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19:38:13

폐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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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妃尹氏
1455년 음력 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

1. 소개2. 일생
2.1. 출생2.2. 후궁에 간택되다2.3. 성종의 총애를 받다2.4. 왕비가 되다2.5. 폐비가 되다
2.5.1. 일화
3. 평가
3.1. 현대 평가
4. 무덤5. 대중 매체6. 관련 항목

1. 소개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다. 연산군 때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였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削奪)되었다. 묘호는 회묘(懷墓).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추존왕비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성종이 책봉한 정실 왕후였기 때문에 이것은 맞지 않다. 추존(追尊)은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해당 지위에 없었던 인물에게 그 지위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장군 윤관의 후손이다. 다만 폐비 윤씨는 윤관의 장남의 후손이고,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은 윤관의 4남의 후손들이다.

외가 쪽으로는 신숙주가 친정 어머니의 사촌이었다.

2. 일생

2.1. 출생

흔히 생년이 확실하지 않다고들 하나, 1455년 생이 정확하다. 실제 국립고궁박물관의 폐비 윤씨 태실(胎室)[1] 속의 태지문(胎誌文)에, 단종 3년(1455년) 음력 6월 1일 생으로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네이버 백과사전 등에는 성종과 연상의 띠동갑1445년 생으로 나와 있고, 드라마 《인수대비》, 도서 《왕을 낳은 후궁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설을 채택[2]하여 성종과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실제로 1445년 생이라면 29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당시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이었고, 늦어도 20살[3]에는 결혼하는 걸 당연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었어도 엄연히 양반의 딸인 윤씨가 29살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후궁이 되었다 함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4] 심지어 30살 가까이까지[5] 결혼을 안 할 시에는 나라에서 혼수품을 챙겨주며 결혼시키는 정책까지 있던 시절이었다.[6][7]

그렇기에 양반 집안에서 그런 경우는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할 정도이고, 무슨 이유든 정말 그 나이까지 (중병, 심각한 장애 등) 결혼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당연히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동안이라 나이를 10년 속이기? 아님 호적조작했나?

그래도 남편 성종(1457년생)보다는 나이가 실제로 2살 많기는 한데,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조선 초기 대부분의 왕비들은 남편보다 2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나이 차이가 지극히 정상이다.

2.2. 후궁에 간택되다

간택 후궁[8]으로 입궐하였다.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신 씨의 딸이다. 하지만 윤기견이 일찍 요절해서, 사실상 과부인 신 씨 아래에서 성장했다. 입궁하기 전에는 베를 짜서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효녀였고, 윤기견은 집현전(集賢殿) 학자 출신으로,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딸이 추존되자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나, 반정으로 삭탈관직되었다.

폐비 윤씨보다 3개월 후에 간택후궁으로 들어오는 정현왕후 윤씨는 윤호의 딸인데, 윤호는 파평 윤씨로, 대단히 부유하면서도 비리가 많아 친척인 정희왕후가 처벌을 명했을 정도였다. 이런 점이 모두 왕비 간택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2.3. 성종의 총애를 받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공혜왕후 사후 2년 후(1476년)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 역시 마음에 들어 했는데, 총애의 이유는 무엇보다도 윤씨가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것. 간택 시점에서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4개월 후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 성종장남연산군은 원자로 책봉되었고, 원자의 생모인 윤씨의 위세는 더욱 상승했다.

2.4. 왕비가 되다

그러나 다른 후궁들과 분란을 일삼아, 왕비가 된 지 겨우 1년도 안 된 1477년에, 방안에서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方禳書)와 비상(砒霜)이 묻은 곶감성종에게 발각되면서 폐출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을 우려한 중신들의 간곡한 부탁으로,[9]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려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짓고, 윤씨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5. 폐비가 되다

하지만 분란은 계속 이어져, 결국 1479년(성종 10년) 음력 6월 2일, 폐위[10]되었으며, 2년 후 사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연산군 때 제헌왕후로 다시 추숭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이라고 부르지만, 중종 때 다시 호칭을 되돌렸다. 그래도 묘를 다시 부수진 않았다.

2.5.1. 일화

폐비 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성종 때의 유명한 재상인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한 어전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궁궐로 가려던 도중에 누나의 집에 들렀는데, 누나가 "만약 어느 양반집 주인이 종들과 상의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훗날 그의 아들이 주인이 된다면 그 종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는, 누나[11]의 집을 나와서 계속 궁궐 쪽으로 말을 몰고 가다가 어느 다리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낙상(落傷)을 핑계 삼아 어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훗날 연산군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당시 어전 회의에 참석해 폐비 윤씨의 사사에 동의했던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했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과 허침 형제는 숙청을 피해 갔고, 허종과 허침 형제가 일부러 굴러 떨어졌던 다리는 '종침교'라 불리게 되었다. 야사의 판본에 따라서는 허종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회의에 불참하고 허침은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다른 신하들은 다 동의했는데 허침 혼자서만 이의를 제기했다가 좌천되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허침이 윤씨의 폐비를 반대했음은 사실이다.

또는 허침은 연산군의 어릴 적 스승이였는데, 연산군이 공부를 게을리해도 자상하게 타이르고 칭찬해 연산군이 매우 좋아했다. 반대로 다른 스승 조지서는 늘 꾸짖고 성종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해 연산군이 싫어했다. 연산이 벽에다 조지서를 큰 소인이고 허침은 큰 성인이다 라고 썼고 이 낙서를 조지서가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조지서를 화가 나서는 연산군을 심하게 나무랐고,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허침은 상을 내렸지만 조지서는 트집을 잡아 죽였다.[12] 아무튼 여기서도 훗날 갑자사화에서 허종과 허침 형제가 모두 숙청을 피해 갔다는 건 변함이 없다. 다만 허침과는 달리 허종은 갑자사화가 벌어지기 전인 1494년에 이미 사망했다(허침은 1505년에 사망). 그래도 죽은 뒤에도 허종이 부관참시 등의 처벌을 받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리고 폐비를 결정한 회의 때 두 형제가 불참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사유는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이었다. 즉 운 좋게 화를 면한 유형에 각색이 더해진 것.

참고로 종침교는 현재 철거되어 터만 남았다. 종침교 터 부근에 있는 '종교 교회'(감리회)라는 교회의 이름도 이 종침교에서 유래되었다.

3. 평가

지나친 야망으로 제명을 재촉한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첫 번째 평, 그리고 과거의 부조리와 왕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라는 2번째의 평으로 나뉜다. 하지만 후자는 야사에 지나치게 의존한 감이 있어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당장 《성종실록》에 실린 기사만 해도 윤씨의 죄에 대한 서술이 가득하고, 결정적으로 《성종실록》은 비록 사림 출신 사관들의 입김이 강하긴 했지만,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 때 쓰였다.

실록에는 윤씨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많다. 독살을 하기 위해 독이 든 곶감을 은닉했다고 하고, 야사에도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 즉 용안(龍顔)에 상처를 내었다거나,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국그릇을 엎어 왕의 옷을 더럽히는 등, 기록만 놓고 본다면 분노조절장애 증세가 의심될 정도다.

성종은 윤씨를 내치는 이유로 카더라 가 아닌, "내 눈앞에서 비상(독약)을 가지고 있더라니까? 내 발자취를 깎아버리겠다고 욕을 하질 않나, 다짜고짜 처소로 쳐들어오질 않나, 도저히 못 살겠다!"라고 하는 등 자신이 직접 당한 일들을 주로 들었다. 이때 후궁들이 윤씨를 모함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건 자기 아내를 사약 먹여서 죽였다[13] 하여 나오는 추측 정도로 별다른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윤씨가 다른 후궁들을 모함하다 걸린 적은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야사에서도 윤씨의 질투심이 대단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궐내의 궁녀들에게도, “누구든 상감을 모시는 날이 있으면 나에게 죽을 줄 알아라.” 하고 평소에 말하고 다녔다 한다. 살인예고

애초에 후궁 따위가 감히 아들까지 낳은 정실 왕비에게 개긴 일은 조선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조선왕조에서 왕이 그 외의 모든 사람들 위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내명부 내에서 왕비의 지위도 절대적이었다. 이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임금뿐이다. 그 손 귀한 조선 후기 숙종의 유일한 원자를 낳았던 장희빈조차 겉으로는 정실부인인 인현왕후에게 고분고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물며 직접 아들을 생산한 중전 윤씨에게 후궁들이 참소를 했다면, 뒷날 연산군이 어쩌기 전에, 참소를 접수한 그 시점에서 성종이나 윤씨 중 한 명이 먼저 나서서 그 후궁들을 끝장냈을 것이다. 대비들 역시 중궁을 폐위하기에 앞서, 내명부(內命婦) 전체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 무개념 후궁들을 먼저 박살내려 들었을 거고.

후궁을 남들 보는 앞에서[14] 매질로 혼쭐을 내도 '기강을 다잡았다'는 호평이 기록되는 왕후와, 후궁이 자기 친자식에게 '너'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네 살리네 소리가 임금 입에서 나올 정도로 왕비와 후궁의 차이는 그 정도로 크다[15]

야사지만 폐비 윤씨는 마치 선녀와도 같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의 미녀였다고 한다. 남편인 성종이 키만 크고 얼굴은 별로였으나 둘 사이에서 낳은 연산군은 현대적 미남상에 완벽히 딱 맞는, 곱상한 기생오라비 외모였다고 하므로 연산군은 키는 아버지 성종을, 전체적인 외모는 어머니 윤씨를 닮았던 모양이다.

3.1. 현대 평가

<역사저널 그날>에서 나온 바로는 최근에는 출산 후 급격한 성격 변화의 원인이 산후우울증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론 경계선 성격장애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폐비 윤씨의 폐출 및 사사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아닌 남편 성종이 사실상 가장 열렬히 추진했다. 신하들의 입장으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이슈였기 때문이다. 1차 폐위 위기에는 임사홍이 반대해서 막았으나, 2차 폐위 위기에 가서는 '뭐 저런 여자가 있냐?'라면서 조정의 옹호 여론도 싹 사라졌고[16] 대비들마저 '저거 놔뒀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공포에 휩싸인 수준이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들이 길길이 날뛰고[17], 조정에서도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입을 모아 아웃을 외치고, 국왕이자 남편인 성종은 '저 년이랑 살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는 반응을 보이며 배수진을 친 상황에선, 명나라 황제의 친딸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폐비의 위기를 모면할 도리가 없었다. 성종은 아예 윤씨를 한나라여후당나라측천무후에 빗대서 깔 정도였으니 이건 뭐...

사실 폐비 윤씨가 어떤 마음을 품었든 간에 실질적으로 폐비당한 계기는 성종에게 "죽여버리겠다!" 하고 욕을 퍼붓고 독을 가지고 다니다가 걸린 것이다. 조선시대 뿐 아니라, 왕정시대에 이런 짓을 한 사람은 그 어느 나라, 어느 임금의 치세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대역죄다[18]. 대역죄는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19]이 기본이고 당사자 본인 또한 사지가 찢어 지거나 못해도 참수형이 기본 베이스이다. 참고로 대역죄는 남녀를 구분하여 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삼족(三族)은커녕, 당사자인 윤씨의 목숨까지 살려서 내쫓은 것으로 끝낸 성종은 정말 대단한 아량을 베푼 것이다.[20]

폐서인 조치 후 2년간 사가에 유폐시켰다가 사사 시킨 일을 두고 뒤통수를 맞았니 어쩌니 하는 것도 당시 시스템을 전혀 모르고 그저 결과만을 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왕실 사람이 사형을 받는다면, 이맹종이나 단종의 경우처럼 작위추탈 - 폐서인 - 형 집행이 기본 테크였고, 각 단계별로 테크가 진행될 때까지는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가량 유예기간을 두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흥안군은 이 테크를 따르지 않고 체포하자마자 급하게 사형을 집행했는데 전후 처리과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폐비 윤씨는 폐서인되어 사가로 내쫓긴 그 순간부터 본인이 아무리 뉘우치더라도 살아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물론 동정 여론까지 생길 정도로 가만히 있긴 했으니 윤씨 입장에서는 참 냉정하고 잔인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4. 무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있는 회묘(懷墓).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왕후의 자격을 다시 박탈당하였으나, 반정 세력들이 무덤에는 손을 대지 않아서, 연산군에 의하여 왕후의 예로 단장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공개 능역이라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안내자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으니,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에 가면 답사해 볼 수 있다.

본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21] 경희대학교 정문 옆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경희의료원 건축을 하면서 1969년에 서삼릉 내의 후궁들 묘역인 현재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폐비 윤씨를 닮았다고 해서, 연산군노국대장공주가 그려진 초상화를 수집하도록 했다는 말이 있다.

5. 대중 매체

워낙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인물인지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였다. 특히나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인물인지라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이 맡는다는 것도 특징. 그리고 다들 예쁘다(…)[22] 다만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정사와 달리, 윤씨의 폐출의 계기가 성종에게 손톱 자국을 낸 것으로 그린다. 또 윤씨가 사약을 마실 때 흰 적삼에 피를 토하고 이를 그 어미 신씨에게 건네며 "훗날 내 아들에게 전해 달라." 하고 부탁하는 이야기를 차용한다.

1984년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에서는 이기선이 윤씨 역할을 맡았다. 당시 폐비 윤씨가 등장하면서 드라마에서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인수대비고두심이 맡았다.

1994년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장서희가 열연하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윤씨 사사 장면(94회)에서 윤씨의 아비가 윤기견인지 윤기무인지 불분명한 것에 대해 윤씨 족보를 참고하여 해설을 덧붙였는데, 윤기무는 윤기견의 동생인 것이 분명하므로 윤기견의 딸이 맞다고 나온다. 참고로 장서희는 훗날,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폐비 윤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기사) 인수대비김영란이, 성종박진성이 열연하였다.[23]

1995년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야기 시작이 윤씨가 사사된 후부터 진행되기 때문. 그러나 20회에 연산군(유동근)의 회상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그 인물은 다름아닌 월산대군 부인 박씨 역할의 양미경. 나름 1인 2역인 셈이다. 인수대비반효정이, 성종현석이 열연하였다.

1999년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김성령이 열연하였다. 여기서 윤씨는 상당히 표독스럽지만 원자와 성종에 대한 그리움을 잘 나타냈다. 다만 중궁이 되자마자 내/외명부 부인들을 불러놓고 왕비 행세를 톡톡히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버린다. 또 걸핏하면 인수대비는 윤씨를 두고 "천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야." 운운하며 천대한다. 그 밖에 윤씨가 대궐에서 울부짖는 장면이나, 채시라김성령의 실감나고 소름 끼치는 고부갈등은, 지금 봐도 정말 간담이 서늘해진다. 윤씨의 어머니로 고 여운계가 열연을 펼쳤다.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연산군에게 건네며 폐비의 최후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절규였다. 인수대비채시라, 성종이진우가 열연하였다. 좀 웃긴 것은, 시어머니인 채시라는 68년생, 아들인 이진우는 빠른 69년생으로 채시라와 사실상 동갑이며, 며느리인 김성령은 빠른 67년생이란 거다.

2003년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이주희가 1회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하는 장면으로 잠깐 등장한다.[24]

2007년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윤씨의 이름을 '윤소화'로 정하고, 성종과 같은 1457년생으로 설정하였다. 아역은 박보영이, 성인 이후는 구혜선이 열연하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기존의 질투심 많은 이미지와는 달리 비교적 인간적이고 선한 이미지로 그려졌다. 단 이 드라마에서는 내관 김처선과의 묘한 러브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물론 허구다. 인수대비전인화, 성종고주원이 연기하였다.

2012년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어린 시절을 진지희가 연기하고, 성인 시절을 전혜빈이 아주 표독스럽지만 남편과 아들을 애타게 그리는 모습으로 열연하였다. 특히 윤씨가 사약을 받는 장면(54회)는 이 드라마의 분당 최고 시청률인 5.53%를 기록하였다. 당시 종편이 생긴 지 6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시청률(당시 기사)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같은 정하연 작가의 전작 <장녹수>, <왕과 비>와 달리 폐비 윤씨를 성종보다 12살 많은 '윤송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하고, 단종궁녀로 들어가 성종시녀 등을 거쳐 후궁이 된 것으로 나온다. 물론 윤씨는 1455년생이므로 이는 허구다. 인수대비는 채시라, 성종은 백성현이 연기하였다.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선 잠깐이지만 우희진이 연기하였다.

영화에서는 《연산일기》(1988년)에 등장하며, 김영애가 배역을 맡았다. 참고로 김영애는 여기서 월산대군부인 박씨와 1인 2역을 맡았다. 인수대비는 원로배우 한은진이 연기하였다.

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처럼 될 야망을 품었기에, 신뢰를 잃어 폐위되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인용하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서 문제였다. 왕비로 오르기 전 기록을 보면 '어른을 공경하고 예절도 바르다.'는 호의적인 내용도 있음을 감한하면, 야망을 너무 일찍 품음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자를 두고 폐비 윤씨가 했던 발언이나 복수를 다짐하는 표현 등이 너무 위험수위가 높았다고 평가하는 이는 박시백 말고도 많다.[25]

조선공주실록에서 윤씨의 이야기를 다룬 외전이 나온다. 윤미래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한미한 가문 탓에 사랑하는 한건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고 대신 성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에 한건과의 사이에서 아들 연산군을 낳았으며, 성종이 연산군이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깨닫자 한건은 외눈이 되었고 본인은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본편의 모든 비극을 불러온 시발점.

6. 관련 항목



[1] 태(胎), 즉 탯줄을 보관한 곳, 혹은 보관함,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여염집에서도 이런 식으로 탯줄을 따로 보관하곤 했다. 하물며 왕가(王家)나 고위 관료 가문이라면...[2] 단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3] 1900년대 초, 구한말에도 20살까지 자식이 미혼인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흔했을 정도이다. 사실 이 시기면, 비단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10대 중후반 결혼이 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4] 요즘 독신주의자나 노처녀/노총각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결혼은 인륜지대사니 빨리 해라'는 말은, 조선시대에서 나온 말. 조선시대 성리학 문화에서, 혼인은 무척이나 중시되어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진짜였다. '결혼 = 축제, 결혼 안 함(못 함) = 본인+가족+ 마을 양반가 전체의 죄악, 혹은 사회 비주류(스님이나 천민)' 이런 취급이었다. 그 시대에 결혼을 피하려던 양반가 사람들은, 지금 결혼 안 하는 사람들이 가족에게 받는 압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 가족만 압박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을 전체 양반가가 다 나서서 압박했기 때문이다. 고위직 관료 자제가 19살 넘어 결혼 못할 경우는 임금의 수치로도 간주되기도 하여, 임금까지 나서서 '왜 자식 혼인 안 시키냐.'고 힐문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막론하고, 20세기 중반 이전까지, 여자 홀몸으로 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비구니수녀가 되지 않는 이상.[5] 가난, 어버이의 병구완 등 집안사정, 혹은 전쟁 등의 특별사정을 이유로. 이런 특별 사정이라도 없으면, 이미 여성이 19~20살쯤에는 자연재해 직전 상황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가족뿐만 아니라 그 지역 관리들까지 다 나서서, 자기 고을뿐만 아니라 다른 고을로 출장도 가서 처녀총각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결혼시키려고 생난리를 쳤고, 방문을 받은 고을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협조했을 정도니 결혼 못할 일은 없다. 물론 양반 가문일 때의 이야기다.[6] 혼인은 철저한 유교 사회이던 당시, 양반 가문이라면 집안 최고의 행사였다. 양반 가문의 딸이 결혼을 못 할 경우, 그 집안은 실제로 딸 시집보내는 데 온 가족이 다 나서서 모든 정성을 올인할 만큼, 대형 비상사태였다. 나이 먹도록 시집 못 간 딸의 아버지가 고위직일 경우, 다른 신하들이 뒤에서 욕할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며, 나이 먹고 결혼 못한 자제를 둔 신하가 모시는 왕이 되는 것 자체도 성리학에서 왕의 부덕이나 큰 수치로 간주하기에, 왕의 명예까지 손상시킬 수도 있는 일이라 왕까지 그 신하를 따로 불러 다그칠 만한 수준의 일이었으니 이봐 좌승지, 뭐해? 빨리 아들 장가 안 보내?, 다시 말해 차라리 출가해서 스님(비구니)이 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양반 딸이 특별한 문제없이 20살을 한참 넘어 결혼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7] 자식이 못생기건 뚱뚱하건 키가 작건 말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심지어 고위직 관료 딸이면... 장애 정도가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또한 장애인도 왕이 다른 신하 하나 잡아 강제로 사돈을 맺어 시집 보낼 수 있었다. 혼전 교제와 사랑, 혹은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는 21세기와는 관점이 뿌리에서부터 다르고, 서양에서도 대동소이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결혼하지 않고, 처녀가 20살 훌쩍 넘어 혼자 사는 건 당시 양반 집안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수녀원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사교계에서는 비웃음, 정치계에서는 비난의 구실도 되는 문제였다. 사실 귀족과 왕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유럽 지역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결혼을 무척 중시한다. 한 예로,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등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2세, 3세로 이름을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유럽에서는 유서 깊은 가문과 왕가일수록 흔하다. 당장 황제, 왕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8] 간택 후궁의 2가지 경우 중, 그냥 후궁으로 추천받아 들어온 경우다. 다른 경우는, 왕세자비왕비 간택 최종심사까지 올라간 3명 중, 탈락한 후보 2명이 후궁이 되는 경우이다. 당시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임신을 못해 후궁이 필요하다는 신하들의 청으로, 윤씨가 간택후궁으로 들어왔고, 1년 뒤 공혜왕후가 죽는다.[9] 특히 임사홍이 가장 반대를 강하게 해서 "중전마마껜 원자마마가 계십니다.","옛날부터 투기하지 않은 부인이 없었습니다." 하면서 성종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고, 우왕좌왕하던 대신들도 일제히 폐출 반대를 외쳤다.[10] 전술(前述)했듯, 윤씨의 생일은 1455년 음력 6월 1일. 즉 윤씨는 자신의 생일 다음날 폐위되었다. 폐위 전날 성종은 당시까지는 중전의 신분이었던 윤씨에게 하례를 일절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 성종실록 1479년 6월 1일[11] 야사에 따르면, 이 식견 높은 누나는 후에 100세까지 살아 사람들이 '100세 할머니'라고 불렀다 한다.[12] 트집의 이유는 연산군 즉위 후 조지서가 올린 글에서 자신이 좀 더 잘 계도했다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건데 그래서 조지서의 죄명은 제 스스로 잘난척하며 군주를 능멸했다는 것이었다.[13] 오늘날 관점에서는 잔인하거나 엽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연유가 타당할 경우, 그리 끔찍하게 여겨질 일은 아니었다. 영국만 해도, 헨리 8세는 2번째 왕비 앤 불린과 5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를 참수(斬首)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부부 중 어느 하나가 살해당하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그 배우자(…)로 두는 게 보통이다.[14]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영조의 적모(嫡母)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았다. 그것도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세자의 생모이며 직첩도 더 높은 '빈'(정1품, 중전 바로 아래)에게 '숙의'(종2품) 따위가 대든다는 것은 심각한 하극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으로 따지면 종2품 참판이 정1품 영의정에게 덤빈 꼴이다. 인현왕후장희빈에게 매질을 가한 적이 있다.[15]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는 자기 외동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죽이네 살리네 한 것을 효종비 인선왕후가 말렸다고 한다.[16] 1차 위기의 옹호도 임사홍이 목숨 걸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조성한 거지, 신하들은 '반성을 좀 시켜야 한다.'며 성종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물론 임사홍의 만류에 성종이 조금 누그러지자, 일치단결해서 폐비 반대를 외쳤지만.[17] 당시 최고 어른이었던, 세조의 정실이며 폐비 윤씨의 시할머니인 정희왕후가 공식적으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선언할 지경이었다.(단 이것은 1차 때)[18] 이 당시 왕에 대해 살해 위협이나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려는 시도는 오늘날의 국가전복에 해당되는 엄청난 범죄였다. 왕을 위험에 빠트리는 그 어떠한 행위도 모두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뤄졌다.[19] 원래는 부(父), 자(子), 손(孫)이었다고 하나, 고려시대를 전후하여, 부계(父系), 모계(母系), 처계(妻界)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즉 아버지 집안, 어머니 집안, 처가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것.[20] 세자를 생각하여 성종이 참았다는 설이 많다. 심지어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도왔다. 7년쯤 후에는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지묘라 부르며 해당 고을 수령에게 '절기마다 제사를 올리고, 제사에 쓰이는 용품은 왕비의 예에 준하게 마련하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아마도 아들인 연산군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배려한 모양인데, 명령이 제대로 안 지켜졌는지 연산군은 내시를 보내 묘의 상태를 알아볼 때에는 엉망이었다고 한다.[21] 회기동(回基洞)의 이름 유래가 회묘(懷墓)에서 비롯된다. 후대에 회기동의 글자가 懷에서 回로 바뀌었다.[22] 기록에는 연산군이 키가 크고 왕의 풍채가 없으며 여자 같이 생겼다고 한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의 꽃미남같은 스타일(…) 엄친아? 이전의 왕들은 대체로 우람한 장군 스타일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의 이런 외모는 모계에서 왔을 가능성도 크다.[23] 재미있게도 여기서 연산군 역을 맡은 이민우와 김영란은 용의 눈물에서도 할머니와 손자로 나온다. 단 김영란의 신덕왕후는 양할머니에다가 일찍 죽었기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24] 서장금(이영애)의 아버지인 군관 서천수(박찬환)가 점을 쳤는데, 도사가 "첫 번째 여인(폐비 윤씨)은 네가 죽이고, 2번째 여인(아내 박명이)는 네가 살리고, 3번째 여인(딸 서장금)은 너를 죽이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는다. 그 점괘대로 서천수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해 죽게 만들고, 죽어가던 박명이(김혜선)를 살려 혼인한다. 박명이와의 사이에서 딸 장금을 낳지만, 장금이 실수로 서천수가 군관이라는 사실을 밝혀 서천수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점괘대로 장금은 훗날 의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린다.[25] 이전에 출간된 임용한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