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韓嶠, (1556~1627)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겸 병법학자. 조선 후기의 군대 체제를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사앙(士昻), 호는 동담(東潭)이다.
2. 예학에서 병법으로
한교의 본관은 청주로 그의 5대조 조상이 바로 한명회이다. 그의 아버지 한수운은 직장까지 벼슬이 오른 인물이었는데, 아버지가 서얼 출신이었던 고로 한교도 정통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상황으로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공부했고 이것이 나중에 한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한교는 이이와 성혼에게서 학문을 공부했는데 이이와 성혼이 사단칠정 논쟁 과정에서 갈라지자 이귀, 정엽 등과 함께 성혼의 편에 서게 되었고 성혼의 정통 직계 제자가 된다. 이런 한교는 이이의 정통 직계 제자인 김장생과 예학 및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와 성혼이 마무리 못한 논쟁을 제자들이 이어서 한 셈.
문제는 이런 논쟁이 발전해서 양측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성혼 자신이 정철과 엮여서 선조에게 미움을 산데다, 선조가 파천하는 와중에 임진강변을 지나게 되었는데 선조는 성혼의 집이 임진강변 근처란 걸 기억하고는 "이 근방에 성혼의 집이 있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조 근처에 있던 당시 병조좌랑 이홍로가 강 건너의 마을을 가리키며 "저곳에 성혼의 집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는 "성혼은 왜 나와서 배알하지 않는가?"라고 되묻자 이홍로는 "이 마당에 어찌 와서 배알하고 싶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
그런데 실제 성혼의 집은 선조 눈앞에 보이는 강 건너 마을이 아니라 거기서 20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당연히 성혼이 선조의 파천 행차를 미처 알지 못했으니 배알을 못하는 건 당연했으나 성혼과는 반대 당파인 북인 이홍로가 이렇게 말을 해버렸던 것이다.[1] 선조는 그간 쌓였던 성혼에 대한 안좋은 감정에 이것까지 겹쳐서 '성혼이 지금 내가 도망간다고 날 무시하나'라면서 두고두고 섭섭하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한교는 매우 통탄해했다고 한다. 광해군 대에 한교는 성혼이 반대파에게 모함을 당했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뭉그적댔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은 대북파였고 대북파의 가장 반대편이 바로 성혼과 한교가 속한 서인이었기 때문. 이는 나중에 한교의 불행한 관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성혼의 제자라서 선조에게 별로 눈에 띌 일이 없던 한교였으나 임진왜란과 조선군의 붕괴가 한교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었다.
1593년, 행주 대첩의 패배 이후 일본군이 군사 활동을 일시 정지한 틈을 타서 선조는 조선군의 재무장을 서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효과적인 재무장의 방책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기존의 군대를 재편하는 식으로는 일본군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명나라군의 모습을 보고 명군의 체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조선에 파병된 명군의 전법인 절강병법을 익히고자 절강병법의 교재인 기효신서를 입수해 조선군을 재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효신서가 훌륭하긴 했으나 책에서 설명하는 구체적인 무기 운용과 전술을 실제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군대를 움직이는 일을 책만으로 달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던 차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고 전공을 세운 한교가 천문, 지리, 복서 등에 능통하다는 류성룡의 천거를 받고 선조는 그를 훈련도감의 낭청으로 임명해 기효신서의 해석과 번역작업을 담당하게 했다.
일단 한교는 기효신서에 따라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의문점이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명나라 장수에게 물어서 이해한 다음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쳐 훈련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594년 4월, 훈련도감은 조총병 포수 5초,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 4초를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던 중 한교는 부모의 상을 당했다. 원칙대로라면 고향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러야 했으나 선조는 비상 시국이니 3년상은 나중에 치르고 군대 육성과 병서 발간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명하였다. 한교는 임금의 명대로 3년상을 미루고 군대 육성과 병서 발간에 힘을 쏟았다. 이때 한교가 편찬한 병서들은 기효신서를 조선 현실에 맞게 요약하고 보강한 기효신서절요, 조선 최초의 무예 서적인 무예제보 등을 편찬했다.
3. 여진에 맞설 연병지남을 펴내다
어느 정도 병서 발간이 마무리된 후 한교는 고향으로 내려가 뒤늦은 3년상을 치른 뒤 1600년 조정에 복귀했다. 이 무렵 북방의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에 선조는 한교를 북방으로 보내 실상을 살펴보고 오게 했다.한교는 북방 여진족의 상황을 살피면서 이들과 맞설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에 정착한 절강병법으론 여진을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한교는 해결책을 찾다가 기효신서의 저자 척계광의 또 다른 병서에 주목했다. 그것은 "연병실기"라는 책으로 북로남왜의 위기를 겪고있던 명의 실정에 척계광이 대응책을 찾으면서 집필한 병서였다. 연병실기가 겨냥하는 대상이 여진족이었기 때문에 한교는 이 연병실기를 조선 상황에 맞게 바꾸어서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여진족들은 기병이 주력이었기 때문에 보병 위주인 절강병법으론 상대가 어려우므로 화포와 대기병용 무기를 바탕으로 전력을 꾸려 상대한다는 게 연병실기의 내용이었다. 한교는 이를 수용해 여진족은 화포, 조총, 활 등을 먼저 쏘아 기병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적 기병의 돌격을 전차를 이용해 전차 뒤의 보병이 막은 뒤, 전차 뒤의 기병이 돌격해 적 기병을 물리친다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이런 개념을 정리한 병서가 바로 연병지남이었다. 특히 한교는 전차 사이에 기병의 말 다리를 찔러 말을 쓰러뜨리고 말에서 떨어진 기병을 죽인다는 개념을 생각해냈는데 이는 연병실기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만약 한교의 연병지남이 받아들여졌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양상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전통적인 보병 체제에서 총과 화포 중심으로의 군대 체제 개편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전차를 도입하자는 것 또한 조선이 산악 지형이니 무리가 있다는 반론에 막히고 말았다. 한교 자신이 정치적 입지가 탄탄했거나 한교의 주장을 강력 추천할 만한 정치 세력도 없어서 한교의 연병지남에 따른 군대 개편은 광해군 때에는 시행되지 못했다.
4. 불운했던 관운과 죽음
한교는 출신상 성혼의 문하였던 탓에 서인의 편에 속했고, 광해군 당대의 집권 세력인 대북은 한교를 못마땅해했다. 이는 대북의 정신적 지주인 정인홍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한교가 성리학자이면서도 군사 전문 관료이기도 했기 때문에 대북은 자칫 한교가 서인의 군사적 브레인으로 자리 잡을까 우려해 그를 탄핵하려 했다.1613년 계축옥사가 터지자 대북은 한교가 과거 응시를 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가짜로 적었다는 핑계로 그를 탄핵했다. 한교의 아버지 한수운(韓秀雲)은 이름을 바꾼 적이 있는데, 개명을 트집 잡아 한교가 아버지의 이름을 가짜로 적었다고 몰고 간 것이다. 비변사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써야 하니 그를 사면하고 북방으로 보내자고 제안했으나 광해군은 끝내 귀양을 보내었다. 이후로 반란 등을 우려하며 국문 매니아가 되어 버린 광해군의 면모를 감안한다면 광해군도 한교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후 한교는 같은 성혼의 문하였던 이귀와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했고 다시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괄의 난이 터지면서 출전했는데 패배한 탓에 백의종군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후 고성군수로 재임했으나 광해군 대에 제기되었던 아버지 이름의 개명 건이 다시 불거지면서 결국 완전히 조정에서 물러났다. 광나루에 집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북방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방비를 탄탄히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무시당했다.
한교는 1627년 세상을 떠났는데 하필 한교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 정묘호란이 터졌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조정은 부랴부랴 연병지남에 따라 군대를 재편해 화차 등을 도입했다. 만약 한교가 살아있었고 그의 주장에 따라 후금을 상대할 병력을 육성했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양상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대목.
5. 의의
한교가 번역, 편찬한 기효신서, 연병지남 등의 병서는 이후 조선 후기 조선군의 기본적인 근간이 되었다. 특히 정조 대에 조선의 병학을 집대성하면서 한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고, 한교의 무예제보를 바탕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다. 무예제보는 조선 최초의 무예 서적이자 무예도보통지의 원형이 되는 책으로서 의미가 크다.[1] 그러나 이홍로는 소북에서 탁소북으로 광해군이 집권하자 류영경과 함께 간신으로 몰려 유배를 당한 후 배소에서 사약을 먹고 죽었고, 아들 세 명도 연좌제가 적용해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