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3:01:59

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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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평양시의 종교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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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교회
鳳岫敎會
Bongsu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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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185064443.jpg
▲ 봉수교회의 모습
<colbgcolor=#E8E8E6,#222222><colcolor=black,white> 설립 1988년 11월 6일 ([age(1988-11-06)]주년)
2008년 (재건축)
종교 [[개신교|
파일:75px-Christian_cross.svg.png 개신교
]]
소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자 송철민 (담임목사)
주소

봉수교회
(평양시 만경대구역 건국동)
1. 개요2. 실체3. 교회 신도에 대한 의견
3.1. 친북단체의 주장3.2. 유엔 인권이사회와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정보센터의 근거3.3. 탈북민들의 증언3.4. 기타 학자의견과 재외교포들의 증언3.5.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의 의견
4. 역대 담임목사5. 기타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종교시설. 평양시 만경대구역 건국동에 있다.

개신교 소속 교회로서, 한국전쟁 후 최초로 북한 땅에 설립된 예배당을 가진 교회이다. 1988년 봄에 완공되어 11월 6일 첫 예배를 드렸다. 북한에는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 교회가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둘 뿐이었다가 2005년에 제일 교회가 설립된걸로 알려졌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외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소속된 가정 예배처소들이 있다. 가정예배처소의 존재에 대해서는 남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후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이 있으나 통일연구원 북한인권 백서에선 실체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 두 곳 외에도 예배당이 있는 개신교 교회가 더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금강산 관광, 경수로 공사, 개성공단 운영을 위해 방문 했었던 한국 사람들을 위한 교회였고 현재는 모두 운영이 중단 된 상황이다.

북한 유일 공인 개신교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소속되어있다.

2. 실체

북한 당국은 교회, 성당, 사찰을 해외 종교인 및 관광객 등 방문객을 대상으로한 정치적 목적의 대외선전용 시설로 활용해 왔다. 새로이 신축된 종교시설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출입이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고, 인근 주민들은 종교시설을 ‘외국인 참관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1988년 9월에 세워진 평양 봉수교회의 경우, 평상시에는 관리원 가족만 거주하고 있으나, 외국인 참관 시에는 만경대구역 내 동사무소 근무자등 노동당에서 엄선한 40~50대의 남녀 수백 명이 위장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많은 외국 방문객들은 교회활동이 연출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2021년 통일연구원 북한인권백서
파일:external/nk.chosun.com/church2.jpg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114948_48031_4355.jpg
<colbgcolor=#E8E8E6,#222222><colcolor=black,white> 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모습

평양시 만경대구역 건국동(옛 봉수동) 보통강변에 있다. 봉수교회 양 옆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와 평양신학원이 있고, 뒤편에는 목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봉수교회는 북한 정부의 지원과 교인들의 모금으로 1987년 착공해서 1988년 봄에 완공되었다. 첫 예배는 1988년 11월 6일 드려졌다. 당시 북한 정부가 봉수교회 건립을 지원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대외적인 선전의 필요성, 두 번째는 대내적인 유화책이다.

첫 예배 설교는 김운봉 목사가 맡았으며, 북한 체류 중이었던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방북단 등 외국인들도 예배에 참석했다.

2000년대 들어서 예배당 노후화 문제가 제기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을 받아 2006년에 재건축을 시작해서 2007년에 재완공되었다.

봉수교회 현 예배당은 3층으로 되어있다. 1층에는 사무실, 당회실, 접견실, 성가대실, 화장실을 갖췄고 2층에는 1,000여개 좌석을 갖춘 예배실이 있다. 3층에는 2백석 규모 좌석과 방송실과 자모실이 있다. 그 외에도 음향 및 영상, 동시통역, 냉난방, 보일러, 비상발전, 전압승압 시설을 구비했다.

매주 오전 10시에 열리는 주일예배에는 북한 교인 뿐만 아니라 북한을 방문한 관광객, 사업가, 외교사절들과 북한에 주재하는 외교관, 국제기구 직원, 평양과학기술대학 교수·직원 등 외국인들도 참석한다. 북한이 아무리 폐쇄적인 국가라고 할지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독교인인 외국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거의 매주 외국인들이 예배에 참석한다고 선전하나.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와 외국인들의 증언으로는 부활절날 예고없이 찾아갔더니 굳게 닫혀있음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매주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외국인 목사와 NGO에서 예배를 열려면 통일전선부에 몇만달러 이상 먼저 선입금을 해야 한다. 이는 캐나다 출신 목사로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집전해본적이 있고, 별개로 NGO 활동으로 10여년간 북한에 구호 사업을 통해 5천만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도 3년 이상 억류된 임현수 목사를 포함한 일관된 증언이다.

봉수교회의 북한 교인들은 주일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평일 조별모임, 일종의 구역예배도 예배당에서 가진다고 주장한다. 교인은 300여 명이며, 직분자로는 장로 9명·권사 14명·집사 5명이라고 한다..


2012년 9월 30일 봉수교회 주일예배 영상. 손효순 목사 집전. 그는 2013년 4월 사망했다.

3. 교회 신도에 대한 의견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봉수교회를 비롯한 장충성당, 보현사 정백사원등의 종교 단체와 시설은 통일전선부에서 관리하는 어용조직이거나 시설이라는데에 있어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신도중에 진정한 신자도 일부 존재한다고 보는 김병로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목회자나 승려등 종교인들도 김일성대 종교학과에서 일괄배출하는것도 잘 알려져있다. 다만 신도 전체가 가짜인지 여부는 의견이 약간갈린다.

3.1. 친북단체의 주장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2019. 8. 개정)
  •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전(前) 위원장 강량욱 목사부터가 일제강점기에 안수 받은 개신교 목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외에 1980-90년대 외부 인사와 접촉한 당시 연맹 간부 김성률·김득룡·고기준·김운봉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 신자였다는 사람들이며 월남 개신교 인사 중 그들을 개신교 신자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순전히 가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모퉁이돌선교회 이삭 목사조차도 다른 사람의 증언을 참고하여 고기준 전(前) 서기장은 한국전쟁 전 평양신학교 신학생이었던 사람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 현재 조선로동당은 종교인 입당을 금지하지 않는다. 당장 강량욱 목사 차남 강엽섭 목사와 손자 강명철 목사부터가 조선로동당 당원이다.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 또한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조선민주여성동맹 가입과 조선로동당 입당을 허락받은 당원이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미담'으로 언급하는 사실이다. 즉, 봉수교회 교인들이 설사 조선로동당 당원이라고 해서 그것이 '봉수교회를 포함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구성원들이 전쟁 전 개신교 신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에 대한 협조야 해방 직후부터 각 종교 신자 사이에 있던 상황이었고, 협조적인 종교인과 그 자녀·손자들이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아 신앙생활을 한다든가, 박해 받아 원거주지에서 추방당했던 종교인과 그 자녀·손자들이 몇 차례 있었다는 사면 조치로 추방지로부터 돌아와 북한 당국에 협조해 공인 종교단체에 가입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법한 상황이다.

3.2. 유엔 인권이사회와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정보센터의 근거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됩니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로동당출판사, 김일성저작선집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 북한은 표면상 법치국가일 뿐, 그 어떤 법령보다 김씨 일가의 교시와 로작이 우선인 국가이다. 따라서 불완전하게 나마 보장된 북한 헌법상의 종교의 자유는 대외선전용 문구일 뿐이다. 1989년에 열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외신에게 북한의 '종교의 자유'를 보여주기 급조한 교회라는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90여곳의 가정예배소 또한 실체가 의심스러우며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해도 평양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21년간 통일부의 지원과 협조로 하나원 출신 탈북자 전원 1만 5천여명의 조사로 15년간 북한 종교의 자유백서를 발간한 북한인권정보센터에서도 현재까지 면접을 실시한 북한이탈주민들 중 가정예배처소의 예배경험은 커녕 실제로 보았다는 답변자를 아직 발견하지못 했다. 2020년 통일연구원 북한 인권 백서에서도 봉수교회의 실체를 명백한 대외 선전용으로 보고 있다.
  • 북한의 기독교 커뮤니티는 1945년부터 박해를 받다 1950년 6.25 사변 이후 1958년부터 1960년의 사회안전성의 주민료해 사업으로 악질 종교인과 그 후손과 친족들을 적대계층으로 구분하여 체포, 사살, 정치범 수용소 구금과와 기독교인의 친인척들까지 내각결정 149호로 산간오지 광산 지역으로의 추방 조치 등으로 1950년대 말에 박멸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통일연구원의 2020 북한 인권 백서에 따르면 "봉수교회는 평상시에는 관리원 가족만 거주하고 있으나, 외국인 참관 시에는 만경대구역 내 동사무소 근무자 등 노동당에서 엄선한 40~50대의 남녀 수백 명이 위장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 김길선 기자 역시 종교 사역자들 실체에 대해 조선로동당원중에 선발된 인원중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로 부터 목사, 승려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사업에 종사하며, 봉수교회 주변 주민들은 근처에 지나가다 주위에 깔린 보위원에게 취조를 당할까봐 일부러 먼길을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탈북자들은 대부분 함경북도 량강도 출신이라 종교와 관련된 탈북이 아니니 북한 종교 탄압에 대한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종북주의자들의 생각없는 물타기로 역으로 그들의 논리를 보면 평양을 제외한 지역에 교회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준다. 즉 평양 밖에는 어용교회도 없고 기독교에 대한 접근도 가능하지 않은 보여주기식 종교의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 개신교 뿐만 아니라 장충성당(천주교), 정백사원(정교회), 보현사(불교), 천도교 같은 북한의 모든 종교조직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에 사업으로 관리 대상으로 해외 NGO와 종교단체 지원의 달러유입 창구로 활용하고 해외 종북단체 관리까지 하기 위함이다.
  • 그리고 조선로동당원도 종교단체에 가입할 수 있다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산권의 국가무신론은 물론 북한체제와 관련된 주체사상에 대하여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자본가도 입당이 가능한 중국 공산당에서 조차 공산당원의 종교가입은 물론 종교관련 행사의 참석은 금지되어 있고, 시진핑은 공산당원들에게 종교를 단순히 가지는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을 추구하는 것 조차 금지했다.# 지방 관료들의 종교 유화 정책 또는 용인 정책을 비판 하며 당사자는 해임하고 유력 간부들 조차 종교도 아닌 단순 미신이나 점을 쳤다는 이유로 내치고 있다.#2 "공산당원은 굳건한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자가 돼야 하며 절대로 종교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며 지속적으로 유물론적 및 무신론적 반종교적 관점을 견지하라는 압박을 하고 있다. 이런 판에 주체사상을 제외한 다른 이념은 엄격하게 금지되는 북한에서 일반 주민도 아니고 조선로동당 당원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김일성의 절대 수령독재체제 이전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도 유사하게 제사가 아니라 성묘를 가는것 또한 비사회주의 및 봉건주의 관습이라며 1989년까지 탄압을 받았다.
    • 당과 김일성 김정일의 교시로 제사는 봉건유교관습이며 반혁명 종파행위와 관련된다고 비판해서 일반주민들은 쉬쉬하며 조용히 지냈고, 당간부들은 철저하게 단속했음에도 성묘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제사지냈다는 투서가 올라오면 잡혀가 사상투쟁 연단에 올려 비사회주의 관습 이라며 조리돌림 시키다가 1980년대 초반에 체제경쟁중인 남한에서 북조선은 조상도 모르고 에비애미도 몰라보는 쌍것들이라는 비방이 김일성 귀에 들어갔는데 발끈 했고, 13차 평양 세계 청년학생 축전을 앞두고 김정일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있는 김정숙 묘 앞에 사과 하나 바치면서 이렇게 간소하게 모시는게 사회주의적 방식의 조상 제사다라고 선전하면서 제사금지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1]
  • 국가보위부에서 만든 종교인 미신 검거 영상을 보면 공화국 형법으로 미신 행위나 종교단체 가입은 5년이하 노동단련형에 처한다고 나와있다. 북한에선 종교 자체를 미신으로 본다. 다만 점쟁이를 찾아가는 정도는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 뇌물을 쓰면 바로 풀려나오는 정도로 평양에선 김정은에 숙청에 불안한 고위 당 간부들도 있고 지방에선 보위부까지 범인 찾아달라고 점쟁이를 찾아 갈 지경이라고. 그러나 단체가입은 다르다. 로동당원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신자는 물론 단순 성경반입 조차 공개 처형 내지 가족까지 정치범수용소안에서도 완전통제구역행이라는건 국제인권 단체와 탈북자들의 일관된 증언으로 확인된다. 일반 탈북자들은 송환 되어도 뇌물을 쓰면 귀가, 운이 나쁘면 혁명화라고 부르는 강제노동내지 수감생활이지만 성경반입 내지 중국에서 한국인 목사 접촉은 무슨 빽을 써도 살아남기 힘들다.
  • 강량욱 목사와 그 후손은 김씨 일가 백두혈통의 친척으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숙부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에서 초법적인 지위로 기타 주민이나 일반 로동당원처럼 북한의 독재 체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수 신분이다. 더군다나 강량욱 목사는 창덕학교 당시 김일성의 담임 선생님으로 특별한 인연으로 포장되어 불쏘시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김일성에게 극찬받은 인물이란걸 감안해야 한다. 다만 강량욱이 기독교인에 목사이며 강반석의 친척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강 목사의 아들과 손자는 가업을 물려받아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간부직을 역시 대대로 3대 세습 중이다. 그리고 정통 개신교 신학, 교회, 교인입장에서 보면 목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죄를 언제든지 범할 수 있는 죄인이므로 '강량욱이 정식 안수를 받았으니 북한교회가 진짜다'는 주장은 북한식 선동에 넘어가거나 종교에 무지한 발언이라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런식이면 히틀러와 나치 인물들도 대부분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니 나치독일은 기독교 국가다.안창호나 조만식 같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친척은 당연히 보는 눈이 많으니 비교적 관대하게 대할뿐이지 일반적인 예로 볼 수 없다.

3.3. 탈북민들의 증언

  •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태영호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봉수교회 교인들을 포함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구성원들은 전쟁 전(前) 개신교 신자들과 아무 관련 없는 조선로동당 당원일 뿐으로 단지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태영호는 종교에 대한 공식 북한입장(지령)은 떼어놓고 볼 때, 자신은 평양시 핵심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생활했던 시절에도 종교 또는 기독교나 교회에 대해 전혀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 태영호가 북한에 있던 기간이 짧으므로 신뢰할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태영호와 같은 외교관들은 정치범 수용소, 종교의 자유 같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북한의 공식 지령을 눈감고도 외울 정도로 학습받기 때문에, 태영호 본인은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말인지 모를 수가 없다.
    • 탈북 외교관 고영환도 외교관 시절 경험을 들며 북한 외교관들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민감하게 대하는것이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문제로 핵개발이나 미사일 발사 무력 사용 규탄 성명같은것을 유엔총회에서 참관하면 비웃거나 졸아도 별 문제 없지만,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격렬하게 반박하지 않는것은 지상락원을 주장하는 공화국의 체면이 달린 목숨이 오가는 중대한 문제로 해외에서 북한 외교관들 뿐만 아니라 북한 외무성내에 인권문제 대책 상무조가 항시 가동중이며 북한관련 매뉴얼을 주기적으로 외교관들에게 배포하고 학습한다. 해외 외교관들도 이것이 임무중에 가장 중요한 업무이며, 평소에 서방 기자들에게 답변을 연습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북한 외교관들은 북한 내에서도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해외에 오자마자 북한 체제가 비정상이며 인권문제가 심각한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외교관들이 인권문제에 격렬하게 부정하는것은 살아남으려고 하는것이지 실상을 몰라서가 아니다.
  •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주성하 또한 봉수교회, 칠골교회 신도들은 통일전선부 사람들의 아내들이며 목사 내지 교역자들은 1989년 13차 평양세계청년축전을 앞두고 김일성의 지시로 김일성대에 종교학과를 급하게 설치한 후에 속성과정으로 배출한 종교인이라고 한다. 김일성대 력사학부 교수들은 유물론 사관에 입각한 무신론자들로, 이들이 배출하는 종교학과 졸업생은 매해 20~25명이라 한다. 통일전선부의 판단에 의해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불교 등의 간부(?)들을 함께 배출한 후 일부는 국가보위성으로 배치하여 지하종교인을 색출하는 임무를 준다. 즉, 이들 중의 일부가 개신교에 배치되어 신학교육으로 진학하는 형태이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2014 유엔 인권이사회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보고서 내용이다.
  • 탈북 외교관 출신 김동수 박사 또한 북한의 종교 실태 강연에서 조선그리스도 연맹 봉수교회 장충성당은 통일전선부 산하의 가짜 조직이고 종교인은 모두 조선로동당원이며 목사나 승려들은 옷속에 당원증을 차고 있고 골수 충성 분자들만 선발한다고 한다. 재외 교포 목사나 종교인들이 봉수교회에서 설교를 하려면 미리 통전부에 선금 지불을 해야 하며, 이에 대해 친북성향의 재미교포 종교인들은 돈을 주고 설교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3.4. 기타 학자의견과 재외교포들의 증언

국내 연구자들의 주장 역시 북한과 종북단체의 주도로 초청된 재미교포나 진보단체의 증언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다지 신뢰하긴 어렵다. 북한에서 초청할 정도의 교포나 NGO, 종교인이라면 이미 통일전선부에서 성향파악이 완료되어 북한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초청하고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지정된 장소와 사람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불쑥 가정집에 방문해봤다고 해봤자 이미 섭외돼서 몇달간의 학습이 완료된것. 북한과 종북주의자들의 논리가 "태영호와 탈북자들은 북한에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북한의 종교 탄압에 대해선 잘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초청식으로 섭외된 재외교포들이야 말 할것도 없다.
  • 이북 평양 출신 재미교포한국전쟁 중 아버지 이태석 목사를 북한 군에 잃은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전(前) 총회장 이승만 목사(1931년 3월 25일-2015년 1월 14일)는 1978년 북한 방문을 시작하여 2014년 마지막 북한 방문까지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는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번 봉수교회를 방문했는데, 봉수교회를 방문했을 때 자신이 월남하기 전 같이 학교·교회를 다녔던 동기·교우의 자녀를 수십여 명이나 만났다고 한다. 이승만 목사는 봉수교회 외에 평양과 지방에 있는 가정예배처소도 방문했는데, 이 곳 신자들은 전쟁 전(前)부터 믿던 개신교 신자거나 적어도 전쟁 전(前) 개신교 신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 이북 함경남도 원산 출신 재독교포로 아버지 이풍운 목사를 원산에 두고 월남한 이영빈 목사는 1955년 10월 독일에 감리교 선교사로 이민한 후 북한에 남아있는 아버지 이풍운 목사와 서신 왕래를 할 수 있었다. 이영빈 목사는 서신 왕래를 통해 아버지 이풍운 목사가 한국전쟁 후에도 소천할 때까지 원산에서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하며 매 주일마다 몇 명의 교인들과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영빈 목사의 아버지 이풍운 목사는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를 시작한 개신교 신자로, 1960년 원산에서 소천했다. 이영빈 목사는 1981년부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감독을 받고 있는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했는데 그 중에는 평양이 아닌 원산지역에 있는 가정예배처소도 있었다.
  • 북한 개신교 연구자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김흥수에 따르면 봉수교회는 운영 초기 가정예배처소 신자들의 비협조로 좌석을 채우는데 어려움을 겪어 비신자에게 요청하여 임시로 자리를 채웠으며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관계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봉수교회는 운영 초기 성가대를 신자 아닌 전문 음악인에게 요청하여 임시로 성가대 역할을 맡겼으며 이 역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관계자들이 인정한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봉수교회의 운영 초기 가정예배처소 신자들이 비협조적이었던 이유는 오랫동안 가정예배처소 방식의 신앙생활이 익숙한 점도 있었지만 정세가 바뀌어 다시 자신들이 탄압당할 수 있음을 우려한 점도 있었다고 한다.
  • 탈북전 종교에 관심도 없고 공인 종교단체에 왜 무지했었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북한사회에선 종교의 언급이 가정에서 부터 금기시되고, 평양 밖엔 어용교회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봉수교회나 조선그리스도연맹에 진짜 신자가 있다고 하는 서울대 김병로 교수의 연구로는 북한 정권의 혹독한 압박과 탄압, 즉결처형과 투옥,추방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김병로 교수는 북한교회가 북한당국에 완전히 장악되어있으나 그게 전부의 실체가 아니다라고 진짜 신자들도 존재한다고 본다의 발언이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는것으로 김병로 교수는 정보기관의 신빙성과 탈북자들의 증언을 부인한적이 없다. 수만명의 탈북자들의 증언은 그렇다 치고, 국내외 전문가와 유엔과 인권단체도 일관되게 북한 교회의 실체에 대해 부인하거나 강하게 의심하고 있는데 북한에서 초청하여 방문한 일부인사들의 증언을 과대평가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의 정보통제는 철저하기 때문에 1994년 평양을 방문한 당시 정연주 기자는 김일성 사망후에도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라며 북한 특집 연재기사를 게재하며 북한 위기설을 부정했지만 94년 여름 이미 당시 김정일에게 상주한 강석주 제 1부상의 제의서 내용으로로 북한 전역에서 50만명이 아사한 상황이었다.[2] 주성하 기자도 당시 김일성종합대 학생으로 있으면서 고작 100여킬로 미터 떨어진 농촌 지역에 아사자가 속출한것을 당시에 몰랐다며 북한의 정보통제는 주민과 핵심계층에게도 철저한데 통일전선부 초청 외국인 관광객들이야 말할것도 없다.
  • 에릭 와인가트너(Erich Weingartner) 전(前)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북한 담당자이자 전(前) 세계식량계획(United Nations World Food Programme, WFP) 식량원조연락소(Food Aid Liaison Unit, FALU) 대표가 1985년 처음 WCC 북한 담당자로서 조그련과 접촉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고, 1997년 5월부터 1999년 10월까지 세계식량계획 식량원조연락소 대표 자격으로 북한 평양에 체류했다. 그에 따르면 1997년 12월 세계식량계획 식량원조연락소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 체류하고 있을 당시,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른 체류 외국인 거의 대부분이 잠시 본국으로 귀환했음에도) 그의 가족과 함께 불시에 봉수교회를 찾았는데, 다른 참석 외국인이 없었음에도 예배를 하고 있었으며 "훨씬 복음적인 예배"였다고 한다. 또한 그 후 봉수교회가 건립되고 가정예배처소에 가서 왜 (봉수)교회에 출석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니 "가봤는데 익숙하지 않고 옛날이 더 좋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 대북 교류에 힘써왔던 서울 후암동교회 담임과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조동진 목사는 봉수교회 집사들은 대부분 남한이나 외국에 있는 월남 실향민 목회자들의 친척이라고 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3.5.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의 의견

북한 개신교 연구자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에 따르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개신교 신자들의 자발적 의사로 조직된 교단은 아니나, 그렇다고 한국 정보기관이나 탈북자 측 주장처럼, 종교와 전혀 관련 없는 조선로동당 당원들의 동원으로 조직된 교단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봉수교회를 포함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활동이 북한 정부 및 당의 통제와 동원 아래 있음은 맞지만 그 구성원들은 한국전쟁 전(前)부터 믿던 개신교 신자거나 그 자녀들이라고 한다. 2002년 12월 11일 김병로 교수 본인이 방북 중 평양 대동강구역 옥류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하면서 강량욱 목사 동료였던 강병석 목사의 딸 강세영 장로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강세영 장로와 만난 자리에서 몇몇 주제로 진솔하게, 심지어 조만식 장로에 대해서까지 대화를 나눴다. 다만 조만식 장로가 북한과 김일성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다 알려진 사실이고 조만식 같은 독립유공자도 그럴진데 나머지 신자들의 운명은 뻔 하다.

2020년 4월 출판된 김병로 교수의 저서《그루터기》에는 탈북자로서는 아주 드물게 공인 종교단체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교인 집안 출신 증언이 나오는데, 제한적이긴 하지만 1978년 혹은 1980년부터 북한 당국 허락으로 조선민주당평양시인민위원회 간부였던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인 할머니가 가정예배처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 증언에 의하면 봉수교회 건립 전이라 할아버지의 집 일부를 작은 예배당으로 꾸려 사용했다고 하며, 성서·피아노를 비롯하여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허락받은 교인방북 외국인전도는 금지되었으며, 할아버지는 가족 중 아들이나 조카가 자신의 대를 이어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을 맡아주길 바랬지만 둘 다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거나 집안 나머지의 반대가 극심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정작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성서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 할머니가 흥얼거리곤 하던 찬송가에 관심이 있던 증언자 본인은 조부모의 거절로 공인 종교단체 교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어쨌든 이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1980년대 초반에는 합법 가정예배처소가 존재했으며, 공인 종교단체 신자는 전쟁 전 교인이거나 최소한 그 인척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병로 교수는 조선그리스도연맹이나 봉수교회의 실체는 공산당 어용조직으로 보며 "북한 당국이 완전 장악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김교수는 어용 교회 신도들이 아니라 정권의 혹독한 압박과 탄압 때문으로 지하에 있는 7만여명의 지하교회 신도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보며 2020년 인터뷰에선 "비판적인 측에선 북한 당국의 정치적 통제 목적 달성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겠지만 자신은 그것만이 100%는 아니라고 본다"며 밝혔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고, 봉수교회등의 종교시설도 어용교회임을 인정하지만 다른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취지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고 분류했던신도 대다수가 예수란 말을 북한에서 전혀 듣지 못했다. 대신 ‘하늘은 다 듣고 있으니 하늘에 빌라’는 식의 신앙이라고 설명했다.

4. 역대 담임목사

봉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김일성의 친척이며 담임 선생님으로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 목사의 아들 강영섭 목사이다. 그 후 리성봉 목사, 손효순 목사를 거쳐 현재 담임목사는 송철민 목사이다.
  • 1대 강영섭 목사 : 원래 루마니아 유학까지 다녀와 고위 법조인으로 있다가 1989년부터 2012년 사망 때까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위원장을 맡았다.
  • 2대 리성봉 목사 : 원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지역조직인 원산가정예배처소 책임자와 강원도그리스도교연맹의 위원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 3대 손효순 목사 : 리성봉 목사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를 맡았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 4대 송철민 목사 : 2014년 초부터 봉수교회 담임목사를 지내고 있다. 1968년 7월 31일, 평양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부 력사학부 졸업, 개성 고려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연구사, 평양신학원 통신과정 졸업. 본래 해방 이전부터 강량욱 목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생활을 하던 집안 출생이었으며, 강영섭 목사의 권유로 평양신학원에 재학했다.

5. 기타

봉수교회에는 여러 명사들이 방문했다. 빌리 그래이엄 목사,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이엄 목사, 문익환 목사,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재미동포 홍동근 목사 등이다.

탈북 후 침례교인이 된 태영호의 간증에 따르면, 봉수교회가 세워진 지 몇 년이 지나자 주일 11시쯤 되면 일찍부터 나와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나, 교회 주변을 맴돌다가 예배 시간이 되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사람들 중에서는 출신 성분이 좋은 간부의 부인들도 많았다. 태영호가 그 중에 한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는지 여부를 물어봤더니,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평양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40년 동안 기도했고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 문제는 북한에서 사과는 비싼건 둘째고 구하기도 힘들다. 굉장히 귀하다.[2] 당시 북한 외교관,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NISS) 수석연구위원 김동수 박사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