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9 16:58:40

김상진(1970)

김상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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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5

OB 베어스 등번호 61번
결번 김상진(1989~1998) 이경수(1999~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1번
곽채진(1997~1998) 김상진(1999~2001) 틸슨 브리또(2002~2003)
SK 와이번스 등번호 31번
브리또(2000~2001) 김상진(2002~2003) 브리또(2004)
SK 와이번스 등번호 86번
결번 김상진(2005~2016) 정수성(2017~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김성래(2011~2016) 김상진(2017~2018)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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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상진(金尙珍 / Sang-Jin Kim)
생년월일 1970년 3월 15일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학력 마산월포초 - 마산동중 - 청강고[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신고선수 입단 (OB)
1990년 2차 3라운드 지명(OB)[2]
소속팀 OB 베어스 (1989~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1)
SK 와이번스 (2002~2003)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5~2011)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2~2014)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15)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5~2016)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17)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투수코치 (2018)
1. 소개2. 선수 시절
2.1. OB 베어스 시절2.2.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2.3. SK 와이번스 시절2.4.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시절4. 이야기 거리

1. 소개

배트맨
연습생 신화의 산증인 중 한 명

한국프로야구 OB 베어스 - 삼성 라이온즈 - SK 와이번스를 거쳤던 투수이자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 현역 시절 등번호는 61번(OB) - 31번(삼성, SK) - 86번(SK 코치).

2. 선수 시절

2.1. OB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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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스의 암흑기를 지탱했던 에이스

경상남도 창원 출신[3]으로 1989년 연습생으로 OB 베어스에 입단했으며, 이듬해 OB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정식 선수가 되었다. 1991년부터 OB 베어스 선발의 한 축을 담당, 1991년 10승, 1992년 11승, 1993년 11승, 1994년 14승을 올리면서 2년 연속 꼴찌를 하며 추락했던 OB 마운드의 재건을 이끌었다. 특히 OB가 2번째 KS 우승을 차지한 1995년에는 17승(8완봉승 포함)[4] 7패 2.11의 ERA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95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5], 12이닝 17탈삼진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12이닝 17K는 5월 23일 잠실 한화전에서 달성하였다. 영상. 공교롭게도 이 기록은 2010년 5월 11일 류현진에 의해 재조명된다. 류현진한화LG와의 경기에서 정규 이닝(9) 동안 124구를 던지면서 17K를 달성했는데, 김상진은 187구를 던지고 달성했다. 기사 하단

외국인 용병 선수제가 도입되기 전의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에이스들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삼성에는 김상엽, 한화에는 정민철, 현대에는 정민태, LG에는 이상훈, 해태에는 이대진, 롯데에 주형광, 쌍방울에는 김원형이 있었다면 OB에는 단연 김상진이었다.

그러나 1991~1995년까지 매년 평균 181.8이닝을 던진 혹사[6]로 구위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해 1996년부터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으며, 예전의 묵직한 강속구를 잃어버리고 기교파에 가깝게 변신했다.

전성기 김상진은 140km/h 중반대의 강속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하는 올드스쿨 파워 피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특히 1995년의 포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서, 이 한 해의 포스만 놓고 보면 선동열이나 최동원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제구력도 준수한 편이라 피네스 피쳐로 변신한 후에도 꽤나 좋은 성적을 올렸다. 두산의 구단 역사를 놓고 보면 박철순 이후 최고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7]

2.2.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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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삼성 라이온즈 시절. 이후 15년만에 코치로 되돌아왔다.

결국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6억 5,000만 원에 현금 트레이드됐다.[8] 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그럭저럭 활약했다.

이에 힘입어 2000년이 끝나고 3년 8억 5천의 FA계약을 맺는다. 다만 성적을 보면 하락세가 보이는데, 1999년은 4점대 방어율을 찍었지만 타고투저니까 어느 정도 보정이 되지만 2000년은 소화이닝과 경기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12승에 3점대 방어율, 나이가 30대 초반으로 아직은 젊었기에 반등의 여지가 보였고, 전년도 외부영입 먹튀인 김동수와 이강철보다 5천만원을 더 줬다.[9]

노쇠화 및 부상이 겹치며 2001년에는 7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 성적이 대폭 하락하였다.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혹사에 따른 후유증이 하락세의 큰 이유였다.

한편,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혔던 탓인지 김상진 외에도 이 사건에 관련된 OB 베어스 주축 선수들이 같은 시기 다른 팀으로 떠나야 했다[10].


2.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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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었던 SK 와이번스 시절

결국 2001 시즌 후 SK - 삼성 간의 2:6 대형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브리또, 오상민을 상대로 김동수, 김기태, 김태한, 이용훈, 정경배와 함께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고[11], 그럭저럭 이닝을 먹어주며 4~5선발로 뛰었지만 전성기에 비해서 못 미치는 활약이었다. 결국 2003 시즌 후 FA계약이 끝나자 SK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했다.

2.4.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OB 1군 기록 없음
1990
1991 32 151⅔ 10 6 1 - 0.625 3.74 136 10 62 65 74 63 1.33
1992 33 168⅔ 11 13
(공동 3위)
1 - 0.458 3.63 131 11 95
(4위)
96 79 68 1.30
1993 33 187⅓
(5위)
11 11 0 - 0.500 3.07 156 6 63 142
(3위)
75 64 1.13
1994 34 194
(4위)
14 10 7 - 0.583 2.37
(3위)
170
(5위)
4 52 148
(2위)
64 51 1.12
1995 27 209
(2위)
17
(2위)
7 0 - 0.708
(3위)
2.11
(3위)
174
(2위)
6 52 159
(3위)
58 49 1.04
1996 22 94 5 7 3 - 0.417 3.64 81 6 44 83 48 38 1.28
1997 24 136⅓ 12 9 0 - 0.571 3.30 122 8 51 108 59 50 1.24
1998 27 141⅔ 8 8 0 - 0.500 3.81 149 13 51 97 71 60 1.3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31 179⅓ 12 7 0 - 0.632 4.67 195
(2위)
22 64 136 104
(4위)
93
(4위)
1.42
2000 22 89 12 6 0 1 0.667 3.84 91 8 37 63 43 38 1.37
2001 16 30⅔ 2 3 2 0 0.400 7.04 39 5 24 15 26 24 1.9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SK 32 116⅔ 6 5 0 2 0.545 4.71 122 21
(공동 5위)
35 95 62 61 1.29
2003 26 89⅓ 2 8 0 2 0.200 4.53 90 7 39 30 51 45 1.32
KBO 통산
(13시즌)
359 1787⅔ 122 100 14 5 0.550 3.54 1656 127 679 1237 814 704 1.2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1년 3완투 1완봉
1992년 9완투 1완봉
1993년 7완투 2완봉
1994년 9완투
(공동 3위)
2완봉
1995년 13완투
(1위)
8완봉
(1위)[12]
1996년 2완투 0완봉
1997년 2완투 1완봉
1998년 3완투 2완봉
2000년 2완투 0완봉
KBO 통산 50완투 17완봉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2004년에는 MBC ESPN에서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1년 간 활동했다.[13]

3.1.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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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자신이 은퇴했던 팀 SK 와이번스에서 투수코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성근 체제에서는 주로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허나, 이만수 체제로 넘어오면서 2군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보직 이동이 좀 있긴 했지만, 투수코치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SK 팬들도 김상진의 투수코치로서의 역량은 인정하는 편. 특히 1군 투수코치 시절 투수 교체 능력과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된 뒤에는 2군에서 서진용, 김주한, 김찬호 등을 육성해 1군으로 올리는 등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던 좋은 코치였다.

2015년부터 조웅천과 자리를 맞바꿔 오랜만에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으나, SK 팀 내 분위기가 나빠지면서 불펜코치 김원형에게 메인 투수코치 자리를 넘기고 2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이 때 김원형의 불펜코치 자리에는 김경태가 들어왔다. 이후에는 계속 2군에 있었다.

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16 시즌 종료 후 김원형과 함께 SK 와이번스를 떠났다. 김원형은 롯데행을, 김상진은 삼성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욕 엄청나게 많이 들은 김태한이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어 삼성의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이로써 삼성에는 선수 시절이었던 2001년 이후 15년만에 돌아오게 됐다.

팀 순위는 최하위권인 가운데 감독과 수석코치가 투수 혹사나 보직 파괴 등으로 욕을 먹는 것과 달리, 투수코치임에도 투수진 운용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적다. SK 시절 투수코치로서 명성이 높았고, 반대로 투수코치 시절 쌓여온 비토 여론이 상당한 김태한 수석코치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2017 시즌 후 삼성이 오치아이 에이지를 다시 영입한 가운데 2017 시즌 동안 그가 투수 운영 전권을 맡았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도 삼성에서 평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보직 변경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상대로 육성군행.

2018년 시즌 후 조용히 팀을 떠났다. 강기웅, 김재걸 등의 코치가 팀을 떠났을 때는 별도의 기사가 나온 것과 달리 김상진에 대해서는 어떤 기사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4. 이야기 거리

  • 선수 시절의 별명은 배트맨이었다. 금테 안경과 특유의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 노안이다. 선수 시절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20대 중후반에도 금테 안경을 쓰고 수염이 덥수룩했던 선수였던지라 본의 아니게 양준혁, 이종범, 이상훈 등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였던 편이었다. 은퇴 후 2017년 현재도 같은 팀의 감독인 김한수보다 한 살 많은데 비해 얼굴은 서로 상당히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 OB 베어스에서 전성기를 보낼 때는 LG이상훈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양 팀의 에이스 맞대결이 있었을 때 잠실에서 열리는 경기의 입장권을 구하는 건 엄청나게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전적은 이상훈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1995년에 이상훈이 20승을 기록했을 때 김상진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이 3경기 모두 이겼다. 이때 김상진은 이상훈과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의욕이 앞서 경기를 많이 그르쳤다고 한다.
  • 트레이드마크인, 금테 안경과 특유의 턱수염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이상훈의 긴 머리가 부러웠는데 경기 후에 둘이 만나려고 하면 이상훈이 머리 손질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김상진이 항상 기다려야 했다고한다. 잠실 에이스 라이벌로 불렸지만 서로 친하게 지냈다.
  • 이름이 같은 해태 투수였던 김상진과도 현역 시절 맞대결했던 적이 있으나,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상진은 권명철과 함께 에이스였다. 그러나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게 대체적인 평이다. 7차전 선발이었지만, 프로 입단부터 약점인 번트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7회초에 번트 후 1루 송구 에러하는 모습을 보이는등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결국 그 경기에서 김인식 감독이 투수를 권명철로 바꾼 이유도 가끔 나오던 번트 수비 후 악송구 우려 때문이었다.
  • 2017년 기준 약 8~9년전 야구에 관심 갖기 시작한 베이징 뉴비 두산 베어스 팬들 중 이 1995년 두번째 KS 우승 때와 암흑기의 에이스였던 김상진을 기억하는 팬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SK 투수코치 시절 한때 두산전에서 경기 중 투수를 교체하러 마운드에 오를 때 두산 팬들의 야유가 쏟아진 적도 있다.[14] OB 레전드인 줄 모르고 그냥 라이벌 팀 SK 코치라서... OB 올드 팬들은 이것을 보고 한숨을 쉰다.[15]
  • 의외로 묻혀서 그렇지, 통산 100승 이상 거둔 선수다.[16] 다만 한용덕처럼 골글이나 MVP 등의 기록이 없고, 개인 타이틀도 없다. 따라서 무관의 제왕. 한용덕처럼 우승반지는 하나라도 끼고 은퇴했다는 점도 같다.
  • 아들 김웅 군이 인천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했다. 부친과 같은 우완투수로, 중학야구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1]마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2] 1989년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여 1990년 지명을 받음으로써 정식 선수가 되었다[3] 오래 전에 야구부가 없어진 청강고등학교(現 마산제일고등학교)를 나왔다.[4] 한 시즌 8완봉승은 1986년의 선동열과 타이 기록이며, 이 해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 하기룡, 이상군, 선동열, 송승준 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에서는 5명만 달성한 기록이다.[5] 이후 기록이 없다가 2009년 송승준의 3연속 완봉승을 기록해 새롭게 달성자가 나왔다.[6] 통산 기록한 50완투 가운데 41완투가 1991~1995년 5시즌에 집중되어 있다.[7] 베어스의 에이스 계보는 박철순-장호연-김상진-박명환으로 이어진다.[8] 같은 시기에 삼성은 해태에 현금 18억원과 간판 타자 양준혁을 내주면서까지 임창용을 영입하였고, 곧이어 쌍방울에 현금 20억과 양용모, 이계성을 내주고 김기태김현욱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전해에 해태에서 4억 원에 조계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에 이은 현질이었다.[9] 다만 화폐가치가 급상승하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엇비슷한 수준.[10] 예시로 권명철 - 해태, 김상호 - LG 등[11] 사실상 FA 먹튀인 김동수와 먹튀기질이 보이던 김기태, 김상진, 여기에 내야자원 중복으로 써먹을 데가 없던 정경배와 재활하던 이용훈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삼성이 받아온 선수는 좋은 모습을 보이던 브리또와 그럭저럭 던지던 좌완 오상민. SK는 선수층을 보강했고, 삼성은 외국인을 보강했다고 보면 된다.[12] 선동열의 86년 8완봉과 함께 유이한 한 시즌 최다 완봉이다[13] 당시 MBC ESPN에서는 최태원을 해설가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최태원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게 되자 김상진을 영입하였다.[14] 한창 SK 와이번스두산 베어스가 서로 라이벌 구도를 달리고 있던 시절인 2007~2009년 즈음이다.[15] 비단 두산 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도 그렇다. 유독 두산이 당시 유입 10~20대 팬들 비중이 높아서 그런 것.[16] 122승으로 KBO 리그 통산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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