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3 20:24:51

강병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MBC 전 드라마 다시 시작해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강병철(다시 시작해) 문서를, 198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남성그룹의 멤버에 대한 내용은 강병철과 삼태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강병철의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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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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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최우수감독상을 받는 모습
파일:external/www.sisapress.com/44263_42339_2153.jpg
롯데 자이언츠 감독 3기 시절(2007년)
이름 강병철(姜秉哲)
생년월일 1946년 8월 2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1]
학력 부산상고 - 우석대학교[2] 석사
신체 180cm, 85kg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크라운맥주 (1965)
해병대 야구단 (1966~1969)
한일은행 야구단 (1970~1977)
지도자 동아대학교 감독 (1978~1982)
롯데 자이언츠 코치 (1983)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84~1986)
빙그레 이글스 수석코치 (1988~1990)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91~1993)
한화 이글스 감독 (1994~1998)
SK 와이번스 감독 (2000~200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6~2007)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 (2008)
종교 불교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1984 1992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평가
4.1. 투수 운용에 대한 변호4.2. 비판4.3. 인재 기용과 타자 코칭4.4. 결론
5. 그 후6. 여담7. 역대 감독 성적

1. 개요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의 감독.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db.kookje.co.kr/20071217.22029210508i1.jpg
부산상고 시절 강병철

부산상고를 나왔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65년에 실업팀 크라운맥주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 간 해병대 야구단에서 군 문제를 해결하고, 1970년 한일은행 야구단에 입단하여 1977년까지 선수로 뛰었다. 당시 박영길, 김응용[3]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하였으며, 실업야구가 인기를 끌던 1970년대를 휩쓴 3루수 중 하나였다.

3. 지도자 경력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 1984년 한국시리즈 1, 3, 5, 7차전 선발로 최동원을 등판시키며 한 말.

은퇴 후 1978년 동아대학교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지방대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강병철은 동아대학교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1978년 제59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필두로 1982년까지 총 8회 우승, 4회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1981년 3관왕, 1982년 2관왕을 차지하며 대학 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주가가 치솟았고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계 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원년 OB 베어스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한 한일은행 시절 스승 김영덕이 영입 의사를 밝혔지만 동아대와의 모종의 계약 관계로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엔 절친한 사이였던 부산상고 선배 김응용해태 코치로 올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으나 결국 고향인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직을 선택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로 프로에 입문했지만, 시즌 도중 박영길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자 감독 권한대행으로 잔여 시즌을 마감했고 이듬해인 1984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여 데뷔 첫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이후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1986년 시즌이 끝나고 롯데 감독에서 물러났다. 강병철이 롯데를 떠나게 된 계기는 어찌보면 황당한 사건이 원인이었는데, 일명 까자값 사건이라고 알려진 해프닝 때문이었다. 당초 롯데는 1986년을 끝으로 3년 계약이 만료된 강병철과 재계약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계약금에 대하여 (5백만~1천만원 정도로)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강병철의 요청으로 이희수 코치는 팀에 잔류 시키기로 하고 그의 코치 계약금에 대하여 강병철이 구단 관계자와 전화로 얘기하던 중 "아이들 과자값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라고 했는데(분명히 이희수의 계약금에 관한 말이었다), 그 관계자가 당시 롯데 단장인 박종환에게 "강병철 감독이 계약금을 과자값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다" 라고 곡해하여 보고하는 바람에 다혈질인 박종환은 "뭐라? 아아 까자값?!?! 강병철이 마이 컸네, 5백만원이 까자값이라꼬???" 라며 펄펄 뛰었고 이 얘기를 들은 신준호 구단주도 대노하면서 강병철과의 재계약 의사를 단칼에 끊어버렸다.[4] 이 일은 훗날 강병철이 신준호와 만난 자리에서 해명을 통해 오해를 풀긴 했지만, 난데없이 백수가 된 강병철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는 부산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 면서 유니폼을 벗었다.

롯데 감독을 그만둔 후 약 1년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던 강병철은 1988~1990년에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수석 코치를 지냈다. 당시 김영덕 감독에 이어 차기 감독직을 보장받고 빙그레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소위 종신감독 파동으로 빙그레를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덕 항목 참조.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으로 복귀하여 1992년 롯데의 두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구단과 갈등으로 1993시즌이 끝나고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이적했다. 비록 1993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박정태의 시즌아웃과 한 시즌 팀홈런 29개라는 답이 안나오는 타선으로 5할에 준하는 승률을 올렸기에 당시 부산팬들의 강병철에 대한 지지는 높은 편이었고 몇몇 팬들은 직접 강병철에게 부산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읍소할 정도였지만 결국 구단과의 사이가 틀어진 강병철은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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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1994~1998년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5년간 포스트시즌에 두 차례 진출하였고, 1998년 올스타 브레이크 중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이시기 전임 김영덕 감독 시절에 팽배했다고 하는 특정 학교의 파벌[5]을 혐오하여 신인 선수들을 중용했으나, 문제는 해당 파벌을 너무 혐오한 탓에 오히려 가용 자원을 한정시켰고[6], 특히 투수 운용에서 구대성을 과하게 혹사시켜 구원 투수이면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18승 3패 24세이브!!)하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기록을 세웠다.[7] 거기다 통산 성적 자체도 김영덕 감독 때에 비해 영 좋지 않은 편이라[8] (1992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을 빼더라도)강병철을 싫어하는 한화팬들도 상당히 존재한다.[9] 그나마 이전의 이글스는 해태 빼면 최강 소리를 들었고 당시 한국프로야구 자체에 투수 관리에 대한 개념이 전반적으로 덜 잡힌 시절이라 김인식 감독 시절[10]처럼 팀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사태[11]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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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2000~2002년 신생 SK 와이번스의 초대 감독을 지냈다. 그러나 이 때 고졸 신인이었던 이승호를 혹사시켜 강속구 투수였던 이승호를 기교파 투수로 전락시키고, 에르난데스를 혹사시켜 선수생활을 끝내게 하는 등 여전히 혹사를 하여 올드 SK팬들의 평은 이만수와 비슷하거나 약간 나은 정도이다. 결국 2002년 시즌 도중 해임당했다.

2006년~2007년에 또 롯데 감독을 맡았다. 전임인 양상문에 대한 롯데팬들의 여론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임이 강병철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강병철의 재부임 소식에 대해 대부분의 롯데팬들이 통수를 맞은 듯한 분위기였다. KBO 리그 역사상 한 팀에서 세 번이나 감독직을 맡은 것은 지금 현재까지도 강병철이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그러나 계약기간인 2년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감독경력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당시 팬들이 납득할 수 없는 작전을 남발했는데 안타 치면 닥치고 번트, 좌완투수엔 닥치고 우타자, 좌타자엔 닥치고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너무나 뻔한 작전 때문에 사토라레를 패러디한 '강토라레'라 불리며 '강병Fe[12]', '강노망', '강노인' 등 수도 없이 많은 별명으로 까인다. 특별히 강병철의 플래툰 작전은 '병페툰'이라고 불리며 작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낮은 성공률로 까인다. 불필요한 작전의 남발로 07시즌을 망쳤다고는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의 08시즌에서도 가끔에야 나오는 작전마저도 선수들이 수행을 못해내는 걸 보면 비단 감독만의 탓은 아닌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병철 감독의 07시즌을 옹호하기는 힘들다. 프로는 성적이니까. 하지만 이 당시에 감독이 구단내 정치싸움에서 밀렸으며[13] 선수단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고있다. 모 선수 한때 1년간 놀았던 그 분는 대놓고 감독을 욕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한다.[14] 전임 양상문이 재계약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고참 선수들을 무리하게 내치는 과정에서 팀 케미의 붕괴와 더불어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는데, 구단에서는 이를 감안해 강병철을 후임으로 낙점했으나 이전까지 해왔던 방식이 먹히지 않아 역시나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새로 창단된 우리 히어로즈의 2군감독[15]으로 1년간 재임했다.

감독 통산 900승의 위업을 달성한 다섯 명의 감독중 하나지만[16] 김응용, 김성근 감독의 승률이 5할을 넘기는 반면 강병철 감독의 승률은 4할 7푼. 승률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17]

4. 평가

4.1. 투수 운용에 대한 변호

사실 이 항목이 강병철 전 감독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 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의 감독 재임기간동안 자잘한 논란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그는 36년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서 딱 두번 있었던 우승을 당해 끝판대장급 포스를 날리던 팀들[18]을 상대로 가져온 유일한 롯데 감독이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능력을 인정해 줘야 하는 이유가 된다.

최동원과 염종석의 힘을 빌어 우승한 것 때문에 롯데 팬들에게 두고두고 욕먹고 있는데 사실 최동원과 염종석이 망가진 책임이 강병철 혼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 투수혹사 논란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감독은 한국에 거의 없는데다[19][20] 최동원이 하락세를 탄건 프로와서의 혹사와 더불어 이미 아마때부터 쌓이고 쌓인 혹사의 누적[21]과 더불어 선수협 관련으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한동안 운동을 쉬었던 탓이 크다.

염종석의 경우 1992년 한해를 제외하면 혹사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틈만나면 등판하려는 염종석을 그가 말려서 그나마...그렇게 등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부족한 훈련량과 몸관리 실패로 1994년 말 결국 부상이 찾아오게 된다.[22] 당시 제반시설이 극히 열악했던 한국프로야구에서도 가장 형편없다고 이름난 롯데의 재활시스템은 부상의 재발을 불렀고 결국 염종석의 전성기는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즉, 염종석의 부상은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롯데 구단의 무리한 욕심[23]과 당시의 열악했던 재활 시스템, 방위병[24] 제도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인데 모든 독박은 강병철 감독이 뒤집어 쓴 측면이 있다.

한화, SK감독 재임시절 혹사에 관해서도 반박의 여지가 있다. 강병철 당시 한화는 기존 한화 투수진이 전부 붕괴된 상태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SK 시절엔 페르난도 에르난데스이승호, 채병용을 혹사시킨 것은 맞다. 그러나 신생팀이었던 당시 SK상황을 고려해야한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재정난 떄문에 계속된 선수 팔아먹기로 전력이 거덜난 상태였다. 기존 투수진은 물론이고 2차 1픽 신인 마일영까지 현대 유니콘스에 팔아먹은 상태라 제대로 된 투수라곤 이승호, 김원형, 오상민과 2001년 영입된 외국인 에르난데스 뿐이었다. 게다가 김원형은 99시즌 여름 장종훈의 타구에 얼굴을 맞아 1년간 개점휴업 상태였다. (00년 2승 13패 다패왕) 결국 강 감독은 몇몇 투수에게 큰 부하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필 2001시즌은 유래없는 대혼전이었다. 꼴찌와 4강 컨텐더의 차이가 굉장히 적어서 8개구단이 전부 4강을 노릴 수 있었고 덕택에 얼마안되는 투수진이 더욱 혹사당했다.

그래도 2002년에 이승호의 재활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느정도 휴식을 부여했고(대신 2군에서 올라온 신인 채병용이 짐을 졌다.) 상술한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젊은 투수들은 별다른 혹사가 없었다. 아마시절 부상휴유증으로 고생하던 정대현은 프로 2년차 후반기부터 던지기 시작했고 제춘모, 윤길현에게 경험을 쌓게하고 신예 엄정욱을 최대한 빨리 기용하려는 프런트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혹사는 부인할 수 없지만 온전하지 않은 투수진으로 4강 싸움을 벌였고 팀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온전하게 남겨주어 후임 조범현 감독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기반을 다졌다. 이승호에겐 불행한 말이지만 신생팀, 창단 초 SK상황을 고려하면 어차피 누군가는 제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승호와 채병용은 조범현 시절 재활을 제대로 안시키고 계속 뽑아먹기만 한 탓도 분명히 있다.

4.2. 비판

그러나 최동원과 염종석이 우승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 것을 시대적인 착오에만 책임을 묻는 것 또한 옳지 않다. 1984년에 최동원을 자그마치 한국시리즈에 자그마치 4번선발 포함 5경기나 등판시키고 우승을 거둔 것을 단순히 "시대가 그랬잖아."라고 옹호하기에는 그 여파가 너무나 컸다. 애초에 투수 혹사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이지만 이 정도로 특정 투수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감독은 83년의 삼미 김진영 감독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그리고 07시즌에 실패이유 중에는 무능코치들과 정치놀음한 선수들 잘못도 적지않게 있지만, 그가 팀을 휘어잡지 못한 것은 분명히 그의 카리스마 자체의 부족도 원인이 것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80~90년대 롯데 시절의 투수 운용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그가 동년배 감독 가운데 투수의 체력 안배에 가장 무심한 감독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롯데 시절을 제하더라도 한화와 SK에서 보여준 투수운용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혹사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강병철 감독이 재임하던 94~98년동안 구대성선발, 중간, 마무리의 역할 구분 없이 무려 641과 1/3이닝을 던졌으며[25] 이런 기용은 분업화가 확실치 않아서 3이닝 마무리가 흔하던 당대의 다른 팀 투수들과 비교해도 극악한 수치다. 또한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정민철은 강병철이 재임하던 5년 동안 세 번이나 200이닝을 넘겼다. 이들보다 못하긴 하지만, 송진우한용덕의 혹사도 제법 심했던 편. 게다가 구대성을 제외하면 정민철, 송진우, 한용덕 모두가 이후 구위가 하락하거나 부상으로 신음했다. 오히려 40대 중후반 까지 호주 리그에서 롱런한 구대성이 이상해 보일 정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강병철의 막장행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송진우는 스타일을 바꿔서 이후로도 활약했고, 정민철과 한용덕은 강병철이 쫓겨난 직후에 구위가 하락했기 때문(...). 그리고 정민철은 1999시즌에 에이스 역할을 했으며, 일본으로 갔다가 부진했기에 강병철 감독 보다는 일본 진출의 영향이 더 커보일 정도이다.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이승호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유명하다. 이전까지의 상황은 '그 시절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로 어떻게 쉴드를 칠 수 있다지만, SK 시절은 2000년대이다. 이미 혹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아진 시절이 되었는데, 꿋꿋하게 혹사를 시켰다는 것.[26]

2000년 고졸신인으로 입단한 이승호는 첫해부터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등판해 139.2이닝 10승 12패 9세이브, 2년차 풀타임 선발 시즌인 2001년에는 마무리 알바까지 해가며(2세이브) 220.2이닝을 던지면서 혹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2001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영입한 에르난데스가 34경기에서 무려 233과 2/3이닝을 던졌는데, 이닝 자체도 2000년대 들어와서 다니엘 리오스의 07시즌 기록(234.2이닝)에 이은 2위의 기록이지만 이 선수의 경우 컨트롤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파이어볼러였기 때문에 경기당 평균투구수가 120개를 상회했다.[27][28] 제구력이 극도로 나쁜 파이어볼러를 233이닝이나 던지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결국 이승호는 이후 두번다시 데뷔 당시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채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인저리 프론(유리몸)이 되었고 에르난데스는 바로 다음 시즌인 2002년 초에 어깨부상으로 퇴출되고 말았다.[29]

2002년에는 이승호가 힘들어 하자 고졸 신인투수인 채병용을 혹사의 제물로 삼아 예의 그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시즌내내 왔다갔다하는 투수기용을 시전, 고졸투수가 무려 141이닝동안 7승 9패 11세이브, 완투 2회라는 기록을 작성하게 만들었다. 채병용은 이후 2004년을 통째로 쉬면서 재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기교파에 가깝게 변신하면서 데뷔 초의 묵직한 구위는 보여주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야구에서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을 넘기거나 거의 육박하는 경우는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강병철의 경우 단순히 마무리투수에게 이닝을 많이 맡기는 차원이 아니라 시즌중에 보직을 계속 바꾸면서 선발에게 마무리 알바를 시키거나 마무리를 선발로 돌리는 식의 무차별한 기용을 자주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90년대 초에 김성근이 삼성에서 김성길을 써먹었던 방식이나 김인식이 쌍방울에서 조규제를 써먹었던 방식을 강병철은 무려 2000년대 초까지 고수했다. 역시 투수 깎던 노인... 논외로 김성근은 나중에 자신의 방식으로 2000년대 후반 SK 왕조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것 때문에 여전히 그 방식을 못 고치고 있다.

자신과 스타일이 안맞는 선수를 홀대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김응용이나 김성근처럼 선수를 대놓고 구타했다거나[30] 눈밖에 난 선수를 노골적으로 팽해버린 경우는 없다.[31] 정수근[32]이나 손민한[33]과의 마찰은 선수 본인의 성격 탓이 컸고 그럼에도 선수 자체를 홀대한 적은 없었다. 정수근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FA옵션까지 챙겨먹었고 한화 시절부터 죽어라 속을 썩인 노장진[34]을 끝까지 안고가려 하는 등 뒤끝이 심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대신 혹사를 시켰지

4.3. 인재 기용과 타자 코칭

자타공인 강병철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를 보는 안목과 타자코칭이다. 강병철의 양아들로 대표되는 그의 선수 기용은 성적때문에 까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1984년 롯데의 첫번째 우승은 임호균을 기용해 간간히 최동원을 쉬게 하고 한문연, 조성옥 등 차세대 타자 자원들을 성장시키며 이뤄낸 결과였고 두번째 우승 전 해인 1991년에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 1989~1992년 사이에 입단한 젊은 선수들을(박정태, 김민재, 김선일, 전준호, 이종운, 박계원, 공필성, 김태형, 김상현, 강성우) 발굴, 성장시켜 부임 첫해 정규리그 4위를 기록했다.

강병철의 능력이 가장 빛을 냈던 1992년에는 특유의 Hit & Run 야구를 토대로 전준호, 이종운, 공필성, 김응국, 김민호, 박정태, 김선일, 박계원 등이 활약하며 장타력 부족에도 빙그레와 해태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하게 된다. 당시 신인이던 전준호와 중고신인인 이종운을 중용해 기동력을 극대화하고[35] 신인 박계원을 유격수로 기용하고 "움직이는 화약고"라고 불리울 정도의 불안한 수비를 보이던 공필성을 3루로 보내 내야를 안정시켰다.[36] 여기에 노련한 김선일과 신인 강성우의 콤비를 이룬 포수진은 8개 구단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했다.[37]

투수 쪽에서도 리빌딩에 성공했는데, 전해 14승을 올린 박동희가 부진했지만(1992년 8승), 윤형배(8승), 김상현(7승 4세이브), 염종석(17승 6세이브) 등이 가세하며 에이스 윤학길(17승)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선동열이 건초염으로 빠진 해태를 플레이오프에서 관광보내고[38] 리그 최강의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송진우, 정민철, 한용덕이라는 극강 투수진을 보유한 빙그레를 4승 1패로 초살시키며 차지한 것이 두번째 우승이었다.

한화 감독으로 재임하던 1996년에는 일명 신인 4인방(홍원기, 임수민, 송지만, 이영우)을 전폭적으로 기용하며 한화 우승의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투수 쪽 리빌딩 성과는 거의 없었고 이 때문에 1~3선발 외에 내리막 탄 4선발, 제대로 잡히지 않은 5선발[39]과 중무리 구대성 구조인, 하라는 리빌딩은 안하고 일부 투수들의 혹사에만 최적화된 기형적인 투수진 구조를 만들어버렸다. 근데 이걸로 우승. 흠좀무...[40] 게다가 이후 입단한 신경현을 잘못된 훈련방식으로 부상당하게 만들었는데, 데뷔 당시까지 야구천재라 불리던 신경현은 이 이후로 하락세를 타며 체고의 그저그런 포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일들로 한화 팬덤에서는 두고두고 까인다.

다만 그렇다고 투수 쪽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삼성에서 건너온 빼빼마른 불펜 투수였던 이상목을 부임 첫 해부터 선발진에 넣고 집중 관리하여 주축 투수로 키워냈다. 이상목은 이후 10년 간 한화에서 활약하며, 선발 투수로 1999년 우승에 공헌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선발 투수를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만약 강병철이 이상목을 키우지 않았다면 한화의 우승은 없었을 것이다.

신생팀 SK시절에는 타자 전향한 지 얼마안된 이호준을 2000 시즌 중 성영재와 트레이드해 영입, 팀의 장타력을 크게 향상시키고[41] 채종범, 이진영을 발굴해 키워 냈으며 지명도 받지 못해 오갈 데 없는 신세였던 조동화, 이대수를 테스트해 신고선수로 받아들이고 투수로 지명한 김강민을 외야수로 전향시켰다. 삼성과 트레이드를 단행했을 때 틸슨 브리또오상민을 주고 정경배, 김동수, 김상진, 이용훈, 김태한을 영입했다.[42]

이렇게 영입된 선수들 상당수가 경험을 더 쌓아 조범현 시절 준우승, 김성근의 SK왕조 초창기[43]를 이끈 주역이 되었으니 그 공로는 결코 적지않다.

2006~2007년에도 팀 성적은 나빴지만 리빌딩은 충실히 진행했다. 정말로 친척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던[44] 강민호는 2000년대 후반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로 등극했고 김주찬은 수비와 작전수행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정말 죽도록 욕을 먹어가면서도 끝까지 라인업에서 빼지않고 밀어준 결과 결국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성장해 공격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인구2008년 후반기 정수근의 파행으로 위기에 빠진 롯데 외야진에 구원투수 역할을 했고 꾸준히 투구폼을 고정시키고 꾸준히 선발 수업을 시킨 장원준[45]신명철을 내주며 콕집어 트레이드해온 강영식은 각각 선발과 불펜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자리잡았다. 무명이었던 정보명을 발굴해 레귤러로 키워내었고 이우민의 경우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3할타율을 강병철 감독 재임기간에 달성하기도 했다.

이들 모두 제리 로이스터가 부임한 2008 시즌 롯데 돌풍, 나아가 양승호 체제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가 1위에 도전하는 핵심 전력이 되었다. 어째 남 좋은 일만 계속 시켜주는 것 같지만 기분탓이다.

4.4. 결론

2000년대 이후 야구의 발전에 뒤따르지 못한 구식 야구를 구사한 탓에 승률은 좋지 못하지만, 대대로 타자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여 그의 손을 거친 타자들은 대부분 크게 성장했다. 단적인 예로 1990년대 중반 한화 재임 당시에 비판받으면서도 백재호, 임수민, 이영우, 송지만 등을 중용했고 2000년 신생팀 SK에서도 많은 비난을 들으면서도 이호준, 이진영, 채종범을 주축으로한 강타선을 구축했으며, 2006년 롯데에 부임해서 이대호를 1루로 옮겨 그의 타력을 극대화한 것을 시작으로 이승화, 강민호, 김주찬, 정보명을 중용하면서 경험을 쌓게 해준 것을 보면 분명히 리빌딩과 타격 코칭 능력만큼은 정상급인 감독이다.

특히 이대호의 경우 체중을 줄이기 위해 영남 알프스 전체에서도 가장 등반 난이도가 높은 통도사~백운암 코스를 매일 왕복시켰다고 한다. 해병대 조교 출신 프런트 직원까지 붙여서. 이대호는 그 덕에 엄청난 감량을 할 수 있었고 장타력 있고 3할을 칠 잠재력이 있는 타자에서 타격 3관왕이 될 수 있었다. 그 해 개막부터 스윙 스피드가 달라졌으니... 이대호가 여전히 수준 높은 리그에 진출할 때 마다 감량을 엄청나게 하는 것도 이 때의 경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저 살 쪘다고 사직구장 관중석 계단 오리걸음 시켜서 이대호 무릎을 한 번 작살냈던 어떤 개X끼랑은 다르게 강병철은 이대호 감량에 대해서 "이대호가 가진 유연성이라는 장점을 키우기 위해"라는 꽤 합당한 명분을 내세웠고, 결과물도 앞서 언급한 한층 업그레이드 된 스윙 스피드를 비롯해서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팀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의 손을 거쳐간 팀들은 리빌딩에 성공하여 다크호스로 부상한 적이 많다. 1998년 그를 경질했지만 그 다음 해에서 한화 이글스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2년까지 그가 감독 생활을 했던 SK 와이번스는 다음 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해냈고 마찬가지로 2007년까지 감독 생활을 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다음 해 비밀번호를 끊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다만 시대의 변화에 뒤쳐진 점이나, 타자쪽과는 반대로 투수 운용에 있어서는 아주 극악했다는 것이 최대의 단점. 그래도 전성기에는 단기전에서 승리의 활로를 찾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승부사 기질도 다분했다. 실제로 1992년 우승 당시 당대의 명장들인 김성근, 김영덕, 김응용 감독을 모두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야수 육성과 선수 보는 안목이 좋아 리빌딩에 능하며 장기적인 플랜을 잘 짜며 단기전 승부사 기질도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특정 투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세대적인 투수 운용을 한 감독이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서 2번밖에 없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전부 그의 지도로 이루었다는 점만으로도 대한민국 야구사, 최소한 롯데 역사에 기억될 지도자임에는 분명하다.

5. 그 후

2017년 10월 8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리는 2017년 KBO 준플레이오프 1차전의 시구자로 선정되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롯데의 2번 우승을 모두 함께한 유일한 감독이기 때문. 더구나 롯데의 당해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가 "마! 함 해보입시다!"[46]인 데서 1차전 시구자로서의 의미부여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1차전의 결과는 롯데의 패배로 나왔다.

2018년 올스타전에서도 시구를 하였다. 시타는 이승엽

6. 여담

  • 해병대 선수 시절 군복무를 40개월이나 한 희귀한 기록(?)을 가지기도 했다.
요즘 육군의 의무 복무기간은 24개월, 딱 2년이다. 하지만 강병철 전 SK 감독은 해병대에 입대, 햇수로 무려 4년을 복무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크라운맥주에서 강타자로 활약하던 강 감독은 66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당시 복무기간은 24개월 정도. 하지만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바람에 군복무 기간도 36개월로 늘어났다. 68년 억지로 36개월 다 채웠지만 제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 중요한 대회가 남아 있다는 황당한(?) 이유에서였다. 강 감독은 “또래들에 비해 상당히 군생활을 오래 했다. 나 말고도 제대를 연기당한 선수들이 몇몇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강 감독은 68년 시즌을 다 뛰고 69년이 돼서야 군복을 벗을 수 있었다. 출처
  • 롯데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이끈 감독은 강병철이었고 우승을 이끈 선수가 둘 다 신인에 안경잡이 에이스였기 때문에 롯데가 우승하기 위해선 강병철 감독(그것도 취임 2년째에[47]), 혹사, 안경 우완 에이스 삼신기가 모여야 한다는 우스개도 있다. 덤으로 상대팀 감독은 김영덕 2015시즌 롯데가 드디어 안경 쓴 우완 에이스를 데려와서 꼴갤에선 강병철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 카더라...근데 이 안경잡이는 부산이 아닌 대구 출신이라는 게 함정

7.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3 롯데 자이언츠 50 21 29 0 6위[48] -
1984 100 50 48 2 4위[49] 우승
1985 110 59 51 0 2위 [50]
1986 108 50 52 6 5위[51] -
야인시절[52]
1991 롯데 자이언츠 126 61 62 3 4위 -
1992 126 71 55 0 3위 우승
1993 126 62 63 1 6위 -
통산 746 374 360 12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94 한화 이글스 126 65 59 2 3위 -
1995 126 55 71 0 6위 -
1996 126 70 55 1 4위 -
1997 126 51 73 2 7위 -
1998 64 29 33 2 7위[53] -
통산 568 254 298 16 ­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0 SK 와이번스 133 44 86 3 4위[54] -
2001 133 60 71 2 7위 -
2002 133 61 69 3 6위 -
통산 399 165 226 8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6 롯데 자이언츠 126 50 73 3 7위 -
2007 126 55 68 3 7위 -
통산 252 105 141 6 ­
총계 1965 914 1018 33 ­


[1] 김해국제공항 인근의 평강마을 출신(지번 주소상으로는 대저1동이다.)으로 출생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김해군 소속이었다.[2] 전북 완주군의 우석대가 아니라 고려대에 합병된 우석대이다. 해당 문서 참조.[3] 고등학교 시절 직속 선배이다.[4] 사실 롯데의 성장 기반이 제과회사 였다는 점에서 푼돈을 과자값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을 것이다.[5] 한화는 전통적으로 천안북일고가 지배하는 구단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코치진, 선수단 도처에 천안북일고 출신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매년 신인지명때면 실력은 무시하고 일단 천안북일고를 배려하는데 탓에 한화팬들은 자기네 2군보다 천안북일고를 더 중시한다며 구단을 깐다. 다만 이 북일파 VS 비북일파의 실체 자체를 의문시하는 시각도 있으니 해석은 알아서.[6] 이 시기에 한용덕과의 불화를 빚기도 했다.[7] 2001년에 김성근 감독도 신윤호를 굴려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한적이 있었다. 참고로 구원투수 20승(김현욱)도 김성근의 작품이다.[8] 김영덕 감독 시절 승률 .572, 강병철 감독 시절 .447[9] 그래도 한화 이글스로 이름이 바뀌고 난 후 단일시즌 7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은 1996년의 강병철(70승, 승률 .560)과 1999년의 이희수(72승, 승률 .554) 둘 뿐이고 승률은 팀명 변경 후 최고였다. 물론 또 투수를 깎아 만들었지만...[10] 이쪽은 부임 전 이광환과 유승안을 거치면서 팀이 전반적으로 나사가 빠져있던 상태였다.[11] 안영명, 윤규진, 정병희 등이 이 시기에 굴려졌다.[12] 팀의 병폐(病弊)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13] 부산상고 출신으로 롯데를 휘어잡고 있는 부산고, 경남고, 용마고 학벌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언론플레이나 줄타기에 목숨건 보신주의자도 아니다.[14] 07시즌에 덕아웃에 걸린 칠판에 "강감독, 야구 대범하게 합시다"라고 정수근이 적어놓은 일이 있으며 손민한은 팬미팅에 나가서 감독 욕을 하고 돌아다녔다. 참고로 정수근은 강병철을 계속 욕하다가 은사인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에게 지적받은 적도 있다.[15] 당시 히어로즈의 2군은 현대 시절부터 쓰던 원당야구장에 세들어 살았다.[16] 2014 시즌 종료 후를 기준으로 1위는 김응용 감독의 1,567승, 2위가 김성근 감독의 1,234승, 3위가 김인식감독의 980승, 4위가 김재박감독의 936승, 그리고 강병철 감독이 914승으로 5위다.[17] 특히 한화 이글스의 경우 .447로 대충 봐도 영 좋지 않은데 결정적으로 이전의 승률과(.530, 참고로 창단 첫해 배성서 시절의 승률이 .290이다.) 김영덕 감독 시절 비교하면(.572) 더욱 처참해진다. 특히 저때의 이글스는 해태만 아니었으면 리그를 지배할 잠재력이 충분했었다.(1992년 이전까지 준우승 3번이 전부 해태 상대) 특히 1992년에는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는 등 드디어 우리도 우승한다는 등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하필 그때 김영덕 감독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간 입장으로서 찬물을 끼얹은 것도 모자라 정작 후임감독으로 부임해서는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이글스 팬들에게 불쾌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2006~7년에 소소하게 돌려받긴 했다.[18] 1984년 삼성은 최동원을 제외한 나머지 롯데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앞섰으며 1992년 빙그레는 정규시즌 우승에 롯데를 14승 4패로 호구잡았다. 거기에 정규시즌 2위였던 해태의 포스도 만만치 않았고,[19] 유이한 예외라면 최초로 투수 분업 시스템을 정착시킨 1994년의 LG 이광환 감독, 정민태와 정명원 등을 재활시킨 태평양의 정동진 감독 정도 뿐이다. 심지어 이광환도 95년 후반에 갑자기 돌아서 이상훈을 4일마다 등판시킨 전적이 있다.[20] 사람들이 곧잘 잊어먹는데 1984~1985년의 삼성도 김일융 아니면 김시진이 다 해먹었다. 물론 삼성은 김일융, 김시진 이 두명의 에이스 외에도 뒤를 받쳐줄 투수가 많아 최동원 혼자 분투하는 롯데보다 사정이 훨씬 나았다.[21] 84년 한국시리즈 이전에도 최동원은 한국실업야구 시절 육군경리단과의 한국시리즈 6경기에 다 나오는 등 정말로 말도 안 되는 혹사를 당했었다. 물론, 이때도 팀은 롯데...단, 감독은 강병철이 아니었다.[22] 염종석은 초등학교때 팔꿈치 부상, 고교시절의 구타 등으로 허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투구 로케이션이 아닌 다소 변칙적인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내구성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당시 선동열이 염종석의 투구를 보고 "3년도 못갈 폼"이라고 혹평한 적도 있을 정도.실제로도 3년을 못갔지...[23] 강병철 감독은 92년 우승후 구단에게 93년은 염종석에게 휴식을 주고 수술과 재활을 시켜줄 것을 분명히 주장하였으나 롯데구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24] 이 방위병 제도는 양날의 검이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경기 출장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많은 선수들이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제대로 된 훈련과 관리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기에 나가게 만들면서 혹사가 만연했던 당시 염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선수들이 부상이라는 짐을 지게 만들었다. 염종석 본인은 스포츠 2.0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망친 주범으로 이 방위병 제도를 꼽았다.[25] 1년에 거의 128~129이닝씩 던졌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혹사가 확실하다.[26] 참고로 2000년대 이후 한 시즌 200이닝 투구를 시킨 감독은 강병철, 김응용, 김인식, 이광환, 김성한, 김경문, 김기태, 이종운인데 하나같이 소속팀과 끝이 영 좋지 않았거나 말년 커리어가 영 좋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돌'이나 '킬' 같은 접두어 별명이 있다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김기태는 특이하게 '런'이라는 접두어 별명이 있다. 아니 그런데 KBO에서 소속팀과 끝도 좋고 말년 커리어도 좋은 감독이 얼마나 되지[27] 에르난데스의 2001시즌 투구수 4144개는 프로야구 역대 4위 기록이다. 에르난데스 외에 한국프로야구에서 한 시즌 4000구 이상 기록은 모두 4번 나왔는데 모두 1985년 이전에 나온 기록이다. 그리고 에르난데스의 기록이 나온 해는 2001년. 게다가 저기 나온 4000구 이상 던진 사례들은 적당히 구원투수 알바도 하며 기록한거지만, 에르난데스는 순수 선발경기만으로 기록한거다.[28] 2001년 기록한 134볼넷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한시즌 최다볼넷 기록으로 남아 있다.[29] 정확히는 롯데 선수인 메기ᆞ조경환을 에르난데스ᆞ박남섭ᆞ윤재국과 바꾼 것이다.[30] 이 두 감독은 2000년대 초까지 구타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성근의 경우 이진영이 맞은 이야기를 방송에서 대놓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니시오카 츠요시도 맞았다.[31] 김응용 눈밖에 나서 팽당한 선수야 위키 김응용 항목만 뒤져도 여러명이다. 일례로 이호준은 김응용 눈밖에나 인생이 꼬일뻔 하다 강병철에게 구제받았다. 김성근은 간염을 앓고 있는 한대화를 불성실하다며 선수 생활 내내 박대했다.[32] 당시 해설인 이순철도 방송에서 대놓고 깠고 이에 롯데팬이 좋아할 정도로 롯데시절 야구계 전반에서 불성실한 선수로 낙인찍힌 상황이었다. 더욱이 덕아웃 화이트 보드에다가 "강감독. 우리 야구 대범하게 합시다."라고 적은 적이 있지만 강병철 감독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대인배 하지만, 강병철을 대인배라고 보기만도 어려운 것이, 2019년 정수근이 박명환의 개인방송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강병철도 휴게소에서 정수근을 두고 가거나 2006 시즌을 앞둔 전지훈련 중에 노장진을 찾아오라고 요구하는 등 꼬장을 부렸다고 한다. 정수근은 강병철의 구시대적 야구관을 깠다.[33] 07시즌 정치놀음한 바로 그 선수로 꼽힌다.[34] 노장진은 김영덕 시기에 입단했지만, 강병철 시기에 군 입대를 마치고 1997년에 복귀했다만, 1998시즌중 강 감독의 해임 때 까지 여전히 강병철 감독의 속을 썩였다. 그리고 강 감독의 임기가 시작되던 2006년 개막전에서부터 무단이탈을 저질렀으니...[35] 이종운은 뱃을 짧게 쥐는 타법으로 3루타 14개를 기록하며 3루타의 사나이로 등극했고 베테랑이 된 조성옥한영준 등은 백업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필성의 3루수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화약고"라는 별명은 선수시절 내내 공필성을 따라다닐 정도로 수비능력은 좋지 않았다. 그나마 3루쪽 강습타구를 특유의 근성으로 몸으로 막아내는 수비를 하였기에 3루수로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현승 이전의 3루수 자원이 기껏해야 한영준 밖에 없었던 점도 공필성이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37] 롯데가 우승할때는 언제나 안정된 수비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38] 이강철이 나름 탈삼진 1위로 잘했다만 그 선동열이 없었던지라...[39] 신재웅, 노장진 등이 기용되었는데 노장진은 태업을 했고 신재웅은 별 볼일 없는 투수였다. 강병철이 사퇴하고 이 둘이 치워지면서 5선발은 우승 당시에도 제대로 잡히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40] 이때 1~3선발은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이라는 정말 확실한 투수들로 이루어졌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 당시 4선발 한용덕은 이미 내리막이었지 이 셋의 말로도 좋지 못한데 정민철은 일본 가서 혹사 후유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송진우는 기교파 투수로 간신히 버텨나갔으며 이상목은 FA 먹튀로 낙인찍히고 만다.[41] FA먹튀 이미지에 가려있어서 문제지 스탯상 최정 이전 SK 역대 최고 장타자는 이호준이다.[42] 김상진은 전천후로 투수진에서 2시즌 간 활약했고 정경배정근우가 입단하기 전까지 SK의 2루를 지키며 2003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일익을 담당했다.[43] 김성근 감독의 전임자인 조범현은 정근우, 최정, 김강민, 조동화, 박재상 등 김성근 왕조의 주축 야수들에게 1군 경험을 부여해 향후 치고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공로가 있다. 반면 투수진에 관해서는 강병철 감독보다 남겨준게 없다. 혹사도 혹사고 선수 관리에도 소홀했다. 투수들이 어떠게 되었는지 보면 김희걸은 박재홍과 트레이드로 떠나고 채병용, 이승호의 몸상태는 더욱 안좋아졌으며 정우람은 김성근 첫해 안식년을 맞이했고 송은범은 놀아 버리고 제춘모는 공익갔다와서 사생활 관리의 실패로 망가졌으며 신승현은 2005년에 포텐이 터졌지만, 군미필+부상으로 김성근은 써먹지도 못했다. 그리고 윤길현, 엄정욱 등도 부상의 늪에서 해맸다.(엄정욱은 자기 관리가 소홀했던 점이 컸지만) FA 김민재 보상선수로 신체 건장한 양훈 대신 킬인식의 혹사로 맛이간 정병희를 선택하거나 신인지명에서 류현진 거르고 이재원과 김성훈을 선택한 것은 덤. (물론 이재원이 현재 포텐이 터졌지만 김성훈은 부상과 구단과의 불화가 겹치며 입단 1년 만에 방출되었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투수FA를 요구한 김성근에게 구단은 당시 해외리그에서 방황하던,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최향남을 제시했다.[44] 성이 같아서 농담삼아 강병철의 양아들이 아니라 친아들이라는 소리도 나왔다.[45] 양상문 시절에는 특별한 혹사없이 선발수업을 받긴 했는데 투구폼을 못 잡아줘서 여러번 바뀌었다.[46] 바로 상단에 언급된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에 대한 최동원의 대답이었다.[47] 첫 롯데 감독 시절인 1983년은 박영길 전 감독의 대행 자격이었다. 두번째 우승하기 전 해인 1991년은 비록 승률은 5할 밑이었지만 롯데는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다.[48] 전기 4위, 후기 6위[49] 전후기 통합 순위, 후기 1위로 한국시리즈 진출.[50] 1985년에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51] 전기 3위, 후기 5위[52] 정확히 말하면 1988년 ~ 1990년에 빙그레 이글스 코치를 하기전까지 야인생활을 했었다.[53] 시즌 도중 경질되었으며 남은 경기는 이희수가 감독대행으로 치뤘다.[54] 매직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