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23:40:55

대봉

1. 개요2. 무기3. 군대에서의 활용
3.1. 기효신서3.2. 연병실기3.3. 조선
4. 무술
4.1. 복원 현황
5. 참고

1. 개요

무예도보통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권 찌르는 무기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鐺鈀), 기창(騎槍), 낭선(狼先)
2권 베는 무기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1
3권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
4권 치는 무기 권법(拳法), 곤방(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1: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 }}}

대봉()은 중국 명나라 척계광 군대에서 사용한 무기이다. 척계광의 기효신서, 그리고 명나라 장군들에게 무술을 배워 정리한 한교의 무예제보에서는 대봉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조 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서는 곤방()[1]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척계광이 북방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전근한 후에는 전술이 바뀌면서 대봉을 약간 개량한 협도곤(挾刀棍)이 등장하지만, 끝부분의 칼날이 짧은 창날 대신 외날이 되고 조금 더 길어진 것 말고는 봉 자체의 스펙은 동일하며, 연병실기에서는 "협도곤은 곧 대봉이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협도는 이 협도곤의 칼날이 길어지면서 등장한 것으로, 월도에 가까워진 무기.

2.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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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척계광의 선배였던 유대유(兪大酋) 장군이 무술가 이량흠(李良欽)에게서 배웠던 쌍수검술인 형초장검을 곤법으로 변환시켜서 정리한 검경(劒經)에서 사용하던 6~7척(126~147 cm)짜리 중간 길이 봉에서 비롯되었다. 척계광에 따르면 명나라 시대에는 대봉을 북방에서는 백봉(白棒), 남방에서는 곤(棍)이라고도 불렀다고 하고, 모원의에 따르면 봉과 곤은 비슷하지만 다르며, 곤은 한봉(桿棒), 백봉(白棒), 혹은 대봉(大棒)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검경의 묘사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 두껍지 않고 어느 정도 탄력도 있는 평범한 봉이었던 모양. 척계광은 기효신서 1564년 판본에서 민간무술가들의 봉술이 실전에서 창과 같은 무기에 불리하여 쓸모가 없다고 비판하였으나, 유대유 장군의 봉술이 모든 무기의 기본이 된다고 인정하면서 당파[2]와 곤법을 다룬 검경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그러다가 척계광이 왜구토벌을 완료하고 북방 오이라트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해 영전하면서, 철갑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곤을 개조하여 대봉, 협도곤으로 개발한다. 연병실기에 기재된 재원을 옯기면 길이 8척(168 cm), 지름은 2촌(4.2 cm), 앞뒤 끝부분에 철판을 감아 보강했다. 찌르기를 할 때 나무로는 안된다고 하면서 앞부분에 짧은 삼각형 단면, 한쪽에 혈조를 판 창날을 달았고 이를 오리부리(압취/鴨嘴)라고 불렀다. 압취는 창날 치고는 매우 짧은 3촌(6.3 cm)짜리 칼날을 달았는데, 너무 길면 봉으로 누를 때 힘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짧게 만들었다고 했다. 압취는 슴베가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고 못 3개로 고정하였음을 기효신서, 무예도보통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봉과 압취를 합치면 전체길이 174.3 cm가 된다.

철갑기병이 돌격하면 장창은 쉽게 부러지기 때문에 대봉을 사용했다고 하며, 연병실기에 의하면 말머리와 다리를 마구 후려치는 훈련을 한다고 되어있어 타격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척계광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마지막으로 내용을 통합 정리한 1584년본 기효신서에서는 다시 왜구와 싸우던 시절의 전술로 복귀하되 북방의 경험을 적용하여 대봉을 훈련용으로 화병(취사병)에게 지급하고, 길이는 1척 줄여 7자(주척 환산 147 cm), 무게는 3근 8냥으로 약 2.1 kg라고 명시했다. 여전히 자루의 앞뒤는 철판을 감아 보강했고, 짧은 창날인 압취(鴨嘴)는 역시 1촌 줄여 2촌(주척 환산 4.2 cm)에 무게 4냥(150 g)으로 명시하여, 길이 자체는 유대유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칼날을 포함하면 전체길이 151.2 cm, 무게 2.25 kg가 된다.

대봉을 개량해 만든 협도곤은 대봉과 동일하다고 연병실기에서 명시하였다. 따라서 연병실기 대봉과 동일한 자루 8척, 지름 2촌이다. 여기에 생선머리(선수/鮮首)라고 불리는 외날의 칼날을 부착하였고 길이는 5촌(10.5 cm)이며 전체 길이는 178.5 cm에 달한다. 자루에는 긴급할 때나 야간에도 칼날의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칼날 방향으로 각지게 가공했고, 대봉과 동일하게 앞뒤로 금속판으로 감아 보강했다. 편제를 보면 보병은 지급받지 않고 오직 기병만 협도곤을 사용했다. 기효신서 최후 판본인 1584년본에서는 협도곤이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의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나오는 협도곤의 무게와 규격은 대봉 남방 버전과 동일한 길이 7자, 무게 3근 8냥이며 칼날길이 5촌(10.5 cm), 칼날 무게는 대봉과 동일한 4냥(150 g)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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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대에서의 활용

3.1. 기효신서

척계광이 남방에서 왜구를 상대할 때에는 대봉이 아닌 평범한 목봉이었으며, 군대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척계광은 빙빙 돌면서 싸우는 화려한 화법(花法)이나 짧은 민간무기를 혐오하는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4] 기효신서 수족편 단기장용해를 보면 곤법을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에 비유하며 모든 무기술의 근원이 된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쟁터에서는 짧아서 쓸모가 없다고 하였고, 당파, 곤, 대도를 예로 들며 중간을 잡으면 끝까지 2자(42cm)에 불과하지만 좌우로 치며 이긴다는 것은 떠돌이 무술사범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적들의 장창이 길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두 1자1치(23.1cm)씩 늘리고 중간을 잡지 말고 끝부분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대유의 검경 체계가 중국의 여러 무기술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기본기를 배우는 데 좋았기 때문에 몸만들기를 의도한 권법과 더불어 훈련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효신서에 실린 모든 무기술 항목 중 봉술의 분량이 제일 길다.

척계광 군대의 보병 기본 편제인 원앙진은 장창, 당파, 낭선, 등패로 구성되었고 대봉은 없었다. 원앙진도 체계가 여러차례 바뀌었는데 1564년 판본에서는 대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기효신서 3권 수족편 수기해를 보면 본래 화병은 부엌칼을 가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만 되어 있었고, 연병실기 기점에서도 바구니를 양쪽에 매달고 다니는 용도의 봉만 지급되었다. 기효신서 1584년본에서 비로소 교대봉(봉술 실력 비교)편에서는 화병이 곤수(棍手)라고 되어 있고 취사병 및 잡일 담당인 화병(火兵) 의 호신용으로만 지급되도록 규정되었는데, 기효신서 1584년본은 실전에서 쓰인 체계가 아니라 단순히 척계광이 은퇴하고 나서 자기 생각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라 화병이 대봉으로 싸운 실전 사례는 없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원앙진 도해를 보면 뒤에 화병이 대봉을 들고 서 있는 그림이 있고, 무예제보에서 명나라 무술교사가 등패는 대봉으로 치면 뒤집힌다는 말 때문에 실전에 대봉이 투입되어서 대봉으로 등패를 이긴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소한 왜구와 싸우던 남방전선에서는 훈련용 나무봉만 있었고 대봉은 없었다.

기효신서 1584년 판본에서 6권 비교편 유차역에는 현지 민병대와 관아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내용이 나와있다. 관아에서는 원거리 무기로 궁술을 익히고 근접전투술로 당파, 창, 등패, 대봉을 선택해 익히도록 되어 있다.

3.2. 연병실기

척계광이 북방의 오이라트를 상대하기 위해 전출가면서 마침내 대봉이 개발, 실전배치된다. 단순히 군대의 훈련도구 취급이던 나무봉은 북방에서 원앙진이 아닌 전투 마차를 이용해 사각형의 벽을 짜서 기병을 막고, 압도적 화력으로 제압한다는 새로운 전법 안에서 북방의 기병을 상대하는 새로운 무기로 주목받았다. 이때의 경험을 정리한 병법서 연병실기(鍊兵實記)를 참고하면, 실전에서는 1척1촌씩 길이를 늘려야 한다는 척계광의 논지대로 자루는 1척, 압취는 1촌 늘어나 기존의 151cm에서 174.3cm로 크게 길어졌고, 굵기도 2촌(42mm)나 되며 양끝에 철판으로 보강, 앞쪽 끝에는 3촌(6.3cm)의 압취를 달아 커다란 타격병기로 변화했다.

여기에 기병과 보병 모두가 대봉을 장비했다. 연병실기는 기병과 보병 모두 비슷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기병대는 총원 12명이 1대(隊)로 구성되고 대총(지휘관)이 1명 조총수 2명, 쾌창수 2명, 당파수 2명, 창곤(협도곤)수 2명, 대봉수 2명, 화병 1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봉과 협도곤으로 대봉계열 무기를 실 전투병력 10명 중 4명이 장비하였다.

보병대는 화기대와 살수대로 나뉘었는데, 살수대는 총원 12명 대장1명 원패(원방패)2명 낭선2명 장창2명 당파 2명 대봉2명 화병 1명으로 구성되었다. 화병은 대봉 대신 양끝을 쇠로 보강한 짐을 지기 위한 봉을 지급받았다. 장창수와 대봉수는 활을 필수적으로 지급받아 적이 멀리 있으면 활을 쏘았다. 1개 보영(步營) 3109명 편제 중에서 대봉수는 256명으로 다른 백병전 병종인 등패 266명, 당파 256명과 동등하게 편제된다.

기병들이 일제히 돌격할 때 장창으로 대적하면 부러지기 때문에 대봉으로 대적해야 한다고 쓰여 있으며, 기병 훈련은 협도곤으로 내려치고 찌르는 훈련과 마상에서 돌격하여 협도곤으로 찌르는 훈련을 했고, 보병 훈련은 말머리와 말다리를 후려치는 훈련을 했다. 적들이 물러나면 기병으로 추격하는데 이때에도 대봉과 협도곤이 활약했다.

3.3. 조선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파병된 명나라 장군인 낙상지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군관 한교가 참관단장으로써 장창, 낭선, 등패, 대봉, 장도, 당파의 6가지 백병전 무술을 배워 이를 무예제보로 정리했다. 그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기효신서 체제를 받아들이면서 훈련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대봉술을 바탕으로 보병용 편곤의 사용법을 고안하여 무예도보통지 편곤으로 정리되기도 하는 등 후대의 무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4. 무술

대봉술의 기원은 중국 명나라의 장군이자 척계광의 상관이었던 유대유(兪大猷)에서부터 시작된다. 훗날 왜구 토벌의 핵심으로써 산동성과 절강성에서 활약한 그는 젋은 시절 무술에도 관심이 많아 민간무술가 이량흠(李良欽)에게 형초장검(荊楚長劍)이라는 쌍수장검술을 배웠고, 이것을 곤법으로 변환시켜 검경(劒經)으로 편찬하였다.

검경의 내용은 대부분 기효신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 때문에 군대에서 찬밥신세인 것과는 달리 무기술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가장 많다. 하지만 팔강(八剛), 십이유(十二柳), 체(剃), 천(穿) 따위 민간무술 특유의 표현들이 많이 실렸거니와 따로 설명도 없다. 또한 현대 중국에 남은 곤법과는 용어와 초식이 미묘하게 달라서 중국무술을 오래 한 사람들도 검경을 바로 이해하기 힘들다.[5] 현재 중국의 검경 연구는 대부분 중국무술인 이량근(李良根)의 검경주해(剑经注解)에 의존한다.

검경 봉술의 특징은 오른손을 앞에 두고 찌르기를 중심으로 사용하며 이것을 쳐내고 휘감아 내리며, 가까워지면 몸을 돌려 봉 뒤쪽으로 치는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봉술 형태로, 2 m가 넘는 봉의 한쪽 끝을 잡고 창술과 유사하게 쓰는 곤법은 정종유의 소림곤법천종의 후계, 뒤쪽을 좀 남게 잡고 좌우로 후려치는 타입의 봉술이 유대유 곤법의 후계라고 보면 된다. 유대유 자신이 올려치고 내려치고 양팔을 곧게 뻗으며 앞다리는 굽히고 뒷다리는 펴고 한번 치고 한번 들어올리는 것에 온몸의 힘을 다 쏟아 한발 한발 전진하면 천하무적[6]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특성을 척계광은 전쟁터에서는 쓸모없다고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봉으로 봉을 대적할 때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박위(拍位)라고 지칭되는 봉이 부딪칠 때 딱 소리가 나는 시점과, 딱 소리가 났을 때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상대방의 반격수를 제압하며 연속으로 공격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명나라 군대에서 가르치던 투로[7]는 기효신서, 연병실기에는 자세의 이름과 그림만 실렸을 뿐 구체적인 훈련 투로는 수록하지 않았고, 후대에 모원의가 집대성한 군사백과사전 무비지에도 훈련 투로가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군들에게 직접 배운 군관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에서는 대봉, 협도곤의 훈련 투로를 한문, 한글로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등패, 장창, 낭선 등의 훈련 투로도 함께 실었다.
棍勢總圖

扁身中欄{大當·大當·大當·大當}大剪大吊→ 一刺􄦤滴水→{大當·大當·大當·大當}大剪大吊→ 一刺􄦤滴水→{大當·大當·大當·大當}大剪大吊→ 一刺􄦤滴水{大當·大當·大當·大當}大剪大吊→ 一刺滴水→ 仙人z棒盤·棒盤{大剪大吊→ 一刺􄦤滴水→z仙人棒盤·仙人棒盤{大剪大吊→ 一刺滴水→ 齊眉殺倒頭→ 下穿大吊→ 一刺􄦤滴水→ 齊眉殺倒頭→ 下穿大吊→ 一刺 閃腰剪下接下穿大吊→ 一刺􄦤下接下穿大吊→ 一刺 下接下穿大吊→ 一刺􄦤下接下穿大吊→ 一刺 直符送書→ 走馬回頭→ 大剪大吊→ 一刺 扁身中攔 → 上剃{畢}]

두 사람이 곤을 잡아 마주 서서 편신중난세(扁身中欄勢)를 하고 각각 한 발을 나오면서 갑이 곤을 들어 을의 곤을 다이져 대당세(大當勢)를 하고, 을이 또 곤으로써 갑의 곤을 대이져 대당이 되고, 갑이 또 곤으로써 을의 곤을 대이져 대당이 되고, 을이 또 곤으로써 갑의 곤을 대이져 대당이 되고, 인하여 곤으로써 갑의 곤을 바로 쳐 대전세(大剪勢)를 하고, 또 둘러 곤으로써 갑의 곤을 쳐{손으로 잡은 데라}대적세(大吊勢)를 하고 한 걸음 나아가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며 곤으로써 갑의 곤을 뛰우며 적수세(滴水勢)를 하고 한 걸음 물렀다가 인하여 몸을 돌려 한걸음 나아가 대당으로써 갑의 곤을 대있고, 갑이 또 대당으로써 을의 곤을 대있고, 을이 또 대당으로써 갑의 곤을 대있고, 갑이 또 대당으로써 을의 곤을 대있고, 곧 대전으로써 을의 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으로써 을의 곤을 치고 한 걸음 나아가 가슴께 한 번 지르라.

갑이 몸을 두로쳐 뒤로 향하며 적수세(滴水勢)로써 을의 곤을 뛰우쳐 한 걸음으로 다라 인하여 몸을 돌려 한 발 나오며 대당으로써 을의 곤을 대잇고, 을이 또 대당으로 갑의 곤을 대잇고, 갑이 또 대당세로 을의 곤을 대잇고, 을이 또 대당으로 갑의 곤을 대잇고, 곧 대전으로 써갑의 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으로 갑의 곤을 치고 한 걸음 나아가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여 적수세로써 갑의 곤을 뛰우치고 한 걸음으로 달아 인하여 몸을 도로며 한 걸음 나오며, 대당으로써 갑의 곤을 대 잇고, 갑이 또 대당으로써 을의 곤을 대잇고, 을이 또 대당으로써 갑의 곤을 대 잇고, 갑이 또 대당으로써 을의 곤을 대 잇고, 곧 대전으로써 을의 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으로써 을의 곤을 치고한 걸음 나아가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갑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여 적수로써 을의 곤을 띄우치고 한 걸음으로 달아 인하여 몸을 두루쳐 한 발 나오며 곤이 타며 을의 머리 위를 향하여 쳐든, 을이 한 발 나오며 선인봉반세(仙人捧盤勢)를 하여서 받고, 또 쳐든 을이 또 선인봉반으로 받고, 곧 대전으로써 왼녘으로 향하여 갑의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세로써 갑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오며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여 적수로써 갑의 곤을 뛰우치고 한 걸음으로 다라 인하여 몸을 도루며 한 발 나오고 곤을 이르며 갑의 머리 위를 향하여 쳐든, 갑이 한 발 나오며 선인봉반세로써 받고, 을이 또 쳐든 갑이 또 선인봉반으로 받고서, 곧 대전으로써 오른쪽으로 향하여 을의 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으로써 을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오며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갑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여 적수로써 을의 곤을 띄우치고 한 걸음으로 다라 인하여 몸을 도루며 한 발 나오고 곤을 이르며 앞으로 향하여 제미살세(齊眉殺勢)를 하고 인하여 곤으로써 아래로 치거든, 을이 곧 도두세(倒頭勢)를 하여서 막고 인하여 한 발을 나오며 하천세(下穿勢)를 하여 갑의 곤을들치고 겨레 대적세로써 갑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오며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며 적수로써 갑의 곤을 뛰우치고 한 걸음으로 다라 인하여 몸을 도루며 한 발을 나오고 곤을 이르며 앞을 향하여 제미살이 되고 인하여 곤으로써 아래로 치거든, 갑이 곧 도두세(倒頭勢)되어 막고 인하여 한 발을 나오며 막고 하천(下穿)으로써 을의 곤을 들치고 겨레 대적세로써 을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들치고 겨레 대적세로써 갑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오며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몸을 두루쳐 뒤로 향하며 적수로써 갑의 곤을 뛰우치고 한 걸음으로 다라 인하여 몸을 도루며 한 발을 나오고 곤을 이르며 앞을 향하여 제미살이 되고 인하여 곤으로써 아래로 치거든, 갑이 곧 도두세(倒頭勢)되어 막고 인하여 한 발을 나오며 막고 하천(下穿)으로써 을의 곤을 들치고 겨레 대적세로써 을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나두 사람이 몸을 함께 휘두루치고 곤을 둘러 하접이 되고 갑이 하천으로써 을의 곤을 들치고, 겨레 대적으로써 갑의 곤을 치고 한 발을 내며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을이 한 발을 물러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를 하여서 갑이 곤을 잡고 몸을 두루치며 앞으로 향하여 서로 막으며 물렀거든, 을이 따르면서 쳐든{또한 따르며 또한 치라}물러 세 걸음에 이르러 갑이 곧 몸을 돌려 한 걸음을 나아가 주마회두세(走馬回頭勢)를 하고 또 한 걸음 나아가대전으로써 을의 곤을 바리치고 겨레 대적으로써 을의 곤을치고 한 걸음 나아가 가슴께를 한 번 지르라.

갑이 한 발을 물렀다가 편신중난이 되고, 두 사람이 함께 한발씩 나오며 상체세(上剃勢)를 하고 마쳐라.

이 때문에 명나라 군용 무술을 복원하는데 조선의 무예제보가 아주 중요하다. 이 명나라 군용투로는 동작이 잘 설명되어 있고, 검경의 고유용어를 몰라도 자세 그림과 동작을 연결하면 웬만큼 움직임이 나오기 때문에 국내 무예도보통지 관련 단체에서 나름 복원해서 시연하고 있다. [8] 대봉으로 등패를 힘있게 찌르면 등패가 뒤집힌다는 것도 한교가 명나라 교관에게 들은 것을 수록한 것. 무예제보의 내용은 이후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진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소림곤법천종의 정종유를 언급하며 6가지 투로를 수록했다고 하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무예도보통지 곤방에 수록된 봉술은 무예제보에 수록되었던 검경 기본투로일 뿐 소림곤법천종의 투로는 아예 없다. 국내에서는 곤방의 봉술이 정종유의 것이라는 글을 찾아볼 수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에서 잘못 쓰여진 것이 유래.

협도곤의 투로 역시 무예제보의 내용을 보충한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수록되어 있다.
夾刀棍總圖
進→ 朝天中平→ 躍步中平→ 躍步中平→ 躍步中平
退→ 反鎗 → 反鎗 → 反鎗 → 琵琶
進→ 躍步倒鎗勢架上勢中平→ 躍步倒鎗架上中平→
退→ 反鎗 → 反鎗 → 反鎗 → 琵琶寒江叉魚勢仙翁採藥→ 闖鴻門{畢}

협도곤(夾刀棍) 익히는 보(譜)

처음으로 조천세(朝天勢)를 하여 겨레 중평세(中平勢)로 한번 지르고, 한 걸음 나아가 중평으로 한 번 지르고, 또 한 걸음 나아가 약보세(躍步勢)를 하여서 중평으로 한 번 지르고, 또한 걸음 나아가 약보세를 하면서 중평으로 한 번 치고 한 번 지르라.

한 걸음 물러나 반창세(反鎗勢)를 하고, 인하여 두 걸음 물러나 비파세(琵琶勢)로써 한 번 치고 한 번 지르라.

한 걸음 나아가 약보세를 하고 겨레 도창세(倒鎗勢)를 하면서 인하여 가상세(架上勢)를 하여 중평으로써 한번 지르고, 또 한 걸음 나아가 약보·도창·가상 하여서 중평으로써 한 번 치고 한 번 지르라.

한 걸음으로 물러나 반창을 하고, 인하여 두 걸음으로 물러나 비파세로써 한 번 치며 한 번 지르고, 인하여 한강차어세(寒江叉魚勢)를 하고 두로쳐 선옹채약세(仙翁採藥勢)를 하면서 몸을 돌려 틈홍문세(闖鴻門勢)를 하고 마쳐라.

특이한 점은 협도곤의 기술은 대봉 투로가 둘이서 연습하는 공방 투로인데 비해 혼자서 하는 것이고, 용어가 검경의 것이 아닌 양가창법, 등패, 당파 등 기효신서 무술의 용어가 섞여있다는 점이다. 또 대봉에 비해 찌르기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연병실기에서는 작은 봉 하나와 긴 봉을 세우고, 작은 봉은 말머리, 긴 봉은 기병이라 상정하고 이것을 공격하는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을 보여준다. 왜구에서 유목민으로 적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협도곤은 오직 치고 찌르는 것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모두 화법[9]이라고 강조하며, 말과 적병을 빠르게 찌르고 빼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 대봉은 막대기를 말의 다리와 머리로 상정하고 이것을 강하게 후려치는 것을 통해 병사의 실력을 비교한다.

자루의 길이와 무게가 동일한 형제뻘 무기이지만 주 공격법이 다름을 보여준다.

4.1. 복원 현황

경당, 24기 보존회의 복원
국내의 복원은 무예도보통지 곤방 투로의 복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하나, 경당에서는 무예도보통지 편곤에서 교차검증한 것으로 보이는 좌우로 휘둘러 치는 대당세 구성을, 십팔기협회에서는 현대 중국곤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대당세 구성을 하는 것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난다.
서양검술 연구 그룹에 의한 복원

HEMA 유저 Oldswordplayer의 복원은 중국 원전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며 그에 따라 유대유 검경의 복원을 기준으로 무비지, 이화창, 당파를 비롯한 명나라 무술과 교차검증하며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의 투로를 재현한 영상이다. 그에 따라 무예도보통지의 삽화, 글을 기준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대당, 대전, 대조, 적수헌화 등 여러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국측 사료를 폭넓게 인용하고 특히 원전인 검경의 재현을 하고 있어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자부한다고 한다.

5. 참고

검경 원본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무비지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기효신서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기효신서 상권 (군사편찬연구소 번역)
기효신서 하권 (군사편찬연구소 번역)
무예제보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조선 후기 무기 고증 재현(국립민속박물관)
단도법선(상)
단도법선(하)
무예도보통지
보병 무기/고대~근세기
[1] 현대 한국어로는 곤봉이라고 읽으나 무예도보통지 언해본의 한글을 보면 당시에는 곤방이라고 읽었음을 알 수 있다.[2] 왜구와 싸우던 당시에는 당파가 아니라 팔차곤(朳杈棍)이라고 불렀는데 길이가 2.4 m에 달했다.[3] 무예도보통지 무기 길이 규격의 기준을 주척(21 cm)으로 할지 영조척(30 cm)으로 할지 논쟁이 있었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무기를 잴 때는 주척을 사용한 점, 쌍수도예도의 규격을 영조척으로 재면 지나치게 거대한 반면 가벼운 도검이 되어버린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청나라 당시 황조예기도식에 실린 녹영의 쌍수대도(雙手帶刀)는 주척으로 쟀을 때 쌍수도의 규격과 거의 똑같으며, 기효신서에서 유래했다고 직접적으로 명시되었다. 이로 인해 주척이 맞음을 알 수 있다. 지름 42 mm짜리 단단한 나무를 쓰고, 위아래로 철판으로 보강하면 147 cm 길이로도 무게가 2.1 kg 정도는 확실히 나온다.[4] 정확히는 민간인끼리의 소규모 분쟁에서나 먹힐 짧고 값싸고 약한 무기를 엄연한 군대에서 요령 피우고 장부 채우는 용도로 쓰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5] 이는 명나라 무술 연구할 때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이다. 분명히 명나라 기효신서에서 유래한 무기술들이 지금도 분화, 발전된 형태로 전수되는데, 고유용어들이 미묘하게 다르고 초식명이 생소해서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6] 總訣歌: 陰陽 要轉, 兩手 要直. 前脚要曲, 後脚要直. 一打一揭, 遍身着力. 步步進前, 天下無敵.[7] 중국 무술의 흔한 연무형태로, 혼자서 여러 동작을 연결하여 연속으로 행하는 훈련법이다. 카타, 품새와 동일하다.[8] 다만 검경의 해석은 시연된 적이 없다.[9] 花法, 실전성이 없는 보여주기용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