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5 12:45:41

인민대학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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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大學習堂
Grand People's Study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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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인민대학습당/pb_066.jpg
▲ 인민대학습당의 낮 풍경
파일:attachment/인민대학습당/pb_067.jpg
▲ 인민대학습당의 밤 풍경
<colbgcolor=#e40001,#222222><colcolor=white> 설립 1945년 11월 5일
평양시립도서관 설립
준공 1982년 4월 1일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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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립도서관 (1945~1946)
국립중앙도서관 (1946~1973)
중앙도서관 (1973~1982)
인민대학습당 (1982~ / 현 부지)
규모 건축면적 40,000㎡
연건축면적 100,000㎡
층수 12개층
주소

인민대학습당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접속불가]

1. 개요2. 역사3. 장서4. 내부5. 운영 시간6. 이용 자격7. 역대 총장8. 인근 풍경9. 고문헌의 보고?10. 김정일 집권의 도약대?11. 여담12. 인민대학습당 외 북한내 도서관 목록

1. 개요

북한 평양시 중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서관으로 북한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도서관이다.

북한에서는 인민의 학습을 생각하는 김일성의 은혜의 상징이라고 선전하며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로 넣는다. 북한의 기념일에 조선인민군이 열병식을 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기에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북한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2. 역사

인민대학습당 터는 1946년 미군이 발행한 평양 지도를 보면 평양시 남산동에 있는 광성학교 자리로 되어 있다.[2]

한편 기관으로서는 1945년 광복 직후에 평양시립도서관으로 개관[3]했고, 1948년에 북한 정권 출범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꿔 달면서 국가대표도서관으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에 건물을 해방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갔고 1973년에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했다가 1982년 현 건물로 이전하면서 인민대학습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파일:20160603_155029.jpg
인민대학습당 건설을 보도한 로동신문 기사. 1979년 12월 착공해 1980년 10월 경에는 거의 공사가 끝난 상태였다.

현 건물은 김일성의 지시로 1982년 지어졌으며, 총면적 10만 m²에 10층 규모이다. 당초 1982년보다 훨씬 일찍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학습당 부지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사저를 짓는 바람에 착공이 늦어졌다. [4]

원래 정부청사로 계획된 건물이었으나 김일성의 지시로 바꿨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이 도서관 확충과 독서문화 장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 국가지도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도서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데 크게 신경을 썼고, 6.25 전쟁 직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도서관을 체계적으로 복구, 건설하는데 신경 쓰며 상당한 재원을 투입하였다. 그 덕택에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어서 1980년대 초반까지도 북한 도서관이 남한 도서관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월했을 정도였다.

3. 장서

도서관의 정확한 장서량은 확인하기 힘들다. '3천만 권' 운운하는 루머가 있으나 이는 북한의 선전 문구를 오독한 것이다.

북한의 해외향 선전선동 웹사이트인 "우리민족강당"(김일성방송대학의 웹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인민대학습당은 그 규모와 건축술, 장비수준에 있어서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주체시대의 빛나는 기념비적창조물이다. 인민대학습당은 조선식건물로서 10개의 호동으로 구분되는데 크고작은 조선식지붕이 34개이고 방수가 600여칸이다. 3천만권의 장서능력을 가진 서고를 중심으로...(후략)"
출처아카이브
즉, 책을 3천만 권 소장했다는 말이 아니라 건물의 서고가 최대로 소장할 수 있는 책의 권수가 약 3천만 권이라는 뜻이다. 그 외 북한의 책 《조선건축사》 2권(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에서는 인민대학습당에 대해 정확한 장서능력이나 소장권수를 밝히지 않고 "수천만 권의 장서 능력을 가진..."으로 얼버무렸다.

현재 인민대학습당 홈페이지에서는 그 소개에서 "보유하고 있는 출판물과 각종 자료의 총수는 2천6백만부"라고 밝히고 있다. 이 중 외국으로부터 기증받은 자료의 수 29만 8천여 부, 해외동포 (조총련 및 친북 성향 재미한국계 미국인) 기증서적이 61만 7900부, 특허자료 (마이크로필름형태 포함) 303만 5500여 건, 그 외 전자자료 161만 2100건이 존재한다고 소개하였다.

북한의 정보 통제 정책상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는 책은 북한 서적밖에 없다.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인 만큼 남한 국립중앙도서관은 못 하더라도 소장한 책도 많고 고서들과 외국에서 수입해온 서적들도 다수 보유했지만, 열람은 전문가와 연구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다만 건립 초기에 신간열람실에서 외국 서적도 상당히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90년대 들어 사상 통제가 강화되면서 폐쇄. 외국 도서는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 도서가 들어오는 편이다.

4. 내부

파일:attachment/010911_nohst_py01.jpg
러시아어를 공부중인 평양의대 학생
파일:attachment/4049_11566_386.jpg
문답실. 은퇴한 학자들이 상주하거나 편지와 전화등으로 이용자들의 질문에 답한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88267-12071002r0315_00.jpg
음악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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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00306.png
파일:nklib.jpg
자료검색 컴퓨터(2016년 사진)

5. 운영 시간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하며, 공휴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휴관일은 매달 2, 4주 목요일이라고 한다.

강의도 진행되는데, 주말과 휴관일, 공휴일에는 진행되지 않는다.

6. 이용 자격

18세 이상의 내외국인이 이용할 수 있으며, 학습당독자로 등록해야 한다. 고급중학교 학생의 경우 인민대학습당 학생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7. 역대 총장

대수 이름 기간
1 남순홍 1982년 2월 ~ 1982년 8월
2 전주남 1982년 8월 ~ 1994년 8월
3 김재성 1994년 8월 ~ 1998년 9월
4 최희정 1998년 9월 ~ 2006년 8월
5 신오순 2006년 8월 ~ 2019년 3월
6 신광선 2019년 3월 ~ 현재

8. 인근 풍경

파일:attachment/인민대학습당/pb_068.jpg
인민대학습당 주위 전경
사진에서 건물 앞에 굉장히 널따란 광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북한 관련 뉴스마다 등장하는 대규모 열병식 장소로 유명한 김일성광장이다. 선군정치다 뭐다 해서 이 광장에서 열병식이나 기타 대규모 시끌벅적한 군중 집회를 상당히 자주 하고 있는 터라, 학습당 이용객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정은을 비롯해 군부와 정계의 높으신 분들이 이들 의식과 집회를 참관하는 주석단이 학습당 코앞에 붙어 있어서 최소한 행사 당일에는 아예 학습당이 문을 닫는다. 공식적으로는 격주 단위로 휴관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휴관일이 많은 것이다.

참고로 인민대학습당 옆에 있으면서 김일성 광장 좌우에 있는 건물은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 남한으로 치면 세종로나 시청 앞 광장에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이 모여 있는 격이다.

9. 고문헌의 보고?

이곳에 나오듯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과 함께 고문서가 많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고문헌만 5만~10만건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문서가 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도서정리사업 풍파가 일기도 했고, 주체사상 입맛에 안맞으면 은폐하고 연구조사도 미진한 북한 특성상 미지의 영역이 다수다.

한편 북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무예도보통지 판본이 이곳에 있다.

10. 김정일 집권의 도약대?

이 건물은 김정일과도 관계가 깊다. 이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김정일이 큰 역할을 했고 명실상부 김일성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부터 인민대학습당을 구상했었고 미리 터까지 잡아놨었다. 20년 가까이 여유가 없어서 착공을 못하고 있다가 1973년에 본격적으로 대학습당 건축을 추진하기로 결정나서 김일성이 공사 예정 부지를 시찰하러 나갔는데, 빈 땅이어야 할 곳에 궁궐 같은 저택이 하나 있었다. 어이를 상실한 김일성은 주변에 있는 조선인민군 보초에게 "저 집은 누구네 집인가?"라고 물었고 보초는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총비서인 김성갑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성갑은 당시 김평일을 낳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남동생이었다. 김일성에게는 처남이 되는 관계였고 이 집은 김성갑과 그의 어머니(장모)가 사는 처가였던 셈이다. 문제는 김일성이 자기 프로젝트를 시행하려고 남겨둔 부지에 집을 지은 것과, 그 과정에서 당에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최고권력자인 본인이 아끼고 아끼던 땅에 본인 허락도 없이 아무렇게나 집을 지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김일성은 즉시 김성갑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해서 호되게 혼을 냈다. 물론 이 사실은 아내 김성애도 알고 있었다. 참고로 김성애는 남편 김일성만큼이나 성격이 괄괄했다고 한다. 난데없이 본인의 남동생이 남편에게 불려가서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성애는 분노하기에 이른다. 김성갑을 혼낸 그날 저녁 김일성은 관저로 들어가서 김성애와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김일성의 얼굴을 본 김성애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낮에는 자기 처남을 그렇게 못살게 굴더니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쇼? 당신 부모 묘는 그렇게 요란하게 꾸며놓고 우리 오마니는 좋은 집 살면 안됩니까? 당신은 처남이랑 가시어머니가[5] 그런 집에서 살면 뭐 잘못 되는 것이라도 있수? 오마니가 잘 살면 배가 아파요? 왜 처남이랑 가시어머니한테 못살게 구는거이야?"라고 소리를 빽 지르며 밥상 위에 있던 밥그릇과 국그릇을 김일성에게 집어던지고 밥상을 엎었다고 한다. 조용히 저녁을 먹으려던 차에 음식을 뒤집어쓴 김일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김성애와 밤새도록 싸웠다고 한다. 급기야 김일성은 김성애를 두들겨패려다가 김평일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이 상황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도 알게 됐다. 당시 김정일은 이복동생 김평일보다 뒤처지는 것이 많았다. 집안 혈통으로 따지면 김정일이 당연히 적자였지만 장남이라는 것을 빼면 김정일은 모든 면에서 김평일보다 부족했다. 김평일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외모에 똑똑하고 용맹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김일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과 달리 김정일은 머리도 나쁘고 성격은 괴팍하며 모략에만 능한 인물이라서 김일성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욕이 남달랐던 김정일은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은 북한의 수령이 되고 싶어했고 본인의 생모 김정숙 대신 아버지를 차지한[6] 김성애를 극도로 혐오해서 온갖 권모술수를 부렸다.

김정일은 평소 김성애와 김성애의 친족은 물론 김평일의 비리 사항을 꼼꼼히 조사했고 김일성과 김성애의 사이가 틀어지자 그 내용들을 전부 보고했다. 김정일의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김성애 일가에 대해 다시 강도 높은 검열과 사상검증을 실시했고 결국 사실상 권력의 최상층에서 김성애 일가를 내쫓기에 이른다. 아울러 김일성이 총애하던 김평일도 권력 다툼에서 이탈하면서 해외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김정일은 생전에 김평일이 자신의 관저나 집무실 근처로 접근하는 것을 아예 차단했을 정도로 김평일을 혐오했다.

어쨌든 김일성의 극대노 이후 당연히 김성갑의 저택은 철거됐고 그 자리에 현재의 인민대학습당이 지어졌으며 김평일을 밀어낸 김정일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북한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11. 여담

  • 고려투어스나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 같이 외국인 대상 북한 관광사들이 항상 패키지 투어에 집어넣는 곳이다. 유튜브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기에 올라 김일성광장대동강 그리고 건너편 대동강구역 등을 보며 사진을 찍는 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다.
  • 2016년 한 외국인 관광객이 이곳에서 북한 인트라넷을 해킹한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 #

12. 인민대학습당 외 북한내 도서관 목록


[접속불가] 대한민국에서는 접속 불가.[2] 현재는 서울로 피난하여 광성중·고등학교이다.[3] 당초 위치 미상[4] 여담으로 이 일은 북한의 2대 세습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해당 부지는 평양시 중심지역에 있고 대지도 아주 넒은 곳이라 김일성이 훗날을 위해서 일부러 비워두라고 지시해뒀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김성애의 남동생이란 권세를 믿고 김성일은 아무런 허가도 안 받고 호화주택을 지었던 것이다. 평양시 간부들도 김성애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현장시찰을 돌다가 우연히 김성갑이 이 위치에 사저를 지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격노한 김일성이 김성갑을 좌천시키자 김성애가 남동생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의 눈밖에 난 김성애의 일족은 후계구도에서 제외당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정일이 그간 조사해온 김성애 가문 구성원들의 비리를 아버지에게 보고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5] 가시어머니는 장모를 뜻하는 북한말 어휘다.[6] 김정숙은 넷째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정숙이 살아있을 때부터 김일성은 자신의 비서였던 김성애와 불륜을 저질렀고 이 또한 김정일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성애가 김일성의 비서로 발탁한 사람은 다름아닌 김정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