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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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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남호(柳男鎬 / Nam-ho Yoo)
생년월일 1951년 9월 3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당진군
학력 혜화초-이대부속중-선린상고-연세대학교
포지션 투수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1]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 (1982~1984)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 (1985~1988)
해태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1990~2000)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1)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코치 (2002~200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3~2004)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2004)
KIA 타이거즈 감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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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김동엽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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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조창수
2대
김응용
(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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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김성한
(200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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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유남호
4대
유남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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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서정환
5대
서정환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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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조범현
(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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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선동열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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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김기태
(20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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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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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흑역사

1. 소개

프로야구 전 감독. 1951년생.

2. 선수 시절

선린상고의 에이스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다. 연세대학교를 거쳐 실업 무대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실업팀 코치를 역임했다.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야구 대회에서 주장으로 사상 첫 한국 야구의 세계 대회 우승에 한 몫했다. 이 때, 감독인 김응용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3.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4[2] KIA 타이거즈 45 26 18 1 4위 4위[3]
2005 84 34 49 1 8위[4]
통산 129 60 67 2

그 뒤 프로 출범 후,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감독인 김동엽과 충돌을 빚게 되는데, 이는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을 참조. 그 뒤 해태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과 인연을 맺고 그의 휘하에서 해태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1983년 우승을 했지만, 1985년부터 4년간 잠시 청보 핀토스 코치로 있었던 적은 있었다. 그 뒤 김성근 감독의 코치사단의 부임으로 인해 해임되고, [5] 김인식 수석코치의 쌍방울 감독 영전으로 인해 수석코치 자리가 비워지자, 1990년부터 다시 수석코치로서 해태와 함께 한다.

해태 수석코치 시절 투수 교체 임무를 맡았는데 덕아웃에서 마운드까지 걸어가는 속도가 유독 느렸다. 지금 같으면 스피드업 규정 때문에 욕을 먹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의 느린 걸음도 나름의 전략으로 해석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그는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저 놈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 되나..." 내지는 "이 놈을 바꿔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해태 수석코치 시절 선수들 생활 통제의 일선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순철과의 충돌과 이를 통해 빚어진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 뒤 김응용을 따라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부임하지만, 2003 시즌 중 그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결별하게 되었다.[6] 결국 시즌 중인 2003년 6월 최종적으로 삼성을 떠나 그의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로 이동하게 되고, 여기서 김성한 당시 감독을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2군 감독과 1군 수석코치를 오가다가 2004년 6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김성한이 해임되자 감독대행에 올라 잔여시즌을 수행했고, 나름 감독대행시절에는 준수한 성적으로 SK 와이번스를 제치고 4위에 오르며 준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그 공에 힘입어 그 해 10월에 2년 계약을 맺고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정식감독에 오르자 그의 역량은 수준 미달이었던 것이 드러났다. 참모에서 벗어나 감독 역할을 수행한 첫 시즌인 2005년, KIA는 전신인 해태를 포함해서 구단 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맛보게 되자 팬들에게 돌남호라 불리며 엄청나게 까였다. 엘롯기의 전설을 알리는 꼴찌였다.[7] 팀 역사상 최초의 꼴찌 순위속에 전년도 김성한처럼 시즌 도중 경질된다. 감독대행은 서정환이 맡았는데 이변 없이 최하위로 시즌이 끝났다. 감독 생활은 사실상 1년. 하지만 당시 신인이었던 이용규윤석민을 꾸준히 출장시키면서 키웠다는 점에선 아주 기아에 민폐만 끼친건 아닌 셈이다.

그 뒤, KBO 국가대표 전력분석관과 경기 감독관을 지내고 있다.

4. 흑역사

1999년 5월 31일 삼성전에서 장진범 심판[8]을 폭행하여 20경기 출장금지,제재금 300만원을 부과받았다.
[1] 투수 겸 코치생활을 겸함[2] 시즌 도중 경질된 김성한 감독대행[3] 준플레이오프 敗[4] 시즌 중 경질[5] 이때 김성근이 데려온 코치들은, 신용균, 박상열, 이종도 이 셋이다.[6] 약 10년뒤 한화 이글스에서 이 상황이 데쟈뷰되었다. 아이러니한건 이번 당사자는 삼성에서 나온 유남호 코치를 받아준 김성한 전 감독.[7]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꼴찌가 롯데.[8] 장진범 심판원은 참고로 80년대 초중반에 해태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