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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 金一鏡 | |
호 | 아계(丫溪) |
자 | 인감(人鑑) |
생몰년 | 1662년 ~ 1724년 |
본관 | 광산 김씨 |
소속 당파 | 소론 준론[1] |
직업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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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아계(丫溪)며 사색당파 중 소론에 속했다.2. 생애
2.1. 관직생활
1687년 진사와 생원 양시에 합격했고, 1702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을 시작했으며 170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판결사로 특진했다. 노론 측 기록에서도 '김일경에게 문예(文藝)가 있었다.[2]'는 기록으로 보아 학문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1721년 노론 정권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뒤에 영조)가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했다. 김일경은 이것을 반대하며 노론 탄압에 앞장섰다. 결국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의 노론 4대신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그 밑에 있던 노론의 신하 수백 명을 살해, 추방시켰다. 이것이 신축년인 1721년과 임인년인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옥사(신임사화)이다. 다만 김일경이 소론 강경파인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없는 죄를 지어 정적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4대신 중 이이명은 그 자신이 노골적으로 국왕을 능멸한데다,[3] 정당하다고 했지만 자식이 역모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다른 3명도 마찬가지. 신임사화 항목에 자세히 적혀 있지만 애초에 노론 주류는 경종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2.2. 사망
이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재집권하였는데, 신임사화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1724년 참수형을 당하였다. 영조에게 국문을 받으면서도 신이라는 호칭을 쓰지도 않고 꼿꼿하게 자신은 억울하다며 대들었다. 이에 영조도 김일경을 미워해 형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바로 사형을 시켰다. 조선시대에 참형은 추분 이후 춘분 이전 사이에 집행하게 되어 있는데 역모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런거 없었고, 김일경 또한 마찬가지로 절차에 따라 곧바로 처형당했다.2.3. 사후
이 정도로 영조 및 노론과는 불공대천과 진배없는 사이였다보니 당연하게도 이후 김일경은 역적으로 취급받았다. 반대로 소론 준론들에게는 충신 취급을 받았고 이들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했다.이후로도 영조는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자 그나마 살아남은 김일경의 후손들을 보이는 족족 없애버리는 등 철저히 씨를 말렸으며, 후대 임금인 정조 이후도 할아버지의 정통성 문제가 걸린데다가 김일경에게 적대적인 노론이 집권했기 때문에 복권은 꿈도 못 꿀일이었다. 김일경의 복권은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인 1908년에야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