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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 West Three Royal Tombs, Goyang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면적 | 1,361,665㎡ |
지정연도 | 1970년 5월 26일 |
시대 | 조선 중종 10년(1516) |
소유단체 | 국가유산청 |
관리단체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 |
서삼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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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西三陵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자리한 조선왕릉군(群).
희릉, 효릉, 예릉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근처를 다니는 노선으로 고양 버스 043번이 있다.
원래는 위에서 설명한 3기의 왕릉과 소현세자의 소경원만 자리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현대를 거치며 나머지 원(園)과 태실, 후궁과 왕자, 공주의 묘 등이 차례대로 옮겨오게 되면서 굉장히 거대한 권역이 되었다.
2025년 1월 현재 희릉과 예릉은 공개, 효릉과 태실 권역은 예약에 따른 제한적 공개가 이루어지고 있고, 소경원, 경선군·경완군묘, 영동현주묘는 여전히 비공개 묘역으로 남아있다.
2. 능(陵)
2.1. 희릉(禧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장경왕후의 왕릉 | 서삼릉 내 1기 희릉 禧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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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단릉(單陵) |
매장자 | 장경왕후 (1515년 3월 26일 사망) |
조성시기 | 1차 조성: 1515년 4월 4일 2차 조성: 1537년 9월 6일 |
홈페이지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희릉(禧陵) 전경 |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안장한 단릉(單陵)이다.
본래 희릉은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년) 희릉을 조성할 당시 큰 돌이 있었는데 이를 신중하게 논의하지 못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중종의 정릉이 지금의 예릉[1] 자리에 들어서면서 희릉 역시 정릉의 일부가 되고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종의 능이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 정릉으로 이장되고, 장경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이 되었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
희릉(禧陵)의 무석인과 문석인 |
상술했듯 희릉은 원래 헌인릉의 서쪽, 즉 지금의 국정원 경내 서쪽 능선에 있다가 현 위치로 이장됐는데 이 무덤 자리가 한동안은 세종의 구 영릉으로 잘못 알려져있었다. 2008년에 구 영릉인 줄 알고 발굴조사를 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무덤은 석실로 조성한 소헌왕후까지 묻힌 합장릉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회격묘에 단실이었기 때문에 영릉으로 보기엔 어려웠고 결과적으로는 희릉 초장지(初葬地)임이 확인됐다.[2]#
이렇게 되면서 1973년에 인근에서 발굴했던 구 영릉 석물이 사실은 영릉이 아니라 희릉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추정은 공식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진짜 구 영릉 석물들은 그 자리에 순조의 인릉이 조성되면서 인릉의 석물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2.2. 효릉(孝陵)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인종 관련 문서}}} |
생애 · 효릉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 인종실록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인종과 인성왕후의 왕릉 | 서삼릉 내 2기 효릉 孝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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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쌍릉(雙陵) |
매장자 | 봉분 좌 인종 (1545년 8월 17일 사망) 봉분 우 인성왕후 (1578년 1월 16일 사망) |
조성시기 | 1545년 10월 15일 |
홈페이지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효릉(孝陵) 전경 |
중종이 승하하고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1545년 7월 1일 인종이 승하하였다. 인종은 승하하면서 부왕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효를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여 자신을 부모의 곁에 묻어 줄 것과 상장(喪葬)을 소박하게 하라는 유언를 남겼다.
이 유언은 인성왕후를 통해 언문(諺文)[3]으로 승정원에 전달되었으며, 그녀 또한 자신을 인종 곁에 묻어 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 뜻에 따라 고양에 있던 정릉의 백호에 해당하는 산자락 너머 간목산(艮木山)에 능을 조성하여 10월 15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부왕의 곁을 지키고 싶었던 인종의 뜻과는 달리 1562년(명종 17년) 중종의 능침이 선릉 곁으로 옮겨 가면서[4] 어머니 장경왕후의 희릉(犧陵)만 남게 되었다. 이후 1577년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그녀의 뜻대로 인종의 곁에 능침을 조성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
효릉(孝陵)의 병풍석 |
특이하게도 인종의 능에만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원래는 상술한 유언에 따라 인종의 능에도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었는데 선조 때 인종의 능에만 병풍석을 추가로 두른 것이다.
효릉은 남한 내 조선왕릉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비공개 능역으로 남아있던 왕릉이었는데, 이유는 효릉 주변이 축협 부지이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까지 비공개 능역이었던 온릉이 전면 개방되면서 효릉이 유일한 비공개 능역으로 남아있었으나 이후 예약자에 한해서 출입이 가능하게 바뀌었다.[5]
2.3. 예릉(睿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철종과 철인왕후의 왕릉 | 서삼릉 내 3기 예릉 睿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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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쌍릉(雙陵) |
매장자 | 봉분 좌 철종 장황제 (1864년 1월 16일 사망) 봉분 우 철인장황후 (1878년 5월 31일 사망) |
조성시기 | 1864년 4월 10일 |
홈페이지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예릉(睿陵) 전경 |
원래는 중종의 정릉이 자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이 이장되면서 초장지로 남았고, 후에 철종이 승하하며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
예릉(睿陵)의 석물 |
예릉의 석물들은 정릉을 이장하며 묻어둔 석물들을 꺼내 재사용한 것이다. 때문에 비슷한 시기의 타 왕릉들의 석물들과 비교하면 훨씬 거대한 크기를 엿볼 수 있다.
3. 원(園)
3.1. 소경원(昭慶園)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소현세자의 원(園) | 서삼릉 내 원(園) 1기 소경원 昭慶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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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단분(單墳) |
매장자 | 소현세자 (1645년 5월 21일 사망) |
조성시기 | 1645년 6월 19일 |
홈페이지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소경원(昭慶園) 전경 |
3.2. 의령원(懿寧園)과 효창원(孝昌園)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의소세손의 원(園) | 서삼릉 내 원(園) 2기 의령원 懿寧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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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단분(單墳) |
매장자 | 의소세손 (1752년 4월 17일 사망) |
조성시기 | 1752년 5월 12일 |
홈페이지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문효세자의 원(園) | 서삼릉 내 원(園) 3기 효창원 孝昌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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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단분(單墳) |
매장자 | 문효세자 (1786년 6월 6일 사망) |
조성시기 | 1786년 7월 19일 |
홈페이지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의령원(懿寧園)과 효창원(孝昌園)의 전경 |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혜경궁 홍씨의 장남이었던 의소세손의 원이다. 1752년(영조 28) 안현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묘를 조성하고 의소묘라 하였으나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의령원이라 하였다. 이후 194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 문효세자의 원이다. 1786년(정조 10년)에 고양 율목동에(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였는데, 의소묘와 마찬가지로 1870년(고종 7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하였고, 이후 1944년 일제가 현재의 자리로 강제 이장하였다. 여담으로 처음 조성될 당시에는 문효세자 이후 세상을 떠난 의빈 성씨의 묘와 100보(약 50m)였는데, 두 묘를 이장을 한 현재는 약 2km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의빈 성씨의 묘가 먼저 서오릉으로 옮겨 왔고, 효창원도 4년 후에 따라오듯 옮겨온지라 역시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은 아니다.
4. 태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태실(胎室) |
5. 묘(墓)
5.1. 회묘(懷墓)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폐비 윤씨의 묘 회묘 懷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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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형태 | 단분(單墳) |
매장자 | 폐비 윤씨 (1482년 9월 18일 사망) |
조성시기 | 1차 조성: 1504년 4월 27일 2차 조성: 1969년 10월 25일 |
홈페이지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회묘(懷墓) |
회묘 인근에는 농협 젖소개량소와 한국스카우트 종합훈련원의 부지가 차지하고 있고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가 그 인근을 지나고 있다.
5.2. 왕자·왕녀묘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
왕자·왕녀 묘 |
- 왕자 : 인성대군(예종), 순조 2남, 철종 원자, 고종 원자, 고종 3남, 고종 4남, 고종 왕자 육, 고종 왕자 우
- 왕녀 : 정소공주(세종), 인순공주(중종), 선조 왕녀, 숙신공주(효종), 명선공주(현종), 명혜공주(현종), 화억옹주(영조), 영조 왕녀1, 영조 왕녀2, 영온공주(순조), 헌종 왕녀, 고종 왕녀(내안당), 고종 공주, 고종 왕녀(영보당)
5.3. 후궁묘
5.3.1. 숙의 묘역, 완친왕묘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
후궁묘(숙의 묘역) |
숙종 후궁 소의 유씨, 순조 후궁 숙의 박씨, 헌종 후궁 숙의 김씨, 인조 후궁 숙의 나씨, 인조 후궁 숙원 장씨의 묘가 있다.
그리고 한편 완친왕의 묘도 이 권역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쪽은 1960년대 도시화 개발로 인해 옮겨오게 되었다. 참고로 어머니인 영보당 귀인 이씨의 무덤은 바로 옆인 빈·귀인 묘역에 있다. 과거에는 의친왕의 어머니인 귀인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2009년에 남양주시 홍유릉으로 이장하였다.
5.4. 빈·귀인 묘역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
후궁묘(빈·귀인 묘역) |
다음은 여기에 옮겨 온 빈, 귀인의 명단이다.
명종 후궁 경빈 이씨, 숙종 후궁 귀인 김씨, 철종 후궁 귀인 조씨, 철종 후궁 귀인 박씨, 철종 후궁 숙의 방씨, 철종 후궁 숙의 김씨, 철종 후궁 숙의 범씨, 정조 후궁 원빈 홍씨, 정조 후궁 의빈 성씨, 정조 후궁 화빈 윤씨, 헌종 후궁 경빈 김씨, 고종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고종 후궁 정화당 김씨, 고종 후궁 귀인 양씨, 고종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 고종 후궁 내안당 귀인 이씨
5.5. 경선군·경완군묘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
경선군·경완군묘(慶善君·慶完君墓) |
이곳은 제30기갑여단 영내, 즉 군사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30여단 주둔지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분단되어있는데, 그중 2015년 신막사 완공 전까지 제30기계화보병사단 시절 예하 90여단 주둔지로 사용했고 현재는 30여단 소속부대 창고가 조성된 지역 내부에 위치해있다. 외부 출입구도 없고 막사 등 병영생활 관련된 시설이 없으니 훈련이나 작업 등을 목적으로 일부러 가지 않는 이상 해당 부대 출신이더라도 방문할 일이 없다. 덕분에 인적이 거의 닿지 않은 채로 방치되고 있다.
5.6. 영동현주 및 이숙무 묘
<colbgcolor=#CA5E59><colcolor=#ffd400> |
영동현주 및 이숙무 묘 |
낙타고개 인근에 있고[6], 근처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비공개 묘역이다. 서삼릉 능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무덤 양식인 사각분으로 둘레돌을 세웠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영동현주의 묘이고, 오른쪽이 이숙무의 묘이다.
영동현주는 원래 경혜옹주가 되었다가 종실의 자식이기에 영동현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숙무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의 충신인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6. 훼손의 역사
본래 서삼릉의 능역은 광릉수목원에 필적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 서삼릉의 광활한 능역을 한양컨트리클럽, 뉴코리아 컨트리클럽, 농협대학교, 농협 젖소개량소, 종마장[7], 한국스카우트 종합훈련원에 넘겨주었고, 그로 인해 서삼릉의 능역은 무참히 훼손되었다.인종의 효릉과 폐비 윤씨의 회묘, 태실, 소현세자의 소경원[8], 왕자 및 공주, 후궁묘는 서삼릉의 능역을 차지하고 있는 농협 젖소개량소에 둘러싸여 오늘날까지도 비공개 구역이 되어 버렸다. 최근에는 효릉과 태실 권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단, 방문하려면 온라인으로 예약해야 한다.
7. 복원 문제
2009년까지 능 내의 시설을 철거하고 능역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2023년 6월, 인종의 효릉과 소현세자의 소경원도 개방할 예정이다. 그런데 부지의 젖소개량사업소 문제는 아직 확정을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2023년 9월 8일, 관람로를 마련하면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방문하려면 사전에 온라인으로 신청해야 한다. 그리고 방역을 위해 입장 시 소독 작업은 필수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소경원은 개방되지 않았다.
2024년에는 소경원의 정자각을 복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8. 기타
삼릉역의 역명도 여기서 따왔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원흥역이다.조선왕릉 중 가장 훼손이 심각한 왕릉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태실과 여러 무덤이 지속적으로 옮겨오고 군사정권 시절 때 도시화로 인해 무덤이 옮겨오고 주변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되겠다.
9. 관련 문서
[1] 후술할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이다.[2] 세종의 영릉이 있었다고 하면 그 아래에 석실(돌방)이 있어야 하는데, 발굴 당시 회격묘의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바닥이 단단하면서 움푹 파인 흔적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희릉을 이장할 때 구실로 '현재 조성한 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현재의 서삼릉 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3] 조선 시대에는 한글을 언문으로 불렀다.[4] 당시 대왕대비였던 문정왕후의 지시였다.[5] 본인이 관람을 희망하는 날짜에서 최소 3일 전에는 예약을 신청해야 한다.[6] 정확히는 원당에서 통일로 IC에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7] 한국마사회 소속[8] 인근에 뉴코리아 컨트리클럽, 제30기갑여단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소현세자의 아들들인 경선군묘와 경완군묘는 30여단 주둔지 내부, 즉 군사지역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