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삐쭈의 신병에 나오는 장면으로, 군대 꿈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관용어로 쓰이는 "꿈에 나올까 무섭다" 의 참 좋은 예제[1] |
2. 상세
개개인의 차이는 존재하나 대부분의 군복무를 마친 전역자 남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오랜 세월동안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특성상, 특정 연령에 국한되지 않아 심지어 6~70대를 넘긴 노인층에서도 이런 꿈을 꾸는 경우가 정말 흔하다.[2]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아예 꾼 적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꿈을 꾸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언급을 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나, 이것을 개개인의 정신적 강인함과 결부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PTSD에서도 설명되어 있듯이 군대와 관련된 악몽은 아무리 카리스마 있고 용감한 사람이라도 겪을 수 있다. 특히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용감하게 싸우고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군인들이 오히려 PTSD를 더 심하게 겪는다.
전역자만 꾼다고 생각하지만 현역이나 미필자들도 자주 꾼다. 현역 군인의 경우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테마가 좀 더 다양해지는데, 물론 제일 흔한 것은 뼈빠지게 구르던 훈련소나 이등병 시절 중 한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외에는 생활관에서 혹은 휴가복귀가 20:00까진데 시계를 보니 20:10인 상태로 시작하거나, 보급병, 탄약관리병의 경우 창고/탄약고 물자가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나 수량이나 상태를 파악할 수 없어 하나씩 까서 세야 한다거나, 운전병의 경우 대형 교통사고를 냈다거나 하는 등의 배리에이션이 있다. 반대로 현역병이 전역하는 꿈을 꾸는 것이 있는데, 전역자가 군대 꿈을 꾸는 것보다 100배는 더 큰 충격과 허탈감으로 다가온다.[3] 또한 이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원래 있던 부대를 갑자기 떠나 다른 부대로 전출가는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미필자들의 경우는 군대에서 고생하는 꿈은 아니지만 병역판정검사 내지는 머리 깎는 꿈이라서 앞으로 닥쳐올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충격적이다. 깨고 나면 "내 미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드물게는 성소수자 중 미필 게이나 트랜스여성이 현실에서 자신의 입대 혹은 병역판정검사를 앞두고 남자친구가 군대 끌려갔다 100일 휴가 나오는 고무신 꿈을 꾸다 막상 깨고 보니 현실의 남자친구가 면제인 참으로 얼탱이가 없는(...) 꿈도 있는데, 이는 연인에 대한 소중함과 군입대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진 몹시 기분나쁜 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련의 꿈들은 사실상 가벼운 PTSD나 트라우마의 일종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데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군대와 관련된 압박감 등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가 '꿈'이라는 잠재의식 속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이는 징병제와 군대에 의한 피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다. 월급이라도 제대로 준다면 모를 일이지만 까놓고 21세기 현재 한국의 군대 체계는 합법적인 착취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 당연히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 더군다나 부족한 보수나 거친 훈련, 군대 자체의 문제 뿐 아니라 병영 내 조직생활에서 일어나는 인간 존엄성의 박탈 문제 역시 현역병 및 전역자의 마음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자세한 치료 방법은 후술하겠지만 군대 무용담처럼 군필자들끼리 군대와 관련된 담소를 하는 것이 답답한 마음을 더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군대 꿈을 꾸는 만큼 지루해진다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정말로 악몽급으로 깨어났을때 숨을 거칠게 쉬곤 했지만 점점 꾸면 꿀수록 "아 또 군대 꿈이네"하고 지루해한다고. 물론 다시 말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다.
소위 꿀부대나 꿀보직 출신이거나, 군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지냈던 사람의 경우 군대 꿈은 악몽이라기보다는 단지 꿈의 배경장소가 군 부대인 것에 그칠 때도 있다. 심지어 군대에서의 좋았던 일을 꿈꾸고 깨어나서 허탈해하는 경우도 있다. 병 출신이라도 해/공군병 및 육군 모집병 출신인 경우 일단 자원 입대하여 자신이 그래도 원하는 보직을 받긴 했지만 자신이 영장을 만들어서 간 거에 가깝기 때문에[4] 중간 정도 간다.
간부출신의 경우 병사로 복무한 예비역에 비하면 군대 꿈을 꾸는 빈도가 적거나 내용 자체가 사뭇 다를 가능성이 있다. 자원하는 양성과정 자체가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각종 시험과 훈련과정을 스스로 버텨내야 임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에 대한 인식이나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국가공무원에 임용되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일종의 사회적 포섭효과도 작용한다. 군간부로서 받는 처우, 보수나 복무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간부출신 전역자들이 꾸는 꿈의 내용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현역시절 겪었던 작전과 임무에 관한 꿈이나 복무 중 일상에 관한 꿈, 또는 현역시절 선후배를 만나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뜬금없이 후보생이나 생도 때로 다시 돌아가서 훈련을 받는 꿈을 꾸는 케이스는 드물고 병으로 복무하다가 간부가 된 경우나 억지로 간부가 된 군법무관&군의관 출신자들, 의무복무기간만 채우고 전역하여 민항으로 진출한 조종장교[5]들이 병 출신들과 내용상 비슷한 군대 꿈을 꾼다는 사례가 있다.
사람에 따라 군대 꿈과 학교 꿈이 합쳐지기도 한다. 학교를 배경으로 군대 선후임이 등장하거나 군대를 배경으로 같은 반 학생이 등장하는 등 진풍경이 펼쳐진다.
상근예비역, 사회복무요원도 비슷한 꿈을 꾸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주로 훈련소와 상근예비역의 경우 군대, 사회복무요원의 경우 복무지에서 겪은 안 좋은 경험들이 꿈에 나온다. 다만 현역에 비해 강도나 빈도가 훨씬 낮은데, 이 쪽은 스트레스가 쌓여도 퇴근 후 집에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작그만에서 곰팽이 이봉원이 군부대 내무반에서 졸다가 병장으로 진급해서 후임병들을 갈구는 꿈을 꾼 에피소드가 있는걸 보면 군대에서도 군대 꿈을 꾸기 마련이다. [6]
3. 치료방법
사람에 따라 증상이 다르지만, 군대 꿈을 꾼 날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있다. 정말로 극심할 경우 기상 후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거나, 덜덜 떨리거나,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몸살 정도로 끝나지만 사람에 따라 이런 증상이 계속될 경우 약물이나 집중 진료가 필요하다.전문가들은 사회 내에 징병제와 군대문화, 똥군기 등의 비현실적인 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계속될 이 현상의 해결법으로 군대 트라우마에 대한 공론화를 통해 군대 꿈이라는 것이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임을 대중들에게 인지시키고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심리 상담 및 치유 활동을 통해 완화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현역병과 전역자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징병제나 군대 문화 등 상기한 문제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군대 꿈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문가들도 못박은 셈이다.
증상이 염려스러운 점은 나이가 일흔에 가까운 환자도 있다는 점이다. 발견되는 사례는 주로 행정 착오로 다시 돌아가는 꿈들인데, 그정도로 나이가 있으면 상식적으로 재입대를 할 일이 전혀 없고 스스로 그것을 아는데도 악몽을 꾸게 된다. 정신적 충격이 크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경과했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실제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말년병장으로 제대했는데, 행정착오로 이등병부터 재입대를 하여 군생활을 두 번 하였기 때문에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건 경우도 있었다. 소송은 너무 과거의 일이라 기각되었다. 출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대체로
한군두로 유명한 싸이는 "요즘 군필자들이 군대 꿈을 꾼다고 하던데, 내가 군대 한번 더 갔다 오니깐 그 뒤로부터는 군대 꿈이 한번도 안 꿔지더라."라고 하였다.
큰 충격을 받아 악몽에 시달릴 때 일반적으로는 악몽의 장소를 기피하게 되는데, 막상 다시 가서 생각만큼 충격적인 곳은 아니란 것을 알게되면 트라우마가 완화될 수도 있다. 마치 어린 시절 충격을 받았던 공포영화의 장면이 가위 눌릴 때마다 악몽으로 자주 등장하다가, 훗날 성인이 된 후 그 영화를 다시 보니 유치하고 별것 아니란 것을 알게되어 그 뒤로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이것 외에도 6.25시절 젊은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이 든 지금도 악몽에 시달리며 한국을 아예 기피하여 예전 6.25시절의 전쟁터인 한국으로만(아비규환의 지옥)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한국에서 그 할아버지들을 초청한 다큐가 있다. 그 할아버지는 예전 자신이 전쟁을 치렀던 곳을 돌아보며 자신의 기억 속의 그 지옥 같은 모습을 떠올리며 묘사했는데, 전쟁의 아픔을 딛고 발전한 한국 거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전쟁에 참전하기를 잘했다라고 고백했는데, 그 후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는 치유된 듯한 밝은 모습이 되었다.
위에서도 군대에 관련된 담소를 하는 것이 답답한 마음을 더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나와 있는데, 무작정 그것을 피하고 억누르는 것보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하여 털어놓는 것이 마음의 응어리를 덜어낼 수 있는 것이다. 심리상담같은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고민을 무작정 억누르는 것보다 털어놓는 것이 심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사실 군대 꿈은 누구나 꾸고 군대란 곳이 상처를 줬다고 하지만, 동시에 군대 무용담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 한국 남자들이 즐겨하는 얘기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나 실은 자신이 고생한 얘기를 하며 그동안 말 못 했던 상처를 털어놓는 과정이므로 정신 건강에는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고생한 얘기를 과장해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어찌보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안타까운 심리일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좀 알아달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군대 무용담 늘어놓는 사람들을 무작정 기피하거나 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참 고생하셨다고 한마디라도 해주자. 그 한마디만으로도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심리상담센터에서 어머니들이 내가 집에서 자식들 뒷바라지 다 해주고 고생했는데도 자식들에게 무시 당한다며 눈물 흘리는 상담사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렇게 고생해도 집에선 알아주지도 않고 그런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 어머니들은 그저 그 말을 토해내고 상담선생님이 진지하게 자신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상처가 완화되며 한결 후련해지곤 하는데, '군대 꿈'과 '군대 무용담'이라는, 어찌 보면 서로 상반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군대 무용담을 토해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 무용담을 들어주고 고생했다고 위로해주면 군대 꿈의 트라우마가 완화되는 것이다. 위의 어머니들이 자신이 가정을 위해 희생했다고 거창한 보상을 바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처럼 예비역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 여담
현역만 꾼다는 인식이 있으나 보충역도 훈련소를 다녀오기 때문에 충분히 군대 꿈을 꾸곤 한다. 또한 근무지 꿈을 꾸는 형식으로도 가능하다. 물론 이후 군대 꿈 꿨다고 하면 지인들에게 쿠사리 먹을 각오는 해야 한다.5. 관련 문서
[1]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디스맨의 패러디[2] 이런건 주로 전쟁에 관련된 꿈으로, 태평양 전쟁,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PTSD와 동반되지만, 참전 경험이 없어도 재입대 꿈은 잊을 만하면 꾸는 경우도 있다.[3] 군대는 당연히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인데, 그 수준은 학교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이다. 불행한 공간을 탈출한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선 정말 기쁘고 행복한 일인데 그 상태에서 기쁨과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 즈음에 눈을 떴는데 여전히 현실은 군대에 남아있다고 깨달으면 또 똑같은 훈련과 상명하복 고통의 사이클이 남아있다는 것에 상당한 허무감과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4] 심지어 입대 전에 보직과 자대가 결정된 경우도 있다.[5] 고정익 조종사들의 의무복무기간은 13 ~ 15년이며, 이쯤 되면 소령 ~ 중령 정도 된다. 비행기 조종을 배우려면 상당한 돈이 들어가는데,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곳이 군대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조종장교 출신들은 민항에 진출했더라도 전시에 동원될 수 있고, 동원 지정이 되지 않았더라도 전쟁 나면 자신의 기종을 몰아서 행군 지원 등 병참 업무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6] 극 중에서 이봉원 이병이 입은 전투복과 야전상의는 이경래 병장의 것을, 이경래 병장은 이봉원 이병의 전투복과 야전상의를 그대로 입었으며 김한국 상병은 다른 사람의 전투복과 야전상의를 입었다.[7] 구타는 군 창설부터 군법상 원칙적으로 위법이나, 관례적으로 허용했고 자대와 훈련소에서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21세기 들어서 집중적으로 단속하고, 장병들에게 휴대폰이 불출되어 쉽게 공론화가 가능해짐에 따라 점차 개선되고 있으나 얼마 전까지도 부분적으로 잔존해 있었다.[8] 대구 지하철 참사당시 생존자 중에선 지금도 불타는 지하철이 꿈에 나오며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고, 마찬가지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때 충격을 크게 받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침몰하는 배가 꿈에 나오며 악몽에 시달리는데, 이런 것들과 같은 경우다. 폭력 등 범죄 피해자 등이 아무리 되갚음을 시원하게 성공하고나서도 그 이전의 피해 상황으로 돌아가는 악몽도 그렇다. 비록 사건 자체는 해결되었지만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기 때문. PTSD 문서에서도 비슷한 비유가 있지만 괴한에게 흉기로 당한 뒤 성공적으로 제압했지만 그렇다고 흉기로 인한 상처가 곧바로 치료되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