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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의빈 성씨
宜嬪 成氏
호칭 의빈(宜嬪)
의빈궁(宜嬪宮, 의빈 성씨의 사당 이름.)
안현궁(安峴宮, 의빈 성씨의 사당 이름)
성덕임(成德任)[1][2]
출생 1753년 음력 7월 8일[3]
사망 1786년 음력 9월 14일 미시(오후1시 ~ 3시)[4]
사망지 창덕궁 중희당[5]
향년 34세[6]
본관 창녕 성씨[7]
배우자 정조
자녀 첫째(유산), 둘째(유산), 문효세자, 옹주, 다섯째(복중 사망)
처소 창덕궁 연화당(讌華堂)[8][9][10]
1. 개요2. 생애
2.1. 궁녀로 입궁하다(10세)2.2. 소설을 필사하다(21세)2.3. 승은을 입다(28세)2.4. 2번의 유산(28세 추정 ~ 30세)2.5. 문효세자를 낳다(30세)2.6. 비극적인 죽음(34세)
3. 독살 의혹
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
4. 사후
4.1. 의빈묘4.2. 궁호(?)
4.2.1. 칠궁4.2.2. 의빈궁4.2.3. 안현궁
5. 의빈 성씨가 기록된 서적
5.1. 《이재난고5.2. 《국휼등록》5.3. 《한중록》5.4. 《순재고》5.5. 《준호구》5.6. 《청장관전서》5.7. 어제문
5.7.1. 어제의빈묘지명5.7.2. 어제의빈묘표5.7.3.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5.7.4.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5.7.5. 어제의빈치제제문5.7.6. 의빈성씨유제축문
6. 관련 장소
6.1. 거둥고개6.2. 승가사
7. 가족 관계8. 장희빈과의 유사성9. 거절의 이유10. 미디어
10.1. TV 드라마10.2. 예능10.3. 창작 뮤지컬10.4. 창작 판소리10.5. 소설

1. 개요

이 문서는 본명인 성덕임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빈(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上曰: 病情奇怪, 竟至於此。 從今國事尤靡托矣。
- 정조, 《조선왕조실록》 의빈 성씨의 졸기 (1786년 9월 14일)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我思矣千古之訣"
-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조선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다. 승은을 입은 건 원빈 홍씨·화빈 윤씨 간택 다음이지만, 정조가 1766년에 승은을 내렸다가 거절당했을 때부터 후궁의 반열에 뒀다.[11]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후사를 위해 명문가에서 간택한 후궁인데 반해, 의빈 성씨는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궁녀 출신 승은 후궁이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서 평생 재색을 잊을 수 없고[12], 여홍(바느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하고, 붓글씨가 뛰어나고, 수학을 잘하고, 예의가 바르고, 효의왕후를 공경하는 등으로 보아 팔방미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 때문에 집안이 한미한 중인 신분의 여자라 큰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사후 칠궁에 봉안됐지만 순종황제 때에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위를 땅에 묻었다. 의빈의 시조모 영빈 이씨도 아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해 왕으로 즉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후대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즉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를 낳은 유일한 후궁이다.

2. 생애

2.1. 궁녀로 입궁하다(10세)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이며[13] , 1753년(영조 29년, 계유년) 음력 7월 8일생이다.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14]였던 아버지 성윤우와 어머니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0세[15]가 되는 1762년(영조 38년)에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16] 정확히 몇 월에 입궁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음력 2월에는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왕세손빈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리고, 윤5월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입궁하자 혜경궁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17] 헌종 비나 철종 비는 자식이 없어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던 경우가 있었으나, 혜경궁은 의빈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셋(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이나 있었다. 하지만 임오화변(1762년) 이후 아들 정조는 1776년까지 혜경궁이 머문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에 머물렀고 두 딸인 청연공주는 1765년, 청선공주는 1766년에 혼인하여 출가를 하게 되어 3남매가 혜경궁을 자주 만나러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반해 덕임은 친정 아버지의 청지기의 딸에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늘 혜경궁 곁에 있을 수 있으며 3남매(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비슷한 나이대여서 혜경궁이 덕임을 자식처럼 기른듯하다.

2.2. 소설을 필사하다(21세)

곽장양문록 문서 참고 바람.

2.3. 승은을 입다(28세)

"처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울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뽑았고 다시 빈(의빈 성씨)에게 명하였으나 또 굳이 사양했다. 그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명을 따랐다. 이후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원자(문효세자)가 태어났다. 이에 소용이 되었고, 아들의 귀함에 의빈이 되었다"[18]
 
정조가 직접 쓴 의빈 묘지명의 일부이다. 황윤석의 《이재난고》에서 1780년(정조 4년) 음력 12월 8일 당시에 의빈이 임신 중이었으므로 늦어도 1780년 음력 11월에는 첫 승은을 입었을 것이다. 정조가 15살이던 1766년(영조 42년)에 처음으로 고백했고, 1786년(정조 10년)까지 20년 동안 후궁의 반열에 뒀고, 첫 고백을 거절당하고 15년 동안 원빈 홍씨화빈 윤씨를 간택했다. 아무래도 정조는 첫 고백을 거절당한 1766년을 1년으로 정하여 15년을 계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궁녀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승은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 큰 욕심도 별다른 야망도 없었던 것 같다. 일개 궁녀의 신분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세손, 왕의 명령에 불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용감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였을 수도 있다. 정조가 자신의 하인들에게 벌을 내리자 구애를 받아들인 것으로 볼 때 아랫 사람들과의 친밀함이 높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의빈 성씨는 거절의 이유로 정조와 금슬이 친밀치 못했던 정비인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음을 들었는데, 이를 통해 윗사람인 효의왕후와의 사이도 상당히 친밀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나 의빈은 죽는 순간까지도 효의왕후를 위했고, 효의왕후도 의빈의 죽음에 마치 친형제의 죽음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이렇듯 의빈과 효의왕후 사이의 호감과 의리는 진심이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의빈이 죽음을 각오하고 왕의 구애를 거절한 이유가 효의왕후에 대한 배려인 것이 착한 척 하는 가식이거나 다른 생각이 있는 핑계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의빈 성씨는 혜경궁이 친히 기르던 궁녀였으니 어린 나이에 입궁한 효의왕후와도 안면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가 같고, 입궁 연도도 1년 차이로 비슷하다.[19] 그러나 애석하게도 효의왕후는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20]
 
이후 정조는 15년간 후사를 위해 간택을 거쳐 후궁 둘을 들였는데,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는 입궁 1년 만에 죽고, 두번째 후궁 화빈 윤씨는 당시 임신을 한 상태였다.[21] 정조는 의빈에게 첫 번째 고백을 하고 거절당한지 15년 만인 1780년에 의빈 성씨에게 2번째로 고백했으나 또 거절당한다. 또 거절한 이유는 안 나와 있다.
 
왕의 승은을 거절한다는 것은 곧 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의빈은 목숨을 걸고 거절을 한 것이다. 가설 중 한가지로 두 사람이 신분차를 떠나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소꿉 친구나 오누이 같은 매우 가까운 사이기에 의빈이 감히 '거절'이라는 선택지를 꺼내 들 수 있었던 것이라는 설도 제시된다.[22] 
 
정조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이번엔 의빈 성씨의 하인[23]에게 벌을 내리는 강수를 뒀고, 의빈 성씨는 하인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24] 여기서 중요한 건, 정조가 일개 궁녀였던 의빈에게 2차례나 거절당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긴 세월을 기다렸다는 점이다. 신분상 자신이 원하는 여자는 강제로라도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는데도 의빈이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점에 대해서는 끝내 벌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입궁 30년 뒤에 상궁이 되므로 승은을 입을 당시 의빈 성씨는 나인 신분이었을 것이다. 승은을 입고 상의(尙儀)[25]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26]

2.4. 2번의 유산(28세 추정 ~ 30세)

《이재난고》에서 의빈 성씨가 경자년(庚子年, 1780년) 음력 12월 8일, 신축년(辛丑年, 1781년) 음력 7월에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효세자가 임인년(壬寅年, 1782년) 음력 9월 7일생이니 첫째는 1780년 음력 12월 8일 이후, 둘째는 1781년 음력 7월 이후에 유산한 듯하다. 

2.5. 문효세자를 낳다(30세)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782년(임인년) 9월 7일 인시(새벽 3시 - 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맏아들 원자(문효세자)를 낳았다.[27] 이 때 의빈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28]와 유모 아지[29]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소용(昭容)[30]을 거쳐 정1품 의빈(宜嬪)이 된다. 의빈의 빈호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31], 수(綏) 자[32]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33]

'宜'는 '마땅할 의' 자로 '마땅하다, 알맞다' 라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 '화목하다, 화순하다(온화하고 어질고 순하다), '아름답다, 선미하다(착하고 아름답다)'라는 뜻도 있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묘사된 의빈 성씨의 행적을 보면 딱 알맞는 한자이다.

1784년(갑진년) 윤달 3월 20일에 옹주를 낳았다.[34] 아마 이때가 정조와 의빈 성씨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2.6. 비극적인 죽음(34세)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35]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36]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37]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불과 생후 2개월도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경풍으로 죽어 작위도 받지 못했다.[38] 문효세자 역시 2년 뒤인 1786년 음력 5월 11일에 5세를 일기로 홍역으로 요절했다. 문효세자 사망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의빈 성씨 역시 앓기 시작해서[39] 그 해를 못 넘기고 만삭[40]의 상태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34세.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 같다.

3. 독살 의혹

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당시 왕대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은언군이 자신의 장남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는 것. 이 때문인지 상계군은 의문사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41],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2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42]

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

같은 해 같은 달, 또 독살 의혹에 관한 기록이 있다.
 
김종수가 아뢰기를, “어떤 선비가 와서 이 종이 쪽지를 보여 주었는데, 보고서 마음 속으로 몹시 놀라 감히 이렇게 청대(請對)하였습니다.” 하여, 원지(原紙)를 가져다 보니, 대략에, “마을 안에 손가(孫哥)란 자가 있는데 와서 말하기를, ‘9월에 성빈(成嬪:의빈 성씨)께서 앓고 있을 때 내관 이 지사(李知事)가 약물을 간검(看檢)하였는데, 내의원의 약을 쓰지 않고 자기가 가져온 약을 달여서 올리니, 약을 드시자마자 바로 돌아가셨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아는 자가 없었는데, 하늘의 이치는 가리기 어려워 왕대비전께서 살펴서 알아낸 점이 있어 이를 상감에게 전달하자, 상감이 듣고 크게 놀라 곧장 성빈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잡아다 그 자리에서 끌어 내어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43], 또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으므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 멀리 찬배(竄配)하였는데, 동짓달에 상께서 특별히 용서하여 풀어 줘 이 내관(李內官)의 고향인 충청도로 돌려보냈다. 대체로 이 내관은 일찍이 홍국영(洪國榮)과 한통속으로 결탁했던 자로서 위세를 부리고 아부하는 것이 종잡을 수 없고 지극히 요망하고 악독하였으니, 옛날 진 시황(秦始皇) 때 천하의 간신이었던 조고(趙高)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상의 총애를 받아서 품계가 높았는데, 그자의 아비가 죄를 받았을 때에 또한 그 품계를 삭탈당해 우선 신문(新門) 내궐(內闕)의 제청색(祭廳色)에 차임되었다. 이 내관의 집은 매우 재물이 넉넉하여 보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내막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다른 일로 의심할 단서가 있다면 혹시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여기겠지만, 약을 쓴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운운한 것은 지극히 가소롭다.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에 내가 반드시 직접 검열한 사실을 궁중 안팎이 모두 다 알고 있으며[44],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을 모두 누워 자는 침실 안에 보관해 놓고 썼다. 경이 이런 상황을 몰라서 비록 이처럼 놀랐지만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그자의 약을 쓰고 쓰지 않은 문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 중관이 주관하는 궁방(宮房)이 자못 많아서 내부에서 시기하는 자가 없지 않았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런 근거 없는 말이 있었다. 궁중의 일에 관계되므로 조용히 조사하여 단서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금 기다려서 응당 문안(文案)을 내보이겠다. 경은 우선 물러가라.” 하였다.[45]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이에 연루된 내관 이윤묵의 목을 바로 치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항상 자신이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주었다. 정조는 독살설을 퍼뜨린 손용득을 직접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

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

《이재난고》에 당시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화빈의 인척인 조시위가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나 화빈이 후궁의 지위를 유지한 것을 볼 때 독살임을 확실히 입증하지는 못한 듯 하다.

4. 사후

첫째와 둘째는 유산하였고 출산한 두 아이는 조졸, 다섯째는 태어나지 못한 채 의빈과 함께 죽었기에 후사는 전하지 않는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비(御製碑)를 내렸다.#
 
1797년(정조 21년)에는 육상궁선희궁의빈궁명일제삼궁고제[毓祥宮宣禧宮宜嬪宮名日祭三宮告祭]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육상궁은 숙빈 최씨의 사당, 선희궁은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증조모, 조모와 함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4.1. 의빈묘

사적 제 200호.
하여, 내가 이르기를, “잘하였다. 들으니, 효창묘의 소속이 ‘의빈묘(宜嬪墓)와 경계를 나누어 정하여 애초에 서로 관섭(管攝)하지 않았는데 또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는데,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兼管)하게 하라. 수호(守護)하는 일 등에 대해 만약 이전처럼 다투고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있다면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예판은 묘소에 나아가서 각별히 신칙하고 하체(下帖)를 각각 그 직소(直所)에 써서 주라. 호판도 나아가서 묘소 아래에 사들여야 할 전토(田土)를 간심하는 것이 좋겠다. 예판과 호판은 오늘 나가서 석상식(夕上食)을 지낸 뒤에 들어오라고 호조와 예조의 하리(下吏)를 불러와서 분부하고, 연교(筵敎) 1통도 적어 보내도록 하라. 하번 한림(下番翰林)도 나가서 봉심하라.” 하였다.
- 정조, 《일성록》 1787년(정조 11년) 9월 14일
 
정조는 의빈 사후 이례적으로 아들 문효세자와 100보 가까이 나란히 묻힐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본래 후궁보다 후궁의 자식들이 신분이 더 높다는 점과 숙종 때, 숙빈 최씨의 묘자리를 공주가 묻힌 곳으로 정할 수 없다 하여 다시 정했다는 전례를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46]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원에 묻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 공원으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때문에 아들과 어머니가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자와 나란히 묻혀있고, 의빈 성씨는 효창원에서 2km 떨어진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이 후궁묘역은 비공개 지역[47]이라 사전에 서면으로 신청을 해야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 역을 연기했던 배우 한지민이 의빈 성씨의 묘에 다녀왔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4.2. 궁호(?)

의빈 성씨가 조선 왕조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궁호를 받았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첫째, 의빈 성씨 사망 이후 정조가 직접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명칭 한 이후 여러 곳에서 의빈을 ‘의빈궁’이라고 표기 했다. 또한 의빈궁(宜嬪宮)의 또 다른 호칭은 안현궁(安峴宮)인데 일반적으로 의빈궁(宜嬪宮) 내지 의빈방(宜嬪房)으로 지칭 했다.[48]
 
둘째,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에서 육상궁, 선희궁, 의빈궁을 ‘삼궁(三宮)’으로 지칭 했다. 의빈은 생전에 의빈궁으로 불린 적이 없고 정1품 빈(嬪)의 신분으로 사망 했다. 의빈이 문효세자의 생모이나 궁호를 받지 않은 빈(嬪)이라면 삼궁(三宮) 안에 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는 국가의 공식 제사 예법을 적은 책인데 의빈(宜嬪)으로 표기해야 될 것을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하고 더군다나 삼궁(三宮)이라고 쓰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의판(儀版)의 궁묘원(宮墓園)에서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를 ‘안현궁 성씨(安峴宮 成氏)’라고 표기 했다. 궁묘원(宮墓園)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와 왕세손, 왕이나 왕세자를 낳은 후궁,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의 사당이나 무덤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의빈을 안현궁(安峴宮)이라고 분명하게 적었다. 의빈에게 궁호가 없었다면 안현궁(安峴宮)이라는 호칭이 있을 수 없다. 의판(儀版) 외에 안현궁에 관한 기록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혼전 일기인 효안전일기, 지구관청일기, 일성록 순조 32년 1월 28일 기록 등에 나타나 있다.
 
넷째,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에서 저경궁, 육상궁, 대빈궁, 연호궁, 경우궁, 선희궁, 의빈궁을 칠궁(七宮)이라고 분명하게 표시 했다.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 역시 의빈이 저경궁, 육상궁, 대빈궁, 연호궁, 경우궁, 선희궁과 나란히 제사를 받았고 ‘의빈궁봉 의빈 성씨(宜嬪宮奉 宜嬪 成氏)’라고 표기 했다.
 
다섯째, 1908년(순종 1년) 7월 23일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면서 의빈궁의 신주는 매안 되고 칠궁에서 제외 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 :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무덤)의 예법을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 정식 궁호라고 부르기 힘들다. 의빈 성씨는 궁호가 분명히 없을 소용일 당시에 소용궁이라고 불린 적 있다. 따라서 궁을 붙였다고 정식 궁호일 리가 없다. 희빈 장씨의 대빈궁처럼 궁호라기 보단 사당 이름일 것이다. 영조 때부터 세자를 낳은 후궁에게 사당에 궁호를 내리긴 하지만 안현궁이라는 칭호 역시 안현의 본궁에 빈소를 지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49] 게다가 궁호는 미칭이기 때문에 고개 현(峴)을 궁호로 쓴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즉, 의빈궁과 안현궁은 정식 궁호가 아니라 사당 이름을 궁호처럼 쓴 것에 가깝다.

4.2.1. 칠궁

1898년에 간행된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은 궁내부(조선 말기 왕실에 관한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에서 때마다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올리는 곳에서 소용되는 제반 기물, 제수 등의 내역과 수량을 적어놓은 책이다. 8권에서 저경궁 인빈 김씨, 대빈궁 옥산부대빈 장씨, 육상궁 숙빈 최씨, 연호궁 정빈 이씨, 경우궁 유빈 박씨, 선희궁 영빈 이씨, 의빈궁 의빈 성씨를 ‘칠궁(七宮)’으로 표기 했다. 당시 칠궁(七宮)은 왕과 왕세자를 낳은 생모의 사당이었다. 의빈궁은 문효세자의 생모로서 신주가 칠궁에 봉안되어 있었다.
宜嬪宮四節日四仲朔(의빈궁사절일사중삭)
 
「대한예전(大韓禮典)」은 대한제국이 독립 제국에 맞는 예법을 정하여 기록한 책이다. 3권 단묘도설(壇廟圖說)에 ‘의빈궁’이 나오는데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과 마찬가지로 칠궁에 속해 있는 후궁이었다.
 
宜嬪宮奉 宜嬪 成氏(의빈궁봉 의빈 성씨)[50]
 
조선 왕조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의빈 성씨에게 궁호(宮號)를 내렸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향수조사책과 대한예전에서 의빈을 분명하게 ‘의빈궁 의빈 성씨(宜嬪宮 宜嬪 成氏)’라고 명칭하고 칠궁에 봉안 했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그러나 1908년(융희 2년) 7월 23일, 개정된 제사 제도에 따라 의빈궁의 신위는 매안(埋安)[51]되었다. 다만 의빈궁의 제사는 원소(園所)[52]의 예법에 따르라고 했다. 의빈은 정1품 빈(嬪)의 신분으로 사망했는데 원소(園所)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나왔다. 의빈궁의 신위가 매안되고 칠궁에서 빠지자 육궁(六宮)이 되었고, 후일 순헌황귀비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이 봉안되면서 오늘날의 칠궁(七宮)이 되었다.엄비가 영친왕 낳았다고 지 자리 만들기 위해 쫓아낸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으리라.

4.2.2. 의빈궁

의빈 성씨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1787년(정조 11년) 1월 10일 일성록에서 정조가 의빈의 호칭을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했다.[53] 이후 여러 곳에서 의빈궁(宜嬪宮)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는 1795년(정조 19년)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에 관한 규범이나 규정의 사례를 기록하여 예조에서 편찬한 책이다.
육상궁 선희궁 의빈궁 명일제 삼궁 고제(毓祥宮 宣禧宮 宜嬪宮 名日祭 三宮 告祭)
이 책에서 의빈 성씨를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명칭하고 육상궁, 선희궁과 함께 삼궁(三宮)이라고 일컬었다.
 
육상궁(毓祥宮)·선희궁(宣禧宮)·귀인방(貴人房)·화순옹주방(和順翁主房)·화평옹주방(和平翁主房)·화협옹주방(和協翁主房)·화유옹주방(和柔翁主房)·화령옹주방(和寧翁主房)·화길옹주방(和吉翁主房)·청연군주방(淸衍郡主房)·청선군주방(淸璿郡主房)·의빈궁(宜嬪宮)·은신군방(恩信君房)에 바치는 동등의 공납 가운데 상대구어·생상문어·대구어란·대구어고지의 4종을 모두 견감한다.
1798년(정조 22년) 음력 4월 21일 일성록에서도 의빈 성씨를 ‘의빈궁(宜嬪宮)’으로 표기했다. 이 외에도 만기요람(萬機要覽),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 영선사절목(營繕司節目), 대한예전(大韓禮典) 등에서 의빈궁(宜嬪宮)이 표기되어 있다.

4.2.3. 안현궁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다 의빈의 빈소를 차렸다. 상구(喪柩)를 소난상(小欄床)에다 봉안하고 흰 비단 보자기로 덮고 난 다음 유장(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처 단봉문(丹鳳門)을 나와서 견여(肩輿)로 옮겨 나아갔다.[54]
안현궁 성씨 정종 후궁 문효세자 대비(安峴宮 成氏 正宗 後宮 文孝世子 大妣)[55]
의판(儀版)의 궁묘원(宮墓園)은 국왕 및 왕세자 생모, 왕세자, 왕세손의 사당이나 무덤을 간략히 정리했다. 안현궁 성씨(安峴宮 成氏)가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를 낳은 어머니라고 표기 되어 있다. 

5. 의빈 성씨가 기록된 서적

5.1.이재난고

조선 시대 여성 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드문데, 정조 대의 문신인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의빈 성씨의 본명, 가족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빈 성씨와 모르는 사이였던 황윤석이 어떻게 의빈의 본명, 가족 관계 등에 대해 알고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56] 아마 의빈이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정조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이 가깝도록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해 간택해 후궁을 둘이나 들였는데도 정작 첫 왕자를 승은을 입은 궁녀가 낳았다 하니 당시 호사가들 사이에서 화제였을 것이다.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 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 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 曰德任腹漸高大矣 上則微哂而已 尹嬪 過三十餘 朔 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 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 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 上意亦然 亟從之 徐則竟八度呈辭而遞 蓋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그녀가 복스러운 관상이라고 칭찬하였고 그리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윤빈(화빈 윤씨)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원자가 태어났는데, 산실청도제조 서명선 등은 오히려 윤씨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자고 청하면서 원자로 정하는 것을 청하지 않았다. 봉조하 김상철은 극력 상소하여 <춘추>에서 서자로 장자를 세우는 의리를 인용하며 원자 정호를 청하였다. 임금의 뜻 역시 그러했다. 서명선은 끝까지 8차례나 반대의 뜻을 아뢰다가 체직당했는데, (그가 반대한 까닭은) 대체로 소용이 본래 홍봉한 가문의 청지기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 황윤석, 《이재난고》#
元子私親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而爲一錢布衙門該吏 犯逋七千兩 幾死而敗 則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旣長轉至追御 今其父已沒 其兄弟方爲別軍職 而中宮又躬自撫養元子 兩宮和氣可幸云
원자의 생모 소용 성씨의 부친은 본래 홍봉한의 청지기(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며 또한 홍낙성의 첩의 부친이다. 잠시 관청의 관리로 있으면서 돈을 벌었으나, 7천냥을 범포(국고에 낼 돈이나 곡식을 써버림)함으로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무너졌다.[57] 곧 혜경궁이 소용 성씨를 거두어 친히 길렀고 소용 성씨는 혜경궁을 모셨다. 이윽고 성씨가 자라자 혜경궁은 임금을 지극히 따르기를 전했다. 지금 부친은 이미 죽고, 형제는 별군직이다. 그리고 중궁(효의왕후)이 원자(문효세자)를 몸소 무양했고, 양궁(兩宮, 대전과 중궁전의 왕과 왕비)은 화기로움을 다행이라고 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成嬪之父 舊□軍門庫直者 已死 有二兄 方爲東宮內隸云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예전에 군문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지키고 감시함, 신분 상 노속(奴屬))였는데 이미 죽었다. 그리고 두 오라버니는 세자궁의 액례(액정서에서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중인 계급)와 원례(승정원에 속한 하인)를 아울러 일컫는 내례였다.
- 황윤석, 《이재난고》#
 
追聞 是日寅初 後宮成氏 誕出王子 命依毓祥廟故事 賜爵昭容 大臣等 請陳賀稱慶 而以尹嬪産室廳事 姑今退待 又自軍門賜成氏兄戶曹書吏者武科
추가로 들었는데 그날 인시에 후궁 성씨가 왕자를 낳았다. 명에 따라 육상묘에 갔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던 일이었다. 후궁 성씨는 소용의 작위를 받았다. 삼정승이 경사를 기뻐하며 진하(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이 모여 임금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일)하길 청했다. 그러나 화빈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잠시 물러나서 기다렸다. 또한 이로 인하여 성씨의 오라버니는 군문의 명령으로 호조의 서리(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구실아치)가 되었는데 성씨의 오라버니는 무과였다.
- 황윤석, 《이재난고》#
 
五月成昭容所生女 以避寓出處闕外卽夭 命武寵臣任嵂主治喪葬
(1784년) 5월에 의빈 성씨가 낳은 딸이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 (임금은) 총애하는 무관 임율에게 명을 내려 옹주의 상장례를 주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 황윤석, 《이재난고》#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上下大小 擧多傳說 而東宮魂宮 命移于新門內慶熙宮 或曰 此因産期 故有忌別移也 或曰 大駕將移御慶熙宮 故先移也
의빈 성씨는 또한 임신한 지 4개월이었으니, 10월이 곧 해산할 때였다. 상하와 대소 사람들은 많은 소문을 들먹이면서 문효세자의 혼궁(왕세자의 장례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궁) 때문이라고 했다. 임금이 명을 내려 의빈 성씨를 돈의문 내에 있는 경희궁으로 보냈는데, 혹자들이 말하기를, 의빈이 해산할 시기이기 때문에 기피해야 할 것이 있어서 경희궁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혹자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거둥이 장차 경희궁으로 옮기기 때문에 경희궁으로 옮기는 것이라고도 했다.[58]
- 황윤석, 《이재난고》#
 
宜嬪成氏 在本第方待十月産期 而經産男子 子孔而母亦逝 自上哀慟 朝廷致慰
의빈 성씨의 10월 산기를 대비해 약으로 살폈다. 아들을 낳은 경험이 있는데. 어머니(의빈 성씨)와 태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슬피 울부짖었고 조정에서는 임금을 위로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의빈은 자현(임신 때에 태기가 조화되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가슴이 부어오르는 것처럼 아픈 병증) 병세가 있었고 사망했다. 대개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고 했다. 윤씨에게 심히 죄를 물어 내쫓았다.
- 황윤석, 《이재난고》#
 

5.2. 《국휼등록》

宜嬪葬禮時孝昌墓告由祭祝文 爾墓之左卜宜嬪宅往卽在今幽明慟䀌
의빈이 문효세자의 장례 때, 효창묘에 가서 고유제(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제사)의 축문을 읽었다. 의빈께서 문효세자의 무덤 곁으로 가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서럽게 울었다.#
 
《국휼등록》의 <문효세자국휼고유제축문>에 문효세자의 장례 때 의빈이 효창묘에 갔다는 기록은 정조 실록 1786년 윤7월 19일에 정조가 효창묘에서 장례 절차를 지켜봤다는 기록[59]과 상응한다. 따라서 문효세자의 장사를 지낸 날에 정조와 의빈이 효창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3. 《한중록》

아지는 내 유모로 (중략)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산실에 들어와 수고하니, 앞뒤로 거의 스무 차례가 넘는지라. 그 공이 적지 아니하니, 주상이 공을 표창하여 제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하여 후한 녹봉을 받게 하시고, 저를 후히 대하셔 천한 몸에 당치 못할 은혜와 영광을 많이 주시니라.
복례는 1782년 문효세자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다한 공이 있어 주상께서 공을 갚으셔서 시녀 직위를 주시니, 제 영광이 지극하더라.
 
정조께서 후사가 늦어 나라의 근심이 크다가, 1782년 문효를 얻어 처음으로 경사로워하니라. 그런데 1786년 5월에는 문효가, 그해 9월에는 문효의 생모 의빈이 죽는 변을 당하니,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하시어, 내 임금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애를 태우니라.

5.4. 《순재고》

순조가 지은 시문집인 《순재고》 6권에# <의빈묘견내시치제제문>#, <의빈회갑일치제제문계유>#가 있다.

5.5. 《준호구》

1852년(철종 3년) 안만길 준호구와 1858년(철종 9년) 성빈 수묘군 안만길 준호구. 1861년(철종 12년) 안장손 준호구.# 두 사람 모두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의 수묘군이었다.##

5.6. 《청장관전서》

19일, 의빈(宜嬪)을 예장(禮葬)할 때 제전차사원(祭奠差使員) 및 사후토제관(祠垕土祭官)으로 차출되었다. 20일, 묘소에 있었다.
21일, 본아에 있었다. 22일, 녹비(鹿皮) 1장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의빈 장례 때의 일이다.
-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71권

5.7. 어제문

어제문이란, 왕이 직접 쓴 글을 말한다.

5.7.1.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지명》 이미지

5.7.2.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묘표》 이미지
어제의빈묘표는 정조가 1786년(정조10년)에 썼다. 어제의빈묘표의 탁본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을때 보도자료에 탁본의 연도(혹은 비석을 세운 연도일 수도 있다), 서(書)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60]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이 함께 1책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어제의빈묘지명 또한 1786년(정조 10년)에 쓰였다.
 
2013년 8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조선이 사랑한 글씨' 서예 특별전에 전시되었다.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 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5.7.3.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의빈 성씨가 죽은 지 3년 째인 1789년(정조 13년), 정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제축문이란, 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월을 말한다.
 
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세월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동안  속세의 머뭇거림이 있었는데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상여를 따라가니 기약을 져버림에 이르렀구나. 아! 장자 이 길을 어찌 가겠는가?"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노제.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관머리 앞에 만시(挽詩)를 세우고 길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밤 동안 한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뒤섞여서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새벽닭이 울 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 흘러가는 모양으로 봤는데 아침에 혁옥을 타고 흐른 물은 저 어둠이 내린 산으로 떠나 가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따른 촉룡(계절, 기후 같이 대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너를 저승으로 환하게 인도 할 것이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땅의 신이여. 지금 의빈 성씨가 여기 고양군 율목동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비어 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하여 감출 것이 없으니 이에 현숙한 여인의 한 골육이 있는 언덕은 신 역시 위해줄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어 재앙이 있다고 꾸짖어도 작은 힘으로 뒤의 어려움을 아주 명백하게 물리칠 것입니다. 천 가지를 삼가고 깨끗한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신에게 공경히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여 주십시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형체는 이미 넋이 되어 모두 돌아 가버렸다. 만일 여기로 와서 무탈하게 편안히 단장 하고 저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저 어두운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령이 되어버렸는가. 임금이 완연히 기댔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또한 그 어머니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초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반우(反虞)를 지낸다. 이로써 이 길을 따라 무사히 사당에 이르기를 청한다.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재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재우(再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삼우(三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졸곡.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졸곡(哭萬)을 지낸다. 빈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정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초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덧없이 가버리는구나. 이미 캄캄해지고 나니 또한 초하루가 되었다. 빈이 한 번 떠나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아 속죄 할 길이 없어 한탄스럽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망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하늘의 때는 이처럼 갑자기 그 달 동안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빈이 남긴 행적에 대한 마음을 어찌 다하겠는가?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한식.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일.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삼일(三日)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단오. 건륭 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단오(端午)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추석. 건륭 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추석(秋夕)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한식.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일. 건륭 치세 모갑 3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삼일(三日)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단오. 건륭 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단오(端午)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추석. 건륭 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추석(秋夕)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건륭 치세 모갑 9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동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동지(冬至)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춘. 건륭 치세 모갑 2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하. 건륭 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5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추. 건륭 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8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이미 예를 마치고 대상(大祥)을 치르고 나서 또 담제(禫祭)를 지냈다. 길이 그리워하는데 나를 더욱 감응하게 하는 훌륭한 잠언(箴言)을 누가 말하겠는가? 세월이 흘러가면 역시 잊을 수 있도다.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백세 뒤에도 더욱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5.7.4.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제축문을 썼다.
 
삭제. 건륭 치세 모년 세차 모갑 모월 모삭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날이 가고 달이 가더니 훌쩍 초하루에 이르렀다. 아득해진 하소연을 이제야 헤아려보니 슬프고 애통한 마음을 어찌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망제.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 삭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달이 차고 기우는 저 아득한 세월에 내 마음은 허전하고 애달프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생신다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7월 삭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너의 세월은 이 하지에 이르렀으나 틀림없이 죽었으니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구나. 어찌하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는 네가 문효세자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일 뿐만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마음속 깊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가?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정조.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한식. 선륭 모년 세차 모갑 정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삼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3월 모갑삭 3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단오. 건륭 모년 세차 모갑 5월 모갑삭 5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구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9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동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 모갑삭 모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춘.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2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하.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5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5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추.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8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8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동.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11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11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납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21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납일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기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다시 기신일이 되었구나. 하늘의 뜻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해처럼 빛나는 대의는 기록이 있으나 훌륭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는다. 나의 사사로운 말은 종사에 영원토록 힘입었던 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5.7.5. 어제의빈치제제문

《어제의빈치제제문》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 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5.7.6. 의빈성씨유제축문

의빈성씨유제축문 이미지
1789년(정조 13년)에는 의빈성씨유제축문[宜嬪成氏諭祭祝文]을 받았다.

6. 관련 장소

6.1. 거둥고개

1787년(정조 11년) 1월 9일, 여를 타고 의빈묘(宜嬪墓)에 이르러 전작례를 행하였다.[61]
1787년(정조 11년) 5월 1일, 여를 타고 묘소와 의빈묘(宜嬪墓)를 두루 살피고 이어 재실로 돌아왔다.[62]
1788년(정조 12년) 4월 29일, 의빈(宜嬪)의 묘에 임하여 전작(奠酌)하고, 이어 국내를(局內, 묘지의 지역 안) 두루 살폈다.
1788년(정조 12년) 7월 8일,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것) 하였다.[63]
1788년(정조 12년) 9월 7일, 의빈묘(宜嬪墓)에 임하여 전작(奠酌)하고 도로 재실로 들어갔다.[64]
1788년(정조 12년) 11월 5일, 의빈묘(宜嬪墓)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였다.[65]
1789년(정조 13년) 4월 25일,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따위를 맞아 지내는 제사)를 행하였다.[66] 
1789년(정조 13년) 4월 26일, 의빈묘에 가서 별다례(명절, 음력 초하루나 보름 외에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드리는 차례)를 행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12월 28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 왕이 왕비가 되지 못하고 돌아간 조상이나 왕자, 왕녀를 임금이 몸소 제사 지내는 예)를 행하였다.[67]
1790년(정조 14년) 3월 15일, 의빈묘(宜嬪墓)에 들러 잔을 올렸다.[68]
1790년(정조 14년) 3월 24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69] 

이처럼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서울 지명 사전

6.2. 승가사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7. 가족 관계

7.1. 본가(창녕 성씨)

  • 7대조부 : 성만종(成萬種) - 제릉 참봉(종9품)[70]
  • 고조부 : 성경(成景) - 군자감 정(정3품)[71]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成胤祐) - 홍봉한의 청지기로 사후 찬성으로 추증[72]
  • 어머니 : 증 정경 부인 임씨 - 통례원 인의(종6품) 임종주의 맏딸, 사후 정경 부인으로 추증[73]
  • 오빠 : 성식(成軾)[74] - 어영청 군교[75], 별군직
  • 오빠[76] : (이름 불명) - 별군직[77]
  • 언니 : 이름 불명 - 영의정 홍낙성(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의 첩[78]
  • 고모 : 이름 불명 - 공조 판서 정방(鄭枋, 1707년 ~ 1789년)의 첩[79]
어제의빈묘표에서는 의빈이 여항 출신의 비천한 태생[80]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여항은 중인, 평민, 천민을 아우르는 말이나 의빈의 조상들이 간간이 낮은 벼슬을 한 것으로 볼 때 중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조부가 벼슬을 한 뒤로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르기까지 3대 째 벼슬을 하지 못한 것, 언니와 고모가 양반가 첩이었던 것, 의빈이 궁녀로 입궁한 것 등을 볼 때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의빈도 필사에 참여한 소설 《곽장양문록》이 처음 소개된 시기는 1997년 작성된 지연숙 교수의 논문인데, 논문에서 의빈 성씨를 성윤우의 삼녀(三女)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재난고》의 내용을 봐도 의빈 성씨의 일가 여성 중에 언니와 고모는 있지만, 의빈에게 또 다른 자매가 한 명 더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삼녀라는 논문의 정보가 오정보인지 잘 모르겠다.

의빈의 고모는 조선 시대 문신 정방#의 첩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정방은 1786년(정조 10년) 윤7월 29일 공조 판서가 될 수 있었고,# 정방의 조카 정복환#은 옥당(홍문관의 별칭)이 되었다고 한다.[81]

7.2. 왕가(전주 이씨)

  • 남편 : 정조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
    • 첫째 : ? (1780년 음력 12월 8일 이후 유산)[82]#
    • 둘째 : ? (1781년 음력 7월 이후 유산)[83]#
    • 장남 : 문효세자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
    • 장녀 : 옹주 (1784년 윤달 3월 20일 ~ 1784년 음력 5월 12일)[84][85][86]
    • 다섯째 : ? (1786년 음력 9월 14일) - 복중 사망

8. 장희빈과의 유사성

여담이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과는 100년(정확히는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다.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지만 조선 시대 빈들 중 이름(장옥정, 성덕임)이 알려진 경우 역시 두 사람 뿐이다.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으며,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다.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 정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아이(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87],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다.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각각 43세,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다.[88]
 
하지만 장희빈이 왕비 인현왕후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왕비 효의왕후와 사이가 좋았다.[89] 또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오를 만큼 야심 있는 성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할 만큼 욕심 없는 성격이었다.
 
또한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한글 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반면,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 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굉장히 긴 한문으로 되어있어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9. 거절의 이유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과 효의왕후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가설) 승은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후궁이 되기 전 조선 후기의 승은 후궁들을 보면 인조의 후궁 폐귀인 조씨는 사사,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는 자살 사실상 타살.,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는 독살, 영빈 이씨는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해야 했으며, 폐숙의 문씨는 사사, 사도세자의 후궁 숙빈 임씨는 첫 임신 때 낙태당할 뻔 했으며 사도세자 사후 사가에서 어렵게 살았고, 경빈 박씨는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었다.[90] 사족으로 첫 번째 승은 거부는 사도세자가 젊은 나이 때부터 궁녀들을 취하고 그들로부터 자식을 낳은 행동을 영조는 못마땅해했고 서손자들(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청근옹주 등)마저 싫어했는데 정조 역시 아버지의 절차를 따라 어린 나이 때부터 궁녀를 취하면 영조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빈이 거절한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물론 영조때문이라는 것은 2번째(영조가 사망하고 정조 즉위 후)에 거절한 이유에 대해선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91] 그러나 "문효를 잃은 뒤로 늘 죽기를 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자식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 (가설)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
    성덕임의 부친 성윤우가 7천냥을 범포했다는 《이재난고》의 기록이 사실이라 가정하면 조선 시대에 범포한 죄인들은 대부분 효수되거나 유배지로 보내짐에도#### 성윤우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무너졌다고 하나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이 때문에 10세의 성덕임이 1762년(영조 38년) 궁에 입궁해 혜경궁 홍씨의 처소 나인이 되었다. 참고로 조선 왕조 공식 국가 기록인 조선 왕조 실록이나 일성록 등에 성윤우의 범포 관련 기록은 없다. (화빈 윤씨의 부친인 윤창윤과 윤창렴, 윤창순 세사람이 함께 행한 사건의 경우 형조를 거쳐서 왕에게 전해지자 조사하고 보고해서 엄히 처리하라는 정조의 전교가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10. 미디어

왕을, 그것도 정조를 15년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 관계 등이 적힌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라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92]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93]으로 그려졌다. 2005년 로맨스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 속 성송연 캐릭터. 최근에는 정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 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10.1. TV 드라마

성송연 문서 참고 바람. 역사대로 이산(정조(이서진))의 첫사랑으로 그려졌다. 임오년에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까지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임오화변이 있던 이 해에 당시 세손이었던 이산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후에 도화서 다모가 됐다는 것은 모두 제작진의 허구적 상상력에 의한 설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의 승은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를 출산했고, 그 원자가 세자(문효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급했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는 걸 봐야 했다. 이때 둘째[94]를 임신 중이었는데 장결병(간경화) 진단을 받게 된다. 이산은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의원을 불러오려 한다. 그러면서 송연에게 나는 아이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 아이를 포기하고 치료를 받으라며 낙태약까지 건네나 송연은 아이를 더 잃을 수 없다며 일체의 치료를 거부하고 버틴다.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정조의 어진을 직접 그렸으나 결국 산달까지 살지 못하고 임신 중에 끝내 병사한다. 
 
2017년 1월, KBS1에서 방송 예정이던 드라마 《다산 정약용》에 의빈 성씨 역에 배우 '정한비'가 캐스팅되었으나 제작비 문제로 편성 취소되었다.

10.2. 예능

2017년 1월 1일 방송된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왕이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10.3. 창작 뮤지컬

  • 2016년 수원 시립 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95]
    • 배역 : '성선우' 역
    • 배우 : 홍민아
정조와 장터에서 처음 만나 '물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10.4. 창작 판소리

  • 2017년 수원 문화 재단 창작 판소리 《정조가
    • 배역 : '성덕임' 역
    • 소리꾼 : 신유진

10.5.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비단속옷
    • 세자익위사 우익위 '성연' 역
  • 2005년 로맨스 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 콘티 작가 '강건희' 역
  • 2007년 ~ 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 도화서 다모 '성송연' 역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 전 5권. 성송연의 생애는 드라마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극중에서 병사한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정순왕후 김씨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음독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일부는 드라마와 다소 차이가 있다.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의빈 성씨' 역
현대의 의사 오세아가 정조 시대 한세로 태어나서 정조를 돕는 내용. 극중 오세아(한세)와 의빈은 별개의 인물이다. 의빈은 정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되는 궁녀로 등장한다.작가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며 집필한 첫 소설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의빈 성씨는 궁녀였습니다. 경희, 영희, 복연이라는 궁녀들과 소설을 필사하고 임금의 사랑에마저 순순히 응하지 않는, 정조의 완고한 가치관과 맞지 않을 법한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던 걸까요?'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밝혔다.


[1] "昭容成氏 名德任", 황윤석 《이재난고》[2] 조선 시대 왕의 후궁들 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손에 꼽는다. 대표적으로 장녹수, 장옥정 등이 있다. 추존 빈이지만 사도세자의 후궁인 숙빈(임유혜)과 경빈(박빙애)의 이름도 한중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3] "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정조 《어제의빈묘표》[4] 丙午九月十四日未時, 上御重熙堂。(병오년 9월14일 미시, 상어 중희당) <후략>, 승정원일기 정조 10년 9월 14일 갑신 13/13 기사[5]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곳에서 사망하였다.[6] "得年三十有四", 정조 《어제의빈묘표》[7] "系籍昌寧", 정조 《어제의빈묘표》[8]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就善堂)에서 태어났고,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처소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慶春殿)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讌華堂)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의빈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의빈이 왕실에서 어떤 위치였고,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讌華堂)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熙政堂)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따라서 의빈의 처소는 정조가 나랏일을 하는 전각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9] “탄생한 당호(堂號)는 창덕궁(昌德宮) 연화당(讌華堂)으로 쓰고, 연월일시는 임인년 9월 7일 인시(寅時)로 쓰도록 하라.”, 정조 《일성록》#[10] “임인년 9월 7일 인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세자가 태어났다. 이날 밤 갑자기 한 줄기 붉은 빛이 침실을 비추었는데 마치 해가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 세자의 탄생을 보인 것이다.”, 김종수 《몽오집》 제7권 <문효세자지문>[11] 즉, 처음 차였을 때 일단 물러나기는 했지만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었다는 소리. 거기다 단순한 승은 상궁이 아니라 후궁의 반열에 뒀다는 것은 나중에 후궁의 품계를 내릴 생각이 있었다는 소리다.[12] 의빈 사후, 정조는 "빈의 장례에 자신이 《어제의빈묘지명》을 씀으로써 '재색'을 잊지 않을 수 있겠지(才色之不忘乎哉)"라고 하였다.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정조 《어제의빈묘지명》[13] "昭容成氏 名德任"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황윤석 《이재난고》[14] 예전에, 양반집의 수청방(守廳房)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아보고 시중을 드는 하인.[15] "十歲選入掖庭", 정조 《어제의빈묘지명》[16]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황윤석 《이재난고》[17] "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황윤석 《이재난고》[18]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19] 효의왕후는 1761년(영조 37년)에 입궁하여 삼간택을 치루고 왕세손빈으로 정해졌으나 천연두를 앓아 다음 해인 1762년(영조 38년)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다.[20] 혜경궁 홍씨의《한중록》에 정조와 효의왕후의 금슬이 좋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1] 하지만 진짜 임신이 아닌 상상 임신이었다.[22] 실제로 왕정 국가인 조선에서 어명을 거역하면 예외없이 죽음이다. 더욱이 궁녀는 승은을 입은 유무와 상관없이 왕의 여인이다.[23] 조선 시대의 궁녀들은 윗전을 모시느라 바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식주나 청소는 무수리 등 하인에게 맡겼다고 한다.[24] 하인에게 벌을 내릴 정도면 궐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것이고, 혜경궁 홍씨나 청연공주 등이 의빈에게 정조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설득했을 수도 있다.[25] 정5품 하계로 궁관이다.(정5품 상계는 상궁尙宮이다.) 승은을 입었으므로 특별 상궁 정도 직첩을 받은 듯하다.[26] 다만 순헌황귀비 엄씨가 승은을 입을 때 의빈 성씨와 비슷한 연령대였고 시위 상궁 신분이었던걸 감안하면 성씨도 상궁 신분일 가능성도 있다.[27]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김종수 《문효세자지문》[28] "복례는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다한 공이 있어 주상께서 공을 갚으셔서 시녀 직위를 주시니, 제 영광이 지극하더라." -한중록[29] "아지는 내 유모로 (중략)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산실에 들어와 수고하니, 앞뒤로 거의 스무 차례가 넘는지라. 그 공이 적지 아니하니, 주상이 공을 표창하여 제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하여 후한 녹봉을 받게 하시고, 저를 후히 대하셔 천한 몸에 당치 못할 은혜와 영광을 많이 주시니라." -한중록[30] 실록에는 1782년 12월에 정3품 소용으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성록에서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1782년 9월 7일에 '소용방'이라는 언급과 덕임을 '상의' 혹은 '궁인'이 아닌 '소용'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있는걸로 보아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덕임은 이미 정3품 소용으로 정식 후궁 대접을 받았고 정식 책봉은 12월에 한 듯하다.[31] 철빈, 태빈, 유빈, 흥빈이 될 뻔 했다.[32] 의빈 사후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이 빈호를 받았다.[33] # 《일성록》 1783년(정조 7년) 2월 19일[34]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정조 실록 17권, 정조 8년 윤3월 20일 을해 1번째 기사》[35] 1764년,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36] 문효세자가 죽은 후[37] 소망은 의빈이 죽기 전 뱃속에 있던 아이를 말한다.[38] "新生翁主阿只氏, 以驚風奄忽普慟"《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39] 인터넷에 의빈이 딸, 아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충격받아 실성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의빈은 죽기 전날 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정조에게 앞으로는 효의왕후의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하며 그러면 자신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자. 의빈에 말이 나라와 내전(효의왕후)를 위하는 마음이 정성스럽다며 정조는 감동한다.[40] "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 "빈이 임신하여 해산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정조 《어제의빈묘지명》[41] 의빈 성씨는 혜경궁이 친히 기를 정도로 혜경궁과 가까운 사이였다. 훗날 정순왕후 김씨가 혜경궁 집안의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혜경궁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음을 고려할 때, 정순왕후 김씨와 의빈 성씨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42] 정조 실록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43] 정조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44] 정조가 얼마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45] 《일성록》 1786년(정조 10년)12월 27일[46] 숙종 실록 61권, 숙종 44년 4월 20일 무술 1번째 기사[47] 축협 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48] 제 67책 황해도신천군재녕소재장토화상우제출도서문적류(黃海道信川郡載寧郡所在庄土河相禹提出圖書文績類)[49] 궁호를 받은 후궁 모두 지역명을 쓴 적이 없다.[50] 대한예전 3권 단묘도설[51] 신주를 무덤 앞에 묻는 것.[52]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산소[53] 정조 실록 23권, 정조 11년 1월 10일 기묘 1번째 기사[54] 정조 실록 22권, 정조 10년 9월 16일 병술 1번째 기사[55] 의판[56] 의빈의 아버지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것으로 볼 때 의빈은 서울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윤석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다. 게다가 의빈은 10살에 이미 입궁했기 때문에 황윤석과는 모르는 사이였을 것이다.[57] 나랏돈을, 무려 7천냥을 써버렸으니 참 대책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때문에 의빈이 궁녀가 되어 정조를 만나게 되었으니 결론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큰 그림[58] 이재난고 내용을 토대로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5월 21일에 정조가 문효세자의 혼궁을 경희궁으로 정했으며. 윤7월 15일에는 문효세자의 혼궁을 경희궁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는 1786년 윤7월 20일에 경희궁에 머물렀다. 윤7월 21일부터 9월 7일까지 정조가 경희궁에서 머물렀거나 다녀갔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은 문효세자가 죽은 뒤에 잠시 창덕궁을 떠나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조가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아버렸으나 날마다 반드시 깨끗하게 씻었는데 이는 내가 친히 가서 보았다(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는 내용과 정조가 9월 7일 이후 의빈이 사망하는 9월 14일까지 경희궁에 거둥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봤을 때, 의빈은 병이 위중해지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추정 근거로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임종하기 전날 밤 내가 의빈에게 가서 물으니 문득 말을 하는데 있어서 슬픔과 한탄이 가득했고 눈물을 흘렸다.(屬纊之前夕予臨問則忽辭致悽惋淚)”는 내용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입고 자리에 나아가기를 마쳤다.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 할 수가 없었다(及詰朝起正衣就席而訖予入視已無奈矣).”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 역시 9월 13일과 14일에 정조가 창덕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듯 의빈은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9월에 병이 위중해지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어제의빈묘지명의 내용과 정조가 9월 14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고 말한 점을 봤을 때 창덕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9]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하였다. 다시 홍화문 안의 악차(幄次)로 돌아와서 영여가 도성 밖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흑립(黑笠)과 백포 철리(白布帖裏)를 다시 입고 묘소에 나가 최복(衰服)으로 바꾸어 입고서 일을 지켜보았다. 장사가 끝나자, 임금이 친히 신주(神主)를 쓰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지냈다. - 정조 실록 22권, 정조 10년 윤7월 19일 경인 1번째 기사[60] 1786년(정조 10년) 전면대자 : 박명원 서, 음기: 정조 어제, 서용보 서[61] 일성록 1787년(정조 11년) 1월 9일[62] 일성록 1787년(정조 11년) 5월 1일[63] 정조 실록 26권, 정조 12년 7월 8일 무진 1번째 기사[64] 일성록 1788년(정조 12년) 9월 7일[65] 일성록 1788년(정조 12년) 11월 5일[66] 정조 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25일 신해 1번째 기사[67] 정조 실록 28권,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1번째 기사[68] 일성록 1790년(정조 14년) 3월 15일[69] 정조 실록 29권, 정조 14년 3월 24일 갑진 1번째 기사[70] "七代祖萬種齊陵參奉", 《어제의빈묘지명》[71] "高祖景軍資監正", 《어제의빈묘지명》[72] "父曰胤祐贈贊成", 《어제의빈묘지명》[73] "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 《어제의빈묘지명》[74] 정조는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문효세자와 의빈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하지만 1782년 음력 9월 15일, 어영청 금위대장(종2품)에게 성식이 다른 사람과 내통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 파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일성록 정조6년 음력 9월 15일》[75] 일성록 정조6년 9월 15일[76] "有二娚窮窶",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가난했다"  《어제의빈묘지명》[77] "其兄弟方爲別軍職", 황윤석 《이재난고》[78]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성소용(후일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본래 홍봉한의 청지기인데 또한 즉 홍낙성 첩의 아버지이다", 황윤석 《이재난고》[79]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성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황윤석 《이재난고》[80] "閭巷卑微之地生" 《어제의빈묘표》[81] 鄭枋 初以炎文登明經科 近以京妾成姓者 與成嬪爲姑姪 因得工判 而其姪福煥 亦得玉堂 人人笑之, 황윤석 《이재난고》[82]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궁녀도 임신한지 여러달이 되었다.)" 황윤석, 《이재난고》[83]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내가 신축년(1781년) 7월에 듣기를 성씨가 임신했다.)" 황윤석, 《이재난고》[84]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가 졸하여 여러 신하들이 문안하기 위해 와 기다리고 있어서 드디어 소접(召接)한 것이었다.", 정조 실록 1784년 5월 12일[85] "임금이 재거(齋居) 하느라 시사(視事)하지 않았다.", 정조 실록 1783년 5월 13일 - 옹주가 죽은 다음 날인데 정조가 죽은 딸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머무느라 나랏일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다.[86] 이재난고에서는 옹주가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는 내용과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서는 옹주가 경풍(驚風: 갑자기 몹시 놀라서 정신을 잃고 넘어지며 몸이 싸늘해짐)으로 매우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다.[87] 늦은 출산에는 각각 이유가 있는데, 장희빈은 명성왕후 청풍 김씨(현종의 정비)에 의해 7년간 쫓겨나 있었기 때문이고,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 청풍 김씨(정조의 정비)가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5년간 승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어떤 여인도 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결국 장희빈이나 의빈 성씨가 낳은 아들이 각각 숙종과 정조의 첫 아들이었으며, 세자로 책봉됐다.[88] 그렇지만 장희빈이 이후 숙빈 최씨와 명빈 박씨 등 다른 후궁에게 총애를 빼앗긴 것과 달리, 의빈 성씨는 죽을 때도 임신 중이었고 죽은 후에도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89] 뿐만 아니라 장희빈이 시어머니 명성왕후나 시누이 명안공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은 시어머니 혜경궁이 딸처럼 기른 궁녀였고 시누이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소설을 함께 필사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90] 희빈 장씨와 영빈 김씨를 제외한 숙종의 후궁들과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 등 처럼 나름 조용하고 평탄하게 산 승은 후궁들도 있기는 하나 아무래도 후궁 생활을 하는 순간 앞의 예시들처럼 기본적으로 신변에 대한 위협이 따르게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피하고 싶을 만한 일이다.[91] 왕의 의중을 직접 알 수 있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사관의 시선이 아닌 왕이 직접 본인의 의중을, 그것도 후궁에 대한 감정을 직접 글로 남긴 것 자체가 정조 외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기 때문.[92] 작품에 따라 병사, 자살, 살해 등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병사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93] 정조가 15살 때 고백했을 정도니 실제로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94] 실제 역사상으로는 다섯째 임신 중에 졸하지만 극 전개상 일찍 죽은 옹주는 등장하지 않았다. 연출자인 이병훈 PD는 정조가 사랑하는 영조, 홍국영,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연이은 죽음에 시청자들이 피로를 느낄까 우려했다고 한다.[95] 2016년 초연, 2017년에는 수원 연극 축제 개막작으로 재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