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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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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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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시절
이름 이광은(李光殷 / Kwang-eun Lee)
생년월일 1955년 6월 2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배재고 - 연세대
가족관계 누나 이옥자[1]
포지션 3루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1978~1979)
성무 야구단 (1979~1981)
MBC 청룡-LG 트윈스 (1982~1991)
지도자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1993~1998)
LG 트윈스 2군 감독 (1999)
LG 트윈스 감독 (2000~2001)
연세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2004~2005)
연세대학교 감독 (2006~2010)
배재고등학교 감독 (2010~2012)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0
1984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용희 (롯데 자이언츠) 이광은(MBC 청룡)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1985년~1987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이광은(MBC 청룡)
박종훈(OB 베어스)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이광은(MBC 청룡)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이광은(MBC 청룡)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1986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이광은(MBC 청룡)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1987년 한국프로야구 득점왕[2]
김재박(MBC 청룡) 이광은(MBC 청룡)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LG 트윈스 등번호 33번
프로야구 출범 이광은 (1982-1996) 임선동 (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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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현재
1대
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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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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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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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1984 1985~1986 1987 1988~1993
이종도 이해창 김재박 이광은 ?
1994~1997 1998 1999 2000 2001
노찬엽 김동수 송유석 김선진 양준혁
2002 2003 2004 2005 2006
서용빈
유지현(서용빈의 군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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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아마추어 선수 시절3. 프로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
4.1. LG 코치 시절4.2. LG 감독 시절
4.2.1. 평가
4.3.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4.4. 비리4.5. 근황4.6.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현역 시절에는 MBC 청룡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현재는 대한민국범죄자. 양승호, 정진호, 천보성 등과 더불어 입시비리의 대표주자다.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배재고 재학 시절인 1973년 청룡기에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어떻게? 혹사로(...)

그 해 청룡기 대회에서 팀 동료였던 하기룡이 부정선수 판정을 받자[3] 투수가 없어진 배재고가 3루수였던 그를 투수로 출전시키면서[4]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팀은 중도 탈락하지만, 5일 동안 매일 나와서 혼자 59이닝을 던진 것이다. 그간 던진 투구가 223명의 타자를 상대로 총 697개. 그럼에도 32안타를 맞고단 7점을 내주는 호투를 하였다. 덕분에 그는 이 대회 감투상을 차지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별명은 '온달'이다. 순한 외모인데도 독한 구석이 있다고 붙여졌다고.

그 뒤, 연세대학교에서 주전 3루수로 이름을 알렸고, 졸업 무렵에는 후배인 양세종에게 3루수를 물려주고 외야수로 출전한 뒤 1978년에 포항제철 야구단이 창단하자 실업 무대에 데뷔하여 2년간 뛰다가 1979년에 공군에 입대하여 2년간 성무 야구단에서 활동했다.

3. 프로 선수 시절

덕분에 세상에 이름을 알리면서 군 제대 후 1982년 MBC 청룡의 창단 멤버로 지명받아 합류한다. 단, 프로 개막전부터 뛴 것은 아닌데, 당시 군 복무 중이라 시즌 중반부터 합류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www.ejanews.co.kr/2013120829037359.jpg
MBC 청룡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써 10년간 한 팀에서 맹활약한 선수였고, 3할의 타율과 잠실에서는 수준급이던 장타력[5], 나쁘지 않았던 베이스 러닝을 바탕으로 한 도루 능력과 내야수 출신으로 좋은 어깨를 바탕으로 준수한 수비까지 보여주면서 구단을 대표하는 호타준족으로 자리매김했었으며 3루수로 한 번, 외야수로 세 번의 KBO 골든글러브[6]를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MBC-LG 구단 역사상 몇 안되는 우타자 성공사례이기도 하다.[7] 1990년 LG의 첫번째이자 본인의 선수시절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에도 주전 3루수로 출장하여 활약했다.

4. 지도자 시절

4.1. LG 코치 시절

1991년에 팀의 세대교체 와중에 은퇴를 선언했다. 세대교체 와중에서 은퇴 대신에 현역 생활 연장을 선택한 선수가 김재박. 여하튼 그는 이 때 은퇴한 이후, 팀의 코치로서 계속 남게 된다. 그리고 이광환, 천보성 감독 체제 하에서 타격코치와 2군 감독을 거쳤다.

4.2. LG 감독 시절

파일:/image/144/2012/12/18/l_2012121902000581300204871_59_20121218220502.jpg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정식으로 LG 트윈스의 감독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MBC 청룡-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이다. 당시 나이가 44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는데, 단장인 최종준 씨가 많이 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최종준은 이광은의 배재고 선배다.) 뿐만 아니라 MBC-LG의 창단 멤버로서 구단 최고위층도 그를 많이 신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요약하자면 2000년대 이후 LG 감독 흑역사의 스타트를 끊은 인물. 시즌 내내 선수 기용에서 미숙함을 보였고 그나마 1990년대 강팀의 흔적이 남아있던 LG 트윈스를 이끌고 2000년에는 PO에 올랐지만, 이는 당시에 채택하던 양대리그의 덕을 많이 봤다. 단일 리그였다면 4위 정도의 성적이었다. 응? 단일리그로 해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것 같은데? 이미지와 달리 김동엽식의 스파르타식 지도로 일관하여, 팀 장악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편이라서 김용수가 항명하기도 했고[8], 서용빈은 팀을 이탈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자율야구에 길들여진 선수들의 반발을 불렀다. 오히려 자신의 후임 감독인 김성근과 스타일이 매우 비슷했다. 당시 LG는 이광환-천보성 라인의 자율야구 체제였다가 이광은 감독때부터 급격하게 선수들을 통제하는 야구로 전환되자 당시 프런트와 럭키회 등에서 이광은과 김성근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같은 이광은-김성근식 야구에 대한 반감이 적절했던 분위기.[9]

자신이 직접 뽑은 용병들도 시원찮았다. 그나마 2000년의 데니 해리거는 17승을 거두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의 공신 역할을 했으나, 무지막지한 이닝을 소화한 탓에 다음 해에 귀신같이 부상으로 8승에 그쳐 부진하고 만다. 그리고 외국인 타자들도 찰스 스미스를 데려오기 전의 선수들인 짐 테이텀브렌트 쿡슨은 부상과 부진으로 퇴출되었다. 투수 운용도 엉망진창이라서 마무리 투수들이 김용수-최향남-장문석-경헌호-큰 승호-장문석으로 무려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중간계투진의 믿을 구석이었던 송유석김기범선수협 결성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최고존엄의 지시로 쫓겨났고[10] 차명석의 과부하를 부채질했다. 그 외에도 전임 천보성 감독이 추진한 심재학의 투수 전향이 실패로 돌아가자 1999년 말 현대 유니콘스최원호를 상대로 트레이드했다.[11] 또한 양준혁과의 트레이드 과정에서 손혁을 내준 것도 실책으로 꼽힌다.[12]

그래도 양준혁의 트레이드 영입으로 타선은 매우 괜찮은 편이었다. 2001년 시즌 시작 기준 FA로 홍현우를 영입하고 테이블 세터에 유지현, 이병규, 중심타선에 김재현, 양준혁, 댄 로마이어가 버티고 있었고, 하위타선에도 서용빈, 조인성이 쏠쏠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타력만 보면 충분히 우승권을 갈 수 있었으나, 투수운용 실패와 선수단 장악 실패로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0년 PO 6차전에서는 김용수가 9회 2사까지 잡아놓은 상황에서 특별히 문제가 없었는데도 원아웃을 남겨놓고 장문석으로 교체했고,[13] 다음 타자 안경현에게 동점 홈런과 연장전에서 심정수에게 역전 홈런을 허용하여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진출을 허용하고 말았다.[14] 당시 패배는 이는 구단에서 그에 대한 신임의 악화로 이어졌고, 2000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김성근 당시 삼성 2군 감독을 영입하면서 그에 대한 의구심을 표출한다. 그리고 2001년 9승 25패라는 부진에 빠지자 김성근이 1군에 올라와 처음에는 수석코치 겸 투수 전권 위임으로, 그리고 결국 중도 해임으로 귀결되었다.

4.2.1. 평가

너무 빨리 실패한 까닭에 프로 팀에서 기회를 다시 얻지 못했다. 팀 운영에 있어서 낡은 방식을 고수하여 고참 선수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팀 장악에 한계를 보였고, 학연(배재고-연세대)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가 박힌 것도 문제였다.[15][16] 항간에는 구본무 구단주가 그에게 직접 연을 끊으라는 충고를 했다는 소문도 있으니.[17] 원체 성적도 시원찮았고, 후술할 비리로 크게 터트려 같은 입시비리 범죄자지만 하다못해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호성적이라도 있는 천보성만 못하다.

4.3.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그 후 야인으로 있다가 2004년부터 연세대 야구부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일하다가 2005년에 김충남 감독이 퇴임하자 감독으로 승진해 5년 간 지휘했다. 퇴임 후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다가 배재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4.4. 비리

연세대 감독을 지내던 2009년 당시 서울의 한 고교의 학부모로 부터 3,000만원을 받고 그의 아들을 야구특기생으로 입학시킨 혐의, 또 배재고 감독으로 재직하며 천보성 당시 한양대 감독에게 제자를 입학시켜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건낸 혐의로 2012년 12월 18일에 공개수배되었다. 양승호 전 고려대 감독과 정진호 연세대 감독 등의 입시비리를 조사하던 중 첩보를 입수해 신병을 확보하려 했으나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기사. 한 해 뒤 누나인 이옥자 KDB생명 감독도 사임하고 동생은 잠적해서 스포츠인 집안은 제대로 벌집 다 쑤셨다.

그러던 중 2013년 12월 3일에 자수했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 햇수로 따지면 지난 2월달에 집안을 압수수색했을 때부터 잠적했으니 약 9개월동안 도피 생활을 한 것이다. 도주 생활에 지쳐서 자수한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2월 6일에 구속되었다. 기사.

2014년 1월 16일,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3천만원이 구형되었다. 양승호보다 적게 해먹은 탓이었는지 추징금은 적었지만, 도주경력 탓인지 양승호보다 더 긴 구형을 받았다.
기사.

2014년 3월 23일 인천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대한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천만원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4.5. 근황

2014년 4월 4일 부친상을 당했다.

부친상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6년 7월 14일 장기기증 홍보단체인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고 한다(...)

4.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MBC 64 243 .313 76 16 3 5 36 46 17 19 .465 .363
1983 93 329 .271 89 12 4
(4위)
8 36 45 17
(5위)
32 .404 .335
1984 99 378 .288 109
(3위)
19
(4위)
3 18
(3위)
68
(2위)
53 7 31 .497 .342
1985 87 326 .279 91 11 3 6 39 38 20 28 .387 .336
1986 107 408 .304
(3위)
124
(1위)
21
(4위)
3 15
(4위)
60
(4위)
59
(5위)
20 53 .480
(3위)
.379
(3위)
1987 108 410 .298 122
(3위)
21
(4위)
2 14
(4위)
74
(2위)
66
(1위)
8 45 .461 .362
1988 67 247 .279 69 9 1 7 28 35 1 26 .409 .348
1989 87 273 .234 64 11 5
(4위)
4 47 40 12 38 .355 .32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LG 102 336 .286 96 13 2 8 44 55 11 51 .408 .375
1991 109 329 .271 89 16 0 5 41 38 6 43 .365 .354
통산 923 3279 .283 929 149 26 90 473 475 119 366 .427 .352


[1] 농구선수 출신으로 2012-13 시즌에 구리 KDB생명 위너스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2] 득점왕 부문은 1999년에 신설[3] 부산고에서 전학 온 그는 당시 선수 등록이 늦어지면서 부정선수 판정을 받았다.[4] 원래 투수도 했었으나 부산고에서 전학온 하기룡에 밀려서 투수를 포기하게 된 것이었다.[5] 3번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6] 1985년부터 3년 연속 수상[7] 사실 LG 트윈스는 전신이던 MBC 청룡 시절부터 좌타자가 많았던 것에 비해 우타자가 많이 없기로 유명했던 팀이었다. 그나마 성공했던 우타자 사례가 이광은을 비롯해 노찬엽, 조인성, 채은성 정도.[8] 이 때문인지 2000년 시즌 후 김용수는 은퇴하게 된다.[9] 물론 김성근이 2002년에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이끌고 나서 경질된 후 팀이 암흑기에 빠지고 김성근은 SK에서 만개하자 후대에 가서 안좋게 평가받았지만 당시로서는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말년에 SK 왕조 시절의 '야신' 이미지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먹으면서 재평가되고 있긴 하지만[10] 송유석은 시범경기 기간에 한화 이글스최익성과 트레이드했고, 김기범은 2군에서 썩다가 미국 이민을 선언하며 자진 은퇴했다.[11] 그 후 2000-2001 시즌에 심재학이 대폭발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깝다. 거기에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해 삼성을 우승시킨 선수가 최원호인지라 여러 모로 LG가 손해를 보게되었다.[12] 손혁은 1996-1999시즌에 기존 김태원, 정삼흠의 은퇴한 자리를 완벽하게 메운 좋은 선발 투수였다. 그런데 이 선수는 해태로 트레이드 되고서 영 좋지 못한 분위기에 반발해 1년간 야구계를 떠났고, 이로인한 부진끝에 결국 일찍 두산에서 은퇴하게된다. 어찌보면 트레이드가 한 선수의 선수생명을 망친 셈.[13] 게다가 이 장면은 김용수가 선수로서 마운드에 오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김용수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몰랐겠지만.[14] 이에 대해서는 1) 플레이오프 내내 부진했던 장문석에게 자신감을 회복할 기회를 주려 했다는 설, 2) 시즌중 김용수의 항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15] 그가 임명한 오영일, 노찬엽, 박철영 코치 등은 모두 그와 학연(배재고 or 연세대)이 있다. 그와 학연이 없고, 타격코치로 라이벌 구도였던 김용달은 팀을 떠나 현대 유니콘스로 간다.[16] LG 팬들이 이를 가는 금지어 이순철을 대학 후배라고 엘지로 데려온 사람 역시 이광은이었다.[17] 친구이자 현대 감독이였던 김재박은 "너 그러다 감독 오래 못한다." 라고 예언 충고해 줬는데, 결국 그 충고가 예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