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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20001> 시 소재지 | 개선동[1] 일대 | ||||
면적 | 314.4㎢ | ||||
행정구역 | 45동 14리 | ||||
시간대 | UTC+9 | ||||
인구 | 363,127명 | ||||
인구밀도 | 1,145.04명/㎢ | ||||
시당위원장 | | 최강일 | |||
인민위원장 | | 리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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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강원도에 위치한 항구도시. 도소재지[2]이며, 북한 강원도의 최대도시이다.[3] 분단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함경도나 강원도 영동 지방으로 갈 때 원산을 거쳐갔으므로 대표적인 교통거점이었다[4].남북 분단 이전에는 함경남도 산하였지만, 1946년 소련군정에 의해 강원도에 편입된 후 현재까지 쭉 강원도 산하이다. 다만 한국 정부기관인 이북5도위원회에 따르면 원산은 여전히 함경남도 산하이듯 남한에서는 한동안 함경도의 도시로 인식되었다. 남한에서 남은 원산과의 교류의 흔적을 묘사할 때는 분단 이전의 역사를 다룰 수밖에 없어 함경도의 도시라고 해야 고증에 맞다. 고려 말기 이래로 북한이 생기기 전까지 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나 원산 근처를 제외한 북한령 강원도 일대와 아예 다른 행정구역에 속한 곳이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함경도에 속했다.
원산이 강원도로 넘어온 이유는 분단 이후 강원도의 주요 도시인 강릉시, 원주시, 춘천시 등이 모두 남한령이 되어 38선 이북에는 딱히 중심도시로 기능할 만한 곳이 남아있지 않았던 데다가[5] 기존 도소재지이던 철원군은 38선 기준으로도 너무 최전방이라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 그나마 가장 인접한 큰 도시인 원산을 끌어들인 것이다.[6] 한편 함경남도 영흥군 이남은 함경도 방언이 아닌 영동 방언권이기는 하나 다른 영동 방언권인 금야군과 고원군도 함경남도에 포함시킨 것으로 미루어 보면 행정의 편의적 성격이 강한 조치로 보인다.
2. 지리
2.1. 지형
해안선이 단순한 동해안의 다른 항구도시들과는 달리 원산이 위치한 원산만은 주변이 갈마반도, 호도반도, 그리고 여도(麗島), 신도(新島), 웅도(熊島), 황토도(黃土島) 등의 여러 섬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선시대에도 천혜의 항구로 평가받았다.한반도에서 동서 거리가 가장 짧은 구간은 평안남도 평원군과 강원도 문천시(한국 기준 함경남도 문천군)를 잇는 선이다. 대략 북위 39° 15′ 정도.
동해안에 있는데도 경기도 양평군, 여주시, 충청남도 금산군, 전라남도 광양시와 비슷한 경도에 있다,
2.2. 기후
평양시와 비슷한 위도에 있지만 산맥과 바다의 영향으로 기후는 북한에선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으로 원산만에서는 이류(移流)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그러나 안개일수 자체는 적어서 안개가 끼는 날은 1년 평균 9일에 불과하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항구도시치고는 바람이 약하다. 1월 평균 기온은 -1.7°C[7], 8월 평균 기온은 23.8도°C 겨울은 서울과 비슷하고 여름은 서울보다 시원하다.[8]2020년 9월 3일, 북한 강원도 원산시에서 3시간 만에 태풍 마이삭의 북상으로 인해 132mm의 폭우가 쏟아져 원산 시내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 #
여담으로 부산, 인천, 목포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공식 기상 관측이 시작된 곳이다.
3. 역사
옛 이름은 덕원(德源)이었다. 한사군 시대에는 임둔군(臨屯郡) 동이현(東暆縣)으로 추정된다.동예의 일부였고 고구려에 복속,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다.
이후 진흥왕 때 신라가 차지했고 이후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의 정천군(井泉郡), 선산현 지역이었고, 9주 5소경 중 삭주에 속했다. 지금의 원산시 세길동인 구 덕원면 지역에는 신라가 탄항관문(炭項關門)을 만들어 발해와의 국경선 관문으로 삼았다.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의하면 발해의 신라도는 동경용원부가 있던 책성(柵城)부터 신라 정천군까지이며 그 사이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엔 서쪽 의주군과 한자가 다른 의주(宜州)라고 불렀고 원나라가 점령했다가 공민왕이 되찾았다.
1437년(세종 19년)에 덕원군이 설치되었으며, 8년 후 덕원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후기 상업활동이 이전보다 발전하면서 장이 들어섰고, 덕원의 원산장은 조선의 상업중심지로 떠올랐다. 1880년에 개항했는데 러시아식 명칭은 포트 라자레프(Порт Лазарев)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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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원산부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개항장 지역만을 원산부로 남기고, 잔여 지역(면 지역)을 덕원군으로 분리시켰다. 동시에 안변군 영풍면이 덕원군으로 편입되었고 영풍면은 풍상면, 풍하면으로 분리되게 된다. 이후 1942년 덕원군 적전면, 현면을 원산부에 편입하고, 덕원군의 남은 지역인 덕원면, 북성면, 풍상면, 풍하면을 문천군에 편입시킴으로서 덕원군은 폐지되었다.
원산은 항구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개항하기 전까지는 덕원부 원산'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본격적인 항구 발전이 시작되어 곧 조선 3대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경원선이 부설되고 공업지대가 조성되었고, 해방이전까지 한반도 유일의 정유시설인 스탠다드 정유공장, 철도차량공장 등이 들어서는 등 흥남, 청진, 성진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관북지방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으로 성장했다. 송도원해수욕장과 명사십리해수욕장 등 천혜의 관광자원과 경원선을 통한 편리한 접근성으로 인해 동시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피서지로 각광받았다.
구한말에는 '방곡령 사건'의 무대이기도 했고 1929년에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학교인 '원산 학사'가 설립된 곳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반도가 분단되자 원산은 38선 이북 지역인 관계로 북한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가, 한국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1950년 10~12월 사이 잠시나마 UN군 점령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인해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이 원산을 재점령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원산은 현재까지 북한의 지배 하에 남아있다. 원산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한국전쟁이 개전하기 전까지는 정유시설을 비롯한 각종 중화학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한국전쟁의 개전부터 종전 직전까지[9] 지속적인 폭격과 함포사격을 맞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때문에 원산의 구시가지와 대부분의 시설은 사라졌으며, 원산의 철도시설도 완파되었다. 그래서 원산의 철도시설은 전후에 복구 및 이설된 곳이며, 원산역도 외곽으로 이전한 상태다. 자세한 내용은 원산 포위전을 참조.
인구는 36만명 수준으로 남한 강원도의 도시들보다는 인구가 많은 편이다.[10]
과거에는 다른 북한 도시들에 비해 낙후되었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지만, 원산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김정은이 집권하게 되면서 21세기 원산은 부흥의 기회를 다시금 얻게 되었다. 집권 이후 법동군에 마식령스키장이 건립되었으며 지금은 갈마해안관광지구가 조성 중이다. 북한의 보잘 것 없는 경제 수준을 감안할때 지금의 원산개발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이는 어마어마한 국책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아니지만, 원산의 원도심인 중동 일대를 재개발하여 상업, 관광,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규모의 계획도 구상 중에 있다.[11] 덤으로 원산시는 김정은 시기에 북한 공식 매체에서 야경을 공개한 몇 안 되는 지방도시이기도 하다.[12]
아직 원산의 인구는 남포시나 함흥시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김정은 시대의 원산 개발이 순조롭게 진척된다면 남포시와 함흥시를 넘고 북한 제2의 도시로 급부상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더 나아가 경제수도 원산이 될 것이라 예견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4. 인문 환경
1924년 당시 조사에 따르면 원산 토박이는 40%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외지 출신으로는 함경남도 외에 평안남도, 강원도, 경기도 출신자들이 많았다. 추가령 구조곡이라는 골짜기가 서울과 원산 사이에 있으며, 서울과의 직선거리가 강릉보다 약간 멀고 삼척보다 가까운 정도라 분단 전에는 서울과의 교통이 강릉 이상으로 편리한 곳이었다. 고유 사투리도 다른 동해안권과 달리 성조 억양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광복 당시 종교 상황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강원도 내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개신교 신자도 상대적으로 많았고, 천주교 신자도 많았다. 특히 천주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던 덕원수도원과 부설 덕원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최초의 근대 사립 교육기관 중 하나인 원산학사가 세워지기도 했고, 1903년에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루시(Lucy) 여학교가 세워져 공산화 전까지 여성교육에 큰 역할을 했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박정희의 애인 이현란 등이 루시여학교 출신이다. 교명은 학교에 건축 기금을 기부한 미국인 선교사 루시 암필드 커닝김(Lucy Armfield Cuninggim)의 이름에서 딴 것.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학교가 있었는데,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이나 교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원산학사 건물 일부가 남아 있으며, 원산학사 자리는 현재 원산교원대학이 되었다.
1949년 북한 정부의 대대적 천주교 탄압 전까지 베네딕토회 덕원수도원과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덕원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덕원수도원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다. 북한 정부의 1949년 대대적 천주교 탄압 과정에서 외국인 주교와 수사신부들과 평수사들은 전부 체포되었으며 한국인 수사신부들도 체포되었고 한국인 평수사들은 강제 귀가조치되었다. 이후 건물은 북한 정부에 몰수되어 현재는 원산농업대학으로 쓰이고 있다.
봉수교회의 전(前) 담임목사였던 리성봉 목사는 원산가정예배처소 책임자와 강원도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5. 교통
다른 강원도 도시들과 다르게 원산은 제일 먼저 철도가 뚫리는 등 다른 강원도 도시들보다 교통의 혜택을 먼저 얻었다. 왜냐하면 강릉 같은 도시는 해안선이 단조로워서 항구가 발달하기 힘들고 험준한 태백산맥 동쪽에 위치해서 서울로 이동하는 교통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원산은 항구가 발달하기에 알맞은 지형이었고 서울, 평양 방면 어느쪽으로도 산맥이 끊어져있는 추가령 구조곡을 통과하면 됐기 때문에 강원도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한반도 중심지를 통한 교통이 발달할 수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구를 이용해 원산항에 물류를 운반하면 평양과 서울에 공급이 가능해 현재의 북한, 미래의 통일 한반도에도 중요한 물류기지로 사용할 항구도시이자 교통의 핵심지역이다.대한민국의 명목상의 5번 국도, 7번 국도, 8번 국도가 존재한다. 북한에서는 이런 구분은 쓰지 않는다.
철도는 경원선, 강원선, 송도원선이 통한다. 그리고 강원선은 평라선과 연결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평양과의 사이에 평양원산간 고속도로가 뚫렸다. 평양-원산 구간은 북한에서도 나름 고속버스가 흥했던 구간이기도 하다. 평라선 철도는 화물 물동량 처리하기에도 벅찬데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평양 - 원산 사이를 2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다. 평양-원산 고속도로와 시 외곽 적천동 일대에서 연결되는 함흥으로 가는 고속도로도 건설이 시도되었다. 한편 광복 당시의 원산역은 건물만 남긴 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갈마반도에 원산갈마국제비행장이 있으며 이를 3,500m의 활주로를 갖춘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이 공항을 안변군으로 이전하려는 모양이다. 링크 링크
서울 기준 철도로 약 230km[13], 속초 기준 도로로 약 190km[14].
서울에서 직선상으로는 약 180km 거리로, 전라북도 군산시[15] , 익산시[16] 및 경북도청신도시[17]와 비슷한 거리에 있다.
6.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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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시내 (2002년 이전)[18] |
원산 시내의 야경 (2012년)[19][20] |
원산 시내 (2018년) |
▲ 원산 동명호텔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8.15 광복 시대를 비롯한 옛날 한국인들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선이나 금강산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놀러가는 것을 쉽게 생각했을 정도로[21] 원산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자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원산의 송도원(松濤園) 해수욕장도 남북분단 이전에는 한국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이름날 정도였다. 또한, 갈마역 근처의 명사십리 해수욕장도 매우 유명하다.#
또한, 1900년대의 근대화 시기 서양선교사들도 원산이 맘에 들어서 동북아시아 최대규모인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웠고, 개신교 신자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산은 해안가임에도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도 서울과 비슷한 수준의 기후를 유지한다.
구글 어스같은 지도로 원산을 자세히 보면, 원산의 송도원해수욕장이 중심지인 원산항 일대와 매우 근접하여 있으며, 당시에는 송도라는 이름을 가진 해수욕장들이 흥했고, 각 지역의 송도해수욕장이 지금도 모두 항구도시 중심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이는 원산뿐만이 아니라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포항시에도 송도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셋 모두 도심과 너무 가까워서 심각한 난개발로 인한 수질악화, 매년 쓸려나가는 모래로 인해 현재는 부산을 제외하고 모두 폐장 상태이며, 포항 송도는 모래사장이 아예 사라졌고 인천은 매립 끝에 유원지로 재개발 중인 상황이다. 부산 또한 한동안 폐쇄 상태였다가 최근 들어 재개장 한 것이므로, 분단이 안 되었을 경우 원산의 송도원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부산광역시의 주 해수욕장이 송도→광안리(또는 수영)→해운대로 바뀐 만큼 여기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기능이 옮겨갔을 것이며, 원산의 갈마는 부산의 해운대에 비견되는 관광도시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1990년대 북한이 경제난을 겪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원산은 다른 도시와 달리 6.25 전쟁 이후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이기 때문에 일본산 중고 가전제품, 자전거, 자동차 등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시기 원산의 영화는 고작 중국산 식료품과 잡화류, 잘 해봐야 중국산 자전거나 자동차를 수입하는 정도인 신의주시나 다른 국경 연선 도시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006년에 일본이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보복으로 만경봉호의 니가타항 입항을 불허하면서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개인 사업차 원산을 자주 방문했던 한 탈북자는 당시 원산을 '유령도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김정은 집권 이래 원산은 '김정은 (계획)도시'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김정은이 원산을 제2의 평양으로 개발하라고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송도원에는 2013년 기준 김정은의 7성급 별장이 있으며, 송도원 청년야외극장과 1960년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가 있어 체제선전에 사용되고 있다.# 물론, 특권계급을 위한 곳이다. 데니스 로드먼이 놀러간 그 휘황찬란한 별장이 여기로 추정되었다.# 외국인 호스텔 구역을 지었다. 이처럼 김정은이 원산을 적극 밀어주는 이유는 대체로 김정은 혹은 생모인 고용희가 원산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어서 일종의 우상화 작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정은의 특각 별장도 원산에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규모 관광단지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인데 공사장에서 화재가 크게 나서 4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 #
김정은이 이 곳을 밀어주는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를 취재하러온 외신과 한국 공동취재단을 홍보를 위해 2018년 5월 23일 이 곳에 초청했다. # 원산에 기자센터를 마련할 정도였다. 그리고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을 5월 24일에 폭파하고 취재진이 25일 다시 원산으로 향하자, 김정은은 24~25일 원산에 머물렀다. 아마 25일에 외신 앞에 서서 직접 원산을 홍보하는 효과를 누리려고 했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24일 오후 북미정상회담이 취소되었고, 취재진은 원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접했고 25일 원산 호텔에 갇혀지냈다. 그리고 김정은은 27일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자 급하게 평양으로 날아간 것으로 보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
인근 문천군 덕원면(구 덕원군 덕원면)에는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수도원 소속 가톨릭 신학교(덕원 신학교)가 있었다. 베네딕토회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2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1909년 독일에서 진출해 왔다. 처음에는 서울 백동[23]에 정착했다가,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북녘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종교들을 탄압했고, 분단과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많은 베네딕토회 독일인&한국인 남녀 수도자(수사, 수녀)들이 순교했다.[24]
원래 덕원과 원산 일대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관리하는 원산교구에서 분리된 덕원자치수도원구였다. 베네딕토회는 북한 공산당 정권의 종교 박해를 피해 월남하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수도원을 재건했다. 원산에 남아있는 당시의 수도원 건물은 원산농업대학으로 쓰이고 있다. 성당은 헐렸지만, 신학교 건물들은 개조된 채 남아있다.
조선 최초의 스키장(신풍리 스키장)이 생긴 곳도 여기였다. 1903년 개항 후 핀란드인 2명이 신풍리에서 스키를 탄 것을 시초로 1926년에 조선총독부의 철도국 국우회에 의해 원산 신풍리 스키장이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대회 역시 1930년 2월 16일 원산 신풍리 스키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 조선스키선수권대회였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법동군 마식령에 대규모 스키장인 마식령스키장을 세우고 평양시 김일성 광장에서 10만 군중 대회#까지 벌이면서 김정은의 치적으로 삼을 모양이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스키장 자재 수출을 금지했다. #
골프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곳도 원산이다. 1900년, 고종 37년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그들은 원산 바닷가의 세관 구내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현재도 송도원에 골프장이 있다.
- 명승지 일람
7. 군사
북한이 한때 미사일발사 시험을 하곤 했던 깃대령 미사일 기지가 원산 인근 안변군에 위치한다. 깃대령은 대포동 미사일 쏘던 시절 이야기이고. 2016-2017년 북한 미사일 도발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원산이 애용되고 있다. 원산 인근의 호도반도도 애용되는 장소. 그 외에도 원산갈마국제비행장은 화성-10(무수단 미사일) 발사 시험지였다. 이 외에도 북한 공군의 사열식이나 공군 비행훈련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향산1초대소에 김정은이 머무르면서 미사일 발사를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8. 미래 전망
남북통일을 가정한 전망과 남북이 통일하지 않고 북한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의 전망으로 나뉜다.8.1. 북한 개방 후 전망
8.1.1. 발전
남북 간 교류가 증가하고 경원축 교통망 복원, 확충으로 원산을 관광하는 수요도 발생할 수 있고 북한이 비핵화와 함께 정상국가화되고 서방 세계와 관계가 개선된다면 동해를 통해 일본, 미국 등지로 통할 수 있는 원산 일대의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8.2. 남북통일 후 전망
8.2.1. 행정구역
지금 행정구역인 강원특별자치도에 남거나 북한이 바꾸기 전 행정구역인 함경남도로 편입될 것이다. 강원특별자치도에 남을 경우 남한 강원도가 강원특별자치도(강남특별자치도)로 유지되고 북한 강원도가 강원북도(강북특별자치도)로 각각 따로 분리될 수 있다. 원산은 종전대로 강원북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강원특별자치도가 분할되지 않고 원산도 강원특별자치도 관할로 유지된다면 행정 편의를 위해 제 2도청이나 도청출장소가 설치될 수도 있다.통일 후에도 도농통합 기류가 계속된다면 원산시 + 문천군 내지 원산시 + 문천군의 구)덕원군지역이 도농통합 되어 도농복합 원산시가 출범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현재의 인구규모로도 50만을 넘게되어 원산시에 갈마구, 덕원구, 문천구 등 일반구가 설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식 도농복합구를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현재의 원산시는 갈마구, 문천시 및 북성면은 문천구 동 지역, 천내읍 등은 문천구 산하 읍면, 덕원면 지역은 덕원구 동 지역, 풍상면, 풍하면은 덕원구 산하 읍면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
8.2.2. 발전
남북통일을 전제로 원산은 인천에게서 수도권의 외항 역할을 분담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왜냐하면 서해안인 인천항보다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수심이 깊다는 점과 부산항보다 수도권과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는 점에서 우위을 지니고 있으므로 큰 항구도시이자 해군 기지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25]하지만 인천항은 인천신항의 건설로 이미 조수간만의 차와 낮은 수심이라는 단점을 극복했다. 또한 수도권은 업무지구의 형성과 발전으로 공항의 중요성도 높아졌다. 이는 첨단산업, 서비스업의 발전과 과거 노동집약형 산업의 쇠퇴와 수도권 개발 가용지의 고갈이 주된 이유이다. 또한, 수도권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은 경원축선에 위치한 서울 동북부-의정부시, 양주시, 동두천시 부근의 경기 북부 지역이 아니라 수도권의 서남부 지역이며, 이쪽은 인천항과 평택항이 매우 가깝다. 게다가, 경기 동북부 지역과 원산은 DMZ로 갈라져 있는 상태인데다 그마저도 평야가 아닌 좁은 구조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대규모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이 지역이 남북통일 이후 인구 폭등으로 골머리를 앓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도 생활 환경이 잘 마련된 지역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고, 자연스레 남한으로 유입되는 인구들 중에서 상당수가 서울 및 경기도의 수도권 지역을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남북통일 이후 급변할 대한민국의 상황을 다소 간과한 분석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교육 수준이 매우 낮아서 수도권의 첨단 산업, 고부가가치 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단순 경공업 역시 신체 조건도 외국인 노동자에 현격히 떨어진다.
더구나 남북통일 이후 북한 리스크가 사라진 서울과 인천이 외자 유치로 초거대 업무지구를 이룬다면, 지가 폭등으로 북한 주민들의 이주 자체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저부가가치 산업의 지방 이전으로 지방으로의 인구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며, 기껏해야 일부 인원이 수도권의 빈민가 정도에 정착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마저도 지속적인 재개발로 큰 기대는 접어야 한다. 무엇보다 수도권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의 이주를 달가워 할 리가 없으며, 오히려 남북통일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구 북한 주민들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일정 기간 통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원산항의 수심이 6.1~8m 정도로 얕은 편이다. 전근대에는 어떤 선박이 다니든 문제 없었지만 컨테이너선과 같은 초대형 선박들이 다니기에 얕은 편이다. 만약 원산항을 화물 항구로 개발하려면 준설을 하여 수심의 증심(增深)이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원산시가 아닌 다른 지역을 항구로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부산항이 갖는 미주, 일본, 유럽으로의 관문 역할을 가져오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러나 현재 부산항은 세계 해운사로부터 이용료 인하를 거세게 요구당하는 중이고, 대한민국 해운사들이 세계 해운동맹에서 줄줄이 낙상하는 바람에 국제적인 항구로서의 입지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물론 이 때문에 오히려 미주, 일본으로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원산이 성장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결론 역시 도출된다. 다만 2020년 기준으로 조선업과 해운산업은 현대상선이 The Alliance라는 해운동맹에 들어간 상태라서 대한민국 해운 사업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위 주석에서 설명했던 것은 해운사들의 해운동맹 낙상과 한진해운의 파산이 겹치면서 악재가 찾아왔던 상황을 얘기한 것. 부산항은 이용료 인하를 요구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019~20년 기준으로 세계 5대 항구에 들었다.
남북통일 이후 동해선의 건설과 개량으로 북한 지역의 부산항 접근성이 개선될 것이며, 원산은 산간지대로 개발 가용지가 적은 강원도, 함경도임을 감안할 때 일정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부산항은 북한과의 거리가 멀다. 물론, 남북통일 이후 인프라 문제 문서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시설확충과 도로확장을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산시와 라선시와의 거리가 무려 1,000km가 넘고, 그 사이를 낭림산맥이라는 험산준령이 틀어막고 있어서 도로 및 철도 개통이 빠르게 건설되지 못해 속도가 더딜 확률이 크다. 물론, 부산항이 대한민국의 해상의 관문임은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북한의 수요까지 담당하기에는 거리나 인프라 확충 등에서 어려움이 많다. 더구나 지금도 포화상태인 부산항에 북한 수요까지 더해진다면 항만 확장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한 자금과 부지 마련 문제도 크다.
무엇보다도, 지역 균등 발전과 북한의 경제적 자립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이북 소재 항만을 떨어지는 경제력 하나만으로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북한의 항구들을 놔두고 무조건 멀리 떨어진 부산항을 이용하라고 주장하면 북한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할 것은 뻔하다. 대한민국의 기술력과 자본력이면 작정하고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버리고 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서 개발하기에는 청진, 라선의 입지가 더 좋아 원산은 우선순위에 밀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한의 주요 인구 밀집지역인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동해안 항구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26], 일본이나 러시아 방면의 수출입은 계속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해상 교통뿐만 아니라 육상 교통 역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데, 남한 지역에서 육로를 이용해 나진이나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갈 때는 원산을 거쳐서 지나는 것이 가장 빠르다. 거기다가 현 평양원산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경원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가 지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원산은 통일 이후 공업도시로써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원산시가 북한의 대표적인 국내 주요 공업도시로써 자리잡았기에, 통일 이후 정부가 국토 균형 발전 등을 명목으로 주요 산업기반을 이주시킬 수도 있다. 다만 인프라가 확충된다 해도, 대규모 해외자본 투자는 현실성이 적다고 봐야 한다. 통일 이후에 구 북한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최저시급이 적용된다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인건비와 노동 숙련도 모두 분명한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외 기업이 수도권과 인천을 두고 굳이 열악한 북한에 자본을 투자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인프라가 부족한 북한의 현재 상황에서 짧은 기간 내에 폭발적인 성장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바라본다면 일단 남북통일 이후 북한 지역에 대한 개발은 당연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고 특히 실질적으로 지리적 조건이 가장 좋은 이북 지역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당장에 라선시와 신의주시는 각각 러시아와 중국과 가깝고, 특히 신의주시는 육로로도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과연 지리적인 요충지를 놔두고 모든 인프라를 남한에만 놔두려고 할까?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이 북한 지역, 특히 원산시와 같은 지역에다 항구나 공장을 건설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해답이 나온다. 사실, 중국 침략의 일원으로 지은 것이긴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일제 역시도 원산의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했다고 볼 수는 있다.
이처럼 원산시는 중공업 중심의 항만도시로 발전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관광도시로써의 전망은 꽤나 긍정적이다. 상기한 송도원, 명사십리 해수욕장 등 원산시 부근의 해변들은 남북분단 이전의 경원선과 평원선 덕분에 서울-평양이라는 당대 조선의 주요 대도시들에서 접근성이 좋았던 동해안을 대표하는 여름 휴양지로 명성이 높은 피서지였다. 실제로, 6.25 전쟁 이전만 해도, 강릉보다는 원산의 서울 접근성이 훨씬 뛰어났다. 서울과 강원 영동 지방을 잇는 태백선, 영동선은 1960년대 들어와서야 개통되었고 그마저도 매우 돌아가는 노선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서울에서 강릉은 2017년 12월 22일 강릉선 KTX가 완전 개통된 뒤에야 비로소 철도 접근성이 좋아졌다. 그리고, 도로 접근성은 2001년 11월 28일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이 확장 및 선형개량되어 개통된 뒤부터 좋아졌다.
그래서, 남북통일 이후부터 도로를 닦아놓은 뒤에 서울-원산의 접근성이 개선된다면, 여름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산광역시와 강릉시/속초시의 국내 관광 수요를 원산의 송도원 해수욕장과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어느 정도 분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산시의 남쪽에는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통천군의 총석정과, 고성군의 삼일포, 갈마반도를 비롯한 금강산 관광 벨트와 북쪽으로는 광복 전에 민벌, 야태해변이 유명했던 문천시, 여름에도 서울보다 상대적으로 서늘한 기후에다 약 20km에 다다르는 석호들을 끼고 송림이 아름답게 펼쳐진 호도해변이 있는 금야군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해변 관광 벨트'의 중심지로서 원산시는 '한반도의 마이애미, 캘리포니아, 골드코스트, 칸쿤'처럼 여름철의 대표적인 해변 휴양지와 산악 관광지로 크게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해수욕장 외에도 재개발이 불가피하겠지만 마식령스키장을 중심으로 금강산까지 이어지는 산악 관광자원을 만들 수도 있고 백두대간을 걸어가면서 등산을 할 수 있는 코스까지 만들어놓았다면 국내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원산시에서 전략적으로 도시개발까지 잘 이루어졌다면 통일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관광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9.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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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군 | 삼수군 | 갑산군 | 혜산군 | ||
명목상 도청소재지 : 함흥시 | }}}}}}}}} |
-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 명사동은 옛 덕원군 현면(縣面)에 해당된다.
- 1939년에 덕원군 적전면(赤田面) 송하리·송흥리·와우리가 원산부에 편입됐으나, 1942년에 덕원군이 폐지돼 문천군에 병합되면서 송흥리와 와우리가 적전면에 환원됐다. 그러다 광복 직후 적전면 전체가 원산시에 편입돼 사라졌다. 행정동 적전동 중에서 장덕동을 제외한 나머지, 행정동 송도동 중에서 송흥동이 옛 적전면에 해당한다.
행정동 | 법정동·리 |
광산동 | 광석동(廣石洞)·산제동(山祭洞)[27] |
남장동 | 남산동(南山洞)·장촌동(場村洞) |
명사동 | 갈마동(葛麻洞)·견산동(見山洞)·내원산동(內元山洞)·두남동(斗南洞)·두방동(斗方洞)·두산동(斗山洞)·방하산동(訪霞山洞)·성라동(星羅洞)·성북동(城北洞)·세동(細洞)·용평동(龍坪洞)·장흥동(長興洞)·지경동(地境洞)·춘산동(春山洞)·춘악동(春岳洞)·포평동(浦坪洞)·현동(峴洞)·능도리(能島里)·여도리(麗島里)·신도리(薪島里) |
명석동 | 명석동(銘石洞)·상동(上洞)·석우동(石隅洞) |
상중동 | 남촌동(南村洞)·북촌동(北村洞)·상리1동(上里一洞)·상리2동(上里二洞)·중리동(中里洞) |
송도동 | 송흥동(松興洞)·양지동(陽地洞)·철산동(鐵山洞)·평화동(平和洞)·해안동(海岸洞) |
용산동 | 신흥동(新興洞)·용동(龍洞)·중청동(中淸洞) |
적전동 | 관풍동(館豊洞)·낙수동(洛水洞)·당상동(堂上洞)·당중동(堂中洞)·당하동(堂下洞)·무라동(武羅洞)·삼태동(三台洞)·송상동(松上洞)·송중동(松中洞)·송하동(松下洞)·신동(新洞)·신풍동(新豊洞)·와우동(臥牛洞)·용계동(龍溪洞)·용주동(湧珠洞)·장덕동(長德洞)·중평동(仲坪洞) |
아래는 광복 당시 지명으로, 88개 동과 리로 구성되었다. 동 일부는 정(町)이었다.
- 춘일동(春日洞) - 시청 소재지
- 해안로1가~6가(海岸路一街~六街)
- 욱동1~3가(旭洞一~三街)
- 수동1~2가(壽洞一~二街)
- 행동(幸洞)
- 중동1~3가(仲洞一~三街)
- 본동1~5가(本洞一~五街)
- 천동1~4가(泉洞一~四街)
- 영동(榮洞)
- 경동(京洞)
- 명치동(明治洞)
- 녹동(綠洞)
- 대화동(大和洞)
- 명석동(銘石洞)
- 상동(上洞)
- 광석동(廣石洞)
- 산제동(山祭洞)
- 남촌동(南村洞)
- 신흥동(新興洞)
- 북촌동(北村洞)
- 상리1~2동(上里一~二洞)
- 남산동(南山洞)
- 용동(龍洞)
- 교하동(橋下洞)
- 중리1~4동(中里一~四洞)
- 하촌동(下村洞)
- 장촌동(場村洞)
- 신촌동(新村洞)
- 포하동(浦下洞)
- 와우동(臥牛洞)
- 송흥동(松興洞)
- 송하동(松下洞)
- 신풍동(新豊洞)
- 두방동(斗方洞)
- 두산동(斗山洞)
- 중청동(中淸洞)
- 당상동(堂上洞)
- 당중동(堂中洞)
- 당하동(堂下洞)
- 무라동(武羅洞)
- 삼태동(三台洞)
- 낙수동(洛水洞)
- 중평동(仲坪洞)
- 신동(新洞)
- 송상동(松上洞)
- 송중동(松中洞)
- 용계동(龍溪洞)
- 용주동(湧珠洞)
- 관풍동(館豊洞)
- 내원산동(內元山洞)
- 세동(細洞)
- 장흥동(長興洞)
- 견산동(見山洞)
- 지경동(地境洞)
- 포평동(浦坪洞)
- 사둔동(沙屯洞)
- 춘악동(春岳洞)
- 춘산동(春山洞)
- 현동(峴洞)
- 방하산동(訪霞山洞)
- 용평동(龍坪洞)
- 성라동(星羅洞)
- 성북동(城北洞)
- 두남동(斗南洞)
- 여도리(麗島里)
- 웅도리(熊島里)
- 신도리(薪島里)
이 곳 역시 일제강점기 때도 주요 도시였기에 일본식 지명이 있다. 일본 지명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카스가, 메이지, 야마토 등 다양한 일본식 지명이 보일 것이다.
10. 기타
소설가 복거일이 유독 애호하는 북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가 1987년까지 지속된다는 설정의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의 처가가 원산에 있었고, 송도원이나 근처의 금강산, 설봉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역사 속의 나그네>에서는 주인공이 2050년대 원산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는 평양에 있던 것으로 설정) "원산 괭이갈매기"라는 실업야구단의 팬이 되었다는 설정이 있다. 주인공이 조선으로 타임슬립후 위엄을 보일 때마다 쓰는 게 괭이갈매기의 빨간 모자.대한민국 해군의 기뢰부설함인 원산함(MLS-560)은 이 도시에서 이름을 땄다. 함경남도 원산시민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11. 출신 인물
11.1. 실존 인물
- 구상: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성장기는 원산에서 보냈다.
- 이중섭: 출생지는 평원이지만 성장기는 원산에서 보냈다.
- 김원균: 광산노동자 출신의 음악가. 북한의 애국가를 작곡한 인물이다.
- 김사복: 실향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광주 취재 여정을 함께 한 택시 기사로,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
- 김정구: 대한민국의 가수.
- 김정은: 현 북한의 최고지도자
- 니시다 켄: 일본의 배우
- 이기동: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 이남순: 탱고 풍 노래인 아마다미아 유명함
- 이선미: 김건모의 어머니
- 이현란: 박정희의 내연녀.
- 이호철: 소설가.
- 이흥렬: 대한민국의 작곡가.
- 최용신: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티브가 된 인물.
- 최양숙: 최초의 서울대 성악과 출신 대중가요 가수, 대한민국 최초의 샹송 가수. 박춘석 작곡의 황혼의 엘레지, 호반에서 만난 사랑으로 유명함.
- 함태호: 대한민국 기업 오뚜기의 창업자.
11.2. 가상 인물
[1] 데일리NK 등의 북한 관련 언론에서는 이 지역이 중심지라고 간주하기도 했다. # 근처에 '개선광장'이나 학생소년회관 같은 시설이 있다.[2]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는 도청/시청이 아니다. 도당 소재지, 도 인민위원회 소재지 같은 말도 안 쓴다. 도의 백화점, 공설 운동장 위치로 중심지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도소재지, 강원도의 소재지라는 말만 쓴다. 한국의 연구에서도 '도청 소재지'라는 표현까지만 쓴다. 나무위키에서는 이 오류를 열성적으로 편집하고, 위키백과에도 옮겨 적는 바람에 이런 인민위원회를 도청이나 시청에 비유하는 오류가 많아졌다. 북한/행정구역, 인민위원회 문서 참조.[3] 이는 남한의 강원도까지 합쳐도 마찬가지이며, 이 경우 2위는 남한의 원주시이다. 다만 원주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유치의 영향으로 최근 상당한 속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터라 근미래에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4] 당시에는 영동선이 묵호-철암구간만 개통되어 있어서 이 경로로 서울에서 영동지방을 갈 수 없었다. 영동선이 영주까지 연장된 것은 1955년의 일이다.[5] 현재의 대한민국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속초시가 있지만, 속초는 당시 소읍이었다.[6] 철원군은 1945년 소련군정에 의해 철원시로 승격된 바가 있지만 너무 최전방에 있다는 리스크 때문에 1946년 도 소재지가 원산시로 옮겨지자 다시 군으로 환원됐다. 그리고 1950년대 한국전쟁 과정에서 철원읍 등 군의 주요 지역을 대한민국이 수복하면서 잔여 지역과 이천군 일부, 련천군 잔여 지역을 합하여 새로 철원군을 구성하였다. 북한에 존재하는 철원읍은 옛 이천군 안협면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남한의 철원읍과는 상관이 없다.[7] -3°C 기준으로는 북한 내에서 얼마 없는 온대기후 지역이다. 물론 0°C 기준이면 냉대기후. 북한에선 따뜻하지만 동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확실히 춥다.[8] 서울은 1월 -2.0˚C, 8월 26.1˚C이다. 즉, 여름엔 훨씬 시원하고 겨울엔 조금 따뜻한 편.[9] 진짜 말그대로 '종전 직전까지'로 마지막으로 포격을 맞은 시각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9시 58분 휴전 발효 2분 전이었다.[10] 다만 남한 강원도의 경우 인구가 한 도시에 몰빵되지 않고 세 도시에 분산된 영향도 있다. 또 원주시의 경우 2021년 인구가 35만 4천명으로 크게 차이가 안난다. 여담으로 통일 이후 강원도와 함경남도와의 분쟁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만일 남한의 주도 아래 통일이 될 경우 한국 정부가 공식 규정한 이북 5도 체계 하에서 원산시는 엄연히 함경남도 산하 도시이므로 통일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지 않는 한 원래대로 함경남도 산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저건 환원론의 예시이고, 존치론이 선택되는 순간 원산은 강원도의 도시가 된다. 둘 중 무엇이 선택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환원론과 존치론에 대해서는 이북 5도 문서와 남북통일/행정 문제/행정구역 개편을 참고.[11] 투자금액은 1억 9,656달러로 외국투자를 통한 BOT방식으로 추진 중인데, 물론 이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비핵화를 통한 대북제재 완화 또는 철폐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12] 나머지는 김정은 시기에 조성된 신도시이자 김정은의 친부 김정일의 거짓된 고향인 삼지연시, 김정은의 조모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시(다만 북한 야경 선전에서의 비중은 0에 수렴한다), 북한의 지도자들이 은근히 애착을 가졌던 강계시밖에 없다.[13] 용산역 기준. 청량리역 기준으로 할 경우 210km이 약간 넘는다.[14] 직선상 145km. 금강산이 틀어막고 있어 해안을 따라 우회하기 때문이다.[15] 용산역-군산역 장항선 철도로 약 225km.[16] 용산역-익산역 호남본선 이용시 약 245km, 호남고속선 이용시 약 210km.[17] 동서울터미널 - 경북도청신도시 중부내륙고속도로 이용시 약 215km.[18] 원산 포위전으로 인해 종전 건축물은 파괴되어, 현재 존재하는 건축물은 1953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가 울창한 것으로 보아 2002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 2002년만 해도 민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출처[19] 2012년 '조선의 오늘'을 통해 공개된 원산 야경. 건물에 실제 사람들이 주거하고 있어 작동 중인 실내 조명이 아니라, 외곽에 LED 전등을 붙여 대내외 선전용으로 만든 모습이다. 그런데도 2012년에 한 관광객이 촬영한 원산시 야경 사진만 봐도 건물 내부 불빛이 희미하거나 전혀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 역으로 북한의 전력난을 더욱 강조하는 꼴이 되었다.[20] 참고로 사진 속에 있는 높은 건물은 1984년에 건축된 북망 타워로, 150m 높이, 32층을 기록하여 북한에서 평양 밖의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21] 지금도 금강산은 '한민족의 명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22] 한국 천주교 최초의 여자 수도회(수녀회)는 1888년 프랑스에서 진출해 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이다.[2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자리[24]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한국 베네딕토회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25] 역사적으로 원산항, 인천항, 부산항은 개항장이기도 하였다.[26] 평양-원산 사이에는 북한에서 보기 어려운 고속도로가 건설된 지역이다.[27] 법령에는 '사나제동'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오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