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6 07:51:14

노장진

노장진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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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2

1992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임종수
(경남상업고등학교)
노장진
(공주고등학교)
김수관
(경북고등학교)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8번
김대중(1989~1992) 노장진(1993) 신재웅(1995~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30번
김일혁(1992~1993) 노장진(1997~1998) 예상효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
성준(1986 ~ 1998) 노장진(1999) 훌리오 프랑코(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변대수(1997~1999) 노장진(2000~2004) 박석진(200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9번
박석진(1997~2004) 노장진(2004) 이왕기(2005~2006)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박현승(1999~2004) 노장진(2005~2006) 옥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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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노장진(盧長震 / Jang-Jin Noh)
생년월일 1974년 8월 10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학력 공주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1993, 1997~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4)
롯데 자이언츠 (2004~2006)

1. 소개2. 프로 시절3. 은퇴 후4. 기타5. 연도별 성적

1. 소개

KBO 리그 선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28번 - 14번 - 18번.

오승환이 나타나기 이전의 원조 돌직구였다. 묵직한 직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평균 140km대 중반, 최고 155km의 엄청난 속구를 팡팡 뿌려대었다. 게다가 중계화면으로 보면 공이 살짝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수직 무브먼트도 대단했다. 요즘처럼 회전수나 궤적 분석이 가능한 시대였다면 최강 직구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했을 선수. 슬라이더와 커브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내구성도 대단해서 사생활 문제, 현역 군복무등 기량이 떨어질만한 사태가 계속 벌어졌음에도 강제 은퇴 직전까지도 140km대의 직구를 계속 뿌려대었다. 물론 선수 생활 말기에 제구력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는데 훈련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1]

하지만 임선동과 함께 프로야구계의 풍운아로 더 유명한데, 그 사람 좋다는 류중일이 노장진의 행패를 보다 못해 손을 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류중일의 기타 문단 참고.

박찬호의 공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

2. 프로 시절

2.1. 빙그레-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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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프로 데뷔이자 빙그레 이글스의 마지막 해였던 1993년 시즌의 모습. (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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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탈퇴 이후 4년만에 다시 돌아온 한화 이글스의 현역 선수 시절 (출처 : 포토로)

공주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승리투수, 그것도 노히트노런을 달성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1993년 1월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도중 뛰쳐나와 계약금 4천만원의 조건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것도 이러한 활약에 따른 기대를 반영했던 것이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데뷔하여 그 해 100이닝 3승 10패 평균자책점 4.41로 공주고 시절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성격과 지속적으로 선수단을 이탈하는 등 불성실한 생활 태도로 인해 1994년 초 임의탈퇴 공시되었고, 현역으로 입대하여 유격 조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를 마친 1997년 임의탈퇴가 해제되어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1998년 말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어 고향 팀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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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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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첫 해인 1999년 188⅓ 15승 9패 평균자책점 4.35로 삼성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하며 원조 탈칰효과 잠재력을 대폭발시키며 한화 시절 사고뭉치 만년 유망주 이미지를 벗어나며 환골탈태하였고, 1999년의 노장진은 그야말로 구위 더좋은 우완 차우찬. 사사구로 주자는 열심히 쌓지만 구위의 힘으로 실점은 최소화하는 타입이었다.[2][3] 임창용이 2001년 선발로 전향한 뒤 마무리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4] 2002년부터 팀의 마무리로 자리잡았고, 63경기에 출장해 127⅓이닝 11승 4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로 활약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멤버와 삼성 라이온즈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하며 프로 데뷔 처음이자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2002년 중무리로 굴려지며[5] 너무 혹사당했던 탓인지, 이듬해인 2003년에는 9승 10패 21세이브 평균자책점 4.12로 구원투수로 시즌 10패를 찍는 등[6] 전년도에 비해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마무리에서 부진을 보이자.[7] 이듬해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선발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하였던 2004년에는 시즌 초부터 다시 잡음에 휘말렸다. 그 해 4월 7일 고지행과 함께 음주 사건으로 원정 숙소에서 무단 이탈하여 크게 물의를 빚었고[8], 2004년 7월 12일 김승관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어 삼성과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때 그와 같이 이탈하였던 고지행은 2004 시즌 후 방출당했고 한화 이글스로 갔다. 그의 트레이드 상대는 김대익박석진이었다. 여러가지로 보면, 양쪽 모두 손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9]

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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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보냈던 롯데 자이언츠의 현역 선수시절

트레이드 이후엔 잠시나마 정신차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롯데의 솔리드한 마무리로 활약한다. 팀 창단 이래 현재까지도 마무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롯데는 그가 활약했던 2004년 말~2005년 초까지 잠시나마 마무리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시즌 도중에 부인이 사망했고[10] 2006년 시즌 개막 전 윤학길 당시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후 또 다시 팀을 무단 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복귀했다. 2006 시즌을 마치고 FA를 선언했으나 그가 무단 이탈한 전력 등 강하게 이미지가 남은 사생활 문제 때문에 롯데를 포함하여 다른 팀들과 계약하지 못해 FA 미계약 선수로 남으면서 은퇴하고 만다.

3. 은퇴 후

빙그레 입단 시절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장정순 세한대학교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세한대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장정순 감독이 청주고 감독으로 옮길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노장진의 야구교실을 운영했었다가, 한때 야구 외에 삼성중공업 협력사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중이다.[11]

4. 기타

  • 사생활 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선수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흑역사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라는건 결국 자기 관리와 절제가 필요한 것이라 결국 그 사적 문제를 참지 못하고 잦은 무단이탈을 한 것이 결국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잡음 많았던 선수로 기억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도 노장진의 투구 이야기보단 사생활로 인한 무단 이탈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걸 보면...
  • 선수 시절 무단이탈 등의 행보 때문에, 당시 수비코치인 류중일에게 혼났다. 류중일의 회고에 의하면 자기는 선수에게 손을 안 대는(때리지 않는) 스타일인데 선수 코치 생활 통틀어 때린 사람이 딱 2명, 노장진과 김진웅이었다고 하니 알 만하다. 제 버릇을 못고쳤고 결국은 FA미아가 되어 은퇴했으니 선수 본인이 문제였던 셈.
  • 2011년 1월 24일 200km/h로 광란의 폭주를 한 혐의로 입건되었다.
  • 야갤 등에서 불리는 별명은 노잦이(...)다. 은퇴 후 한 번씩 언급될 때마다 역시 불린다.
  • 살려조의 여파로 다시 알려진 사실은 2002년불펜 2천구 투구가 있다.
  • KIA 타이거즈 투수 김진우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무단이탈 사건을 터뜨렸을 당시, 노장진과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돌며 후배를 버려놨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루머로, 김진우와 안면이 있긴 하지만 두어번 정도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여담으로 이 둘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전 LG, 기아 투수였던 장문석.
  • 아들인 노학준도 야구선수다. 2016년 새로 창단한 물금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해 외야수 겸 투수로 뛰었다. 경주중학교를 나왔기에 NC 다이노스의 2019년 1차 지명 대상은 아니었으며, 결국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하고 질롱 코리아 창단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대학도 못 붙은 듯. 질롱 코리아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자 메이저리그 팀의 러브콜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나왔지만 이것이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인지 단순한 립서비스일 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교 졸업 예정 선수들의 육성선수 입단이 막힌데다가 뒤늦게 대학으로 발을 돌린다고 해도 하위권 대학이나 2년제 대학 정도만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선택지는 국내 독립리그행 아니면 마이너리그행 정도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빙그레 26 100 3 10 3 - 0.231 4.41 88 4 62 93 57 49 1.47
1994 임의탈퇴 및 군복무(유격 조교)
1995
1996
1997 한화 35 133⅓ 6 10 0 - 0.375 5.47 124 21
(2위)
91 81 84
(5위)
81
(공동 3위)
1.60
1998 35 149⅓ 7 10 0 - 0.412 5.24 150 20
(공동 2위)
84 104 91
(3위)
87
(공동 2위)
1.5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33 188⅓
(5위)
15
(5위)
9 0 - 0.625 4.35 180 17 116 173
(4위)
100
(5위)
91
(5위)
1.50
2000 28 138⅓ 11 8 0 0 0.579 4.29 142 15 89 103 72 66 1.65
2001 22 85⅔ 7 2 1 1 0.778 4.62 88 10 67 57 47 44 1.74
2002 63 127⅓ 11 4 23
(3위)
1 0.688 2.54 98 15 54 146 38 36 1.19
2003 53 83 9 10 21
(4위)
1 0.474 4.12 73 8 53 87 40 38 1.4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삼성 / 롯데 34 46 1 0 17
(4위)
1 1.000 4.11 51 7 30 55 22 21 1.72
2005 롯데 35 33 1 2 18
(4위)
0 0.333 2.45 19 3 9 52 9 9 0.79
2006 42 48⅓ 3 4 6 5 0.429 4.66 44 5 39 32 25 25 1.66
KBO 통산
(11시즌)
406 1132⅔ 74 70 89 9 0.514 4.35 1057 125 694 983 585 547 1.51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3년 1완투 0완봉
1998년 1완투 0완봉
1999년 2완투 1완봉
2000년 1완투 0완봉
KBO 통산 5완투 1완봉


[1] 단 밑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제구가 그렇게 좋은 선수는 아니였다. 선수 생활 초반과 후반의 방황을 감안하더라도, 좋지않은 제구력을 구위로 버티는 투수인 차우찬보다 적은 이닝을 소화했음에도 사사구는 더 많이 내줬다.[2] 100사사구가 넘는 제구력으로 어떻게 15승을 올렸나 물으신다면 1999년 삼성의 클린업은 이승엽, 찰스 스미스, 김기태 셋이 합쳐서 122홈런...또한 백인천 감독의 리빌딩 성과로 1루 이승엽 - 2루 정경배 - 3루 김한수 - 유격 김태균으로 구성된 철벽 내야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3] 단적인 예로 2002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7회말 무사 만루를 막아낸 것이 있다.[4] 2001년에는 외국인 투수 벤 리베라가 마무리를 맡았으나, 허리 부상과 개인 사정 등을 이유로 시즌 중 임의탈퇴 처리되었고, 후반기에는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웅이 마무리를 맡았다.[5] 2002년의 노장진이 현재까지 풀시즌을 중무리로 굴린 마지막 사례라고 한다.[6] 같은 해에 롯데 자이언츠임경완임작가백인천백골퍼 아래서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구원 10패를 찍었다.[7] 2002년 우승 당시 김응룡 감독에 의해 중무리로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했던 여파가 컸다. 불펜으로 나와 2천구를 던졌으니...[8]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밤새 술 마시고 새벽 6시에 들어오다가 산책 중이던 김응용 감독에게 걸렸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은 자체벌금 300만 원에 비공개로 결정했는데, 노장진이 무단 이탈하면서 기자들도 알게 되어 파문이 커졌다고 한다.[9] 박석진은 2006년 다시 롯데로 돌아갔고, 김대익 역시 2006년에 은퇴했다. 노장진은 2006년 FA미아가 되어서, 김승관은 리빌딩 차원에서 2007년 방출됐다.[10] 부부싸움 이후 부인이 음독하여 병원 입원 치료 중 사망했다. 그러나 음독 이전 부부싸움에서의 폭력의 강도에 대한 의문도 있으며, 이는 KBO 홈페이지에 부인 김씨의 가족을 주장하는 자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11] 신정중학교 감독이 전 롯데 투수 박지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