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원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84 | 1990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2번 | ||||
차동열 (1982) | → | 심재원 (1983~1984) | → | 김용운 (1985~1990) |
{{{#ffff00 [[MBC 청룡|MBC 청룡]] 등번호 27번}}} | ||||
김용운 (1982~1984) | → | 심재원 (1985) | → | 서효인 (1986~1995) |
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42번 | ||||
최정상 (1984)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심재원 (1986~1991) | → | 전일수 (1992.6.30.~1995) |
심재원 沈載元 | Sim Jae-Won | |
출생 | 1953년 7월 30일 |
경상남도 부산시 서부출장소 (現 부산광역시 서구) | |
사망 | 1994년 5월 19일 (향년 40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남부민공립국민학교 (졸업) 개성중학교 (졸업) 부산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
신체 | 186cm, 80kg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3년 1차 지명 (롯데) |
소속팀 |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2) 롯데 자이언츠 (1983~1984) MBC 청룡-LG 트윈스 (1985~1991) |
지도자 | LG 트윈스 플레잉코치 (1991) LG 트윈스 2군 배터리 코치 (1992~1993)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1994) |
본관 | 청송 심씨[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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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롯데 자이언츠, MBC 청룡-LG 트윈스 소속의 포수.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프로야구 창단 전 이미 탈아마급 수비를 가졌고 큰 경기와 찬스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일찌감치 야구 대표팀에 승선해 최동원, 김시진, 선동열, 이선희 등 당대 최고의 투수들과 호흡을 맞춰왔었으며, 특히 실업 시절 1977년 야구 월드컵 때 주전포수로서 맹활약을 펼쳤다.특히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로 출전, 결승전인 일본과의 경기에서 2점차로 뒤진 8회 선두타자 안타를 치며 출루,[2] 대표팀이 약속의 8회를 이루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후 아마 야구 선수들이 대거 유입된 1983년에 풍부한 경험과 수비능력을 높이 산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하게 된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83, 84년 통틀어 138경기에 출장, 준주전 포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국가대표 시절 같이 호흡을 맞춘 최동원, 임호균을 잘 이끌며 롯데 첫 우승의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1983년 후기리그부터 지휘봉을 잡은 강병철 감독은 원체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지라 프로 입단 당시 30세였고, 나무배트에 적응하지 못한 수비형 포수 심재원 대신 자신의 동아대 시절 애제자이자 1984시즌에 무려 8할대 OPS를 기록한 한문연을 주전 포수로 육성할 생각이었다.2.3. MBC 청룡 - LG 트윈스 시절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정삼흠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결국 1985년 시즌 전, MBC 청룡의 김용운과 맞트레이드 되며 KBO 역사상 최초의 포수간 맞 트레이드의 주인공이 된다.
김용운의 이적으로 사실상 공석이 된 MBC의 주전포수 자리를 꿰차게 된다. 이 후 멘도사 라인의 타율과 득점권에 강하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두자릿수 타점도 근근히 찍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당시 청룡의 대안은 심재원 보다 타율이 더 낮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던 차동열, 서효인 정도 외에는 두각을 드러낸 포수가 없었고, 또한 타율은 낮아도 경험을 바탕으로 한 투수리드와 수비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1986년을 빼면 더 이상의 트레이드 없이 LG 트윈스가 창단하는 1990년까지 계속해서 청룡의 안방을 책임지게 되었다.[3] 김용수는 과거의 그를 회고하면서 그의 체구가 작지만 공을 잘 던질 수 있도록 유도를 잘 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0년 김동수의 입단으로 백업포수로서만 활동하게 되었고, 결국 1991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이 후 트윈스 측에서는 심재원의 포수로서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 은퇴와 동시에 코치직을 권했고 심재원이 이를 수락해 LG 트윈스의 배터리 코치로 취임하게 되었다.
3. 지도자 경력
이후 배터리코치를 맡으면서 김동수를 지도하는데 힘썼고, 김정민을 육성하기도 했다.4. 사망
그러나 현역 때부터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우는 지독한 골초였던 게 원인이 되었는지 1994 시즌 중 폐암으로 인해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이에 LG에서는 신언호를 배터리코치로 돌리고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간 박철영을 2군 배터리코치로 불러들였다.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83 | 롯데 | 68 | .225 | 41 | 4 | 0 | 3 | 13 | 19 | 3 | 12 | 4 | 22 | .286 | .297 | .583 |
1984 | 70 | .250 | 47 | 10 | 1 | 0 | 19 | 19 | 6 | 11 | 1 | 19 | .291 | .314 | .60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85 | MBC | 76 | .206 | 39 | 3 | 0 | 3 | 15 | 14 | 4 | 17 | 1 | 23 | .274 | .270 | .544 |
1986 | 48 | .235 | 23 | 7 | 0 | 0 | 12 | 9 | 1 | 5 | 1 | 14 | .276 | .306 | .582 | |
1987 | 69 | .188 | 24 | 1 | 0 | 1 | 6 | 12 | 1 | 16 | 1 | 18 | .283 | .219 | .502 | |
1988 | 73 | .202 | 33 | 0 | 0 | 2 | 9 | 13 | 2 | 14 | 3 | 22 | .276 | .239 | .516 | |
1989 | 65 | .146 | 12 | 2 | 0 | 0 | 4 | 3 | 1 | 6 | 2 | 11 | .220 | .171 | .391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90 | LG | 70 | .211 | 19 | 0 | 0 | 1 | 12 | 12 | 3 | 7 | 1 | 14 | .276 | .244 | .520 |
1991 | 12 | .250 | 2 | 0 | 0 | 0 | 0 | 1 | 0 | 0 | 0 | 0 | .250 | .250 | .500 | |
KBO 통산 (9시즌) | 551 | .213 | 240 | 27 | 1 | 10 | 90 | 102 | 21 | 88 | 14 | 143 | .276 | .265 | .541 |
6. 기타
- 국가대표 시절 심재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선동열의 제구를 잡아줬다고 한다.
- 미트를 대준 곳에 공을 던지게 한다.
2. 빗나간다.
3. 선동렬한테 공을 주워오라고 한다.
4. 빗나간 벌로 공으로 머리를 3대 때린다.
5. 반복한다(…).
선동렬은 이날 훈련이 끝나고 난 뒤 하도 많이 맞아서 야구공이 머리에 붙어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이후 본인 제구력이 좋아졌으며 컨트롤 하면 심재원이 떠오를 정도라며 심재원을 자신의 컨트롤 스승으로 평가했다.[4]
- 역시 국가대표 시절 이야기. 선동열이 심재원과 방을 같이 쓰게 되었는데 담배를 피고 싶은 나머지 심재원이 없는 사이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다 심재원에게 걸렸다. 선배에게 들킨 선동렬이 공포에 질렸는데 심재원은 의외로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타이르며 담배 한 갑을 사오라고 시켰다. 이 후 선동열이 담배를 사오자 손수 담배를 입에 물려주고는 불까지 피워줬다고 한다. 문제는 담배 한 갑을 모두 선동렬의 입에 물려줬다. 이날 이 후 선동렬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선배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선배에 대한 예절교육, 나쁘게 말하면 후배에 대한 횡포. 20개피를 동시에 피워 물면 급성 니코틴 중독이 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저 당시 담배의 타르나 니코틴은 지금의 거의 3배이상 수준이었다.
- 1977년 니카라과 야구 슈퍼 월드컵 출전 당시 더운 날씨 때문에 호텔 방 창문을 열어놓고 잤다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음에도 근성으로 선발 출장해 9이닝 내내 포수마스크를 쓴 일도 있었다.
- MBC 청룡과 LG 트윈스에서 심재원과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던 김용수는 스톡킹에 출연했을 때 LG 트윈스 역대 베스트 멤버를 꼽으면서 김동수와 함께 심재원을 포수로 뽑았다. 덩치는 왜소해도[5] 투수가 던질 각을 잘 만들어 주던 선수라고 회고했다.
7. 관련 문서
[1] 청송 심씨 25세손 '載'자 항렬이다.[2] 이후 대타 김정수의 1타점 2루타, 조성옥의 희생번트, 김재박의 그 유명한 동점 개구리 스퀴즈번트, 이해창의 연속 1루타, 그리고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이어졌다.[3] 통산 도루저지율이 무려 0.424로 굉장히 높다.[4] 홍현우도 김성한과 수비훈련을 할때 김성한이 정면으로 오는거는 받고 빗나가는거는 안받고 다시 홍현우한테 주워와서 벌로 꿀밤맞는식으로 하였다.[5] 포수 치고는 몸이 호리호리하다는 뜻이다. 심재원은 프로필상으로는 186cm에 80kg라는 상당히 우수한 신체조건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