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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 | 구단주 구광모 | 대표이사 김인석 | 단장 차명석 | 감독 염경엽 | 주장 박해민 | ||
| 경기장 | 1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2군 LG 챔피언스 파크 이전 동대문야구장 · 구리 LG 챔피언스 파크 | ||
| 우승 | 1990(V1) | 1994(V2) | 2023(V3) | 2025(V4) | ||
| 역대 한국시리즈 | 1983 | 1990 | 1994 | 1997 | 1998 | 2002 | 2023 | 2025 | ||
| 정보 | 구단 역사 | 트레이드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 사건·사고 | 암흑기(453566, 6668587667) | ||
| 주요 정보 | 팀 컬러 | 역대 선수 및 인물(선수단) | 등번호 | 유니폼(협업, 기타) | 상대 전적 | 팀 응원가(서울의 찬가 · 서울의 모정) | 응원단장 | 엘튜브 | 치어리더 | 제휴카드 | ||
| 역대 시즌 | 역대 시즌 | ||
| 현재 시즌 | LG 트윈스/2026년 | ||
| 영구 결번 | 9 이병규 | 33 박용택 | 41 김용수 | ||
| 팬덤 정보 | LG 트윈스 갤러리 | I love Twins | 유광잠바 | ||
| 라이벌전 | 잠실 시리즈 | 엘 꼴라시코 | 통신사 시리즈 | 엘키라시코 | ||
| 기타 | 방화신기 | 간채골 | 보루갈 | 빅5 | 사랑해요 LG | 엘롯기 | 엘넥한 | 엘롯한 | 헬로키티 | 탈쥐효과 | 추격쥐 | 쥐평 | 엘나쌩 · 엘상바 클럽 | 아워게임 : LG트윈스 | DTD | 이 팀은 솔직히 | 메가트윈스포 | 용택아 나는 무서운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 올해는 다르다 | 박신홍문 | 오김박 | 상대 전적 | X-존 | }}}}}}}}} |
| |
| 2002년부터 2011년까지의 순위 |
| |
| 이 술단지의 마개는 당시의 구단주인 구본무 회장이 사망한 지 5년 반이 지난 뒤에야 열리게 되었다.[1] |
1. 개요2. 상세3. 역사
3.1. 2003년3.2. 2004년3.3. 2005년3.4. 2006년3.5. 2007년3.6. 2008년3.7. 2009년3.8. 2010년3.9. 2011년3.10. 2012년
4. 2013년: 비밀번호 탈출5. 비밀번호 탈출 이후6. 원인6.1. 부실한 마운드6.2. 프랜차이즈 베테랑 방출·전력에 보탬 없는 베테랑 수집6.3. 터지지 않는 유망주6.4. 인색한 신인지명6.5. 철밥통 코치진6.6. 무사안일 프런트와 나태한 선수단6.7. 팬들의 몰지각함
7. 유사한 비밀번호 사례7.1. 목록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1. 개요
| |
| 이병규, LG의 가을을 경험한 문화재[2] |
2. 상세
| 박성웅, 내가 LG 팬이라고 밝힐 수가 없어 |
| 전화번호가 아닙니다.[3] |
지금 LG 트윈스에서 10년째 뛰고 있는 선수들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야구 제일 못하는 선수들입니다. 10년간 가을야구 못 간 팀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용균 기자, 사사구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와 한화 이글스의 5886899678에 버금가는 대한민국 야구계가 만들어낸 또 다른 전설의 비밀번호. 참고로 이 기간 동안에 LG 트윈스는 713패를 기록하였다.이용균 기자, 사사구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LG는 비밀번호 기간 동안 5번이나 6위를 했다. 그런데 암흑기의 LG를 대표하는 멸칭은 칠쥐(7G)인데, 2009년에 7위를 할 때 2011년과 맞먹는 DTD 시즌을 보낼 정도로 임팩트를 보여줬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문서는 비밀번호 7자리 시절이었던 2009년 시즌 종료 이후인 6668587 시절부터 존재했다. 즉 문서 이름을 3번 갱신했다는 소리. 사실 정확히 따지면 4번 갱신인데, 문서가 처음 만들어진 6668587 시절에는 비밀번호 관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터라 하이픈이 들어간 '6-6-6-8-5-8-7'로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8888577과의 통일성을 맞추기 위해 하이픈을 제거하고 그 이후로 숫자가 3자리 추가되면서 갱신 횟수도 3번 늘어나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6668587'이나 '66685876', '666858766'으로도 넘어올 수 있다.
실제로 비밀번호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본 문서보다도 빠른 666858 시절 동아일보 기사에서 언급되면서부터이다. (동아일보 기사) 그래서 한화의 비밀번호 항목인 5886899678도 2013년에 6자리가 찍히자마자(588689) 항목이 생성되었고, 이후 숫자가 4자리 추가되었다. 해당 기사에서 당시 박명환, 이동현, 이형종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신인이었던 이형종은 투수로 뛰고 있었다.
2009년까지는 666-8587로 중국집 전화번호마냥 외우기도 쉬웠고, 10자리로 늘어난 2012년에도 666-858-7667의 데칼코마니 형태라 외우기 쉬웠다. 게다가 이미 미국에서 볼 법한 전화번호가 되었고 8개 택배 회사[4] 한정으로는 택배 운송장 번호가 되어버렸으며, 이대로 암흑기가 지속되다간 은행 계좌번호나 바코드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이 기간의 처참한 성적은 2010년대까지 LG 팬덤의 연령대가 높아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 당시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전승 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몇 개월 지나지 않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한창 야구 붐이 일 때 LG의 성적은 비밀번호의 정점이었던 87을 찍고 있어 당시 베이징 뉴비들에게는 약팀으로 인식이 굳어진 탓에 대부분 당시 강팀이었던 두산이나 SK로 가버려 유입이 어려웠다.[5] 그렇기에 LG의 암흑기 당시 문제점 중 하나였던 4~50대 극성 팬들이 많아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암흑기를 탈출한 이후에도 극성 팬의 비중이 많아 KBO 리그 내에서 아저씨 팬이 가장 많은 팀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2020년대 들어서는 LG가 6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고 2023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강팀 이미지가 붙어졌고, 마침 2023년부터 다시금 야구 붐이 일어나며 현재는 젊은 팬덤의 유입이 많아져 극성 팬의 비중이 많이 옅어졌다.
신기하게도 이런 극심한 침체기 속에서도 10승 투수는 꼬박꼬박 배출했다. 투수진이 완전히 망가져 꼴지를 했던 2006년조차 심수창이 10승을 거두었고, 또 한 번 꼴찌를 한 2008년에는 무려 봉중근과 옥스프링 두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또한 약팀임에도 꼴찌는 의외로 두번밖에 안했다. 롯데와 한화가 비밀번호 찍는 동안 무수히 많은 꼴찌를 해서 꼴데나 꼴칰 등의 별명을 얻은 것과는 달리 LG는 칠쥐가 별명이다.
2020년대 들어서는 비슷한 사례인 삼성의 암흑기인 99688378과 비교되고 있는데, 삼성이 201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드래프트와 육성 실패로 5년이라는 시간을 내다버렸다는 평가를 받으며[6] 이종열 단장 체제 이후 부랴부랴 육성 시스템을 갈아엎어 제대로 된 리빌딩을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LG 트윈스는 느리기는 하지만 착실히 리빌딩을 하여 암흑기를 잘 탈출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똑같이 암흑기를 맞은 한화는 제대로 리빌딩이 되지 않은 상태로[7] 김성근 시대 이후 이상군의 아주 짧은 리빌딩 이후 2018년에 반짝 3위에 등극해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가, 다시 9AAA98을 기록하는 등 비밀번호를 계속 찍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화는 2025년 리그 최고의 강력한 원투펀치 폰세와 와이스에 문현빈, 문동주 등 유망주들의 성장이 맞물리며 비밀번호를 끊었고, 페넌트레이스 2위에 플레이오프 승리로 1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다음 해 연속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현재는 암흑기 탈출 이후 계속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면서[8] 암흑기를 완전히 청산하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총 5년동안 두 번이나 우승하였으며, 이 2번의 우승 이후로 이당시의 암흑기는 그냥 어두웠던 과거로만 기억되고 있다. LG의 암흑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신생팬들은 포스트시즌 단골팀이 된 LG를 보고 LG가 그렇게 길었던 암흑기도 있었느냐며 놀라워 하는 경우가 많다.[9]
3. 역사
3.1. 2003년
2002년 한국시리즈 직후 김성근 감독은 경질되고, LG의 90년대 당시 전성기를 이끈 이광환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이 당시 LG 프런트의 만행과 별개로 김성근 감독의 경질에 대해서는 큰 반발은 없었다. 불펜 혹사로 대표되는 김성근 식의 관리 야구[10]가 LG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신바람 야구와 완벽한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02년 정규 시즌에 LG 선수들이 숙소 무단 이탈을 하자 김성근 감독이 이 선수들을 칼같이 라인업에서 제외하는 일화도 있었다.그렇게 이광환 체제 2기에서 맞이한 2003년, 시즌 초인 5월까지는 그래도 4위권에서 버티며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경쟁을 했으나 6월 초 그 유명한 백인천의 롯데와 11승 39패의 두산을 상대로 연속 스윕패를 당하며 6연패를 당한 것으로 분위기가 한번 꺾이며 위기가 찾아왔고, 좀처럼 승패마진을 위로 쌓아가질 못하는 와중에 시즌 후반 대전 한화전 4연전 전패를 포함한 8연패를 당한 것이 결정타가 되어 6위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다시 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시즌이 종료되었다.[11] 최종 성적은 60승 2무 71패 승률 .458의 성적을 거두며 4위 SK와 6게임차의 격차로 낭낭하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LG는 핵심타자 이병규의 십자인대 파열로 인한 시즌 아웃과 작년의 주축 야수들의 부진으로 타선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즌 wRC+는 구단 역사상 최하위였고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뒤에서 13번째였다. 그나마 투수쪽에서는 성과를 보였던 것이, 팀 ERA가 3.98로 KIA 다음으로 2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먼저 선발투수에서는 당해 11승과 탈삼진왕을 수상한 이승호가 팀의 에이스 노릇을 했고, 작년 불펜 에이스였던 장문석이 선발 전환 후 한동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불펜에서는 전승남과 류택현이 버텨주었고, 마무리 이상훈도 30세이브를 올리며 여전한 활약을 보여줬다.
그러나 작년 신인임에도 좋은 활약상을 보인 이동현이 작년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했고, 마무리 이상훈도 전년도의 김성근의 혹사 여파[12]로 인해 이전과 같은 위압감은 없었으며 위에 언급한 큰 이승호나 장문석 또한 팀의 연패를 끊어주는 연패 스토퍼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3.2. 2004년
시즌이 끝나고 프런트는 이광환 감독을 2군 감독으로 강등시키고[13]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순철 주루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2004년 캐치프라이즈를 제2창단으로 내세울 정도로 강제적인 세대 교체를 준비했으나, 이는 암흑기의 서막이었다.부족한 팀 전력을 어떻게든 쥐어짜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던 김성근을 경질하고 이광환을 선임한 것도 그 당시에는 절차 문제로 말이 많았지만, 그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선임한 이광환 감독을 고작 1년 만에 2군 감독으로 밀어내고 다시 이순철을 감독으로 올린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이다. 한마디로 프런트가 팀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없이 즉흥적으로 사람을 짤랐다 세웠다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시즌 전부터 팀의 마무리인 이상훈은 기타 파동으로 인해 이순철과 갈등을 빚어 반강제로 SK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유지현은 전력 외 취급을 받아 1군에서 배팅볼을 던지는 수모를 겪다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게 되는 등, 팀이 프랜차이즈 취급을 개판으로 하자 팀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력 보강을 아예 안한 것이 아닌 게, FA로 진필중을 영입해 팀의 뒷문을 책임지게끔 했으나 그마저도 먹튀가 되어버리며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즌 초반에는 선두까지 치고 나가긴 했으나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삐그덕대기 시작했고, 6월이 되자 4연패-8연패-5연패를 박아버려 단숨에 중하위권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6월 이후부터 KIA, SK, 한화와 4강 경쟁이라도 하는 듯 희망이라도 있던 것마저도 8월 말부터 에이스 이승호, 불펜 핵심 이동현, 데뷔 첫 3할 타율의 박용택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완전히 무너져내려 결국 최종 성적 59승 4무 70패 승률 .457로 저번 시즌과 다를 바 없는 승률로 4위 KIA와 8게임차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를 확정지으며 시즌을 마감한다.
과거 2002년과 2003년 두 시즌간 LG의 뛰어났던 투수력을 만든 양상문 투수코치가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새롭게 이상군이 투수코치가 되자마자 멀쩡했던 투수들의 구속이 내려가는 마법이 펼쳐졌다. 이른 바 '상군매직'. 강속구 투수 유망주였던 김광삼의 성장은 정체되었고 후반기 들어 선발진이 너도나도 구속이 떨어지며 무너졌다. 불펜 필승조들은 FA로 마무리 투수의 역할을 기대했던 진필중의 실패로 뒷문에 구멍이 뚫린 것이 치명적이었고 여기에 핵심 불펜 이동현이 팔꿈치 수술로 이탈하니 불펜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것은 당연했다.[14] 1군에서 자리잡기를 기대했던 좌완 파이어볼러 서승화는 고질적인 제구 문제에 유리멘탈이라 잇따른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며, 신윤호는 마당쇠 역할을 소화했으나 과거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던 2001년의 모습을 되찾기에는 그 시즌 혹사로 인해 더이상 보여줄 수 없었다. 거기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외국인 투수 후타도와 그의 대체선수 쿠퍼 모두 처참한 모습으로 투수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2004년은 지난 2년의 강점이었던 투수력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것도 모자라 후술할 일들로 인해 거의 10년의 가까운 시간 동안 재건 불가 상태가 되어버려 향후 10년간 거칠 기나긴 암흑기의 가장 큰 문제점이 되었다.
시즌 후에는 더 가관인 일이 있었는데, 또다른 프랜차이즈이자 공격에서 이병규와 함께 사람 구실을 한 몇 없는 선수인 김재현에게 FA 협상에서 과거 부상을 당했던 고관절 부상과 관련된 각서를 쓰게 했고[15], 당연히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재현은 LG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SK로 이적하게 된다. 이때 그나마 SK 유망주 중에서 정우람, 윤길현, 신승현 등의 질 좋은 투수 유망주들이 있었기에 이 선수들 중 한 명을 데려왔더라면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이순철이 "안재만의 영입은 SK의 내야진에 큰 구멍을 가져올 것이다."랍시고 보상 선수로 안재만을 지명했는데, 정작 SK는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김태균을 영입해 바로 메웠고, 이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최정이 주전 3루수로 자리를 잡으며 내야진이 오히려 탄탄해졌다. 반면 안재만은 LG로 돌아오고 나서도 주전으로 활약하지 못하며 해당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되려 남 좋은 일만 해버린 역대급 삽질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특별한 전력 보강 조차도 없어서 다음 시즌 팀의 전망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16]
3.3. 2005년
앞서 언급했듯이, 팀의 간판급 프랜차이즈 스타인 유지현이 반 강제로 은퇴를 하게 되었고, 김재현은 각서파동으로 인해 FA로 SK 이적을 함으로써 팀에 심각한 전력누수가 일어난 와중에도 딱히 특별한 전력보강이란 것은 없었고, 전문가들의 예상은 하위권에 머물렀다.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개막 3연패에 5월 5연패 등으로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7월 초 반짝 8연승을 달려 잠깐 4위를 했으나 곧바로 7월에 7연패, 8월에 6연패를 하면서 한때 7위까지 떨어지는 등, 포스트시즌과 완전히 멀어졌다. 그나마 최종전에서 2위를 확정지으려던 SK의 발목을 잡으며 최종 성적 54승 1무 71패 승률 .432로 승률이 폭락하며 3년 연속 6위로 시즌을 마감[17], LG 트윈스라는 팀명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이해 두산과 SK, 두 팀을 상대로 각각 5승 13패, 4승 1무 13패에 그치며 승점자판기로 전락했다. 게다가 두산을 상대로 개막 이후 맞대결 전패가 이어지면서 두산전에서 이길 때까지 홈 경기 무료 입장 이벤트까지 여는 굴욕까지 겪었으며, 앞서 전술했듯이 최종전에서 고작 6위로 올라가기 위해 SK의 발목을 붙잡아서 2위가 된 팀이 두산이었고, 그 덕분에 두산은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였기에 해당 시즌 LG는 완전히 두산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다.
타격은 주축 타자들인 이병규가 타격왕과 최다안타왕,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박용택은 도루왕과 득점왕을 수상했다. 또한 젊은 대주자 요원이던 이대형은 37도루로 리그 전체 도루 3위에 오르며 팀 도루 1위를 이끌기도 했다. 덕분에 나쁜 세부지표를 기동력으로 커버해 팀 득점이 삼성과 한화와 함께 600득점을 넘기는 등 나름 선방했다. 그러나 리그 최악의 팀 ERA 4.90이라는 처참한 투수력이 심각하게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선발투수는 최원호가 13승을 거두며 로테이션을 돌아준 것을 제외하면 그 어느 투수도 안정적으로 돌아주지를 못했고, 불펜 또한 가장 중요한 마무리 투수들이 계속 부진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교체되는 수모를 겪으며 불펜 가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투수진 붕괴의 책임으로 이상군 투수코치는 시즌이 끝나고 해임되었다.
외국인 농사도 엉망이었다. 일단 시즌이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공격력 보강을 위해 타자로만 두 명을 뽑는 전략을 세웠다. 시범경기 맹타를 휘두르던 마테오는 정작 정규시즌이 되자 부진 끝에 퇴출되었으며 클리어는 후반기에 맹타를 휘두르며 3할 타율과 15홈런으로 1인분 정도는 했으나 꾸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뒤늦게 투수력 문제를 확인하고 영입한 좌완 투수 왈론드는 초반 완투승을 포함 2승을 거뒀으나 제구 난조 문제에 타선 지원 부족으로 9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실패했다.
LG의 우타 거포 기근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 특급 고졸 신인 정의윤과 박병호가 동시에 입단한 해이기도 했다. 향후 LG를 대표하는 거포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둘 다 가능성만 확인하고 정작 포텐은 다른 팀에서 터졌다.
성적 부진으로 선수단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으며, 결국 시즌 내내 이순철 감독에 대한 경질 여론이 들끓었다. 심지어 최종전 전에는 경질이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가 해프닝으로 끝난 일도 있었을 정도. 2004년 이상훈의 기타 파동과 트레이드, 유지현의 반강제 은퇴와 함께 시즌 전 팀의 유일한 영구결번 김용수 코치를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치고 잠실 외야에 걸려있던 41번 영구결번 유니폼도 치우는 졸렬함은 이순철에 대한 팬들의 반감을 더욱 키운 사건이 되었다.
결국 이 시즌 시작 전까지 LG는 MBC-LG 프랜차이즈 통산 승률이 5할이 넘었지만, 2005년 8월 6일을 기점으로 승패마진이 마이너스로 전환되며 이를 다시 메우는 데에만 자그마치 20년이 넘게 걸리게 되었다.
3.4.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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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철아 우리는 네가 정말 창피하다"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4강 신화의 열기를 타고 시작된 시범경기에서 LG는 1위를 기록했다. 당초 LG의 계획은 외국인 선수 구상에서 강속구 투수 아이바를 마무리 투수로 영입하고, 텔레마코는 선발투수감으로 계약했다. 또한 베테랑 최상덕과 마해영을 영입해 선발진과 중심타선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며 지난 3년 연속 6위에서 탈피하여 최소 포스트시즌에는 진출하기 위해 의욕적인 준비를 했다.[18]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이해는 아예 팀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바는 시범경기때부터 어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며 전력에서 이탈했고, 개막전 선발투수 최상덕은 오른 허벅지 통증으로 2회에 강판했다.[19] 최상덕의 이탈로 안그래도 불안정한 선발진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마무리를 맡아줄 것이라 기대한 아이바까지 전력에서 이탈해 불펜까지 안정적인 곳이 없어 투수진 전체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타자 쪽에서도 기대와 다르게 엇나가기 시작했는데, 당초 리드오프로 낙점했던 이대형이 공격의 물꼬를 트기에는 역부족임을 드러냈고 마해영 등 중심타선마저 해결사 역할을 하지 못해 공격력마저도 부실했다. 기대주로 평가받았던 박병호, 정의윤, 이성열 등은 1군 붙박이로 활약하기에는 경험 부족을 드러냈다.
결국 투타 모두 환상적인 밸런스를 선보인 덕분에 시즌 초반부터 승패마진을 신나게 깎아먹으며 승률 3할대로 허덕여 같은 시기 똑같이 부진하고 있는 롯데에 이어 7위로 떨어지게 되자 이러한 행태에 분노한 LG팬들은 6월 3일 경기 도중 얼굴을 가린 채 위와 같은 플래카드를 잠실 야구장에 내걸게 될 정도로 민심이 악화되었고, 결국 이순철은 이틀 뒤인 6월 5일에 사퇴하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양승호 수석코치가 잔여 시즌 감독대행을 맡게 되어 시즌을 마치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롯데가 반등하는 바람에 8위로 내려앉았으며 막판 8연패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LG 트윈스의 2006년 최종 성적은 47승 4무 75패 승률 .385로 MBC-LG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최하위와 역대 최저 승률[20], 최다패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만이 남게 되었다. 당초 양승호 감독대행은 최소 50승과 승률 4할을 희망했지만 당연하게도 둘 다 달성에는 실패했다.
당시 LG 투수진은 한국프로야구 전체를 통틀어도 최악이라 평가받을 수준이었는데, 이 해 프로야구 전체 ERA는 3.58로 상당한 투고타저였으며, LG 빼고 모든 팀이 팀 ERA 3점대를 찍었으나 LG만 혼자 4.22를 찍는 그야말로 걸레짝이라고 표현해도 될만한 투수력이었으며 팀 조정 평균자책점(ERA+)은 고작 83.9를 찍어내는데 불과했다.[21] 게다가 해당 시즌은 팀 내 sWAR 1위가 2.70을 찍은 마무리 투수인 우규민일 정도로 선발이나 불펜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선수들이 처참한 경기력을 선보였다.[22]
우선 외국인 선수들부터 심각했다. 당초 마무리를 기대하고 영입했으나 스프링캠프에서 던진 공 19개가 전부인 희대의 먹튀 아이바는 말할 것도 없고, 텔레마코와 베로커 역시 폭망했다. 국내 투수들도 다를 바 없었는데, 그나마 팀에서 괜찮았던 선발투수로는 심수창과 정재복이었다. 그러나 팀 내 유일한 10승 투수인 심수창은 투고타저인 리그 내에서 4점대 ERA로 별로 좋지는 않았으며 정재복은 ERA 3.59로 평균 정도의 ERA와 규정이닝 소화, 7승을 따기도 했으나 역시 다른 팀의 선발투수에 비해서는 모자랐다. 이 외에 선수들인 이승호, 최원호, 김광삼은 시즌의 절반도 채 나오지 못하며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선발투수에서부터 믿을만한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다시피한 LG 투수진은 그렇게 완벽한 붕괴를 맞이하고 말았다.
방화신기로 인해 투수력이 걸레짝이 되어버린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어서 그렇지 공격력 또한 투수와 다를 게 없었다. 박용택과 이병규를 제외하면 타격에 어떠한 힘도 되어줄 뿐만 아니라 애초에 10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들이 이 두명 외에는 조인성, 박경수 외에는 없다. 또한 정의윤과 박병호와 같은 유망주들의 성장세는 언제나 정체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타격 WAR은 14.33, 팀 wRC+는 86.4로 압도적인 꼴찌였다.
3.5. 2007년
2006년 최하위 이후, 구단은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현대에서 4회 우승을 이끈 김재박 감독을 비롯해 당시 현대의 코칭스태프들을 통째로 데려왔다.[23]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병규가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을 하는 전력누수가 생기긴 했지만 이를 메우기 위해 FA로 4년 40억원이라는 총액에 두산의 토종 에이스 박명환을 영입했고, 국내로 리턴한 메이저리그 출신 봉중근이 계약금 10억원과 함께 1차 지명으로 LG에 입단했으며, 외국인 선수도 2년간 삼성의 에이스로 삼성의 2년 연속 통합우승을 이끈 하리칼라와 이병규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2003년 우승을 이끈 발데스까지 영입하며 LG팬들의 기대를 모았다.실제로 타자쪽에서는 이대형이 리드오프로 자리를 잡아 타율 3할과 도루왕,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의 좋은 활약을 통해 이병규의 빈 자리를 메웠고, 긴 시간 무명 선수였던 최동수가 팀의 중심 타선으로 거듭났으며, 이종열과 조인성도 타격에서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쪽에서는 박명환이 10승과 3점대 ERA라는 기대치에 걸맞는 성적을 선보였고, 불펜에서는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 류택현이 홀드왕에 오르는 활약상이 있었으며 전년도 붕괴된 투수진의 유일한 희망인 우규민까지 마무리로 뒷문을 깔끔하게 막아주며 시즌 막판까지 한화, 삼성과 치열한 포스트시즌 진출권 싸움을 벌이며 2002년 이후 5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서서히 부서져가고 있었는데, 먼저 타자쪽은 테이블세터와 하위타순은 훌륭했었으나 정작 중요하다 여겨지는 클린업 트리오에서 발데스-최동수-박용택 이 선수들이 장타력이나 클러치 능력에서 다른 팀들에 비해 부족한 능력치였다는 점이었고[24], 팀의 주전 3루수로 많은 기회를 받은 김상현은 초반 잠깐의 활약을 제외하면 실망스러웠다.
투수진에서도 박명환과 중간에 들어온 옥스프링 이외에는 다른 선수들이 부진했으며 기대를 모은 봉중근, 하리칼라는 그 기대치에 못미쳤고 하리칼라는 시즌 중 방출되었다. 그 때문에 불펜진의 과부화를 재촉해 전반기까지 호투하던 우규민이 8회부터 멀티이닝을 던지거나, 연장전까지 던지는 등 과부하를 해서 체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막판에는 방화범으로 전락해 시즌 종료 기준 30세이브를 거두며 오승환 다음으로 세이브 2위를 거두며 겉보기에는 좋아보였으나 그 뒤에는 블론세이브 13회라는 역대 한 시즌 최다 블론세이브 기록을 세우며 매우 불안했고, 다른 불펜진인 김민기나 불안한 불펜진을 메꾸기 위해 선발에서 전향한 심수창과 정재복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삼성과의 4위 싸움으로 갈 길이 바쁜 상황에 SK와의 홈 경기에서 1:2로 앞서던 9회초 2아웃 상황, 김우석[25]의 히 드랍 더 볼로 동점이 되어 결국 연장에서 역전패를 당한 것을 기점으로 막판 뒷심 부족으로 최종 성적 58승 6무 62패 승률 0.483을 거뒀고, 4위 삼성과 3게임차 차이의 5위로 아쉽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26][27]
3.6. 2008년
2007년의 선전으로 인해 2008년을 기대하는 팬도 많았지만, 사실 실제 승률에 비해 턱없이 낮은 피타고리안 승률, 빈약한 기초 전력에 비해 실제 성적이 잘 나왔던 시즌이었고, 유망주들도 기대만큼 성장하질 못해서 생긴 야수진의 고령화 등, 불안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프런트는 팀 전력을 오판하며 아무런 보강에 나서지 않았다.이는 결국 다음 해인 2008년 시즌이 시작되자 겨우 다시 살아났던 팀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문학에서 열린 SK와의 개막전에서 우규민이 연장전 정상호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패배한 뒤 다음날은 봉중근의 호투로 첫 승을 거두었지만 곧바로 4연패를 박고 난 이후 4월까지 12승 16패, 7위로 좋지 않은 출발을 하고 난 이후에는 선발투수가 잘 던진 날엔 타자들이 도와주지 못하고, 타자들이 점수를 뽑는 날엔 투수들이 무너지는 전형적인 약팀의 엇박자 야구가 이어졌다. 거기에다 4월 25일에는 저번 시즌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준 박명환이 오른쪽 어깨 통증을 호소해 전력에서 이탈해 투수진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이해 6월에만 LG는 초반 2연승 이후 6연패-1승-9연패-1승-3연패를 거두며 4승 18패 승률 .182를 찍어 팀 전체가 삼미 슈퍼스타즈와 진배없는 정신나간 성적을 찍기도 했다. 결국 바닥까지 추락한 LG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최종 성적 46승 80패 승률 .365로 MBC-LG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다패, 최저 승률을 2년만에 경신하며 다시 꼴지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2008년은 공중분해 위기 속에서 전지 훈련도 가지 못한데다가 분위기도 개판이던[28] 서울 히어로즈에도 밀린 최하위라 충격이 더욱 컸다.
팀 내 sWAR 1위를 기록한 타자가 반 시즌 뛴 지명타자 페타지니의 3.16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야수진이 완벽하게 망했다. 페타지니 외에는 난세의 영웅이라 불렸던 안치용이나 최동수 같은 선수들이 그나마 사람 구실이라도 했지만 저번 시즌 리드오프로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 이대형은 도루를 제외하면 스탯이 하락했고, 박용택 마저도 WAR 0점대를 기록하며 기대치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며, 박경수나 박병호 같은 유망주들도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투수진도 선발에서 봉중근과 옥스프링이 원투펀치로 분전했지만 팀 내에는 저렇게 사람처럼 던져주는 선수가 저 둘 말고는 없었다. 저번 시즌의 하리칼라를 보고도 깨닫지 못했는지 똑같이 삼성에서 2년간 준수하게 뛴 브라운을 에이스로 기대하고 데려왔지만 결과는 참담해 하리칼라와 똑같이 시즌 중 방출되었으며, 저번 시즌 팀의 1선발로 자리를 잡아준 박명환은 부상으로 드러눕기 시작했다. 결국 1군 로테이션으로 돌려볼 선수들이 남아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고졸 신인 정찬헌과 이범준이 선발 로테이션을 억지로 소화해야 했다. 불펜진도 저번 시즌 블론세이브 13회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30세이브로 뒷문을 책임진 우규민은 이번 시즌은 시즌 초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해 마무리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 자리를 정재복이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끝장승부 제도가 한국프로야구에 도입된 유일한 해여서 안그래도 불펜이 약한 LG는 더욱더 불리했다.
3.7. 2009년
결국 시즌을 마치고 구본준 구단주의 지시로 대대적인 감사에 들어갔고 수많은 프런트 인사들과 코칭스태프들이 갈려나갔다. 그리고 FA로 정성훈과 이진영을 영입하며 의욕적인 오프시즌을 보냈고, 홈경기에 한해 X-존을 설치하여 공격력 강화를 모색했다. 그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러 2008년 11월 30일에 열린 러브 기빙 페스티벌에는 수많은 팬들이 찾으며 차기 시즌 LG의 선전을 기대했다.실제로 2009년은 5월 초까지는 외부 FA 영입생인 정성훈과 이진영의 활약 + 박용택의 각성 + 페타지니의 대활약 + 주전 포수 김정민의 투수 리딩에 힘입어 예전보다 나아진 투수진까지 더해져 8연승과 2위 자리에 오르는 쾌거를 누리게 된다. 당연히 그동안 잠들어있는 모든 LG팬들은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며 7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까지도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5월 20일 김정민이 아킬레스건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며 주전 포수가 시즌 아웃되는 악재를 겪게 되었고, 급하게 부상에서 회복중인 조인성이 주전 포수로 나섰으나 나아진 줄로만 알았던 투수진은 조인성이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자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며 그 꿈은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선발은 저번 시즌부터 각성한 봉중근이 여전히 에이스 노릇을 해줬으나 나머지 선발투수들은 자기 몫을 해주지를 못했고, 불펜진 또한 이재영이 마무리를 맡은 7월 초에 잠깐 4위와 반게임차로 뒤진 5위까지 올라가는 선전을 했으나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한 채 그대로 최종 성적 54승 4무 75패 승률 .406,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해 그나마 공격력이 좋았던 탓에 죽어라 따라가다 결국 패배하는 경기가 많았다.
고질적인 마운드 문제는 이번에도 LG의 발목을 제대로 붙잡았다. 먼저 남은 외국인 한 자리를 시즌 내내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시즌 개막과 함께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외국인 투수 옥스프링이 결국 1군 마운드에 복귀하지 못하며 방출되었고, 그의 대체자 바우어는 기복이 심한 피칭으로 기대치에 비해 모자른 경기력을 보여주다 부상으로 역시 방출되었으며, 대체자로 데려온 존슨 역시 팀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 국내 선발진 조차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수술 뒤 재활에 속도를 낸 박명환 역시 복귀와 부상 재발을 거듭했음에도 끝끝내 과거 두산 시절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여기에 베테랑 최원호도 광주 원정에서의 무박 2일 경기 후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황당한 부상을 당하며 이탈했으며, 2006년 이후 3년 만에 선발로 돌아온 정재복은 홈런공장장이 되면서 전혀 경쟁력이 없었다. 그나마 에이스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봉중근에 이어 2선발 역할을 했던 투수는 심수창이었는데 5월까지는 3점대 ERA에 5승을 거두며 괜찮았으나 6월 들어 부진에 빠지더니 7월 이후에는 심논개 사건 이전까지 심수창의 호투 여부와 관계없이 타선 지원도 따르지 않으면서 패전만 쌓이기 시작했다. 선발에 구멍이 발생하면서 당초 롱릴리프 역할이었던 김광수가 20번의 선발등판을 해야했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상대 타자가 한 바퀴 돌면 얻어맞는 패턴을 반복했다. 방화신기로 유명한 불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규민은 시즌 초반에는 미스터 제로로 활약했으나 5월 이후에는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마무리 자리를 이재영에게 넘겨주고 2군에 갔다가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통증으로 시즌 아웃되며 시즌 후 경찰청으로 입대했다. 타 팀에는 1이닝을 거뜬히 맡아주는 불펜투수들이 즐비했지만 LG는 1이닝은 커녕, 아웃카운트 하나도 제대로 막아줄 역할을 해줄 투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고졸 2년차 정찬헌은 8월 중순 시즌 아웃되기 전까지 불펜으로만 55경기 76.1이닝을 던지면서 혹사를 당하고 말았고, 이는 허리 부상으로 이어져 그의 남은 선수 생명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결국 5월 초까지 LG 투수진이 정상화가 된 것은 단지 주전 포수인 김정민의 신들린 포수 리딩 덕분이었고, 김정민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며 팀 순위와 같은 팀 ERA 7위(5.42)로 시즌을 마감했다.
거기에 그 어느 팀보다도 신진 세력들의 등장이 많이 필요했던 팀이 LG였으나 김재박 특유의 검증된 선수 선호 성향으로 인해 김재박 체제 내내 선수단의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년간 하위권에 머무르고도 선수단 변화의 폭은 적었다. 그저 다른 팀에서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박명환, 정성훈, 이진영)이나 방출된 베테랑 선수들(오상민, 박종호)을 데려오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같은 시즌 KIA의 우승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이 LG였다. 3위 두산은 13승 6패로 압도적인 우세로 2000년 이후 9년 만의 상대전적 우세를 점했고, 추격쥐 본능이 발동되어 SK의 19연승 기간에서 유일하게 무승부를 선사했으며, KIA에는 2승 1무 16패를 당해 승점자판기 노릇을 한 것도 모자라 MVP 선수를 내주고 사이버 투수를 데려오기도 했다.[29] 참고로 LG는 7위보다는 6위를 훨씬 많이 했는데 7G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 바로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2009 WBC 준우승 등의 대표팀의 선전 및 기존 인기팀이라고 할 수 있는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의 호성적이 겹쳐 야구팬이 대량 유입된 이 시즌에 시즌 중에 크게 미끄러지며 7위를 한 것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30] 또한 그로 인해서 베이징 뉴비들에게 약팀으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외면받는 신세가 되었고, 같은 시기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진출하던 두산과 달리 향후 신규팬들의 유입에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 외에도 심수창과 조인성은 1군 경기에서 충돌하는 심논개 사건으로 인해 당시 LG의 1군 선수단의 조직력이 모래알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2군에서도 서승화가 작은 이병규를 구타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선수단의 사건 사고 또한 터져 홍역을 겪기도 했다.
다만 늘 터질 듯 터지지 않았던 존재였던 박용택이 프로 데뷔 8년 만에 0.372의 고타율로 타격왕에 오르며 드디어 포텐을 만개한 모습을 보인 것은 팬들에게 한 가지 위안거리였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 롯데 홍성흔과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보인 졸렬한 타율 관리로 인해 향후 박용택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생긴 것이 옥의 티.
결국 김재박 감독도 풀지 못하고 재임기간 동안 5-8-7의 실망스런 모습만 보여주다 3년 임기를 마쳤고 8888577에 버금가는 비밀번호인 6668587이 완성된다.
3.8. 2010년
김재박 감독의 뒤를 이어 두산 2군 감독 출신의 박종훈 감독이 취임했다. LG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한 바 있었고 현대와 SK 등을 거치며 무난한 코치 커리어를 이어오면서 두산 화수분 야구의 상징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LG 구단에서도 이례적으로 박종훈에게 5년 계약을 맺으며 신임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가장 시급하다고 여겨진 유망주들의 발굴과 그동안 구단이 그토록 바라던 포스트시즌 진출이었기에 과연 두 가지 모두 이뤄낼 수 있을지 주목되었기에 그의 어깨가 더욱이 무거워졌다.그리고 시즌 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다시 LG로 리턴한 이병규에 더해 넥센에서부터 현금 트레이드로 이택근까지 영입하며 이른바 빅5를 구성. 기존 X-존과의 시너지를 기대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칼을 갈았다. 다만 이미 박용택, 이대형, 이진영이라는 수준급의 외야수들이 있었기에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거리로 남았다. 그렇지만 좌타자들이 주축이 된 타선에서 우타자인 이택근의 합류로 짜임새가 강해질 것으로 생각했기에 대부분의 LG팬들 모두 기대했다. 그리하여 빅5 다섯명을 모두 가동하기 위해 외야에 3명을 쓰고 남은 2명을 지명타자와 1루수로 활용하게 되었다.[31]
개막전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전에서는 9회 2사에 오승환을 상대로 이진영의 동점 홈런에 이어 연장에서 박용근의 2타점 적시타로 순조롭게 시작했고, 4월 말까지 3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온 DTD 정신으로 순식간에 승패마진을 많이도 깎아먹으며 6월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고, 7월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4연패-5연패-5연패로 폭삭 내려앉으며 그대로 시즌 최종 성적 57승 5무 71패 승률 .429, 6위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3연전 스윕승이 없었고, 디펜딩 챔피언 KIA가 16연패를 겪었는데도 그 KIA보다 낮은 순위로 시즌을 마쳤다.[32]
타선은 마침내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조인성에, 작은 이병규 또한 잠재력을 확인했고, 유망주 시절 오지환 또한 수비에서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타격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가장 기대를 모은 빅5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시즌 중반까지 제대로 가동된 경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이택근은 타격 성적은 나쁘지 않았으나 시즌 중반 허리 부상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며 고작 91경기 출장에 그친 탓에 규정타석에 미달했으며, 그마저도 득점권 타율이 .241에 불과해 클러치 능력이 약해 팀의 패배에 기여한 적이 꽤나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시즌 후반 팀의 성적이 떨어진 이후 몰아친 탓에 이는 스탯관리를 한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거기에다가 기존 주포지션인 중견수에는 이미 이대형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좌익수나 1루수를 봐야했는데 수비가 처참해서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하며 기존에 세워둔 빅5 구성이 어그러지기도 했다. 지난해의 타격왕 박용택은 전반기 1할대의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면서 2군에 다녀오기도 하다가 후반기에 겨우 몰아쳐서 겨우 괜찮은 클래식 스탯을 만들어냈으며, 이병규는 4년 만에 돌아온 국내 무대에서 좀처럼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해 wRC+가 평균인 100을 밑돌았으며, 타격 WAR도 겨우 1점대에 불과할 정도로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다. 이대형도 66도루로 4년 연속 도루왕과 3년 연속 60도루를 기록하는 등의 주루 능력은 분명 좋았으나 타격에서는 역시나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이진영이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어도 타율 .331에 타격 WAR 3.64로 기대치에 조금은 도달했다. 이 외에도 저번 시즌 FA로 영입되어 기대치가 있던 정성훈 또한 부진했으며, 유망주인 박경수, 박병호는 여전히 성장세가 정체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타선은 위력이 있었지만 기복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좌타자들이 많은 특성상 좌완 상대로 너무 약해 상대팀들은 좌완투수들[33]을 표적등판을 시켜가면서까지 LG를 공략했다.
투수진은 여전히 심각해 봉중근을 제외하면 선발진은 돌아가는 꼴을 보질 못했다. 무엇보다도 외국인 투수 중 메이저리그 경력이 화려했던 곤잘레스를 1선발로 기대했지만 1승도 없이 9경기 6패 ERA 7.68의 최악의 기록만을 남기고 방출되었고, 그의 대체자인 좌완 파이어볼러 더마트레는 구속만 빠를 뿐 가벼운 공과 날리는 제구로 ERA 8.22로 난타당하며 일찌감치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2007년의 10승으로 제 몫을 해주고 난 뒤 지난 2년간 부상과 재활로 먹튀의 길을 걸었던 박명환은 4승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기량이 떨어진 가운데 어김없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해에는 타자 전향 후 투수로 되돌아간 김광삼이 데뷔 첫 완봉승도 한 차례 기록하는 등 사실상 2선발 노릇을 했지만 다른 선발후보군 심수창, 서승화, 한희, 이범준, 강철민, 이형종 등은 모조리 실패했다. 다만 SK와의 4대3 트레이드로 영입한 사이드암 박현준과 고졸 2년차 최성민 정도만 시즌 막판에 가능성을 남긴 정도였다. 그리고 에이스 봉중근조차도 10승은 기록했지만 지난 3년간 누적된 피로로 인해 이전 2년의 구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펜진 또한 그 페타지니 대신 마무리를 기대하고 데려온 오카모토가 시즌 초반에는 기존 LG 마무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탄탄한 뒷문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구위로 승부하던 유형이 아니었기에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점점 폼이 하락하며 시즌 후반기에는 마무리 자리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이외 불펜진도 김광수가 7~8월에 예상치 못한 호투를 한 것을 제외하면 전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현대에서 방출된 뒤 영입한 이상열과 지난해 5년 재활에서 돌아온 이동현, 그리고 베테랑 좌완 오상민, 젊은 김기표가 있었지만 선발투수가 이닝을 많이 책임져주지 못하는 탓에 이들에게 과부하가 자주 걸렸다. 신인 신정락은 시즌 도중 부상에 발목잡히며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했다.
여러 차례 사건사고로도 시끄러웠다. LG의 레전드 이상훈은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 '쌍둥이 마당'에 '이 글을 단장 이하 구단에게 바칩니다'라는 글을 올려 파문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유망주 투수 이형종도 자신의 미니홈피에 박종훈 감독을 겨냥한 말을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재활군에 있던 와중에 "힘들어 못해먹겠다"는 글을 올리고 잠적해 버리며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또한 시즌 초반 2군행을 통보 받은 봉중근의 아내가 미니홈피에 "남편이 막말과 함께 2군행을 통보받았다"고 썼다가 삭제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서승화도 전반기를 마치는 시점에서 미니홈피에 "야구를 그만두겠다"라는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2010년 LG는 최종 성적 57승 5무 71패 승률 .429로 또 6위에 그쳐 한국프로야구 최초 8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종전 기록은 1982~1988년 삼미-청보-태평양과 2001~2007년 롯데의 7년이다.
시즌 후 구단에서는 2010년 초부터 '신연봉제'라는 파격적인 연봉고과 시스템을 도입해 개인성적 위주로 연봉고과를 산정했던 기존의 시스템을 바꿔 승리공헌도를 측정하여 연봉의 50%를 반영할 것을 예고했다. 그 결과 박명환은 5억 원에서 90% 삭감된 5천만 원, 2010년 0승을 기록한 심수창은 3천 만원으로 삭감되었다. 물론 수혜자도 있었는데 프로 2년차였던 오지환의 연봉은 기존 2,400만원에서 1억 200만원으로 수직상승했고 작은 이병규도 2,800만원에서 1억 원으로 올라 억대 연봉자가 되었다.
3.9.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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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
2010년까지 유지하던 X-존이 이 시즌을 앞두고 사라졌다.
2011년에는 주키치와 리즈라는 걸출한 외국인 투수들을 뽑고, 박현준의 포텐이 터짐으로써 선발투수가 훨씬 안정화되었고, 타선 또한 이병규와 박용택이 맹타를 휘두르는 등, 투수진과 함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불펜진은 저번 시즌의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마무리로 낙점찍은 김광수가 여지없이 불을 지르며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그래도 시즌 초에 공동 1위까지 올라가기도 할 정도로 승승장구했고, 그 기세를 5월까지 이어가 2위와 3위를 왔다갔다 하면서 30승 선착과 함께 포스트시즌 안정권으로 접어드는가 했다. 실제로 당시 주장이었던 박용택이 인터뷰에서 유광잠바를 준비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팬들도 이제 올해는 다르다며 9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34]
그러나 6월이 되면서 여러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지기 시작하자 박종훈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투수진 운용이 시작되어[35] 투수진이 퍼지기 시작해 루징 시리즈만 4번을 하고 신인 투수 임찬규가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연속 밀어내기로 무너지는 등의 큰 부진을 겪으며 5위와 승차가 3경기차의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권에 간신히 메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 3시간 전에 박병호, 심수창을 넥센 히어로즈로 보내고 송신영과 김성현을 받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36] 그리고 8월 3일 SK전, 그렇게 트레이드로 데려온 마무리 송신영이 이호준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그날 경기를 치르지 않은 롯데에게 4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결국 이후 이렇다할 반등 없이 9월 24일 SK에 패배하면서 트래직 넘버 소멸.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확정되었다.
이후 최종 순위는 59승 2무 72패 승률 .450으로 한화와 공동 6위로 마감. 666858766 비밀번호 완성. 박종훈 감독도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사임하면서 LG의 흑역사 감독 계보를 잇게 되었다.
참고로 9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실패는 한국프로야구 최초. 30승 선착하고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도 한국프로야구 최초[37]. 공동 1위 하다가 7위로 추락한 것도 한국프로야구 최초.[38] 또한 최초로 10승 투수 3명 보유하고도 7위로 시즌을 마감할 뻔 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건 면했다. 하지만 10승 투수 3명 보유하고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는 2002년 두산 이후 9년 만의 일이자 한국프로야구 역대 11번째 일이다.
타자쪽에서는 이병규가 저번 시즌의 부진에서 벗어나 맹타를 휘두르며 타선을 책임졌고, 정성훈 또한 부진했던 저번 시즌에 비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며, 저번 시즌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조인성 또한 괜찮은 타격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장타자 전환을 시도한 박용택이 기대치를 밑돌았고, 이택근은 저번 시즌에 비해 잔부상이 잦고 클러치 상황에서 약해 스탯관리를 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이진영 또한 잔부상으로 인해 wRC+ 100을 넘기지 못했다. 게다가 이대형은 부상 이후로 커리어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고, 저번 시즌의 모습으로 기대감이 컸던 오지환도 여전히 수비 실책이 잦은데 더해 타격 성적이 떨어졌다. 결국 타선에서 줄부상이 이어지며 그 자리들을 서동욱이 겨우겨우 메웠음에도 구멍을 끝끝내 다 메우질 못했고, 팀은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선발투수에서도 주키치와 리즈라는 훌륭한 외국인 투수들을 뽑으며 단숨에 투수력이 강화되었고, 박현준 또한 13승을 올리며 향후 팀의 토종 1선발을 알리는 호투를 연일 선보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팀의 에이스를 도맡았던 봉중근이 이번 시즌에서는 그동안 많은 공을 던진 여파가 제대로 터지는 바람에 부상으로 제대로 공을 던지질 못했으며, 남은 선발 2자리를 김광삼, 심수창이 메워보려 했으나 모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불펜은 저번 시즌과 다를 바 없는 최악의 모습이었다. 먼저 저번 시즌 7~8월의 호투로 이번 시즌 마무리로 낙점된 김광수가 시즌 초반부터 불을 지르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신인 임찬규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6월부터 박종훈 감독의 조급증으로 이상열, 임찬규, 김선규와 같은 선수들을 마구잡이로 굴려버리기 시작하며 그 선수들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며 팀의 DTD는 가속화되었다. 결국 다급해진 LG는 급하게 트레이드 마감일에 박병호와 심수창을 내주고 송신영과 김성현을 데려오며 투수 보강을 했다. 실제로 송신영은 마무리 자리에서 확실히 안정적인 모습으로 뒷문을 막아주었고, 김성현은 선발 유망주인 만큼 앞으로가 기대되는 피칭을 하였다. 하지만 이 둘 만으로는 팀의 투수력을 커버하기에는 터무니 없었고 결국 팀은 완전히 폭삭 내려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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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TD" LG 가을야구는 또 내년입니까? |
결국 이번 시즌에도 포스트시즌 진출이 멀어지게 되자 분노한 LG 팬들은 구단 버스를 가로막고 청문회를 열기까지 했으며, 시즌 종료 이후에는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에서 당시 LG 담당 기자인 이재국 기자가 수뇌부부터 프런트까지 그동안의 모든 치부들을 까발리는 등 LG팬들을 실망시키는 소식들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었다. 해당 시즌 종료 이후 LG는 다른 하위권팀들인 넥센과 한화에 비해 그 어떠한 희망거리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수뇌부부터 프런트, 감독, 코칭스태프, 선수들까지 모두 승리에 대한 갈망 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9년간 한결같이 LG의 포스트시즌을 위해 믿고 응원해준 팬들을 절망하게 만들며 이제는 해체 말고는 답이 없다라는 말까지 나와버린 것이 LG의 현실이었다.
시즌 종료 이후 박종훈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한때 SK에서 경질을 당한 직후인 김성근이 LG로 돌아올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헛소문에 불과했고, 결국 내부 승격으로 김기태 수석코치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되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송신영, 이택근, 조인성이 각각 한화, 넥센, SK로 이적한 데다가[39]
3.10. 2012년
앞서 언급한 내부 FA 3명을 모두 놓친 것에 더해 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유망한 투수 두 명이 영구제명되어 팀에 심각한 전력누수가 생겨버렸기에 LG 팬들 사이에서는 10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졌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는 아예 압도적인 꼴찌 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다.그나마 신임 감독 김기태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이번 시즌부터 마무리로 전향한 봉중근이 뒷문을 탄탄하게 막아줘 시즌 초 5할 승률을 계속 수성하기도 하며 정말로 이제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나 했다. 하지만 역시나, 6월 22일부터 롯데와 KIA에게 연속 스윕패를 당하면서 5할 승률마저 무너지고 말았고, 그 과정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소화전을 내려치며 자책한 봉중근이 그대로 손등뼈 골절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며 그 결과 6월 29일에는 7위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연속 스윕패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셈. 그래도 7월까지는 반등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계속 하위권을 맴돌았다.
8월 들어 계속 하락세를 유지하더니, 9월 초에 이르러 당시 4위인 두산과 게임차가 벌어지면서 대부분의 팬들은 비밀번호 갱신이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낙담했다. 심지어, 9월 중순에는 당시 꼴지인 한화와의 게임차가 2.5게임까지 줄어들면서 8을 붙이는 거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9월 24일에 트래직 넘버가 소멸했다.[40] 이날 LG는 SK를 상대로 승리했으나 두산이 한화에 승리하는 순간 LG의 트래직 넘버는 0이 되었다. 이날 기준으로 한화와는 3게임 차이밖에 나지 않아 꼴찌로 떨어질 걱정까지 했지만, 한화의 탈꼴찌 트래직 넘버가 10월 1일 소멸함에 따라 일단 8이 붙는 것은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6위 넥센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비밀번호의 10번째 자리는 7로 확정되었다. 6668587667 완성. 결국 전력 출혈로 생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면서 최종 성적 57승 4무 72패 승률 .442로 이번에도 여지없이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선에서는 박용택이 장타자 전환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폼이 이전 만큼 살아나며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정성훈 또한 슬래시 라인을 3-4-5에 가깝게 찍을 정도의 좋은 비율을 기록하며 그 덕분에 wRC+는 178.5가 나올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거둬 박용택과 함께 팀의 타선을 이끌었다. 이 외에도 작은 이병규 또한 적은 경기수에 비해 정성훈과 비슷한 wRC+를 기록하는 좋은 타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선수들은 기대치에 미치지 않았다. 이진영은 뭔가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고, 이병규는 이제 에이징 커브가 오나 싶은 듯이 파워가 감소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했던 포지션은 포수. 조인성이 SK로 이적을 해버리는 바람에 새로운 포수들을 써야만 했고, 그 때문에 심광호, 윤요섭, 김태군, 조윤준, 유강남과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써봤으나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단번에 자리를 잡는 경우는 없었다. 이 외에도 위에 언급한 주축 선수들 모두 아무리 젊어봐야 30대 중반인 베테량들이며, 40대를 넘긴 선수도 있었기에 세대 교체는 시급해보였다. 하지만 정의윤, 오지환과 같은 선수들은 여전히 부족해보였으며, 위에 언급한 작은 이병규 또한 나이가 30대다.
투수에서는 주키치와 리즈가 저번 시즌의 모습과 비슷하게 잘해줬고, 불펜에서도 마무리 전환에 성공한 봉중근과 불펜의 핵심으로 거듭난 유원상, 그 외에도 신재웅, 임정우, 최성훈과 같은 새로운 인물들을 발굴해내는데 성공하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다만 작년 불펜 핵심인 임찬규와 한희를 마구잡이로 굴린 대가가 참혹해 이번 시즌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유원상, 이동현, 우규민을 똑같이 마구잡이로 굴리는 짓을 했다.
그리고 해당 시즌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팀 분위기를 개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구장 안팍에서 선수들이 직전 시즌 보여준 무기력함과는 다르게 조금이나마 더 잘해보자라는 분위기를 서서히 만들어나갔고, 이는 다음 시즌에서 그 분위기가 제대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결국 최종 순위 7위로 LG 트윈스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0자릿수 비밀번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4. 2013년: 비밀번호 탈출
4.1. 정규시즌
2013년, LG는 이번 시즌에도 신생팀 NC와 암흑기의 한화와 함께 3약을 구성하며 7위로 시즌을 마무리할거라는 예측이 많았었다.개막 이후 4월까지는 5할 승률 및 4위권 언저리에서 버티고 있었으나, 5월이 시작하자마자 역시나 부진한 성적으로 일찌감치 비밀번호를 한 자리 더 늘리는 것인가 하는 여론이 팬들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드리웠다. 그러나 5월 말 광주 원정을 스윕한 이후 6월 성적 16승 5패 승률 .762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단숨에 3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7월에도 그 기세가 이어져 무려 2위까지 올라가게 되는 대반전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운명의 8월, 무려 18년 만의 6할 승률과 더불어 선두 삼성을 0~2게임 차로 바짝 쫓으며 선두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고, 8월 20일에는 넥센과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기존 1위였던 삼성이 SK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삼성을 누르고 단독 1위를 탈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음 날 8월 21일에 넥센에 패하고 삼성은 SK에 승리하여 하루 만에 2위로 떨어졌다.
이후 8월 23일에 SK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며 시즌 60승 고지에 선착했다. 그리고 9월 4일 SK전에서 작은 이병규의 끝내기로 승리하고 삼성이 KIA에 2연속 고춧가루 세례를 당하며 15일만에 다시 1위에 등극했고, 이제 머지않아 이 지긋지긋한 비밀번호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더욱더 고조되고 있었다.
9월 18일 SK를 이기면서 SK를 6위로 다시 끌어내린 동시에 LG의 4강 매직넘버가 2가 되어서, 포스트시즌에 한걸음 더 다가서고 6668587667을 끝내버릴 기회를 잡게 되었다.
9월 20일 두산에게 패배해서 다시 선두 자리를 삼성에게 내주게 되었지만, 이틀 뒤인 9월 22일, NC를 이기고 넥센이 5위 롯데에 승리하면서 4강 매직넘버가 전부 소멸되었고,[41]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되면서 10년 동안의 기나긴 암흑기가 끝이 났다.
기나긴 비밀번호를 끊는데에는 먼저 팀의 베테량 선수들의 공이 컸다. 먼저 주장 이병규는 역대 최고령 타격왕을 거머쥐며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박용택 또한 작년에 이어 여전히 좋은 활약으로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외에도 정성훈과 이진영 또한 베테량으로써 팀에 힘을 보태주었고, SK에서 돌아온 권용관은 8월 10일 두산전 결승 솔로 홈런과 같이 후반기에 예상치 못한 활약을 해줬으며, 트레이드로 삼성에서 넘어온 현재윤과 손주인과 같은 선수들도 팀에 잘 녹아들었다. 베테량 선수들의 활약 덕분에 이 외에 김용의, 문선재, 정의윤, 오지환과 같은 선수들도 팀에 보탬이 되어 LG의 상승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LG는 팀 내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장타력 부재에도 불구하고 베테량 선수들의 활약 등으로 과거의 신바람 야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회생 불가 상태에 놓여 답이 없었던 투수진을 기어코 재건에 성공해냈다는 점이었다. 2년 전 팀의 토종 에이스 투수였던 박현준과 트레이드로 데려온 선발 유망주 김성현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발진에서는 리즈가 굳건히 선발 자리를 잡아주었고, 선발 전환에 성공한 우규민과 신정락,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5월부터 1군에 합류해 승률왕을 차지한 류제국이 선발진에 안착하면서 주키치가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팀이 안정적인 4선발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불펜진에서도 1997년 이상훈의 37세이브를 뛰어넘는 MBC-LG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인 38세이브를 기록한 봉중근을 필두로, 이상열, 이동현, 류택현과 같은 베테량 선수들이 중심축을 잡아주며 팀 평균자책점 1위를 거두는, 과거 LG를 기억하는 팬들 입장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최종전이 열리는 10월 5일까지 순위가 확정되지 않아 넥센, 두산과 2위 자리를 두고 피 말리는 경쟁을 하게 되었고, 최종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2위 경쟁팀인 두산이었다. 같은 시각 대전에서 진행중인 넥센과 한화와의 경기 결과에 따라[42] 2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최종전에서 2:5로 승리하고 같은 시각 한화가 넥센을 2:1로 잡으며 시즌 최종 성적 74승 54패 승률 .578로 정규시즌 2위를 확정지으며 무려 16년 만에[43] 플레이오프에 직행하였다!
4.2. 플레이오프
그렇게 해서 2013년 10월 16일, 2002년 11월 10일 이후로 멈춰있었던 LG 트윈스의 포스트시즌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상대팀은 바로 최대 라이벌팀 두산이었다.당초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최종전인 5차전까지 가서 리버스 스윕으로 올라왔고, 특히 연장전만 3번을 한 끝에 올라왔기에 체력적인 면에서 LG의 우세로 점치며 전문가들은 대부분 LG가 11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뤄낼 거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LG는 1차전에서부터 1회말 작은 이병규의 투런 홈런을 제외하면 어떠한 득점도 올리지 못하며 타격 부진을 겪었고, 수비에서도 포스트시즌 경험이 있어 중요하다 생각되었던 정성훈이 1회와 7회 두 번이나 실책을 저질렀으며 특히 7회는 결승 득점이 되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9회에도 한 점을 더 내준 결과, 4:2로 패배하며 가장 중요하다 여겨진 1차전을 패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2차전, 리즈의 8이닝 무실점 10K라는 역투로 2회말에 낸 2점을 지켜내며 0:2로 승리, 시리즈를 1승 1패로 되돌려놓았고 거기에다가 2차전 투수를 단 두명 밖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컸기에 3,4차전 불펜을 쏟아붓는다면 시리즈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3차전이 시작되자마자 그 희망은 부서지고 말았다. 이 날 LG의 실책 갯수는 무려 4개였고, 실책성 플레이와 주루방해까지 겹치면서 LG의 수비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나마 9회초에 동점 찬스를 두 번이나 맞이했지만 두 번 모두 최재훈이 온 몸으로 막아내는 투혼으로 홈에서 아웃되며 동점을 만들지 못한 채 게임이 끝나며 4:5로 패배. 다시 1승 2패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4차전 승리가 너무나도 절실해진 LG. 하지만 4차전에서도 2회말 또 김용의의 실책으로 점수를 내주며 끌려가며 남은 포스트시즌 희망이 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7회초 박용택이 좌중간을 꿰뚫는 적시 2루타로 동점을 만들며 다시 희망의 불씨를 살려나갔다. 그러나 기껏 살린 희망의 불씨는 7회말에 이종욱의 희생플라이로 점수를 내주며 다시 꺼져갔고, 승리가 급해 8회말 마무리 봉중근을 투입했으나 결과는 대타 최준석의 솔로 홈런과 오재일의 큰 타구를 박용택의 발을 맞고 굴러가는 바람에 타자주자가 홈에 들어오는 등, 1:5로 완전히 경기가 기우는 대참사가 터지며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결국 4차전도 1:5로 패배, 시리즈 스코어 1승 3패로 두산에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포스트시즌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세월을 포스트시즌 없이 보낸 세월은 그대로 플레이오프에서 여파가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고, LG는 플레이오프 4경기 동안 8실책이나 하며 자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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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라는 길고 긴 암흑기를 정규시즌 2위라는 기대를 뛰어넘는 호성적으로 끊어내어 11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은 것은 큰 성과이며 이는 향후 LG가 강팀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한 시즌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5. 비밀번호 탈출 이후
비밀번호를 탈출한 2013년 이후 LG는 12년 동안 494684443131의 최종 순위를 기록하며 8번의 포스트시즌을 경험하는 강팀으로 발돋움했으며, 특히 2019년부터 현재까지 7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며 포스트시즌 경험치를 풍부하게 쌓은 상위권의 팀이 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때 쌓은 경험치는 오랜 한을 푸는 밑거름이 되었다.다만 암흑기 탈출 직후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두 해인 2014년과 2016년은 4위라는 순위와는 별개로 승률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2014년에는 0.492의 승률로 5할이 되지 않았음에도 9팀 중 4위를 기록하였고, 2016년에는 딱 5할의 승률로 10팀 중 4위를 기록하였다. 2013년 두산이 0.568의 승률로 9팀 중 4위, 2012년 롯데가 .511의 승률로 8팀 중 4위를 한 것을 생각해보면 2014년과 2016년 LG의 정규시즌 4위에는 운도 분명 따랐음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2014년과 2016년 모두 1,2위가 압도적으로 치고 나갔으며[44], 그 때문에 중위권의 승률 디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중위권끼리는 서로 물고 물리며, 중위권 중 간발의 차이로 높은 승률을 기록한 LG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중위권에서 혼전이 일어났을 때 간발의 차이로 이긴 것도 실력이 좋아서 진출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중위권과 충분한 거리를 벌리며 안정적으로 포스트시즌에 가는 것이 훨씬 더 강한 팀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두 번 모두 준플레이오프에서 업셋을 하고 플레이오프까지 오른 걸 보면 실력으로 포스트시즌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했다.
물론 암흑기 탈출 이후 시행착오도 많았다. 2015년에는 그동안 발목을 잡았던 야수진의 고령화 문제로 시즌 내내 9위에 머물며 리빌딩을 해야했고, 2017년에는 외국인 타자가 중간에 런을 하는 악재와 같은 여러 이유들로 막판에 DTD를 하기도 했으며, 다음 해인 2018년엔 최대 라이벌팀인 두산과의 맞대결에서 1승 15패를 당하며[45] 다시는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쓰는 것도 모자라 6월 2위였던 순위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새까만 재가 되어버린 불펜진과 함께 무너져내려 8위까지 떨어지는 기록적인 DTD로 인해 향후 다시 암흑기를 열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하지만 그 이후 2019년부터 이천에서의 2군 팜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며 암흑기 동안 내내 LG의 발목을 잡은 육성이 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강팀으로 군림하기 시작하며 현재 7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냈으며, 2023년에는 그토록 바라던 통합 우승을 함으로써 10년 간의 암흑기는 어두운 과거로만 기억이 되게 되었고, 이제는 2020년대 KBO 리그 최강팀으로 자리잡았다.
6. 원인
LG 트윈스의 2009~2012 시즌 성적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4월에는 순위가 오르다가 5~6월 들어 순위가 내려가고 비밀번호를 연장한다는 점이다. 즉 처음에는 1위도 했다, 2위도 했다가 시즌 끝나면 순위는 잘해봐야 5위고 보통 6~7위 정도였다. 이런 패턴이 10년 동안이나 쭉 이어져왔고, 특단의 조치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2012년마저도 비밀번호를 찍으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일본프로야구에선 했지만 KBO 리그에선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대망의 열 자릿수 비밀번호가 완성되었다.그런데 MLB에서는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팀 16개 중 20자리 비밀번호를 작성하지 않은 팀은 뉴욕 양키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밖에 없다. 이유야 당연히 MLB는 초창기에는 리그 팀 중 절반이 아니라 리그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팀만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쥐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MLB의 20자리 비밀번호보다 이 10자리 비밀번호가 훨씬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라 봐도 무방하다.
6.1. 부실한 마운드
비밀번호가 만들어진 근본 원인이다. LG 트윈스는 비밀번호 첫 시즌인 2003년엔 팀 ERA가 3.98로 전체 2위를 기록했으나,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단 한 번도 팀 ERA가 4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밀번호 기간 LG의 팀 ERA 순위는 2-5-8-8-6-8-7-7-4-7이다. 정규시즌 2위로 암흑기에서 탈출한 2013년 팀 ERA는 3.72로 전체 1위를 기록한 것을 보면 마운드 부실이 LG의 암흑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타격왕 박용택 + 로베르토 페타지니 + FA 영입생 이진영과 정성훈의 존재로 경쟁력 있는 타선을 갖췄던 2009년에는 부실한 마운드 때문에 좀처럼 치고 올라가지 못했고 추격쥐만 양산한 채 DTD하면서 7위로 마쳐야 했으며, 큰 이병규의 복귀 및 이택근의 트레이드 영입으로 국가대표급 외야수 5명을 갖췄다는 빅5가 있던 2010년에 조인성이 몬스터급 시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6위에 그친 이유 역시 마운드 부실이었다.팀 ERA 2위를 기록한 2003년에는 이닝 1위 + 탈삼진 1위를 기록한 큰 이승호를 축으로 장문석, 전승남, 김광삼, 김광수, 이동현 등 나름 괜찮은 투수진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이순철 감독의 부임과 함께 레전드이자 투수진의 버팀목이었던 이상훈을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보내고 대신 FA로 영입한 진필중이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이때부터 LG의 마운드는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이동현은 2004년 시즌 중반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 뒤 토미 존 수술만 2번을 받으며 5년 동안 LG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토종 선발이 두 축이었던 큰 승호와 장문석은 2004년 이후로 더 이상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둘 다 FA 보상선수와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다.
2001년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마운드의 신데렐라였던 신윤호는 나왔다 하면 불만 지르다가 2007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좌완 파이어볼러 서승화는 툭하면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사고뭉치가 되었고 꼴랑 2승 23패만 기록하며 2011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고, 전승남은 2004년을 끝으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김광삼은 2005년까지는 그럭저럭 활약하다가 2006년 부상으로 개점휴업했고 타자로 전환해 3년을 보내다가 2010년에 다시 투수로 돌아왔다. 최원호는 2005년 13승을 거둔 것을 빼면 평범한 선발 투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며, 유리몸 기질로 인해 1군에서 이탈한 적도 많았다.
2006년 LG가 8개 구단 중 유일한 4점대 ERA를 기록하며[46] 창단 첫 최하위를 차지하는 굴욕 속에 심수창이 10승 투수가 되고 정재복이 ERA 3.58로 선전하며 LG 마운드의 희망으로 떠올랐으나, 2007년 김재박 감독 부임 이후 당장의 성적을 위해 마당쇠로 굴리기 시작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심수창은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한 끝에 2009년 6월 이후 승리 없이 연패에 빠지다가 2011년 중반 트레이드되었고, 정재복은 2009년 선발로 돌아와 두들겨 맞은 뒤 부상 및 재활로 1군에서 사라졌다. 2006년 중반부터 마무리 투수가 되며 17세이브를 기록하며 해당 시즌 팀 내 투수 WAR 1위에 오른 우규민은 2007년에 30세이브를 기록했으나 후반기부터 블론세이브를 남발해 13블론세이브로 아쉬운 모습을 보였고, 2008년과 2009년에도 끝내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경찰 야구단에 입대했다. 다행히 우규민은 경찰 야구단에서 선발 투수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2012년에 마당쇠로 활약한 이후 2013년부터 토종 선발의 한 축이 되며 LG의 암흑기 탈출에 앞장섰다.
2007년을 앞두고 두산의 에이스 박명환을 FA로 영입했지만 첫 해인 2007년에만 10승으로 활약한 뒤 2008년부터 부상 및 재활로 2년을 허비해버리며 먹튀로 전락했다. 2010년에 돌아와 4승을 기록한 뒤 부진해 2011년 신연봉제에 의하여 연봉 폭풍세일을 당했고 2012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2008년 정찬헌, 이범준, 이형종이 한꺼번에 입단했는데 정찬헌과 이범준은 무너져버린 마운드를 메우기 위해 입단 첫 해부터 억지로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해야 했으며, 정찬헌은 2009 시즌 불펜에서 노예로 혹사당하다가 결국 시즌 중반에 부상으로 이탈해 오랫동안 1군에서 볼 수 없었다. 이범준은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군복무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형종은 부상으로 2년을 방황하다가 2010년 박종훈 감독과 트러블을 빚은 뒤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부상으로 재이탈했다. 이후 "힘들어 못해먹겠다"는 글을 올리고 잠적해버리며 임의탈퇴 신분이 되었다가 군 복무를 마친 뒤 2013년 LG에 복귀했고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했다.
2011년 벤자민 주키치와 레다메스 리즈 전까지 외국인 투수 중 성공작은 2007년 대체선수로 들어와 2008년 봉중근과 원투펀치를 이루었던 크리스 옥스프링 하나 뿐이었다. 2004년 에드윈 후타도와 대체 외국인 브라이언 쿠퍼, 2005년 레스 왈론드는 실패작이었으며 2006년 아마우리 텔레마코와 매니 아이바는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텔레마코는 전혀 외국인 투수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방출되었고 마무리 투수로 낙점했던 아이바는 부상을 숨긴 채로 들어와 아예 1군에서 1경기도 등판하지 않고 팀을 떠났다. 대체선수로 버디 카라이어와 라이언 베로커가 들어왔는데 카라이어만 그나마 활약했고 그거마저도 불펜에서의 활약이라 한계가 있었다. 2007년과 2008년을 앞두고 삼성에서 재계약에 실패한 팀 하리칼라와 제이미 브라운을 영입했으나 둘 다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시즌 도중 웨이버 공시되었다. 하리칼라의 대체선수로 들어와 활약했던 옥스프링은 2년 연속 재계약에 성공하며 2009년에도 뛰게 되었지만 WBC 대회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개점휴업하다가 결국 웨이버 공시되었으며 그의 대체선수로 영입된 릭 바우어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부상으로 퇴출, 그의 대체선수인 제레미 존슨 역시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팀을 떠났다. 2010년에는 에드가 곤잘레스를 1선발로 낙점하며 영입했으나 0승 6패의 최악의 모습을 보인 채 웨이버 공시되었고 그의 대체선수인 필 더마트레는 국내 선수만도 못한 모습만 보이며 '더맞드레', '쳐맞드레' 라는 별명만 양산했다. 오카모토 신야는 불펜에서 나름 괜찮은 모습이었으나 구위가 뛰어나지 않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 기간 꾸준히 활약했던 선발투수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10승으로 에이스로 활약한 전직 메이저리거 봉중근이었다. 그러다가 2011년에 외국인투수 듀오 주키치와 리즈의 동반 성공에 2010년 트레이드로 영입한 박현준이 토종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선발 마운드에 숨통이 트였다. 그 박현준이 2011년 중반 트레이드로 영입된 김성현과 함께 승부조작 혐의로 방출되면서 LG 선발진은 다시 약해지게 되었다. 수술로 2011년 중반 시즌아웃되었던 봉중근은 2012년 선발이 아닌 마무리 투수로 LG에 복귀했다. 그러다가 2013년 리즈가 에이스로 활약하는 가운데 우규민이 사이드암 토종 선발로 자리잡고, 류제국의 등장과 함께 신정락과 신재웅이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토종 선발이 리그에서 경쟁력을 갖추었고 암흑기 탈출의 열쇠가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에이스로 활약해야 했던 벤자민 주키치가 태업 논란 끝에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눈앞에 다가온 정규시즌 1위를 아깝게 놓친 점이다.
선발투수도 문제였으나 마무리투수는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LG는 이상훈의 이적파동 이후 리그를 압도할만한 마무리투수를 보유하지 못했다. 이상훈의 이적 이후 마무리투수로 3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사례는 2007년 우규민이 유일했으며 20세이브를 기록한 사례조차 없었다. 2012년 봉중근이 마무리투수 보직으로 1군에 복귀하기 전까지 LG의 마무리투수는 매년 시즌 중 교체되기 일수였다. 안정적인 마무리투수를 기대하며 FA로 영입한 진필중은 화려하게 불을 지르다 '진필패'라는 오명과 함께 망해버렸고 1년 반의 혼란기 이후 2006년부터 우규민이 자리잡는 듯했으나 2007년 후반기에 흔들린 이후 2008년에도 불을 지르면서 마무리투수 보직은 정재복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정재복 역시 안정적인 마무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규민은 2009년에도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당해 트레이드로 이적해온 이재영이 마무리투수 보직을 맡기에 이르렀다. 2010년에는 외국인 투수로 일본 국적의 오카모토를 낙점했지만 초반에는 미스터 제로를 찍더니 점점 맞아나가고 ERA도 오르기 시작하며 마무리투수를 내려놓게 되었다. 2010년 후반기 마무리 보직을 소화한 김광수는 2011년 들어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그 역시 마무리투수 보직에서 하차했고 신인 임찬규가 마무리투수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1년 후반기 LG는 4위를 굳히기 위해 마무리투수로 송신영을 트레이드했지만 4위 진입에도 실패하고 시즌 후에는 송신영을 붙잡지 못하면서 FA로 떠나보냈다. 2012년 김기태 감독은 외국인 원투펀치 에이스 리즈를 마무리로 돌리는 실험을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 뒤 팔꿈치 수술로 인해 약 1년의 재활을 마친 봉중근을 선발 투수가 아닌 마무리 투수로 기용한 것이 성공하며 마무리 고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6.2. 프랜차이즈 베테랑 방출·전력에 보탬 없는 베테랑 수집
2003년 LG 프런트는 이광환 감독에게 구단과 척을 진 이상훈과 김재현, 류지현을 정리하라고 압박했다. 이광환이 이를 거부하자 성적 부진을 빌미로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내려보내고 주루코치였던 이순철을 감독으로 내세워 눈엣가시 정리에 나섰다.2003년에는 비록 부진했지만 아직 나이가 32세에 불과했던 류지현은 2004년에는 거의 전력외로 취급되었고 후배들 앞에서 배팅볼을 던져주는 굴욕을 당하며 은퇴를 종용받다가 바로 은퇴했다. 비록 SK와 한화의 오퍼가 있었으나 LG 프랜차이즈로 남겠다며 이적 대신 은퇴를 선택했다. 이상훈은 기타 사건을 빌미로 SK로 트레이드됐다. 이순철이 이 일로 가장 크게 욕먹고 있으나 근본 원인은 이들을 정리하라고 압박을 가한 프런트다. 선수협 활동 및 고관절 각서 사건으로 인해 구단과 마찰을 빚은 김재현은 2004년을 끝으로 FA를 선언했고, 결국 SK로 떠나 왕조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이들의 대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LG에는 육성 메뉴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트레이드 대상자와 FA 보상선수를 선택하는 안목도 꽝이어서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또 유망주들의 성장이 더디면서 당장 전력에 활용하기 위해 타 팀에서 퇴물 취급받은 나이 든 선수는 데려오는 우를 범했다. 전성기에서 두 번 이상은 내려온 강상수와 마해영, 최상덕 등을 데려온 것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전력에 거의 보탬이 되지 않았다. 위에 언급된 세 명만 하더라도 모두 1~2년도 버티지 못하고 LG를 떠났다.
6.3. 터지지 않는 유망주
6668587667이라는 암흑기 동안 LG에서 부진에 시달렸던 선수와 코치들은 모두 다른 팀에서 빵빵 터졌는데, 대표적으로 이용규, 김상현, 박병호, 박기남,물론 이 선수들은 모두 '언제든 크게 터질 수 있다고' 평가될 정도의 기본 실력을 갖고 있었던 선수들이지만 LG에서는 터지지 않고 1~2군을 오가는 백업으로 머물거나 아예 2군 생활을 주로 하다가 타 팀에 가자마자 터졌다.
혹은 박경수, 정의윤처럼 1군에 머물더라도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보이다가 팀을 옮기자마자 대폭발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저 둘은 팀을 탈출한 뒤로, 각각 2021년과 2018년에 우승반지까지 받았다.
한 두번이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오랜 암흑기 동안 이런 사례가 반복된다는 것은 LG 트윈스의 신인 육성 및 선수 기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2년의 박용택을 끝으로 신인이 데뷔 시즌에 1군의 주요 전력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없었다.[49]
리빌딩인지 윈나우인지 불확실한 팀의 스탠스와 함께 긴 호흡을 가지고 기다려주어야 했던 유망주들에게 1군에서 당장의 성적을 요구했다.[50]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1군에서 버텨주고 유망주들에게 큰 조언을 줄 수 있었던 주축 선수들은 프런트와 척을 지거나 조금만 부진해도 가차 없이 내쳐버리면서 올바른 육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거포를 영입해놔도, 소총수로 만들어버리는 짓거리들을 저지르고, 결국 영입은 죄 다 장타 가능성 없는 소총수들로만 채웠다. 오죽하면, 김용의처럼 이 시절 트윈스의 상징을 보여준 타자도 있고, 일발장타 기대하기에는 무리에 가깝던 삼진왕 오지환도 있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2020년대 이후로 유망주 육성이 빛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팀을 꾸준히 강팀으로 유지하고 2023년에 통합우승까지 올려놓는 초석이 되었다.
6.4. 인색한 신인지명
그리고 LG는 2군 선수층이 얇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1군 주전 선수들이 부상당하거나 부진할 때 자리를 메꿔줄 수 있는 선수들이 부족해서 리그 중반을 넘어서면서 뒷심이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후술할 코치진의 능력 등 육성의 문제도 있지만, 신인 지명에 인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2000년대 중반 신인 지명회의에서 LG는(각 년도마다 편차는 있지만) 5라운드 선에서 신인 지명을 그만두다시피하곤 했는데, 심지어 08년 신인 지명회의에서는 4라운드에서 연세대 진학이 확정된 나성범[51]
6.5. 철밥통 코치진
그리고 이 당시 무능한 코칭스텝들이 LG에 있는지라 유망주 성장이 더디고 선수들 실력 하락이 되었다고도 볼 수가 있다.제일 먼저 이순철 감독시기의 1군 메인투수코치는 한화에서 공무원 소리를 듣던 이상군이고 1군 타격코치는 KIA에서 무능하다고 욕을 먹는 것이 연례행사였던 이건열이다. 이 둘 다 크보 최악의 코치로 유명하며 수비코치 김용국 역시 2011년 전까지는 무능한 걸로 한 몫했던 인물로 코치진의 질이 상당히 낮았다.
다만 이순철 초기까지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황병일, 박상열, 박철영 같이 유능한 코칭 스태프들이 있었다. 2005 시즌부터는 그런 거 없었다. 이순철 감독이 껄끄럽다고 친히 2군 투수코치였던 김용수를 잘랐는데, 김용수는 능력이 미묘한 코치이긴 하지만[56] 팀의 레전드를 내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 뿐더러 그 와중에 이순철보다 연배가 높은 코치진들이 싸그리 내쳐졌다. 말년에 구단이 데려온 수석코치 양승호 정도를 빼면 이순철의 코치진들은 하나같이 악평을 받았다.
결국 김재박으로 감독이 바뀐뒤엔 코치들이 또다시 물갈이 되며 육성 시스템이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57] 2군 감독 김영직, 타격코치 김용달 주루코치 송구홍, 외야수비코치 윤덕규, 투수코치 양상문, 성영재 배터리코치 서효인, 2군 투수코치 김용수. 그러나 이 인물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무능했다는 점이다. 양상문은 8위 하고서 롯데 2군 감독으로 가버렸지만 대신 올라온 인물이 김용수였다. 김용수도 사람만 좋지 2군 코치 하면서 키운 선수가 없다는 점에서 영 좋지 않았다. [58]
그나마 이 시기에 유능한 코치가 없던 것은 아니다. 배터리 코치인 전종화나 일본인 투수코치인 다카하시 미치타케[59]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수의 능력자를 제외한 주요 코치진들은 말 그대로 무능했는데, LG 내부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주요 코치진들은 오히려, 선수들을 강하게 지도하지 못하고 순하게만 지도하며 무능함을 보여줬다.[60]
1군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여서, 2군 타격코치 서용빈, 2군 수비코치 유지현으로 유망주들을 못 키우는 인물들이 2군 코치를 하고 있었다.[61] 이 정도면 한화의 코치진 소위 칰무원들하고 다를바가 없다. 특히 김영직, 노찬엽, 서효인, 송구홍은 코치진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렸지만 실적은 아예 없었다. 이제는 쥐무원이란 멸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박종훈으로 감독이 바뀌면서 정진호, 김용수, 김용달, 윤덕규가 잘렸지만 그게 그거라 봐도 무방했다.[62]
거기에 운영팀장에서 현장으로 온 염경엽 수비코치[63], 권명철 투수코치, 윤학길 투수코치가 가세를 해 무능한 코치들로 가득 채워져있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명 투수코치로 유명한 차명석은 이 시기에 윤학길, 성영재에 밀려서 2군과 재활군을 오가던 코치여서 존재감이 없었다. 그 외에도 허문회 역시 2군코치로 있었는데 구단이 좋아하던 서용빈에게 밀려서 1군에 못 올라왔다.[64]
박종훈 2년차에 윤학길이 롯데 수석코치로 간 것과 김정민이 은퇴하면서 1군 배터리 코치가 되면서 서효인 코치가 잘린 것 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메인 투코도 최계훈이 새로 부임했다. 그런데 불펜 투코가 권명철이었다.[65]
결국 김기태로 감독이 바뀌면서 염경엽은 넥센 3루코치로 가버렸고 권명철이 두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성영재가 프런트로, 서용빈이 2군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차명석이 1군 투코로 왔으며 롯데에서 김무관을 1군 타코로 영입했다.
그리고 이걸로는 모자랐는지 김기태 2년차에는 계형철, 신경식, 이홍범, 김민호(전 두산) 등의 능력있는 코치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1, 2군 모두 훌륭한 코칭스탭들로 채워졌다.[66] 동시에 김영직과 최원호가 물러났으며[67] 이것이 어찌보면 LG의 4강 진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68]
23년에 LG가 통합우승할 수 있었던 데에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도움을 준 유능한 코치들이 있었고 특히 이호준 타격코치의 영입은 팀의 타격 뎁스를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6.6. 무사안일 프런트와 나태한 선수단
여기에 LG 트윈스의 진정한 문제점은 감독이 아니라 무사안일한 프런트와 나태한 선수단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실제로 LG에서 부진했던 김재박의 경우 프런트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선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등에 업고 현대 왕조를 건설한 바 있으며, 역시 같은 이유로 중도 사임한 박종훈도 두산 베어스의 화수분 야구의 중심으로 유망주 육성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었다.[69] 2011 시즌이 끝나고 방영된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에서 한 번 대놓고 특집으로 LG를 디스하는 방송을 내보냈는데 디스의 90%, 아니 99%가 프런트를 향한 것이었다. 방송 내내 비판의 강도가 아주 높았다. 과장 좀 하자면 패밀리 가이와 맞먹을 정도. 더 큰 문제는 방송된 내용 또한 프런트가 저지른 잘못들의 단지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애당초 이광용 아나운서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한 거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요약하자면 이재국 스포츠동아 기자[70]의 평이었다. "LG 사장은 뭐하러 오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최소한 야구는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위에 언급된 야구도 안 보시는 LG 트윈스 사장님은 바로 이 분 되시겠다.
위 영상에서 언급된 문제들은 한두 가지 문제가 아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프런트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영상 요약본.
- 프런트가 문제다. 이재국 당시 LG 담당 기자는 당시 8개 구단 중 가장 심각한 프런트라고 평했다.
- 역할 분담이 안 되어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화보 촬영 문제. 운영팀과 홍보팀이 서로 발이 맞지 않아 헤맸고 애꿎은 선수들만 욕을 먹었다.
- 프런트가 특정인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특히 수장 문제가 심각한데, 외부 인사들이 배치가 되고 자주 바뀌는 경향이 심각해 팀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야구를 모르니 잘못된 정보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장이 술 먹고 감독에게 주사를 벌이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는 상황도 연출이 될 정도로 문제라고 한다.
- 이용균 기자에 따르면 벤자민 주키치의 계약과 관련해 감독은 일주일 시간을 뒀다가 기자들에게 발표를 해달라는 구단의 요청에 승낙했지만, 정작 엉뚱한 데서 먼저 누설하는 바람에 졸지에 감독만 바보[71]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는 프런트 간에 손발이 안 맞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감독의 권위가 얼마나 땅바닥에 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용균 기자는 "아무래도 감독은 왕따구나."라고 평했다.
- 수석코치와 감독직에 대해 몇몇 코치진과 프런트와의 커넥션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도 제기했다. 정치적인 분위기가 가장 강한 팀이 LG 트윈스다. 즉 모 기업, 프런트와 코칭스탭에 파벌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 감독에 대한 권위가 없다. 프런트 인사들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XX아!"거리는 팀이 LG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에 이광용은 삼성이 감독을 존중하는 분위기[72]라 LG는 삼성이 하는 거 반대로 하는 거 아니냐[73]면서 대차게 깠다.
- 이러한 덕아웃, 프런트의 분위기는 선수단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보인다. 다음시즌에 FA가 되는 모 선수[74]는 100억을 줘도 이팀에선 못뛰겠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 이광용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LG 트윈스 관계자가 말했다. "LG 트윈스에는 두 가지 검은 세력이 존재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감독을 언제든 갈아치울수 있는 선수단 내의 세력,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장과 단장을 바꿔 끼우려는 프런트 내의 세력. 그 두 세력이 사라지지 않는한 LG 트윈스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매번 감독에게 전권(全權)을 부여한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비판했다. 이용균 기자는 이를 두고 전권(前權)과 후권(後權)이 나뉘어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6.7. 팬들의 몰지각함
다수의 LG 팬들은 위에서 설명한 문제들만 중요하고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LG가 암흑기를 겪은 데에는 팬들의 지분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김성근 감독 시절인 2002년에 LG팬들은 공식 홈페이지 쌍둥이 마당에 김성근 감독이 기존 스타들이나 박용택 등 엘리트 유망주 대신 최동수, 권용관 같은 무명을 쓴다고 감독과 해당 선수를 계속 욕했다. 특히 유명한 여자 팬은 최동수 등이 뼈가 부러지라는 저주를 쌍마에 올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매일 같이 '신바람 야구', 'LG 다운 야구', '이기는 것보다는 지더라도 납득이 되는 야구', '예상 가능한 오더[75]의 야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승리하나 패배하나 앵무새처럼 떠벌렸고, 준우승을 한 후에도 그런 비판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시는 쌍마는 김성근 감독 옹호파와 비난파(반대파)가 매일 피터지게 싸웠으나, 대체적으로 비난파가 더 강했다. 그래서 어윤태가 새로 프런트 수장으로 부임하면서 이들 LG팬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이 그렇게 원하고 노래부르던 이광환 감독을 기용한 것이다. 그때 김성근 반대 LG 팬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원하는 신바람 야구가 구현되게 되었다며, 어윤태와 이광환 감독 체제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리고 당시 LG 팬들 중 김성근 찬성파들 중 많은 수가 LG에 실망해 떠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LG 10년 저주의 가장 큰 원인은 2002년 무리한 혹사로 투수진을 박살낸 김성근[76]과 또한 이 시기 두각을 나타낸 최동수 등의 무명 출신 선수들을 증오한 LG팬들이다. 최동수가 그 뒤에 서용빈이 하락세를 탐과 동시에 유명 선수로 성장하고서 다른 박병호 같은 2군급 선수가 1루에서 삽질을 하면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LG의 암흑기가 길어지면서 결국 프런트는 현대 유니콘스 계열의 김재박 사단을 영입하게 되는데 기존에 있던 LG 코치진들과 융화가 잘 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고, LG팬들 사이에서는 코치들 내에서 파벌이 있다는 루머까지 나돌기 시작했고, 그렇게 되면서 프런트가 팀에 적합한 선수단을 구성하기 보다는 팬들의 눈치를 보면서 여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암흑기를 더 길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의 정점이 된 사건이 염경엽과 김기태 감독 부임 초기의 정치설 논란. 물론 이쪽도 프런트의 책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닌게, 이순철 감독 시절에 팀의 레전드를 내친 이후로 LG 팬들의 프런트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3년 이후로 2시즌 동안 가을야구를 하게 되면서 당분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2015년 9위 추락으로 비밀번호 재림을 두려워하는 팬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투수층이 두터워지면서 보직 재배치만 제대로 해준다면 반등의 여지를 지니고 있으며, 15시즌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된 야수진 고령화 문제는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고,[77] 이들을 대신할 야수 자원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2016년 이후가 도약이냐 추락이냐의 기로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극성팬들은 프런트를 쥐고 흔들기 보단 맘에 들지 않는 감독이나 단장, 선수에 대한 악플을 달며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기도 했다. 2016시즌 채은성, 이천웅 등 기존자원의 발견과 김용의의 각성 등으로 인해 라뱅은 2군에서 4할을 침에도 시즌 마지막까지 1군에 못 올라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리가 없어서였다.[78] 2013년 마지막 불꽃 이후로 나름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그의 OPS는 6할이 간당간당했고 타율은 2할 초반에 그쳤다. 이 정도의 타격 성적이면 2루수나 유격수여도 욕을 먹을 마당에 그는 지명타자로, 타격으로 모든 걸 보여줘야 하는 선수였다. 이렇듯 팀 체질 개선 및 본인의 노쇠화로 라뱅의 자리가 1군에 없었지만 극성팬들은 여전했다. 이병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잠실 외야에 '상문아 우리는 네가 부끄럽다'라는 현수막을 걸었고, 이에 당시 주장이던 류제국은 부담스럽다고 인터뷰를 할정도였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사건 이후로 엘지는 급격히 반등해서 4위를 마크했고 이 극성팬들은 이 해의 성과를 자신들이 선수단과 감독을 정신차리게 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중이다. 더욱 어이없게도 이 극성팬들은 이병규가 한창 1군에서 삽을 푸던 2015년엔 양상문이 이병규를 기용한다는 이유로 신나게 깠다.
해가 가도 이들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정성훈이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주전 경쟁에서 밀렸지만 이들은 팀의 4번타자인 양석환을 못 마땅해하며 정성훈을 쓰도록 강요했다. 더불어 주전 2루수인 손주인의 나이가 많아서 새로운 자원을 시험하기 위해 강승호, 정주현 등을 테스트했지만 극성팬들은 손주인을 왜 벤치에 두냐고 한탄했다. 덤으로 이들 눈에 띈 또 하나의 선수가 있었는데, 바로 이형종. 2017시즌 4월, 4할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제일 잘나가기 시작하자, 이들은 당시 소포모어 징크스+삼재+금단현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시달리던 채은성을 2군에 박아놓으라고 악플을 일삼았다. 물론 당시 채은성의 성적은 예년에 비하면 재앙이었던건 맞지만 채은성이 홈런을 치는 날조차 칭찬 한마디 없었으니 그 도가 너무나도 지나쳤다. 이 외에도, 원 포인트 릴리프인 진해수를 왜 우타자 상대 안 시키냐고 까는 등 이진영, 이병규, 정성훈, 손주인 등으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양상문을 어떻게든 무슨 이유를 들어서든 까는데에 앞장섰고, 그에 대한 평가는 4번의 시즌 중 2번의 가을야구와 팀에 새로운 얼굴들을 비추게 했음에도 이순철과 동급 취급을 당했다. 물론 팀 사기는 박살나서 신나게 롤코를 타다가 DTD로 추락했다.
2018년, 정성훈이 방출되어 KIA로 가고 허프는 일본으로 떠났으며 손주인이 2차 드래프트로 삼성으로 떠나자, 팬들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이들은 단장으로 영전한 양상문이 김현수의 영입을 성공하던 말던 소사 재계약을 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79] 이들은 신임 감독 류중일에게도 불만을 품었다. 부상당한 이형종은 그렇다쳐도 이천웅이 아니라 양상문의 양아들이자 적폐로 둔갑한 채은성이 시범경기 주전 우익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은성이 시범경기에서 매 경기 안타행진을 하며 무력시위를 함에도 이들은 채은성에게 꾸준히 악플을 달며 저주를 했고, 실제로 4월까지는 퐁당퐁당으로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이천웅 주전설이 퍼졌지만 정작 이천웅은 1달 내내 3안타를 치며 부진의 끝을 달렸다.
결국 이 해 채은성이 각성을 하며 팀 역사를 싹다 갈아치웠지만 언제나 이 극성팬들은 이형종과 이천웅이 먼저였다. 덤으로 유강남도 까였는데, 존재조차 하지 않는 투수리드를 탓하며 신나게 터져나가는 투수들을 대신해 까였다.[80] 이 투수진은 LG 팬들에게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인 차명석에게 키워진 존재들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주전포수인 유강남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있으니 정상호를 쓰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 참고로 16~17시즌 정상호의 WAR은 약 -2였다. 거기에 3루수로 낙점된 가르시아가 드러누워만 있자, 주전 1루수인 양석환이 3루수를 맡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자 팀의 1군급 중 1루를 볼 수 있는 선수는 4명뿐이었다. 김현수, 김용의, 서상우, 김재율. 하지만 서상우의 수비는 극혐이었고, 김재율은 2군에서조차 부진했다.
마침 김현수, 이천웅, 이형종, 채은성 모두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성적을 기록하자 타선의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김현수를 1루로 돌렸다. 하지만 이 일 역시 극성팬들의 타겟이 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국대 좌익수를 1루수로만 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현수가 좌익수로 나가면 1루를 김용의가 보고 이천웅, 이형종, 채은성 중 1명이 벤치를 지켜서 타선의 주포가 한명 사라지고 식물이 하나 들어가는 참사가 발생하는데도 이들은 꾸준히 김현수의 좌익수 기용을 외쳤다. 물론 결과적으로 시즌 막판에 김현수가 1루 수비도중 시즌아웃 되며 이들의 말이 맞았지만 이들은 대안없이 김현수의 좌익수 투입을 주장했다. 그리고 김현수의 부상 이후 서상우와 김용의가 1루를 봤지만 한명은 눈이 썩는 수비를, 한명은 눈이 썩는 타격을 보여주며 또 DTD였다.
2019년에는 양상문 대신 새 단장 차명석이 오자 급속도로 팬들은 프런트의 편을 들었다. 이런 충성심은 백순길, 송구홍, 양상문 시절에도 없었는데, 투수코치로서 능력을 입증했었던 차명석이 아무것도 안 해도 ‘믿습니다 차단장님 충성충성^^7’을 외치며 프런트에 힘을 실었고, 프런트는 장원삼, 심수창, 전민수 등 타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을 영입하며 보답했다. 물론 이 중 잘 영입했다 싶은건 전민수와 이성우 뿐. 장원삼은 5선발 후보로 나와 불만 질렀으며 심수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민수는 다행히도 대타로써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외야자원이 차고 넘치다 못해 썩는 엘지 입장에선 잉여로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81] 이성우는 사람수준도 못 되는 정상호 대신 백업으로써 좋은 활약을 했지만, 이는 또다른 불씨가 되었다. 유강남이 잠시 손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타격에서 병살을 양산하고 투수들의 실점이 조금 늘자, 유강남의 리드가 잘못이라 투수가 터지니까 유강남 갖다 팔고 주전으로 39살인 이성우를 쓰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힘을 얻었고, 이에 위축된 유강남의 성적은 점점 나락으로 파고 들기도 했으며 정주현 역시 까였는데, 손주인의 뒤를 잇는 주전 2루수인데다가 기복에 따라 5툴과 무툴을 오가는 정주현인데, 결국 못 하는 것만 부각되며 역대 최악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19시즌 정주현의 WAR은 양수이지만 18시즌 손주인의 WAR은 -1점대. 채은성은 올해에도 부당하게 까였는데, 전반기 팀내 셋 뿐인 3할타율을 치지만 여전히 4옵션으로 전락한[* 공인구 변화에도 홈런을 9월 18일 기준 지난해와 동일한 13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이 있지만 문제는 클러치 능력. 외야 주전 4인방 중 유일하게 득점권 타율이 3할 미만이다.
2022년 플레이오프에서 최악의 졸전으로 1승 후 3연패로 키움에 업셋을 당해 구본능 구단주 대행의 극대노를 유발하여 류지현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염경엽을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하자 이에 극성팬들은 LG 야구 망했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11년 전인 2011년 자신들이 퍼뜨린 온갖 악성 루머로 LG에서 떠나게 만든 염경엽 감독을 상대로는 커뮤니티 등을 통해 온갖 악담을 퍼붓기도. 심지어 LG가 선두 경쟁을 하고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어도 주루&작전 미스 등으로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히면 온갖 비난을 퍼부어댔고 과연 진정 LG팬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82] 패배주의적인 글들을 마구 생산해냈다. 그러나 염경엽 체제의 LG가 시즌 중 맞이한 온갖 악재들을 극복하고 강력한 전력을 기반으로 강한 뒷심과 위닝 멘탈리티를 동원해 2023년 29년 만에 정규시즌 우승을 이룬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1패 후 4연승으로 통합우승까지 성공시키면서 진정한 야알못은 극성팬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2025년 또 한 번 통합우승을 하면서 확인사살...
심지어 202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선수단의 우승 축하 행사에도 일부 몰상식한 관중이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7. 유사한 비밀번호 사례
7.1. 목록
-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과 7A788777: 한 때 LG의 비밀번호와 쌍벽을 이뤘었던 비밀번호이자, 2024년 현재는 한화의 비밀번호와 쌍벽을 이루는 비밀번호. 1992년 마지막 우승 이후 암흑기 이전인 2000년까지만 해도 가을야구에 3번 진출해 그 중에 준우승을 2번[83]한 어느 정도 강팀이였고 2008년 1차 암흑기 청산 이후만 해도 5연속 가을야구 진출에 플레이오프만 2번 두드린 가을야구 단골팀이였지만, 그 이후 2013년-2025년까진 단 1번만 가을야구에 나가는 약팀이 되었고, 결국 2차 비밀번호까지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 중에서 유일하게 우승 공백이 30년을 넘고, 한국시리즈 진출 공백도 20년이 넘는 팀이다.
- 한화 이글스의 5886899678: 2023년 현재 기준 위의 롯데와 같이 쌍벽을 이루는 비밀번호, 한화는 1999년 첫 우승 이후부터 암흑기 시작전인 2007년까지만 해도 가을야구에 4번 나가고, 그 중에 1번은 준우승을 했던 어느 정도 중상위권 팀이였지만, 10년 간의 암흑기 청산 이후 가을야구 진출이 단 1번밖에 없으며, 그 뒤엔 9위 - 3연꼴 - 9위란 성적을 만들어 내며 2차 비밀번호가 유력한 구단이다. 그나마 롯데보다 다행인 건 21세기에 한국시리즈에 두 번 진출했다는 점과 2차 비밀번호 생성을 막아냈다는 점이다.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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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단 | 비밀번호 | 기간 |
| 태평양 돌핀스 | 6366677 | 1982~1988년 |
| 롯데 자이언츠 | 8888577 | 2001~2007년 |
| LG 트윈스 | 6668587667 | 2003~2012년 |
| 한화 이글스 | 5886899678 | 2008~2017년 |
| 롯데 자이언츠 | 7A788777 | 2018년~진행 중 |
[1] 1995년산 오키나와 아와모리 소주로, 43도로 꽤 독하다. 증발과 오염에만 신경써준다면 100년 이상 보관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증류주 참조. 그런데 2020년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보관을 잘못했는지 술이 거의 증발해 버려서 2017년에 새로 채웠지만 2023년에 또 대부분이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다행히도 술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고, 우승 직전 LG에서 오키나와로 급파한 직원이 추가로 두 병을 더 사왔다고 한다. 기사 그리고 11월 17일에 열린 축승회에서 뚜껑을 뜯고 축배를 들었다.[2] 여담으로 LG의 2002년 한국시리즈 출전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 27명 중 LG의 2013년 플레이오프 출전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는 이병규, 박용택, 이동현, 권용관, 류택현까지 총 5명이다. 정현욱, 현재윤은 2002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있었으며, 류지현은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주장이었으나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코치가 되었다.[3] 2010년에 찍힌 사진이며, LG는 이후 3번이나 비밀번호를 더 늘려야만 했다.[4] 경동택배, CJ대한통운, 한덱스, 한진택배, 롯데택배, 편의점 택배, DHL, KGB. 참고로 9자리였던 시절엔 일양로지스도 있었다.[5] 2020년 설문조사에서 그때 학창 시절을 보낸 20대 LG 팬 비율이 처참하게 나오는 것이 그 증거이다.[6] 오죽했으면 삼성이 2024년에 정규시즌 2위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이 2020년대 KBO 리그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라 평가받을 정도로 삼성의 전력은 다른 팀들에 비해 크게 떨어져 있었다.[7] 한대화나 김응용이 뭔가를 해보는 듯 했으나 결국 애매하게 끝내서 평가하기도 미묘하다.[8] 2019년 이후로는 7년 연속 진출하고 있다.(4443131)[9] 주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엘린이 자녀를 둔 LG팬 부모와 자녀 간 대화나 최근 LG팬으로 유입된 사람과 오래 전부터 응원해 온 LG팬들 간의 대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1990년대에만 세 번이나 최하위를 하며 '꼴비'라고도 불리던 시절부터 OB 베어스를 응원한 두산의 올드 팬덤과 2000년부터는 포스트시즌 단골이 된 이후로 2015년부터 7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할 정도로 리그에서 가장 꾸준한 강팀이 된 두산의 젊은 팬덤의 사이의 입장이 다른 것과 똑같다.[10] 다만 관리 야구 자체는 2000년부터 시작된 이광은 시절부터 이어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광은이 어설픈 경기 운영과 선수단 관리 실패 등으로 인해 조기에 해임되고 관리 야구로 유명한 김성근이 취임하면서 그 색채가 짙게 굳어진 것이다.[11] 참고로 시즌 후반부에는 원정 경기 16연패라는 수모를 당했다.[12] 2002년 5월 중순에 복귀하여 52경기에 등판하여 85이닝을 던졌다. 거기에 더해 이상훈은 포스트시즌에서도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계속 던졌다. 30대 중반의 불펜투수를 이 정도나 굴렸으니 다음 시즌에 그 여파가 드러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13] 명목상 이광환 감독의 자진 사퇴 후 2군 감독 임명이었지만, 실상은 구단이 못 미덥다고 생각한 이광환 감독을 자르고 선동열을 새 감독으로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이광환 감독이 알아서 사의를 표명한 쪽에 가깝다. 또한 이광환 감독은 94년 신인 3인방 정리 문제 등으로 프런트와 갈등이 있던 상황. 정작 선동열은 은사인 김응용 감독이 있는 삼성 수석코치로 가면서 LG 프런트는 똑같이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김인식 감독을 짜른 두산 프런트와 함께 뒷목을 잡는다.[14] 이동현은 세 번의 팔꿈치 수술 끝에 2009년이 돼서야 1군 마운드에 돌아왔다.[15] 요약하자면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었다.[16] 사실상 이 때부터 LG의 암흑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팀의 프랜차이즈 출신 베테량 선수들인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과 같은 선수들을 모조리 내쳐버리면서 중심추가 사라지며 팀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17] 하지만 이로 인해 차기 드래프트 순번에서 손해를 봤고, 그 2위 경쟁을 하는 팀이 다름 아닌 두산이었기에 두산의 정규시즌 2위 및 한국시리즈 진출에 공헌하는 꼴이 되며 결과적으로 LG 입장에서는 남 좋은 일만 하게 되었다.[18] LG 트윈스로 팀명이 바뀐 1990년부터 LG는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에 최소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징크스가 있었기에 최소한 포스트시즌 진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던 이들이 있었다.[19] 애초에 개막전 선발투수라는 중책을 타 팀에서 트레이드로 넘어온 노장이 맡았다는 것 자체가 LG 마운드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0] MBC 청룡 시절인 1988년과 타이 기록[21] 해당 시즌 리그 평균자책점이 5.21이라는 극심한 타고투저라는 것을 감안해도 팀 평균자책점이 6.35라는 경이로운 ERA를 기록한 2014년 한화보다 더 낮은 기록이었다.[22] 우규민 이외에 팀 내에서 2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들 중 프로야구 전체 ERA인 3.58보다 낮은 ERA를 기록한 투수는 경헌호와 카라이어 외에는 없었으며, 이 둘의 선발 등판 회수는 단 3회에 불과했다.[23] 당시 현대에서 코치는 물론이고 트레이너, 스카우터, 프런트까지 김시진과 같은 일부 인물을 제외하면 김재박을 따라서 LG로 이동했다. 이 당시 현대 출신 인물들 중 일부는 지금도 LG에 남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 중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카우터 백성진. 스카우트팀 차장을 거쳐 2017년 말 기존의 스카우트 팀장이던 김현홍의 후임자로 팀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신인 스카우트를 이끌기 시작하더니 지명된 유망주들이 2군에서 가능성을 보이며 1군에서 포텐을 터뜨리며 성공적으로 팀에 자리잡는 등의 성과를 보이며 유망주의 무덤이라 불리우던 LG의 유망주 팜을 재건하는 데 1등 공신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2025년 현재도 일선에서 활약 중이다. 또한 스카우트와 운영팀장을 거쳐 1군 수비코치로 활동하다 넥센으로 자리를 옮긴 염경엽은 2023년을 앞두고 LG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의 29년 만의 우승을 이끈다.[24] 시즌 초반에는 마해영에게 팀의 중심타선에서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28타수 2안타 타율 .071로 완전히 폭망해 5월에 2군으로 내려간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25] 김성근이 실업야구에서 뛰던 김우석의 수비력만 보고 강력하게 요청해서 2차 1라운드로 지명했다. 참고로 바로 다음 순서에서 뽑힌 두 내야수가 조동찬과 고영민이다. 알려지지 않은 LG 시절 김성근의 흑역사 중 하나.[26] 참고로 이 해 거둔 성적이 LG가 암흑기를 거치면서 가장 성적이 좋았을 시기였다.[27]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암흑기였던 KBL 서울 SK 나이츠도 07-08시즌 5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주희정의 안양 KT&G 카이츠에게 2전 전패로 패퇴했다. 이 시즌 서울 SK는 암흑기 시절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 오른 시즌이다.[28] 구단주 - 프런트 - 선수단 - 코칭스태프 등이 서로 융화되지 못 했고 구단 측의 행보로 인해 분위기가 굉장히 흉흉했었다.[29] 물론 이 당시에는 김상현의 주 포지션이었던 3루수 자리에 FA로 영입한 정성훈이 있었기에 자리가 없어 길 터주기 용도로 트레이드가 되었던 것이었다. 트레이드 직후 곧바로 김상현이 당해 MVP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30]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를 통틀어서 6위를 가장 많이 한 구단은 LG이며, 7위를 가장 많이 한 구단은 한화, 8위를 가장 많이 한 구단은 롯데다. 다만 최하위 횟수로 줄을 세울 경우 한화와 롯데가 공동 1위.[31] 하지만 이 빅5는 오히려 LG에게 있어서는 독이 되었는데, LG가 그렇게 터지길 기원하던 우타 거포 유망주들인 정의윤과 박병호의 주포지션인 외야수와 1루수 자리에 빅5 선수들을 모두 기용해야 했기에 이들에게 주어진 출장 기회는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일례로 박병호는 2009년 말에 이택근의 트레이드 소식을 접하고 난 이후 집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저 이제 야구 그만해야 할까봐요" 라고 펑펑 울기도 했다.[32]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승률 기준으로 하면 LG가 5위이지만, 당시에는 무승부를 패배로 간주하는 승률제였기에 KIA가 5위가 되었다.[33] 류현진, 차우찬, 양현종, 전병두, 장원준 등.[34] 실제로 그 당시에는 30승 선착팀은 무조건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기에 많은 LG팬들의 기대치는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35] 그 특유의 조급증으로 인해 안그래도 별로 쓰지도 않는 불펜투수인 한희와 김선규와 같은 필승조들의 부담이 더욱더 가중되었으며, 박현준과 같은 선발투수들을 불펜으로 당겨쓰기도 시작되었다.[36] 이 트레이드는 단순한 트레이드가 아닌, 한국프로야구의 미래를 바꾼 엄청난 트레이드가 되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박병호는 이 트레이드 이후 그저그런 유망주에서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홈런타자가 되었는데 반해, 송신영은 잔여 시즌간 LG 마무리로 쏠쏠하게 던져줬으나 시즌 종료 후 LG 프런트의 냉대 속에 FA를 통해 한화로 이적했고, 김성현은 전 소속팀에서 승부조작을 해버리는 바람에 영구제명되어 말 그대로 LG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는 트레이드였다. 거기에다가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뒷돈 15억까지 껴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LG는 더욱더 비참해졌다.[37] 정리하자면 처음 두 달 동안 30승을 거두고 나머지 네 달 동안 29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세세히 따지면 첫 두달 30승은 한달에 15승이나 했다면, 나머지 네 달은 한달에 정확히 7.25승, 약 7승으로 무려 절반을 깎아먹었다.[38] 웬만해선 깨지지 않을 거 같은 기록이었지만 불과 2년 후, 타어강으로 대표되는 KIA가 1위에서 8위로 추락하는 대참사로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kt와 NC가 17시즌과 18시즌에서 1위에서 10위로 곤두박질치며 다시 기록을 경신했다.[39] 특히 송신영은 이적 과정에서 프런트 담당자가 욕설을 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아예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후문. 반면 한화는 운영팀장이던 그 이상군이 직접 공을 들였을 정도였다.[40] 공교롭게도 2011년에도 같은 날 트래직 넘버가 소멸했다.[41] 한편, 한화의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9위 확정도 이날이었다.[42] 당시 넥센은 한화를 상대로 승리하면 자력으로 2위가 될 수 있었고, 지면 자동으로 3위가 확정되는 상황이었다.[43] 단일 리그 기준. 양대리그까지 포함하면 2000년 매직 리그 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것 이후로 13년 만이다.[44] 2014년엔 삼성과 넥센, 2016년엔 두산과 NC가 치고 나갔다.[45] 그 1승 마저도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차우찬이 134구 완투승을 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겨우 1승을 거둔 것이었다.[46] 이 시즌은 투고타저 시즌이다. 다른 시즌, 특히 타고투저 시즌이었다면 4점대 평균자책점이 상위권일 수도 있었지만 투고타저 시즌이라 저게 팀 평균자책점 최하위가 되었다.[47] 사실 스카우터로 능력이 좋은 편이었다. 당초 LG 트윈스로 온 것도 스카우터로 온 것이었고, 문제는 수비코치 시절로 이 시절 재수가 없었는지 파벌 설이 떠돌아서 오해와 의심을 받으면서 죽도록 까였다. 결국 넥센에서 명장이 되어 재기에 성공했으나 SK 감독 재임 때는 망했다. 하지만 4년 후인 2023년 LG 감독으로 부임한 후 첫 정규리그 우승, 더 나아가서 한국시리즈에서 29년만에 LG를 우승시켰다. 거기다 2025년 시즌에도 우승하여 LG 트윈스를 2번이나 우승시킨 감독이 되었다.[48] 서건창은 신고선수 신분이었고 부상 때문에 방출된 것이라 탈쥐효과의 사례로는 부적절하다. 공교롭게도 서건창은 친정 팀인 LG로 트레이드된 후 끝 없는 내리막을 타면서 입쥐효과가 발동해버렸다.[49] 당시의 대졸 신인과, 현재의 고졸 신인이 1군에 자리잡는 과정을 완전히 동일하게 볼 수는 없겠지만, 옆동네 두산만 보더라도 김현수처럼 대졸 1년차 혹은 고졸 2년차에 바로 주전 차지한 사람도 많고, 심지어 타 팀에서 필요없다고 방출당한 사람이 신고선수로 힘들게 입단해서 그 해 바로 도루왕을 차지한 이종욱의 경우도 있고. LG는 고졸 출신, 대졸 출신을 가리지 않고 박용택 이후 2013년까지 프로 입단 2년 이내에 1군에 주전으로 자리잡은 선수가 현 주전 유격수 오지환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2019년 이후 고우석, 정우영, 문보경 등이 나온 이후에야 해결되는 모양새다.[50] 이정후나 강백호처럼 데뷔 시즌부터 자리잡는 고졸 야수는 극소수다. 대개 20대 중후반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51] 나성범의 경우는 기량과는 상관없이 집안 내에서 은퇴 이후의 진로도 생각해서 대학 진학을 건의해서, 어느 팀의 지명 여부에도 상관없이 대학 진학을 이미 결정한 상태였는데 프런트가 냅다 지명한 경우이다.[52] 양의지, 오재원, 한유섬, 문성주 등[53] 김현수, 박해민, 서건창 등 아이러니하게도 이 들은 2023년 현재 모두 LG 선수들이다 서건창은 방출당한 건 안 비밀[54] 특히 LG가 무려 115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영입한 김현수 역시 신고선수 출신이다.[55] 이와 비슷한 문제를 겪은 팀이 한화 이글스로, 신인 지명에 인색했고 당장의 즉시전력감으로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들을 주로 영입했다. 2007년까지는 어찌어찌 포스트시즌에 꼬박꼬박 갔지만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그 대가를 치렀다.[56] 1기 시절에는 평범한 이미지였는데, 정삼흠 - 이상군으로 이어지는 무능한 1군 투수코치들 때문에 반사 효과로 유능한 이미지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57] 사실 구단은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를 2군 감독으로 보내서 육성을 맡길 계획이었으나 정작 양승호는 고려대학교 감독으로 갔다.[58] 그나마 김용달은 잠깐이지만 이대형의 포텐을 터뜨린 공이 있고 타 팀에서도 적당히 철밥통으로 살아남았고, 윤덕규는 코치 경력이 너무 짧아서 평가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LG 외야는 암흑기 시절에도 상위권으로 손꼽혔고 수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59] 다카하시는 LG와 주니치가 자매 구단이었다는 점 때문에 LG에서 거의 모셔오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이 쪽은 감독이 김기태로 바뀔 때 정리되었고 과거 주니치 시절의 제자인 선동열을 따라 KIA로 갔으나 폭망하고 한국을 떠났다.[60] 실제로 2009 시즌을 보면 양상문이 롯데 2군 감독으로 가고서 1군에 올라온 김용수 코치는 주전 포수인 조인성과 심수창이 신경질이나 부리며 싸우는데도 말리지도 못하고 당황한 모습만 보였다. 코치의 인품을 떠나서 코치가 선수들을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는 그 자체가 충분히 문제 있는 것이다.[61] 뭐 적어도 유지현은 2013~2014년에 1군 수비코치로서 제 몫은 뒤늦게나마 해냈다.[62] 애초에 정진호, 김용달, 윤덕규는 김재박 사단이었으니 교체될 운명이기는 했다. 김용수는 프런트로 전출되었으나 중앙대 감독으로 가면서 바로 사직했고.[63] 원래 이 사람은 단장이나 주루코치에 어울리지, 염경엽에게 수비코치를 맡기는 건, 정현욱, 이대진에게 투수코치를 맡긴 꼴이라는 흉물취급 수준이였다. 이는 넥센 가서도 수비 능력이 하위권인 건 마찬가지.[64] 그리고 잘려서 상무로 갔다가 염경엽의 부름을 받아 넥센의 타격코치로 가버렸다.[65] 물론 메인투수 코치는 최계훈이었다.[66] 이 중에서 계형철과 이홍범은 김성근 사단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이고, 김기태 감독과 쌍방울 시절에 함께한 사이이다. 신경식도 쌍방울 시절의 인연이 있고, 김민호는 국가대표팀에서 함께한 사이.[67] 최원호는 피칭 연구소 개업을 하고 해설위원으로 일했다. 다만 최원호는 능력을 평가하기에 애매한 인물이기는 했다. 연수도 안 다녀오고 2년간 2군에서 일했던 인물이니... 이후 한화 2군 감독으로서 보여준 능력은 제법 준수했다.[68] 다만 계형철, 이홍범 코치는 김성근 감독을 따라서 한화로 갔고, 김민호 코치는 조계현 2군 감독과 같이 김기태 감독 따라 KIA로 갔다.[69] 그래서인지 2013년부터 NC 다이노스 육성이사로 있으며 좋은 평을 받았고, 2017년 한화 이글스 단장으로 취임한 뒤로도 2군을 재정비하며 여러 업적을 쌓아가며 호평을 듣는 중이다.[70] 당시 LG 트윈스 담당 기자였다. 본인이 이 방송에서 예언했듯이 방송 이후 2012년에 넥센 히어로즈 담당 기자로 보직 변경했다. 그리고 2013년 삼성 라이온즈 담당 기자로 삼성의 6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동영상 내내 얼굴을 붉혀가면서 분노 스킬을 시전하는 걸 보면 본인도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71] 기자들이 계약 건에 대해 알고 물어봤지만 당연히 감독은 위에서 시킨 대로 말했지만 이미 기자들은 구단 측에서 발표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72] 자신이 감독보다 선배라 하더라도 존칭을 붙여 감독님이라고 부르는 것. 실제 삼성은 2011년 당시 류중일 감독보다 선배인 김성래, 장효조(같은 해 9월 간암으로 타계), 양일환, 성준 등의 코치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감독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존대했다.[73] 참고로 LG와 삼성간은 야구 외 적인 측면에서도 경쟁심리가 강해, LG가 MBC 청룡을 인수한 1990년 이래로 근 23년간 서로 트레이드도 하지 않았다. 2012년 시즌 후 김태완, 정병곤, 노진용 ↔ 현재윤, 김효남, 손주인 트레이드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 관례가 깨졌다.[74] 그다음 시즌 FA로 풀려서 더 적은 금액에 팀을 옮긴 이 분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18년 2월 더그아웃 지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그건 아닌 걸로 보인다.[75] 즉 기존 유명 선수의 꾸준한 출장을 의미하며, 이는 최동수 등의 무명 출신 선수의 배제를 뜻한다.[76] 더불어 박용택의 어깨도 박살냈다.[77] 주전 야수들인 박용택이나 이병규(7), 이진영 등은 벌써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베테랑이다. 그리고 라뱅은 16년에도 반등하지 못한다면 시즌 끝나고 은퇴를 바라봐야 할 정도로 무너졌다. 결국 협상 테이블에서 구단과 싸우기 싫다며 은퇴했고 17시즌 중반 은퇴식을 치렀다.[78] 13시즌에 당한 햄스트링 부상으로 수비가 불가능한 라뱅을 기용하려면 리그 최고의 타자인 박용택을 좌익수로 보내고 당시 주전 좌익수이던 이천웅을 벤치에 앉히거나 이천웅을 우익수로 보내고 엘지의 주포인 채은성을 빼거나, 이천웅을 중견수로 보내고 리드오프이던 김용의를 빼는 등 자충수뿐이었다. 그렇다고 라뱅을 대타로 쓰기에는 당시 대타자원만 정성훈/양석환, 서상우, 이형종, 문선재 등 잔뜩 쌓여있었으며 서상우와 정성훈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최소 2개 이상의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냉정히 말해서 이병규는 설령 팀 내에 자리가 있었어도 쓸 이유가 없었다.[79] 매일같이 잠실구장 LG 사무실 앞에서는 양상문 퇴진 시위가 벌어지고 양상문 개인의 전화번호가 털려서 전화번호를 바꾸는 등,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80] 벤치 개입이 많은 리그 특성상 볼배합은 거의 무조건 벤치 사인을 따라간다. 또한 볼 배합대로 공을 던졌다고 안타를 안 맞는 것도 아니고 볼 배합 지시대로 100% 공을 찔러넣을 수 있는 투수는 MLB에도 없다.[81] 전민수의 영입으로 인해 퓨처스 4할타자로 차기 외야 세대교체의 대표 주자가 되어야 할 홍창기의 자리가 사라졌다.[82] 근거가 있는 비판은 팀에 도움이 되지만 지금까지 안돼왔으니 이번에도 안 될 거라는 자세는 올바른 팬의 태도가 아니다.[83] 1995년,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