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조선 · 대한제국이 타국과 맺은 통상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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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 |
1. 개요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과 미합중국 사이에 체결된 수교 조약. 대한민국과 미국은 본 조약을 오늘날 한미관계의 시작으로 규정한다.이 조약은 한국 역사상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이 조약을 시점으로 영국(1883년), 독일 제국(1883년), 이탈리아 왕국(1884년), 러시아 제국(1884년), 프랑스 제3공화국(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92년)과 같은 여타 유럽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최초로 태극기가 사용된 조약이기도 하며, 본래 국기가 없던 조선에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외교적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미국 측의 제의에 의해 김홍집의 명으로 역관 이응준이 제작하였다. 이 때 사용된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등에서 도안하여 이듬해인 1883년 3월 6일 공식 국기로서 공포되기에 이른다.
2. 배경
1860년,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한 후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했었고, 이에 따라 조선이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어야 세력 균형으로 조선이 안정된다고 봤다.청나라는 1871년 일본 외무경(外務卿)이자 전권대사인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두 달여간의 논쟁끝에 삼궤구고두례를 폐지하고 일본과 대등하게 수교했고 일본과 조선의 수교를 반대치 않는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천황, 폐하 등의 문구를 문제 삼아 국서를 접수치 않았다. 결국 이홍장이 "우리는 괜찮으니 천황이니 폐하이니 하는 문구에 신경쓰지 말라"고 해서 조선도 더 이상의 명분을 내세울 수 없어 수교에 나섰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 후에도 외국과의 수교에 미온적이었다. 특히 강화도 조약 후 조선에는 척사파가 득세했는데, 이홍장은 개인적으로 영의정 이유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을 움직여 서양과 수교시키려 했다. 구체적으로 1879년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미국과 영국은 무역이익을 추구하지만 러시아는 영토를 빼앗는다"며 "조선이 영미와 조약을 맺어 러시아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했다.[1] 이홍장은 청나라 내부에서도 자기 사람 정여창을 움직여 이러한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1879년 8월에는 총리기무아문[2]도 조정에 같은 내용을 주청하여 이것이 청나라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확정된다.
문제는 기존의 속방 조공-책봉 관계에서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므로 조선을 직접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는데 마침 이유원도 영의정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877년 박규수까지 사망해 개화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척사파들이 강해지는 상황이었다. 1881년 조선에서는 청나라 예부[3]의 자문(咨文)[4]을 받기 위해 영선사(領選使) 김윤식과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했는데 이때 이홍장이 왜 개항(강화도 조약) 후에 자강(自強)하지도 않고, 서양과 수교를 미루는가 묻자 이들은 "이이제이와 같은 세력균형책은 청나라 같은 대국이나 가능하고, 류큐국의 예처럼 조선같은 약소국은 오히려 화만 불러오며 늘 그래왔듯이 청나라에게 의존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수교문제는 조선은 서구 열강과 원한이 있어서 화해가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자 프랑스, 미국 같은 서구국가는 통상만을 요구하기에 별 문제없고, 다만 러시아가 위험한데 영흥만(원산) 일대에서 러시아가 도발할 경우 청나라는 조선을 도울 능력이 없으니 하루빨리 자강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으라고 종용한다. 러시아가 청나라의 연해주를 할양받으면서 두만강을 경계로 처음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했던 조선은 뒤늦게 국제 정세를 인식하고 이홍장의 요청으로 톈진에 대표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이리(伊犁)사태로 1881년 이리 조약을 체결해 또 다시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충돌하여 영토를 할양하고, 2차 아편전쟁 당시 만주인의 발상지 동만주 지역을 뜯기는 등 반러감정이 매우 큰 상태였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홍집은 한 달 동안 도쿄에 머무르면서 일본이 권한 서양 외교관들의 방문은 거절하고 일본에 주재하던 청나라의 외교관을 찾아가 만났다. 이때 이홍장의 수하인 하여장(何如璋)과 황준헌을 만나 사흘밤을 세며 논쟁한 끝에 설복당한 김홍집이 대화한 바를 요약해 문서로 받은 게 바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다. 이 책은 러시아는 동양에 위협이 되니 러시아를 막기 위해선 조선이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속하고, 동양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홍장과 청나라의 구상과도 동일했다.
그레이트 게임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청나라, 일본은 조선에 강력하게 구미열강과 수교를 요구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상태로는 자강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홍장은 1880년 4월, 미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생각을 갖고 이를 위해 일본에 중재를 요청하려 파견한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2~1895) 제독이 일본(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의 생각을 알게 된 이홍장은 나가사키의 청나라 공사를 통해 슈펠트에게 청나라가 중재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1880년 7월 슈펠트를 톈진으로 초청했다. 1881년 6월, 슈펠트는 미국 국무장관에게서 협상 전권을 위임받고 톈진으로 가 이홍장과 접견해 조선이 일본의 중재를 거부해 교섭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선과 미국의 수교가 시급하다는 것에 서로 동의한다. 이후 프랑스 유학파이자 동양인 최초로 바칼로이야 자격을 획득하고 시앙스포(Sciences Po)에서 국제법을 전공, 프랑스 변호사 자격증을 딴 마건충(馬建忠)이 조선과 미국이 맺을 조약의 내용을 작성했다.
1882년 5월 22일, 슈펠트와 마건충은 각자 군함을 몰고 제물포[5]에 상륙했고, 조선은 전권대관 신헌, 전권부관 김홍집이 파견되어 군함 갑판 위에서 베이징에 있는 광서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올린 후 마건충이 번역한 한문본을 소개받고, 설명을 들은 후 서명한다. 이 과정에서 마건충은 청나라의 함선에서 조약을 조인하자고 했으나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 제독은 제3자인 청나라의 배 위에서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미국 함선에서 체결했다. 마건충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니 후견인으로 입회라도 해야한다 했으나 미국은 강력히 반대해 조선과 미국의 양자 체결 형식으로 체결했다.
조선과 이홍장은 조약 내용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삽입하려 했으나 미국 측이 조선은 독립국이라며 이를 계속 거절해 회담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수교조약에서는 해당 문구를 빼고, 대신 조선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별도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은 이홍장이 조선이 서구열강에게 수탈당하는 것은 청나라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관세 자주권을 첨부했고 이는 청나라나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에도 없는 꽤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조영, 조독 조약도 연이어 체결되었다. 참고로 일본이 관세와 치외법권 자주권을 되찾은 것은 청일전쟁 5년 후인 1899년 영일동맹을 앞뒀을 때였고, 20세기에야 각국으로 부터 비슷한 조건으로 되찾았다.
3.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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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국가와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 치고는 조문들이 불합리적인 편은 아니다. 우선 지난번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는 조선 측이 관세라는 것이 뭔지도 몰라서 일본 상인들이 무관세로 조선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됐었는데, 이홍장의 배려로 깨닫고 동양의 거의 유일한 국제법 전문가 마건충이 작성한 이 조약에서는 관세를 규정해 매길 수 있게 되었으며, 방곡령도 별 조건 없이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거중조정[7]이 규정되어 있다.
민족주의 사학에서는 수탈과 식민화 타령을 하며 강화도 조약에 이어 이번에도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고 원통해하나, 아직 조선에서 고문이 합법이며 공식적인 수사기법인 데다가, 연좌제, 신체형과 탐관오리들의 자의적 재판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조선식 재판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며, 당시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외국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치외법권이 폐지된 건 근대법을 받아들이고 실력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의 일이다.
최혜국 대우는 현재에도 수교국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라서 특별할 게 없는데 문제는 조선은 나룻배밖에 없어서 외국으로 갈 상선도 없었고 외국 상인들에게만 이권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이후에 청나라와 맺게 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청나라 상인의 내륙 통상이 허용되자, 이것을 빌미로 일본 상인들도 조일통상장정을 통해 역시 내륙 통상이 가능해져버렸다.
4. 여담
- 당시 조선의 공식 문어는 한문이었으므로 조약 또한 영어와 한문으로 체결되었다. 언어 관련 조항은 조선에 유리하게 체결되었는데 조선은 자국 문어인 한문으로 미국에 서한을 보낼수 있었지만 미국은 영어 서한을 조선에 보낼시 한문 번역문을 첨부해야 했다.
- 조선의 영어명칭은 흔히 생각하고 있는 Korea가 아닌 Chosen이었다. 조선 입장에선 전조인 고려라고 불리는 것에 거부감이 심했다.
- 우라나라가 자주적으로 체결한 것이 아니라 이홍장이 대리로 체결해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약 협상은 이홍장이 대신했고 마건충이 실무 문서를 작성했는데 마건충은 강소성 출신 천주교도로 일찍이 프랑스에 유학하여 국제법을 전공한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양무운동으로 유학파는 많았으나 마건충같은 전문가는 드물었다.[8]
- 조약 체결 과정에서 청나라측은 자신들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규정한 조항[9]을 넣으려 했으나 미국 슈펠트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청 측은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에 속방조회를 보내게 하여 조선의 종속성을 자인하게 조치했다.
- 이 조약 체결 1년 후 조선은 미국에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 즉 보빙사를 파견한다. 그렇게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는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에게 큰절을 해서 아서를 매우 당황시켰다고(...) 하지만 이것은 타국의 임금을 뵙는 한국식 예절을 행한 것이며 절을 한 후에는 미국식으로 악수도 했다.
- 조약 체결 후 1883년 일본과도 재협상하여 강화도 조약에서 무관세 혜택을 폐지하는데 일조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에 비하면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타국과의 형평성을 들자 개정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다만 일본 또한 재협상 과정에서 최혜국 대우를 삽입했다. 최혜국 원칙은 어느 한 국가 내에서 혜택, 면제 등의 대우를 상대 교류국가에게 부여하고자 할 때 그 국가에 진입한 다른 국가에게 부여한 혜택, 면제 등에 비하여 불리하지 않도록 대우하는 원칙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비차별원칙 중의 하나로 조약 후에 제 3국에게 시장을 개방할 경우 이전 최혜국 대우 수교국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의미이지 조미수호통상조약이 강화도조약에 비해 조선에 유리하므로 최혜국 대우로 일본이 이득을 본게 아니다. 오히려 조선에서는 방곡령까지 삽입하여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성을 개정했다.
- 조약 제1조에서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이라는 항목을 흔히들 거중조정 항목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립서비스 차원에서 거중조정 항목을 넣었지만, 국제관계에 무지했던 대한제국과 고종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 조약에 근거해서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해서 SOS를 쳤다. 하지만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미 체결됐으니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기대한 거중조정 조항의 효과는 이 조약이 체결된 지 71년이 지난 뒤 양녕대군의 후손이자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의회의 비준을 받고 나서야 발휘될 수 있게 되었다.[10]
- 조약 제14조가 그 유명한 최혜국 대우를 다룬 조항이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외국과의 조약에서 인정한 조항으로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청 상인의 내륙 통상을 허용한 이후 조일통상장정을 통해 일본인 상인이 역시 내륙 통상을 하게 되는 만악의 근원이 되는 조항이다. 이전까지 외국 상인 즉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 10리 이내로 설정된 거류지 내에서만 활동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 이 조약의 효력이 무효화된 시점을 놓고 각국마다 의견이 제각각인데,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시점에서 이미 이 조약이 무효화됐다고 보며, 미국과 한국은 경술국치 이후로 이 조약이 파기됐다고 본다.
- 이승만은 1943년 5월 15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이 조약을 어겼음을 상기시키며 대략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 소련이 2차 대전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빨리 승인해야 한다." 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
- 조약 체결의 현장인 인천광역시에는 이 조약의 체결을 한미수교의 징표로 삼아 기념하는 시설물이 몇 군데에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인천 자유공원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고 화도진공원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를 재연한 디오라마와 기념비가 있다. 매년 5월에 인천 동구에서 주최하는 지역 축제(화도진축제) 때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재연하는 퍼포먼스가 열린다. 조약 체결에 서명하는 전권대신 역할은 동구청장이 매년 한다.
[1] 정작 이홍장은 국내에서는 해방새방 논쟁에서 해방파를 지지하며 러시아가 아닌 영국을 주적으로 상정했다(...).[2] 외무부와 비슷하다[3] 조선처럼 조공-책봉 관계의 속국 외교는 예부에서 담당했고, 몽골과 티벳 등 간접통치는 이번원(理藩院), 서양등 외국 사절은 총리아문이 담당했다.[4] 상국인 청의 예부와 주고받는 외교문서, 명이나 청국의 예'부'는 제후국 조선의 예'조'보다 상급 부서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의정'부' 명의로 예부에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고, 황제와 조정에는 표문(表文)을 황태자에겐 전문(箋文)을 보냈는데 정기적으로 의례적인 미사여구 곁들여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실무 부서나 실무자에게 보내는 문서는 자문 형식으로 보냈다.[5] 현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현장으로 알려진 화도진지가 공원 형식으로 복원됐으며 누구나 무료관람할 수 있다. 이 공원 안에 조미수호통상 체결 기념비가 있다.[6] 대통령(President)의 음역. 당시 미국 대통령은 체스터 A. 아서였다.[7] 조선이 다른 나라와 분쟁 시 미국이 중재에 나서고, 반대로 미국이 그런 상황을 맞을 경우 조선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8] 청나라 조정에서 120여 명의 인재를 엄선하여 미국 유학생을 보내 40여 명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했는데 보수파의 반발로 중도 귀국해서 예일, MIT 재학생 출신을 해군 하사관 조타수니 기술병으로 보내버릴 정도로 인재양성에 실패했다.[9] 속방조관[10] 사실 미국은 이 조약을 체결하고 싶어하지 않아했으나,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라는 초유의 대사건을 일으키고 나서야 체결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