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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영국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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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영국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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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colbgcolor=#012169><colcolor=#fff>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19길 24
상급기관 영국 외무부
영사관 설립 1884년
공사관 승격 1898년
공사관 폐쇄 1905년
파일:구한말 영국공사관.png
<colbgcolor=#c8102e>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 공사관 모습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70_big.jpg
영국공사관의 현재 모습[2]

1. 개요2. 역사3. 건물4. 여담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영국의 옛 공사관이다. 1957년에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현재는 주한영국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위치와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3] 이는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서양 국가들 중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장소 및 건물을 외교공관으로 사용한 유일한 사례이다.[4]

2. 역사

1883년(고종 20년) 11월에 조선영국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다음해 4월에 비준서를 교환하여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영국은 거문도를 무단으로 2년간 점령했었는데 이 거문도 문제 해결 및 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수교한 것이다.

영국은 곧바로 한성총영사관을 두었다. 이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성에 설치한 서양 외교공관이었다. 그러나 조약이 비준되기도 전에 부지 선정 작업을 신속히 시작했으며 이는 미국보다 앞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에 따라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즉시 최대한 빨리 상주 공관을 두려고 했던 것이다.[5]
파일:한옥 영국공사관.png
<colbgcolor=#c8102e> 한옥 영국공사관[6]
한성 내 여러 곳을 알아본 끝에 영국 측에서는 1883년(고종 20년) 4월에 정동에 있는 신헌[7] - 신정희 부자가 살던 한옥에 공관을 두려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이 한성에 없는 관계로(...) 매매는 이듬해에 했다. 신정희는 임오군란 당시 도성과 궁궐을 지키던 어영대장이었는데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유배갔고 그래서 신헌도 한성 밖으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8] 나중에 신헌 부자와 접촉을 하긴 했으나 그들은 공식적인 정부 허가 없이는 매매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영국 측에서는 확실하게 부지를 선점하기 위해 김옥균과 외아문 독판[9] 민영목에게서 부지 선점 약속을 받아내고, 민영목의 후임으로 외아문 독판이 된 김병시에게 문제 해결을 바란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김병시는 한성부의 중재로 계약을 처리해 줄 것을 약속했다.[10] 우여곡절 끝에 영국 측은 1884년(고종 21년) 5월에 신헌 부자의 가옥을 사들이고 그곳에 총영사관을 차렸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 한옥 생활은 매우 낯설고 불편했으므로 새로 양옥을 짓기로 했다. 1889년(고종 26년) 1월에 상하이 건설국[11] 책임건축가였던 F.J. 마셜이 예비 설계도를 만들어 영국 외무부로 보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 디자인을 설계했으며 건립 과정 전반은 당시 총영사였던 월터 힐리어[12]가 총괄주도했다. 그러나 자재 확보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이유로 착공이 늦어지다가 1890년(고종 27년) 5월에 드디어 한옥을 철거하고 서양식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 7월 19일에 힐리어 총영사의 부인이 정초석을 놓았으며, 그 사실은 현재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정초석에 새겨져있다. #
파일:구한말 영국공사관2.png
<colbgcolor=#c8102e> 완공 후 영국공사관
1호관은 1891년(고종 28년), 2호관은 1892년(고종 29년)에 완공했다. 1호관은 총영사를 위한 곳으로 1층은 사무실, 응접실, 접견실, 식당, 서재 등 주로 공적인 공간이었으며 2층은 목욕탕과 침실 4개 등 사적인 공간이었다. 여기에 주방과 하인들의 숙소 용도로 세운 부속건물이 별도로 있었다. 2호관은 1호관보다는 작은 규모였으며, 각 층의 용도는 1호관과 비슷했다.[13]#

완공된 영국총영사관 건물은 당시 서양식 고층 건물이 거의 없었던 한성의 풍광을 상당히 이채롭게 만들었다. 그 무렵 한성을 찾았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총영사관 건물에 대해 꽤 인상깊게 느꼈던 모양이다. 완공 당시 영국총영사관을 찾았던 영국군 대위 카벤디시는 자신의 저서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에 자신의 느낌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전략) 우리는 극동 지역의 영국식 관공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취향에 따라 설계된 새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총영사관 건물은 약간 도드라진 언덕 위에 서 있으며, 방들의 규모와 배치에 관한 한 내부는 흡족한 정도이다. 사무공간들은 이곳과는 테라스와 테니스 잔디구장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경사면에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위치했다. 열정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한 힐리어 총영사는 작은 온실에다 숱한 수목과 화초를 키우고 있으며, 상당한 취향과 정성으로 정원을 꾸며놓았다. (중략) 모여 있는 한옥으로 이루어진 원래 영사관 건물들은 새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이곳이 정원으로 바뀌었다. 영사관 구역 바로 곁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곳은 왕비의 재산이었으나 아무 것도 그가 이곳을 영국 정부에 내놓도록 하지는 못했다. (후략)#
카벤디시,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

또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자신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길폭이 차차 넓어지면서 우리는 서울의 성벽에 도착했다. 굴곡이 깊은 이중 지붕을 가진 성문(숭례문)이 있는 매우 높은 성벽을 통과하여 10여 분간 더 추저분한 길을 걸으니 산들바람 부는 언덕이 나타났다. 그 언덕 위에 눈에 확 띄는 영국영사관의 붉은 벽돌건물이 있었다. (후략)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譯,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영국 정부에서는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8년(광무 2년) 2월에 영국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
파일:Anglo-Japanese_Alliance_002.jpg
<colbgcolor=#c8102e> 일본 미쓰코시 오복점에서 제작한 영일동맹 기념엽서.[14]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국교가 끊겼다. 사실 영국은 이미 그 전에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시적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영국공사관은 다시 총영사관이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었다.
<colbgcolor=#c8102e>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전했던 영국 공사관 터 확인을 다룬 연합뉴스TV 영상
8.15 광복 이후인 1949년에 대한민국영국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영국 정부는 서울에 다시 공사관을 설치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사관은 부산으로 잠시 이전했고# 휴전 후 서울로 복귀했다.[15] 1957년에는 영국 정부에서 최고위급 한국 주재 외교관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고 이에 공사관도 대사관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내용은 주한영국대사관 문서 참조.

3. 건물

  • 1호관은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건축 양식을 혼합한 형태로 평가받는다.# 컨트리하우스 형태에 청나라 양식과 르네상스 빌라의 구성을 더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어떤 해석으로든 동, 서양의 건축이 섞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 붉은 벽돌과 회색 전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 정면 지붕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으며 페디먼트 가운데에 둥근 환풍구를 설치했다. 전면 칸 사이마다 아치를 설치했으며 아치 하단에 난간을 설치했다. 1층의 아치는 한 칸에 하나인 반면, 2층의 아치는 한 칸에 2개이며 두 아치가 중앙에서 만나는 부분의 하단에는 돌기둥을 두었다. 아치 안으로는 베란다가 있다.

4. 여담


파일:external/news20.busan.com/20091113000145_0.jpg}}} ||
<colbgcolor=#c8102e> 영국공사관 옆에 있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17]
바로 옆에 서울주교좌성당이 있다. 애당초 성당이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가 영국공사관 옆이기 때문이다.
  • 1933년 12월 15일 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총영사관에서 이왕직[18]에 ‘석조전 2층에서 자신들의 공사관이 내려다보인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렵 일제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여 일반인들이 자연스레 석조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석조전 뒤편과 영국총영사관은 바로 마주보는 위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외교공관이 노출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현재 주한영국대사관과 덕수궁 사이에는 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져있어 덕수궁에서 영국대사관을 바로보기 힘들다.

5. 같이보기


[1] 공사관은 영어로 Legation이라고 하며, 공사는 Minister라고 한다.[2] 사진 출처.[3] 물론, 그때 지은 건물말고도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4] 구 미국공사관 부지도 현재 주한미국대사관 측에서 사용 중이나 대사관이 아닌 대사관저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오롯이 조선 말기와 같은 용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저는 한옥이며 그나마도 현재는 새 한옥 하비브 하우스를 지어 입주했다. 근대에 지은 양관을 현재까지 사용하는 건 영국대사관 뿐이다.[5]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87.[6] 사진 출처.[7]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였으며 경복궁 경회루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다.[8]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106.[9] 외아문은 조선 말기에 외교와 통상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이고 독판은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10]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107.[11] 영국 건설부 소속 조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국 외교공관의 건설, 유지, 관리를 책임지던 기구였다.[12] Walter C. Hillier. 1889년(고종 26년) 5월부터 1896년(건양 원년) 10월까지 약 7년 간 재임했다.[13] 1호관의 침실 개수는 4개였으나 2호관의 침실 개수는 3개였다.[14] 왼쪽의 영국 소녀는 일본 황실의 꽃인 국화(菊花)를 들고 있고, 오른쪽의 일본 소녀는 잉글랜드의 국화인 장미를 들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정해진 국화(國花)가 없고, 영국도 연합왕국 차원에서 정해진 국화가 없다.[15] 단 당시 공사였던 비비언 홀트는 전쟁 초에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혀 3년이나 억류당했다가 1953년 4월에서야 다른 민간인 포로들과 함께 풀려났다.[16] 정동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다만, 능 자체는 1410년(태종 10년)에 태종이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켰다.[17] 사진 출처 - 《부산일보》.[18] 李王職. 일제 강점기조선총독부에서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의 의전 및 관련 사무 담당을 위해 설치한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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