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2-15 15:38:49

박영길

박영길의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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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현재
1대
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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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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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성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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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어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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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도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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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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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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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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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김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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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우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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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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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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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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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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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제리 로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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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양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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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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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이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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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조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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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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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공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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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현재
1대
서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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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이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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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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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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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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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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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우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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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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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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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김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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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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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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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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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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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2007년
삼미 1대
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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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2대
청보 1대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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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 2대
허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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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 3대
태평양 1대

강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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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임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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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2대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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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3대
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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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4대
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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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대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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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2대
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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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82501002031700175051.jpg
이름 박영길(朴永吉)
생년월일 1941년 11월 5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출신학교 경남고 - 동아대
포지션 외야수(중견수, 우익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남선전기
육군
한국전력
지도자 경력 롯데 자이언츠 감독(1982 ~ 1983)
삼성 라이온즈 감독(1987 ~ 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1991)

1. 소개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트리비아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이자 한국 야구 최고 타격이론가.[1] 그리고 외야수 출신 감독 중 KBO 리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2]

2. 선수 시절

1960년대 한국실업야구 최고의 강타자였던 김응용에 비견되어, '좌영길 우응용'이라 불리며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응용과는 당시 국가대표 룸메이트로 십수년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현재도 서로 막말을 하며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

김응용 못지않은 슬러거였지만 정교함까지 갖춘 타자로, 이승엽 이전까지는 올드 야구 팬들에게 국내 최고의 좌타자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네 명의 타자 중 한 명이다. 나머지 3명은 故 박현식 옹(前 삼미 감독), 김응용, 김우열(前 OB-빙그레).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8게임에서 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이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실업야구 통산 타격왕 6회, 타점왕 3회, MVP 4회를 수상했으며 철저한 체력 관리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3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3. 지도자 시절

파일:external/img.sbs.co.kr/30000093328_700.jpg
최동원의 롯데 입단식에서. 당연히 오른쪽이 박영길.

은퇴 후 실업리그 롯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프로야구 출범 직전 해인 1981년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부산 야구의 대부로서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을 주도했으며, 초대 롯데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3] 1983년에 중도 사퇴하고 타격코치였던 38세의 강병철에게 지휘봉을 넘겼다.(롯데는 이듬해인 1984년 불세출의 대투수 최동원을 앞세워 우승. 지금도 깨지지않은 한국시리즈 진기록인 4승이라는 기록도 혼자 가지고 있다.) 하필 최동원이 아마시절 내내 당한 혹사 후유증으로 부진하자 최동원을 쉬게 해주던 중 성적 부진으로 사퇴했는데, 1년만 더 버텼다면 우승 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4]
최동원 투수는 20년이나 30년만에 하나 나오는 투수다. 두고 보시라고. 30년 후에 롯데에 최동원 투수가 나오겠냐고.
ㅡ1983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재직 당시.

1984년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타격에 있어서는 김응용과 더불어 국내에서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기에 때마침 삼성으로 부임한 김영덕 감독이 그를 타격코치로 영입한 것. 그러나 그의 타격이론이 맞지 않다면서 삼성 타자들이 불만이 가지면서 선수단과 갈등이 비화되어 김영덕 감독까지 심기가 불편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은 그해 팀타율 1위를 달성했다. 이후 선수들은 박영길 코치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선수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박영길은 삼성에서 감독으로 승진하게 된다.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있었던 져주기 게임 당시, 삼성의 코칭스태프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고르는 것에 대해 반대한 인물이라고 한다.[5]

타격코치 시절 계속 팀타율 1위를 달성하자 그 공을 인정받아 1987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진했다. 그 해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팀 타율 3할을 달성하며 타격부문에서는 최고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 플레이오프에서 천신만고 끝에 OB 베어스를 간신히 꺾고 올라온 해태 타이거즈에게 4연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에 그치는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6][7] 이듬해인 1988년에는 창단 3년차의 신흥 강호 빙그레 이글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어 힘 한번 못 써보고 스윕을 당했다. 빙그레는 88년 이후 90년대 전반기까지 거의 매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강호였지만 당시만 해도 신생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패배의 충격은 무척컸고 결국 해임되었다.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해설가로 일하면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1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당시 태평양은 막강한 투수진과 달리 사상 최악이라 할 만큼 형편없는 타선으로 유명했는데, 집요할 정도의 번트, 단타와 작전 위주의 스몰볼에 최적화된 김성근[8]의 타격 이론과 정반대의 빅볼 성향이었던 박영길은 번트와 컨택 위주의 타격에 길들여진 팀 타선에 체질 개선을 가하여 장타력을 키우기 위해 선수들의 타격 폼을 전면적으로 교정하려고 했다. 김성근이 7.5m로 높혀놓은 도원구장의 펜스를 5m로 내리도록 지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동기김경기를 제외하고 박영길 식의 타격 이론을 소화할 만한 선수가 태평양에는 없었고, 투수진 역시 김성근 시절의 혹사로 태평양 주력 투수 3인방이 동시에 부상과 부진을 겪고 있었다.

결국 그해 팀 성적 5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과 에이스 박정현이 김성근 시절 혹사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프런트와의 불화로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정동진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9] 성적 5위면 태평양 신화를 썼다는 김성근 감독 2년차 성적과 동일한 것이고, 5-8-8을 기록한 김용희선동열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는건 없었지만, 그해 그 짧은 인천 도원구장에서 두자릿수 홈런을 친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10] 이후에는 사실상 현역 지도자로서는 은퇴했으며, 2011년 현재 실업야구연맹 및 일본 독립리그 서울 해치의 회장직 및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를 맡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그저 그랬지만, 1987년의 삼성 타선에서 볼 수 있듯 타격 이론에서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지도자이며[11] 대한민국 야구에서 최초로 작전을 최소화하고 장타율출루율을 중요시하는 빅 볼 스타일의 야구를 지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2] 최근에도 단기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여러 팀에서 타격 지도를 했으며 2009년 시즌을 앞두고는 최희섭의 단기 인스트럭터를 맡아 최희섭이 슬러거로 부활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런데 2009 시즌 종료 후 가르친 2명의 롯데 타자 장성우오장훈의 경우에는 2010 시즌 기준 타격이 오히려 떨어지기도...
#당시 기사
오장훈은 방출 당했고 장성우는 KT로 이적 했지만,,, SNS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와중 2016 시즌 전 스프링캠프에 두산 베어스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오재일김재환을 전담마크해 가르쳤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두 선수 다 2016 시즌에 데뷔 첫 규정타석 시즌을 치뤘는데 둘 다 OPS 1을 넘겼고, 둘이 합쳐 64홈런을 쳐내면서 두산의 새로운 클린업으로 거듭났다.

4. 트리비아

  • 충무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최동원의 할아버지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최동원롯데 자이언트로 데려온 이가 바로 박영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13] 영상 10분 20초 부터
  • 오랜 시간 야구인생을 보낸 덕에 야구 다큐에 야구원로로 얼굴을 자주 비춘다. 그런데 비슷한 또래들인 김응용, 김인식 등과 달리 나이에 맞지않게 패션감각이 꽤 뛰어난 편이다.


[1] 삼성 타격코치 시절 84-86년 삼성은 사상최고의 타격을 자랑했으며 감독 재직시절인 87년에는 프로팀 최초 팀타율 3할을 찍었다.물론 그게 태평양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게 함정[2] 한 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1987년)을 했다. 나머지 외야수 출신 감독들의 성적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예를 들면 LG 팬들에게 금지어로 찍힌 이 양반이나 좌우놀이에 중독된 돌덩이라던가 아니면 맨날 입만 주구장창 털던 이런 놈이라던가...1990년에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백골퍼도 외야수로 분류할 수 있지만, 백인천은 본래 포수였고 일본프로야구 시절 포수로 데뷔해서 활약하다 외야수로 뛰는 일이 많아진 케이스. 이순철도 데뷔 당시 포지션은 내야수였다가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30년 뒤 2017년 조원우가 외야수 출신 감독으로써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단 준플레이오프에서 NC에 패함으로써 2017년 기준으로는 여전히 박영길이 외야수 출신 감독 중에서는 최고 성적.[3] 당시 롯데는 투타 균형이 안좋던 상태였다.타격이 터지면 투수들이 불을 지르고, 투수들이 기껏 잘던지면 타선이 침묵하여 지는 경기가 많았다. 83년에는 국가대표 투수 최동원, 포수 심재원이라는 거물급 스타들을 야심차게 데려왔으나, 막상 시즌에 들어가니 둘은 첫해 부진하면서 성적은 바닥을 찍었다.[4] 이처럼 선수 보호 등 선역을 한 감독들은 항상 본인은 피해 보고 뒤에 오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박영길, 정동진 이 있다.[5]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실업 롯데 감독으로 있을 당시 이미 최동원의 실업야구 한국시리즈 활약상을 소속 팀 감독으로서 직접 본 인물이다. 당시 최동원의 시리즈 성적은 시리즈 6경기에 모두 출전해 2승 1무 2패 1세이브 42와 3분의 1이닝 투구. 흠좀무. 그러나 그의 의견은 결국 묵살되었고, 결국 1984년 한국시리즈는 그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말았다.[6] 이 시리즈 1차전에서 당시 좌익수였던 장효조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1차전 패배와 시리즈 완패의 주범으로 몰렸고, 결국 1988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고 만다.[7] 이 우승이 무등야구장에서 해태(KIA 포함)가 안은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다.[8] 박영길의 삼성 전임 감독이었던 김영덕과 마찬가지로 번트 작전을 자주 구사했다[9] 원래 정동진은 미국 연수 중에 태평양 코치로 제의를 받았는데, 본인이 감독 출신임에도 박영길 밑이라면 코치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와보니 난데없이 박영길이 사퇴해서 나중에 미안했다고 한다.[10] 1992년 쌍방울의 형편없는 투수진이 140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거기에 비교적 준수했던 태평양의 투수진이 125피홈런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인천이 얼마나 타자친화적인 구장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거기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SK창단년도 195피홈런도 이 도원구장에서 나왔다 홈경기 115/원정 80으로 이거 빼도박도 못한다 한경기에 2개씩 맞은 셈[11] 김성근 감독도 타격에 관해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당시 야인으로 지내던 박영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12] 박영길 이후로는 김용희, 김인식 감독이 이쪽 계열로 꼽힌다.[13] 본인도 이 사실을 몰랐다가 최동원과 계약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