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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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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최명길
崔鳴吉
<nopad>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33263983.jpg동양화가 황창배가 후손들의 얼굴을 참고해서 그린 상상화
출생 1586년 10월 7일
(음력 선조 19년 8월 25일)
사망 1647년 6월 19일 (향년 60세)
(음력 인조 25년 5월 17일)
봉호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본관 전주 최씨 (문열공계 경절공파)
자겸(子謙)
지천(遲川), 창랑(滄浪)
부모 부친 - 최기남(崔起南, 1559 ~ 1619)[1]
모친 - 전주 류씨(1556 ~ 1615) 류영립(柳永立)의 딸
형제자매 5남 1녀 중 차남
누나 - 최몽희(崔夢姬, 1580 ~ ?)
형 - 최내길(崔來吉, 1583 ~ 1649)
남동생 - 최혜길(崔惠吉, 1591 ~ 1662)
남동생 - 최만길(崔晚吉, 1596 ~ ?)
이복 남동생 - 최정길(崔正吉, 1619 ~ ?)
부인 정부인 인동 장씨 - 장만의 장녀
계부인 양천 허씨 - 허인(許嶙)의 딸
자녀 양자 - 최후량(崔後亮, 1616 ~ 1693)[2]
장남 - 최후상(崔後尙, 1631 ~ 1680)[3] 허씨 소생
서녀 - 능성 구씨 구횡(具鐄)의 처

1. 개요2. 생애
2.1. 초년2.2. 광해군 시기(1608~1623)2.3. 인조반정(1623)2.4.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2.5. 병자호란(1636. 12~1637. 1)2.6. 병자호란, 그 이후
3. 평가4. 가족관계5. 기타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다만 우리는 이 조선 나라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君父)[4]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5]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 만력 황제재조시켜 준 은덕은 우리나라 군신 가운데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우리나라가 생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어찌 옛날에 중흥시켜준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이야말로 조선을 위하는 신하로서는 반드시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여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장유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6]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믿는 바에 따르네.[7]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조선의 문관.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중 한 명이며,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대변되는 혼란의 시기에 주화파(主和派)[8]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호란 전후에도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 개혁에 매진했다.

그의 힘으로 조선 왕조는 멸망하지 않고 250년을 더 버텼으며 임금도 신하도 백성도 살아남았지만 주화파의 운명이란게 흔히 그렇듯 훗날 사대부들에겐 남송의 간신 진회에 비유되기도 했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린 사관들조차 그럼에도 조선을 구한 명재상이라고 오락가락했던걸 보면 시대의 비운아라고 할 수도 있다. 손자 최석정이 조부인 최명길의 뜻을 이었다.

2. 생애

2.1. 초년

최명길은 성종의 5녀인 경순옹주의 5대손[9]으로, 최기남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인은 장만이었다. 매우 똑똑했으나 몸이 약하고 인물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몸이 허약한 최명길을 장모는 평생 못미더워했다고 한다. 스승인 신흠도 최명길을 사위로 삼고자 생각했으나 몸이 약해 생각을 거두었던 바도 있다.

장유[10], 조익[11]과 함께 김장생에게 배운 바 있으며, 이후 이항복, 신흠[12] 아래에서 수학했다. 장유, 이시백, 조익과 평생 지기로 지내며 사우(四友)라고 불릴 만큼 가까이 지냈다.
포저(浦渚) 조공 익(趙公翼), 계곡(谿谷) 장공 유(張公維), 연양(延陽)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어 절차탁마하였는데, 교의(交義)가 한결같아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었다.
- 이민서, 《서하집》 16권,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공 시장>의 일부[13]

1605년(선조 38년) 20세의 나이로 증광시 생원시에 1등 1위로 장원, 같은 해 증광시 진사시에 2등 3위로 입격,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 22위로 급제했다. 조선 시대에서 45명에 불과한 한 해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모두 급제한 사람 중 한 명.[14] [15]

2.2. 광해군 시기(1608~1623)

1609년(광해군 1년) 한림(翰林)에 천거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했다. 1610년(광해군 2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예조좌랑(禮曹佐郞), 1611년(광해군 3년)에 공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1612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 폐모론이 일어날 시기에는 정6품 병조좌랑을 맡고 있었는데 1614년 명나라 차관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당하고 말았다. 당시 서학 유생이었던 이홍임(李弘任)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국인이 어디서 왔는가?' 라고 했다. 그러자 포도청 군사들이 이홍임을 체포하여 무고를 해 상을 타고자 했다. 최명길이 이 일을 조사해 이홍임의 죄가 없음을 알고 석방했는데 당시 집권당 대북의 실권자였던 이이첨이 이것을 꼬투리로 삼아 최명길을 잡아오게 했던 것이다. 이후 최명길은 하옥되었다가링크, 문외출송되었다.링크 부친 최기남도 당시 김제남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흥부사에서 삭직되어, 부자가 함께 지금의 북한강가의 가평 대성리로 가서 지냈다. 그곳의 지명이 최명길의 호가 된 지천(遲川, 더디내)이다. 최명길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냈는데 이때 《주역》을 수천 번 읽었다고 한다. 1616년 모친이, 1619년에 부친 최기남이 별세했다. 모친 삼년상을 마친 이듬해에 부친이 별세하여 6년간 상복을 입었고 몸이 많이 상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이이첨의 대북이 인목대비의 작호 삭탈 및 서궁 유폐 여론을 일으키며 정청했으나 서인들은 참여하지 않아 대북의 미움을 샀다. 탄압이 더해가던 중 1620년 구굉과 이서가 쿠데타 논의를 첫 번째로 시작했다. 그들은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결심하고, 구굉의 외사촌형인 신경진과 조카 구인후를 끌어들였다. 이들은 모두 무인으로 똑똑한 문신이 반정 계획을 빈틈없이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마침 신경진이 체찰사인 장만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그의 사위인 최명길을 눈여겨보고 끌어들였다. 그리고 신경진은 절친한 김류를 설득하여 대장으로 추대했고, 최명길은 이시백을 통해 이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16]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가 되었고, 신경진이 중군(中軍)을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꾀했는데, 박승종이 이상하게 여겨 신경진을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에 임명하여 외곽으로 내보냈다. 최명길이 이후 거사 계획을 짜고 날짜를 정했다.[17] 거사 이전 다른 반정 참가자들이 능양군을 미리 뵙자고 했으나 최명길은 개인적인 만남을 갖지 않았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뵙고자 하였는데 공만 홀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사사로이 뵙는 의리는 없다.”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논의가 제때에 결행되지 못하니, 공이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거사할 날짜를 잡고 계책을 정해 계해년(1623, 인조1)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서 맞이하였다.
- 박세당, 최명길의 묘비명 일부-

2.3. 인조반정(1623)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 광해군은 연회에서 취해 있었다. 이이반이 길에서 친구 이후원을 만나 그에게서 오늘 반정이 있다며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뿌리치고 궐로 가서 고변했다. 그러나 취한 광해군은 무뎌져 있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류희분과 박승종이 수차례 조사를 청하여 광해군은 당상관들과 포도대장을 부르고 도승지와 병조판서를 입직하게 했다. 또한 도감 대장 이홍립에게 궁성을 호위하라고 했으나 이미 사위 장신[18]을 통해 반정 세력과 내통중이었던 이홍립은 이상 징후가 없다고 보고했다. 최명길은 반정 날짜를 정할 때 광해군의 폭음을 이용하여 자정을 넘긴 시간의 급습을 목표로 했다. 반정 세력은 홍제원에 초저녁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대장인 김류가 나타나지 않아 분위기가 어수선하던 때 이성부(李聖符)가 이귀에게 지체할 수 없다고 했고, 이괄에게 주장을 맡아달라고 하며 본인이 선봉을 맡겠다고 자원했다. 이에 이괄이 주장이 되어 부대 배치까지 마쳤을 때에야 김류가 도착했는데, 이괄이 대장을 양보하려 하지 않자 이성부와 이귀가 달랬다.[19] 반정군이 도성으로 진군하면서도 지휘가 일사분란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자 이성부가 다시 호령하며[20] 진정시켰다. 이성부는 최명길이 반정군에 합류시킨 사람으로 군율을 바로 잡도록 부탁도 했던 자이다.[21]

반정은 성공했고 최명길은 이귀, 김류, 김자점과 함께 반정 1등 공신 중 1명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조좌랑부터 시작해[22] 1년 만에 이조참판까지 올라갔으며 반정 공신 중 가장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기에 인조의 치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신이 되었다.[23] 당장 인조반정 이후 정사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인조와 친견하여 대화하는 사람이 나이와 명망이 있었던 4대장(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외에는 최명길 뿐이었다.실록 링크[24]

반정 이후 공신들이 전면에 나서 정치하는 것에 대한 내부 논쟁이 있었다. 김류 측의 명분주의와 이귀 측의 책임론에 기초한 현실주의가 대립했는데 최명길은 먼저 김류의 측에 섰다.[25] 김류 측의 의견이 먼저 받아들여져 이조판서 신흠 등의 용인(用人)으로 국사가 1년간 이루어졌다. 거사 이후 최명길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신흠의 건의로 조익 및 장유와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주관하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겨울에는 1등 공신으로 녹훈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또 오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게 되었다.최고 공신으로 쾌속 승진 코스를 밟는다. 그러나 최명길과 이귀는 1년 후 냉정하게 현실을 평가하고 의견을 바꾸게 되었으며, 이들은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붕당 타파론을 적극 주장하게 된다.[26]
당초에는 국사(國事)가 오늘에 이르도록 안정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흠이 이조판서가 되자 신이 김류(金瑬)에게 말하기를 ‘이제 사람 쓰는 일은 신흠에게 맡겨야 한다’ 하니 김류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이귀에게 말하니 이귀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일을 시작한 사람이 마땅히 일을 끝내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맡아서 해야지 어찌 남의 손을 빌리겠는가?’라고 하였지만 신은 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흠이 사람을 쓰는 것을 보니 옛날 방식대로만 하여 어려운 시대를 크게 구제할 솜씨가 못 되었습니다. 그 뒤에 당색이 다른 사람들은 합심하려 하지 않고 당색이 같은 사람도 공신 대하기를 사류(士類)와는 달리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아무리 힘을 다해 주선해도 모두 기꺼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의 손에만 맡겨두었더라면 사람을 등용할 때 필시 미진한 점이 많았을 것이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귀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았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후금과 직접 대적하고 외교를 담당한 평안감사 박엽의 능력을 높이 사, 반정 이후 그를 죽이지 않고 활용하도록 수차례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27] 결국 박엽은 학정을 행했다는 명목으로 살해되었다.

2.4.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

인조반정 후 채 1년이 안 되어 핵심 공신이었던 이괄이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최명길은 이괄이 인조반정의 대의에 공감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해, 인조가 이괄을 군사적 요충지인 평안도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는데 최명길은 이괄을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결국 그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28] 인조와 조정 중신들이 공주로 파천을 떠난 와중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 직을 맡아 관군에 합류하여 사기를 고무하고 도원수 장만과 계책을 논의했다.[29] 관군이 안현 전투에서 대승하고 도망쳤던 이괄이 부하들의 손에 의해 목이 잘리면서 이괄의 난은 마무리되었고, 최명길은 한양으로 들어가 유언비어의 확산을 막고 민심 수습에 앞장섰다.

이괄의 난 이후 조정이 안정되자 최명길은 법제, 관제, 전제, 병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조선의 각종 병폐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개혁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고, 법이 수탈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니 법을 정비해야 한다던지 비변사가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행정의 전문성이 사라지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지니 이를 개선해야 한다든지. 뿐만 아니라 양전 실시, 면세지 철폐[30], 군적 시스템 재정비 등을 주장했다. 다만 <대동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었고, <호패법>을 주장하여 실시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31] 수십년 전 시대의 병폐를 진단한 율곡의 경장 노력이 거의 실현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32] [33]

1626년 봄, 인조의 생모였던 인헌왕후(=계운궁)가 사망했다. 인조는 3년상을 치르려 했고, 신하들은 계운궁이 인조의 생모이기는 하나 왕자의 부인이기 때문에 3년상을 반대했다. 당시 부제학이었던 최명길 또한 처음에는 인조에게 반대했으나 생각을 바꾸었고, 대간에서는 공의를 따르지 않아 시비를 야기한다며 탄핵했다.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최명길은 차자를 올려 본인이 사직을 청했다. 인조는 다시 형조참판을 제수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아이신기오로 아민의 후금군이 평양에 도착하여 조정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당시 조정의 중론은 척화였기 때문에 누구도 화친을 선뜻 언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였던 최명길은 먼저 화친을 주장했고[34] 이귀가 동의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의견이 옳다고는 생각했으나 결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고,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에 내려가 있었던 도체찰사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들이 최명길의 말이 옳다고 하자 장유가 글을 작성하여 후금군에 보냈다. 당시 인조는 강화도에 가있었는데 후금의 사신 유해(劉海)가 접견을 요청하자, 조정에서는 화친을 청하면서도 진군을 멈추지 않고 경기도까지 도달했다며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우려하는 견해가 컸다. 이때 다시 최명길이 그래도 만나자고 주장하여 인조가 유해를 만났다. 그리고 화친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 후금군의 퇴각 이후 대간에서는 화친을 주장했다고 하여 최명길을 귀양보내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링크 최명길은 본인이 물러났다가 형조, 병조참판에 제수되며 다시 올라왔다. 가도의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문제로 조선 백성들의 부세 부담이 크기에 군량을 거두는 양을 줄이자고 건의했다.링크

1628년에도 대간의 배척은 지속되었고, 외직에 나가기를 청하여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 7년) 김류가 젊은 신료 몇 명을 붕당으로 거론했고, 이에 인조가 분노하여 박정, 유백증, 나만갑을 귀양보내고, 이들을 실드한 이조판서 장유를 나주목사로 발령했다. 이때 최명길은 차자를 올려 붕당이 아니라며 실상을 알렸다.링크 1630년에 우참찬이 되었다. 당시 가도의 진계성이 유흥치에게 살해당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의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최명길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반대했고 출병은 취소되었다. 1631년(인조 9월) 아들 최후상이 태어났다. 여름에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을 추숭하고자 했고 조정의 의론은 반대였다. 하지만 이귀와 함께 최명길은 인조를 지지했다. 이에 인조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1632년에 추숭도감을 만들었고 최명길을 예조판서 겸 추숭도감 제조로 삼으며 정헌대부에 임명했다. 그리고 겨울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633년에는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었고, 이조판서를 역임한 3년 동안 인재를 찾아 적절한 자리에 등용하는데 신중을 기했다.[35] 1633년 1월 후금이 과한 요구를 해오자 국교를 끊어버리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발생했고, 결국 인조는 절화교서를 내렸다.링크 이 절화교서는 훗날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의 명목으로 언급하게 된다. 최명길은 홀로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링크 2월에는 최명길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일관된 주화론을 주장하며 큰 힘을 보탰던 이귀가 사망했다.

1634년 정원군 추숭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최명길은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634년 9월에 화폐 유통에 대한 건의를 시작했다.링크 12월에는 인조를 면대하여 늘어난 도둑과 도적에 대한 대응 방안을 건의했다.링크 삼사에서는 최명길이 혼자 왕을 대면했다고 하여 추고하도록 청했고링크, 최명길은 사직을 요청하여 이조판서에서 물러났다.링크 4개월 후인 1635년 4월 호조판서가 되어 상평청을 혁파하고 호조에서 재정 일원화를 담당하도록 요청하여 승인받았다.링크 7월 화폐의 부분 사용을 건의했고, 9월에 다시 화폐 통용을 건의했으나 수락받지 못했다.링크 1635년 겨울에 인열왕후가 사망했고, 국장도감 제조로 장지를 고르느라 도성 밖에 있다가 몸이 상하여 사직했다.

1636년 2월 청나라용골대마부대가 인열왕후의 상을 위로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왔는데 정묘호란으로 맹약을 맺은 형제의 대등한 관계가 아닌, 조선이 아래라고 여기는 봉서의 내용으로 인해[36] 조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차자를 올려 아래와 같이 진언했다.
당초 화친을 맺을 적에 저들은 이미 우리를 의리가 아닌 일로 감히 강요하지 못했습니다. 또 저들은 큰 사막을 차지하면서 제재받을 대상이 없어 제멋대로 황제를 칭하였으니, 누가 다시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우리나라를 구실로 삼고자 하니 그 속셈을 혹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저 구두로만 답한다면 일의 자취가 불분명하여 증거가 없게 됩니다. 만일 교만한 오랑캐가 그 말을 뒤집어 천하에 우리를 무함한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지금 의례적인 답장 외에 따로 편지 한 통을 써서, 위호(僞號)를 참칭해서는 안 되고 신하의 절개를 바꿀 수 없음을 갖춰 진술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고 국체(國體)를 보존해야 합니다. 이어 오랑캐의 편지 및 우리나라의 답서를 가지고 도독부(都督府)에 자문을 보내어 황조(皇朝)에 전해 올려야 합니다. 또 팔방(八方)에 하유하고 병마(兵馬)를 훈련시켜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또 오랑캐 사신은 춘신사(春信使)와 조제(弔祭)를 명분으로 삼는데다가 한서(汗書; 청나라 황제의 글) 또한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이른바 패서(悖書)라는 것은 바로 팔고산(八高山) 및 몽고 왕자(蒙古王子)의 편지입니다. 그들의 의례적인 편지에는 답하고 패서는 거절해야 군신(君臣)의 의리와 인국(隣國)의 도리가 둘 다 온전해질 것이니, 계책에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날 오랑캐의 정세상 시기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화(兵禍)를 입는 것은 같습니다. 다만 불분명하게 처리하여 이용당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무시해서 병란을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의 차자를 본 비변사에서 인조에게 따로 답서를 작성하는 것을 요청했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청나라 사신 일행을 타이르자고 했고, 승정원에서는 타이를 것 없이 우리가 잘하면 된다고 정신승리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용골대와 마부대는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소식을 접한 최명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인조를 만나
"오랑캐 사신이 곧장 돌아갔으니 맹약을 저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쟁의 단서를 확실히 볼 수 있으니, 청컨대 먼저 큰 계책을 정하여 미리 공격과 방어의 계책을 강구하소서."
라고 했으나 조정의 뜻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

1636년 5월 병조판서가 되었고 송준길, 송시열 등의 등용을 추천했다.링크, 그리고 다시 몸이 안좋아져 사직했다가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6월에 차자를 올려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자고 청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링크 1636년 9월 다시 차자를 올려 청나라를 경계했으나 인조는 답조차 내리지 않았다.링크 언관들은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1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37] 청나라와의 사신 문제, 국방, 흉년에 대한 차자를 올렸다.링크

그리고 다음해 1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2.5. 병자호란(1636. 12~1637. 1)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청나라로 개칭하고, 홍타이지 한이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조선 내부에서도 국왕부터 관료,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오랑캐와 한 번 붙어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도 최명길이 유일하게
"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상소를 올렸다.[38] 이로 인해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갖은 욕을 먹었으나 그의 말대로 병자년(인조 14년) 겨울 청나라는 4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입했다.[39]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나라군이 불광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자신이 저들의 요구 사항을 물어보겠다"고 사신을 자청해 청나라군을 찾아가 시간을 끌어서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그 후 남한산성이 청나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와 "계속 전쟁을 하느냐?"를 놓고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대신들과 극렬하게 대립했다.[40]

그러나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남한산성에는 전략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지리멸렬하여 맥없이 무너졌으며 그나마 정예군이었던 북방군은 군 통수권을 쥐고 있었던 도원수 김자점이 눈치만 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명길은 사대부의 욕을 정말 세차게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며 청나라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급한 상황에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딴지를 계속 걸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잘났으면 니들이 청나라군 물리쳐보든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41] 관료들이 "항서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 고 주장하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그대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그대은 신(臣)이라는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되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내 책임이지 그대들 알 바가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라고 일갈(인조 15년 1월 18일 기사)하기도 했다. 척화파들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인조의 국서에 스스로를 '臣'이라 일컫는 부분 등 항복 형식과 관련되어 열을 내는 사이 최명길은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오명과 비방을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오랑캐라 지칭하는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더라도 최대한 비극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했다. 최종적으로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오랑캐에 항복하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자살을 시도했는데 최명길은 쌓인게 많았는지 "가족들이 다 보는데서 하면 죽을 수나 있겠느냐''면서 진실성을 크게 의심하기도 했다.[42]

최명길의 주화론은 대명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호란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명의리를 위해 조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사직과 백성이 대명의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예기》를 해석한 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여 사직을 보존하도록 설득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43][44]

2.6. 병자호란, 그 이후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패배(삼전도의 굴욕, 즉 정축하성)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후 국정을 주도하며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호란 이후 태종 홍타이지가 고관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하자 솔선하여 아들 최후량이 심양에 가게 되었다. 다른 고관들의 참여도 독려했으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5]

대청 외교를 전담하여 사은사로 청나라로 가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해 데려오고,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처리했으며, 특히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 대해
"정조(절개)를 잃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정의 잘못이므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46] 역시나 입만 살아있는 사대부들한테 "자결도 못하고 돌아온 더러워진 환향녀를 옹호한다"고 대차게 까였다.[47] 여기에 대해 《인조실록》의 사관은 "삼한(三韓)을 오랑캐(夷)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 라고 극딜했는데, 덕분에 오늘날 이 구절은 사대부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무책임과 뻔뻔함, 그 와중에 빛나는 최명길의 실리주의와 인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이 시기의 그는 자신이 친청파가 아니라 진정한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었는데, 우선 청나라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최명길은 영의정으로서 극렬히 반대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중요한 건 이걸 청나라로 찾아가서 숭덕제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는 것이다.[48] 홍타이지는 처음에는 진노했으나 "최명길이 의리가 있다"면서 결국 풀어주었다.[49]

최명길은 임경업과 승려 독보(獨步)를 통해 명나라와도 비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한선(명나라 배)과 접촉해 외교 문서를 주고받고,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상황을 해명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도 중원에는 명나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중원의 상황이 어찌될지는 당시만 하더라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의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명장 홍승주가 최후의 결전인 송금 대전에서 참패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선과 내통한 것을 실토했고, 이어 명나라 상선과 거래하다가 청나라에 걸린 선천부사 이계가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연락한 것을 용골대에게 고자질해 버렸다. 이계는 "청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애걸했으나, 용골대는 그를 국가와 왕을 배반하는 자로 판단하며 "조선에서 알아서 처분하라"며 돌려보내 버렸다. 이계는 국경을 넘자마자 '나라와 정승을 팔아넘긴 놈!'이라며 분노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았고[50] 법을 집행하러 간 관료들이 백성들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죽기 직전의 이계를 간신히 인수받아 참수형에 처했는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51][52] 이것을 이른바 횡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최명길은
"나와 임경업이 벌인 일이다."
라고 말하며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관리들이 누구 소행이냐고 심문하자
"간첩은 필요한 거 아니냐.[53] 근데 우리 임금은 그런 거 싫어해서 내가 혼자 한거고 신하들도 모른다. 임경업도 내 말만 들은거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벌을 줄거면 내게만 달라."
라고 말해서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 기개에 감탄했다고 한다.[54]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갔을 때, 김상헌은 평안도 의주에 있다가 심양으로 다시 끌려왔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 항복 문서를 쓰고 김상헌이 그것을 찢었던 때로부터 6년이 지났을 때였고, 두 사람은 심양 감옥의 옆방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친청파라고 생각했던 최명길이 왜 끌려와있는지 의아해 했을 김상헌은 결국 최명길과 서로의 마음을 알고 화해하게 되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대상공'이라며 우대했고, 최명길을 수발하던 최후량과도 친하게 지내며 많은 칭찬을 했다. 훗날 귀국 이후 헤어질 때도 김상헌은 최후량에게 시를 지어주었다.[55] 이 모습을 본 태종 홍타이지가 "청나라에도 없는 저런 충신이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 하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56] 훗날 김•최 두 가문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기 이전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으나, 후손인 김창협, 김창흡최석정은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 1645년 청나라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인질들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도 당시 귀국할 수 있었고 최명길도 돌아왔다. 이후에는 국가의 원로로서 정사에 참여했으나 이 시기는 인조가 급격히 막장화될 때였다. 인조가 맏아들 소현세자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르려 하자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아니했고 며느리 강빈이 사사될 때도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역시 인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1647년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1세였다. 당시 인조는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탄식하며 특히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서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57] 척화파가 칭송받으며 최명길이 비판받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김상헌이 굴복하지 않고 남문으로 나왔는데[58] 그것도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나온거다는 등 칭찬하는 부분도 많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졸(卒)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氣敏)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協贊)하였는데 명길의 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上)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 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인조실록》 48권, 25년(1647) / 청 순치(順治) 4년) 5월 17일(기사) 2번째 기사

사후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여, 1651년 (효종 2년) 이시백이 인조의 배향 공신으로 배향해야 한다고 논의하였지만 김육의 반대로 제외되었으며, 1676년 (숙종 2년)에도 정태화와 함께 추배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남인의 반대로 탈락했다.[59] 시호도 늦게 받았는데 사후 34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받았다. 대립했던 김상헌이 사후 바로 받은 것과 대비된다. 1691년 최석정의 주도하에 신도비 건립이 추진되었고, 글을 스승인 남구만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최명길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갈렸고, 최석정의 설명에도 수정해주지 않아 남구만의 글은 신도비명으로 사용되지 않았다.[60] 최석정은 박세당에게 부탁하여 1702년 신도비가 완성된다. 박세당은 최석정의
'최명길의 행동이 의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당당하고 떳떳한 충정의 행동이었다'
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한 박세당은 최명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현혹된 사람들이고, 남의 견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 언급하며, 최명길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신념을 "사소한 의리"(溝瀆之諒)라고 했다. 박세당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언급이 가능했다.박세당이 쓴 묘비명 훗날 최석정이 작성한 가장을 바탕으로 이민서가 최명길의 행장을 작성했다.링크[61]

또한 송시열은 1671년에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최명길과 삼학사의 대립을 통해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결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면서, 최명길을 간교한 성품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박했다. 그러나 1677년 남구만과 이민서의 사실 관계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여[62]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으나, 부기를 남기며 기존의 내용도 후대에 전했다.[63]

3. 평가

최명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양면 화친(명나라와의 사대를 저버리는 일)을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운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의 선두주자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의주성과 안주성 등의 핵심 요충지가 맥없이 함락되고, 인조가 강화도로 몽진한 상황에서 후금과의 강화(화친 교섭)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소장파들은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하고 중신들은 협상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64] 최명길은 이귀 및 강홍립[65]과 함께 인조에게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여 결국 후금과의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로 인해 조선은 후금의 동생이 되었지만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일단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도하고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칭신(稱臣)도 가능하다고 한 것 때문에 전후 척화파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최명길은 호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조선을 끝까지 지탱해낸 사람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발생한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론을 펴고 실행했으며, 그 바탕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이 있었다.[66] 현실주의자로서 국가를 보존하지 않으면 백성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치자는 스스로의 수양에만 매몰되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는데 있지 않고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67] 신분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고, 그에 반대하는 삼사의 공론정치[68]를 비판하며 관제병통론을 주장하여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책임정치를 외쳤다. 그러나 최명길의 그러한 사상과 실천은 주류 지배층인 사대부의 입장과는 달랐기에 당시에도 훗날에도 매도당하며 조선 왕조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이시백[69]박세당처럼 그의 공을 알아 본 사람들도 있었다.
청국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들 알지 못했겠는가. -중략-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 = 강화도)가 함락되자 중요한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중략- 동토(東土)의 사람들(=조선 사람)이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를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박세당, 《지천집》[70] 서문[71]
"완성(完城=완성부원군 최명길)의 사업에서 큰 것이 8가지이다.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 스스로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이시백의 말, 박세당, <영의정완성부원군최공신도비명>의 일부
"문신으로서 외교에 미친 영향력이, 임진왜란 때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서 조선을 지탱했던 류성룡에 버금간다"
사관이 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최명길을 깎아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주화파의 간판급 인물인데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과 (환향녀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금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등 주류 인물들의 생각과 매우 달라서였다. 그런 사관들도 최명길이 외교로 나라와 종사(宗社)을 구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주화론을 호란 시작부터 끝까지 격렬하게 깎아내린 사관들이, 최명길의 졸기에서는 그의 자질과 행보를 칭찬해주며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다. 최명길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이 진짜로 더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서 인조가 더 극악의 방법으로 고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 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5년 5월 17일 <완성부원군 최명길 졸기>

가히 고려서희, 원종[72]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외교관 중 한 명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다.[73][74]
대내적으로 반정에서 출발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 이후 조선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형성하고, 취약한 인조의 왕권을 확립하여 그 후손인 영조에 의해 <삼종혈맥론>이 제출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 만주족의 성장으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이들과의 화해를 통해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여 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참고 - 김용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정치 활동과 유자(儒者)의 책임의식>

4. 가족관계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성혼의 제자였으며 1585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태학에 입학했다. 1600년 왕자의 사부로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을 가르친 바 있었다. 1602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균관 전적, 형조, 예조, 병조 정랑을 거치고 1612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영흥부사가 되었다가 인목대비 폐출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가평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아들의 출세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기남의 외조부는 남상질(南尙質)이었으며 조선의 첫 번째 양명학자라고 할 수 있는 남언경(南彦經)의 집안이었다.

최명길의 첫 번째 부인은 인동 장씨로 장만의 딸이었다.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장자 최후량(崔後亮, 1616 ~ 1693)을 입양했다. 장씨 사후 재취하여 양천 허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 사이에서 최후상(崔後尙, 1631 ~ 1680)을 얻었다. 그럼에도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변함없이 장자로 여기며 관계를 유지했고 가산도 상속시켰다.[75] 최후량 또한 부친에게 변치 않고 효도했으며 동생인 최후상과도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76]

장자 최후량은 아우 최혜길의 차남이었다. 3세에 친모인 이씨가 사망했고, 9세에 백부인 최명길의 양자로 들어갔다. 최명길, 최혜길에게 배운 것 외에도 장유이경석에게도 배웠다. 21세이던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양부인 최명길, 생부인 최혜길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강화도 함락 이후 가족들과 지인을 보호하고 청나라 군영으로 찾아가 최명길의 아들임을 밝히며[77] 가족의 안위를 지켰다.[78] 청군도 가족들을 안전하게 한양으로 보내주었다. 이런 일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태종 홍타이지와 최명길이 내통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 사실도 있었다. 호란 이후 최후량은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8년간 하게 되었다. 1642년 양부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왔는데 최후량이 이때 청나라의 관리를 세 차례나 찾아가 여진말로 최명길을 적극 변호하여 청나라에서는 최명길에 대한 처우를 경감했다. 또한 당시 몸이 좋지 않은 최명길을 수발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양부의 정적이었던 김상헌과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1645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자, 소현세자를 포함한 모든 포로들이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고 최후량도 최명길과 함께 귀국했다. 1651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공조좌랑 및 배천군수, 영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정사공신인 최명길의 원훈이라 하여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1681년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85년 70세에 아들들의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한성부 좌윤이 되었으나 고령으로 사직했다. 문집으로 《정수재집》(靜修齋集)을 남겼다. 호란 당시나 볼모 생활 당시의 일화를 보면 기개가 있고, 최명길도 그의 식견을 높이 사며 정무 상의를 했던 등 빼어난 능력이 있었으나 과거 시기를 놓치며 입신양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유전자는 어디 안가고 아들인 정승 형제 최석정최석항에게 이어졌다. 남구만이 묘갈명을 지었고,링크[79] 박세당이 묘지명을 지었다.링크 최석정의 아들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관료이자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창대였다.

최명길의 친자였던 최후상은 1654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664년 문과에 급제했다. 현종 시기 지평, 정언, 교리, 수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응교 등 청직을 역임했으나, 최명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래저래 말이 많아 관운이 좋지 않았다. 실록에서도 허적과 정태화 등이 현종에게 이야기한 바도 있다.링크 훗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친자가 없어 최후량의 차남인 최석정이 입양되어 뒤를 이었다. 최후상의 묘지(墓誌)가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다.

큰 형 최래길(崔來吉, 1583~1649),[80] 바로 아래 아우인 최혜길(崔惠吉, 1591~1662)[81]도 문과 급제자였으며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최래길은 3등 공신이었으며, 최혜길은 한 집안에 공신이 너무 많이 나올 수 없다고 하여 제외되었다. 두 사람 모두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했고 이후 최래길은 공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최혜길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최혜길은 최명길과 최후량 부자가 심양에 인질로 있었을 때 동지사로 심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최명길의 조카로서 최래길의 아들인 최후윤(崔後胤, 1611 ~ ?)은 1644년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으며, 최혜길의 장남은 최후정(崔後定)이었고, 차남은 최후량, 3남은 진사 최후원(崔後遠, 1627 ~ ?)이었다.

5. 기타

  • 키가 작고 인물이 볼품없었던 데다가 몸이 약했으나[82][83] 집안 사람들도 그를 무서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영민해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聖德)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治道)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고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84]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상당히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고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단 1번에 모두 통과한 천재였지만 정작 최명길의 문집인 《지천유사》를 보면 의외로 엉뚱하고 4차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을 보고 "네 의 귀는 왜 그리 기냐?"라고 물었는데 조카가 어이가 없었는지 크게 웃으면서 "이거 말이 아니라 당나귀예요."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 호조판서 시절에는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주문했는데 "500장은 너무 많으니까 '한 우리'를 줄 것"이라고 결재를 냈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한 우리'는 '기와 2,000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최명길은 '한 우리'를 '기와 100장'으로 착각하고 결재를 잘못해서 망신을 당했다.[85]
  • 명나라에서 송나라성리학을 비판하며 유행했던 왕양명양명학[86]을 공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87] 시기는 불분명하나 젊은 시절 장유와 함께 주자서 외에도 육왕서를 함께 공부했다.[88][89] 최명길의 연보에도 24세에 ‘아버지의 외가쪽 친척인 동강 남언경(東岡 南彦經)의 아들 남격(南格)에게서 계곡 장유와 함께 양명학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90] 아마도 독자적으로 익히고 남격에게도 더 배웠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50세 때인 1635년 장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왕학이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깨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손자인 최창대는 ‘지천이 어려서 육왕학을 공부했지만 중년에 이르러 양명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초년의 견해를 수정하였다'는 기록도 남긴 바 있다.[91] 최명길은 저서로 《사문록》(思問錄)을 남겼는데 주자의 유학 경전 주석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의 견해를 수록했다. 이 중 <맹자기의>(孟子記疑)는 최명길이 묻고, 조익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문록》은 훗날 주자학과 반하는 언사를 입에 올렸던 박세당이나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본 후손들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았고, 문중에서 필사본으로만 전해내려 갔다고 한다.
  • 군사 방면으로도 관심을 가졌는데 역적 이괄을 토벌한 무신 정충신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였으며[92] 정충신이 이괄을 토벌하고 관직 생활을 할 당시, 한직에 붙잡혀서 서인들의 감시를 받는 최명길과 비슷한 입장에 섰다. 정충신은 대표적인 주화파 무신이었으며 최명길과의 군사 대담을 실은 《만운집》(萬雲集)은 당시 주화파들의 입장에서 조선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두 사람은 각각 '문충공'과 '충무공'으로서 문신과 무신으로서 제각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를 받았다.
  • 최명길은 《주역》에 매우 능해서 인조반정의 거사일을 직접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주역》을 공부하는데 매우 힘썼다고 한다.[93]
  • 야사에는 최명길이 젊은 시절에 험난한 산길을 가야했는데 하룻밤 묵은 곳에서 어느 여자 원혼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최명길이 그녀를 도와 한풀이를 하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때 그녀는 고마워하며 앞으로 최명길이 높은 벼슬을 할 것이고, 청나라가 쳐들어와 어려운 고생을 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언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1980년대 <전설의 고향>에서 다룬 바 있다.
  • 많은 사안에 관해 딱딱하고 감성이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청음 김상헌이 자살 미수를 벌이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쑈라고 의심했다든지[94] 인조의 부친 추숭 행위를 두고 그깟 왕위 따위 아무나 받으면 된다고 선비들의 불만을 무시했다든지,[95] 이괄이 역모에 연루되자 이귀만큼 추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바로 현실 대책부터 논의했던 점을 보면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특유의 각박한 심리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환향녀 문제와[96] 기득권 철폐[97] 등에서 보여준 약자 보호의 마음까지 본다면 최명길은 '패도'와 '정의'의 양립을 추구했던 인물[98]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당대에 드물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다.
  • 위에서 나오듯이 옥중에서 김상헌과 화해했다고 하는데, 주고받은 필담이 유명하다. 다음은 최명길의 필담 중 일부이다.[99]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진정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나니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이나 삼베옷이나 옷 아닌 것 없네.


    마음이야 어찌 정도를 벗어날까?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6. 대중매체

난세에 활약했던 것에 비해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비중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최명길의 활약상과 시대상을 영상화하기에는 전쟁씬에 들어가는 막대한 제작비가 걸리고, 또 임진왜란과 같이 적을 물리친 전쟁이 아니기에 스토리의 암울함이 발목을 잡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나마 영화 <남한산성>에서 그의 활약이 제대로 다뤄졌다.

6.1. 만화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최명길에 대해 "그는 동시대의 인물들보다 시대의 병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것을 치유하려 애썼다"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작 내에서 인조와 인조 정권 내 실세들, 사대부 전체 집단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박시백이 가장 싫어하는 왕들 중 하나가 인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조는 뭐 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못하고 하려고만 한 것뿐이고[101] 실세들은 대북과 그 밥에 그 나물에 제대로 대응도 못했다는 식으로 사대부 집단도 은근히 책임지지 못하는 절개나 지켰다고 비판했고 환향녀 문제에서도 대차게 비판했다.[102] 그런데 유일하게 비판을 안 하고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다.
  • 고우영 일지매》에서는 후반부에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청렴하고 유능한 인물로 나온다.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화약 개발을 하라는 밀지를 받고, 마침 이를 읽은 일지매의 도움으로 비밀 화약 제조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6.2. 드라마

6.3. 영화

파일:movie_image_(2).jpg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이병헌이 연기했다.

홀로 오명과 모함이라는 짐을 짊어지면서도 임금, 백성, 나라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전쟁보다는 타협을 중시하고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하는 충신으로 나온다.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백성들의 시체와 피가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 몸의 안위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사대부들은 형식적인 명예만 중히 여기며 오랑캐인 청나라에 무릎꿇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 와중에 현실적으로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 힘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은 그들로부터 따돌림과 비난를 받고 역적 취급까지 당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라, 임금, 백성을 구한 진정한 충신이다.

중간에 인조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서 청나라에게 바치면서 화친을 요구하면 성사된다고 상소문을 올리는데 김류는 마냥 좋다고 빨리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자 인조가 하는 말이 가관인데 "상소문에 영상(김류)의 목도 베라는 문구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여담으로 이병헌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군 역을 맡았는데, 본작에서는 그 광해군을 몰아낸 최명길 역을 맡아서 엄청난 배우개그가 성립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에서 광해군(정확히는 광해군의 행세를 하는 광대 하선)이 중립외교를 추진했다는 점과 최명길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기도 하다.
[1] 성종의 5녀인 경순옹주의 고손자. 경순옹주의령 남씨 남기 → 남상질 → 최수준의 처 남정옥 → 최기남[2] 동생 최혜길(崔惠吉)의 차남으로 최명길의 양자가 되었다.[3] 친자이나 최명길은 최후상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양자인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았다.[4] 조선의 임금. 곧 인조.[5] 나루를 건너고 배를 탄다는 뜻. 일을 거꾸로 함을 의미함.[6] 심경호, <17세기 초반 지성사의 한 단면 - 지천 최명길과 월사 상촌 계곡 택당>[7] 이거 하나만으로도 김상헌과 최명길의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둘 다 나라를 위했고, 책임있는 원칙을 보여줬다는 데서 어찌 보면 극과 극은 통한다의 긍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8] 당시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죄없는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는 "청(후금)과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파벌. 이와 반대되는 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더라도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였다. 김상헌이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9] 경순옹주의령 남씨 남기 → 남상질 → 최수준의 처 남정옥 → 최기남 → 최명길[10] 공사가 분명했던 최명길은 장유가 병자호란 이후 며느리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오자 아들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반대했다.[11] 趙翼, 1579~1655, 호는 포저(浦渚). 윤근수의 외손자이자 제자이다.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훗날 좌의정까지 올랐다. 학자로서는 특정 학파에 자신을 소속시키지 않고, 독자적인 견해를 개진했다. 변통론자로 효종 시기 김육과 함께 제도 개혁을 시도하여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12] 서인 계열의 인물, 선조 시대인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1583년 외숙부가 쓴 율곡 이이를 비판하는 글을 읽고 동인 계열의 이황을 옹호한 일이 알려져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청요직을 거치면서 선조에게 중용되어 선조의 유언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 때인 1613년 계축옥사(後. 폐모살제)로 파직되었다가 1616년부터 5년간 강원도 춘천으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 후 다시 중용되어 정승까지 지냈다. 신흠의 문집인 《상촌집》의 발문을 최명길이 썼으며 '열 일곱 나이에 책을 끼고 선생의 문하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13] 행장의 전체 내용은 하단의 링크 참조[14] 다른 유명한 인물로 이석형, 양성지, 김일손, 이이가 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15] 단, 최명길은 이걸 20세에 해냈다는 점에서 다른 인물과 차이가 있다. 단 20세에 이걸 해낸 인물은 최명길이 유일.당장 구도장원공으로 유명한 이이도 소년등과에 실패했다.[16] 이귀가 먼저 반정 멤버로 참여하고 그 후 아들인 이시백, 이시방과 최명길을 끌어들였다는 기록도 있다. 선후가 어찌되었거나 핵심 멤버임에는 변함이 없다.[17] 기록에는 점을 쳐서 길일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런 큰 일을 점을 쳐서 정했을리는 만무하고, 아마 실제로는 궁궐 수비 상태나 거사 준비 상태 등 여러가지 사항들을 꼼꼼히 고려해서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는 최적의 날짜를 치밀하게 골랐을 것이다.[18] 최명길의 베프 장유의 동생이다. 최명길의 지시로 장인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19] 이괄은 결국 이성부와 좌•우 선봉을 맡았다.[20] “본래 이번 거사를 도모한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죽음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뿔뿔이 흩어져서 아이들의 장난처럼 하자는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감히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겠다.”[21] 1583~1624, 전주 이씨로 의정부 참찬 이준의 종손이었다. 1608년 무과 급제 이후 비변사 낭관이 되어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의 신임을 받았다. 함경도 북청, 경상도 통영, 평안도 만포를 돌며 일하다가 대북에게 밀려났다. 은거하던 중 교분이 있었던 유백증의 소개로 최명길과 만났으며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조의 반대로 이성부는 정사공신의 3등 공신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원종공신에 머물렀다(상이 이르기를, "이성부는 그날 비로소 알았는데 어떻게 높은 등급에 참여되었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선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상을 주는 데 인색하여 이렇겠는가. 다만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 참여된다면 참여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참여하지 못한 자가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장단에서 미리 안 사람이 가장 가상한데 이서와 함께 일한 사람이야 어찌 성부만 못하겠는가. 김연은 어떤 사람인가?"실록 링크). 이괄은 2등 공신에도 불만을 품었으나, 이성부는 공신 책봉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품지 않았다. 훗날 이괄의 난때 이성부는 경기·강원도 우방어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원수 장만의 후퇴 이후 부체찰사 이시발과 부원수 이서가 좌•우 방어사에게 각각 명령을 내려 지휘 계통의 혼란이 생겨 6일 동안 세 차례나 군사를 이동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좌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함께 서로 격려하며 최선을 다했고, 예성강 상류의 저탄(猪灘)에서 이괄의 반란군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자 강에 투신하여 40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1694년(숙종 20년) 이성부와 이중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황해도의 유림들이 충렬사를 세웠고, 1712년(숙종 38년) 국가에서 민충사(愍忠祠)라고 사액(賜額)하고 노비와 위토(位土)를 하사했다. 진정한 무인의 전형이었다.실록 위키 링크[22] 절친인 조익과 함께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 기사에도 '기묘하고 은밀한 계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 링크[23] 다른 공신들 대부분이 반정 이후 기존 척신들의 가산을 몰수하여 차지했던 것과 달리 개인적인 치부도 하지 않았다.[24] 그러나 최명길은 훗날 4대장과는 달리 인조의 배향공신이 되지 못했다. 주화론의 주장으로 인한 논란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은 효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25] 일종의 사론(士論)에 의하면 ‘우리들이 명륜을 위하여 반정을 했는데, 관직에 나가는 것을 즐긴다면 이것은 공(功)을 바라는 혐의가 있다. 그러니 조정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가는 것이 옳다’는 말이 있다. 장유와 최명길 등도 그렇게 여겼다.[26] 참고 - 김용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정치 활동과 유자(儒者)의 책임의식>[27] 박엽은 광해군과 사촌 동서 지간이었고, 반정 세력은 그를 광해군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보았다.[28] 인조는 이괄을 신뢰했다.[29] 장만은 최명길의 장인이었다.[30] 면세지의 상당수가 왕실 소유였다. 이 왕실 면세지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 재정을 압박하는 병폐로 남는다.[31] <호패법>은 제대로 시행만 되면 군역과 요역의 파악을 통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정확히 확보하고, 관리들의 농간을 막는 등 국가 시스템 정비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백성들의 불만과 행정 미비로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32] 최명길도 율곡의 예를 들었던 바 있다. "정자(程子)가 치도를 논할 적에 ‘조금 고치면 조금 유익하고 크게 고치면 크게 유익하다.’고 했으니, 이는 대개 법을 고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다스려진 법을 고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진 법을 고치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왕조 때 은총과 대우를 가장 많이 받으면서 경장(更張)하려고 하다가 조정이 허락하지 않아 그의 뜻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선왕께서 말년에 자못 이이가 한 말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조종조의 법은 갑자기 고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는 매우 불가합니다. 선조께서는 유성룡과 함께 도감군(都監軍)·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하셨으니, 이는 대개 군정이 난잡한 것을 답답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이 법은 조종조의 법이 아닌데도 선조께서는 시행하셨습니다.", 링크[33] 최명길은 사람들에게 하도 많이 공격당하며 힘든 상황에서 탄식하며 '만약 율곡(栗谷=이이)과 백사(白沙=이항복)께서 세상에 계시다면, 내 신세가 필시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던 바 있다.[34]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한데 오랑캐 세력은 매우 강성하니, 공손한 말로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느니만 못합니다.”[35] 소외되었던 서얼 및 서북 지방의 인재 기용 +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기본이 수령에게 달렸다고 보고 치적이 알려진 사람들을 기록해두었다가 갑자기 결원이 발생하면 그 사람들을 등용했다.링크[36] 팔고산(즉 팔기)과 몽골 왕자가 조선 국왕을 동급으로 여김.[37]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이 이조판서, 김상헌이 예조판서로 나온다.[38] 정묘호란 당시 함께 강화를 주도했던 이귀와 강홍립은 둘 다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상소를 받고 인조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청나라 군대는 이미 군사를 출동할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39]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던 인조는 현실을 깨닫고는 "최명길은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강력하게 최명길을 옹호했다.[40] 김상헌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 세력이 지지 세력을 늘리기 위해 끌어들인 재야의 서인인 '청서'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현실주의적인 면이 강하던 공서와 달리 이들은 명분 중심적이었으며 그랬기에 비현실적인 척화의 의견을 강하게 견지했다.[41] 일단 당시 상황이 조선군으로 막아낼순 없는 상황인지라 남한산성 내 조선군에서 척화신을 내보내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정작 조정은 이걸 또 어떻게 강경 진압이나 해산을 시킬 수 없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최명길 말대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었다.[42] 여기서는 최명길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상헌은 대들보에 목을 매면서 가족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다가 숨이 끊어지면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다. 공조참의이자 관량사였던 나만갑이 김상헌한테 왔다가 방 안에서 김상헌이 목을 매달고 밖에서 가족들이 곡만 하고 있는 꼴을 보자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살려냈다. 이를 볼 때 자살 시도는 진짜였던 것 같다.[43] 《예기》, <곡례>(曲禮) 下의 '국왕은 사직을 위해 죽는다'(國君死社稷)라는 말을 국왕이 반드시 죽어야 할 경우는 사직이 망할 때이므로, 나라가 망하지 않을 방법이 있으면 임금이 죽음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해석했다. 또한 인조가 종사와 나라를 위하여 항복하고 백성을 위해 욕됨을 참았기 때문에 항복했지만 항복한 것이 아니고, 욕되었지만 욕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 참고: 이남옥, <지천 최명길의 사상적 배경과 주화론>[44] 또한 국왕인 인조가 ‘필부(匹夫)의 절개’에 ‘집착'(膠守)했다면 ‘반드시 종사는 망하고 모든 생령은 사라졌을’이라면서, ‘생민’을 위해 치욕을 감수한 것은 ‘지극히 어진 행동이고, 크나큰 용기'(至仁大勇)였다고 인조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45] 수년 후에야 조정은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3공 6경(의정부의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의 자제들이 심양에 인질로 떠나게 되었다. 병조판서 신경진의 아들은 청나라로 가다가 사망하기도 했고, 이조판서 이명한의 장남 이일상도 인질로 억류되었던 바 있었다.[46]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명길의 가장 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장유(인선왕후의 부친)조차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의 아들이었던 장선징의 처가 돌아오자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비록 장유 생전에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장유 사후 그의 아들은 전략을 달리하여 "처가 시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다"는 등의 핑계를 대었고, 결국 이혼했다.[47] 김상헌은 죽음 직전에 이를지언정 기개를 버리지 않았고, 몇몇 신하들은 적에게 목숨을 내버리면서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비록 현실과 맞지 않는 말을 했을지언정 삼학사들 역시 정말로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향녀를 비방한 대부분의 사대부들 중 몇이나 이들처럼 행동했을지는 의문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이성구는 청나라에 1,500금을 주어 포로로 잡혀 간 아들을 데려와 놓고(이렇게 되면 자연히 조선인 포로의 속환 값이 오르게 되어, 나머지 많은 포로들의 귀국길이 막히게 된다. 이 때문에 최명길은 속환가의 한도를 정해놓고 그 이상이면 데려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청한 바 있었다. 심지어 조정에서도 이 행위가 논란이 되었는지 삼사가 이성구를 파직해야 한다고 청했는데(이성구가 1500금을 주었다는 얘기가 여기서 나왔다) 당시 이성구가 다른 일로 파직당해 있어서 기각되었다) 정작 환향녀에 대한 최명길의 입장에는 "몸을 더럽힌 것과 같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인들이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도 살아남았으니 그게 수치가 아니냐? 응? 너희 남자 놈들아!"라며 대차게 까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는 생각해보면 간단한 게, 누군가가 강자에게 뺨맞으면 오히려 더 약한 약자에게 화풀이하는 속담인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와 유사하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얻어맞은 조정의 사대부들이 괜한 여자들에게 화풀이한 것이었다.[48] 이 때 자신이 살아서 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장례 물품을 챙겨갔다고 한다.[49] 이후 최명길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제야 원군을 파병했는데, 그걸 듣고 한탄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강요로 총 4차례에 걸친 출병을 해야만 했으며 규모도 적지 않았다. (최소가 3,000명, 많게는 6,000~7,000명씩 보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싸우다가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 중에는 "조선군에 의한 저격 피해가 컸다"면서 이를 간 사람도 있었는데, 이건 청나라에서 매우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소현세자도 "조선이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게 늦다"며 화내는 태종 홍타이지의 갑질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치뤄야 했을 정도였다.[50] 그도 그럴 게,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청나라가 미울 백성들이었지만, 청나라에 자기 나라와 재상을 팔아넘긴 이계는 그야말로 죽일 만큼 더 미웠을 것이다.[51] 이계는 남인이었는지라, 남인 측에서는 "이계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원통해 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서도 김상헌과 이계의 일을 언급하면서 "김상헌으로 말미암아 이계가 극형을 받았으나, 이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남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서술했다.[52] 훗날 이계는 숙종 초에 남인이 집권하면서 복권되었지만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복권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성구가 이계가 그런 짓을 했다는걸 말한 이는 구봉서 뿐인데 한 사람의 말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변호했고, 이후 인조도 다들 이런 이성구를 비난하자 이성구를 오히려 비호한걸 보면 적어도 남인측의 주장대로 이계가 완전히 억울한건 아니더라도 실록에 기록된 것은 살짝 과장되었을 수는 있다.[53] 실제로 여말선초 시기의 태조 이성계도 명나라에 간첩을 보낸 바 있었다. 단, 들켜서 곤욕을 치렀다는게 문제였다.[54] 하지만 인조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건만, 인조는 최명길을 별로 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사건 당시 "최명길이 '난 죄 없어요'로 일관하면서 인조와 다른 신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는데, 인조는 병자호란정묘호란 때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뛰어다닌 신하를 조금도 믿어주지 않고 삭탈관직해버렸다.[55] 봄꽃 활짝 피어날 때 가을 낙엽 떨어질 때(春花爛熳秋葉落) / 슬프게 서로 그리워하며 밝은 달 바라보겠지(惆悵相思共明月) - <청문의 노래. 최후량에게 주다>(靑門歌, 贈崔生後亮)[56] 필담은 위 개요 부분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57] 졸기에 비난도 많이 적기는 했지만 결론은 뒤에 나온 저 말이다.[58] 남문은 정문이며, 출성 항복 당시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국왕(인조)은 죄인이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그래서 인조는 서문으로 나왔다.) 즉 김상헌이 남문으로 나온건 청나라에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비쳐질 수 있다.[59] 정태화는 배향 공신이 되었다.[60] 《지천집》의 내용. “남 정승은 명곡이 변론한 이 글로 인하여 마침내 고쳐 지어주겠다고 승낙했다. 하지만 명(銘)의 한 구절만은 끝내 개찬하지 않은 까닭에 우리 가문에서는 그 글을 쓰지 않았다.”[61]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최명길, 김상헌과 함께 심양에 억류되었던 중신 이경여의 아들이었으며 송시열의 제자였다. 예조, 호조, 이조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은 노론 4대신의 한 명인 이건명이었으며, 이민서의 딸과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이 혼인했다. 즉 남구만과는 사돈인 셈이었다.[62] 최명길이 윤집과 오달제에게 척화신을 청나라에 고변하게 만들려 했다는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민서는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63] 참조: 김민혁, <숙종조 정치 상황에 따른 정치적 글쓰기- 최명길에 대한 포폄을 중심으로 ->[64]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쟁 중인 상황에서 상대방과의 외교 협상은 하다못해 시간 벌기 및 정보 입수를 위해서라도 필수 중의 필수이다. 그런데 협상 자체를 반대했다는 것은 당시 척화파라 불리던 신료들이 얼마나 현실 감각이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65] 사르후 전투의 패장으로 유명하다. 조명 연합군이 후금군에 거의 괴멸당한 이후 조선군 잔여 병력과 함께 항복하여 후금에 억류되었으며, 광해군이 쫓겨나기 전까지 그와 조선 조정을 위해 꾸준히 서신 교환과 정보 전달의 역할을 수행했다.[66] 주자학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67] 이것은 사실 유학의 지향이기도 하다.[68] 국가 전체의 공론이 아닌 지배층 일부 특권층의 공론에 불과하다. 허나 어차피 시대상 특권층(귀족, 양반) 등의 의견이 주류가 되는 정치는 어디나 다 같다. 막말로 조선이 어느날 갑자기 입헌군주정 같은 체제가 된다 쳐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민심을 하나하나 반영할 수단이 없다. 교통이 불편해 투표를 해도 표를 순식간에 반영할 수도 없을 뿐더러(이 시대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20일 이상이다!) 또 조선이 중앙집권적인 행정력이 강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시대 기준이고, 현대의 대한민국이나 북한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리고 조선도 격쟁 같은 방법을 통해 일반 백성이 자기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두긴 했다. 이는 동시기의 일본보다 선진적인데 일본은 대체적으로 다이묘나 쇼군의 행차를 막는 것만으로도 처형감이었다. 몇몇 다이묘나 쇼군은 일반 백성들의 직소를 허용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례였지, 보편적이지는 않았다.[69] 효종 년간에 인조의 배향 공신을 정하는 과정에서 최명길도 넣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육이 반대를 했고 김상헌에게 물어보려 했더니 김상헌은 병이 들어 회의에 나오지 못해서 그냥 김육의 의견대로 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기사 막바지에 사관은 이시백이 식견이 밝지 못해 이런 소리를 한거라며 디스한다.[70] 최명길의 문집[71] 참고 - 황인옥, <최명길과 박세당의 중용관과 실리적 현실대응-주화론(主和論)을 중심으로>, 2022[72] 태자 신분으로써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을 상대로 한 외교가 고려의 사직을 보존했다.[73] 사실 외교로만 국한하기에는 한 일이 많다.[74] 이 때문에 한국사를 전공한 일부 서구권의 학자들은 최명길을 조선의 리슐리외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게 최명길리슐리외는 각 국가들의 이후 외교 방침의 기초와 전략관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패권국으로 성장하며 세월이 지날수록 재평가를 받은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달리 병자호란의 패전에 대한 여론의 분풀이로 최명길은 그 업적들이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설사 최명길을 좋게 보더라도 한국사 최고의 협상가로 볼 정도로 그 업적이 아직도 격하된 상태이다.[75] '당시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 박세당의 묘비명의 일부.[76] <최후량 묘지명>의 일부.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했다.'[77] '내가 들으니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와 이조판서 최명길 두 집안을 찾아내어 침범하지 말라는 칸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러한가? 내가 바로 최명길 상서(尙書)의 아들이다.'[78] 태종 홍타이지가 최명길의 가족이 있다면 보호해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때 청군은 바로 믿지 않고, 영의정을 역임했었으며 당시 좌의정 김상용과 함께 종묘 신주를 모시는 제조로 강화도에 있었던 윤방에게 최후량을 데려가 확인했다.[79] 묘갈을 청할 당시 최석정은 영의정, 최석항은 이조판서, 최창대는 광주부윤이었다.[80] 최명길 급제 다음 해인 1606년 생원시, 1611년 문과 급제[81] 1613년 진사시, 1625년 문과 급제[82]조선왕조실록》에 외모를 셀프디스하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으며 40세 전후에 이미 치아가 10개 넘게 빠져서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스승인 신흠의 글을 보면 "내 사위를 삼고 싶으나 후사를 남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라는 대목이 있다.[83] 심지어 장모인 임씨조차도 사위가 키가 작고 병약한 것을 문제삼았고 이후에도 사위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다만 장인인 장만은 "최서방의 겉모습은 비록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자손들이 사위 덕을 보게 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늘 두둔했다고 한다.[84] 즉, 자신이야말로 큰 일과 작은 일 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멀티플레어를 가진 인물이라는 말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김류의 그럼 큰 의논도 잘 내고 큰 식견도 가진건 자신이라고 생각하냐는 생각을 통해 이를 드러냈다[85] 오늘날로 말하면 기획재정부 장관도량형도 제대로 알지 못해 결재를 엉뚱하게 하고, 개쪽을 당한 격이다.[86] 양명학은 성리학과 반대되는 이론이었으며, 성리학과는 비교가 안되어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는 당대 조선에서는 송나라에서 만든 주자의 성리학을 비판하거나 이론을 부정한다면 사문난적(邪文亂敵)으로 몰려버렸다. 다만 이전에 문서에는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87] 한국에서 양명학은 퇴계 이황 이래로 성리학이 주류를 잡은 조선에서 거의 이단 취급을 받았고,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왕씨(왕양명)의 심즉리에도 논리가 있다"며 양명학을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수한 인물이 정제두였고, 이후 정제두가 거주했던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강화 학파가 생겨났지만 한국 사상사에서는 비주류였다. 다만 비주류라고는 해도 한국사에 적지 않은 흐름을 남겼는데 강화 학파의 명맥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기도 했던 위당 정인보였다.[88] 장유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우리들이 전에 베낀 육왕의 글을 열람하여 평소에 좋아하던 여러 편을 크게 낭독하여 보다가, 형과 같이 침상을 같이 하며 함께 공부하던 옛 일이 갑절이나 생각났습니다.'[89] 1611년 이전으로 추정. 1603년 장유와 함께 이항복의 문하에 함께 있었는데, 침상을 같이 하며 공부했던 때일 가능성이 높다.[90] 남언경은 서경덕의 문인이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 중 한 명이다. 부친 최기남의 외가가 남씨 집안이다.[91] 참고: 한정길, <조선조 관료 지식인의 양명학관연구(3)-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의 양명학관을 중심으로>[92] 정충신은 스승이었던 백사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여 유배를 갔을 때 함께 귀양살이를 하면서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기록을 남겼다. 이 때 정충신이 저술한 책이 《백사북천일록》이었다.[93] 한명기, 《최명길 평전》, 도서출판 보리, 2019[94] 하지만 위의 야사에 등장하는 북경의 감옥에서 나눈 시의 일화 등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화해했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감동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현대에는 김상헌이 척화파라 까이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출성 항복을 거부한 이유가 "성을 나가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걸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출성 항복을 한다는 건 '내 나라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청나라는 수백 년 동안 대립해온 여진족인데다가 당초 정묘호란 때 '명나라와 단교를 안하고 형제 관계 맺읍시다.'라고 한 후금이 대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너네 우리 신하 하라능" 하니, 김상헌의 눈으로는 "수백 년간 우리와 대립해오고 형제 하자더니, 이제는 신하를 하라 하고, 출성 항복으로 나라가 망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저들을 믿고 항복하는가?"였을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답이 없는 척화파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논거를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나라에 충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짜 척화 정신이 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김상헌은 입만 산 사람은 아니라서 일흔 넘은 나이에 청나라로 끌려갔는데도 자기 할 말은 다 했다. 이에 오목도라는 용골대랑 같이 있던 청나라 관리가 조선 사람은 다들 우물쭈물거리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감탄했다고 한다.[95] 종법상으로야 어긋난 면이 있지만 어쨌든 생부는 정원군이다보니 그런 듯하다.[96] 이건 대단한 건데 사대부들은 자기들 탓임에도 불구하고 환향녀들이 정조를 잃었다면서 무시해, 심지어 1500금으로 아들을 속환시킨 이성구라는 사람은 "옛날에도 역적의 딸과 이혼시킨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몸을 더럽혔으니 이혼시켜 주소서."라고 했다. 사실 문제는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도 없이 막연하게 추측만으로 한 이야기인 데다가 사대부 전체가 환향녀에 대해 무시를 한 집단이라 이들을 옹호하는건 용기가 상당히 필요한 일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사관들로부터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며 거하게 까였는데 사실 사대부들, 적어도 벼슬하는 사람들도 이 논리대로라면 신하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죽어야 했다.[97] 물론 궁방전 문제는 다른 이들도 제기했고, 그 이후로도 제기한 사람이 많았다.[98] 사실 현대 시각에서야 왕도와 패도의 양립을 추구하는게 실용적으로 보여서 뭐가 나쁘냐고 할 수 있지만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의 시각에서 패도는 전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뒷날 윤증송시열회니시비 중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도와 패도를 같이 행하니 경전의 가르침과 안 맞는다'고 송시열을 디스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최명길이라는 인물이 비록 본질은 유학자였어도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99] 이 부분의 앞은 개요 부분에 나와 있다. 김상헌의 답구는 김상헌(조선) 항목으로.[100] 사실 같은 산에 있는데 선을 그어 만든 행정구역이다보니 동이 달라졌다.[101] 예를 들어 환향녀 문제 등에서도 그것에 인조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실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정도로 끝맺었다.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그런 것은 있었는데 그렇다고 문제 해결을 하지 않았다는 것.[102] 다만 작가는 척화파 사대부의 대표격인 김상헌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지만 책임지는 절개' 라고 평가했다. 아얘 최명길과 세트로 엮어서 '김상헌처럼 한계가 있지만 책임질 수 있는 절개와 최명길처럼 책임질 수 있는 현실주의가 함께 계승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상헌을 두고 한계가 있다고 말한 반면 최명길은 그렇지 않았기에 최명길을 더 높이 평가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모두 계승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동등하게 좋게 평가한 것이다. 작가가 사대부들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김상헌과 엮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김상헌이 청나라로 압송되었을 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청나라에서 보통 영감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 일화를 그대로 싣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과 청나라를 두고 두 나라 운운에 용골대가 어째서 두 나라라고 하냐고 화를 내자 서로간에 국경이 있는데 그럼 두 나라가 아니면 뭐냐고 되받아치는 장면도 있다.[103] 효종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로 KBS 대하드라마의 효시격인 작품이다.