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4:45:38

김사복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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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사복
金士福
파일:金士福.jpg
출생 1932년 10월 3일[1]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신풍리
(現 강원도 원산시 신풍동)
사망 1984년 12월 19일 (향년 52세)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묘소 경기도 양평군
본관 신천 김씨
가족 부모님
아내, 장남 김승필(1959년생), 차남, 손자 김준호
종교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1. 개요2. 생애3. 발굴 이전 추측4. 발견 및 확인 과정5. 확인 이후6. 기타
6.1. 극우의 날조6.2. 문세광 연루 억측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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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김사복과 레코드.jpg
그가 생전에 타던 포드 20M과 찍은 사진

대한민국의 前 호텔 택시 기사.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티브인 실존 인물이다. 1980년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헤닝 루모어 녹음기자와 함께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2. 생애

고향은 함경남도 원산시 신풍리[2]로, 월남실향민이다. 그의 아들 김승필 씨의 말에 의하면, 김사복은 2대 독자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월남했고, 다음 배를 타고 오던 부모님은 배가 뒤집히는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는 바람에 고아가 됐다고 한다. 다행히 고모 댁에 의탁해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열심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군복무를 마쳤고, 결혼 후에 원단 공장을 하였으나 실패한 뒤 부산에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 사람을 알려면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인 택시에서 시작하여 호텔 택시까지 운수업을 종사하였다. 회현동에 위치한 파레스호텔[3]에서 호텔택시 운영권을 취득하였는데, 호텔 소속 차량은 포드 20M, 새한 레코드 프리미어였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시점에 김사복은 서울에 있었는데 1980년 5월 19일 독일 기자들과 김포공항에서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독일 기자들에게 당시 한국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날 광주로 가기에는 시간이 늦어서 조선호텔에 머물렀다. 20일에 독일기자들과 함께 광주에 들어갔고 21일 낮에 광주에서 1차적으로 탈출한 뒤, 밤 11시에 서울로 돌아왔다가 힌츠페터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먼저 촬영한 필름을 전해주고, 돌아온 23일 오전 10시 30분에 광주로 돌아오고 27일까지 계속 광주에 있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직접 목격해서 PTSD가 발발했는지,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거의 술에 빠져지냈다고 하며 술자리에서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사람의 탈을 쓴 채로 이래선 안 된다며 학살극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감을 드러낸 채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나친 과음을 해서인지 결국 1984년 6월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투병 중 1984년 1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힌츠페터 기자와는 1980년 5월에는 이미 초면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둘의 인연은 1975년 10월부터 1984년 6월 전까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3. 발굴 이전 추측

이 단락의 이하 모든 내용은 2017년 영화 개봉 이후 고인의 장남인 김승필 씨가 등장해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김사복이라는 기사가 자신을 태우고 광주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증언하였고[4] 이후 그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서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군사정권을 두려워한 김사복이 가명을 알려 주었을 거란 의견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지금의 국가정보원이나 국군방첩사령부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험악했던 국가안전기획부국군보안사령부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외국 이름이라 기자가 잘못 알아듣지 않았나 하는 의견, 사고나 지병으로 사망했을 것이란 의견도 있었으며 심지어 당시가 엄혹한 시절인 만큼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내용 때문에 오해한 것으로 사실 당시 광주에 있던 외신기자는 힌츠페터 말고도 꽤 많았다.[5] 계엄군 재진입 전날인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이던 윤상원이 외신기자들을 불러모아 기자회견을 했을 정도다.(이때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 인요한.)[6] 게다가 정보부에게 본인들이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선교사로 위장하여 서울과 광주에 출입하였다.[7] 그 많은 외신기자 중 선교사로 위장한 한 명을 태워다준 기사의 존재를 전두환의 신군부가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는 가명이라는 설을 채택했다. 돈이 궁했던 김만섭이 다른 택시기사가 태우기로 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선수쳐서 자신이 태우고 광주를 들어갔다가 나왔고, 김포공항에서 헤어지면서 엉뚱한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나왔다. 당연히 이 부분은 정보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8] 다만 채널A에서 방영한 뉴욕타임스 서울 특파원 최상훈 기자의 증언에는 영화 내용과 다르게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공항에 도착할 시점에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후술되는 김사복 씨의 아들 김승필 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즉, 영화처럼 손님을 가로챈 게 아니고 원래부터 김사복 씨가 힌츠페터 기자를 광주에 태워줄 예정이었다는 거다.

4. 발견 및 확인 과정

《택시운전사》 개봉 3일 후인 8월 5일 한 사람이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김사복의 큰아들이라고 밝히면서 화제가 된 동시에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김사복이라는 이름은 영화 속 설정처럼 가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본명 그대로였으며, 1984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언론사, 《택시운전사》의 제작사는 접촉 의사를 보였다. 이후 《택시운전사》 제작진에게 아버지 사진을 전달했고, 확인 절차를 거친 이후 힌츠페터 기자의 유가족과 만날 예정이라고 트윗을 통해 밝혔다.

영화가 흥행한 2017년 8월에 만들어진 '알계'[9]라는 점, 제대로 된 증거 자료가 없다는 점 때문에 영화의 유명세에 편승하려는 누군가의 자작극이란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8월 24일 아침 CBS 표준FM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당 트윗의 당사자인 김승필 씨와 접촉한 김정훈 기자의 대담을 방송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김씨는 기자에게 본인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여주어 아버지 이름이 "김사복"이라는 것을 손쉽게 증명하였다고 한다. 노컷뉴스 기사(8월 24일) 오마이뉴스 기사(8월 24일)

김승필 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위르겐 힌츠페터와 제작진, 언론사 등이 택시운송사업조합, 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도로교통공단을 수소문하고도 찾지 못한 이유는 김사복이 일반 택시 운전사가 아닌 호텔택시 운전사였기 때문이다. 즉, 택시운송사업조합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이 아예 없는 상태였다. 당시에는 호텔에 소속되어 손님을 목적지까지 태워주는 호텔택시라는 것이 있었으며, 주로 외국인이 이용했다. 호텔택시에 대한 매일경제의 1978년 8월 25일자 기사.

사실 여기서 김사복에 대한 증명은 끝났다. 각종 택시회사 다 뒤져도 '김사복'이라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고, 가족관계 증명서로 김사복 이라는 사람이 실존함이 밝혀졌으며, 무엇보다 힌츠페터의 책(The Kwangju Uprising)에 "밖에는 김사복이 우리를 기다렸다. 서로 인사한 뒤 우리는 서울 도심의 조선호텔로 내달렸다."라며 김사복과 조선 호텔이 언급되는데 이는 김승필씨의 주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힌츠페터의 책과 영화에서 김사복 묘사가 서로 모순된다. 모든 정황이 '힌츠페터와 함께한 김사복'이 '김승필의 아버지 김사복'과 동일 인물임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김사복이 일반적인 택시 운전사라는 지레짐작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생전의 힌츠페터가 김사복을 찾아달라고 했을 때 한국측에선 택시운송사업조합 등만 뒤지고 다니는 우를 범했다. 윗 문단에서도 나온 것처럼 힌츠페터의 책 또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김사복이 택시 운전사라는 말은 커녕, 택시를 탔다는 말도 없다. 그저 'Driver'가 운전하는 '검정색 세단'을 탔다고 했을 뿐이며, 심지어 '조선 호텔'에서 탔다고 정확히 밝혀 놨는데 조선 호텔을 통해 알아보지도 않은 것이다. 막상 기자들이 그 시절 조선 호텔에서 근무한 사람들을 찾아가니 바로 김사복을 확인해 주었다.김현정의 뉴스쇼 "C호텔 앞에서 '택시 김사복' 만나다"(8월 25일) 이에 김현정 앵커는 "조선호텔에서 검정 세단을 가지고 택시 같은 영업을 했던 김사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이것은 아들도 증언을 하고 알고 있는 지인도 있고 사진도 있고. 그리고 힌츠페터 씨의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면 역시 택시를 타고 갔다는 얘기는 없고. 검정색 세단을 타고 갔는 얘기가 있는 거네요."라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또한 위 기사의 하루 전인 8월 24일 오마이뉴스에서 추가 취재기사를 냈는데, 김사복이 근무한 곳이 서울 회현동에 위치한 파레스 호텔, 즉 지금의 파레스 호텔 남대문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파레스 호텔의 상무이사로 근무했던 이원무에 의하면 김사복이 서울 파레스 호텔에서 호텔택시 기사로 일했고, 이원무가 관리하던 택시가 2대였다고 한다. 이원무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당시 호텔택시는 외국인들만 이용했으며 김사복이 5.18 당시 3-4일 정도 차가 없었고, 며칠뒤 회현동 아바이순대집에서 같이 소주를 마시면서 광주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원무의 증언은 김승필 씨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그 김사복 맞다! 광주 가서 혼쭐났다고 말하기도..."[10]

그러면 김사복이 조선 호텔에서 일한다는 노컷뉴스(김현정의 뉴스쇼)와 파레스 호텔 소속이라는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각 기사를 잘 보면 김사복 씨는 파레스 호텔 소속이라고 하며, 조선 호텔에서는 '상주하다시피 일한 것'이라고 나온다. 일종의 프리랜서인 지입차주라서 그런 듯. 5월 19일 당시에도 김사복은 힌츠페터를 자신이 일하는 조선 호텔로 데려가 1박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 호텔에서 일하던 택시 기사는 3명인데 그중 한명이 김사복. 참고로 문세광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을 일으킬 때 조선 호텔에서 호텔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러나 《택시운전사》 제작사 측에선 8월 24일~25일에 걸쳐 김현정의 뉴스쇼(노컷뉴스)와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확실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확인 중'이란 입장을 고수했다.[11]'택시운전사' 제작사 "김사복 존재? 아직 확인 중이야"(조선일보, 9월 5일) 하지만 부친의 이름이 김사복이 맞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동안 찾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은 매우 높아졌다.

제작사측에서 이렇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김사복은 '택시 기사'이며 실존하는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라는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대전제가 깨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도저히 김승필 씨의 아버지가 김사복이라는 것을 부정 못하니 동명이인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흔한 이름이 아닌 것을 뛰어넘어 사람의 이름조차 아닌 것 같아 영화에서는 "'사복'은 다방 이름"이라고 설정했는데 이제 와서 흔한 이름이어서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 무엇보다 김승필 씨의 이야기는 힌츠페터의 책 내용과 일치하고, 영화에서의 설정이 책과 틀린 마당에 제작사측의 이런 태도는 신중함이 지나치다. 즉, 김승필 씨가 최초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때와 자기 아버지가 김사복이고 관광호텔 택시 기사라고 말하며 관련 사진까지 보여줬을 때 증명은 끝난 것이다. 김승필 본인도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안믿어 줘서 몹시 힘들어했다.

실제 김사복은 영어를 잘해서 많은 외신 기자들이 단골로 삼았다고 한다. 김승필 씨는 힌츠페터가 외신기자를 통해 부친을 소개받아 김포공항에서 바로 광주로 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광주를 다녀온 날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며 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훗날 아들에게 들어갈 때도 힘들었지만 나올 때는 더 힘들었는데 군인 중 하나가 알고도 보내준 거 같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전했다.[12]

김승필 씨의 주장과 부합하는 측면이 힌츠페터 기자의 회고에서도 나오는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자신이 광주로 갔을 때 타고간 택시가 오펠차라고 회고한 바 있다. 오펠차는 한국에서 조립한 새한 레코드로 추정되는데, 김승필 씨의 주장대로 김사복이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던 호텔택시 운전사였다면 당시 일반적인 택시로 쓰였던 포니나 기아 브리사가 아닌[13] 최고급 차량인 새한 레코드를 운전했을 수 있다. 김승필 씨의 주장에 의하면 김사복은 호텔택시 2대와 자기 명의의 자가용을 소유했다고 하는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처음 광주로 갔을 때 타고간 차량은 포드 20M차로 보이고, 2차로 광주에 들어갔을 때는 새한 레코드차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14] 이런 부분도 김승필 씨의 주장과 맞물리는 측면이다. 또 김승필 씨가 아버지의 택시가 일반 택시가 아니라 고급 세단이었다고 회고한 것은 처음 광주에 들어갈 때 힌츠페터가 말한 '한국에 비즈니스로 온 외국 회사원인데 부장과 광주에서 길이 엇갈려 데리러 간다.'는 이야기가 계엄군에게 통했던 것과 정황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그래서 정리해보면, 군인들이 수색을 하려 해도 비싼 고급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나기에 함부로 수색할 수 없었고, 김사복 씨는 호텔택시 기사이며, 고급차를 탄 사람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인데다가, "비즈니스 때문"이라는 거짓말이 통하고,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신군부는 끝까지 모르고 김사복에게 전혀 주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돌았던 소문과 달리 다행히도 군부에 잡혀 고초를 겪지는 않았다고 하며, 5.18 민주화 운동 4년 뒤인 1984년 간암으로 인해 향년 5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승필 씨는 군부 독재 시절에는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고, 이후로는 스스로 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자기 아버지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9월 1일에 방영되는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김사복에 대해 다뤘다.
파일:김사복의차.png
5.18 민주화운동 직후 1980년 8월경의 모습.

바로 이 검은색 차량 "새한 레코드"를 타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헤닝 루모어 기자와 광주로 진입했다.
파일:김사복84년.png
1984년 2월 사진. 그 해 1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른쪽의 얼굴이 가려진 인물은 둘째 아들인데, 공교롭게도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핵심 부대인 육군 특전사 소속 특전병이라 광주의 진상을 알고 있던 그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15]
파일:50152_35397_3715.jpg
김승필 씨에 따르면 외신 기자와 자주 동행하면서 장준하, 함석헌 등의 재야의 인사들과 만날 기회도 자주 가졌고, 평소 '사상계'도 자주 읽었다고 한다. 실제로 같이 공개된 사진 중에는 민중운동가 함석헌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기사, 김정훈 기자의 글로 왜 힌츠페터가 파견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같이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9월 5일 노컷뉴스를 통해 김승필 씨가 공개한 사진 중 하나에 김사복 씨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및 녹음기사 헤닝 루모어가 같이 있다는 것을 당시 광주행을 지시했던 ARD-NDR[16] 특파원 페터 크레입스[17]가 직접 확인하였다.[18]
파일:힌츠페터와김사복.jpg
김승필 씨가 에 공개한 사진 중 안경 쓴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 오른쪽이 김사복이며, 윗줄에 머리 벗겨진 외국인은 녹음 담당이었던 헤닝 루모어다. 위 사진에는 잘려 있지만 원판의 사진 왼편에는 함석헌 선생이 나와 있다(장소는 도봉산).

2017년 9월 6일, 최종적으로 《택시운전사》의 제작사인 더램프 측에서 힌츠페터의 아내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타트 여사에게 사진을 보내 남편이 맞다는 확답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김사복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기사 여담이지만 힌츠페터는 브람슈타트 여사와 2002년에 결혼했다고 하니, 당시 고인의 상사였던 페터 크레입스의 증언은 거의 쐐기를 박는 정보였던 셈이다.[19]

5. 확인 이후

2018년 5월 5.18 전시회를 통해 김승필 씨가 추가적인 사진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기사 한겨레와의 인터뷰

2018년 12월, 김사복의 묘지가 경기도 양주시 천주교 청량리성당 묘지에서 옛 5·18묘역의 힌츠페터 기념정원으로 이장되기로 결정되었다. 이미 2016년, 힌츠페터가 2005년 광주를 방문했을 때 5·18기념재단에 맡긴 손톱과 머리카락 일부가 안장되어 있으니 두 사람은 약 40년 만에 해후하게 되는 것이다.#

6. 기타

6.1. 극우의 날조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극우 세력은 위르겐 힌츠페터를 간첩+기레기로 몰아붙이고, 극중에서 위르겐 힌츠페터 역할을 맡은 독일 영화 배우 토마스 크레치만도 동독의 스파이라고 날조와 선동을 했다. 왜곡 사례(시스템클럽) 정작 위르겐 힌츠페터는 서독에서 일하였고[20] 동독1990년 독일 통일 이전에는 방문도 해보지도 못했다. 극중에서 위르겐 기자 역을 맡은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은 동독 출신이지만 귀순 용사다. 실존인물을 날조하는 것도 모자라서 단지 그것을 연기한 배우에게까지 비난을 하면서 옹졸함과 무지함만 드러냈다.[21]

게다가 힌츠페터는 베트남 전쟁 종군기자 출신으로, 공산 진영인 북베트남군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경험도 있는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힌츠페터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자기 생각에 좀 거슬린다 싶으면 용공분자,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억지에 불과하다.

김사복이 실존 인물이란 것이 확인되자 김사복이 함석헌과 찍은 사진을 두고 뜬금없이 김사복이 한민통의 간첩이라는 날조를 하기도 했다.#

6.2. 문세광 연루 억측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문세광과 연루되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대령의 주장인데, 그 이유라는 것이, 문세광이 숙소인 조선호텔에서 사건 현장인 국립극장으로 이동할 때 김사복의 택시를 타고 갔다는 것뿐이다.

당시 문세광이 차량 대절을 요청하자 조선호텔에는 전용 호텔택시가 없어서 우연히 다른 손님을 태우고 조선호텔에 온 김사복의 택시를 호텔 측이 대신 태워줘서 가게 된 것이다. 이마저도 김사복 본인이 운전한 게 아니라 보조 운전사였던 황수동이 운전하였다. (동아일보 1974년 8월 17일자)

그리고 김대령 문서에도 나오듯이, 김대령은 유사 역사학자라고 비판 듣는 인물이다. 심지어는 보수 성향 매체인 월간조선에서조차 김대령의 주장은 증거라기보다는 추론의 성격이 강하다며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요원이었던 이용택 전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참고인 조사 수준에 머물렀고 그나마 특별한 혐의가 없어 풀어줬다고 한다. 링크

7. 관련 문서


[1] 음력 9월 4일. 장남 김승필 씨가 택시운전사 특강을 통해 아버지 김사복의 생년월일을 공개하였다.[2]북한 강원도 원산시 신풍동[3] 현재의 정화예술대학교 백암관으로, 2018년까지는 파레스호텔 남대문이었다. 이 기사에 장남인 김승필 씨가 부친의 업을 잇겠다고 호텔을 상대로 고소장을 낸 적도 있는데, 고소장에 당시 호텔의 주소가 나온다. 이 주소는 정화예술대학교 백암관과 동일 주소다.[4] 영화 끝에서도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김사복이라는 택시운전사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은 영화와는 달리 실제 인물 인터뷰[5]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노먼 소프, 르몽드 필리프 퐁스, 뉴욕타임스 심재훈(내국인이지만 외신 소속)과 헨리 스톡 스토크스, AP통신 테리 앤더슨과 샘 제임슨, 타임(주간지) 로빈 모이어, <볼티모어 선> 브래들리 마틴, <쥐트도이체 차이퉁> 게브하르트 힐셔, 요미우리신문 마츠나가 세이타로, 그 외 아사히신문, NBC, ABC 등. 이 중 일부는 <5.18특파원리포트>에 경험담을 기고하기도 했고, 2017년 《택시운전사》가 개봉했을 때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이들은 한국으로 초청되어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6] 《택시운전사》 작중에서 계엄군이 위르겐 힌츠페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각색이다.[7]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는 서울 입국시 선교사, 그리고 광주 출입시 사업가라고 위장한다.[8] 영화 상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실제와 달리 광주에 있던 외신기자는 단 한 명이었던 데다가 김만섭이 군인에게 죽을 뻔했고, 힌츠페터가 한국에 와 그를 찾을 때조차 정부 요원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외국인, 게다가 당시 국력이 한국과 넘사벽이었던 독일인인 힌츠페터는 건드릴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이를 갈고 있던 김만섭은 찾는 즉시 죽여버릴 게 분명했기에 가짜 이름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힌츠페터를 도와준 한국인 기자도 "당신이 그를 찾지 않는 게 나을지 몰라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9] 트위터 계정 신규 생성 시 기본 프로필 사진이 실루엣이라는 점에서 착안된 용어이다. 신규 생성 내지는 프로필 사진을 지정하지 않거나 없거나 평소 활동력이 없는 계정을 가리킨다. 후일 밝혀진 김승필 씨의 노년에 접어든 나이를 생각해보면 트위터는 그저 아버지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 원래 트위터를 하지는 않았고 SNS 자체가 처음이었던 듯하다.[10] 기사 중의 사진에 호텔의 소재지가 나온다.[11] 주연배우였던 송강호마저도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12] 군인 중 한 명이 위르겐 힌츠페터 일행을 묵인한 장면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회고록과 《택시운전사》에서도 나온다.[13] 한국에서 중형택시가 등장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한 시점이었다.[14] 상단 사진도 포드 20M의 것이다. 실제 차의 뒷부분을 보면 유사하다.#[15] 실제로 그 부분 때문에 얼굴 공개를 거부했다.[16] ARD는 독일 제1 공영방송연합을, NDR은 북부독일방송을 말한다.[17] 1971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과 일본, 대만, 필리핀을 취재하던 특파원이었다. 그의 아내 루이즈 크롬 역시 5.18 당시 광주에서 취재를 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국을 취재하던 특파원이었던 탓에 서울에 잘 알려져 있었고, 중앙정보부가 자신에게 취재 제한을 걸 것으로 생각하여 힌츠페터를 광주로 보냈다고 증언했다.[18] 사실 기자가 "이 사람이 힌츠페터 기자가 아닌가요?"하고 물어본건데 페터 크레입스가 그 사람은 힌츠페터가 맞고 "그 뒤에 헤닝 루모어도 있네요."라며 생각지도 못한 중요한 확인을 해준 것이다.[19] 사실 이 사진이 나오기 이전인 8월 24~25일에 이미 노컷뉴스와 오마이뉴스는 김승필 씨의 아버지가 그 김사복이라고 확인하였다. 즉,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도 증거는 충분 하였다. 제작사 측이 지나치게 신중했을 뿐.[20] 위르겐이 태어났던 1937년 당시에는 분단 전인 나치 독일 시기였다. 그래서 서독에서 지냈다는 말은 몰라도 태어났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인물을 남/북한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않듯이.[21] 애초에 지금 현재 독일은 통일된 하나의 나라다. 분단국가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국 국민이 분단 당시 출신지를 운운하며 색깔론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매우 무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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