 임창용이 안식년을 가졌고, 2001년부터는 선발로 전향하였다. 그리고 임창용이 다시 마무리로 전향한 2004년 진필중은 먹튀가 되어있었다. 확실한 건 이후의 행적까지 비교하면 진필중이 임창용에게 캐발린다는 사실이다.
  • 2017년 2월 18일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 갱신 기간이 지난 일본 운전면허로 무면허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30만엔(약 302만원)을 내기도 했다.
  • 이승엽이랑 공통점이 많다. 같은 1976년생 동기에, 둘 다 고졸연고 자유계약 입단,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전성기를 이끌었고, 둘 다 일본진출 경력이 있으며 성구회 회원인 점, 2017년 겉보기에 죽쑤는 것 같아도 의외로 잘하는 등.
  • 2017년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선발등판 없이 규정이닝을 기록한 선수이다. 1999시즌에 138.2이닝을 선발등판 없이 기록했다.
  • 일본에서는 여전히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하면 임창용이 대명사 수준으로 불리우고 있는 듯 하다. 니코동에서 프로야구 게임 관련 영상, 특히 파워풀 실황 프로야구에서 선수 육성이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테크를 타면 십중팔구 임창용이 언급된다.
  • 해태 타이거즈 시절 고작 4시즌 밖에 뛰지 않았지만 고향팀에 대한 애정은 그 이후로도 한결같았는데, 생애 첫 FA 요건을 갖춘 2004년에는 소속팀 삼성과의 불화도 아랑곳 않은 채 시즌 내내 KIA 타이거즈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았으며 시즌 후 협상 과정에서도 삼성과 2년 18억원의 계약을 맺은 뒤 KIA로의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돌출 행보로 구설수에 올랐다. 선수 본인도 고향팀에 가고 싶어했고, 부모님도 고향팀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결국 FA계약 하루만에 계약무효를 외치는게 말이 되냐며 삼성이 들고나와 임의탈퇴 위기까지 몰리고 KIA 또한 FA 시장 철수로 인해 임창용의 영입을 거부하면서 모양새가 꼬였지만 훗날 일본에 진출하여 화려하게 재기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인 셈. 2011년에는 "가능하다면 마지막 시즌을 KIA에서 보낸 뒤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고향팀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는데 그로부터 5년 후 드디어 고향 팀에 돌아왔다. 그러나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 도박하다 걸려서 삼성에서 방출당해서 기아로 갔으니 임창용이나 기아나 좋은 소리는 못들었다. 삼성 시절에 세이브든 승리든 담담한 표정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다르게 기아 시절에는 그런대로 경기 내용이 좋으면 표정을 밝게 짓는 편이다. 그리고 2017년 시즌 후 2번째 FA 기회가 왔지만 "나는 KIA에서 1년, 1년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면서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KIA에서 방출당하면서 임창용의 소원은 이뤄지지못했다.
  • 유망주 시절에는 타격 재능도 있었던 선수다. 광주일고와의 친선경기에서 김병현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고, 3학년 때는 충암고와의 화랑대기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프로에서는 1998년 4월 27일 OB(현 두산)전에서 4-2로 앞선 9회초 2사 1·2루서 상대 마무리 진필중을 맞아 2타점 좌월 2루타를 기록한 뒤 세이브를 올렸다.
  • 프로 누적년도가 쌓이면서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록이 나올 때 던졌던 기념구를 잘 챙기지 않고, 그 대신 경기가 끝나고 해당 기념구를 관중들에게 나누어준다. 아마도 기념구 하나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 기록을 눈으로 본 관중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의미인 듯 하다.
  • 사실상 2018 시즌 끝으로 KBO 복귀가 힘들어진 가운데 2019년 1월 2일 대만언론 'SETN'은 "임창용이 2018 시즌을 마치고 KIA 타이거즈에서 방출된 뒤 에이전트를 통해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대만 구단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매체는 "임창용은 지명도가 있지만 이닝 이터 능력이 의심받고 있다. CPBL 구단들이 대부분 선발형 외국인 투수를 찾고 있어 임창용의 리그 진출은 쉽지 않다"며 임창용의 대만행을 회의적으로 봤다.
    '현역 연장 의지' 임창용, 대만 리그행 타진한다
  • 2019년 5월 22일, 충격적인 인터뷰가 공개됐다. 길더라도 한번씩 읽어보길 바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임창용, 그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와 진실

5. 사건/사고

5.1.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문서 참조

5.2. 오재원을 향한 2루 견제 논란

문서 참조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1995 해태 14 29⅓ 0 2 0 - 0.000 5.83 37 0 8 16 19 19 1.43
1996 49
(4위)
114⅔ 7 7 0 - 0.500 3.22 91 8 44 78 48 41 1.13
1997 64
(4위)
135 14
(3위)
8 26
(4위)
- 0.636 2.33
(2위)
93 6 42 120 44 35 0.97
(2위)
1998 59 133⅔ 8 7 34
(1위)
- 0.533 1.89
(2위)
90 4 42 141 35 28 0.90
(1위)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71
(4위)
138⅔ 13 4 38
(1위)
- 0.765
(3위)
2.14
(1위)
91 10 36 141 33 33 0.87
(1위)
2000 52 88⅔ 5 4 30
(3위)
0 0.556 1.52 58 2 31 95 19 15 0.90
2001 30 184⅔
(5위)
14
(3위)
6 1 0 0.700
(4위)
3.90 169 25 79 136
(4위)
88 80 1.25
(3위)
2002 36 204⅓
(2위)
17
(3위)
6 2 0 0.739
(3위)
3.08
(3위)
188 24 58 160
(4위)
82 70 1.09
(1위)
2003 28 147 13
(3위)
3 1 0 0.813
(2위)
3.55 141 15 59 85 63 58 1.26
(5위)
2004 61 67 2 4 36
(1위)
0 0.333 2.01 51 4 26 67 19 15 1.09
2005 29 91⅓ 5 8 0 3 0.385 6.50 110 11 51 70 67 66 1.60
2006 1 2 1 0 0 0 1.000 4.50 3 0 1 0 1 1 2.00
2007 40 119 5 7 0 3 0.417 4.90 138 9 54 62 68 65 1.53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2008 야쿠
르트
스왈
로즈
54 51 1 5 33
(5위)
0 0.167 3.00 55 6 14 50 18 17 1.31
2009 57 57 5 4 28
(3위)
5 0.556 2.05 40 4 25 52 15 13 1.11
2010 53 55⅔ 1 2 35
(2위)
6 0.333 1.46 32 3 19 53 9 9 0.88
2011 65 62⅓ 4 2 32
(5위)
4 0.667 2.17 40 2 28 68 15 15 1.04
2012 9 7 0 0 0 3 0.000 0.00 6 0 2 7 0 0 1.14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2013 CHC 6 5 0 0 0 0 0.000 5.40 6 0 9 5 3 3 2.60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2014 삼성 49 44⅔ 5 4 31
(2위)
0 0.556 5.84 50 4 25 52 33 29 1.59
2015 55 54 5 2 33
(1위)
0 0.714 2.83 45 2 16 71 17 17 1.07
연도 소속 G 이닝 승률 ERA H HR BB SO 실점 자책점 WHIP
2016 KIA 34 35 3 3 15 0 0.500 4.37 45 5 14 38 18 17 1.57
2017 51 50 8 6 7 9 0.571 3.78 51 3 27 58 22 21 1.46
2018 37 86⅓ 5 5 4 4 0.500 5.42 92 16 40 84 54 52 1.40
KBO 통산
(18시즌)
760 1725⅔ 130 86 258
(3위)
19 0.602 3.45 1543 148 650 1474 730 662 1.18
NPB 통산
(5시즌)
238 233 11 13 128 21 0.458 2.09 173 15 88 231 57 54 1.03
MLB 통산
(1시즌)
6 5 0 0 0 0 0.000 5.40 6 0 9 5 3 3 2.60
개인 통산
(24시즌)
1004 1963⅔ 141 99 386 40 0.530 3.30 1722 163 747 1710 790 719 1.17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2001년 1완투 1완봉
(4위)
2003년 1완투 1완봉
(3위)
KBO 통산
(18시즌)
2완투 2완봉

[1] 1998 시즌, 8승+34세이브. 프로 원년부터 2003 시즌까지는 구원승+세이브를 합쳐서 세이브포인트로 계산하여 구원왕을 선정하였다. 그러므로 최다 세이브라고 구원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창용은 세이브 부문에서도 이 시즌에 최다 세이브를 거두며 세이브왕도 획득한다.[2] 2015 시즌, 33세이브.[3] 2017년 10월 29일, 2017년 한국시리즈 4차전 출장.[4] 2018년 6월 7일, 수원 kt전.[5] KBO 리그 258 + 일본프로야구 128[6] 공식 혹은 인터넷 프로필에는 음력 생일을 사용한다. 선수 시절 말년에 세운 각종 최고령 기준도 언론에서는 음력 생일을 기준으로 한다.[7] 까치마을 유래비에는 마을의 상징인 까치고개의 역사와 함께 임창용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민의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진행된 비석 건립이 후원자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임창용이 건립비용 900만원을 후원했고, 주민협의회는 성금 300여만 원을 보태 2015년 10월 까치마을 유래비를 세웠다.[8] 기본적으로 사이드암이지만 경우에 따라 쓰리쿼터로도 던지는 경우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그런데 KBO 리그 홈페이지에서는 우언우타로 나온다.[9] 사실 이 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했던 말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괴테가 먼저이다.[10] 오승환이 MLB에서 클로저를 맡게 되며 세이브 수가 역전당했다.[11] 국내에서도 80년대에는 슈트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사장되었다.[12] 삼성전자삼성 갤럭시 시리즈를 생산한 이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갤럭시라고도 부른다.[13] 혹사도만 따지면 넘사벽 of 넘사벽인 장명부가 있지만 장명부는 자의로 등판한 것이기 때문에 노예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좀 그렇다. 게다가 임창용이 활동하던 시기는 그나마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이 잡혀 있던 9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 게다가 43세 나이에 불펜에서 선발로 전환되기까지했다!![14] 역대 일본인 투수 중에서도 임창용보다 많이 등판한 투수가 없다. 현재 데뷔 때부터 풀타임 불펜투수였던 이와세 히토키가 NPB 최다 등판 투수이며, 1,001경기로 임창용을 뒤쫓고 있다.[15] 다만 2001년부터 03년과 흑역사인 05~07년은 선발로도 뛴건 감안해야한다.[16] KBO 한정으로는 송진우의 21시즌, 김원형의 20시즌이 뒤를 잇는다. 임창용의 경우 해외 시즌을 제외하면 18시즌.[17] 2위는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스에서만 1,001경기를 등판하고 은퇴를 선언한 뒤 2018 시즌 후반부터 투수코치로 합류했다.[18]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면 가네다 마사이치 944경기, 요네다 데쓰야의 949경기, 고야마 마사아키의 856경기 등 내로라 하는 명구회 소속 1950~1960년대에 활약한 NPB 레전드 투수들의 수많은 등판 기록을 21세기에 깨버리며 더 많은 경기에 등판했다. 물론 위의 3명은 선발 투수라서 이닝 차이는 있겠지만.[19] 도박으로 삽질한 선수들 중 현재 리그에서 뛰고있는 윤성환, 그리고 2016년에 퇴출된 안지만, 그리고 前 LG 트윈스 소속으로 뛰던 오상민, 아마 야구계에 종사하다 경찰서에 연행된 위재영 등등 많지만 이렇게 서술된 선수들은 그야말로 사생활이 문제라는 점. 그리고 오상민의 경우는 현역 시절 시즌 중에 경찰과 법원에 왔다갔다 했던 게 사실로 밝혀진 게 놀라웠다. 그리고 LG 구단도 그야말로 멘붕왔는지 그대로 웨이버 공시를 했다.(2011년 시즌) 위재영은 현대-SK 시절 돈을 빌려 사용했는데, 제때 갚지 못해서 결국 난리가 났다. FA때는 잘 챙기더니...[20] 불패라는 별명을 얻은 선수는 이제까지 구대성, 임창용 밖에 없다.[21] 정작 평균자책점 순위는 2위였다.[22] 1998년 구원&평균자책점 - 정명원에게 평자책 밀려서 2위, 1999년 구원&평균자책점 - 진필중에게 구원 밀려서 2위. 99년의 경우 세이브는 1위였으나 진필중이 구원승으로 커버치는 바람에 밀린 것이다.[23] 1997년 구원 - 이상훈에게 밀림, 2002년 투수 골든글러브 - 송진우에게 밀림.[24]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의 조용준과 비교되며 과하게 까였었다.[25] 당시 해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이 임창용의 사생활을 고치기 위해 한 달을 같이 먹고자며 훈련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임창용이 머리 염색을 했던 것을 김성근은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당시 2군에 있던 이순철 등의 고참들에게 원상복구를 부탁하는 등, 사생활 문제를 고치진 못했다.[26] 때문에 실제로 파워프로에서는 '슈트 회전'이라는 페널티 어빌리티로 구현돼있다. 효과는 발동시 상대타자의 비거리 강화.[27] 대략 김병현 투구폼의 팔각도보다 약간 높거나 비슷했다.[28] 팔각도가 올라가기 전까지 임창용의 최고구속은 153~4km/h였다.[29] 일본 진출 시기쯤 장착. 애시당초에는 포크볼을 연마한다고 했지만 원래 포크볼이라는 구종이 사이드암 투수가 던지기엔 꽤나 어렵다 보니 결국은 스플리터로 선회했다.[30] 투수 대주자라 하면 해괴망측하게 생각 할지도 모르지만, 투수들이라고 항상 크게 몸을 불린 체형은 아니다. 게다가 투수 포지션은 선수단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항상 러닝 훈련을 소화하기 때문에 야수보다 발이 빠른 투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임창용은 발 빠른 야수와 비슷한 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담으로, 투수 대주자의 경우 다른 팀에서도 가끔 가다 볼 수 있다. 단적으로 602 대첩의 임정우이진영을 대신해 주루플레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31]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잊혀졌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일부 선수들의 도박의혹이 있었다. 당시 이승엽이 카지노를 갔다고 주장한 사람 중 하나가 임창용이여서 이때를 기점으로 둘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엽이 숙소에 있었다는 증언과 목격자가 많아 유야무야됐고 정작 이승엽을 지목한 임창용은 훗날 진짜로 도박에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32] 기록상으로 임창용의 전성기는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 1996년부터 선발 200이닝+를 찍은 2002년까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넓히자면 2004년까지.[33] 실제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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