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6:12:06

무예도보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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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재는 실전됨, 2격투술 일부 포함, 3격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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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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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무예도보통지
영어 Comprehensive Illustrated Manual of Martial arts
프랑스어 Manuel abrégé illustré des arts martiaux
국가·위치 북한 평양시
소장·관리 인민대학습당
등재 유형 기록 유산
등재 연도 2017년
제작 시기 1790년
파일:attachment/무예도보통지/muyedobotongji.jpg
1. 개요2. 편찬 배경3. 내용 구성4. 현대의 《무예도보통지》5. 패러디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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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예도보통지》를 해석하는 단체 중 하나인 무예24기보존회 소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조선 시대 군용 무술 교본이다. 끊어서 읽는다면 '무예 / 도보(그림과 해설) / 통지(종합 서적)'로 읽어야 한다.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편찬한 조선 시대 군용 무술 교본으로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린다.

2003년 국립국어원이 100대 한글 문화 유산으로 선정하였다.국립 국어원 20년사

2017년 10월 30일, 북한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기사 조선군의 교육용 교본이었던 만큼 사본들이 역사적 사료치고는 온전하게 많이 남아있어서 대한민국에도 여러 권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등록한 것이다. 문화재청의 해명에 따르면 "소장 기관들이 등재 신청을 안해서"라고 했다.

2018년 9월에 서울 특별시 무형 문화재에 등록 예고 중이라고 발표했는데, 2019년 7월에 '전통군영무예'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문화재 51호로 지정됐다.기사

2. 편찬 배경

파일:attachment/무예도보통지/horse_korea_04.jpg
《무예도보통지》의 마상육기

전통적으로 조선은 궁시 기예는 알아주는 나라였지만 오랜 평화로 군사 훈련을 소홀히 하게 되어 나중에 가면 군대가 단병접전에 능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에게 근접전에서 참패하여 그 문제점이 제대로 드러나자 선조의 명으로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기효신서와 대왜구 전법인 《절강병법》을 참고하여, 속오법(束伍法)[1]삼수기법(三手技法)[2]을 도입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기효신서》를 분석하고 명나라 병사들의 훈련을 참관하여 1598년(선조 31년) 한교[3]가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장도)의 무예육기를 담은 무예제보를 편찬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 광해군 때는 선조의 뜻을 받들어 《무예제보》에서 빠진 부분을 추가하고, 일본에서 구한 서적의 번역을 덧붙인 무예제보번역속집을 내놓았다.

영조 시대에는 청나라를 거쳐, 명대의 모원의(茅元儀)가 저술한 《무비지》(武備志)를 수입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1759년(영조 35년)에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에 12종을 더 늘려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旗槍. 깃발 달린 창), 예도, 왜검, 교전[4],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의 18가지 보병 무예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했다. 이렇게 정해진 18종의 무술을 18기(十八技)라고 부르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무예도보통지》의 구본격으로 짐작하고 있다. 유물이 남아있기만 했다면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무예도보통지》 사이의 징검다리로 무술적•학술적 가치가 클 것이라 여겨져 많은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정조 14년(1790년)에 이르러 명나라 말기의 《기효신서》와 《무비지》, 조선의 《무예제보》와 《무예신보》 등등을 기초로 하여 보병 18기와 함께 마상 6기[5]를 추가해 24기(技)를 갖추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3. 내용 구성

무예도보통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권 찌르는 무기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鐺鈀), 기창(騎槍), 낭선(狼先)
2권 베는 무기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1
3권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
4권 치는 무기 권법(拳法), 곤방(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1: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 }}}


이렇게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는 4권 4책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이유가 실려있다.

무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기 만드는 법, 한•중•일 삼국 동일 무기의 형상 비교와 무기의 규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효신서》의 경우, 무술을 아는 사람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각 자세에 대해 정확한 서술이 없고, 단순히 세법과 형의 명칭만 나열하고 있으며, 책에 나온 내용과 명나라 병사들이 실제로 익히는 세법이 서로 다른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무예제보》부터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도보통지》도 비슷한 투의 서술에서 단순한 동작 서술만 나와 있고, 용법은 나와있지 않으며, 아예 설명해주지 않는 용어도 있고, 한 단어에 두 동작을 암시하는 것도 있어서 복원 난이도가 악랄하다.

《무예도보통지》의 내용 상당수가 해외의 무술을 수입 분석하여 만든 것이다보니 그 기원이 중국 무술이나 일본 무술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 권법 - 북송 태조 조광윤의 장권 32세를 기초로 하여, 중간에 상실한 부분이나 의미없는 부분 등을 추려내어 전하고 있다. 권법은 《무예제보》가 나오던 시절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나오던 때에 수록되었고, 이것이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졌다.
  • 곤방 - 유대유의 《검경》에서 나온 척가군[6]의 군용 투로[7]이다.
  • 장창 - 양가6합8모창법, 즉 유명한 양가창법에서 따온 것이다. 다만 총 24세 중 12세는 조선 군관 한교가 만들었다.
  • 쌍수도(장도) - 왜구가 노다치를 들고 쳐들어온 것에 영향받아 만든 중국의 장도(묘도)술을 가져온 것이다. 현대 게임 등에서 나오는 '쌍수'가 보통 쌍검을 뜻하는데 반해 이것은 양 손으로 큰 칼 하나를 쥐는 것을 뜻한다.
  • 왜검 - 숙종김체건이라는 군관이 일본에 건너가서 얻어온 토유류, 운광류, 천류류, 류피류의 네 유파의 검술이다. 《무예신보》에는 네 유파가 아니라 8개의 유파다. 교전은 이것을 기초로 김체건이 창안한 것이다.
  • 제독검 - 임진왜란 시절, 조선인 출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부장인 낙상지에 의해 전래된 검술이다.

임진왜란부터 정조 대왕 시대까지 200여년간 중국 무술과 일본 무술의 수입 역사를 보여준다.

민족 고유의 순수한 무예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무예도보통지는 엄연히 실전 군용무술 교범이고 사용자인 조선 군졸 하나하나의 목숨을 담보로 한 기예를 수록해야 했기에 무술의 정체성 같은 건 따질 계제가 못 되었다. 그리고 외국 무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조선의 현실에 맞게 개량하기도 했고[8], 조선세법과 본국검처럼 고유의 무술을 도외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구, 복원해내기도 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사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니어서 명나라, 청나라, 일본 등 여러 나라의 기예를 두루 받아들였으니, 말하자면 18세기 군용 무술의 종합격투기를 추구한 셈이다. 비슷한 사례로, 20세기 이스라엘군이 실전 군용 무술인 크라브 마가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에 사범을 보내어 무술을 배워온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외국 무술을 받아들인 건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검술은 조선세법과 일본의 카게류를 뿌리로 두고 있으며 인도의 칼라리파야트를 비롯한 다양한 이민족들의 무술을 받아들였고[9], 일본 고무술의 원류인 넨류는 중국 승려에게서 배운 검법이 시초이며 이후에도 직심영류 같은 유파에 중국 창술의 오의가 들어가거나 명나라 장군 유대유의 검경(劍經)이 고류 검술 전반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등 중국 무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호자류(狐子流) 같은 유술 유파는 조선 반도의 당인(唐人)에게서 배워왔다고 선전하기도 했다.*[10] . 유럽 검술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마스터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교류하면서 서로 기술이 섞이며 발전했다. 무술의 본질상 끊임없는 실전과 검증, 교류의 피드백이 있어야 발전하는 만큼 그 어떤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민족무예라는 개념 자체가 허상인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부터 궁시는 선비의 교양으로 높게 쳐주었지만, 단병접전 무술은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민간에서 검술을 연습하면 모반을 획책한다는 눈으로 보기도 했다. 칼들고 설치던 조폭 겸 무술 연습하던 도당인 검계(劍契)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처럼 <폐도령>으로 무기를 압수하지는 않았으나[11], 무과 지원을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닌 이상, 칼든 자들이 뭉치는 경우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 땅에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무술 문파가 세워질 수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는 하도 땅덩이가 넓은 관계로 각 지역의 가전 무술 같은 것에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중앙집권이라는 개념이 그렇게까지는 강하지 않은데다 오히려 그런 명사들을 군의 교관으로 썼기에 무술이 내려져올 수 있었고,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12] 폭발적으로 문파가 크게 중흥했다.

일본의 경우도 각 지역을 '번'이라고 불러 하나의 나라 취급을 하고, 툭하면 전쟁을 벌이는 관계로 각 번마다 검술이나 창술 등의 무술이 성행할 수 있었고, 에도 막부 이후에도 지역색이 짙어 각 번마다 무술이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역사상의 역대 국가들과 한민족은 거의 1,000년을 내려오는 중앙집권의 역사를 자랑하기에 중국이나 일본과는 무(武)의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무술과 유파들은 분명 '호신'의 성격을 지닌 개인 무술들을 발전시켰지만, 한국은 그딴거 없이 무조건 군대 편제에 맞추는 창, 협도, 방패와 칼 등의 역할 분배가 아주 명백하게 갈리는 제식 무술의 성격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첩종 행사를 보면, 명나라에서 편곤이나 낭선 등의 무기와 무술들을 수입하기 이전의 진법을 볼 수 있는데 방패와 창, 협도가 전부이다. 물론 여말선초부터 사용해왔던 편제인 만큼 이 세 가지로도 훈련이 잘 되었으면 왜구와 어느 정도 백병전을 해 봤겠지만, 문제는 조선이 훈련과 준비가 너무나 덜 되어있었던 것이다. 진법이나 무기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왜구들의 노련함과 실전 경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랜 평화동안 전쟁 노하우들이 소실되어 굳이 효과를 내지 못한 옛 전술보다는 빠른 시간 큰 효과를 본 무기와 기예를 수입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고려시대에는 불안한 국가 정세로 인해서 각 지역마다 수박(手搏)[13]이 성행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당대 최고 수준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고, 치안이 안정되면서 그런 수박은 놀이, 즉 스포츠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조선 초에도 충청과 전라 양 도의 백성들이 명절에 모여 수박을 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의 무기 종류가 일본이나 중국처럼 다양하지는 않다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반대로 협도, 기창(騎창), 등배(방패와 칼), 검술 등의 족보가 기원이 흐지부지 사라진 수많은 중국의 무술들보다는 확실하며, 진법을 이용한 단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소수 정예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창은 기원이 조선 전기의 갑을창법, 협도는 조선 전기의 장검, 검술은 본국검, 등패술은 임진왜란 때 전래된 《절강병법》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국 무술은 다른 나라 무술에 비해 약해빠진 놀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맨손 무술은 스포츠로 일반에 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레슬링이나 복싱, 판크라티온 등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씨름 같은 것들은 어느 곳이던지 있었다. 무술의 강함과 스포츠인 것과 크게 관계가 없다. 오히려 스포츠화된 무술이 그 저변이 넓어져서 더 강력해질 개연성이 있다. 고대 판크라티온이나 현대 MMA 등은 스포츠지만 돈이 되고 사람이 모이니 그 어떤 무술보다도 실전적이다.[14]

혹자는 가전 무술이나 산중 1인 전승, 불문 전승으로 이어지는 무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일제 시대 탄압을 받아서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들은 하나같이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많다. 사실 일제 시대 탄압을 받은 무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태껸(택견)이라고 하지만 태껸은 하던 사람이 있고, 목격한 사람이 있는 근거가 있는 무술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자칭 전통 무술가들은 절반 정도는 수상한 사이비 무술을 하는 사람이거나, 반은 실제 택견 같은 전통 무술, 나머지는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군용 무술서를 연구 복원하고 있다. 사실 사이비 무술이든 아니든간에 한국 토종 무술을 한다면 《무예도보통지》를 거쳐가지 않기가 힘이 든다. 한국에서 이것 이상으로 확고하게 전통의 근거가 있는 무술은 없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면 일본, 중국의 무술은 호신도 되고 이것 저곳에 써먹을 수 있는 개인용 무술이 발달했다면, 한국은 닥치고 다같이 으쌰으쌰하는 단체용 소수의 제식 무술이 발달했으며, 민간 무술은 기껏 해봤자 수박이나 씨름 정도가 발달되어 왔다고 보면 된다.[15] 실제로도 중국의 무술들을 보면 무기류들이 매우 다양하지만, 군 편제에 채택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무예도보통지》만으로는 확실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제의 특성상 민족주의에 호소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한국무예원은 《환단고기[16], 경당은 대학 운동권, 검도는 화랑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거나,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4. 현대의 《무예도보통지》

아쉽지만 한국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전통이 희미한 나라이다. 조선시대부터 문치를 매우 중요시했고, 그 이전의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는 조선보다 전쟁이 잦았으며, 기록상 당나라 등 중국에 못지 않은 병장기와 무술 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은 가능하지만,[17] 오랜 평화기로 단절되다시피 하고 남아있는 것은 유물 몇점만 나와도 보물 취급될 지경이다.[18]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얼마 안되는 사료라도 뒤져서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국내 무술인들에게는 그나마 상세하게 남아있는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덕분에 한국에서 전통무술을 한다는 단체치고, 《무예도보통지》를 참고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을 연구, 복원하는 단체 및 개인들은 다음과 같다.
  • 민족도장 경당(24반무예)
    :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임동규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시국 사범으로 복역하던 중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만든 단체. 임동규는 학창시절에 유도를 했지만, 경제학도 이미지가 강한 수재[19]였기 때문에, 초창기 복원의 무술적 완성도를 의심받기도 했다. 특히 어깨에 칼을 지고 있는 자세나 (초기에)복원한 투로가 엉성하다는 비판을 받아 꾸준히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후문. 이후 대학교 동아리 중심[20]으로 퍼져나갔으며, 연구회를 통해서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듯 하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 경당의 목검 길이는 130cm 정도로 상당히 길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요도 규격을 4척 3촌으로 적고 있는데, 주척으로 재면 90cm 정도의 좀 짧은 물건이다. 이에 대해서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체격을 고려하여 현대인의 체격에 맞게 검의 길이를 늘렸다고 한다.[21][22] 어쨌든 목검만 보면 경당은 티가 확실히 난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중시하는 분야가 다른 것도 특징. 현재의 경당은 (사)24반무예경당협회를 비롯해 몇 개의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중 (사)24반무예경당협회 - 총재 : 임동규, 회장 : 김성하 - 가 가장 큰 조직으로 여전히 전국적으로 임동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 때 많이 사용했던 130cm짜리 목검은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목검으로 수련하고 있다. 더불어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한국전통마상무예학교를 중심으로 마상육기를 복원, 훈련하고 있으며 여러 시범이나 지역 축제 등에서 실연하고 있다. 1989년 창립된 경당은 2014년 창립 25주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 대한검도회
    : 세계의 IKF(International Kendo Federation) 산하 검도 단체들은 모두가 일본이 종주국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대한검도회만은 검도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기묘한 단체다.[23] 심지어 검도라는 단어도 본래 명칭인 '켄도'(Kendo)가 아니라 한국식인 '검도'(Kumdo)[24] 라는 표기법을 쓰고 있다. 검도는 명백한 일본 무술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검도를 배워 대한검사회를 거쳐 대한검도회로 이어오고 있는 검도계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검도가 일본 무술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껄끄러워한다. 그래서 검도에서 왜색을 없애고, 한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수한 삽질을 하고 있다. 하카마에서 요판을 떼거나, 시작시에 하는 준거를 없애며, 시합시 홍백기가 아니라 청백기를 써서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복원한 검술을 대한검도회 커리큘럼 안에 포함시키는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다. 조선세법(예도)과 본국검법 같은 것은 대한검도회에서도 하고 있으며, 별도의 단을 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검도하러 온 사람들은 조선세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죽도 스포츠인 켄도를 하러 온 것이므로 그냥 하지를 말던가 거합이나 추진해줬으면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한검도회에서는 조선세법이 거합도의 원류라는 해석하에 거합도도 한국이 원조라는 논리에 따라 대한검도회의 커리큘럼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주장도 반대 세력에 의해 대립하고 있음.[25]. 실제 관련 책자도 서점에서 판매중이고 쉽게 구입 가능하다. 현재 대한검도회의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은 일본 고류검술의 검리를 이용한 해석을 따르고 있으나, 일본 검술의 검리를 과감히 무시하여 해석했다. 결국 정체성도 없고 검리도 맞지 않는 이상한 형태의 검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한검도회 전통 검법의 현실이다.[26]
  • 해동검도
    : 해동검도가 고구려 사무랑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창건자인 나한일과 김정호의 법정 공방을 통해 기술의 상당수가 심검도기천문에 영향받아 만들어낸 현대 창작 무술임은 만천하에 드러나있다. 해동검도에서 가르치는 검술 상당수는 심검도와 기천에서 따온 것이고, 일부는 둘을 혼합해서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아예 일본의 군도술토야마류나카무라류의 검리와 기술을 받아온 것도 있다.[27] 그리고 본국검법과 쌍수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나름 재현해낸 것이다.[28] 해동검도 검술 중에 예도검법이라는게 있어서 이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조선세법)가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해동의 예도검법 1번 ~ 9번은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검술이다. 해동검도는 사범급 연수를 짧고 빠르게 해줘서 도장을 쉽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끌어모았는데, 해동검도 브랜드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에 다른 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들이 짧은 연수를 받고 간판만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해동검도에 흘러들어간 듯 하다. 최근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조선세법도 하고 있다#. 날조한 전통이 법정 공방으로 드러나버렸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진짜 전통 검술인 《무예도보통지》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도장이 세워진 시기나 해동검도 협회마다 커리큘럼이 제각각이기에, 모든 해동검도 단체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지는 않는 듯 하다.
  •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
    : 구) 충혼당. 《무예도보통지》의 마상육기를 최초로 복원한 단체. 1994년 김영섭에 의해 강원도 속초시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상육기보다는 기사(騎射)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 주도로 세계기사(騎射)연맹(World Horseback Archery Federation, WHAF)이라는 국제 단체도 설립되었다. WHAF는 2004년부터 세계 무술 연맹(World Martial Arts Union·WoMAU)이라는 단체와 공동으로 세계 기사 선수권 대회(World Horseback Archery Championship)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련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마상무예"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무술 단체이며, 이에 대한 지적 재산권 논쟁으로 김영섭은 무예24기 보존회의 최형국과 한국 전통 마상무예 학교 김광식[29]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여 법정 공방까지 간 적이 있었다. 결과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 없음으로 판결되었다. 이에 김영섭은 항고하여, 결국 고등법원까지 갔으나 2013년 4월 19일자로 항고 각하 처분되었다. 참고로, 마상무예라는 단어는 경향신문(1989년 6월 9일자 13면)에 최초로 등장했다. 이는 김영섭이 마상무예를 복원 발표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참고로 배우 이한갈[30]이 이 단체 출신이다.
  • 고전검술 한국연맹(HFFK)
    : HEMA(Historical Europian Martial Arts) 계통의 단체[31]지만, 인스트럭터로 있는 올드소드플레이어(OldSwordplayer)가 《무예도보통지》 중 도보 검술 부분의 복원과 교습도 함께 하고 있다. 정확한 복원을 목표로 모아김[32]이라는 네티즌의 도움을 받아 조선세법이 담겨있던 《왕오공태극연환십삼도》를 비롯한 다양한 명나라 시대 무술서 및 일본 무술서 번역을 제공받고,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무비지》 등의 자료를 끌어모아 교차검증을 통해 검술 교리상 고유단어를 해명하여 동작을 재구성[33] 했다. 1인 투로의 복원에 그치는 타 단체와 달리, 각 동작들을 분해하여 실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분석하고, 2인이 서로 검을 부딪히며 공방하는 모습 및 실전 스파링에서 타 유파 검술과 대등한 경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선보여 네티즌들에게 사실적인 복원이라며 큰 호응을 받았다. 본국검 예도총보 쌍수도 실제 스파링 활용 예시
  • (사)대한본국무예협회
    : 구) 대한본국검예협회[34] 《무예도보통지》를 바탕으로 전통 무예를 재구성하여 교육하는 단체로 고조선 무예의 부활을 내세우고 있다.[35] 협회 차원에서 학술적 연구에 지원을 하여 《무예도보통지》의 전통무예를 알리는 성과를 일부 거두었다.[36]

5. 패러디

게임의 도구들을 통해 재해석되었다. 포탈건(포탈건捕奪巾)으로, 빠루(발우拔于)로, 플라즈마 커터(불라주마 고타佛羅朱魔 鼓打)로 변형되었다.

나중에는 애니, 특촬도 패러디되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를 변형한(패이투覇二鬪), 가면라이더 빌드를 패러디한 (가면 기마사 건립 假面 騎馬士 建立)가 쓰여졌다.

네이버 웹툰 《호랭총각》에서 《조선무예도보통지》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그 내용이 건 카타, 제다이 이기어검술, 팩폭 등의 240반이다.#

검은사막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무사매화는 한국 전통의 무인을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전통군영무예의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6. 관련 문서



[1] 부대 편성을 사(司) → 초(哨) → 대(隊) → 오(伍)로 하여 상하 명령체계와 편성을 명확히 하는 것.[2] 병사를 포수, 사수, 살수의 3수병으로 분류해서 멀리서 포수로 쏘고, 접근해오면 사수로 쏘며, 단병접전에서 살수가 칼을 들고 싸우는 형식이다.[3] 이 사람의 5대조가 그 유명한 권신 한명회다.[4] 왜검을 기초로 만든 검술 대련법이다.[5] 기창(騎槍),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6]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이 지휘하던 군대[7] 중국 무술의 흔한 연무 형태로, 혼자서 여러 동작을 연결하여 연속으로 행하는 훈련법이다. 카타, 품새와 동일하다.[8] 왜검의 경우 단순히 일본의 검술이 뛰어나서 배워온 것만이 아니라 카운터 치는 목적으로도 연구, 도입한 흔적이 엿보인다.무예도보통지 왜검 교전 영상(oldswordplayer)[9] 쿵푸계에는 '천하공부출소림'이라 하며 소림사를 중국 무술의 근본으로 두는 전승이 있다. 그런데 소림사를 세운 달마 대사는 인도에서 왔고 소림권을 창시하기도 했다. 물론 신화적 전승이긴 하지만 그런 전승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 철학이 중국 무술 전반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방증한다.[10] 전근대 일본은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전부 당인(카라히토)이라고 불렀기에 조선인에게서 배운 것인지 조선에 거주하는 명나라 유민에게 배운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11] 애시당초 일본과 달리 칼을 들고 다니는 문화 자체가 없었다.[12] 무협소설을 보면 지역별로 문파나 세가가 중심이 되고, 운송업자인 표국이 등장한다. 비록 소설 등 픽션의 설정이긴 해도 과거 중국의 치안이 어땠는지 짐작할 만하다.[13] 특정 무술이라기보다 맨손 무술의 총칭에 가깝다.[14] 사실 너무 실전 지향적으로 되면 눈찌르기, 낭심차기, 물기, 할퀴기, 기습 등 사술에 치중할 가능성이 커지며, 되려 스포츠화되는 쪽이 정면승부가 되기 때문에 육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게 되어 진정한 강함에 더 근접할 수 있다.[15] 이런 무술은 주로 치안이 불안하거나 내전으로 흉흉한 곳에서 호신용으로 배우는게 일반적인데 조선은 중앙집권이 나름 발달해있고 내전이 발생한 적도 거의 없어서 무술은 군대의 훈련용으로, 혹은 민간 놀이의 형태로 발전해 온 것이 특징이다.[16] 《무예도보통지주해》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람.[17] 가령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장창당, 천보노나 고려시대의 수박, 격구 등.[18] 물론 이 정도의 고대 유물 자체가 굳이 한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귀한 대접받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국은, 특히 무기쪽은 심하게 안 나오는 편이다.주요 무기인 궁시같은 것은 쉽게 상하는 것도 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무기들이 많이 녹여졌기 때문인 것도 있다.[19] 형제들이 모두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수재 집안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임동규 본인은 DJ의 진영에 있는 동창들의 추천으로 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캠프에 몸을 담아 <경제 100문 100답>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20] 임동규가 긴 감옥살이를 한 건, 사회주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번 친지분이 임동규 부모님께 부쳐준 거액의 돈을 일부 경찰 간부들이 탐냈기 때문이다. 당시 임동규네 가족들은 이 돈을 천장 등지에 숨겨놓고 가져다 썼는데, 지출 규모가 늘어난 걸 눈여겨 본 경찰들이 마침내 이를 알아내 빨갱이 누명을 씌웠던 것.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 수색을 하는 와중에, 이 돈은 "공작금" 딱지가 붙어 사라졌다고.[21] 하지만 이것은 척도를 잘못 잰 오류일 뿐이라는 것이 연구 결과 통설이 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서 오늘날 전하는 환도들은 모두 길이가 짧은 것이고, 이것은 주척으로 재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는 상상이 아니라 유물로 말한다.[22] 예도의 근원인 《무비지》의 <조선세법>을 보면 환도가 아닌 거의 쌍수도급 길이의 장검으로 운용을 한다. 때문에 130cm 도검으로도 얼마든지 예도는 물론이고, 제독검, 본국검, 왜검의 모든 동작이 원활하게 구현 가능하다. 오히려 100cm짜리 도검으로는 쌍수도 구사때 검의 길이가 너무 짧아 자세에 빈틈이 생긴다. 또한 예도의 도보를 보면 양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있는데 주척으로 환산할 시에 검자루가 20cm이 되기에 체격이 작은 사람이 쥐어도 양손간 간격이 너무나 짧아 검을 양손으로 운용하기 힘들어진다.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의 규격이 정말 유물과 맞아떨어지는지 의문이 남는다.[23] 비슷한 사정의 유도계는 유도가 일본의 무술임을 정확히 명시한다.[24]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저 단어를 "쿰도"라고 읽는다[25] 대표적인 예가 이종림 대한검도회 부회장의 거합도식 조선 세법과 김재일 경기도 검도회 회장의 조선세법[26] 한 때 일부 전통 무술 단체들은 이러한 대한검도회의 정체성을 비난하며 "국제켄도연맹 한국지부"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27] 특히 진검 베기 관련 부분들은 토야마류와 나카무라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28] 대표적으로 쌍수검법 12번.[29] 전 무예24기 보존회 시범단장.[30]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호위 무사로 등장.[31] 롱소드 검술을 중심으로 각종 고전적인 유럽 무술을 다룬다.[32] 한의사로 추정되는 인물로, 일본 고류 및 중국 무술에 대한 방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했다.[33] 가령 거정세의 경우, 기존 단체는 그림대로 왼쪽으로 칼을 들어서 내려베고 다시 허리를 베는 동작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어 문법에 따라 번역을 다시 하고, 명나라 시대 무술서에서 거정이 머리 위를 막는 동작이라는 점, 마지막의 군란이라는 단어가 소림곤법천종에서 뒷다리를 굽히며 물러나는 동작이라는 점을 통해 기존 단체와는 다른 재현을 했다.[34] 대한본국검협회와는 별개의 단체이다.[35] 참고할 것은,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즉 조선시대 후기의 무예서이다.[36] 책을 사서 보면 알겠지만, 역사파트에 환국(환단고기)이 실제라고 주장하고 치우천왕이 무의 신이고 실존 인물이였었다, 위만조선이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다. 등등 그냥 역사 서술 부문에선 유사역사, 즉, 환빠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