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23:17:39

신태중

신태중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팀 창단 신태중
(1982~1983)
조도연
(1984~1988)
{{{#b21528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36번}}}
결번 신태중
(1984)
홍성산
(1986~1987)
{{{#ffffff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34번}}}
장명부
(1983~1984)
신태중
(1985~1986)
유남호
(1987)
{{{#ffffff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18번}}}
이광근
(1986)
신태중
(1987)
이동수
(1988)
}}} ||
파일:청보 신태중.png
신태중
申泰中 | Shin Tae-Joong
출생 1955년 6월 27일 ([age(1955-06-27)]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전남고[1] - 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1978~1979)
해태 타이거즈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4~1987)
지도자 성남 유소년 야구단 감독 (2019)
병역 육군 경리단 (1980~1981)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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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체격이 큰 강속구 투수로서 주목을 받은 선수였지만 큰 경기에 약하고 제구력이 부족하여 '불펜 에이스'라는 별명이 붙은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전남고등학교 야구부 창설 멤버였다. 투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처음 시작할 정도로 투수 전향이 늦었다. 후발주자로 창단한 전남고 야구부에서 고군분투했지만 27회 청룡기 대회, 28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경남고에 연거푸 콜드게임 패배를 당하는 것을 막지 못할 정도로 2연벙 실력은 부족했었다. [2] 그래도 3회 봉황대기 대회에서 군산상고에 7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구속 면에서 재능을 보였던 선수였다.

고려대로 진학 후 실력이 급상승, 국가대표 출신 에이스였던 황규봉, 노상수 등과 함께 마운드를 책임지는 일원이 되었다. 1977년 한국대학야구 대표로도 선발되기도 하였다. 졸업 후 1978년 포항제철 야구단에 입단하여 마운드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고 육군 경리단 야구단을 거쳐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신태중에게 프로의 벽은 높았다. 1982년 3월 28일 부산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 개막전에서 선발투수 방수원이 아웃카운트 한 개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올라 5이닝을 던지고 3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 타이거즈 최초의 탈삼진을 잡은 투수로 기록되었으나 1회 타자일순을 포함 5이닝 8실점으로 무너졌다.[3] 그 후로 경기 출장을 거의 하지 못했고, 82시즌 9경기 출장, 26.1이닝 투구에 1승 2패 ERA 7.52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다. 선수층이 삼미 슈퍼스타즈만큼 약했던 해태에서 투수들이 모두 100이닝을 소화했던 마당에 (김성한까지 포함해서) 혼자 거의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해태 마운드에서 전력외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83시즌 단 한 경기에만 출장한 신태중에게 빛이 된건 삼미였다. 삼미는 83시즌 후 1200만원에 신태중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마운드 보강을 하고자 하였다.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버린 삼미는 박정후, 정성만 등과 함께 신태중을 장명부 홀로 지키던 마운드에 힘을 보탤 자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신태중 본인 또한 장명부가 있는 삼미에서 장명부에게 한수 배워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인천야구에 발을 딛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구력 문제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고, 시즌 전 포수의 송구에 머리를 맞는 부상을 당한 끝에 84시즌 1승 6패 1세이브 방어율 6.89로 여전히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청보 핀토스로 이름이 바뀐 85 시즌에는 본격 릴리프 투수로 전환하여 프로 입단 최초로 100이닝 넘게 소화하였고, 3승 4패 4세이브 방어율 4.77로 프로 입문 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폭투가 11개가 되는 등 제구력 문제는 끝내 고쳐지지 못했다. 특히 7월 11일 친정팀 해태와의 홈 경기에서 10회초 타석의 김일권의 머리를 맞춰 벤치클리어링이 발생, 투수와 타자 전부 퇴장 조치를 당하는 첫번째 사례로 남게 되었다.

85시즌 장명부의 지도와 보직 변경으로 깜짝 활약을 몇번 보였으나, 이후 86시즌 24.2이닝만을 소화하며 다시 하락세에 들었고, 87시즌엔 아예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며 이 해 은퇴하였다.

3. 은퇴 이후

성남의 유소년 야구단의 감독으로써 지도자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은 채 해산되었다.

4. 여담

  • 마구마구에선 뜬금없이 SF볼을 구사한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1982년 당시 선수단을 설명하며 투수는 김용남, 이상윤, 방수원, 강만식, 신태중이 5명이 전부였고 본인이 투타겸업을 뛰었다고 덧붙였다.
  • 성남시야구연합회 부회장, 경기도야구협회 경기이사로 근무했다.
  • 신태중의 주선으로 육군 경리단 - 해태 동료인 서정환은 결혼까지 이어졌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2 해태 9 26⅓ 1 2 0 7.52 30 3 28 5 7 2.20
1983 1 0 1 0 40.50 5 0 1 0 0 9.00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4 삼미 14 48⅓ 1 6 1 6.89 55 8 34 4 30 1.84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5 삼미 / 청보 34 103⅔ 3 4 4 4.77 119 17 42 7 48 1.55
1986 청보 10 24⅔ 0 1 0 4.74 35 1 10 1 7 1.82
1987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5시즌)
68 203⅔ 5 14 5 5.74 244 29 115 17 92 1.76

6. 관련 문서


[1] 전남고 야구부는 1971년에 창단하여 1978년에 해체되었다.[2] 여기서 27회 청룡기에서 결승 타점을 얻은 경남고 김용희와 고려대-포항제철에서 한솥밥을 계속 먹게 된다.[3] 투타겸업이던 김성한이 3이닝 무실점으로 오히려 투수로 등록된 선수들보다 나은 경기 내용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