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9:27:08

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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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신헌
申櫶
파일:작자_미상_신헌_초상.jpg
출생 1811년(순조 11)
사망 1884년(고종 21)
시호 장숙(壯肅)
본관 평산 신씨 (문희공파 30세)
이름 관호(觀浩) → 헌(櫶)
국빈(國賓)
위당(威堂)
가족 손자 신팔균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관이자 외교관이다.

2. 생애

본명은 신관호(申觀浩)였으나, 신헌으로 개명했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에는 실학파에 속하는 최한기, 박규수, 김정호 등과 교류하였다.

김정호를 도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했고, 병인양요 이후 신무기를 연구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수뢰포라는 일종의 기뢰를 제작한다.

1827년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으로 별군직에 차출되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훈련도감의 지휘관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서양식 신병기를 연구한 <훈국신조기기도설>을 저술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유수부의 염창(소금 창고)을 수비하였다.

1876년 판중추부사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미국과의 협상에도 대표로 임명되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아들 익희의 장남이 독립운동가 신팔균이며, 손주며느리는 역시 독립운동가 임수명 여사이다.

3. 여담

파일:신헌1.png 파일:845f45a729f796f1663ba743159c0e24 (1).jpg

흔히 위의 사진들이 말년의 신헌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동시대의 문관 이용숙(李容肅, 1818~?)을 찍은 것이다. 당장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 무관 당상관으로서 쌍호흉배를 패용했던 신헌과 달리, 사진 속의 인물은 문관 당상관에 해당하는 쌍학흉배를 패용하고 있다. 두 사진은 각각 1876년과 1880년, 이용숙이 수신사 사절단의 수행원으로서 두 차례 일본에 방문했을 때 현지의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

신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현전하지 않으며, 문서 상단에 첨부된 60세 때의 초상화 및 그 초본만이 전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